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3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0-학개
20121113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0-학개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1113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0-학개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구약 1310페이지의 학개와 말라기 두 개를 해봅시다. 말라기 같으면 염두에 둘 것은 말라기가 구약 예언의 마지막이 되기 때문에 말라기 그 다음에는 예언자가 없습니다. 구약에 예언자가 없다는 말이 좀 신기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구약에 신앙인이 없다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신앙인이 없는 게 아니고 신앙인이 있어도 예언자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언자는 뭐고, 신앙인은 뭐냐? 신앙인은 신앙에 도가 터서 자기가 하는 말은 전부다 하나님 계시로 간주해줄 수 있는 문제지 않습니까? 우리의 상식 같으면. 예언자와 신앙인의 차이점이 뭐냐? 예언자라 하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앞서 보낸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 그 모든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주신 것이 예언자에요. 그걸 그 당시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에 첨가되는 말을 남기는 사람, 행동을 남기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그러면 신앙인은 뭐냐? 자기가 계시를 만들어낼 수 없음을 아는 사람, 중요하죠. 내가 하나님의 계시를 임의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사람들. 그러면 거기서 반드시 나오는 게 나의 행동과 말은 왜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는가를 알아야 되겠지요. 왜 내 행동과 말은 계시가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계시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이쪽에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고, 우리 같으면 어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계시를 받으면, “너만 계시 받았나? 나도 계시 한 번 해봐?” 이렇게 나올 수도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계시를 받았으면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대학 나오고 그러면, “나도 계시 만들래.”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그 계시 앞에 나는 죄인임이 맞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참 신기한 것 아닙니까. 예언자라는 게 특별한 인간이 아니잖아요. 아모스 같은 경우에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그저 뽕나무 키우고 목동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는데 사람들 보기에는 특별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특별하지 않은 것을 택하사 우리로 죄인 만드는 중심인물로 세워버리는 겁니다. 사사기에 보면 그런 경우가 많이 나오는데 사사기의 사사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고 돼있지요. 사울 왕의 입장에서 다윗은 그냥 자기의 후계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을 때 사울은 악신이 임해줘야 돼요. 그것도 언약이란 줄기 가운데서 그렇게 돼야 됩니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에 의해서 재편성, ‘편성’이라는 말을 제가 쓸게요. 프로그램 편성한다, 피디들이 프로그램 할 때 주변에 많은 피디들이, “우리 프로그램 넣어주세요. 정규방송에 넣어주세요.” 하게 되면, “가만있어봐. 나는 편성국장이니까 내가 편성합니다. 일곱 시에 이것 넣고, 아홉 시에 이거 넣고.” 딱딱 정리 정돈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계시 받은 자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와 그 앞에서 신이 임한 걸 통해서 볼 때, 신이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가 담겨있으니까. 구약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그 사람이 장기와 지식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장차오실 메시아가 와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잖아요. 보고 기뻐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 받은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물론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가 어떤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될 때 그 계시는 효과를 보는 겁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느낄 때. 그 효과 보는 그 집단이 이스라엘 속에 새롭게 연기되어 나오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주 우리교회에 한 이십 명 모였다. 그걸 우리교회라고 칭했다고 합시다. 다음 주일이 됐는데 그게 스무 명이 될지, 열 명이 될지, 한 명도 없을지 그거는 누구 손에 달린 겁니까? 그건 주님 손에 달린 겁니다.
초장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해봅시다. 여러분들이 항상 염두에 둘 것은, 이스라엘은 유일한 신이다. 유일한 신이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신은 신이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는 신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신이 만들어낸다는 걸 염두에 둘 때 유일신이란 너는 신이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신이 유일신이에요.
이방종교에서는 이방신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이방’을 떼어버리자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이방민족 입장에 서면 누가 자기 신은 엉터리입니다, 우상입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민족이 어디 있겠어요. 융통성을 부려서 대자대비한 마음을 포용력을 갖고, “당신들 신은 당신들 신이고, 우리 신은 우리 신입니다. 각자 신을 믿읍시다.” 이렇게 나오지 우리 신만 신이고 너희들 신은 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초월적인 권한을 인간들끼리 머리 맞대고 백날 해봐야 그것은 결론이 안 나지요.
같은 교인들끼리 한 이십 명 모여서 내가 믿는 예수는 진짜 예수고, 네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장로한테 없을뿐더러 목사한테도 없어요. 자기가 그렇게 주장해도 동의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독선적이라는 핀잔만 들을 뿐이지. 독선적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냥 신 같으면 신만 연구하면 되는데 이스라엘 하나님이 무슨 신이라 했습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유일신이기 때문에 필히 다른 민족의 신이 어떤 신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걸 알면 알수록 신기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평소에 내가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이게 믿음이라고 우겼던 모든 것이 놀랍게도 명칭과 상관없이 똑같이 이방민족들도 지금도 그런 걸 창안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진짜 중요한 걸 깨달았어. 이거는 성령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다.”라고 자부했는데 심지어 성령이란 아이템까지 전부다 이방종교에 다 들어있더란 말이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것은 이미 성철 스님이 이야기한 거잖아요. 벌써. 돈오돈수라고. 동국대 불교학자들과 논쟁하면서 돈오점수가 아니고 돈오돈수다. 너희는 의상대사의 말을 따르는데 믿고 거룩하게 되는 것은 점진적으로 된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그렇게 안 한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로마서 1장 17절 말씀처럼. 깨달음에서 깨달음으로 계속하는 것이지 한 번 깨달았으니까 이제 제대로 된 부처 돼볼까 하는 아이디어는 잘못된 아이디어라고 이미 성철 스님께서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구약에 보면 무슨 신이다? 그게 바로 이방신의 일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다는 것이 이방신의 굴레를 감히 뛰어넘을 수 있겠어요? 곤란해지겠지요. 그래서 제가 단도리하듯이 한꺼번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방신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것을 끄집어내요. 그걸 통합하면 그게 바로 신이 되는 겁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던 보편적인 속성. 무식한 사람은 자기가 뭘 갖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유식한 사람, 도를 닦은 사람.
특히 힌두교 같은 경우에는 도를 닦을 때는 숲속으로 가요. 숲속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그 숲속에도 복잡해요. 하나는 은자가 있고, 하나는 가출한 사람. 출가라 하죠. 불교에서 출가하잖아요. 힌두교에서도 출가인데 출가한 사람이 있고 은둔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데 힌두교에서 그 사람들이 마을 떠나서 주변에 있는 숲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자연의 신을 다루는 방법이 제사를 지내서 다루는 방법을 사용한 겁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벌써 제사 드렸잖아요. 아벨도 제사 드렸지만.
제사를 드리게 되면 신께서 제사를 받으시고 거기에 대해서 합당한 처우나 보상을 하게 되면, 한 해 농사는 괜찮게 이뤄진다. 왜 그런 아이디어가 있느냐 하면, 창세기 8장에 보면, 봄여름가을겨울, 하나님께서 노아홍수 이후에 질서 잡힌다는 무지개 혜택을 입잖아요. 이것은 누구나 다 일괄적으로 주는 은혜가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봄여름가을겨울 자연 질서가 규칙적이면 거기서 아이디어를 발휘해서 씨를 언제 뿌려야 되고, 추수는 언제 해야 되고, 잡초는 언제 뽑아야 되고 이것이 안에 있는 법칙이 잡히게 돼요. 그러면 그 법칙을 자자손손 물려주면 되는데 자연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지 않습니까. 어떤 때 보면, 분명히 씨를 뿌릴 때 날씨가 춥지 않아야 되는데 씨 뿌리고 난 뒤에 갑자기 겨울보다 추운 날씨가 오면 당황스럽잖아요.
이 세상에 질서가 있다는 것은 신이 있다는 말이고 신이 질서를 위반한다는 것은 뭔가 제물을 바라고 하는 짓이다. 분명히 우리 공동체 내에 누가 반칙을 했다든지, 신을 섬길 때 소홀히 했다든지, 신이 노할만한 범죄를 저질렀다든지, 그렇게 될 경우에는 그 공동체에서 흠 없는 아주 깨끗한 제물을 바쳐서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일종에 회개죠. “우리가 늘 하다보니까 안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신호를 보내셨으니까 신호에 보답해서 이제부터는 정신 차려서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하고 성대한 제사를 드립니다.
그 제사를 드릴 때 제사에도 법칙이 있을 것 아닙니까. 비가 안 올 때는 어떤 식으로 절차를 어떻게 해야 되고, 비가 많이 왔을 때는 어떤 절차를 해야 되고, 전염병이 퍼졌을 때는 어떤 절차를 해야 효과가 있고, 또 갑자기 병충해가 있을 때는 어떤 식으로 제사해야 되느냐 하는 그것이 효과 본 하나의 정보가 제사장들, 무당, 왕들에 의해서 자자손손 전달됩니다. 거기서 나온 게 바로 예의범절입니다.
특히 중국 같은 경우에 예의범절이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자연이란 신이 원하는 것을 위반해서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너 하나 벌 받는 게 문제가 아니고 너 때문에 신께서 노함으로 피해를 주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이란 이야기를 다 끊어버리면 남는 게 뭘까요? 예의범절이란 그 집단과 그 사회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 그 규칙,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에티켓, 예의범절이 되겠습니다.
옛날에는 예의범절이 종교화 돼있지요. 그래서 예의범절은 반드시 부모가 자식한테 가르쳐야 되는데 만약에 조실부모했다면 그건 호로 자식이 되겠지요. 그런 얘들은 예의범절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예의범절이 하루아침에 다 못하거든요. 규칙이야 외우면 되겠지만 실습까지 들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거든요. 그런 얘들은 대대로 부모 잘못 만나서 그 사회에서 제일 밑바닥 직업, 제일 험한 직업, 3D 직종에 종사하고 그것이 노예로서 그 자리가 확정돼야 됩니다.
그리고 확정될 때 그렇게 노예생활하고 힘든 생활하는 이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의 순리로 수용해야 돼요. 뭐냐 하면, 내가 짐승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또는 더 나아가서 우리 집안이 뭔가 신이 노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 벌이 자자손손 대대로 이어져서 내가 힘든 일을 하고 백정이라든지 무시당하는 직업을 갖는 것도 이것도 운명이고, 신이 내리는 팔자다. 이걸 고치면 안 된다. 상놈 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 운명에 순응을 할 때 그 공동체는 비로소 질서가 잡히는 겁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교회 나오면서 사람들이 은근히 표현은 안했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조직신학 같은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제가 꼭 구체적으로 예를 안 들어서 다 아시겠지요. 평소에 한 주 동안 뭔가 잘못했을 때,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 일요일에 교회 가서 뭐라고 기도합니까? “내가 안일하게 신을 너무 얕봤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잘하겠습니다.” 회개하고 다음 주에 내가 손해 본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회복이 되고. 그리고 그냥 기도 말고 간절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사 내 노선을 정상적인 노선으로 바꿔주는데 그 정상적인 노선이란, 신의 축복을 받게 되면 그 사회에서 인정받고 높음 받는데 유지가 되고 만약에 신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추락하게 되죠.
이러한 제의를 통해서 신을 달래던 시절이 은둔과 출가자가 나오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종교라고 했지요. 제가 이야기하면 학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학개란 모든 인간을 여호와 유일신화 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그 당시에 언약, 계약을 하거든요. 학개는 다윗언약 시대기 때문에 계약이 있단 말이에요. 다윗계약이 성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내리는 결론은 뭐냐? 여호와의 언약과 성전을 결합해서 온 세상의 성전화. 모든 세상의 마당을 여호와가 친히 개입하는 성전으로 전환시켜버리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전환을 하면서 마주치고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키는 대목이 있어요. 바로 지금 내가 계속 이야기하려는 것, 이방종교의 제단 의식과 제도와 마주치게 되는 거예요. 다윗언약의 성전화로 유다 백성들이 넘어가면 좋겠는데 인간들은 타락한 본성이 이방종교를 좋아하게 돼있어요. 이게 선악과 따먹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처음에 하나님 언약 앞에서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 했잖아요.
그 죄인들의 죄의 경향에 따라서 이것이 다윗언약의 성전 쪽으로 돌아서는 게 아니라 이방종교의 제사화, 이방종교의 종교화로 돌아서는 겁니다. 그렇게 돌아섰다는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이 뭐냐 하면, 지금 그걸 이야기하려고 할게요. 사회에서 계급이 있을 때 항상 계급은 돈으로 측정하는 겁니다. 돈이란 것은,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어서 만족하게 하는 수단이 돈이잖아요. 기본적으로 제사로 뭉쳐졌습니다. 이건 다시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사회는 예의범절이라는 것, 그게 종교화돼있어요. 제가 이런 말하는 취지를 알아야 돼요. 지금 교회도 안 다니고, 절에도 안 다니는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짐승입니까? 그 사람들도 노인네 넘어지면, “일어서세요.” 하죠.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예의범절인 거예요. 노인네가 엎어졌다. 길 가다가 차를 세우고 노인네 일으켜 세우고 다시 운전해 갈 때 마음에 뿌듯한 생각이 들겠지요.
그 뿌듯한 생각이 뭐로 이어집니까? 앞으로 내가 바이어 만나서 거래하거나 가정의 화목에 보탬이 됐으면 됐지 손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어떤 확신 같은 것, 어떤 믿음 같은 게 있단 말이죠. 교회도 안 가고, 절에도 안 가요. 그냥 보통사람인데 노인네 하나 도와주면, 어려운 사람 도와주면 분명히 신께서 나한테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른다니까요. 누가 이 기분에서 떠날 수 있고 벗어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가? 교회 오는 교인들 마음속에 이미 이게 들어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언약적 설교가 성립된다 이 말이에요.
강의 처음부터 해볼까요? 예언자가 왔다는 것은 예언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자기가 죄인을 느끼는 거예요. 죄인을 느끼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빼도 박도 못하고 벗어날 수 없는 신적인 바탕 자체가 새로운 계시 앞에서 죄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자인해야 된단 말이죠. 그러면 기존에 나를 나답게 움직였던 그것은 어디서 찾습니까? 이스라엘 밖, 유다나라 밖에 이방나라에서 찾으면 되는 거예요. 일부러 찾을 필요도 없어요. 그쪽에서 계속 넘어옵니다.
현재 학개 같은 경우에는 다리오 왕 이년이거든요. 536년에 와서 성전 지으려고 하다가 산발랏이란 총독이 시비 거는 거예요. 이쪽엔 스룹바벨 총독이 있는데. “성전 지어서 종교적 힘을 발휘해서 바사나라에 대항하려고.” 그게 아닌데. 그래서 14년 간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다가 520년에 학개가 나섰고 4년 만에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는 판이란 말이죠. 536년은 스룹바벨이고, 학개는 520년이고.
70년 만에 온다는 계산이 586년에서 70년 빼면 516년 돼야 되는데 이걸 606년에서 70년 빼면 딱 맞아 들어가요. 그래서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말이, 586년인지 606년인지 지 마음대로 하는데 70이레로 그 자체가 의미 없게 돼버렸지요. 70년을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주께서 70년이 아니고 70이레란 말이죠.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 학개에서 성전을 지으라고 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생각하는 성전개념은 벌써 이방화된 거예요. 지금 제가 이방화됐다는 게 무슨 뜻인지 30분 내내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 그 설명을 이어가 볼게요.
외국에 수입물자가 탐이 나면 돈을 벌어야 되거든요. 옛날엔 농경시대잖아요. 구약에 나오는 모든 민족들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살펴봐야 돼요. 옛날에 돈을 벌려면 지금도 그렇지만 투자를 해야 돼요. 위험 부담이 있어요. 투자를 어디에 했느냐 하면, 그리스에서 올리브와 포도나무는 외래종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다른 나라의 식물들은 외래종이 되겠지요. 아니면 가축을 하든지. 어차피 10년을 잡아야 돼요. 10년 동안 전쟁도 없어야 되고 10년 동안 계절이 농사짓기에 편하면 나중에 목돈 쥐는 거고, 10년 잡아서 투자했는데 실패하게 되면 그 귀족은 몰락된 귀족이 되고 그 집안은 몽땅 빚을 졌으니까.
옛날에도 고리업체가 있었거든요. 이자도 엄청나단 말이죠. 그것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배로 무역할 때 보험도 있었으니까. 보험 들어놓고 상인들이 무역 잘하면 보험도 사는데 만약에 망해버리면 보험투자하다 보험금 다 날리고 완전히 거지꼴 되고. 하여튼 옛날이든 지금이든 한 번 귀족이 계속 이어가는 법은 잘 없고 항상 귀족을 유지하려면 있는 재산을 쥐고 있는 게 아니고 계속 투자와 투자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업을 벌여야 돼요.
사업을 벌이면서 발생된 게 뭐냐? 돈이란 어제나 오늘이나 내가 돈 번다는 것은 라이벌 하나 거지된 거예요. 그 집안 노예로 다 팔려버린 거고. 내가 죽던지, 네가 죽던지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됩니다. 사회라는 게. 경쟁도 중소기업에서 대기업 되면 끝나는 게 아니고 대기업 입장에서 경쟁을 또 해야 돼요. 중소기업에서 갑자기 부자 돼서 대기업 반열에 들어가도 대기업 텃밭에서 살아남아야 돼요. 대기업은 외국의 대기업과 또 싸워야 돼요. 사채놀이 하다가 제2금융권에 들어가도 제2금융에서 제1금융과 또 싸워야 되고. 거기서 망하면 솔로몬, 토마토 짝 나는 거예요.
계속해서 부자란 위치를 유지하려면 투자와 투기를 계속해야 돼요. 거기서 양산되는 것은 계급화입니다. 노예와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 이런 선지자들이 늘 지적하는 게 뭡니까? 왜 이렇게 하나님 계시는 나라에서 노예와 가난한 사람이 많으냐고 지적하죠. 그리고 또 뭘 지적합니까? 노예와 가난한 자가 많은 이유를 추적해 들어가지요. 그 원인제공자가 누구였습니까? 부자와 권력자죠. 성경에 나오잖아요. 우리는 그런 걸 다 제치고 하나님만 믿자고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예의범절 챙기는 것밖에 안 돼요.
그래서 이러한 사회, 제사중심, 어떤 형식적인 제사로서 기존의 사회 계급을 고착화시키려는 이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마을을 떠나서 숲으로 간 겁니다. 숲으로 갈 때 두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은둔자와 출가자.
제사라 할 때 그 당시 힌두교에서 불을 피웁니다. 불을 받는 것은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제단 쌓고 대결을 할 때 저쪽 제단에는 불이 안 붙고, 이쪽은 제단에 물을 양동이로 부어도 불이 붙었잖아요. 불이 나오면 신이 응답한 거고, 불이 없으면 신이 없는 거고. 이게 8세기, 9세기경이에요.
그런데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거기서 더 발전합니다.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있죠. 엘리야가 그렇게 하고 난 뒤에 지진이 나면 하나님이고, 바위가 터지면 그것도 하나님이 손댄 거고, 바람이 폭풍이 불면 하나님이 손댄 거라고 보던 그 시절에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라. 그럼 어떻게 되죠? 세미한 소리.
그런데 놀랍게도 힌두교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결국 불을 태워봤자 그래서 종교로서 질서 잡아봐야 나오는 결과는 빈부의 격차밖에 더 있습니까. 그리고 계급이 고착화되고. 노는 놈들은 잘 나가고 못 사는 놈들은 점점 더 저쪽은 피라미드니까. 사각형 같으면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이 면적이 같잖아요. 피라미드는 1%, 여기는 5%, 나머지 85%는 가난하더라.
의외로 사회가 어느 게 더 안정돼요? 의외로 사각형이 되면 사회가 안정돼있습니다. 삼각형 되면 어른이 너무 많아. 세 명은 너무 헷갈리잖아요. 일대일로 붙어야 되지 세 명은 헷갈린단 말이요. 항상 모든 일이 다수에서 하나, 일종의 오디션이죠. 8강, 4강, 결승전. 모든 걸 탈락시키는 사회. 그 사회에 대해서 진짜 불로서 형식적인 제사, 여기에 신물이 났고 진저리내는 사람들이 내면의 불을 지피자고 나오면서 세상의 모든 걸 끊어버리고 숲으로 가는 겁니다. 거기는 사람의 소리가 안 들립니다. 사람의 소리가 안 들리면 사람이 아니죠. 사람의 소리가 안 들리면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미세한 소리, 오묘한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나온 게 모든 소리의 근원을 힌두교에서 발견했습니다. OM이고, 일본의 옴 진리교.
이 옴은 바로 왕건이 고려 창건할 때 견훤이 이걸 주장했어요. 모든 모음을 하나로 모으면 옴이 되는 겁니다. 옴만 반복하면 관절염, 류마티스, 고혈압, 소화불량, 부인병, 치통까지 옴을 되풀이하면 치료가 돼요. 그게 발전한 게 부산역에 가면 엿가락 두드리는 아줌마들 있지요. 천리교. 엿가락 같은 그 소리를 듣게 되면 몸의 기가 우주의 생명이 활성화 되어 경락만 찾아다니면서 고장 난 곳을 알아서 깨끗하게 치료를 해준데요. 믿거나 말거나 해보세요. 저주파가 우리의 몸 사이를 옴~. 저주파를 유발시키는 하나의 계시적인 발성, 옴~. 그것이 발견되는 거예요. 세미한 음성.
결국은 이것은 이 사회에서 인간의 몸이 유지된다는 것은 뭔가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노동이란 고통을 따지지 않습니까. 신앙이나 종교나 따지고 보면 노동의 괴로움이 오는 거고, 노동을 왜 하는 거예요? 뭔가 몸이라는 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차라리 죽으면 노동 안 할 것 아닙니까. 안 죽고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치울 수도 없고 어떻게 해결책이 없으니까 노동을 해서 밥 먹여줘야 되는 거예요. 노동을 하려니까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몸은 대자연에서 나왔으니까 차라리 이 몸을 대자연이 자연스럽게 하는 방법에 내 몸을 맡기겠다는 거예요. 맡기는데 현재 이 몸은 세상에 있는 종교 너무 억압돼있으니까 이걸 옷을 벗듯이 벗어버리면 이 몸 자체가 그대로 자연과 자연적으로 교류가 어떤 보이지 않는 음성, 옴~ 하는 것처럼 이렇게 뭔가 교류가 되게 되면 이 몸을 자연에 환원시킬 수가 있고 자연에 그냥 흡수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방종교에서 자식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요. “말로는 안 되겠다. 실제로 보여줄게.” 밤에 소금 덩어리를 물에 넣게 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이 소금물을 먹어보아라. 맛이 어떠냐?” “짭니다.” “짜지.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물밖에 없는데 소금은 어디 갔지?” “소금은 이 안에 다 녹아있습니다.” “그게 바로 아트만이다. 그게 세상의 생명이니라. 우리는 그동안 신을 외부에서 찾았는데 신은 외부에서 찾을 문제가 아니고 내 몸, 내부에 신이 있다는 걸 몰랐던가.” “내가 신이군요.” “그래, 네가 신이야.” 선악과 따먹은 티가 팍팍 나잖아요.
결국 종교란 이 땅에서 살기 힘든 것들에 마약, 도피처처럼 외부로서 튀어나가는 거예요. 튀어나가는 그것이 하나의 방편이 되어서 특수한 도 닦는 종교집단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교회 처음 나올 때는 기복신앙 아니라 하지만 누구나 기복신앙이에요. 어려워서 나왔고, 힘들어서 나왔고. “하나님, 이것만 도와주시면 예수 잘 믿겠습니다.” 그 다음부터 아무 문제가 없고 사는 게 편하고 이런 가운데서 정기적으로 교회 다니면서 뭔가 더 깊은 것, 더 오묘한 것, 더 신비로운 걸 찾다보면 결국은 이 코스대로 어느새 가고 있다 이 말이죠. 가고 있으면서 “복음의 깊은 맛을 봤습니다.”라고 할 때 그게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그게 과연 복음의 깊은 것인지 이방종교인지 분간해야죠.
제가 결론부터 내리겠습니다. 이 모든 종교 또는 학개 당시의 유다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자아 중심성. 학개에 나오죠. 하나님의 성전은 팽개치고 어떻게 자기 집구석만 번듯하게 꾸미느냐? 그것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는 게 아닙니다.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들에게 하는 거예요. 고급빌라단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선지자들은 전부 다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된 원인이 학개에 보면, 바로 이방여자를 만났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그들이 이방여자와 결혼했을까요? 학개 선지자의 지적에 의하면. 여자도 골라잡을 자격이 남자한테 있다고 본 겁니다. 이방화 되면.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못 생긴 것들끼리 뽑으라고 하면 연애대상은 되지만 결혼대상은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세련되고, 잘사는 사람들은 세련돼요 돼요. 그냥 예쁜 것 말고 세련되면서 예쁜 것, 예쁜 것도 수준이 있는 거예요. 천박하게 예쁜 것 말고. 진짜 예쁜, 세련되게 예쁜 것을 추구하게 되면 유다나라 내부에서 찾을 이유가 없지요.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겁니다. 돌릴 때는 막대한 혼인자금이 거기에 투입되겠죠.
그런 것이 왔을 때 못 사는 사람들이 팔자라 하고 있겠습니까? 현실은 그렇지만 항상 뭘 추구하겠어요? 나도 언제 자식 교육시켜서 1%에 내 자식을 던져 넣을 수 있을지. 내가 고생하더라도 내 자식만이라도 이런 상류층에 진입시키고 싶어 하는 충동, 우리 얘는 혹시 천재일까 싶어서 천재는 아니더라도 특수한 기술이 있으면 그걸 개발해서 그 사회에 높은데 들이밀려고 얼마나 애를 쓰겠습니까. 그러다보니까 유다나라 자체가 이방화 돼버린 거예요. 그것은 전부다 이방민족, 옆 나라에서 이방여자가 다 하니까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세련됐습니까?” 자연적으로 그쪽 나라의 문화를 수입할 수밖에 없거든요.
특히 문화란 하나의 물질, 상품으로 오면 다행인데 문화는 그냥 상품 정도가 아니고 상징으로 오는 겁니다. 상품은 쓰다가 버리면 그만이어요. 이태리 오백만 원짜리 가방과 국산 오만 원짜리 가방이 사용하는데 있어서 백 배 차이가 납니까? 아니잖아요. 진짜 실용적인 차이는 얼마 안 되고 상징이죠. 상징이 사람 잡는다니까. 상징은 위신과 관련돼 있잖아요. 체면과 관련돼 있잖아요. 위신과 체면은 인간의 정신적인 행복과 삶의 만족도와 관련돼있는 겁니다. 미제 초콜릿에서 초콜릿이 아니고 미제라는 게 중요하고, 항상 외제가 나로 하여금 나의 위신과 체면을 정신적으로 상징화시켜서 그걸 하나의 나의 우상화, 종교화시킨다 말이이에.
그러니까 학개도 그렇지만 에스라, 느헤미야, 스가랴, 학개 사인방입니다. 사인방이 합세해서 어쨌든 간에 유다나라를 장차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나라로 진짜 하늘나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무척 노력하면서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 이방여자와 혼인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같은 경우에는 강제로 이혼시켰어요. 그럼 아는? 아이는 누가 키우고?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진해서 이혼하든지 강제로 이혼당하든지 알아서 해라. 일종의 권력이죠.
그러니 학개나 말라기에 오게 되면 형식적으로 교회 다니고, 성경공부하고 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삶 자체가 이방 것을 원하고 있고, 우리 몸이 그냥 몸이 아니고 상징화 된 몸, 그런 아트만, 그런 자아를 우리가 신의 이름을 빙자해서 건전한 몸이라고 믿고 있지 않는지 이걸 까발려주는 겁니다. 학개가.
아직 결정적인 것은 이야기 안 했습니다. 그렇다면 학개는 뭘 들고 나왔기에 저쪽을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요소가 뭐냐는 거죠.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바탕이 모든 게 죄였습니다.” 자복하고 회개해야 되는데 뭘 들고 나왔기에 일괄적으로 회개할 수밖에 없느냐? 그건 아까 제가 언급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마당을 하나님의 성전화하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성전이란 예루살렘 그 나라만 해당되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스룹바벨 성전이라 하는데 스룹바벨 성전을 짓기로 해야 될 담당자들이 어느 나라를 경유해 왔습니까? 바벨론을 경유하고 왔죠. 바벨론 다음 나라가 페르샤, 바라나라거든요. 바벨론 끝날 때 왕이 고레스. 고레스 왕이 536년, 사실은 고레스 왕이 바벨론 망하기 전부터 있었어요. 망하는데 직접 개입했죠. 바사나라가 바벨론 나라 망하기 전에 있었어요. 교체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바벨론 영토가 바사 영토가 되는 겁니다. 이때에 왔거든요.
그렇다면 두 번째 성전을 지어야 될 책임자들은 바벨론을 경험한 거예요. 다니엘에 보면 바벨론이 바벨론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나라는 바벨론 새끼야. 욕하는 게 아닙니다. 바벨론이 가지라면 거기에 붙어있는 잎사귀들. 그렇다면 살아있는 가지에 잎사귀가 새로 돋아나고 떼질 때 그 진액은 잎사귀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가지에서 나오죠. 그 가지되는 바벨론을 누가 쥐고 있다? 바로 다윗언약에서 성전을 짓게 허락하셨던 유다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쥐고 있지요. 그러면 바벨론 뒤에 나오는 바사나라, 헬라나라, 로마의 열나라, 세상 끝날 모든 나라는 결국은 바벨론의 다른 얼굴들입니다. 자식들이고, 새끼들이고.
거기서 성전이 파괴되고 움직이는 성전으로서 이것은 건물이 아니고 사람으로서 모여 있던 곳이 바벨론 포로 잡혀있거든요. 에스겔에 보면, “내가 거기에 거하리라.” 하나님의 새로운 처소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전쟁하는 용사가 되셔서 자기 전리품을 만들어놓을 때 홍해를 건너간 그 집단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이 언약적 원칙을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을 제2의 출애굽으로 간주해서 새로운 성전을 만드는데 그 성전은 건물이 주가 아니고 왜 우리는 첫 번째 성전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모양새를 보여줄 때 그것도 매일같이 이뤄지는 것,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는, 학개란 뜻이 나의 절기란 뜻입니다. 내 절기를 지킬 때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죽어야 될 희생제물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그러한 성전, 그것은 바로 장차오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지을 진짜 성전의 모형으로서 학개가 이렇게 있는 겁니다.
10분 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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