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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21113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0-말라기자유게시판말라기

20121113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0-말라기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1113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0-말라기

(강의:이근호 목사)

학개를 했는데 그 중심은 자아중심성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성전이 등장한 것은 여기는 맞은편에 자아중심성이 있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 안 하고 너희 집만 자꾸 생각하느냐? 경쟁적이거든요. 그리고 집 짓는 것도 즐기기 위해서 짓는 것이 아니고 사업에 그것이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차 바꾸는 것도 그렇고. 사업에 유리하기 때문에 일종의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지 취미라서 하는 게 아니거든요. 모든 게 자아중심이에요.

그러면 성전은 자아중심성이 빠져있다는 말은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아까 제가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한 자기 구원, 해탈을 위해서 노력한 것과 똑같이 되거든요. 성전은 다윗언약의 자손이 오시는 거예요. 메시아가 오는 겁니다. 메시아 중심성이지 내 구원중심성이 아니에요. 한국교회에서 이런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괴로워요. 전부다 교회에 종교 활동하려고 오는 거예요. 종교 가져보겠다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팔레트에 빨간색 물감 짜고, 노란색 물감 짜는 것처럼 팔레트 빈 칸에 종교 칸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마치 초등학교 아이들 성적표에 국어 듣기, 읽기 이런 것처럼 끝에다가 기독교 이런 것 있는 것처럼. 그게 바로 인간의 다른 신이에요. 유일신이 아니고. 그걸 지적해줄 때 우리는 해결되는 거예요. 네가 종교란 걸 여러 항목 중에 하나로 따로 정한 그 자체를 공격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있어야 되는데 예수님이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어요.

학개에 보면 또 중요한 말씀이 여러분 아시다시피, 지금 성전 보기에 초라하지. 하지만 장차올 성전은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러니까 이 성전은 건물로서는 의미는 찾지 말라. 회개용이 되는 거예요. 왜 성전은 무너졌어야 했는가? 그리고 왜 하나님은 바벨론 제국 안에 새로운 성전, 건물 없는 성전, 움직이는 성전을 따로 조성해야 되는가? 또 그것이 왜 폭풍처럼 B.C.536년에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인도 하에 그들이 왜 왔는가? 그들로 왜 두 번째 성전을 짓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그 당시에 자아중심성에서는 토지에 대한 개발과 투자, 경제성이 중심이 돼있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은 관심 없었어요. 그것이 말라기에서는 어떻게 되는가를 봅시다. 두 번째 말라기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말라기는 정확한 건 아닙니다. 보통 B.C.440년경이다. 말라기는 계시할 때 느헤미야도 살아있었어요. 그런데 말라기와 학개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이 메시아를 보여주는 연결, 매개체가 된다는 거예요. 매개체란 표현을 했는데 이 말을 검토해보면, 매개라는 것은 촉매와 비슷한 의미인데 매개란 A라는 것과 B라는 것이 만나면 폭발해버려요. 만날 수가 없어요. 만날 수가 없는 그 틈바구니에 매개가 들어갑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이걸 중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중보란 의미는 이면의 만남이 아니라 두 인격체, 사람이란 인격체라 간주하고 하나님을 인격체라 간주했을 때 중보자란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개란 성전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성전은 부동산, 건축물이잖아요. 건축물이 되려면 이쪽은 사람이라는 매개체보다도 여기서 어떤 힘, 이것도 어떤 힘, 그러니까 세상 힘과 천국 힘이 만나면 폭발해버려요. 그래서 폭발을 정화시키고 중재하고 원활하게 평화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전이기 때문에 네가 부자 되고 너희 집 잘 짓고, 이방여자와 결혼해서 너의 인생을 꾸리는 것, 그것은 장차오실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완전히 폭발 직전의 탱크로리에 들어있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집을 지은 게 아니고 탱크로리를 지은 거예요. 그리고 무슨 소리인지 들어보면 심지에 불이 붙은 거예요. 5초 후에 폭발합니다.

여기서 구약신학을 하면서 제가 여러 번 했지만 하도 어렵기 때문에 여러분 이해가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인데 구약의 시간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서 언약에서 말하는 시간관은 인간의 시간관을 공격하고 죄로 들춰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이나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구약의 시간관이 내가 갖고 있는 시간관과 활용할 수 있다고 자꾸 고집을 부려요. 코스모스가 시간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관과 일치되는 겁니다. 해와 달이 갖고 있던 시간관은 하나님과 일치된 시간관이에요. 심지어 마귀가 갖고 있던 시간관도 하나님과 일치된 시간관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청년을 찾아왔을 때 무덤의 청년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여, 왜 벌써 왔습니까? 우리를 멸하려왔지요?”

마태복음 25장에서 지혜로운 처녀, 어리석은 처녀의 기름 준비하는 것 있지요. 그 시간관도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관을 공박하기 위한 시간관이에요. “신랑 올 때 그때 준비하지.” 사실은 종 비유인데 소위 달란트 비유에서 게으른 종이, “주인 올 때 그때 열심히 하지.”라는 그 시간관을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있는 종들은 그걸 극복하죠. 주인이 멀리 떠나도 지금 주인이 있는 입장에서 시간을 체크하라 이 말입니다.

주인이 떠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우리 시간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시간을 적용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깨어있으라가 되죠. 왜? 주님은 도적같이 오기 때문에. 도적이 이미 왔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가 가져야 될 시간관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겁니다. 이로써 우리 나름대로의 소박한 희망이랄지 모든 계획은 그 앞에서 늘 포기해야 되고, 무너져야 되고, 접어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하나님 이번 일만 잘 되면 교회 잘 다니겠습니다.” 이런 것.

그래서 시간관을 설명하면서 어떻게 설명해도 이해한 것 같지 않아요. ‘까지’라는 것이 연속성, 지속의 의미에 강조점이 있지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는 관계없다는 말을 분명히 사용했는데 내가 말을 표현하면서도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몰랐는데 이번에 노래 하나 떠서 굉장히 쉬운 줄 알았어요.

뭐냐 하면, 조회수가 7억이 넘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가사에 “갈 때까지 가보자” 하고 잠시 쉬잖아요. 갈 때까지 가보자는 것은 이후로는 나는 몰라도 돼. 그 말이거든요. 갈 때까지 가보자 하면 나이트 가서 춤추고 그 다음에 숙제하자. 이게 아니고 그 다음 계획은 없고, 지금 놀던 대로 머리 풀고 놀아보자는 것 아닙니까. 소위 현대인들이 사는 게 결국 강남스타일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방주가 나오죠. 방주를 왜 지었습니까? 방주라는 것이 노아 자기 식구들 가만히 하면 되는데 왜 떠벌이면서 산 위에서 짓습니까? 그걸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경고하심이죠. 소리가 막 들리는 거예요. 방주를 만든다는 것은 경고하심이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등불을 상 밑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했지요.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경고용 아닙니까. 오늘날 교인들 보면 누가 경고하는지 분간이 안 돼요. 오늘날 사람들은 그게 아니고 강남스타일입니다.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천국이고 뭐고 관심도 없어.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말라기 주제를 먼저 쓰겠습니다. 말라기의 주제는 재앙으로 발전된 사랑입니다. 뒤에는 사랑이라는 의미, 앞에는 재앙이라는 게 어울리지 않지요. 재앙을 벗어나게 해주는 게 사랑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말라기는 성전이 매개체가 아니고 심판, 성전 지었다고 까부는 그 유다나라의 멸망, 유다나라가 심판받는 그것이 바로 심판이 매개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참 어렵다. 벌 받는 게 매개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세상을 경고하는 경고 등이 되는 겁니다.

내가 너를 택함은 나로 세상의 등불이 되기 위해서. 그렇다면 등불 역할하는 게 뭡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로 나타나는 거예요. 예수님은 말라기를 거쳐서 오신 분입니다. 말라기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예수님 시대에 맞도록 다시 한 번 완성된 의미에서 온 몸으로 증거하시는 분이 세례요한이잖아요. 세례요한이 한 일이 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왔을 때 그들을 향하여 일갈을 날리죠. “독사의 자식들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굉장히 유명합니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고 왔는가?

지진이나 태풍이 불면 원래 사람보다 감각이 예민한 짐승들이 먼저 알고 비상한 특이한 움직임을 보인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말라기 입장에서 뭘 보느냐 하면, 재앙으로 발전된 사랑이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사실은 회개하려고 온 게 아니고 이단인지 아닌지 신학 점검하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멸망 받아야 될 대표자로서 바리새인들을 언급한 이유는 그 당시 유대사회, 유대 모든 집단은 상징화를 누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바로 서기관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죠. 그리고 서기관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종교적인 정신적인 지주라고 누가 옆에서 호응을 해줍니까? 바로 백성들이죠. 지도자를 나무란다고 해서 백성들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항상 같이 엮여져 갑니다.

샌님 같이 공부만 할 줄 알고 컴퓨터 연구만 하던 그 사람을 누가 대통령 나오라고 꼬드겼습니까? 본인이 아니죠. 기성 정치세력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 아닙니까. 대중들이잖아요. 정치라 하는 것은 세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세 힘, 세 소용돌이가 움직이는 겁니다. 세 소용돌이 중에서 두 개가 합치면 두 개의 소용돌이가 합치겠지요. 동양에서 말하는 음과 양이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다수를 하나로 모으려고 하느냐 하면, 그중에서 오디션으로 채택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 이런 상징적인 것이 숙지가 돼있고 관습화돼있어요. 우리 마음은 둘이 싸우면서 하나가 이기는 신화적인 요소가 항상 우리 속에 있습니다. 지난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미토스에서 로고스로, 신화에서 이성으로. 항상 종교가 그런 식으로 정립이 되는데.

지금 말라기에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사랑을 먼저 언급해요. 여러분도 아시듯이 말라기 1장에서 사랑할 때 그냥 “너 사랑한다.” 하면 되잖아요. 자식 둘이 있으면, “내가 너 사랑해.” 이러면 되는데 뭐라 하느냐 하면, “나, 너 믿고 내가 사랑한다.” 사랑은 반드시 미움과 조합을 이룹니다. 이 둘을 합쳐서 애증의 관계라 하죠. 사랑하면서도 밉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싶고. 버리려니 아깝고 차지하려하니 내 뜻대로 안 되고. 이게 부부관계 아닙니까.

서로 대비되는 미움을 끄집어낼 때는 반드시 특징이 뭐냐 하면, 천사가 등장해요. 인간은 빠집니다. 말라기라는 뜻이 나의 사자, 나의 천사란 뜻이에요. 아까 학개는 뜻이 나의 절기라 했지요. 성전이 매개라면 말라기에서는 성전이고 뭐가 인간의 손때 묻은 건 다 빠져. 뭐하려고? 심판을 내리기 위해서. 세상에 자기가 자기 머리 때리는 게 심판이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 안 들으면 벌 받습니다. 하니까 사람들 아이디어가 벌 받을 항목을 지가 만들어내요. 객관식 문제에 항목을 지가 만들어내요. 우리 시험 칠 때는 항목이 네 개였는데 지금 다섯 개 됐어요. 처음 알았어요. 옛날에는 수능은 네 개고 공무원시험은 다섯 개였잖아요. 지금은 수능도 다섯 개 되어서 연필 굴리는 확률을 낮추기 위해서

사람이 자기를 심판한다면 자기가 심판받을 것을 미리 다 예상해서 예상문제를 만들잖아요. 하나님께서 그걸 비껴가는 거예요. 인간의 끄집어낼 수 있는 걸 다 비껴가는 심판이 뭐냐? 내가 받을 심판을 대신 심판 받는 분을 내 앞에 내세워서 나로 하여금 입이 백 개라고 할 말이 없게 만들고 나는 그분의 가해자가 되고, 그 메시아는 나에게 피해자가 되는 이 방식을 주께서는 심판을 하시는 겁니다. “누구든지 아들이 없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기존 세계관도 마찬가지지만 교회 교인들이 예상하고 상상한 그것과 성경의 본 말씀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의 종교성에서 조작해낸 날조한 것들이에요. 하여튼 설교의 입에서 튀어나온 모든 것은 다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그런 것들만 알아서 피하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말라기에 오면 심판에 대해서 면제할 수 있는 일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없습니다. 그냥 당하세요. 그냥 당하면 돼요.

당하면 구원받아요. 어떻게? 미리 당하면 구원받아요. 참 구원받기 쉽죠. 심판을 미리 당하면 돼요. 그런데 우리가 예상한 심판은 그것은 심판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작한 거고. 진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해야 돼요. 그 심판은 유일하게 우리를 대신하신 분이 당한 심판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사도 바울은 그걸 십자가로 표현하면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 그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그 앞에서 너희들이 종교적인 아이디어와 테스트하듯이 생산해내느냐 말이죠. 십자가로 끝난 문제인데 십자가로 끝나서 네 앞에 있는 무슨 군소리가 필요 하느냐. 무슨 아트만이 어떻고, 자아가 어떻고. 숲으로 가서 은둔 생활하고 도피 생활하고. 그런 짓거리가 충분히 인간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기껏 끄집어낸 아이디어 속에 하나 아닙니까.

마치 이런 예를 들면 돼요. 하늘나라 잔치를 베풀었는데 “와서 뷔페 음식 드세요.” 하니까 무당벌레 튀김부터 시작해서 요리가 서른 가지 되는데 전부다 너무 혐오스러워서 입맛을 싹 가시게 만드는. 두 번째 음식은 세계에서 가장 매운 인도의 고추로 만든 음식, 먹으면 입에서 불이 나는. 세 번째 음식은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똥 냄새나는 통조림, 청어 삭힌 것, 이건 홍어 삭힌 것은 유도 아니랍니다. 세계에서 제일 더러운 그 통조림으로 이게 천국이라 할 때 누가 먹겠습니까? 아무도 안 먹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먹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아는 음식들 항목 속에서 먹는 거잖아요.

만나가 그런 거예요. 양식은 양식인데 애굽에서 전혀 맛보지 못한 걸 줄 때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인 예상 밖의 것이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알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생명이 된다.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실컷 배부른 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그 배부른 것을 달라고 왔을 때 주께서 주신 건 뭡니까? 내 살과 피를 마셔라 할 때 이게 드라큐라냐 하고 도망가죠. 항상 주께서는 우리를 예상 밖으로 이끌어갑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주께서 이끄시는 길은 우리가 예상한 길이 아니고 마치 눈 덮인 밭처럼 길이 없어요. 내가 가면 그게 길이에요. 주께서 이끄셔서 가면 그게 곧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예상하겠지요. 이러면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하면 어떻게 행동하고. 그것 다 무시하고 내가 미처 예상 못한 길로 이끌고 갈 때 그게 천국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은? 예상한 길로 가는 거예요. 그게 지옥 가는 특징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가니까. 예상한 길로 가게 되면 미리 시나리오를 짤 수가 있어요. “주여, 이렇게 하고 그 다음에 이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제 기도 소원 알지요?” 이런 식으로. 그런 기도는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 우리가 이방인이니까 기껏 이방인 기도밖에 안 되잖아요.

말라기에서 미움을 등장시킨다는 것은 천사가 하는 일이에요. 천사가 와서 미움과 사랑을 거론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뭘 포기해야 됩니까? 나의 내 사랑, 자아 중심적 사랑을 접어야 됩니다. 이제는 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매로 맞을 준비가 되어 얻어터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미움에 등장하는 나라가 있어요. 말라기 1장에 보면, 에서가 만든 에돔이고, 사랑으로 된 나라가 야곱이 만든 나라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말라기 1장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나오죠. 이게 특이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학개에는 유다가 등장합니다. 다윗언약에 속하기 때문에. 다윗언약의 나라는 이스라엘은 미움 받기 위해서 택했고, 남쪽 유다는 선택받기 위해서 택한 나라에요. 시편 92편인가 나오죠.

여기서 이스라엘이 등장한다는 것은 다윗언약보다도 다른 언약이 깊숙이 개입된 거예요. 그러면 다윗언약은 버리는가? 버리는 게 아니고 레위언약의 완성체로서의 다윗언약, 달리 이야기하면, 주어진 매개체가 성전이 아니기 때문에 매개체가 천사거든요. 다윗언약으로 오실 메시아는 모습은 다윗언약이지만 내용은 레위언약에 준해서 심판을 감행한다는 식으로 말라기 선지자는 우리에게 계시를 전하는 겁니다. 좀 복잡하죠.

2장에 보면 레위언약이 등장합니다. 1장부터 하고 합시다. 1장에서는 미움과 사랑, 사랑과 미움으로 대비하면서 이 사랑은 우리가 우리 사랑한 것은 탈락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는 해당이 안 돼요. 그렇다면 이 사랑이란 뭐냐 하면, 내가 에서를 미워할 때 그 미움을 보면서 비로소 그 배후에 등장하는 사랑, 그러니까 미움이 등장하지 아니하면 사랑은 체험하지도 못해요. 지독한 미움을 미움 되게 만드는 그 힘이 사랑의 힘이 되게 한다. 왜?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독하게 이방인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미움의 저주의 강도를 우리가 받아들일 때

받아들인 사람이 있어요. 18년 동안 귀신 들어서 허리 꼬부라진 어떤 여인이죠. 18년 동안이니까 나이 스무 살 때부터 허리 꼬부라졌으면 서른여덟 살까지 허리 꼬부라졌다고 예를 들 수 있거든요. 아무리 꽃다운 처녀라도 귀신 들려서 허리 꼬부라졌는데 누가 결혼하겠습니까? 사랑한 남자와 아름다운 가정의 행복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드라마 끝에 항상 나오는 그래서 사랑해서 사랑의 결실로 결혼해서 행복했다는 행복에서 이 여자는 완전히 끝나는 거예요. 지독한 미움이죠. 인생, 청춘을 다 날린 거예요. 그 당시 평균수명이 몇 살인데 난치병으로 고생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고, 어떤 청년은 날 때부터 소경.

결국 예수님께서 귀신을 좇아냈다는 것은 뭡니까? 귀신을 좇아내는 자체가 사랑이 아니고 귀신 들린 것부터 시작한 거예요. 귀신 들렸는데 귀신 좇아냈다는 것까지 포함해야 이게 사랑이 되는 겁니다. 또 우리 예상을 빗나갑니다. “하나님이여, 아픕니다. 낫게 해주세요.” 이게 아니라 “하나님이여, 저 같은 인간에게 신경 써서 병까지 들게 하시니 웬 사랑이?” 이건 완전히 미친 사람이죠. “나 같은 인간에게 무슨 특별한 병을 걸리게 하십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는데 어느 날 그 여자가 임신이 될 때 그 남자는 얼마나 심장이 상하겠습니까? 그 남자가 누구죠? 모른 척 하지 마세요. 아시잖아요. 요셉이잖아요. 여러분 사모님이 만약에 임신해서 왔다. 그 사모님이 또 이상한 소리한다. “너 빨리 과거 이야기해라. 나 만나기 전에 어느 남자의 얘를 임신했노?” 천사 가브리엘이 와서, 성령이 와서 여종아 두려워 말라 해서 낳았다면 누가 믿겠어요.

주님께서는 드릴로 구멍을 뚫는 거예요. 자아중심성, 인간은 신이 되고자 자아중심성이라고. 구멍 뚫는 게 사랑입니다. 에서를 미워함으로써 비로소 에돔에 대한 미움과 더불어 동반 작업으로 같은 공사를 하면서 이스라엘을 사랑합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위하여 유다나라는 레위언약에 의해서 혹독한 재앙을 당해야 됩니다. 그래서 재앙에서 발전된 사랑이라고 아까 주제로 이야기했습니다.

2장 3절에 봅시다. 얼굴에 무슨 팩을 하고 있죠. 얼굴에 뭘 바릅니까? 얼굴에 똥을 바르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제물 바친 것이, “하나님, 똥 받으세요.”와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께 받은 재물을 그걸 그대로 장소 이동시켜서 너희에게 주면 너희 얼굴에 똥칠이 된다면 결국은 너희들이 한 것은 하나님 얼굴에 똥칠을 한 거다. 레위언약, 모세언약에 의해서 보면 그래요.

2장 8절에 봅시다.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이렇게 했는데 여기는 레위언약으로 돼있어요. 레위언약이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레위지파의 대표적 직분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느헤미야 끝나기 전에 말라기가 같이 있었거든요. 느헤미야가 한 것이 성전을 제거했습니다. 성전을 제거함으로써 절기를 회복시켰어요. 절기를 회복시켰다면 실질적으로 지금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독립이 안 된 상태에요. 바사나라 있는데 바사나라는 바벨론 계통이죠. 가지에서 진액을 받고 잎사귀가 계속 나왔다고요.

바벨론 가지는 끝났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모든 세상 나라는 한꺼번에 망하는데 음녀 바벨론. 대한민국아 심판한다고 오는 게 아니고 “어이 바벨론, 너한테 심판한다.” 모든 나라는 미국이고 영국이고 중국이고 간에 전부다 바벨론화 돼야 돼요. 이게 아까 학개서에 나오는 전 세계를 성전화시키는 겁니다. 나중에는 레위언약화시키는 거예요. 이미 유다나라가 바벨론을 경유해서 왔기 때문에. 그게 제2의 출애굽 아닙니까.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애굽의 가정의 맏이들은 다 죽어야 하듯이 이스라엘 안 거치면 애굽나라 집안의 맏이들이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전염병이라도 어떻게 한꺼번에 다 죽습니까? 말이 안 되거든요. 그들이 죽는다는 것은 이스라엘만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죽듯이 오늘날 성도만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안 됐지만 세상나라는 안 됐지만 제발 좀 죽어줘야 돼요.

제사장의 지도하에 제사장 나라가 됩니다. 세상의 왕이 지도자가 된다면 왕 자체가 법이 돼요. 왕 자체가 법이 되는 이유는 사무엘상 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모든 나라가 왕의 소유가 되는 이유는, 왕이 법을 만드는 이유는, 신이 왕과 거래하기 때문에 그래요. 백성들과 거래하는 게 아닙니다. “똑바로 해. 그러면 다른 백성들에게 혜택 줄게. 네가 만약에 똑바로 못하면 네 나라 망한다.” 왜냐하면 나라 전체가 왕에게 속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가 다니엘에 보면 나와요.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지배자로 여호와 하나님과 일대일로 간섭을, 지적을 받는 대목이 나와요. “똑바로 해. 공의를 행해야 돼. 안 그러면 너는 짐승이 되는 거야.”

제사장 나라에서 법이라 하는 것은, 제사장 나라의 법을 완성하는 것이 왕이에요. 제사장 법은 제사장이 하는 제사를 위하여 여기에 전부다 달려오는 겁니다. 제사장은 농사짓는 사람도 아니고 장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제사장은 뭐로 밥 먹고 삽니까? 십일조 아닙니까. 그래서 말라기 3장에 십일조가 강조돼있는 겁니다. 십일조를 안 하니까 제사장들이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에 전적으로 매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사장이 제사 지내면서 성의 없이 제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교회가 십일조를 꼬박꼬박 낸다면 그 목사는 십일조 낸 명단을 입수해서 그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여나 십일조 낸 사람이 삐지면 목돈이 날아가거든요.

여기서 구약시대의 헌금이 어디서 마련되는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헌금이란 잉여 생산물이에요. 옛날에 채집시대에서 농경시대가 되거든요. 채집을 하거나 농사지을 때는 반드시 내년을 위해 남겨둔 최소한의 곡식이나 씨감자, 일종의 투자니까 그것 남겨두고 그 다음에 식솔들, 자기 집안 식구가 우선이거든요.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마련해줄 때 아버지의 령이 섭니다. 마지막 어려운 거니까 참으세요.

제가 분명히 정치는 상징이라 했지요. 상징은 한 가정에서 아버지가 만듭니다. 아버지가 상징을 강요하려면 기본적으로 자식들과 아내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해줄 때 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가 제대로 만족할 정도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상징이 깨지고, 아버지의 권한이 깨져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자식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가정의 윤리와 도덕이 깨지는 거예요.

오늘날 십대 청소년들이 거리에 돌아다니는 이유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스마트폰 등 좋은 것들을 가정에서 아버지가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권한에 대해서 의심을 할 수밖에 없어요. 상담을 하든지 자기의 속내를 부모와 대화할 수 없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제 때에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령이 서지 않는 거예요. 가정의 령이 서지 않으면 길가에서 중학생들이 담배 피울 때 어른들이 이야기하면 어른들한테 달려듭니다. 아버지부터 령이 서지 않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말을 안 들어요.

어떤 십대 청소년이 미화원 잡아 죽이려고 창고에 숨은 줄 알고 불 질러서 의류 1억원치 다 타버렸잖아요. 그 얘는 1억원 물어주게 생겼어요. 생각해보세요. 아빠, 엄마는 부모의 영을 세우기 위해서 맞벌이한다고 돈 벌러 나갔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식들이 만족할 만한 아버지, 엄마는 존경할 만해. 존경한다는 말이 뭔 뜻입니까? 지가 학교에 가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때 왕따 당하지 않을 수준의 가진 걸 내놔야 돼요. “우리 집의 정수기는 얼음 나온다.” 이럴 때 여러 명이, “나도 나온다, 나도 나온다.” 자기 집은 얼음이 안 나오는 기라. 가정 몰락하기 간단하죠.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오후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세상에 매개는 오직 돈뿐이라는 것. 그래서 집안에 원수가 되는 건 하나밖에 없어요. 돈이 없으면 원수가 되게 돼있어요. 그런데 신약시대에 오면 돈이 매개가 아니고 복음이 매개된다는 말은, “저 같은 인간을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자기 마음을 비워야 돼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되죠. 성령이 와야 될 문제지요. 성령이 안 오면 이제는 더 이상 교회 안 다니겠습니다. 벌써 10대를 지나면 더 이상 엄마 다니는 종교, 기독교 안 믿겠다고 선언한다는 거예요. 그게 안타까워서 의존교회에 들어가 보세요. 윤연숙 성도님이 자기 가정의 것을 너무 충격 받아서 글 써놓은 게 있어요. 세상에 내 자식이 교회를 안 다닌답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하는 식으로.

십일조를 안 한다는 말은 제사장의 권위, 영, 하나의 국가의 근간, 하나님이 친히 만드는, 에돔은 미움으로 만들고 이스라엘은 사랑으로 만든다. 그 사랑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하는 걸 지적하는데 지적하는 근거가 레위언약이라. 제발 제사장만 쳐다보고 살아라. 제사장 제사 꺼지면 너희들 하늘에서 불로서 벌 받는다.

이게 말라기 4장 1절에 나오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아까 탱크로리라 했죠)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이게 지금 느헤미야 있던 그 시대에 말라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제사 드리면 뭐하느냐 다 형식 돼버렸는데. 세월가고 시간가면 다 형식 되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볼까, 그냥 내가 하는 행세가 일단 옳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거예요. 날마다 회개가 안 돼요. 어제 잘 믿었으니까 오늘까지 붙들어보겠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주의 말씀을 받지 않아요. 일요일에 교회에서 설교 듣고 일주일 때우는 겁니다. 벽에 붙은 껌딱지 같아.

헌금이라 하는 것은 잉여생산물이 되어서 옛날 종교라 하는 것은, 가인도 그런 짓을 했는데 일단 가족끼리 해서 아버지의 령이 서고 아버지가 카리스마로 그 가정을 다스릴 자신이 있을 때 그 여분의 것으로 신에게 바칩니다. 요새가 경기가, 경기가 아니죠. 완전히 바닥에 바닥으로 내려앉지요. 그러면 각 교회마다 뭐가 문제입니까? 헌금이 안 나와요. 헌금이 나오게 하는 방법은 절기를 해서 봉투 돌리는 방법밖에 없어요. 추수감사절 이제 곧 크리스마스. 봉투 돌려도 더 이상 헌금이 안 나온다는 말은 목사 입장에서 돈이 안 나와서 생계가 어렵다는 어지간한 목사는 그 정도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목사의 령, 목사의 자존심을 교인들이 건드리고 있다. 내 말을 물 같이 봤다는 것에서 오는 기분 나쁨, 이게 목사가 밥 먹고 사는 것 이상으로 상징적인 존재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안 먹힌다는 거예요. 이게 화가 나는 거예요. “내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헌금 안 하는 겁니까?” 원래 헌금은 잉여생산물이에요. 쓰고 남는 걸 헌금하는 거예요. 왜? 이미 자기 가정에서 아버지의 령이 서고 난 뒤에 아버지가 대표되는 이 자체를 신께서 키워 달라는 거예요. 만약에 신이 아버지의 령을 거기서 그냥은 오면 안 돼요. 반드시 내 가정은 아버지의 령이야. 아버지의 자존심이고. 안 그러면 아버지가 아니니까. 그냥 동거, 하숙생이죠. 큰일 나는 거죠.

코미디에 이런 게 있어요. 딸이, “엄마, 냉장고 오랜 된 음식이 너무 많아. 갖다 버려.” “안 돼. 먹을 수 있어.” “엄마, 채소가 벌써 썩었는데.” “놔둬. 나중에 아버지 주게.” 그러니까 자식들이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를 필요로 해요. 하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아버지 상, 자기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니까. 만약에 자기 기대치에 예상 밖에 축복을 준다면, 어떤 선물을 준다면, 목걸이를 사준다면 그때는 남편이고, 아버지라 할 용의가 언제든지 만반의 준비가 돼있습니다.

아무리 못된 여편네라고 정동진에 가면 해 보고 비는 것은 그저 우리 남편 건강하고 사업 잘 되길 빌어요. 남편을 미워하는 게 아니고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하는 거예요. 사실은 거짓말입니다. 남편 사랑하는 게 아니고 자기 사랑이죠. 자기중심성이에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다나라는 망하고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생활의 어려움 가운데서 십일조가 안 되는 상황에서 “네가 성심성의껏 이런 어려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마음을 내놓을 수 있느냐? 못 내놓는다면 다윗언약에 레위언약을 위반한 죄로 너희들은 불타 버릴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지막에 어떤 운을 남깁니다.

그때가 되게 되면 구원받을 사람은 누가 오는데 누가 오느냐? 엘리야가 올 것이다.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매개죠. 어떤 매개입니까? 성전이 매개가 아니고 천사가 매개가 아니고 어떤 분이 엘리야가 이쪽 인간이 옴으로써 이쪽 인간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오셔서 연결시킵니다. 연결시키는 언어가 독사의 새끼들, 그리고 도끼 이야기.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니까 이것은 성경은 아무리 봐도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한 하늘나라는 의도적으로 벗겨 내버립니다. 그게 바로 종교심입니다. 종교욕구, 구원욕구 그저 내 중심성에서 나온 종교적인 하나의 형태에 불과한 것이지 진짜 성경은 기다려라. 그 다음에 오신다. 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뭡니까? 기다렸었다. 그 다음에 오신 자가 아니고 오셨다. 어떻게 오십니까? 미리 심판받는 모습으로. 누굴 대신해서? 세상 죄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미리 저주받은 분으로 오실 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오직 십자가가 천국으로 통하는 입구가 되는 겁니다. 다른 능력은 없나니 십자가가 우리 구원의 능력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학개와 말라기를 보았습니다. 우리의 껍질이 날마다 벗겨지고 우리의 속살은 나 중심적으로 잉여생산물만 쳐다보고 사는 세상이 어떻게 불로 심판되는지 경고하심도 듣지도 않고 나만 잘 되고 갈 때까지 가보는 식의 이방적인 것, 이런 인간도 대신 저주받아서 용서해주신 그것만이 사랑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21113b 부산강의.hwp (52.0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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