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다니엘5장1절(손가락 계시)121101-7강a -이 근호 목사
가락교회-다니엘5장1절(손가락 계시)121101-7강a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1.16)
가락교회-다니엘5장1절(손가락 계시)121101-7강a -이 근호 목사
제 7강a
오늘은 다니엘 5장부터 할 차례입니다. 제가 계속 다니엘을 해나가면서 다니엘 9장에 보면 70이레가 나오거든요. 70이레 나올 때는 제가 전에 썼던 논문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그것을 복사해 와서 하려고 하는데, 복사할 것 없죠? 책 있잖아요. 복음이냐, 교회냐, 책 뒤에 있으니까 그걸 중심적으로 할 예정입니다. 그 논문이 무척 어려워서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느냐, 그걸 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니엘 5장을 하는데 다니엘 5장 내용은 5장 2절에 “벨사살 왕이 술을 마실 때”라고 돼 있죠? 그럼 느부갓네살 왕은 어디 갔죠? 느부갓네살 왕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 다음 왕이 나보니두스고 벨사살 왕이 BC562년에 죽고 나보니두스라는 왕이 있는데 이 사람은 마르둑 신을 믿어야 되는데 이 사람은 뭣에 빠졌느냐 하면 달의 신, 영어로 Sin, Sin이라는 신을 믿은 거예요. 이걸 믿으니까 백성들이 불교 신자인데 혼자 기독교 신자 되면 밉상 받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밉상 받아서 일종의 도피생활을 했어요.
그래서 대신 등장한 사람이 벨사살이란 사람이 등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끝 이예요. 느부갓네살 그 다음에 나보니두스 그 다음에 벨사살이라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이 BC522년에 등장하고 BC 562년에 이 사람이 죽고 나보니두스는 BC 556~549년 이라고 하는데 정확하지 않아요.
이들이 죽고 난 뒤에 등장한 나라가 바벨론은 아니고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으로 보면 돼요. 페르시아 나오면 전부 다 이란 쪽 아닙니까? 페르시아만, 페르시아 그쪽에 보통 역사에서는 키루스라 돼 있는데, 성경에서는 고레스, 이 사람이 상당히 어진 왕 이예요. 그 당시 그들 나라에서도 그 당시에는 페르시아인데, 성경에서는 바사, 메디아는 메대, 메대 나라 따로 있고 바사 나라 따로 있는데 연합해서 바벨론을 조져버리고 고레스라는 바사 나라가 그 땅을 인수인계 받아서 이제 바사 시대가 시작되는 겁니다.
이 고레스 왕이 오게 되면 이 사람은 이사야에 예언된 대로 포로를 각 나라 종교 따라서 각기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이스라엘만 돌려보낸 게 아니고 여러 민족들도 돌려보내는 그러한 왕이 등장하죠. 그 고레스 왕이 무슨 신을 섬겼느냐 하면 바로 마르둑 또는 마르두크라는 신을 섬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당시에 백성들이 섬기는 신을 왕이 같이 섬기지 아니하면 그 왕은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추방됩니다.
그래서 항상 왕이 되었으면 백성들이 믿는 신에게 제사 드리고 신전에다 예배들 드려야 돼요. 그런데 일본의 신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라는 태양신이 있어요. 그 태양신의 아들이 천황 이예요. 천황이라서 일본의 군국주의나 모든 것은 신도, 일본의 종교가 신도거든요. 신도의 최고 제사장이 천황입니다. 천황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왕 제도가 없으면 안 돼요. 왜, 태양신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태양신이 숨어있는 것을 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라는 신이 불러내서 비로소 빛을 대지에 죽 펼치는 거예요. 일본 국기 보세요. 이렇게 태양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일본 군국주의 국기에 뭐로 돼 있습니까? 태양이 온 천지에 넓게 퍼지는 이 국기라 말이죠. 그러니 이건 신도 제사장을 믿는 나라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로서 천황이 없으면 일본 인, ‘나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인 나는 누구지? 나는 일본인’ 라는 그것이 밑바탕이 날라 가 버려요. 역사와 전통이 다 깨져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옛날 고대국가라든지 현재 왕 제도가 있는 모든 곳에 항상 제일 염두 해 둘 것은 이거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징화, 상징으로 돼 있다는 겁니다. 상징, 더 쉽게 이야기하면 문양, 모양, 디자인, 이미지. 이것은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재 자기 육신과 혈육, 하여튼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게 전부예요. 그리고 보이는 것을 봤다는 그 경험 바깥으로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느끼고 본 것, 그 바깥으로 다른 세계가 없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망상인데요. 세상이라는 것은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안에서만 세상을 규정하게 돼 있습니다.
마르둑 신, 마르둑 신을 믿기 때문에 태양신이나 달의 여신은 절대로 그 페르시아나 바벨론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현대인이 보기는 ‘저 인간들, 신을 믿으면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저걸 왜 믿나?’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걸 왜 믿느냐 하면, 그 신이 없으면 자기가 없어요. 신 앞에 설 때 비로소 나는 그 신에 복속된, 종속된 신의 백성, 우리 일신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신의 축복을 받습니다.‘라고 할 때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비로소 자기 자아정립이 되는 거예요.
목사 집안의 아들이 만약에 스님이 된다. 이건 부모로서는 단순히 직업 하나 갖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고 완전히 우리 집안사람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 이름 질 때 보면 신앙적으로 지으려 하잖아요. 심지어 노래하는 밴드도 엄마가 지으면 믿음의 자녀들, 용감한 녀석들 이렇게 짓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자녀들, ‘엄마 그러면 판 안 팔려요.’ 하니까 양보하고 그렇지, 엄마가 권사고 그럴 경우에는 이름을 그렇게 요란하게 져준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 너는 항상 우리 집안의 정체성을 벗어나서는 내 자식이 아니다 하는 그런 게 있다 말이죠. 그런 상징, 그리고 옛날 유럽 쪽에서는 문양, 상징에서 단합이 돼요. 하나라는 결속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명한 말 했잖아요. 사람이라는 것은 혼자서는 사람이라고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는 거예요. 뭐냐, 사람이라 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 속했느냐를 가지고 사람이냐, 아니냐. 어느 쪽 사람이냐 할 때 사람이 되지, 나 혼자 사람이다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단독적으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건 과학시대 갈릴레이 이후에 주체의식이 있을 때는 사람 혼자서도 사람이지만, 옛날에는 혼자서 사람은 아니에요.
‘저 어느 집안입니까?’ 이렇게 묻죠. ‘어느 집안이냐? 양반 집안이냐, 쌍놈 집안입니까?‘라고 묻잖아요. 어느 집안이냐고 묻지, 니 누구지?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니 누고?‘이렇게 묻는 것은 ’저 아무개입니다.‘라고 답변하라는 말이 아니고, ’저 경주이씨 산수공파 몇 대 몇 대‘ 이렇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성경에 나온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여기 벨사살 왕과 다니엘의 대결이 아니죠. 어느 집단과 집단의 대결이라는 거죠. 항상 그걸 염두에 두어야 돼요. 어느 집단과 어느 집단의 대결입니다. ‘아휴, 교회 가고 싶은데 우리 집안이 다 불교 집안이라서’ 이 말은 뭔 뜻 이예요? 나의 이미 정체성은 절대로 기독교 신자는 돼서는 안 된다는 그런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우리 생각에는 나 혼자 바꾸면 되는데, 나 혼자 바꾸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집안이 있는 겁니다.
결혼이 뭡니까? 젊은 애들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한 집에 동거생활하면 결혼인데,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어른들의 생각입니다. 그 어른 중에 나도 포함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결혼이라 하는 것은 집안 대 집안의 만남입니다. 안 그런 분도 있죠. 안 그런 분도 있어서 그것 때문에 말썽이 나고 그래요. ‘지 좋아서 지가 결혼하는데 내가 뭐’ 이런 사람도 있긴 있어요. 있는데 그게 너무 쌍놈 같다 이 말이죠. 사회적인 통념에 너무 위반되잖아요. 그래서 어떤 분은 딸이 ‘아빠 남자친구 데려갈게.’ 하니까 아빠가 전화로 하는 말이 ‘데려오지 마. 우리 집안은 니가 그렇게 사귄다고 데려오는 게 아니고 사귀기 전에 아빠 이 남자하고 사귀어도 좋아? 나한테 물어야 그동안 내가 너를 키우고 우리 집안은 어떻게 흩어지지 않고 한 집안이라는 정체성이 있는데 니가 건방지게 그걸 무시하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친구다 하면 아버지로서는 그런 건 안 봐주겠다.’고 단호하게 거부한 사례도 있어요. 누구라고 말은 안 합니다. 광주에 김 집사님이라고 말은 안 하는데.ㅎ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자꾸 오늘날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보시면 성경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 벨사살은 뭐다? 왕이다 이 말이죠. 왕이라 하는 것은 그 국가의 정체성을 책임지고 제사를 드려야 될 제사장입니다. 항상 그걸 생각해 주세요. 왕이 하나의 어떤 몸짓, 왕의 어떤 행동, 생각,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백성들과 결속을 이루는데 왕이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를 고려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벨사살 왕이 뭐를 마셨다? 술잔이 어떤 술잔이냐? 바로 예루살렘에서 탈취해 온 술잔이고 그 술잔과 모든 기구, 제구들은, 제사 지낼 때 기구들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쓰여 졌던 기구거든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누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동원된 기구들이었잖아요. 제사 지낼 때.
여기 초반부터 어려운 게 나오는데 할 수 없어요. 신이 있다. 안 보이잖아요? 신이 있는 걸 어떻게 압니까? 여기서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죠. 실제로 ‘우리 신 여호와는 있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말은 누가 못합니까? 나도 하겠다. ‘집에 금송아지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말이죠. ‘신이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데 니가 믿는 신이 진짜로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판정 내리느냐 말이죠.
옛날에 마르둑 신이 있다. 여러 가지 이스타록 신이 있다. 신이 있다 할 때 아까 일본의 신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이 있는 걸 어떻게 아느냐 말이죠. 태양신 있는 걸 어떻게 알아요? 어떤 식으로? 있다고 이야기해줘야 그게 결속이 될 게 아닙니까? ‘있는 거 맞구나, 있는 거 맞구나, 맞아, 인간보다 신이 우선이야.’ 이러려면 추월적인 그 권위적인 힘에 의해서 연약한 우리 인간은 쪼그라들면 그걸로 전부 하나의 나라로 단단히 결속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미가제라는 게 뭐냐 하면 바람입니다. 몽고가 올 때 우연히 태풍이 불어서, 지금은 기상청이 있어서 다 알지만, 그때는 없어서 몰랐으니까 바람이 불어서 몽고 군인이 일본을 못 죽이고 막강한 5만 명인가 엄청난 대군이 몰살했거든요. 그때 가미가제, 바람의 신이 우리 일본을 도와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이 그만큼 도와준 거예요.
그래서 지금 진짜 신이 있다, 없다, 를 뭐로 아느냐 하면 바로 왕이 잘 되는지, 왕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가지고 사람들은 주시하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 당시 사람들 바보들 아니에요? 왕이나 내나 똑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이 신 있다 하는 걸 어떻게 믿습니까?’ 라고 하겠지만 왕이 ‘나는 인간이다.’ 하면 그 왕은 죽어요. 이건 어떤 지도자라는 것은 지도자 되겠다고 해서 지도자 되는 게 아니고 시켜줄 때 어쩔 수 없이 돼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 사회의 아주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집안에 아버지가 있잖아요. 아버지가 있어버리면 본인이 ‘아버지 안 할래’ 해도 그건 자식들은 그걸 용납 안 해요. 아버지는 반드시 아버지 값을 해야 돼요. 본인이 안 하겠다 해도 억지로라도 아버지 값을 해야 되고, 형수는 형수 값을 해야 되고, 그 포지션, 위치, 그런 값을 해줘야 돼요. 엄마는 ‘엄마 안 할래‘ 해도 엄마 값을 해야 되고, 나 이제부터 ’엄마 자식 안 할래’ 해도 자식으로 계속 봐주고 그게 있을 때 인간은 어떤 구조 속에서 자기를 재발견하는 식으로 자기 존재를 정립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 값을 못하면 내가 어느 집안 자식이라는 내가 지금 깨지니까 아버지를 위해서 아버지 일 하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아버지는 아버지 자리에 가 계시라 이 말입니다. 아버지 노릇을 해 달라 이 말이죠. 딸이 결혼하는데 아빠는 헤어져 있을 때 딸이 헤어진 아빠한테 가서 ‘아빠, 비록 이혼해서 다른 여자하고 살지만 그날만 와서 아버지가 팔 끼고 가주소.’ 왜 그러는데? 그럴 때 내 결혼식이 빛나니까. 뒤에서 수군수군 안 하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다 요구하는데 그 요구는 그 사람을 위해서 요구하는 게 아니고 누굴 위해서? 나의 정체성, 내가 누군지 정체를 밝히기 내가 생각한 그 위치에 배치를 해 달라, 배당을 좀 해 달라. 안정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이 있을 때는 천황을 무조건 갖다 세워요. 이게 일본에서는 BC6세기부터 12세기까지 천황 제도가 있다가 BC34년부터는 소위 쇼군이라 해서 우리 말로하면 장군입니다. 사무라이 군인들이 정치하지만 교토에 있던 왕궁을 도쿄로 옮길 정도로 수모를 당하더라도 여전히 민중들 속에는 우리는 일본인이라면, 태양신의 후예라는 것은 이건 아무리 장군들이 설쳐도 항상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태양신.
그래서 일본의 신은 우리가 인간사회 (이거 참 중요합니다.) 바깥에 옛날에 사람들이 살면 보통 넓은 농토가 될 만한 곳에 가잖아요. 그리고 바깥에는 뭐로 둘러싸여 있습니까? 산으로 둘러싸여 있죠. 인간사회는 신이 사는 세계와 분리된 우리들만의 세계일 때, 인간사회는 신과 더불어서 신은 신에게 대우하고 그 대신 신은 인간을 괴롭히지 말고 요렇게 해서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그 정체성이 정립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신이 없다고 하지만 이 신을 아직도 왕이란 이름으로, 신과 경계선에 누가 있습니까? 왕이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왕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누굴 섬기는 거예요? 신을 섬기는 거예요. 왜, 신은 안 보이니까. 그래서 어느 나라 왕은 항상 누구 아들입니까? 신의 아들 이예요.
궁켈이라는 구약 학자는 시편에 나오는 모든 시편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가나안 종교인데 매년 1월이 되면 왕을 신의 아들이라고 제사지내는데서 비롯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아들은 뭐예요? 매년 제사 지낼 때,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던 그 가나안 종교에서 본 따서 여호와 종교라고 따로 만든 이스라엘 민족의 자기 정체성을 위해서 신을 섬기면서 그때 불렀던 찬송가들이 시편이다. 그걸 달리 말해서 여호와 신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기 정체성을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이고, 만들어 낸 것이지 보편적인 신은 이다? 아니다? 신은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사무엘하 7장 14절 “너는 다윗의 자손 내 아들이 되리라“ 했거든요. 하나님의 신의 아들이 있다는 것은 이건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민족도 다들 그러니까 따라서 이 구약이라는 이 말씀도 하나님께 계시 받은 것이 아니고 저희들이 그동안 흘러나온 전설 가운데서 우리 이스라엘이 단합하는데 뭐가 보탬이 될까 정치적인 어떤 책략에 의해서 도움이 될까 싶어서 후대에 와서 재편집한 것이 바로 구약성경이라는 거예요.
그럼 결국 뭐예요? 누가 신이라는 말입니까? 신은 없고 인간 자신이 누구냐를 확립하기 위해서 신을 그냥 만들어내서 배치한 것뿐이죠. 군케란 신학자로부터 많은 로빈켈 구약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고, 거기 따라서 신약학자들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 기도원에 가서 목사 되라고 응답받고 신학교 온 학생들한테 그런 식으로 공부해서 신학 박사 받은 교수들이 그 이야기를 폭로해버리니까 그 신학생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겠습니까? 왜냐 하면 자기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교수들 이야기에 의하면 그런 신은 한 트럭도 넘고 그건 인간이 만들어 내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그 교수들의 주장은 뭐냐 하면 신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광신도가 하는 짓이고,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웃과 이웃 사이에 사랑으로 결속을 맺기 위한, 이웃 사랑을 통한 행복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생성하기 위해서 종교라는 것이 동원됐다고 하는 거예요. 신학생들이 이거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아들이죠. 그저 학점만 따서 졸업하면 목사 되려고 억지로 하지만 그 딴 거 안 하죠. 그 딴 거 안 믿고 아이쿠, 공부해서 신앙 다 버렸다고 욕들을 하시잖아요?
그들이 졸업하고 막상 목회에 나가면 ‘아하! 그렇구나. 야, 사람들이 오늘날 신을 안 믿는구나.’ 신을 안 믿고 신을 믿고 예수 믿는다고 해야 교회에서 사랑받는구나. 결국 교회라는 게 뭡니까? 서로 사랑 주고받는 위로 주고받는 정주고 정 받는 단체, 그래서 덜 외롭고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은 혼자는 못 살고 더불어 사는 계모임, 거기서 따뜻한 그것을 하면서 죽어서 성경대로 좋은 데 가기를 희망하는 그냥 하나의 소망으로 하는, 그렇게 이야기할 때 교회는 무럭무럭 부흥이 되는 거죠. 너도 안 믿고 나도 안 믿고 누구든지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를 아무도 안 하는 그 편리함, 여러분 돈 내서 어려운 사람 도와주시고 그러면 여러분도 도움 받습니다. 이건 완전히 두레 마을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공동체 생활하는 그게 나이 많고 한 사람들 낙원으로서 살 수 있어 가는 곳, 그게 바로 교회, 진짜 신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신이 있다면 정성 모아 세운 예배당, 그걸 주께서 교회라고 하니까 그러면 그 교회 등록하면 죽어서는 좋은데 가겠죠. 또 실제로 눈으로 공동묘지도 돈 내서 만들어 놨으니까. 그것도 앞에서 십자가 탁, 탁, 탁 붙여 놨으니까.
그러니 아무도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데서 오는 행복감. 나만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다 안 믿거든요. 다 안 믿으니까 얼마나 느긋해요? 그것이 바로 벨사살 왕이 하는 행동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집단, 공동체가 중요한 거죠. 그 공동체 어떻게 됐습니까? 그 결속이 된 공동체 파티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초청받지 않은 문양 되지 않고 상징화되지 않고 우리들의 공동체 결속에 도움도 안 되는 웬 난데없는 손가락이 나타났죠. 5절 봅시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라고 돼 있죠?
여기서 무슨 손가락입니까? 늑대 손가락 이예요? 무슨 손가락입니까? 사람의 손가락이죠. 그리고 또 다니엘 3장에 보면 불 속에 들어갔을 때 등장한 네 번째 사람은 어떤 사람 이예요? 신의 아들의 모습과 같다 했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런 것이 설명하기 어려운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좀 정리해 봅시다.
사람이란 자신이 체험한 것만 안다. 그러면 사람들이 체험한 것은 공동체에 있을 때 내가 누군가 확립되니까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으니까, 공동체 속에 더불어 살 때, ‘당신 누구요?’ ‘나 누구 집안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 이 말이죠. ‘보면 몰라요?’ 이러면 안 돼요. ‘니 집안이 뭐고 어느 대학교 나왔느냐’ 하는 공동체에 묻는 게 있어요. 이것을 그들이 보고 있는데 다니엘 3장에서는 네 번째 사람이 등장했죠? 오늘 5장에서는 사람의 손가락이 등장했죠? 그러면 사람이 손가락 등장한 것을 벨사살 왕이 아무리 술 취했어도 봤죠. 손가락이 나타난 게 너무 신기하니까, 그리고 팔은 안 나타나고 손가락만 나타났으니까 환장할 지경이죠. 손가락이 떠다닌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손가락이 떠다니면서 벽에다 후벼 파서 글을 쓰는 거예요.
이거는 초대장 없는 손가락 아닙니까? 그러면 이쪽의 파티는 왕이 주도한다는 공동체를 결속한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뭐라고 해도 마르둑 신의 자녀라고 결속했는데 왕은 제사장이니까, 신과 통하는 왕의 유일한 아들이니까, 그런데 손가락이 나타나 버리면 이건 뭣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손가락을 풀을 수 없는 이쪽은 몽땅 ‘내가 생각한 나는 내가 아니다.’는 뜻 이예요. 오늘 강의제일 중요한 겁니다. ‘나는 이렇다.’하는 그것이 이게 오류다 이 말입니다. ‘니 누구지?’ ‘저 이렇습니다.’라는 자체가 오류인 거예요. 왜 오류냐 하면 내가 기껏 알고 있는 공동체 내에서의 나는 이정도의 왕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풀지 못하는 다른 초대받지 않은 손가락이 나타나 버리면, 그동안 내가 나라고 여겼던 이것이 이게 엉터리일 수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내가 알았던 나는 진정 ‘나’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뭔가 공동체 속에서 남들이 이야기하니까 그런 줄로 알지만 정작 나는 내가 누군 줄 내가 몰랐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는 뭐하는 십자가예요? 나무에 달린 자마다 뭐다? 저주 받죠. 우리가 저주 받을 자라는 것을 그 전에는 생각도 못했죠. 내가 왜 저주 받아요? 이 근호 내가 왜 십자가에 저주 받는데요? 나는 태어나면서 ‘여러분, 나 저주 받아야 됩니다.’라는 식으로 살아오지를 않았어요. 성적이 어떻게 해서 40점에서 50점, 60점, 이렇게 생각하지, ‘나는 저주 받아야 돼, 저주 받아야 돼.’ 이런 식으로 시험 친 적이 없다 이 말이죠.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망신도 그런 망신이 아니고 무슨 망신? 개망신! 내가 개망신 당해야 된다는 생각보다 개망신 안 당하기 위해서 살잖아요? 개망신 당해도 싸다는 생각을 누가 하겠습니까? 개망신은 어떤 경우에 개망신이냐 하면, 공동체에서 쫓겨났을 때 개망신 이예요. 또는 공동체에서 쫓겨나서 가둬져 있을 때 개망신 당하는 겁니다. 교도소가 개망신 당한 곳 아닙니까? 누굽니까? 이명박 대통령 형 이시형씨 올 때 카메라로 찰칵찰칵 찍잖아요. 지금 개망신 당하고 있는 겁니다. ‘왜 돈 6억을 현찰로 줬습니까?‘ 이런 식으로 찍는 이유가 공개적으로 개망신 당하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 공동체 내에서 니는 나쁜 놈이다.’ 이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돼요? ‘나쁜 놈 될래.’ 이러면 안 되잖아요. ‘아휴, 그것은 내가 나쁜 것이 아니고 어떻게 투자 했고 어떻게 조카 줬고…’ 기어이 공동체 속에 머리 내밀고 좀 넣어달라고 하잖아요. 조기 사면해 달라고. 그게 우리 모습인데.
거기에 난데없는 날라 다니는 손가락이 나타나 버리니까 결국 그동안 나를 지켜주고 나를 다답게 했던 공동체가 전부 다 오류다 말이죠. 이건 엄청난 실수다 이 말이죠. 그래서 벨사살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 손가락이 썼던 글자를 해석하라’ 왜 해석을 합니까? 해석이 돼 버리면 그 해석된 글은 이 공동체 속에 다시 편입이 되니까 더 이산 추가적인 정보가 들어올 수 있으니까 우리 이 모임이 확장될 뿐이지, 깨진다든지 오류가 될 일은 없잖아요.
저 손가락이 쓴 글자를 해석하라. 해석이 안 되면 우리는 일괄적으로 망하는 것이고, 해석이 되면 우리는 일괄적으로 더 발전 하는 것이고, 이게 결국은 오늘 이렇게 제가 강의하지만 다니엘 5장 이야기는 매일같이 손가락이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우리 직장에 주께서 매일 들쑥날쑥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때는 손가락이지만 지금은 십자가죠. 십자가를 늘 우리 가정에 우리 직장에 우리 사회에 우리 교회에다 계속해서 십자가로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 저걸 해석해 달라’ 이야기를 해야 돼요. ‘저 십자가를 치워라’ 이러면 안 되고, ‘저 십자가에 왜 저주 받아야 됐는가, 누가 해석을 해 달라.’ 해석을 해서 전에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적으로 우리끼리, 우리교회, 또 무슨 교회기리 하다가 이제는 우리끼리, 우리교회 다 때려치우고, 오직 십자가! 난데없이 날라 온 손가락, 그리고 십자가는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그 십자가를 우리가 해석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십자가는 원래 해석이 안 되게 돼 있습니다. 마치 여기 손가락 같아요.
해석이 안 돼요. 왜 해석이 안 되느냐 하면 요것도 설명을 해드릴게요. 이런 설명이 어려운데 현대 기원 언어학에서 밝혀낸 건데 하이데거가 그런 이야기한 거예요.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인간은 주체가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그런데 인간 바깥에 대자연이 있습니다. 대자연에 인간은 기하학적 형상을 보내요. 기하학이라는 것은 규격 진 것, 모든 인류의 학문을 조사해 보면 전부 다 기하학적 이예요. 숫자가 1,2,3,4…,로 돼 있잖아요. 그러면 1과 2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소수점은 발달된 것이고, 결국 1과 2사이에는 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규격진 거예요. 분류를 시킨 거예요. 딱딱 곽을 진다니까요. 언젠가 이야기했잖아요. 별이 원으로 도는 줄 알았는데 타원으로 돈다고. 원이 더 완전한테 실제로는 원이 아니고 캐플린에 의하면 타원으로 도는 거예요. 참, 하나님도 미쳤어. 왜 원으로 안돌고 원이 타원보다 완벽해 보이는데 왜 원이 타원보다 완벽할까요? 무슨 선입관 때문에? 기하학적 선입관 때문에.
피타고라스에 보면 1,2,3,4는 용납을 해도 루트2 ()는 용납을 안 했습니다. 그런 숫자 발설하면 그 단체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모든 것은 정확해야 되고 숫자로 하는 거예요. 인간은 대자연에다 기하학적으로 해놓고 그걸 다시 회수를 해서 자기를 완벽한 기하학적으로 규격에 맞춰서 그것을 자기의 세계로 다시 수용하는 거예요. 안정되게 이렇게 규격에 맞춰서 혼선이나 혼란이 없게 딱딱 곽에 짜서. 여러분들이 채석장에 가면 돌을 어떻게 깹니까? 중구남방 깹니까? 아니면 딱딱 네모지게 각 지게 깨는 게 맞습니까? 이태리 대리석 보면? 딱딱 각 지게 떼 내죠. 그래서 상품으로 팔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자신이 뭔가 볼 때는 딱딱 규격을 맞춰서 본다 이 말이죠. 장부 회계할 때도 딱딱 규격에 맞춰 하잖아요. 옛날 할머니들은 주머니에서 돈이 얼마 들어가는지 모르고 이러지는 않잖아요. 딱딱 규격에 맞춰할 때는 인간은 정돈된 마음으로 할 때 그게 자기한테 정돈이 되는 겁니다. 그걸 수련회 때 뭐라 했어요? 로고스라 했고 혼돈스러운 것은 뮈토스라 했죠. 뮈토스는 신화 아닙니까? 신화라 하는 것은 돌발적이고 우발적인 것을 모아놓고 어설픈 걸 짜깁기 한 것이 신화고, 신화의 시대가 지나면 모든 게 규격화 되는 겁니다.
신화의 시대에서는 왜 어설픈 걸 끌어 모으느냐 하면 해명이 안 되니까. 왜 번개가 치는지, 해석이 안 되니까 그냥 쭈그리고 앉아서 우리는 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신화의 시대도 그냥 혼돈이 아니고 신화의 시대에도 신을 섬기는데 있어서 종교적 상징을 줘서 ‘신이시여, 딴 데 가지 마시고 요 제사 받으시고 딴 데 가지 마시고 요 시간대에 제사 받으시고 그리고 요 장소에서 복 주시고 딴 데는 주지 마시고 꼭 장소나 시간이나 정해놨어요.
옛날 제사 지낼 때 낮에 지냅니까? 그냥 안 드리죠. 댕~댕~ 열두시에, 댕~댕~치면 그게 제사 지내는 시간 같아요. 안 입던 한복 두루마기 입고 버선 신고 딱 앉아 있고, 좀 전까지만 해도 까불다가 그때만 되면 남편 값 한다고 ‘여자는 저리가.’ 해서 부엌으로 보내고, 물, 술, 가져다 올리고 ‘딸은 저리 가고 아들 이리 와.’ 하면서 폼 내잖아요. 그리고 그날 술 한 잔 먹으면 다시 원상복귀 개 되지만. 그럴 때 뭐냐 하면 이게 조상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정형 화 시키고 기하학 화 시켜서 좌청룡 우백호 대추 놓고 하는 것을 정형시킬 때 내 마음이 나는 이걸 정형시킬 때 비로소 나는 나라고 정립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게 인간이거든요.
이게 상징인데 그래서 종교라는 게 있고 십자가라는 게 있잖아요. 십자가 믿어서 구원 못 받는다니까요. 십자가는 내가 상징화 시켰는데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십자가는 누가 알아요? 상징으로는 안 돼요. 아무도 못 믿어요. 십자가는 기도해도 안 돼, 헌금해도 안 돼, 전도해도 안 돼,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십자가는 못 믿어요. 그리고 사랑을 하고 구제를 해도 자기도 십자가 못 믿어요. 법정 스님이 되고 머리 홀라당 깎아도 십자가는 안 믿어져요. 왜냐, 십자가는 인간의 상징 그 밖에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오늘 나타난 손가락입니다.
우리의 상징으로도 포착이 안 되고 접선이 안 된다는 말은, 저쪽에서 이쪽을 깨겠다는 이야기예요. 결국은 박살내겠다는 거예요. 저주하겠다고 진노하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몰라요.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저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처음 들었다고 해요. 세상에. 갈라디아서에 나오거든요.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너무 사랑의 하나님,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서, 라는 만날 그 노래를 부르니까 설마 하나님이 저주를 앞장세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겁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이제 십자가 이야기 그만한다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대요. 십자가 이야기 하지 말라는 그런 사람도 있답니다. 실컷 십자가 이야기해놓고 밑천이 다 떨어진 모양이라.
그만큼 십자가는 사람들이 기하학적으로 자기 규정하겠다, 자기 정체를 규정했던 사람들은 포착이 안 됩니다. 이 말은 반대로 십자가로 만약에 접선이 되고 포착이 된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될까요? 뭐를 포기하고 뭐가 깨야 됩니까?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딱 정립하고자 하는 서랍 정리, 방 청소, 하여튼 딱딱 정리하는 사람 있어요. 깔끔하게 제 자리 딱딱 있어야 돼요. 그런데 그게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 그게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요즘 아가씨 방에 들어가 보면 개판이랍니다. 어떤 사람이 하숙치는데 여자는 안 받겠다는 거예요. 너무 어질러놔서. 우리 생각에는 정 반대로 여자 화장실이 남자 화장실보다 더럽다는 거예요. 남자 화장실은 볼일 보고 물만 누르면 되는데, 여자 화장실은 안 그렇다는 겁니다. 발을 올려서 스위치를 누른다는 거예요. 그때는 발이 잘 올라가는 모양이라. 깔끔 떤다고 발가지고. 나는 절대로 허접스러운 존재가 아니고 나는 이렇게 깔끔하고 이렇게 착하고 선하고. ‘선한 선생이여, 내가 영생을 어떻게 얻습니까?’라는 부자 청년. 결국은 근심하고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신 세리와 창녀, 그리고 거지, 강도, 이들이 하늘나라 가보면 그들이 먼저 와 있을 거다. 가야 말이지만 가지도 못하죠. 가보면 그들이 먼저 와 있어요. 강도도 보이고 창녀 막달라 마리아도 보이고, 먼저 가 있어요. ‘어, 거기 어떻게 갔습니까? 물어 봅시다.’ 물어보면 ‘사랑 많이 받았어요.’ 한다고요. 경상도 말로 ‘사랑 억수로 받았어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 사랑의 극치가 뭡니까? 가장 많은 사랑, 최고로 많은 사랑이 뭐예요? 바로 십자가죠. 십자가 때문에 거기 가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가 있고 모세도 가 있고 엘리야도 가 있고 천사와 같이 돼서 하늘의 형상을 입고 오직 십자가뿐이죠.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그 많이 용서했다는 것이 사랑으로 전환되어서 지금 천국을 이루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돼요? 정형화 되고 나는 이렇다고 따로 자기 자아상을 고집하면 안 되고, 우리는 혼돈스러워야 되고 혼란스러워야 되고 십자가 앞에 설 때까지 나는 내가 누군지를 몰랐고 사실 십자가 저주에 내가 같이 풍덩하고 뛰어들어야 돼요.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 뛰어들듯이 사실은 그들은 멋도 모르고 뛰어들었는데 예수님 만났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님 있는 줄 알고 뛰어들면 돼요. 우리는 깊은 산속의 연못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예수님께서 먼저 옷을 벗고 목욕하고 계시면 우리도 되도 않은 선녀 옷 벗어버리고 같이 벌거벗고 풍덩 뛰어들어야 된다 말이죠. 거기서 뛰어들어서 하나가 될 때 로마서 6장에서는 그걸 세례, 다른 말로 하면 연합이라 합니다. 롬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같이 죽으면 같이 산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이야기예요?
어쨌든 저쨌든 간에 벨사살이라는 공동체에, 공동체라는 말을 하는 것은 기존의 해석이 벨사살 왕만 자꾸 놀랐다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 왕이라는 위상을 몰라서 그래요. 왕도 신을 바꾸면 백성들한테 추방당한다고요. 그러니까 왕에게 이렇게 등장한 것은
왕뿐만 아니고 너희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아야 합당하다 그런 겁니다. 왕만 잘못했으면 왕만 바뀌면 되는데 왕이 바뀌는 게 아니고 나중에 뭐가 바뀌어요? 나라 전체가 다른 나라가 되고 맙니다.
자, 그러면 해석을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여기 10절에 보면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 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왕의 나라에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라고 추천을 하죠. 누굴 추천합니까? 다니엘을 추천합니다. 그렇다면 다니엘만이 손가락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란 이 말은 오늘날 성도가 이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다니엘 같은 위상을 가지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박아 놓은 거예요. 성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성령이 거기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성도의 몸은 곧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에, 성령이 있다는 말은 그냥 놀면서 있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죠. 있음 자체가 기능이요, 있음 자체가 작용이요, 있음 자체가 적용이요, 있음 자체가 하나님 일의 계획의 파견 근무하는 거예요.
자, 한번 물어 봅시다. 사도들이 무슨 일 했습니까? 사도들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본인들은 무슨 일 했어요? 사도들이 일한 것이 어떤 정치를 했습니까? 아니면 노가다 했습니까? 국가 경제에 이바지 한 게 있어요? 안 그러면 철책 선에 총 들고 나라를 지킨다든지, 무슨 일 했습니까? 사도들은 복음 전하는 일을 했죠. 그것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말씀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들을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나의 거룩함이 나의 뜻이 이 세상에 여전히 있게 하려 함이라. 내가 지금 떠나가는데 너희들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데려가지는 않겠다. 어떻게? 현재 이 세상에 같이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 기능은 사도가 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를 가지고 예수님이 하시고 성령님이 하셔요.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고 너무 걱정하거나 나대거나 설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 그냥 밥 먹고 있는 것조차도 이게 성령이 하는 일이예요. 발걸음을 세시고 백합 한 송이 피어 있는 것, 참새가 날아다니는 것, 다 주의 일이듯이, 우리가 여기 있는 것도 그 나라 의를 증거 하라고 그냥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해도 그게 하나님의 일이 된다니까요. 또 이 소리 듣고 백수들 좋다 하겠다. 복음 믿고 나 아무것도 안 할래. 아무것도 안 해도 지 맘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고, 아무것도 안 해도 하게 돼 있어요. 이빨 아프다든지 일이 있다니까요. 장례식이 있다고 참석도 못하든지 일이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왜, 공동체가 새로운 공동체에 가입돼 있기 때문에. 새로운 공동체, 하늘나라죠. 사람은 혼자서는 존재하는 법이 없어요. 이쪽 나라 아니면 저쪽 나라, 저쪽 나라 아니면 이쪽 나라예요. 둘 중에 한 나라지, 이쪽도 저쪽도 아닌 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해석하는 해석은 새로운 나라의 입지와 속성과 본질에서 이야기하는 건데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첨부파일 : 가락교회-다니엘5장1절(손가락 계시)121101-7강a -이 근호 목사.hwp (62.0K), Down: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