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말라기 121113
학개, 말라기 121113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한윤범(IP:14.♡.134.60)
12-11-17 15:14
20121113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0-학개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구약 1310페이지의 학개와 말라기 두 개를 해봅시다. 말라기 같으면 염두에 둘 것은 말라기가 구약 예언의 마지막이 되기 때문에 말라기 그 다음에는 예언자가 없습니다. 구약에 예언자가 없다는 말이 좀 신기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구약에 신앙인이 없다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신앙인이 없는 게 아니고 신앙인이 있어도 예언자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언자는 뭐고, 신앙인은 뭐냐? 신앙인은 신앙에 도가 터서 자기가 하는 말은 전부다 하나님 계시로 간주해줄 수 있는 문제지 않습니까? 우리의 상식 같으면. 예언자와 신앙인의 차이점이 뭐냐? 예언자라 하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앞서 보낸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 그 모든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주신 것이 예언자에요. 그걸 그 당시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에 첨가되는 말을 남기는 사람, 행동을 남기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그러면 신앙인은 뭐냐? 자기가 계시를 만들어낼 수 없음을 아는 사람, 중요하죠. 내가 하나님의 계시를 임의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사람들. 그러면 거기서 반드시 나오는 게 나의 행동과 말은 왜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는가를 알아야 되겠지요. 왜 내 행동과 말은 계시가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계시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이쪽에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고, 우리 같으면 어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계시를 받으면, “너만 계시 받았나? 나도 계시 한 번 해봐?” 이렇게 나올 수도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계시를 받았으면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대학 나오고 그러면, “나도 계시 만들래.”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그 계시 앞에 나는 죄인임이 맞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참 신기한 것 아닙니까. 예언자라는 게 특별한 인간이 아니잖아요. 아모스 같은 경우에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그저 뽕나무 키우고 목동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는데 사람들 보기에는 특별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특별하지 않은 것을 택하사 우리로 죄인 만드는 중심인물로 세워버리는 겁니다. 사사기에 보면 그런 경우가 많이 나오는데 사사기의 사사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고 돼있지요. 사울 왕의 입장에서 다윗은 그냥 자기의 후계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을 때 사울은 악신이 임해줘야 돼요. 그것도 언약이란 줄기 가운데서 그렇게 돼야 됩니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에 의해서 재편성, ‘편성’이라는 말을 제가 쓸게요. 프로그램 편성한다, 피디들이 프로그램 할 때 주변에 많은 피디들이, “우리 프로그램 넣어주세요. 정규방송에 넣어주세요.” 하게 되면, “가만있어봐. 나는 편성국장이니까 내가 편성합니다. 일곱 시에 이것 넣고, 아홉 시에 이거 넣고.” 딱딱 정리 정돈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계시 받은 자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와 그 앞에서 신이 임한 걸 통해서 볼 때, 신이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가 담겨있으니까. 구약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그 사람이 장기와 지식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장차오실 메시아가 와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잖아요. 보고 기뻐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 받은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물론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가 어떤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될 때 그 계시는 효과를 보는 겁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느낄 때. 그 효과 보는 그 집단이 이스라엘 속에 새롭게 연기되어 나오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주 우리교회에 한 이십 명 모였다. 그걸 우리교회라고 칭했다고 합시다. 다음 주일이 됐는데 그게 스무 명이 될지, 열 명이 될지, 한 명도 없을지 그거는 누구 손에 달린 겁니까? 그건 주님 손에 달린 겁니다.
초장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해봅시다. 여러분들이 항상 염두에 둘 것은, 이스라엘은 유일한 신이다. 유일한 신이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신은 신이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는 신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신이 만들어낸다는 걸 염두에 둘 때 유일신이란 너는 신이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신이 유일신이에요.
이방종교에서는 이방신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이방’을 떼어버리자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이방민족 입장에 서면 누가 자기 신은 엉터리입니다, 우상입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민족이 어디 있겠어요. 융통성을 부려서 대자대비한 마음을 포용력을 갖고, “당신들 신은 당신들 신이고, 우리 신은 우리 신입니다. 각자 신을 믿읍시다.” 이렇게 나오지 우리 신만 신이고 너희들 신은 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초월적인 권한을 인간들끼리 머리 맞대고 백날 해봐야 그것은 결론이 안 나지요.
같은 교인들끼리 한 이십 명 모여서 내가 믿는 예수는 진짜 예수고, 네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장로한테 없을뿐더러 목사한테도 없어요. 자기가 그렇게 주장해도 동의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독선적이라는 핀잔만 들을 뿐이지. 독선적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냥 신 같으면 신만 연구하면 되는데 이스라엘 하나님이 무슨 신이라 했습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유일신이기 때문에 필히 다른 민족의 신이 어떤 신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걸 알면 알수록 신기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평소에 내가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이게 믿음이라고 우겼던 모든 것이 놀랍게도 명칭과 상관없이 똑같이 이방민족들도 지금도 그런 걸 창안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진짜 중요한 걸 깨달았어. 이거는 성령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다.”라고 자부했는데 심지어 성령이란 아이템까지 전부다 이방종교에 다 들어있더란 말이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것은 이미 성철 스님이 이야기한 거잖아요. 벌써. 돈오돈수라고. 동국대 불교학자들과 논쟁하면서 돈오점수가 아니고 돈오돈수다. 너희는 의상대사의 말을 따르는데 믿고 거룩하게 되는 것은 점진적으로 된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그렇게 안 한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로마서 1장 17절 말씀처럼. 깨달음에서 깨달음으로 계속하는 것이지 한 번 깨달았으니까 이제 제대로 된 부처 돼볼까 하는 아이디어는 잘못된 아이디어라고 이미 성철 스님께서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구약에 보면 무슨 신이다? 그게 바로 이방신의 일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다는 것이 이방신의 굴레를 감히 뛰어넘을 수 있겠어요? 곤란해지겠지요. 그래서 제가 단도리하듯이 한꺼번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방신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것을 끄집어내요. 그걸 통합하면 그게 바로 신이 되는 겁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던 보편적인 속성. 무식한 사람은 자기가 뭘 갖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유식한 사람, 도를 닦은 사람.
특히 힌두교 같은 경우에는 도를 닦을 때는 숲속으로 가요. 숲속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그 숲속에도 복잡해요. 하나는 은자가 있고, 하나는 가출한 사람. 출가라 하죠. 불교에서 출가하잖아요. 힌두교에서도 출가인데 출가한 사람이 있고 은둔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데 힌두교에서 그 사람들이 마을 떠나서 주변에 있는 숲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자연의 신을 다루는 방법이 제사를 지내서 다루는 방법을 사용한 겁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벌써 제사 드렸잖아요. 아벨도 제사 드렸지만.
제사를 드리게 되면 신께서 제사를 받으시고 거기에 대해서 합당한 처우나 보상을 하게 되면, 한 해 농사는 괜찮게 이뤄진다. 왜 그런 아이디어가 있느냐 하면, 창세기 8장에 보면, 봄여름가을겨울, 하나님께서 노아홍수 이후에 질서 잡힌다는 무지개 혜택을 입잖아요. 이것은 누구나 다 일괄적으로 주는 은혜가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봄여름가을겨울 자연 질서가 규칙적이면 거기서 아이디어를 발휘해서 씨를 언제 뿌려야 되고, 추수는 언제 해야 되고, 잡초는 언제 뽑아야 되고 이것이 안에 있는 법칙이 잡히게 돼요. 그러면 그 법칙을 자자손손 물려주면 되는데 자연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지 않습니까. 어떤 때 보면, 분명히 씨를 뿌릴 때 날씨가 춥지 않아야 되는데 씨 뿌리고 난 뒤에 갑자기 겨울보다 추운 날씨가 오면 당황스럽잖아요.
이 세상에 질서가 있다는 것은 신이 있다는 말이고 신이 질서를 위반한다는 것은 뭔가 제물을 바라고 하는 짓이다. 분명히 우리 공동체 내에 누가 반칙을 했다든지, 신을 섬길 때 소홀히 했다든지, 신이 노할만한 범죄를 저질렀다든지, 그렇게 될 경우에는 그 공동체에서 흠 없는 아주 깨끗한 제물을 바쳐서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일종에 회개죠. “우리가 늘 하다보니까 안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신호를 보내셨으니까 신호에 보답해서 이제부터는 정신 차려서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하고 성대한 제사를 드립니다.
그 제사를 드릴 때 제사에도 법칙이 있을 것 아닙니까. 비가 안 올 때는 어떤 식으로 절차를 어떻게 해야 되고, 비가 많이 왔을 때는 어떤 절차를 해야 되고, 전염병이 퍼졌을 때는 어떤 절차를 해야 효과가 있고, 또 갑자기 병충해가 있을 때는 어떤 식으로 제사해야 되느냐 하는 그것이 효과 본 하나의 정보가 제사장들, 무당, 왕들에 의해서 자자손손 전달됩니다. 거기서 나온 게 바로 예의범절입니다.
특히 중국 같은 경우에 예의범절이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자연이란 신이 원하는 것을 위반해서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너 하나 벌 받는 게 문제가 아니고 너 때문에 신께서 노함으로 피해를 주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이란 이야기를 다 끊어버리면 남는 게 뭘까요? 예의범절이란 그 집단과 그 사회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 그 규칙,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에티켓, 예의범절이 되겠습니다.
옛날에는 예의범절이 종교화 돼있지요. 그래서 예의범절은 반드시 부모가 자식한테 가르쳐야 되는데 만약에 조실부모했다면 그건 호로 자식이 되겠지요. 그런 얘들은 예의범절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예의범절이 하루아침에 다 못하거든요. 규칙이야 외우면 되겠지만 실습까지 들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거든요. 그런 얘들은 대대로 부모 잘못 만나서 그 사회에서 제일 밑바닥 직업, 제일 험한 직업, 3D 직종에 종사하고 그것이 노예로서 그 자리가 확정돼야 됩니다.
그리고 확정될 때 그렇게 노예생활하고 힘든 생활하는 이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의 순리로 수용해야 돼요. 뭐냐 하면, 내가 짐승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또는 더 나아가서 우리 집안이 뭔가 신이 노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 벌이 자자손손 대대로 이어져서 내가 힘든 일을 하고 백정이라든지 무시당하는 직업을 갖는 것도 이것도 운명이고, 신이 내리는 팔자다. 이걸 고치면 안 된다. 상놈 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 운명에 순응을 할 때 그 공동체는 비로소 질서가 잡히는 겁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교회 나오면서 사람들이 은근히 표현은 안했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조직신학 같은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제가 꼭 구체적으로 예를 안 들어서 다 아시겠지요. 평소에 한 주 동안 뭔가 잘못했을 때,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 일요일에 교회 가서 뭐라고 기도합니까? “내가 안일하게 신을 너무 얕봤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잘하겠습니다.” 회개하고 다음 주에 내가 손해 본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회복이 되고. 그리고 그냥 기도 말고 간절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사 내 노선을 정상적인 노선으로 바꿔주는데 그 정상적인 노선이란, 신의 축복을 받게 되면 그 사회에서 인정받고 높음 받는데 유지가 되고 만약에 신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추락하게 되죠.
이러한 제의를 통해서 신을 달래던 시절이 은둔과 출가자가 나오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종교라고 했지요. 제가 이야기하면 학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학개란 모든 인간을 여호와 유일신화 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그 당시에 언약, 계약을 하거든요. 학개는 다윗언약 시대기 때문에 계약이 있단 말이에요. 다윗계약이 성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내리는 결론은 뭐냐? 여호와의 언약과 성전을 결합해서 온 세상의 성전화. 모든 세상의 마당을 여호와가 친히 개입하는 성전으로 전환시켜버리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전환을 하면서 마주치고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키는 대목이 있어요. 바로 지금 내가 계속 이야기하려는 것, 이방종교의 제단 의식과 제도와 마주치게 되는 거예요. 다윗언약의 성전화로 유다 백성들이 넘어가면 좋겠는데 인간들은 타락한 본성이 이방종교를 좋아하게 돼있어요. 이게 선악과 따먹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처음에 하나님 언약 앞에서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 했잖아요.
그 죄인들의 죄의 경향에 따라서 이것이 다윗언약의 성전 쪽으로 돌아서는 게 아니라 이방종교의 제사화, 이방종교의 종교화로 돌아서는 겁니다. 그렇게 돌아섰다는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이 뭐냐 하면, 지금 그걸 이야기하려고 할게요. 사회에서 계급이 있을 때 항상 계급은 돈으로 측정하는 겁니다. 돈이란 것은,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어서 만족하게 하는 수단이 돈이잖아요. 기본적으로 제사로 뭉쳐졌습니다. 이건 다시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사회는 예의범절이라는 것, 그게 종교화돼있어요. 제가 이런 말하는 취지를 알아야 돼요. 지금 교회도 안 다니고, 절에도 안 다니는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짐승입니까? 그 사람들도 노인네 넘어지면, “일어서세요.” 하죠.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예의범절인 거예요. 노인네가 엎어졌다. 길 가다가 차를 세우고 노인네 일으켜 세우고 다시 운전해 갈 때 마음에 뿌듯한 생각이 들겠지요.
그 뿌듯한 생각이 뭐로 이어집니까? 앞으로 내가 바이어 만나서 거래하거나 가정의 화목에 보탬이 됐으면 됐지 손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어떤 확신 같은 것, 어떤 믿음 같은 게 있단 말이죠. 교회도 안 가고, 절에도 안 가요. 그냥 보통사람인데 노인네 하나 도와주면, 어려운 사람 도와주면 분명히 신께서 나한테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른다니까요. 누가 이 기분에서 떠날 수 있고 벗어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가? 교회 오는 교인들 마음속에 이미 이게 들어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언약적 설교가 성립된다 이 말이에요.
강의 처음부터 해볼까요? 예언자가 왔다는 것은 예언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자기가 죄인을 느끼는 거예요. 죄인을 느끼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빼도 박도 못하고 벗어날 수 없는 신적인 바탕 자체가 새로운 계시 앞에서 죄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자인해야 된단 말이죠. 그러면 기존에 나를 나답게 움직였던 그것은 어디서 찾습니까? 이스라엘 밖, 유다나라 밖에 이방나라에서 찾으면 되는 거예요. 일부러 찾을 필요도 없어요. 그쪽에서 계속 넘어옵니다.
현재 학개 같은 경우에는 다리오 왕 이년이거든요. 536년에 와서 성전 지으려고 하다가 산발랏이란 총독이 시비 거는 거예요. 이쪽엔 스룹바벨 총독이 있는데. “성전 지어서 종교적 힘을 발휘해서 바사나라에 대항하려고.” 그게 아닌데. 그래서 14년 간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다가 520년에 학개가 나섰고 4년 만에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는 판이란 말이죠. 536년은 스룹바벨이고, 학개는 520년이고.
70년 만에 온다는 계산이 586년에서 70년 빼면 516년 돼야 되는데 이걸 606년에서 70년 빼면 딱 맞아 들어가요. 그래서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말이, 586년인지 606년인지 지 마음대로 하는데 70이레로 그 자체가 의미 없게 돼버렸지요. 70년을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주께서 70년이 아니고 70이레란 말이죠.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 학개에서 성전을 지으라고 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생각하는 성전개념은 벌써 이방화된 거예요. 지금 제가 이방화됐다는 게 무슨 뜻인지 30분 내내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 그 설명을 이어가 볼게요.
외국에 수입물자가 탐이 나면 돈을 벌어야 되거든요. 옛날엔 농경시대잖아요. 구약에 나오는 모든 민족들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살펴봐야 돼요. 옛날에 돈을 벌려면 지금도 그렇지만 투자를 해야 돼요. 위험 부담이 있어요. 투자를 어디에 했느냐 하면, 그리스에서 올리브와 포도나무는 외래종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다른 나라의 식물들은 외래종이 되겠지요. 아니면 가축을 하든지. 어차피 10년을 잡아야 돼요. 10년 동안 전쟁도 없어야 되고 10년 동안 계절이 농사짓기에 편하면 나중에 목돈 쥐는 거고, 10년 잡아서 투자했는데 실패하게 되면 그 귀족은 몰락된 귀족이 되고 그 집안은 몽땅 빚을 졌으니까.
옛날에도 고리업체가 있었거든요. 이자도 엄청나단 말이죠. 그것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배로 무역할 때 보험도 있었으니까. 보험 들어놓고 상인들이 무역 잘하면 보험도 사는데 만약에 망해버리면 보험투자하다 보험금 다 날리고 완전히 거지꼴 되고. 하여튼 옛날이든 지금이든 한 번 귀족이 계속 이어가는 법은 잘 없고 항상 귀족을 유지하려면 있는 재산을 쥐고 있는 게 아니고 계속 투자와 투자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업을 벌여야 돼요.
사업을 벌이면서 발생된 게 뭐냐? 돈이란 어제나 오늘이나 내가 돈 번다는 것은 라이벌 하나 거지된 거예요. 그 집안 노예로 다 팔려버린 거고. 내가 죽던지, 네가 죽던지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됩니다. 사회라는 게. 경쟁도 중소기업에서 대기업 되면 끝나는 게 아니고 대기업 입장에서 경쟁을 또 해야 돼요. 중소기업에서 갑자기 부자 돼서 대기업 반열에 들어가도 대기업 텃밭에서 살아남아야 돼요. 대기업은 외국의 대기업과 또 싸워야 돼요. 사채놀이 하다가 제2금융권에 들어가도 제2금융에서 제1금융과 또 싸워야 되고. 거기서 망하면 솔로몬, 토마토 짝 나는 거예요.
계속해서 부자란 위치를 유지하려면 투자와 투기를 계속해야 돼요. 거기서 양산되는 것은 계급화입니다. 노예와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 이런 선지자들이 늘 지적하는 게 뭡니까? 왜 이렇게 하나님 계시는 나라에서 노예와 가난한 사람이 많으냐고 지적하죠. 그리고 또 뭘 지적합니까? 노예와 가난한 자가 많은 이유를 추적해 들어가지요. 그 원인제공자가 누구였습니까? 부자와 권력자죠. 성경에 나오잖아요. 우리는 그런 걸 다 제치고 하나님만 믿자고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예의범절 챙기는 것밖에 안 돼요.
그래서 이러한 사회, 제사중심, 어떤 형식적인 제사로서 기존의 사회 계급을 고착화시키려는 이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마을을 떠나서 숲으로 간 겁니다. 숲으로 갈 때 두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은둔자와 출가자.
제사라 할 때 그 당시 힌두교에서 불을 피웁니다. 불을 받는 것은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제단 쌓고 대결을 할 때 저쪽 제단에는 불이 안 붙고, 이쪽은 제단에 물을 양동이로 부어도 불이 붙었잖아요. 불이 나오면 신이 응답한 거고, 불이 없으면 신이 없는 거고. 이게 8세기, 9세기경이에요.
그런데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거기서 더 발전합니다.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있죠. 엘리야가 그렇게 하고 난 뒤에 지진이 나면 하나님이고, 바위가 터지면 그것도 하나님이 손댄 거고, 바람이 폭풍이 불면 하나님이 손댄 거라고 보던 그 시절에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라. 그럼 어떻게 되죠? 세미한 소리.
그런데 놀랍게도 힌두교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결국 불을 태워봤자 그래서 종교로서 질서 잡아봐야 나오는 결과는 빈부의 격차밖에 더 있습니까. 그리고 계급이 고착화되고. 노는 놈들은 잘 나가고 못 사는 놈들은 점점 더 저쪽은 피라미드니까. 사각형 같으면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이 면적이 같잖아요. 피라미드는 1%, 여기는 5%, 나머지 85%는 가난하더라.
의외로 사회가 어느 게 더 안정돼요? 의외로 사각형이 되면 사회가 안정돼있습니다. 삼각형 되면 어른이 너무 많아. 세 명은 너무 헷갈리잖아요. 일대일로 붙어야 되지 세 명은 헷갈린단 말이요. 항상 모든 일이 다수에서 하나, 일종의 오디션이죠. 8강, 4강, 결승전. 모든 걸 탈락시키는 사회. 그 사회에 대해서 진짜 불로서 형식적인 제사, 여기에 신물이 났고 진저리내는 사람들이 내면의 불을 지피자고 나오면서 세상의 모든 걸 끊어버리고 숲으로 가는 겁니다. 거기는 사람의 소리가 안 들립니다. 사람의 소리가 안 들리면 사람이 아니죠. 사람의 소리가 안 들리면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미세한 소리, 오묘한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나온 게 모든 소리의 근원을 힌두교에서 발견했습니다. OM이고, 일본의 옴 진리교.
이 옴은 바로 왕건이 고려 창건할 때 견훤이 이걸 주장했어요. 모든 모음을 하나로 모으면 옴이 되는 겁니다. 옴만 반복하면 관절염, 류마티스, 고혈압, 소화불량, 부인병, 치통까지 옴을 되풀이하면 치료가 돼요. 그게 발전한 게 부산역에 가면 엿가락 두드리는 아줌마들 있지요. 천리교. 엿가락 같은 그 소리를 듣게 되면 몸의 기가 우주의 생명이 활성화 되어 경락만 찾아다니면서 고장 난 곳을 알아서 깨끗하게 치료를 해준데요. 믿거나 말거나 해보세요. 저주파가 우리의 몸 사이를 옴~. 저주파를 유발시키는 하나의 계시적인 발성, 옴~. 그것이 발견되는 거예요. 세미한 음성.
결국은 이것은 이 사회에서 인간의 몸이 유지된다는 것은 뭔가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노동이란 고통을 따지지 않습니까. 신앙이나 종교나 따지고 보면 노동의 괴로움이 오는 거고, 노동을 왜 하는 거예요? 뭔가 몸이라는 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차라리 죽으면 노동 안 할 것 아닙니까. 안 죽고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치울 수도 없고 어떻게 해결책이 없으니까 노동을 해서 밥 먹여줘야 되는 거예요. 노동을 하려니까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몸은 대자연에서 나왔으니까 차라리 이 몸을 대자연이 자연스럽게 하는 방법에 내 몸을 맡기겠다는 거예요. 맡기는데 현재 이 몸은 세상에 있는 종교 너무 억압돼있으니까 이걸 옷을 벗듯이 벗어버리면 이 몸 자체가 그대로 자연과 자연적으로 교류가 어떤 보이지 않는 음성, 옴~ 하는 것처럼 이렇게 뭔가 교류가 되게 되면 이 몸을 자연에 환원시킬 수가 있고 자연에 그냥 흡수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방종교에서 자식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요. “말로는 안 되겠다. 실제로 보여줄게.” 밤에 소금 덩어리를 물에 넣게 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이 소금물을 먹어보아라. 맛이 어떠냐?” “짭니다.” “짜지.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물밖에 없는데 소금은 어디 갔지?” “소금은 이 안에 다 녹아있습니다.” “그게 바로 아트만이다. 그게 세상의 생명이니라. 우리는 그동안 신을 외부에서 찾았는데 신은 외부에서 찾을 문제가 아니고 내 몸, 내부에 신이 있다는 걸 몰랐던가.” “내가 신이군요.” “그래, 네가 신이야.” 선악과 따먹은 티가 팍팍 나잖아요.
결국 종교란 이 땅에서 살기 힘든 것들에 마약, 도피처처럼 외부로서 튀어나가는 거예요. 튀어나가는 그것이 하나의 방편이 되어서 특수한 도 닦는 종교집단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교회 처음 나올 때는 기복신앙 아니라 하지만 누구나 기복신앙이에요. 어려워서 나왔고, 힘들어서 나왔고. “하나님, 이것만 도와주시면 예수 잘 믿겠습니다.” 그 다음부터 아무 문제가 없고 사는 게 편하고 이런 가운데서 정기적으로 교회 다니면서 뭔가 더 깊은 것, 더 오묘한 것, 더 신비로운 걸 찾다보면 결국은 이 코스대로 어느새 가고 있다 이 말이죠. 가고 있으면서 “복음의 깊은 맛을 봤습니다.”라고 할 때 그게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그게 과연 복음의 깊은 것인지 이방종교인지 분간해야죠.
제가 결론부터 내리겠습니다. 이 모든 종교 또는 학개 당시의 유다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자아 중심성. 학개에 나오죠. 하나님의 성전은 팽개치고 어떻게 자기 집구석만 번듯하게 꾸미느냐? 그것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는 게 아닙니다.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들에게 하는 거예요. 고급빌라단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선지자들은 전부 다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된 원인이 학개에 보면, 바로 이방여자를 만났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그들이 이방여자와 결혼했을까요? 학개 선지자의 지적에 의하면. 여자도 골라잡을 자격이 남자한테 있다고 본 겁니다. 이방화 되면.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못 생긴 것들끼리 뽑으라고 하면 연애대상은 되지만 결혼대상은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세련되고, 잘사는 사람들은 세련돼요 돼요. 그냥 예쁜 것 말고 세련되면서 예쁜 것, 예쁜 것도 수준이 있는 거예요. 천박하게 예쁜 것 말고. 진짜 예쁜, 세련되게 예쁜 것을 추구하게 되면 유다나라 내부에서 찾을 이유가 없지요.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겁니다. 돌릴 때는 막대한 혼인자금이 거기에 투입되겠죠.
그런 것이 왔을 때 못 사는 사람들이 팔자라 하고 있겠습니까? 현실은 그렇지만 항상 뭘 추구하겠어요? 나도 언제 자식 교육시켜서 1%에 내 자식을 던져 넣을 수 있을지. 내가 고생하더라도 내 자식만이라도 이런 상류층에 진입시키고 싶어 하는 충동, 우리 얘는 혹시 천재일까 싶어서 천재는 아니더라도 특수한 기술이 있으면 그걸 개발해서 그 사회에 높은데 들이밀려고 얼마나 애를 쓰겠습니까. 그러다보니까 유다나라 자체가 이방화 돼버린 거예요. 그것은 전부다 이방민족, 옆 나라에서 이방여자가 다 하니까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세련됐습니까?” 자연적으로 그쪽 나라의 문화를 수입할 수밖에 없거든요.
특히 문화란 하나의 물질, 상품으로 오면 다행인데 문화는 그냥 상품 정도가 아니고 상징으로 오는 겁니다. 상품은 쓰다가 버리면 그만이어요. 이태리 오백만 원짜리 가방과 국산 오만 원짜리 가방이 사용하는데 있어서 백 배 차이가 납니까? 아니잖아요. 진짜 실용적인 차이는 얼마 안 되고 상징이죠. 상징이 사람 잡는다니까. 상징은 위신과 관련돼 있잖아요. 체면과 관련돼 있잖아요. 위신과 체면은 인간의 정신적인 행복과 삶의 만족도와 관련돼있는 겁니다. 미제 초콜릿에서 초콜릿이 아니고 미제라는 게 중요하고, 항상 외제가 나로 하여금 나의 위신과 체면을 정신적으로 상징화시켜서 그걸 하나의 나의 우상화, 종교화시킨다 말이이에.
그러니까 학개도 그렇지만 에스라, 느헤미야, 스가랴, 학개 사인방입니다. 사인방이 합세해서 어쨌든 간에 유다나라를 장차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나라로 진짜 하늘나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무척 노력하면서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 이방여자와 혼인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같은 경우에는 강제로 이혼시켰어요. 그럼 아는? 아이는 누가 키우고?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진해서 이혼하든지 강제로 이혼당하든지 알아서 해라. 일종의 권력이죠.
그러니 학개나 말라기에 오게 되면 형식적으로 교회 다니고, 성경공부하고 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삶 자체가 이방 것을 원하고 있고, 우리 몸이 그냥 몸이 아니고 상징화 된 몸, 그런 아트만, 그런 자아를 우리가 신의 이름을 빙자해서 건전한 몸이라고 믿고 있지 않는지 이걸 까발려주는 겁니다. 학개가.
아직 결정적인 것은 이야기 안 했습니다. 그렇다면 학개는 뭘 들고 나왔기에 저쪽을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요소가 뭐냐는 거죠.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바탕이 모든 게 죄였습니다.” 자복하고 회개해야 되는데 뭘 들고 나왔기에 일괄적으로 회개할 수밖에 없느냐? 그건 아까 제가 언급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마당을 하나님의 성전화하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성전이란 예루살렘 그 나라만 해당되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스룹바벨 성전이라 하는데 스룹바벨 성전을 짓기로 해야 될 담당자들이 어느 나라를 경유해 왔습니까? 바벨론을 경유하고 왔죠. 바벨론 다음 나라가 페르샤, 바라나라거든요. 바벨론 끝날 때 왕이 고레스. 고레스 왕이 536년, 사실은 고레스 왕이 바벨론 망하기 전부터 있었어요. 망하는데 직접 개입했죠. 바사나라가 바벨론 나라 망하기 전에 있었어요. 교체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바벨론 영토가 바사 영토가 되는 겁니다. 이때에 왔거든요.
그렇다면 두 번째 성전을 지어야 될 책임자들은 바벨론을 경험한 거예요. 다니엘에 보면 바벨론이 바벨론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나라는 바벨론 새끼야. 욕하는 게 아닙니다. 바벨론이 가지라면 거기에 붙어있는 잎사귀들. 그렇다면 살아있는 가지에 잎사귀가 새로 돋아나고 떼질 때 그 진액은 잎사귀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가지에서 나오죠. 그 가지되는 바벨론을 누가 쥐고 있다? 바로 다윗언약에서 성전을 짓게 허락하셨던 유다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쥐고 있지요. 그러면 바벨론 뒤에 나오는 바사나라, 헬라나라, 로마의 열나라, 세상 끝날 모든 나라는 결국은 바벨론의 다른 얼굴들입니다. 자식들이고, 새끼들이고.
거기서 성전이 파괴되고 움직이는 성전으로서 이것은 건물이 아니고 사람으로서 모여 있던 곳이 바벨론 포로 잡혀있거든요. 에스겔에 보면, “내가 거기에 거하리라.” 하나님의 새로운 처소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전쟁하는 용사가 되셔서 자기 전리품을 만들어놓을 때 홍해를 건너간 그 집단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이 언약적 원칙을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을 제2의 출애굽으로 간주해서 새로운 성전을 만드는데 그 성전은 건물이 주가 아니고 왜 우리는 첫 번째 성전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모양새를 보여줄 때 그것도 매일같이 이뤄지는 것,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는, 학개란 뜻이 나의 절기란 뜻입니다. 내 절기를 지킬 때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죽어야 될 희생제물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그러한 성전, 그것은 바로 장차오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지을 진짜 성전의 모형으로서 학개가 이렇게 있는 겁니다.
10분 쉬고.
한윤범(IP:14.♡.134.60)
12-11-17 15:15
20121113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0-말라기
(강의:이근호 목사)
학개를 했는데 그 중심은 자아중심성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성전이 등장한 것은 여기는 맞은편에 자아중심성이 있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 안 하고 너희 집만 자꾸 생각하느냐? 경쟁적이거든요. 그리고 집 짓는 것도 즐기기 위해서 짓는 것이 아니고 사업에 그것이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차 바꾸는 것도 그렇고. 사업에 유리하기 때문에 일종의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지 취미라서 하는 게 아니거든요. 모든 게 자아중심이에요.
그러면 성전은 자아중심성이 빠져있다는 말은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아까 제가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한 자기 구원, 해탈을 위해서 노력한 것과 똑같이 되거든요. 성전은 다윗언약의 자손이 오시는 거예요. 메시아가 오는 겁니다. 메시아 중심성이지 내 구원중심성이 아니에요. 한국교회에서 이런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괴로워요. 전부다 교회에 종교 활동하려고 오는 거예요. 종교 가져보겠다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팔레트에 빨간색 물감 짜고, 노란색 물감 짜는 것처럼 팔레트 빈 칸에 종교 칸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마치 초등학교 아이들 성적표에 국어 듣기, 읽기 이런 것처럼 끝에다가 기독교 이런 것 있는 것처럼. 그게 바로 인간의 다른 신이에요. 유일신이 아니고. 그걸 지적해줄 때 우리는 해결되는 거예요. 네가 종교란 걸 여러 항목 중에 하나로 따로 정한 그 자체를 공격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있어야 되는데 예수님이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어요.
학개에 보면 또 중요한 말씀이 여러분 아시다시피, 지금 성전 보기에 초라하지. 하지만 장차올 성전은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러니까 이 성전은 건물로서는 의미는 찾지 말라. 회개용이 되는 거예요. 왜 성전은 무너졌어야 했는가? 그리고 왜 하나님은 바벨론 제국 안에 새로운 성전, 건물 없는 성전, 움직이는 성전을 따로 조성해야 되는가? 또 그것이 왜 폭풍처럼 B.C.536년에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인도 하에 그들이 왜 왔는가? 그들로 왜 두 번째 성전을 짓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그 당시에 자아중심성에서는 토지에 대한 개발과 투자, 경제성이 중심이 돼있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은 관심 없었어요. 그것이 말라기에서는 어떻게 되는가를 봅시다. 두 번째 말라기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말라기는 정확한 건 아닙니다. 보통 B.C.440년경이다. 말라기는 계시할 때 느헤미야도 살아있었어요. 그런데 말라기와 학개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이 메시아를 보여주는 연결, 매개체가 된다는 거예요. 매개체란 표현을 했는데 이 말을 검토해보면, 매개라는 것은 촉매와 비슷한 의미인데 매개란 A라는 것과 B라는 것이 만나면 폭발해버려요. 만날 수가 없어요. 만날 수가 없는 그 틈바구니에 매개가 들어갑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이걸 중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중보란 의미는 이면의 만남이 아니라 두 인격체, 사람이란 인격체라 간주하고 하나님을 인격체라 간주했을 때 중보자란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개란 성전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성전은 부동산, 건축물이잖아요. 건축물이 되려면 이쪽은 사람이라는 매개체보다도 여기서 어떤 힘, 이것도 어떤 힘, 그러니까 세상 힘과 천국 힘이 만나면 폭발해버려요. 그래서 폭발을 정화시키고 중재하고 원활하게 평화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전이기 때문에 네가 부자 되고 너희 집 잘 짓고, 이방여자와 결혼해서 너의 인생을 꾸리는 것, 그것은 장차오실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완전히 폭발 직전의 탱크로리에 들어있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집을 지은 게 아니고 탱크로리를 지은 거예요. 그리고 무슨 소리인지 들어보면 심지에 불이 붙은 거예요. 5초 후에 폭발합니다.
여기서 구약신학을 하면서 제가 여러 번 했지만 하도 어렵기 때문에 여러분 이해가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인데 구약의 시간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서 언약에서 말하는 시간관은 인간의 시간관을 공격하고 죄로 들춰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이나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구약의 시간관이 내가 갖고 있는 시간관과 활용할 수 있다고 자꾸 고집을 부려요. 코스모스가 시간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관과 일치되는 겁니다. 해와 달이 갖고 있던 시간관은 하나님과 일치된 시간관이에요. 심지어 마귀가 갖고 있던 시간관도 하나님과 일치된 시간관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청년을 찾아왔을 때 무덤의 청년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여, 왜 벌써 왔습니까? 우리를 멸하려왔지요?”
마태복음 25장에서 지혜로운 처녀, 어리석은 처녀의 기름 준비하는 것 있지요. 그 시간관도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관을 공박하기 위한 시간관이에요. “신랑 올 때 그때 준비하지.” 사실은 종 비유인데 소위 달란트 비유에서 게으른 종이, “주인 올 때 그때 열심히 하지.”라는 그 시간관을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있는 종들은 그걸 극복하죠. 주인이 멀리 떠나도 지금 주인이 있는 입장에서 시간을 체크하라 이 말입니다.
주인이 떠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우리 시간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시간을 적용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깨어있으라가 되죠. 왜? 주님은 도적같이 오기 때문에. 도적이 이미 왔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가 가져야 될 시간관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겁니다. 이로써 우리 나름대로의 소박한 희망이랄지 모든 계획은 그 앞에서 늘 포기해야 되고, 무너져야 되고, 접어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하나님 이번 일만 잘 되면 교회 잘 다니겠습니다.” 이런 것.
그래서 시간관을 설명하면서 어떻게 설명해도 이해한 것 같지 않아요. ‘까지’라는 것이 연속성, 지속의 의미에 강조점이 있지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는 관계없다는 말을 분명히 사용했는데 내가 말을 표현하면서도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몰랐는데 이번에 노래 하나 떠서 굉장히 쉬운 줄 알았어요.
뭐냐 하면, 조회수가 7억이 넘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가사에 “갈 때까지 가보자” 하고 잠시 쉬잖아요. 갈 때까지 가보자는 것은 이후로는 나는 몰라도 돼. 그 말이거든요. 갈 때까지 가보자 하면 나이트 가서 춤추고 그 다음에 숙제하자. 이게 아니고 그 다음 계획은 없고, 지금 놀던 대로 머리 풀고 놀아보자는 것 아닙니까. 소위 현대인들이 사는 게 결국 강남스타일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방주가 나오죠. 방주를 왜 지었습니까? 방주라는 것이 노아 자기 식구들 가만히 하면 되는데 왜 떠벌이면서 산 위에서 짓습니까? 그걸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경고하심이죠. 소리가 막 들리는 거예요. 방주를 만든다는 것은 경고하심이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등불을 상 밑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했지요.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경고용 아닙니까. 오늘날 교인들 보면 누가 경고하는지 분간이 안 돼요. 오늘날 사람들은 그게 아니고 강남스타일입니다.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천국이고 뭐고 관심도 없어.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말라기 주제를 먼저 쓰겠습니다. 말라기의 주제는 재앙으로 발전된 사랑입니다. 뒤에는 사랑이라는 의미, 앞에는 재앙이라는 게 어울리지 않지요. 재앙을 벗어나게 해주는 게 사랑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말라기는 성전이 매개체가 아니고 심판, 성전 지었다고 까부는 그 유다나라의 멸망, 유다나라가 심판받는 그것이 바로 심판이 매개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참 어렵다. 벌 받는 게 매개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세상을 경고하는 경고 등이 되는 겁니다.
내가 너를 택함은 나로 세상의 등불이 되기 위해서. 그렇다면 등불 역할하는 게 뭡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로 나타나는 거예요. 예수님은 말라기를 거쳐서 오신 분입니다. 말라기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예수님 시대에 맞도록 다시 한 번 완성된 의미에서 온 몸으로 증거하시는 분이 세례요한이잖아요. 세례요한이 한 일이 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왔을 때 그들을 향하여 일갈을 날리죠. “독사의 자식들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굉장히 유명합니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고 왔는가?
지진이나 태풍이 불면 원래 사람보다 감각이 예민한 짐승들이 먼저 알고 비상한 특이한 움직임을 보인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말라기 입장에서 뭘 보느냐 하면, 재앙으로 발전된 사랑이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사실은 회개하려고 온 게 아니고 이단인지 아닌지 신학 점검하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멸망 받아야 될 대표자로서 바리새인들을 언급한 이유는 그 당시 유대사회, 유대 모든 집단은 상징화를 누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바로 서기관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죠. 그리고 서기관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종교적인 정신적인 지주라고 누가 옆에서 호응을 해줍니까? 바로 백성들이죠. 지도자를 나무란다고 해서 백성들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항상 같이 엮여져 갑니다.
샌님 같이 공부만 할 줄 알고 컴퓨터 연구만 하던 그 사람을 누가 대통령 나오라고 꼬드겼습니까? 본인이 아니죠. 기성 정치세력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 아닙니까. 대중들이잖아요. 정치라 하는 것은 세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세 힘, 세 소용돌이가 움직이는 겁니다. 세 소용돌이 중에서 두 개가 합치면 두 개의 소용돌이가 합치겠지요. 동양에서 말하는 음과 양이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다수를 하나로 모으려고 하느냐 하면, 그중에서 오디션으로 채택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 이런 상징적인 것이 숙지가 돼있고 관습화돼있어요. 우리 마음은 둘이 싸우면서 하나가 이기는 신화적인 요소가 항상 우리 속에 있습니다. 지난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미토스에서 로고스로, 신화에서 이성으로. 항상 종교가 그런 식으로 정립이 되는데.
지금 말라기에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사랑을 먼저 언급해요. 여러분도 아시듯이 말라기 1장에서 사랑할 때 그냥 “너 사랑한다.” 하면 되잖아요. 자식 둘이 있으면, “내가 너 사랑해.” 이러면 되는데 뭐라 하느냐 하면, “나, 너 믿고 내가 사랑한다.” 사랑은 반드시 미움과 조합을 이룹니다. 이 둘을 합쳐서 애증의 관계라 하죠. 사랑하면서도 밉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싶고. 버리려니 아깝고 차지하려하니 내 뜻대로 안 되고. 이게 부부관계 아닙니까.
서로 대비되는 미움을 끄집어낼 때는 반드시 특징이 뭐냐 하면, 천사가 등장해요. 인간은 빠집니다. 말라기라는 뜻이 나의 사자, 나의 천사란 뜻이에요. 아까 학개는 뜻이 나의 절기라 했지요. 성전이 매개라면 말라기에서는 성전이고 뭐가 인간의 손때 묻은 건 다 빠져. 뭐하려고? 심판을 내리기 위해서. 세상에 자기가 자기 머리 때리는 게 심판이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 안 들으면 벌 받습니다. 하니까 사람들 아이디어가 벌 받을 항목을 지가 만들어내요. 객관식 문제에 항목을 지가 만들어내요. 우리 시험 칠 때는 항목이 네 개였는데 지금 다섯 개 됐어요. 처음 알았어요. 옛날에는 수능은 네 개고 공무원시험은 다섯 개였잖아요. 지금은 수능도 다섯 개 되어서 연필 굴리는 확률을 낮추기 위해서
사람이 자기를 심판한다면 자기가 심판받을 것을 미리 다 예상해서 예상문제를 만들잖아요. 하나님께서 그걸 비껴가는 거예요. 인간의 끄집어낼 수 있는 걸 다 비껴가는 심판이 뭐냐? 내가 받을 심판을 대신 심판 받는 분을 내 앞에 내세워서 나로 하여금 입이 백 개라고 할 말이 없게 만들고 나는 그분의 가해자가 되고, 그 메시아는 나에게 피해자가 되는 이 방식을 주께서는 심판을 하시는 겁니다. “누구든지 아들이 없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기존 세계관도 마찬가지지만 교회 교인들이 예상하고 상상한 그것과 성경의 본 말씀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의 종교성에서 조작해낸 날조한 것들이에요. 하여튼 설교의 입에서 튀어나온 모든 것은 다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그런 것들만 알아서 피하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말라기에 오면 심판에 대해서 면제할 수 있는 일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없습니다. 그냥 당하세요. 그냥 당하면 돼요.
당하면 구원받아요. 어떻게? 미리 당하면 구원받아요. 참 구원받기 쉽죠. 심판을 미리 당하면 돼요. 그런데 우리가 예상한 심판은 그것은 심판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작한 거고. 진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해야 돼요. 그 심판은 유일하게 우리를 대신하신 분이 당한 심판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사도 바울은 그걸 십자가로 표현하면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 그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그 앞에서 너희들이 종교적인 아이디어와 테스트하듯이 생산해내느냐 말이죠. 십자가로 끝난 문제인데 십자가로 끝나서 네 앞에 있는 무슨 군소리가 필요 하느냐. 무슨 아트만이 어떻고, 자아가 어떻고. 숲으로 가서 은둔 생활하고 도피 생활하고. 그런 짓거리가 충분히 인간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기껏 끄집어낸 아이디어 속에 하나 아닙니까.
마치 이런 예를 들면 돼요. 하늘나라 잔치를 베풀었는데 “와서 뷔페 음식 드세요.” 하니까 무당벌레 튀김부터 시작해서 요리가 서른 가지 되는데 전부다 너무 혐오스러워서 입맛을 싹 가시게 만드는. 두 번째 음식은 세계에서 가장 매운 인도의 고추로 만든 음식, 먹으면 입에서 불이 나는. 세 번째 음식은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똥 냄새나는 통조림, 청어 삭힌 것, 이건 홍어 삭힌 것은 유도 아니랍니다. 세계에서 제일 더러운 그 통조림으로 이게 천국이라 할 때 누가 먹겠습니까? 아무도 안 먹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먹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아는 음식들 항목 속에서 먹는 거잖아요.
만나가 그런 거예요. 양식은 양식인데 애굽에서 전혀 맛보지 못한 걸 줄 때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인 예상 밖의 것이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알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생명이 된다.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실컷 배부른 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그 배부른 것을 달라고 왔을 때 주께서 주신 건 뭡니까? 내 살과 피를 마셔라 할 때 이게 드라큐라냐 하고 도망가죠. 항상 주께서는 우리를 예상 밖으로 이끌어갑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주께서 이끄시는 길은 우리가 예상한 길이 아니고 마치 눈 덮인 밭처럼 길이 없어요. 내가 가면 그게 길이에요. 주께서 이끄셔서 가면 그게 곧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예상하겠지요. 이러면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하면 어떻게 행동하고. 그것 다 무시하고 내가 미처 예상 못한 길로 이끌고 갈 때 그게 천국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은? 예상한 길로 가는 거예요. 그게 지옥 가는 특징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가니까. 예상한 길로 가게 되면 미리 시나리오를 짤 수가 있어요. “주여, 이렇게 하고 그 다음에 이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제 기도 소원 알지요?” 이런 식으로. 그런 기도는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 우리가 이방인이니까 기껏 이방인 기도밖에 안 되잖아요.
말라기에서 미움을 등장시킨다는 것은 천사가 하는 일이에요. 천사가 와서 미움과 사랑을 거론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뭘 포기해야 됩니까? 나의 내 사랑, 자아 중심적 사랑을 접어야 됩니다. 이제는 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매로 맞을 준비가 되어 얻어터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미움에 등장하는 나라가 있어요. 말라기 1장에 보면, 에서가 만든 에돔이고, 사랑으로 된 나라가 야곱이 만든 나라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말라기 1장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나오죠. 이게 특이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학개에는 유다가 등장합니다. 다윗언약에 속하기 때문에. 다윗언약의 나라는 이스라엘은 미움 받기 위해서 택했고, 남쪽 유다는 선택받기 위해서 택한 나라에요. 시편 92편인가 나오죠.
여기서 이스라엘이 등장한다는 것은 다윗언약보다도 다른 언약이 깊숙이 개입된 거예요. 그러면 다윗언약은 버리는가? 버리는 게 아니고 레위언약의 완성체로서의 다윗언약, 달리 이야기하면, 주어진 매개체가 성전이 아니기 때문에 매개체가 천사거든요. 다윗언약으로 오실 메시아는 모습은 다윗언약이지만 내용은 레위언약에 준해서 심판을 감행한다는 식으로 말라기 선지자는 우리에게 계시를 전하는 겁니다. 좀 복잡하죠.
2장에 보면 레위언약이 등장합니다. 1장부터 하고 합시다. 1장에서는 미움과 사랑, 사랑과 미움으로 대비하면서 이 사랑은 우리가 우리 사랑한 것은 탈락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는 해당이 안 돼요. 그렇다면 이 사랑이란 뭐냐 하면, 내가 에서를 미워할 때 그 미움을 보면서 비로소 그 배후에 등장하는 사랑, 그러니까 미움이 등장하지 아니하면 사랑은 체험하지도 못해요. 지독한 미움을 미움 되게 만드는 그 힘이 사랑의 힘이 되게 한다. 왜?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독하게 이방인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미움의 저주의 강도를 우리가 받아들일 때
받아들인 사람이 있어요. 18년 동안 귀신 들어서 허리 꼬부라진 어떤 여인이죠. 18년 동안이니까 나이 스무 살 때부터 허리 꼬부라졌으면 서른여덟 살까지 허리 꼬부라졌다고 예를 들 수 있거든요. 아무리 꽃다운 처녀라도 귀신 들려서 허리 꼬부라졌는데 누가 결혼하겠습니까? 사랑한 남자와 아름다운 가정의 행복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드라마 끝에 항상 나오는 그래서 사랑해서 사랑의 결실로 결혼해서 행복했다는 행복에서 이 여자는 완전히 끝나는 거예요. 지독한 미움이죠. 인생, 청춘을 다 날린 거예요. 그 당시 평균수명이 몇 살인데 난치병으로 고생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고, 어떤 청년은 날 때부터 소경.
결국 예수님께서 귀신을 좇아냈다는 것은 뭡니까? 귀신을 좇아내는 자체가 사랑이 아니고 귀신 들린 것부터 시작한 거예요. 귀신 들렸는데 귀신 좇아냈다는 것까지 포함해야 이게 사랑이 되는 겁니다. 또 우리 예상을 빗나갑니다. “하나님이여, 아픕니다. 낫게 해주세요.” 이게 아니라 “하나님이여, 저 같은 인간에게 신경 써서 병까지 들게 하시니 웬 사랑이?” 이건 완전히 미친 사람이죠. “나 같은 인간에게 무슨 특별한 병을 걸리게 하십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는데 어느 날 그 여자가 임신이 될 때 그 남자는 얼마나 심장이 상하겠습니까? 그 남자가 누구죠? 모른 척 하지 마세요. 아시잖아요. 요셉이잖아요. 여러분 사모님이 만약에 임신해서 왔다. 그 사모님이 또 이상한 소리한다. “너 빨리 과거 이야기해라. 나 만나기 전에 어느 남자의 얘를 임신했노?” 천사 가브리엘이 와서, 성령이 와서 여종아 두려워 말라 해서 낳았다면 누가 믿겠어요.
주님께서는 드릴로 구멍을 뚫는 거예요. 자아중심성, 인간은 신이 되고자 자아중심성이라고. 구멍 뚫는 게 사랑입니다. 에서를 미워함으로써 비로소 에돔에 대한 미움과 더불어 동반 작업으로 같은 공사를 하면서 이스라엘을 사랑합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위하여 유다나라는 레위언약에 의해서 혹독한 재앙을 당해야 됩니다. 그래서 재앙에서 발전된 사랑이라고 아까 주제로 이야기했습니다.
2장 3절에 봅시다. 얼굴에 무슨 팩을 하고 있죠. 얼굴에 뭘 바릅니까? 얼굴에 똥을 바르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제물 바친 것이, “하나님, 똥 받으세요.”와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께 받은 재물을 그걸 그대로 장소 이동시켜서 너희에게 주면 너희 얼굴에 똥칠이 된다면 결국은 너희들이 한 것은 하나님 얼굴에 똥칠을 한 거다. 레위언약, 모세언약에 의해서 보면 그래요.
2장 8절에 봅시다.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이렇게 했는데 여기는 레위언약으로 돼있어요. 레위언약이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레위지파의 대표적 직분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느헤미야 끝나기 전에 말라기가 같이 있었거든요. 느헤미야가 한 것이 성전을 제거했습니다. 성전을 제거함으로써 절기를 회복시켰어요. 절기를 회복시켰다면 실질적으로 지금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독립이 안 된 상태에요. 바사나라 있는데 바사나라는 바벨론 계통이죠. 가지에서 진액을 받고 잎사귀가 계속 나왔다고요.
바벨론 가지는 끝났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모든 세상 나라는 한꺼번에 망하는데 음녀 바벨론. 대한민국아 심판한다고 오는 게 아니고 “어이 바벨론, 너한테 심판한다.” 모든 나라는 미국이고 영국이고 중국이고 간에 전부다 바벨론화 돼야 돼요. 이게 아까 학개서에 나오는 전 세계를 성전화시키는 겁니다. 나중에는 레위언약화시키는 거예요. 이미 유다나라가 바벨론을 경유해서 왔기 때문에. 그게 제2의 출애굽 아닙니까.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애굽의 가정의 맏이들은 다 죽어야 하듯이 이스라엘 안 거치면 애굽나라 집안의 맏이들이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전염병이라도 어떻게 한꺼번에 다 죽습니까? 말이 안 되거든요. 그들이 죽는다는 것은 이스라엘만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죽듯이 오늘날 성도만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안 됐지만 세상나라는 안 됐지만 제발 좀 죽어줘야 돼요.
제사장의 지도하에 제사장 나라가 됩니다. 세상의 왕이 지도자가 된다면 왕 자체가 법이 돼요. 왕 자체가 법이 되는 이유는 사무엘상 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모든 나라가 왕의 소유가 되는 이유는, 왕이 법을 만드는 이유는, 신이 왕과 거래하기 때문에 그래요. 백성들과 거래하는 게 아닙니다. “똑바로 해. 그러면 다른 백성들에게 혜택 줄게. 네가 만약에 똑바로 못하면 네 나라 망한다.” 왜냐하면 나라 전체가 왕에게 속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가 다니엘에 보면 나와요.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지배자로 여호와 하나님과 일대일로 간섭을, 지적을 받는 대목이 나와요. “똑바로 해. 공의를 행해야 돼. 안 그러면 너는 짐승이 되는 거야.”
제사장 나라에서 법이라 하는 것은, 제사장 나라의 법을 완성하는 것이 왕이에요. 제사장 법은 제사장이 하는 제사를 위하여 여기에 전부다 달려오는 겁니다. 제사장은 농사짓는 사람도 아니고 장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제사장은 뭐로 밥 먹고 삽니까? 십일조 아닙니까. 그래서 말라기 3장에 십일조가 강조돼있는 겁니다. 십일조를 안 하니까 제사장들이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에 전적으로 매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사장이 제사 지내면서 성의 없이 제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교회가 십일조를 꼬박꼬박 낸다면 그 목사는 십일조 낸 명단을 입수해서 그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