서울 의존교회121012a,b (관계성)―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121012a,b (관계성)―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IP:210.2.60.74)
서울 의존교회121012a (관계성)―이 근호 목사
살전 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라고 되어있지요. 신약성경에서 성령 받은 사람끼리 우리든지 형제들아 이렇게 할 때 성령 안 받은 사람끼리의 우리가 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기에 형제들아 주안에서 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가 되려면 사람이 한 사람이상이 되어야겠지요. 우리들이 있는데 여기에 예수님이 같이 있습니다. 그러면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 합쳐서 우리거든요. 서로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니까 당신, 나 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A하고 B가 엮여지는 것하고 B하고 예수님이 엮여지는 것하고 같을 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이 같을 수가 있습니까?
만약에 여기 예수님이 빠져있다고 봅시다. 예수님이 안 계시고 A B C를 합해 버리면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흔히 뭐라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것을 교회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교회라고 합니까? 안합니까? 이것은 교회가 아니죠. 반드시 교회가 교회되려면 이 안에 누가 계셔야 돼요? 예수님이 계셔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계셔야 되는데 사람 대 사람이 엮기는 것은 우리가 서로 인정하면 되는데 예수님은 여기에 들어왔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엮기는 가를 무엇으로 판정내리고 무엇으로 그것을 확정짓겠습니까?
‘의존교회 주님이 함께 있다.’그것은 교인들이 다 이야기할 수 있어요. 우리교회 주님 계십니다. 우리 목사님도 그러 하시고 나도 그렇게 느낍니다. 주님 계십니다. 어떻게 계시는데? 주님이 그냥 멍청하게 계실 리는 없을 것이고 A와 B가 서로 전화연락하고 잘있나? 하는 것처럼 만약에 예수님께서 여기 들어오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도 뭔가 주고받고 하는 것이 실제로 일어나야 함께 있는 것이 되는데 예수님을 허수아비처럼 세워놓고 인간들끼리 잘 있어요. 하면서 좋게 지내게 되면 이게 무슨 교회입니까? 특히 더 문제가 되는 것은 B가 목사이고 A가 성도라고 합시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해야 여러분이 성도입니다.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하니까 교인들은 예배시간 마치고 목사님 저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합니다. D라는 사람도 목사님 저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기분 좋아서 예 우리 역시 우리는 교회 맞군요. 이렇게 한다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아니에요. 왜 교회가 아니냐 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한다 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이것은 애들도 시키면 해요. 만약에 촌에서 올라온 연세 많은 할머니가 계시는데 할머니, 우리 교회 갑시다. 갈 때는 목사님이 어르신은 예수 믿으십니까? 하면 나도 예수 믿어요. 라고 한 마디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오실 때 그렇게 하셔야 점심 줍니다. 일당도 줄 지 몰라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세요. 라고 했다 말이죠. 그래서 목사님이 어르신을 처음 보는데 촌에서 예수 믿습니까? 예 예수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매가 왔습니다. 그게 교회입니까? 그것은 교육으로 가능하지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A, B, C, D가 인간들의 관계라면 예수님의 여기에 투입은 무슨 관계냐 하면 ‘무관계성’모든 관계없는 분으로 여기에 와서 그 다음이 중요해요. A와 B 사이에 무관계성에 와 버리면 이 관계는 끊어지고 이어집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A와 B, B와 A 사람관계,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고 사람관계는 항상 사람은 내가 저 사람에게 말을 하거나 고백을 할 때는 저 사람이 나에게 의미가 되는 조건하에서 계속 말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나한테 필요한 존재일 경우에 말을 걸지 나한테 필요하지 않으면 말을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실제로 제가 봤던 이야기입니다. 20대 아가씨가 있는데 30대 아저씨가 와서 자꾸 수작을 걸어요. 수작을 거니까 30대가 돈이 있어 보이니까 20대 아가씨의 반응이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버스 기다리십니까? 하고 작업을 겁니다. 우리 같으면 아저씨 왜 이러세요. 하고 피할 수 있는데 안 피하는 거예요. 안 피하면서 배가 고파 그런가? 뭔가 사줄까 싶어서 있는지 이 아가씨가 억지웃음을 짓는데 웃음소리까지 기억나요. 이상해요 저 이상한 관계다? 내가 소름이 끼치니까 하나도 안 우스운데 억지로 웃음을 짓는 것은 웃음으로서 30대가 작업을 걸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어 가요. 저게 무슨 관계일까? 저거 희한한 관계다.
그렇다면 그것을 보고 교회에다 적용시켜 봤어요. 여러분, 예수 믿으십니까? 이상한 웃음을 지으면서 예수 믿어요. 웃음이 이상해 예수 믿는 사람은 저런 웃음이 아닌데 예의상 뭔가 배려 해 주는 느낌이 들고 내가 이 교회 나오면서 그렇게 교양 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티를 내주는 건가? 나는 교회에 나왔지만 아주 점잖은 사람이라고 알아달라는 그런 뜻인가? 억지를 예의를 총동원해서 어떤 교회이니까 믿는 사람 티를 내는 것, 아- 어색합니다. 참 어색합니다. 그래서 뭘 노리겠다는 것인지 그렇게 웃어주면서 말도 안 되는 대화도 안돼요. 동문서답을 하고 있어요. 엉뚱한 소리를 해요. 노란 옷을 입었네요? 그렇지요. 호호 이게 무슨 웃을 일입니까? 진지함도 없고 진정성도 없고 공통된 태마도 없어요.
어쩌면 교회가 저렇게 해도 교회라고 할 수 있겠지 않겠는가! 좋은 관계를 서로가 악에 바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어요. 그 노력이 가상스러워요. 믿어 보려고 믿는 사람 되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참 가상해요. 신약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의 시대라면 그 성령의 시대의 모델을 찾아야 돼요. 민수기입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것은 모세도 예상 못했습니다. 70명의 장로에게 갑자기 성신이 임해서 그들이 예언을 할 때 모세도 미처 예고를 못했고 그리고 그 장로들이 자기가 입에서 예언을 할 줄은 그들 본인이 몰라요.
여기서 결론을 내리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 믿고 남을 배려한다든지 예의 상 그 사람의 좋은 관계를 억지로 유지 하려는 웃는 것도 아닌 웃음인 그런 억지가 아니라 본인이 내가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성령이 임하면 본인이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예상하는 관계를 찢어버리는 무관계성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저 사람에게 하나의 의미가 된다는 겁니다. 내가 꽃이라고 불러줄 때 그게 나에게 의미가 되었다, 이게 만약에 꽃이라면 꽃에게 의미를 주고부터는 누가 이 꽃을 꺾는다든지 누가 손을 데면 나는 내가 화를 내요. 왜? 일단 의미를 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관계라는 하는 것은 자기 정신세계를 확장이에요. 이것을 건드리면 나를 건드리는 것이고 나에게 도전하는 것이고 나에게 시비 거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서로 친하게 지내자고 서로 약속이라고 비슷하게 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너는 나에게 종속되고 당신은 나에게 종속돼요.
이 관계가 있는 한 이것은 주님과 상관이 없어요. 주님과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흉내 내요. 나는 예수 믿습니다. 나는 성령 믿습니다. 나도 성령 믿습니다. 서로 흉내 내요. 흉내 내줘야 서로의 관계가 돈독해 지니까 이 관계를 끊기가 싫은 거예요. 부부가 뭡니까? 부부가 서로를 몰라요. 모르지만 노력을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부부다. 주변에서 우리를 부부라고 이야기했어! 그러니까 우리는 무조건 부부 돼야 돼. 부부되기 위해서는 부부 아닌 것은 빼고 부부 비슷한 것만 우리는 대항하고 밀어붙여야 되는 거야! 각방 쓰지 말고 한 방에 자고 하는 것, 자기 마음대로 관계 정해 놓고…….
주님께서는 이 관계성을 끊어 버립니다. 끊어서 내가 어떤 꽃을 보고 의미라고 하는 것처럼 내가 저 사람보고 당신은 나한테 의미 있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이 와서 잘라 버립니다. 잘라버리고 A라는 사람이 주님과의 관계가 먼저 성립이 되면 그 다음에 B한테 갈 때 내가 B한테 기대할 또는 B가 나한테 기대하는 예상치도 못한 무관계성에 속에 담겨 있는 것들이 주어져요.
대학 캠퍼스 축제에 이런 것이 있어요. 돈벌이 한다고 아르바이트 한다고 그림에 목만 내놓고 화풀이 할 사람은 나한테 물 풍선을 던져라 탁 터질 때 아파할 때 던진 사람이 기분 좋아 돈 천원 내놓고 가는 그런 게임이 있어요. 물 풍선을 던지면 터지잖아요. 터지면서 그 안에 담긴 물이 쏟아지겠지요. 예수님이 가지고 있던 그 교회, 진짜 교회가 이쪽 인간들이 대충 교회라고 우기는 것을 향하여 던져 버리면 이쪽 교회는 깨지잖아요. 깨어지고 주님이 담겨진 진짜 교회가 이 안에 쏟아질 때 교회가 되는 겁니다.
민수기 11장에서 70장로들이 예언을 하는데 주목해 볼 것은 25절에 신이 임할 때에 그들이 예언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이것을 제가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 어떤 모델을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하늘과 이스라엘이 유일하게 내통하고 서로 의사소통이 되는 출구, 통로는 누구냐 하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모든 말씀은 쏟아지고 그들은 모세의 말을 지키면 하나님의 말을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뭡니까? 모세 같은 존재가 교회가 있기를 원합니다. 목사가 그것을 대신해 준다고 하고 싶지요. 그런데 70인 장로들이 모였을 때에 하나님의 신이 임했어요. 그런데 이것은 반칙이잖아요.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가 두 개가 됩니다.
모세를 통해서 내려오다가 그 다음에 70인에게 내려오면 70인에게 내려왔으면 신 받았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신을 받았으면 아까 물 풍선에 맞았으면 아이고 차가워라! 하던지 아이고 색깔 있는 물이네! 왜 빨간 물이 들었지! 뭔가 진짜 맞았으면 맞은 티를 내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맞은 티가 자기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토해 놓게 되어 있다 말입니다. 그것을 민수기 11장에서 예언이라 했죠. 모세가 받은 예언은 뭐고 이들이 받은 예언은 뭡니까? 둘이 만약에 서로 옳은 예언이라고 싸우면 교회의 꼴이 어떻게 되겠어요? 엉망진창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래 놓고 예언을 잠시해 놓고 그 다음에 다시는 예언을 어떻게 합니까? 다시는 예언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민수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신을 주신 것은 모세의 존재를 우습게보고 모세는 필요 없다고 아주 제겨 버려라 이제 신 받으면 누구나 모세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모세의 모세 됨을 보조하고 부각하기 위해서 이들에게 잠시 예언주고 그 다음에 예언 안하게 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당시에 사람들이 모세의 말을 지독스럽게 안 들었습니다. 왜 안 들었을까요? 모세의 말은 예언인데 예언이라 하는 것은 미래의 다가올 세계를 미리 앞당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과거에 누적된 경험에 준하는 현재를 해석하거든요. 과거의 내 경험상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데 모세가 하는 것은 항상 예언의 말씀이에요. 미래의 말씀이에요. 미래의 말씀이니까 그들은 과거의 있는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이해될 수가 없어요.
이해될 수 없는 정도 같으면 괜찮지요. 과거에서 미래로 내 다보는 기대치가 있다 말입니다. 그 기대치에 모세가 이야기하는 것과 안 맞으니까 여기서 반항하는 겁니다. 모세 나와! 이런 모세의 하나님이면 우리 예상 못했어! 우리 실망이야 어긋맞게 가는 거예요 어긋맞게 가는 것을 하나님의 신이 임해 버리니까 70명의 장로가 대표잖아요. 잠시 예언을 하니까 끊어진 노선이 잠시 결합이 되겠지요. 결합이 되면서 다시는 예언했다? 안했다? 다시는 예언을 안 하니까 이것은 땜질하고 떨어지고 모세 말을 듣고 그러면서 모세의 ? ?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성령은 누구 중심입니까? 성령은 예수님 중심이죠. 예수님 중심인데 성령이 왔다는 것은 우리의 몸은 절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순종 안 하는가? 우리의 몸은 기억의 창고입니다. 내가 이렇게 경험했다 내가 이렇게 알고 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렇다 기억의 창고가 있으니까 예수님에게 순종을 안 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해버리면 예수님께 복종 한다가 아니에요. 성령이 임해 버리면 육과 영을 두 개 다 동시에 다 알게 돼요. 성령이 임함으로 영을 안다. 이것은 틀린 거예요.
성령이 임해 버리면 아, 내가 이래서 육이고 그동안 내가 교인들에게 잘 해 보려고 하고 누구하고 좋은 관계 가지겠다는 것은 어디 까지나 나의 과거에 있었던 것을 억지로 땜질하듯이 무리하게 다가가면서 그게 하나님의 뜻이길 원하는 왜냐 하면 과거에서 나와서 현재에 미흡한 것을 보충해서 내가 이러한 미래의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서 그 관계를 보충해서 내가 이러한 모습에 있다는 것을 정당화되기를 하나님의 뜻인 것을 보장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것은 어떤 것도 정당함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누구를 만날 때 자꾸 그것을 내 이익으로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부부가 계시지만 아침에 눈떠서 아내가 보이고 또 남편이 보일 때 여러분 결혼한 사람은 압니다만 여자가 눈 떠서 남편이 보이면 제일 먼저 뭐하고 싶은지 아세요? 시키고 싶어요. 일시키고 싶어요. 음식쓰레기 버리고 오라고 눈에 안 띄고 컴퓨터하고 있어야 되는데 문만 열고 밖에 나왔다 싶으면 고추 다듬고 마늘 빻고 눈에 띄면 무조건 시키는 거예요. 왜? 가정에는 아내의 일이니까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보조 역할을 하라 이 말이거든요. 눈에 띄면 아, 뭐 시킬 것 있었는데 뭐더라 하면서 없어도 끄집어내요. 그러면 남자가 아침에 눈을 쓰고 여자를 봤다 슬슬 도망갑니다. 왜냐? 과거의 경험상 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면 시킨 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슬금슬금 눈에 안 띄는 쪽으로 피합니다.
사람의 관계라 하는 것은 서로 자기가 하는 일에 옳기 때문에 내 하는 일에 당신은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는 서로가 서로를 복종시키려는 고집의 충돌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만약에 교회에서 이집사가 김 집사에게 ‘김 집사님 이것좀 도와주세요.’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 이냐 하면 김 집사가 이집사의 전도를 받고 처음 교회에 나오게 된 내 전도를 받고 교회 나온 사람 같으면 그 다음부터는 주종관계가 생겨요. ‘당신이 예수 믿는 것은 내 덕인줄 알아라! 그러니까 이 교회에서 내가 선배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나한테 물어보고 해 내가 당신을 왜 전도를 했는데?’이게 전도한 게 아니고 종을 하나 들인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 10명하면 자기파가 10명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작은 교회에서 목사한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세력이 됩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에서 전도 잘하는 집사는 곤란해요. 자기파가 생깁니다. 대단해요. 그런 것은 바로 사람이 이처럼 누구나 마주친다 하면 자꾸 위험한 생각부터 먼저 들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도 나한테 의미 있다고 만날 그런 소리 하고 그러죠.
주님께서 이렇게 해 버리면 그럼 그 사람을 피하란 말은 그 사람을 죽이란 그런 뜻이 아니고 ‘내가 보냈다.’는 거예요. 주님 쪽에서 내가 보냈기 때문에 주님이 저 사람을 내게 보냈기 때문에 주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가 네가 그 사람의 관계를 부수기 위해서 너희를 방문한 것이다. 당신을 미처 몰랐습니다. 하고 예상 밖의 무관계성 들이닥치게 하는 그 관계성이 깨지는 그 관계성이 주께서 찾아오고 들이 닥칩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김 집사님 난 당신을 전도해서 예수 믿어 천당 가게 했는데 왜 내가 밀어주는 권사한테 표 안 찍고 왜 다른 사람에게 표를 찍어줍니까? 실망입니다. 할 때 그 실망, 그것 주의 것입니다. 아, 나 목사님 보고 실망했습니다. 그거 주의 뜻입니다. 실망을 근거로 해서 비로소 교회가 됩니다. 모든 게 실망의 관계에요 자식은 부모에게 실망, 부모는 자식에게 실망, 아내는 남편에게 실망 남편은 아내에게 실망, 모든 게 실망의 관계에요. 아 나는 당신을 만나고 나서 너무 좋다! 이것은 아주 수상하고 예의상 멘트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왜 실망해야 되는가? 내가 스스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재료로서 퍼 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관심이 없고 내 구원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중요한 것, 좋다고 하는 것은 다 퍼 담아서 자기를 세력화시키는 겁니다.
살전 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여기서 주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 강의로 다시 보면 사람들이 A B C D 이렇게 있습니다. 목사가 한 소리하게 되면 교육받는 것처럼 우리는 교육을 스스로 받고자하여 그것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교회 아니죠. 그것은 목사가 은연중에 시키고 또는 교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구원된다고 여기는 그런 암묵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이지 실제로는 그냥 인간관계에 불과합니다. 인간관계에 불과한데 여기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민수기 11장에 지도자가 누구였죠? 모세죠. 교회에서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지금 성령님께서 그 당시 오신 것은 모세를 모세 되기 위해서 모세의 가치, 모세의 중요성, 모세의 포지션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기 위해서 신이 왔잖아요. 그러니까 남은 성신 봤다 나도 한 때 예언했어! 무시 하지 마 너만 모세야? 이렇게 나오면 안 되는 거예요. 두 번 다시 예언 안 해요.
성령께서 신약 때는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부터 나온 관계보다도 나부터 출발하는 관계가 이 관계 속에 자기 자신을 정립하려고 한다 말이죠. 나는 이 사람 알아 저 사람 알아 저사람 미워해 이 사람 좋아해 이래 놓고 그 다음에 그것을 모아놓고 나라는 것을 정립하고자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미워하는 것과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자기가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권한은 우리한테 없어요. 그런데 나에게 의미되고 싶은 것, 나에게 의미 안 되고 싶은 것을 일방적으로 구분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교회라는 것이 사실은 따지고 보면 전부 다 각각 자기 칼을 흔드것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교회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 주님이 사람 속에 있게 되면 복종의 힘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러분, 복종이라는 것이 현대인에게 성립이 됩니까? 옛날 조선시대 때나 상놈이 양반에게 하는 것이 복종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복종하는 게 복종이지 현대에서 복종이라는 것은 성경에나 나오지 자녀들아 주안에서 부모에게 복종하라 순종하라 하고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런 말이 있지만 그런 복종은 현재에 없어요. 제가 오늘 오후에 안양강의 할 때들은 건데 어떤 권사님 어머니께서 일본사람이었어요. 일본 사람이 얼마나 남편에게 순종을 잘하는가를 자기가 체험을 했는데 아버지가 기분 나빠서 어머니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하다가 ‘나가! 꼴 보기 싫다 나가!’ 하니까 그 일본 어머니가 군말안하고 집을 나갔어요. 밤새도록 안 들어 왔어요. 아침 5시가 되도 6시가 되도 안 들어 왔어요. 남자라고 큰소리 쳐놓고 걱정은 되고 문을 열어보니까 눈이 펑펑 오는데 꿇어앉아서 소녀의 기도를 하듯이 석고대죄하면서 꿇어앉아서 두 손 모아서 어깨에 눈이 푹 왔는데 밤새도록 남편의 용서를 구하는 그 여인이 일본 여인입니다.
도대체 무슨 고집이 그런 고집이 다 있어요. 그 여자한테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사랑하느냐 하면 나 일본여자가 나 일본스타일이야 나 일본 여인이야 일본여인이 한국 남자한테 시집와서 일본의 여인상이 어떤 것인가를 본데를 보여 주는 거예요. 그리고 죽었어요. 그 권사님 그릴 때 엄마가 그래서 돌아가셨데요. 사람이 눈을 맞아서 체온이 떨어지면 세포가 서서히 죽는다는 것을 과학이 아니라도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석고대죄하면서 용서하기를 바라는 그 여인의 자태, 오늘날 같으면 누가 보면 영화촬영 하는 줄 알거에요. 컷 좋습니다. 네 잘 나왔습니다. 그만 잘나왔습니다. 영화 촬영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그 일본여인의 포지션, 위치를 사랑하는 거예요. 왜? 자기한테 그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일본여자가 남편한테 순종해서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어디서 그것을 배웠습니까? 자기 과거의 기억의 저장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몸이에요.
과거에 그것이 쌓여서 그냥 막돼먹게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리고 고집을 부립니다. 하나님이여! 이게 난데 이런 나를 그대로 나라고 인정해 주옵소서! 라고 밀어붙이는 것이 그게 과거에서 미래로 덧붙이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인간의 자기 의미 찾기를 묵사발 만드는 거예요. 이게 또 어디서 죄인 티를 팍팍 내고 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권하는 사람은 여기에 10절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다음에 뭐라 되어 습니까? 죽으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라고 되어 있죠. 죽은 것을 믿으라! 이 말입니다. 네가 교회야? 그러면 죽은 것을 믿으라 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죽음을 믿으라 이 말입니다.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믿지 말고 네가 살아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말고 나 살아있는데 내 친구 몇 명이고 나 아는 사람 몇 명이고 청와대에 아는 사람 있는데 하는 그런 것에 의미를 두지 말고 죽으심을 믿으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자살했습니까? 누가 죽였습니까? 누가 죽였잖아요. 사람 손에 죽었잖아요. 그것을 풀이 하면 나 같은 사람이 죽였던 분을 우리가 믿자! 그러면 그게 뭐다? 교회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를 죽인 자를 자기가 살리겠다는 겁니다.
자기를 죽인 자를 오히려 살리겠다는 겁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죠. 원수된 자이고 경건치 않은 자이고 죄인된 자를 자신의 피를 흘려서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려낼 때 그게 아까 민수기11장의 모세 아닙니까? 모세인데 사람들이 과거에 아까 권사님 엄마처럼 일본 여자라면 일본여인상에 목숨 걸 것이 아니고 진짜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면 일본여인상은 과거에서 누적됐고 밀어붙인 거잖아요. 만약에 그분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령은 미래에서 온 거잖아요. 미래에서 오는 힘은 뭡니까? 우리는 죽더라도 누구를 위하여 죽어야한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어야 되겠죠. 그러게 되면 남편이 나라고 하면 너나 나가라 이렇게 돼야 됩니다. 네가 석고대죄하고 네가 눈 맞고 해야죠. 그의 일본여인은 남편은 내 남편이다. 저 남편은 남의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나라는 여자의 남편이다. 그 남편이 나를 나물하고 나가라할 때는 남편을 하늘같이 복종해서 나는 순종해야 된다. 그럴 때 나는 그 남자에 합당한 그 여인이 된다. 이 포지션, 이 위치를 나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된다는 것이 일본 가정에서 배운 시집간 여인상이잖아요. 요새 그렇게 한다면 친정에서 말릴 겁니다. 이혼해라 하고 말릴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하는 말이 이게 미래에 천국에 들어 갈 사람을 예상하고 그렇게 한 겁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세상에 대해서 반항 좀 해라. 여러분 반항은 젊을 때만 하는 게 아니고 죽을 때 까지 계속해서 해야 돼요. 우리 이 세상 과거에 자기 존재의 의미만 챙기는 그것에 반항들을 좀 해 주세요. 예수님이 반항했잖아요. 교회에 권면하시는 분이 여기 예수님과 어떤 사이였느냐 하면 19절을 봅시다.
살전 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살전 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살전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그 당시에 초대교회 때에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목회자라는 것은 그야말로 사도행전 20장 28절 말씀처럼 성령의 감독자로 삼아서 감독자로 하여금 치게 하는데 누구를 치느냐 하면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된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 당시에 목회자들은 근본적으로 목사라는 인간들이 하는 자격증, 면허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중요하겠어요? 성령을 소멸치 않는 그런 사람으로서 쓰여 진겁니다. 왜?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성경의 완료시대가 아니라 그 시대를 방언의 시대, 또는 예언의 시대, 또는 통역의 시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예언과 방언과 통역이 전부 다 옳은 겁니까? 다 성령으로 하는 거니까 옳은 거예요? 아니에요. 그 당시 해석은 사도들의 편지, 사도들의 가르침에 맞는지를 측정하고 검증받아야 했어요. 그러면 사도 바울 같은 경우 자기를 뭐라고 소개합니까? 로마서에서 자기를 누구라고 소개합니까? 나는 누구의 종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아까 그림을 다시 그려봅시다. 지금 여기 사도 바울이 있다 합시다. 사도 바울은 지금 사람들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의 관계가 중요합니까?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유지된 포지션이 중요하겠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사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하심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뜻은 너희들이 자던지 먹든지 마시던지 항상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시는 거예요.
살게 하시는 힘은 우리가 살겠다는 힘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던 힘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으심이 중요합니까? 내가 살아있는게 중요합니까? 이 질문이 어리석은 질문입니까? 이게 성립이 안 되는 질문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심이 중요합니까? 내가 살아있음이 중요합니까? 이 질문을 다시 한 번 이렇게 해 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제가 한번 간단히 적어볼께요.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했죠.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니까 우리는 그렇다 하지만 이 문장을 따져보면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 죽고 살고, 살고 죽고가 통일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안 죽는다 했잖아요. 이게 말이 안되는 게 이미 산 사람이 죽을 필요가 없는데 왜 또 믿어야 돼요? ‘나 예수 믿습니다.’ ‘너 영생 얻었어’ 영생 얻었어요. 감사합니다. 안 죽죠? 됐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살아 버렸는데요. 서울대학 합격이에요. 감사합니다. 이러면 끝났데 또 가서 저는 믿겠습니다. 합격된 것을 믿습니다. 하면 이미 합격됐어. 그렇습니까? 돌아서서 또 믿습니다.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아하 한번만 믿으면 되겠구나! 또 이렇게 생각한다니까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하는 말은 잘못됐어요. 나를 믿는 자는 안 죽게 되고 이렇게 돼야 맞거든요. 그렇잖아요. 예수 믿는데 왜 죽어요? 예수 믿으면 예수님의 부하이기 때문에 안 죽여야 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죽여도 살겠고 아예 죽이지 말지……. 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산다 죽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다. 아니다 하는 것이 전부 다 엉터리다 왜 엉터리이냐 하면 항상 노림수가 어떻게 내가 저 사람을 만나 좋은 관계유지하면 나한테 얻는 이익이 솔솔 쏟아져 나올까? 라는 썩어빠진 나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것을 어디에 갖다 댑니까? 예수님 한 마디 해 주세요. 내가 저 사람도 좋은 거 뽑아냈는데 예수님도 사슴 피 뽑듯이 예수님의 좋은 것 쏙쏙 뽑아서 나한테 이용하겠습니다. 예수님 좋은 것 없습니까? 멋진 말 없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야 좋다 그 말씀도 뽑고 그 다음에 또 없습니까?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야, 그것도 좋고 하면서 다 뽑는 거예요. 그런 썩어빠진 사고방식이 마르다 마리아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거든요. 그게 관계성이죠. 그래서 자기 집안에 오빠가 죽는다. 그것도 오빠가 늙어죽는게 아닙니다. 오빠가 이상하게 죽었어요. 병들어서 죽었는데 설마 오빠가 아픈 일이 있더라도 설마 아프기 전에 주님한테 통보만 하면 주님께서 쫓아와서 살려줄 줄 알았죠.
예수 믿고 난 뒤에 예수님이 친히, 교회가 뭐에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 마르다마리아와 나사로하고 예수님도 함께 있어서 이 가정은 예수님이 책임진다 이 말 아닙니까? 의존교회교인들이여 주님이 함께 계셔서 여러분 인생을 주님께서 책임집니다. 그것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그것을 믿습니다! 그게 믿음입니까? 그것을 믿는다고 해서 그게 믿음이냐 그게 교회냐 말이죠. 그것은 교회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빠가 아플 때에 통보했습니다. 오시길 원합니다. 안 갔습니다. 계속 안 간 것이 아니고 죽고 난 뒤에 왔습니다. 그때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달려들었습니다. 왜 우리 오빠를 죽입니까? 이런 것은 우리가 예상 못한 겁니다. 무관계성이에요. 그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을 주께서 익히 아시고 그 관계를 틀어 버리고 피해 가 버린 겁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보통 인간관계와 같은 관계 속에 예수님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도 아닙니다. 그러면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믿느냐?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죽은 나사로가 왜 부활했느냐? 그것은 주께서 나사로에게 믿음을 만들어 놓았지요.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라 했잖아요.
엉터리 우리 믿음, 내 위주로 내 좋은 쪽으로 내 이익 되는 쪽으로 믿음이 있으면 주께서 슬그머니 오셔서 우리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도 함께 죽게 만들어요. 믿음 소망 사랑은 안 돼! 자기만 사랑하면서 무슨 사랑을 해요?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만 기대하고 자기만 믿어요.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지 예수 안 믿어요. 계속 믿어줄까 말까 만날 이것만 계산합니다. 아 예수 10년 믿었는데 더 믿어줄까 말까 매일 이것만 계산 한다니까요 그래 잘되면 내가 믿어주고 안되면 안 믿어줘! 만난 이것만 생각합니다. 거기를 주께서 찾아와서 뭐라 합니까?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라고 해서 이 말씀 자체에서 나오는 그 단어, 나를 믿으면 ‘믿음’ 그 믿음을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세 사람을 등장시켜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만들어 넣어 주시는 무관계성, 침투 그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믿음도 버려라‘ 믿음을 버리고 그 믿음에 자리에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주님과 우리사이에 관계를 맺게 될 때 우리는 나에게 있던 것 날아가 버리고 절망할 때 그 관계를 만드시는 그 자리, 친히 만들어 준 관계를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로마서 4장에서 은혜라고 합니다. 믿음은 선물에 속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주의 믿음 때문입니다. 주님의 믿음작용이 일어나는데 그게 주님의 믿음인지 내 믿음인지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면 주님의 믿음이 왔을 때는 뭐가 이해가 되느냐 하면 무릇 예수님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이 이게 논리로 설명이 안 되는데 이게 이상하게 믿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전에 내가 믿던 것은 이것을 논리로 믿어요. 내가 믿게 되면 죽어도 부활될 것이고 그 다음에 내가 지금부터 믿게 되면 영원히 안 죽게 되고 그러면 이 논리가 어떻게 되지? 그러면 예수 믿어 죽어도 살 것 같으면 그러면 내가 죽었을 때 내가 살았단 말인가 내가 살았단 말인가? 내가 살아 있을 때 믿으면 그게 살았단 말인가 죽었단 말인가? 이 복잡한 논리가 되거든요. 그것을 우리가 내가 내 쪽에서 이해를 잘해야 이게 믿음으로 인정받지 이해 못하면 주님한테 인정 못 받는 거야. 라고 내가 믿는 믿음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인정받고 자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것은 내가 만든 믿음이란 뜻이에요.
내가 만든 믿음은 항상 내가 납득이 되어야 돼요. 주님이 주신 것은 믿음이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말씀이 납득이 되는 거예요. 무릇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게 한다는 것이 내가 살아서를 나를 거기에 집어넣으면 안돼요. 그냥 살아도 안 죽는 것이고 죽어도 그게 사는 것이라는 것이 말씀 자체가 덥혀져야 되지 내가 거기다 말씀을 깔아 놓고 거기다 집어넣는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 말입니다.
나에게는 내가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는 말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을 쓰면 안 된다 말입니다. 쓸 수가 없어요. 있게 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이렇게 하신 거예요. 나는 여기 있고 주님이 여기 있다 이렇게 쓸 수 없습니다. 주님 하고 나하고 남남관계에요 내가 여기 있는데 누가 있게 했는가? 주가 있게 했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주님 믿는 거예요. 이렇게 친절을 베풀어도 이해를 못하면 곤란합니다.
자식이 있잖아요. 자식이 여기 있네. 내가 여기 있듯이 자식이 여기 있네. 그것은 쓸 수 있는데 자식이 있고 자식 옆에 주님이 있네. 주님이 있다는 말을 그렇게 쓰면 안돼요. 자식이 있게 한 그것으로 주님이 계신 거예요. 왜? 모든 있음은 그 배후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있는데다가 거기다 하나 집어넣어서 주님 우리끼리 있는데 주님도 참석하세요. 그래서 하나 둘 셋 주까지 합해서 세 명되게 합시다. 이런 식으로 있다는 말을 용어를 있으면 존재 용어를 갖다 붙이는 게 아니에요. 주님은 숫자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 둘 셋 세면 그 셀 수 있도록 힘을 주신 분으로서 여기 계신 거예요.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믿음이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그런데 내가 예수 믿기 때문에 만약 강도가 와서 나를 죽인다 하면 죽어줘야 돼요 왜? 나는 죽어도 사니까 이렇게 계산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강도가 왜 들어갑니까? 강도가 안 들어가도 돼요. 그냥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죽어도 사는 사례, 경우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게 하는 겁니다. 말씀이 우선이고 나는 말씀을 위해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여기 있게 하신 그리스도 주님이 여기 계신 거예요. 주님은 내 편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냥 주님편이고 그냥 주님에 속했을 뿐입니다.
서울 의존교회121012b (관계성)―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믿음과 관련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가 믿으려고 한다 말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성립이 안돼요. 한국교회가 무슨 소리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왜냐 하면 예수님은 죽어 있고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산자가 죽은 자를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주님은 죽으신 자로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난 분으로 함께 있고 우리는 죽어 본적도 없는 인간이 함께 있고 그게 어떻게 한 목소리 내고 어떻게 한 마음이 되고 하나가 되겠어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우리의 믿음을 버리기를 원하는 겁니다. 믿지 말라 말이죠. 내가 믿게 해 줄 테니까 그런데 주님이 믿게 해 줄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믿음을 거기에 대체해서 바꿔 주는 거예요. 주님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믿음하고 우리가 살아서 구원받고 싶다는 욕심에서 믿어볼까 싶어서 예수 믿을까 부처 믿을까? 아니야 예수가 좋아, 그런 식으로 선택해서 믿는 믿음하고 같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손들고 나오세요. 예도 믿으신 분 나오세요. 당신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게 장난치는 겁니다. 완전히 장난이에요. 교회가 장난치는 거예요. 만약의 교인들이 우리는 사랑한다, 안수한다. 하면서 교제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중에 한 사람이 윽 하고 숨을 죽어보세요. 갑자기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어요. 싸늘해지면서 빨리 앰뷸런스 불러 하면서 분위기가 엉망 되잖아요.
예수님은 우리 손에 죽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고 우리 손에 죽었으면 우리는 그야말로 죽었어요. 우리는 저주 받아 죽어 마땅하다 말이죠. 어디 사랑하는 그런 노래 부를 마음이 안돼요. 부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한국교회는 뭐냐? 전부 다 위선자들입니다.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자꾸 믿음 있다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내가 알아서 선택해 놓고 이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제가 지금 전부 다 잘라내는 겁니다. 진짜 믿음은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다.
죽으신 분이 살아있어서 주는 믿음하고 살아있는 자가 안 죽으려고 계산하면서 퉁구면서 믿는 것 하고 이것은 그 질이 완전히 다른 겁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있어요.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누구이죠?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때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아브라함 말이 제사 지내면서 믿습니다. 하면 오~ 아브라함이 양을 치면서 아이고 축복이다. 아이고, 믿습니다. 뭐 이랬습니까?
신의 존재는 누구나 다 인정하는 거예요. 왜? 신의 존재는 우선 자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야? 나를 이렇게 존재케 하신분이? 어 계십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함을 믿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내 존재에다 존재 있다는 그것을 하나님께 붙이면 된다? 안 된다? 그것을 붙이면 안 됩니다. 같은 질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은 믿음이냐 아니냐! 보여주는 장치를 만들었어요. 그 장치에 누가 동원되는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이 거기에 동원됩니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네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지요. 제가 처음부터 믿음과 행함을 이야기했지만 바쳐라! 이게 명령입니까? 명령 아닙니까? 명령이죠. 이런 명령들을 동원해서 무엇을 구성하느냐 하면 진짜 믿음이냐를 하나님이 보여주기 위해서 명령조로 나오는 겁니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