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조치 121118
하나님의 조치 121118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하나님의 조치 (미 7:7-10)
이근호
12-11-18 15:29
하나님의 조치
2012년 11월 18월 본문 말씀: 미가 7:7-10
(미 7:7, 개역)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미 7:8, 개역)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미 7:9, 개역)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미 7:10, 개역)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 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우리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처럼 행세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놓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 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 비극들은 주변에서 밀려와서 오늘날 자신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었다고 단정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 8절을 읽으면 완전히 오해합니다.
즉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단들이나 모든 교회들은 성경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주신 계시라고 여깁니다. 기본부터 출발점이 다릅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성경 말씀을 주셔서 우리가 이 말씀을 믿고 준수하고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성경 의 모든 말씀은 오직 예수님을 겨냥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곳에서 비켜나야 합니다.
그리고 저주받을 죄인들만 소복이 모여있는 그 자리가 곧 우리의 자리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받거나 저주받을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복이라는 것도 받을 권리 때문에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저주라는 것도 새삼스럽게 저주받을 짓을 했기에 받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축복과 저주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의 중심을 자기 자신으로 잡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나 위주로 해석하게 됩니다. 즉 내가 힘들 때, 내가 만족스러운 수준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심판하시다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미가 7:6에 보면,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또한 예수님 중심으로 일단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들이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이유는 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중심성을 포기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인간들의 자기 중심성은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즉 내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국가가 뭔데 나서서 간섭하느냐고 따지게 됩니다. 도대체 내가 내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살겠다는데 언제부터 국가라는 것이 등장한 것입니까? 옛날에는 군인들이 설쳐대면서 영토 확장에 나섰습니다. 남이 키운 가축들을 무조건 자기 것으로 빼앗고서는 또 딴 곳에 가서 그짓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손으로 키운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탐내서 그것으로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은 우월한 힘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보니 모든 사사로운 개인보다도 군인들이 외부에서 뺏아온 그 영토를 갖는 것에 대해서 자국민들은 신의 축복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국가라는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즉 보다 더 많은 남의 것을 뺏을 수 있도록 신에게 비는 겁니다. 이 국가의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적인 개인의 인생을 희생을 강요받더라도 용납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도박의 일종으로서 만약에 자기가 속해 있는 국가가 타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자기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가족들은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가족의 소박한 행복도 무참하게 짓밟히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이럴 때,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비극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안 좋은 일들의 파장에서 번졌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슬픔의 바다 한 가운데서 주변에서 밀려오는 비극의 파고가 수그려지기를 간절이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기 중심적 의식으로서는 오늘 본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수에게 당했다는 것보다 훨씬 혹독한 보복을 우리의 원수라는 곳으로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경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과격한 조치로서 되레 우리가 원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마련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원망할 것입니다. “하나님, 제 원수가 망하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께서 너무 심하게 다루시니 저의 마음이 시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거북스럽고 부담이 됩니다. 나로 인하여 너무 과한 징벌을 받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에스겔 21:19-23에 보면, “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 머리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베풀며 입을 벌리고 살륙하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베풀고 토성을 쌓고 운제를 세우게 되었나니 전에 그들에게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헛점으로 여길 것이나 바벨론 왕은 그 죄악을 기억하고 그 무리를 잡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과 예레미야 10:23의 말씀과 비교해 보시기바랍니다. 인간들의 판단과 평가가 과연 독자적 효력을 지니는지를 말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즉 우리네 인생사란 모두가 우리가 결정하거나 힘써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중심을 알리기 위해 일종의 미끼 상품이나 혹은 덧밥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걷는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데서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아무리 이방점을 처서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할지라도, 방법이 어떻다 할지라도 모든 결과는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결정된 사항을 아무런 행함도 없이 그저 누리고 참여됨을 받고 살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삼지 말고 하옵소서. 우리에게 그럴 자격도 못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1-19 16:35
17강-미7장7-10(하나님의 조치)1211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7장 7절에서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97페이지입니다.
미가 7:7-10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 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오늘 방금 읽은 말씀을 보게 되면 참으로 우리가 이해하기가 힘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점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기 힘드냐 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싸울 때는 나중에 싸우다가 ‘미안하다. 잘못됐다.’ 하면 그게 끝나는 거예요. ‘너 돈 빌려갔잖아. 왜 안 갚아?’ ‘내가 언제 빌려갔는데?’ ‘몇 월 며칠에 빌려갔잖아.’ ‘아하, 몰랐네. 미안하다. 내가 갚아줄게.’ 이처럼 인간 대 인간의 사이라 하는 것은 얼마든지 화해가 가능하고 용서가 되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보통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고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든지 또는 하나님께 나아올 때 상당히 우리가 거북스러운 거예요. 나아봤자 주의 원칙하고는 안 맞을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어떤 사람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욕을 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주변에서 공격을 받아서 엎드러졌어요. 8절에 보면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이렇게 돼 있다 말이죠.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주변에서 미움을 받아서 내가 직장에서 쫓겨난다든지, 아니면 국가에서 체포가 된다든지, 사도들처럼 목숨을 빼앗긴다든지, 어쨌든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그랬지만 나중에 하나님이 오셔서 ‘니는 내 이름으로 핍박받았기 때문에 니는 구원 받아라. 니가 고생 좀 했지? 나 때문에, 걱정하지 마, 이제 천국에서 니가 편히 쉰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우리가 이해가 된다니까요. ‘아, 고생했다고 주께서 내가 살아서 그때 내가 고생 좀 한 것도 다행이구나. 그때 배반 했으면 어떡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셨다.‘ 요거까지는 우리가 이해가 되는데, 어느 점이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 10절에 보세요.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 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참 이해하기가 힘든 겁니다. 어떤 새댁이 시집을 갔는데 평소에 시누이가 올케언니를 그렇게 괴롭혔다 말이죠. 하지만 그 새댁은 천사 같은 심성을 가져서 교회도 잘 다니고 천사 같은 심성으로 ‘니가 시집을 안 가니 그렇게 내 심정을 모르는구나, 언젠가는 알겠지.’ 그래서 열심히 견뎠더니만 나중에 시누이가 ‘올케언니, 내가 잘못됐어요. 내가 언니 마음을 모르고 했어요.’라고 회개해서 ‘괜찮아. 니도 나중에 나이 많으면 알겠지.’ 이렇게 좋게 됐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됩니다. 이건 인간 사이에는 다 그런 일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난 뒤에 시누이가 길에 가다가 화물차에 받혀서 얼굴이 완전히 뭉개져서 딴 사람 됐다. 이렇게 되면 ‘그건 내가 바랐던 게 아닌데.’ 시누이가 나를 괴롭힐 때 ‘니도 나중에 혼나봐라. 니 같은 여자는 트럭에 받혀서 죽어야 돼.’ 요런 나쁜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고, 그런 일까지 심하게 당하기를 내가 은근히 노린 건 아닌데, 좋게 지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시누이가 길에 가다가 교통사고로 얼굴 반이 날라 갔다 했을 경우에 오히려 괜히 ‘하나님이여, 내가 시누이가 저렇게 당하는 걸 내가 원했습니까? 시누이가 저렇게 당하면 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는 시누이를 벌써 용서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상처를 빨리 치유하시고 제발 잘 돼서 나도 마음이 섭섭하지 않고 편하게 해주세요. 아무리 나를 험담했다 하지만 그걸로 해서 너무 심하게 시누이를 때려버리면 내 마음이 괴롭습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성경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 믿다가 고생해도 ‘우리는 견뎌야 돼, 언젠가 지켜주시겠지.’ 요거까지는 좋은데, ‘나를 괴롭히는 인간은 완전히 왕창 망해라.’ 이것까지는 예수 믿는 양심으로 그것까지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말고도 모든 성경 말씀은 ‘너로 험담하는 자를 내가 진흙같이 밟아버린다. 아주 작살을 낸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원한 건 아닌데, 아니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 그것까지 작살을 낸다 하니까 괜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불신자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겠죠. 그것이 바로 우리라는 몸이 나의 행복이나 마음의 평안을 목적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사용하는 거예요. 미끼 상품이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끼로 사용해서 뭔가 세상이 우리를 공격하게 만들어서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당사는 무시무시한 것을 우리를 미끼로 해서 떡밥으로 해서 이용해서 호된 저주를 퍼붓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 허락도 맞지 않고 우리를 그냥 이용해 먹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고운 양심이라든지 ‘하나님, 너무 심합니다. 내가 그걸 원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주제넘게 하나님 일에 도중에 개입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8절에 보면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할 때 이 나는 바로 이 나에서 우리 자신을 일단 빼주세요. 이 나는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십니다. 이게 구약성경 할 때 옛날 총신 신학교 학생들에게 이야기 할 때도 분명히 언급했어요. 여러분들이 구약 성경에 나오는 ‘나, 나’가 나가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따지지 말고 그렇게 믿으세요.‘ 라고 해서 따지려 하니까 너무 논리가 어렵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여기 나를 자기로 대체해 버리면 당신은 의인이고, 그야말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인이 아닌 게 돼 버려요. 우리는 성경에서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위하여 있다는 것을 빈말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이단들이라고 하는 안 산홍부터 해서 모든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고 신천지고 뭐 전부 다 모든 사람의 제일 잘못된 점은 성경에 나오는 ‘나’를 ‘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성신을 줬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준 겁니다. 이 말을 소위 이단이라는 사람들도 못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목사라는 사람도 이 말을 알아듣지를 못해요. 처음부터 대화가 안 돼요.
‘아, 나는 성경보고 큐티 해서 복 받아야지.’ 아니거든요. 성경의 모든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제발 ‘나’를 빼주세요. ‘나’를 빼주세요. 그럼 나는 어떻게 구원받는데? 예수님하고 하나님하고 이야기해서 그 효과 보는 겁니다. 그 효과!! ‘니는 나가 있어.’ 우리는 ‘나가 있어.’라고 제외해 버리는 거예요. 우리의 자리는 그냥 여기 말씀에 끼어들 자리도 못 되고, 나가 있으면 돼요. 나가 있고 그 말씀을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기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자기한테 구원이 안 돌아오게 돼 있는 반면에, 이 복음은 내가 나서지도 않는 그것으로 인하여 그냥 무한 리필, 무작정 혜택을 입은 거예요. 혜택을 입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게 돼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한테 공격을 하시는데 제가 그분들이 성경말씀 운을 딱 떼면 무슨 소리 하는가를 알아요. 알아서 말이 길어지면 중간에 꼭 이런 말씀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그 다음 말을 제가 또박또박 읽어요. “산. 자. 들. 로. 하 .여. 금. 다. 시. 는. 저. 희. 자. 신. 을. 위. 하. 여. 살. 지. 않. 고.” 요걸 또박또박 읽어요.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를 왜 또박또박 읽느냐 하면, 저한테 공격하고 저한테 이렇게 의심스럽게 공격하는 이유가 ‘왜 사람이 나를 위해서 살아야지, 하나님도 날 위해 있는 하나님인데, 왜 자꾸 이 근호 목사 당신은 인간을 전적으로 죄인으로 취급하느냐?’ 벌써 공격 톤이 그렇게 나와요. 그럴 때 제가 고린도후서 5장 15절 “자. 기. 를. 위. 해. 서. 살. 지. 않. 고.” 또 이야기할까요? “자. 기. 를. 위. 해. 서. 살. 지. 않. 고.” 그런데 왜 자꾸 자기 걱정합니까? 그 이야기하면 전화기 목소리가 쑥 들어가요. ‘그건 그런데요.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게 될 거 아닙니까?’ 왜 본인이 주의 일에 걱정을 하십니까? ‘믿는데 너무 외로워서’ 말 통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좁은 문 이야기해드릴까요? 찾는 이가 없다고! 좁을 길이 원래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있는 친구도 다 떠나고 그런 겁니다. 교회당에도 헐렁해지고 허황해요. 외로워 미치겠어요. 같이 동반자가 있어서 우싸, 우싸 해서 힘을 내야 되는데 하나, 둘 다 뚝 떨어져 나가고 자기만 덜렁 남을 때 ‘내가 잘못 믿었나? 내가 지금 엉뚱한 길을 가고 있나?’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되면 그게 잘못 이예요. 단순히 개인적으로 인생을 잘못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성경자체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게 제가 가슴이 아픈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자꾸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되면, 자기를 위한 예수,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찾다 보니까 성경을 100독을 했고, 1000독을 했고 신학을 했고 목사가 돼도 전부 다 내가 보기에 자기를 위한 짓거리에 불과한데, 거기서 제가 이야기하려니까 가슴이 찢어지게 너무너무 아픈 거예요. 어떤 때는 혼자서 훌쩍훌쩍 울기도 합니다. 왜 그리 못 알아듣는지.
그래서 찬찬히 원인을 따져보니까 결국 이 말로 정립이 돼요. 사람은 왜 자기가 비극의 주인공인지 본인이 원인의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거예요. 왜 내가 비련의 주인공인지, 왜 내 인생이 힘든지, 그 이유를 본인은 알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보기는 본인이 그 이유를 몰라요. 그걸 왜 모르느냐 하면 여기 6절에 봅시다. “사람의 식구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아침에 설교할 때 너무 객소리가 길었다 해서 과연 객소리가 길었는지 한번 이런가 했는데 오후에도 객소리 길더라고 해야 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나라가 왜 필요하냐? 사람은 항상 눈만 뜨면 자기밖에 모르는데 나라가 왜 필요하냐 말이죠. 아니 국가를 누가 만들었고 국가는 왜 생기느냐 하는 거예요.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기 새끼, 자기 가족, 자기 마누라, 자기 남편, 자기 가족밖에 모르게 돼 있어요.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국가가 생겼으니까 도대체 국가가 왜 필요하며, 국가 없이 살면 안 되는가요? 그걸 아나키즘(anarchism)이라 합니다. 이게 무정부주의라는 거예요. 아니 국가라는 게 꼭 필요합니까? 내가 길을 건너는데 ‘어, 쉿, 빨간 불이면 안 됩니다.’ 경찰이 제지를 하는 거예요. ‘니 뭔데?’ ‘경찰’ ‘경찰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있는데? 내가 편해서 가는데.’ ‘나라 질서가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럼 난 나라 같은 거 안 믿을게, 나 혼자 살 거야.’ 그럼 그 경찰이 나한테 할 이야기 뭐가 있습니까? ‘ 나 산에 가서 그냥 고구마 캐고 나 혼자 살 거야.’ 고구마 캐는데 세금 내라고 오지 말고 내 땅에 내 고구마 내가 키울 테니까 맘대로 살 테니까 세무서고 경찰이고 뭐고 오지마라.‘ ’만약 북한이 쳐들어오면?‘ ’북한이 쳐들어와도 똑같은 소리 할게. 하여튼 나는 나만 생각할 테니까 국가고 투표고, 나보고 투표하라 하지 마. 다 귀찮아.‘ 충분히 이렇게 살고 싶고 이렇게 살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왜 우리는 국가의 눈치 봐야 되고 또 10일 되면 또 투표할 준비하고 왜 그렇게 하는데요? 이게 현실문제입니다. 남녀가 둘이 사랑한다. 둘이 미리 혼인신고 했다. ‘결혼식 할까, 말까, 때려 치워. 귀찮다. 오는 것도 귀찮고 뭐 다 귀찮다. 그럼 우리 둘이 혼인신고, 혼인신고도 필요 없네, 국가도 필요 없으니까. 우리 둘이 그냥 방 하나 얻어서 살자.’ 그걸 뒤늦게 안, 부모가 아주 통곡을 하면서 ‘내가 니를 어떻게 키웠는데 니 좋다고 그렇게 결혼하느냐?’ 아들이 하는 말이 ‘내 좋아서 내 사는데 엄마가 왜 필요한데?’ ‘엄마가 키웠으니까’ ‘키운 것은 어렸을 때만 키워줬지, 이제 내 스스로 사는데 엄마가 무슨 필요하나? 내가 결혼하고 내가 벌어서 내가 살겠다는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세상이 점차 그렇게 됩니다. 은근히 자식한테 기쁨을 얻고자 노렸던 것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세상이 그렇게 바뀌어요. 그러면 따집니다. ‘얘야, 니가 사람 사는 게 그게 아니다. 니만 사는 게 아니고 가정이 필요하고 그런 게 아니다. 가정이 필요 없고 그런 게 아니고 가정이 필요해.’ 이건 지금 이야기지만 옛날 같으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얘야, 먼저 결혼을 했으면 나라님 앞에 가서 먼저 신고를 해야 돼요. 지금 북한도 그러고 있어요. 북한은 결혼하면 결혼하자마자 김 일성 동상 앞에 가서 ’결혼시켜줘서 감사합니다.‘ 하고 동상에 절합니다. 이건 옛날 조선시대에 결혼하게 되면 어디를 가느냐 하면, 조상 무덤에 가서 ’이렇게 성사시켜줘서 감사합니다.‘ 했어요. 이게 진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 합니까? “자기 원수가 집안 식구다.‘ 했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비극의 주인공, 인생이 이렇게 슬픈 것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거죠. 그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 안 좋은 바닥 위에 자기가 푹 빠져있는 거예요. 그래서 기대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괜찮은데 이유가 뭐냐 하면 주변에서 나를 못살게 구는 거예요. 이걸 이렇게 표현하게 되면 이 세상의 악한 바다 속에 나는 풍덩 빠져있는데 자꾸 저쪽에서 파고가 높아지는 거예요. 물결이 출렁거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책은 하나밖에 없어요. 제발 그 악한 기운의 파도가 내 곁에는 쳐들어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그 수밖에 없는 겁니다. IMF 때, 금융위기 때, 지금도 경제상황이 안 좋을 때, 유럽 발 경제 침체가 한국 기업이 도산하게 되었어요. 잘 나가던 기업도 확확 무너집니다. 주요소 문 닫고 가게 손님 없고, 그래서 우리는 원인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원인은 너를 위해서 사는 그것이, 이 세상이 만들어진 하나님의 뜻과 이게 충돌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충돌되기 때문에!
국가가 어디서 생겼는가, 그걸 제가 운을 뗐으니까 말씀드릴게요. 처음에 국가를 만들 때 국가는 농민보다도 군인들이 계급이 높았어요. 제일 높은 계급이 영적 신과 통하는 사람이 제일 높고 그 다음에 군인계급이고, 그 다음에 농민계급이고, 그 다음에 장사하는 사람들, 이렇게 대략 4가지 계급이 있었습니다.
국가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군인들이 하는 짓이 전쟁해서 영토를 넓히는 짓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꾸역꾸역 고구마나 심고 자꾸 살피고 내 것 내가 한다 할 때에 군인들은 뭘 했느냐 하면 계속해서 영토를 넓히고 전쟁해서 남의 것을 빼앗고 그것이 취미가 되어서 공로를 세워 놓고 그걸 국가라고 한 거예요. 국가라 하는 것은 전쟁을 계속 해나가야 국가가 되는 겁니다.
우리교회 같이 ‘여러분 신앙생활 잘 하세요. 교회 크다고 천당 넣어주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 같으면 서로가 자기 신앙하면 돼요. 그런데 목사가 와서 하는 말이 ‘여러분들은 자기 신앙만 챙기고 남의 신앙 안 챙기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이 영토를 넓히고 교회를 부흥해서 보다 대구시민을, 한국을 전부 다 신자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이게 바로 군인들의 체제라니까요. 그저 싸우고, 싸우고, 멈추면 무너집니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야 되는 거예요.
가게를 해도 오는 손님맞이하고 가는 손님 안 말린다. 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어쨌든 간에 저쪽까지 삼키고 저쪽 삼키고 가게 키우고 또 빚내서 더 크게 하고 이런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하게 돼 있어요. 반드시 성공하든지 말아먹든지 둘 중에 하겠죠.
우리의 뜻이라는 것은 세상 전체를 내 세계 만드는 거예요. 그걸 이루지 못해서 나한테 비극이 왔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슬픈 것은 내 욕망을 내가, 마저 채워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가 자기보고 슬픈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슬퍼요. 그렇게 되면 자기만 중요하고 남은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어떤 50대 아저씨가 시체에서 금반지 빼내다가 입건됐습니다. 시체,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고 금반지가 중요한 거예요. ‘저 죽는데 왜 금반지를 끼고 가나. 시체 미안하다.’ 하고 금반지 빼다가 입건됐어요. 몰래 카메라 CCTV 에 걸려서. 이웃들이 ‘금반지 있었는데 금반지 어디 갔지?’해서 걸렸어요. 이게 죽은 사람 금반지는 그래도 약과입니다. 산 사람 손가락에서 금반지 빼는 사람이 있어요. 소매치기뿐만 아니고 모든 경제구조가 살아있는 저놈의 것을 내가 어떻게 나의 영토를 확장시키는가, 전부 다 군인 입장에서 싸워서 내 것 만드는, 그래야 자기가 만족하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니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가 바로 니 집안 식구가 원수다.’ 이거 예수님보고 1차적으로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 다음에 우리보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하고는 안 맞는 정도가 아니고 서로 충돌을 매 순간에 충돌을 일으켜요.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느냐, 에스겔 21장 21절을 기니까 제가 읽을 테니까 듣기만 하세요. 바벨론 왕이 유다 나라 칠 때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그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우상에게 점을 쳐서 예루살렘을 선택해서 공격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누가 하시는가? 배후에 우리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공격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 이예요. 왜,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니까. 하나님 빼놓고 다 원수니까.
예레미야 10장 23절에 보면 이건 심방 갈 때 되게 좋아할 말씀인데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걸음을 인도하는 것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걷고 있으니까 내 뜻대로 걸을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걷게 하시고 그 선택을 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이 나를 공격할 때 공격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시고, 그러니까 이 모든 걸 합해서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 인생 하나님의 뜻 이루는데 하나님이여, 사용해 주시옵소서.’ 그런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거예요. 내가 뭘 하든지 뭘 만나든지 내가 스스로 나는 비련의 주인공이라 그렇게 할 권한도 우리한테 없어요. 비극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우리가 슬프면 주님도 슬퍼요. 그러니까 주님이 슬퍼할 일은 없을 거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까.
그래서 괜히 우리가 비극의 원인을 안다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사용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고 그게 바로 미가 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아예 엎드러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가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엎드러지게 하시고 일어나게 하셔서 아무리 너희들이 나를 원수로 여기지만, 하나님이 내편에 서서 하나님의 원수를 기어이 발각시킨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 우리한테 해당되는데 먼저 예수님한테 해당되는 거예요. 그 예수님한테 해당되는 사항이 이제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주어지는 겁니다.
이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예수 믿는 새댁이 시집을 갔습니다. 시누이가 굉장히 괴롭힙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 힘들죠. 그런데 어느 날 시누이가 ‘언니 미안해, 내가 잘못됐어.’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그 못된 시누이 같이 교회 가고 이제는 새 사람 되었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트럭에 받혀서 죽었다. ‘하나님, 내가 그런 걸 원한 건 아니잖아요.’ 할 때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니 원수가 아니고 주님의 원수였어.’
로마서 12장 19절에 “원수 갚는 것을 내게 맡겨라” 니가 친히 원수 갚지 마라. 니도 똑같은 인간이니까, 니 원수 갚아봐야 니만 속 시원하지, 주님의 뜻과는 아무 관계없는 거예요. 그냥 매일 매일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그냥 맡기세요. 그럼 주님의 뜻을 어떻게 압니까? ‘주의 뜻을 어떻게 압니까?’라고 그 말 내뱉는 그것도 주의 뜻 이예요. 우리에게 쏟아지는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만 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따로 주의 뜻을 골라내지 말고, 우리가 현재 있는 모든 것이 주의 뜻이고, 주께서는 우리를 미끼로 사용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를 찾아내는 작업에 우리가 동원된 것을 영광으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