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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세상판 121111우리교회미가

세상판 121111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세상판(미 7:1-6)

이근호

12-11-11 15:43

세상판

2012년 11월 11일 본문 말씀: 미가 7:1-6

(미 7:1, 개역)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미 7:2, 개역)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미 7:3, 개역)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미 7:4, 개역)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미 7:5, 개역)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미 7:6, 개역)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믿지 말라’입니다. 타인을 믿지 말라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네 자신조차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문제만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재앙이로다”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문제점을 지적하고 오실 때는 그 뒷면에 해결책을 갖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찾아오셨는데 그것을 아담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우리의 것을 더 보태주려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려 오신 분’입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어느 곳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신 말입니다. 즉 “지금 네가 빠져 있는 곳의 실정을 알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자신의 처해 있는 곳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빠져나와서 떠나야 될 곳이 필히 기존의 살던 곳이 자신에게 더 유리하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의식으로서는 나오기를 거부하겠지요. 아무리 현재 사는 곳에 문제가 많다고 할지라도 억지라도 그곳에 한 자리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래서 “재앙이다”는 것은 단순히 현 세상을 수정하고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폭파시키는 식으로 조치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멸망을 지정사실화 할 때에, 현 세상에서 인간들의 움직임은 멸망 앞에서 이 핑계, 저 핑계 될 여지가 없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으로 조치하시는 겁니다. 어떤 분이 강의 마치고 난 뒤, 저에게 질의했습니다. “목사님, 롯의 처는 하필이면 소금기둥이 되었습니까?” 이 질문의 취지는 단순히, ‘뒤돌아 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서 그녀는 그렇게 죽었습니다“가 궁금해서 질의가 아닙니다.

쇠기둥도 될 수 있고, 나무 기둥도 될 수 있는 흙기둥도 될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소금기둥입니까 라는 질의였습니다. 이 질의를 받는 즉시, 저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죄를 징벌하자는데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본 취지는 판 자체를 바꾸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삶을 사는데는 필히 바탕이 되는 판이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9:26에 나오는 ‘뒤돌아보면 안돼’라는 원칙은 기존 생활판에 대한 미련을 갖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인이 그냥 유황불이 되어 사라져 죽는 것이 아니라 마치 조각품처럼 소금기둥이 된 것은, 그 지역에 옛적에 바다 밑이라고 소금이 많았고 그 소금에서 솟아오른 식의 기둥으로 변모시키므로서 인간은 기존 판에서 발을 뺄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사나 죽으나 좋든 싫은 기존 생활판 위에서만 놉니다. 비록 그 판이 재앙을 당한다할지라도 다른 대안을 생각 못할 지경입니다. 누가복음 17:28-33에 보면, 하늘에서 유황불이 주어지는 대신 하늘에서 인자가 나타나신답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 ,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바로 이것이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만든 환경이라고 주장할 때, 인자 되시는 예수님은 세상을 멸망 시키기 위해서 위에서 나타나신답니다. 그렇게 되면 평소에 우리가 친구를 믿고 이웃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의도 자체가 문제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습니다. 혈육으로 단단히 맺어진 혈육이 원수가 될 정도라면 이 기존의 세상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힘으로 연결되고 맺어진 바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고 팔고에서 암시되듯이 돈입니다. 돈이란 상대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재판관들이 재물을 탐하고 당국자들이 사리사욕을 취하는 이유는, 이 기존의 세상틀에서 생존이 그런 돈 힘으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런 식으로 돈을 매개로 한 관계로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집안에 돈 문제가 생기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원수지간이 됩니다.

기존의 모든 권력기관은 실은 돈과 돈으로 엉성하게 맺어져 있는 사이들입니다. 신약시대에 나타나신 하늘의 인자되시는 분은 자기 백성과 다른 관계를 맺어십니다. 그것은 복음을 매개로 한 관계입니다. 복음을 매개로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마땅히 살릴 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살게 하는 환경을 말합니다.

즉 “나라는 인간은 진작 죽어야 되는데 아직도 살려주시므로서 살아있다”는 식으로 존재할 때, 그 사람으로 인하여 상호 다른 두 개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돈을 매개로 살아있어야 돼’라는 주장을 하는 측들은 그 사람을 핍박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복음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을 반가워하는 자들도 생겨날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용서를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여기 ‘용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어느 누가 나의 돈을 사기쳐서 뺏아갔다면 이는 내가 용서하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돈 소유로 살려는 본색을 들어내어준 바가 됩니다.

즉 참으로 복음의 매개로 한다면, 가족들을 대할 때, 용서할 마음으로 다하게 됩니다. 비록 돈이 없다할지라도, 가족이 비록 사는 재주가 없다할지라도, 가족들에게 그런 세상적인 성공을 기대한 본인조차도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관계들 때문에 평소에 자신의 생활 태도에 대해서 문제 삼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판이 제시하는 것은 멸망받을 이유를 듬뿍 싣고 찾아온 겁니다. “아, 이래서 멸망당해도 싸는구나”라는 의식으로 세상판을 봐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존 판을 빼내시고 용서판으로 교체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1-12 13:15

16강-미7장1-6(세상판)1211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7장1절에서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96페이지입니다.

미가 7:1-6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

오늘의 주제는 간단합니다. 믿지 말라. ‘믿지 말라’고 하는데 그 믿지 말아야 될 이유는 그 속에 자기 자신의 노림수도 소용없다. 자기 자신이 뭘 기대한다는 자체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고 아까도 기도했지만 억지스러운 거예요. ‘하나님이여, 내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니 뜻 가져와 봐. 니 뜻이 거기 과연 이룰만한 뜻인지 한번 보자.’ 이 말이죠.

우리가 ‘내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것이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기 나와 있는 항목에 해당되는 모든 인간들이 평소에 ‘아버지여, 내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이여 제 뜻 이루어주옵소서.’라는 작자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이러한 판결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말씀을 하시는 문제를 지적할 때, 문제를 지적한다는 말은 다른 해결책이 그 뒷부분에 받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할 때 아담을 구원하지 않으려면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해답이 뒤에 붙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담은 나불나불 자기 변명조를 내놓죠. 뭐 아내가 어떻고 저렇고 이렇다고 하는데,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내를 천사로 봐야 됩니다. 밥 하루 세끼 해주면 천사로 아시고 세끼 안 해줘도 붙어 있는 것만 해도 천사입니다. 안 가고 붙어있어 주는 것만 봐도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지적한다는 것은 뒤에 해결책이 있다는 거예요. 해결책이 없는 인간은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아담아’ 불러냈다는 말은 뒤에 해결책이 있는데 해결책이 미가 7장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1절에 보면 “재앙이로다” “재앙이로다.”는 뭔 뜻이냐 하면 해결책이 있다는 말 이예요. 더 자세히 하면 ‘구원해 봐’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구원이란 뜻은 어디서 건지는 거잖아요. 건지는 것은 빠져있을 때, 허우적거릴 때 빼내주는 게 구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마당에 채워주고 채워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건져내시는 하나님 이예요. 뽑아내시는 하나님!

그러면 그 뽑아내기 전에 우리가 처해있는 이 상황이 이건 정상이 아닌 것을 우리가 간파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문제를 던지는 것은 우리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니가 처해있는 그 상황판이 문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뭔가 미가를 통해서 ‘재앙이로다 내가 무화과 나무 열매를 먹고 싶은데 무화과 열매가 없구나, 보니까 모두다 개판이고 모두다 엉망이다.’라는 조로 죽 해놓고 절대로 서로서로 믿지 말라. 이 말은 이 판을 돌돌 말겠다는 겁니다. 그들이 처해있는 잘해보려고 있던 그들의 현실 판을 이미 재앙으로서 돌돌 말려서 그냥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그 판 위에서 너희들은 지금 톡톡 튀고 있다는 겁니다. 판이 잘못되었으니까 거기서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도 이런저런 문제성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 판이 문제니까 우리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고칠 수가 없죠. 서울에서 지하철 타면 낮에도 역곡, 교대, 강남, 삼성, 사당, 신도림 이런데, 아휴 얼마나 복잡한지 차가 덜커덩거리고 같이 흔들리면 점잖은 사람도 안 점잖은 사람도 할 수 없어요. 버텨야 되니까. 밟히고 부딪히고. 세상이라는 곳이 혼자 점잖게 산다고 살기를 용납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지하철 같아서 흔들리면 다 같이 우루루 저리 흔들리면 우루루 흔들려서 왜 밟느냐, 할 수도 없어요. 내가 밟았나, 저쪽에서 미니까 밟았지. 이런 식으로, 그래서 부대끼는데.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처해있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공동적으로 처해있는 이 상황판이 뭔가 문제 있기 때문에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제가 안양에서 강의 마치고 오는데 어떤 분이 질문을 해요. 질문이 이런 질문입니다. ‘목사님, 롯의 처가 왜 소금기둥이 되었죠?’라는 질문 이예요. 그건 여러분들도 아시잖아요. 소금기둥 된 것은 뒤돌아보지 말라 해서 되돌아보지 말아야 되는데 되돌아 봐서 소금기둥이 되었다. 그건 그분도 아시고 다 아는 문제인데 그분의 질문이 뭐냐 하면, 왜 옥 기둥이라든지, 안 그러면 진흙기둥이 아니고 왜 하필 소금기둥이냐, 그걸 질문한 거예요. 왜 나무기둥도 아니고 쇠기둥도 아니고 대리석기둥도 아니고 밀가루기둥도 아니고 하필이면 소금기둥이 되었습니까? 질문을 할 때 아! 답변을 못하겠데요. ‘이래서 나무기둥이 아니고 소금기둥이다.’ 라는 답변을 그 당시 소금이 귀해서 소금 뜯어먹으라고 한 겁니다. 이런 답변도 안 되고 그래서 답변하는 자체가 구라가 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기껏 즉석에서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소금은 오래 가니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특이한 소금으로 된 인간 모양의 기둥을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이 오래오래 그 사람들의 눈에 띄면서 주의 말씀이 빈틈이 없다는 것, 틀림이 없다는 것을 경각심을 일러주기 위해서 그렇게 소금 기둥으로 했습니다.‘라고 했지만, 그럴 때 ’쇠기둥으로 만들면 더 튼튼하죠.‘ 나오면 할 말이 없는 거예요.ㅎ 뭐 뽑히지도 않고.

그런 질문을 받으면서 느낀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제가 새롭게 인식했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어떤 가정은 잘 믿고 어떤 가정은 못 믿는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고, 판 자체가 이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아마 소금이라 하는 것은 그쪽의 흔하디흔한 광물이었을 가능성이 많아요. 아마 쇠가 많았으면 쇠기둥이 되고 나무가 많으면 나무기둥이 되었을 겁니다. 소금기둥이라 하는 것은 지금도 그 동네에 소금이 많아요. 옛날 바다 밑에 있었던 지형이 올라와서 융기되었으니까. 소금기둥이라 하는 것은 소금으로 인간 형상이 어떤 여자모습이 된다는 것은 현재 소금기둥이란 그 판의 연장선, 그 판에서 솟구쳐 올라온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이 판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거죠.

그러면 인간이란 그 시대의 영향을 안 미칠 수 없고 안 받을 수 없고 지하철처럼 흔들리면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데 거기다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가서 지적한다는 말은 그건 개인을 지적한 것이 아니고 니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라. 이런 조의 말씀이죠.

오늘 본문 하기 전에 소금기둥 이야기를 계속 약간 더해보고 하겠습니다. 판을 바꿔야 되니까. 마태복음 24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이런 본문이 있고 또 다른 본문 누가복음 17장 32절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 롯의 처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 때 롯의 처는 그것만 생각한 거예요. 마치 노아홍수 때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러니까 판을 바꾸란 말은, 또 뒤돌아보지 마라.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마라, 라는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언질 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는 차원이 ‘니 사는데 힘들지? 내가 니 편하게 살게 해줄까? 이 땅에서.’ 그런 차원이 아니고 땅만 보지 말고 하늘 위에서 땅은 어떻게 보느냐, 그런 감각을 가져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그 시선에 의해서 세상을 한번 다시 보자. 보게 되면 기껏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런 것만 생각하는 것은 되돌아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 때 롯의 처가 되돌아봤거든요. 그럼 뒤돌아본다는 말은 지리적으로 이쪽은 불타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그러면 이쪽은 불타지 않는 지역이죠. 불타지 않는 지역에서 불타는 지역을 그리워하면서 애착을 느끼면서 뒤돌아봤다는 것은, 구약 때는 지리적으로 이편과 저편을 지리적으로 구분을 했다면.

그럼 오늘날에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의미가 뭐냐, 오늘날은 그냥 지리적으로 ‘니 기도원에 들어가라든지 도 닦으라든지, 교회 숨어라.’ 이런 뜻은 아닐 것이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전부가 예수님을 비참하게 처리하고 떠나보낸 세상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가신 곳을 생각해야 되지, 예수님을 떠나보낸 이쪽에 너무 애착을 갖지 마라. 그런 뜻에서 뒤돌아보지 마라. 고 적용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이제 본문을 한번 봅시다. 6절에 보면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 지금 이 대목에서는 이 안에 정답이 안 나와 있어요. 문제만 던지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용돈 달라하든지, 돈 없는 아버지 같으면 멸시를 당하죠.

이건 누구한테 들은 이야긴데 아들이 한의사고 며느리도 한의사예요. 그런데 아버지는 뭐냐, 경찰출신인데 퇴직했어요. 경찰출신 퇴직인데 약간의 연금이 있는데 돈을 써도 너무 써요. 동네방네 얼마나 자랑하겠습니까? ‘우리 며느리도 의사다. 우리 아들도 한의사다. 돈 잘 번다.’ 그런데 그 며느리가 얼마나 착한 천사 같은 며느리인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자긍심, 자존심이 외부에 나가서 손상되지 않도록 그동안 막대한 용돈을 준 거예요. 그리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의당 며느리와 아들이 자기한테 용돈을 그렇게 많이 주니까, 아무리 써도 또 주니까 꼭 화수분 같아. 화수분이 뭔지 아시죠? 퍼도, 퍼도 계속 나오는, 엘리야도 아닌데. 오병이어도 아니고. 자꾸 퍼도 계속 나오는 것처럼 내가 이렇게 한번 놀고 다니고 골프 치는지 모르지만, ‘다 우리 며느리 아들이 돈 잘 벌어서 그렇다.’ 그런 식으로 떠벌이면서 쓰던 그런 가락이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한의사 병원이 안 되네요. 보약 지러 사람이 안 와요. 전반적으로 불경기 되면서 이젠 이 착한 며느리가 자기의 착함을 유지하려면 계속 용돈을 줘야 되고, 용돈을 못 주면 착한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반납해야 될 판이라. 야, 갈등생기죠. 계속 착한 며느리로 남을 것이냐, 못된 며느리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그래도 돈을 줘야 될 것이냐. 굉장히 고민이 돼서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니 어른이나 애나 길들이기 나름이라고,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여서 효도한답시고 배운 가정에서 시집왔다는 티를 내려고 너무 시가집에 너무 잘해줬어요. 여기 시어머니가 없으니까 말합니다만 너무 용돈을 과다하게 준 거예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솔직하게 정치적인 타협을 해야 됩니다. ‘아버님, 어머님, 지금 경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애도 학원을 끊었습니다. 그러니 요번 달로 그만 할 수 없습니다. 악한 며느리라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형편 펴면 드릴게요.’라고 해주면 어지간한 시어머니 시아버지도 용납을 하는데, 그쪽 집안은 어지간한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아닌 모양이라. 경찰서에 …

그처럼 이런 시대에서 판이 안 바뀐 시대에서의 모든 매개는 돈입니다. 집안에 어떤 갈등이 있다. 분쟁이 있다. 원인은 돈입니다. 뭐 사랑이 식었다. 좋았다. 원인은 여러분이 이야기해 보세요. 돈입니다. 모든 게 돈으로 엮여져서 집안 식구가, 심지어 내 원수는 집안 식구라고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런 시대, 이 판을 갈아엎어야 돼요.

그러면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이 돈이라는 매개로 하지 않고 뭐로 하느냐,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36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 말씀 인용할 때 사람들이 마음을 자기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 식구끼리 원수가 되는 거예요. 마음을 낮추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매개로, 복음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말은 죽음도 우리 삶의 일부로 간주를 해야 된다는 말 이예요. 그러니까 ‘내가 죽어도 되는데 살아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낮아지는데, ‘나는 안 죽어야 되는데 왜 자꾸 살기가 힘들어.’ 이렇게 돼 버리면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집안의 하나의 분쟁의 씨앗으로 존립하게 돼요. 가정에서 모든 문제가 뭐냐 하면 ‘나는 죽어도 괜찮은데 왜 이렇게 천사적인 혜택을 받지?’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것들이 나를 죽이려고 작심을 했구나.’ 이렇게 나오면 며느리고 아들이고 전부 다 원수가 돼 버려요. ‘이게 지들만 맛있는 거 먹고 나는 아무것도 안 해주고. 저들은 만날 소고기만 먹고.’ ‘소고기 먹으면 뭐 하노.’ 지들은 만날 소고기 먹고 이쪽은 저 푸른 초원위에, 상에 푸른 것만 올라오고 할 때, ‘이것들이 내가 교육을 잘못 시켰나,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어.’ 이렇게 돼 버리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시험 들고 힘들게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3절부터 나옵니다.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재판한다는 것은 법원에 계시는 분들이죠. 법원에 계시는 분이고 경찰에 복무하는 분이고 행정기관에 근무하시는 분이 오직 뇌물과 재물과 사욕을 위하여 서로서로 연락을 취한다. 자기 나름의 특수 공동체를 해서 서로에 대해서는 쉬, 쉬 그러는 겁니다. 우리 갖고 있는 비밀은 남한테 누설하지 않기. 그러면 서로가 신뢰감이 떨어지면 우리 자리가 위태롭기 때문에. 해먹어도 우리끼리 해먹고입 다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뭐냐 모든 게 사적 조직의 사적 이기주의로 통하는 겁니다.

여기 보면 놀라운 사실은 가장 정직한 자라도 그 권력의 맛을 보면 철수가 안철수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가장 정직한 자라도. 그래서 국회의원들은 자기 연봉이 1년에 1억 6천을 받는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족함이 없어요. 왜냐 하면 적어도 4선 정도는 해야 국회의원 할 때 썼던 돈을 겨우 수지타산을 맞춘답니다. 그러니 얼마나 써서 국회의원이 됐는지, 아마 수십억을 썼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은 국민에게 봉사하고 국민을 돕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돈 나오는 구석을 알기 때문에, 돈이 용출하는 돈이 나오는 온천수가 어느 지점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들은 그걸 아는 이상 그걸 덜렁 남한테 넘겨줄 마음은 없는 거죠.

4절 끝에 보면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그동안 사람들이 이웃을 믿고 친구를 의지하는 것은 결국 친구를 위함도 아니고 이웃을 사랑해서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버릇이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돈 나오는 구석이 있다면 기어이 머리 디밀어서 먼저 간 사람이 했던 것처럼 흉내 내면서 자기도 발을 거기다 꽂고서 뭔가 뽑아내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모든 인간 대 인간의 매개는 오직 돈 관계 이외는 사람들 사귈 하들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귀는 이유도 혹시 하나님이 돈 더 잘 벌게 해줄까 싶어서 하나님을 사귀는 거예요.

문제는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판이 잘못된 거예요. 이 판이 개판된 겁니다. 그 개판 위에서 하나님께서는 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먹을 만한 무화과 열매가 없다‘ 했습니다. 내가 여름 실과 따먹을 만한 것도 없고 포도도 먹을 만한 포도도 아니다. 감 같으면 딱딱해서 좋지만, 이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놓고 먹을 과실나무가 나올 수가 없어요. 판이 잘못돼서.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개개인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판을 바꿉니다. 바꾸기 위해서는 재앙이 주어져야 돼요. 파괴는 곧 창조라 했죠? 하나님께서 이 판을 바꾸는 작업을 합니다. 바꾸는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딛고 있는 그 판을 쏘옥 빼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를 딛고 있느냐, 이웃이라든지, 또는 돈 많은 사람, 또는 믿을 만한 친구, 그걸 의지할 때 주님께서는 그 판을 쏘옥 뺍니다. 믿었던 친구한테 사기 당하고 사랑하던 이웃한데 욕을 얻어먹고 뭔가 세상이 살만한 곳이 못되는구나 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할 때, 이것이 미가 7장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웃이 나쁜 것이 아니고 그 이웃에 뭔가 기대해서 뭔가 얻을까 싶어서 그런 안목으로 그걸 의지했던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롯의 처에게 ‘뒤돌아보지 마라’ 한 겁니다. 미련두지 말라는 거예요.

주께서 새로 마련한 그 판은 돈으로 연결되는 판이 아니고, 예수님의 용서로서 연결되는 판입니다. 끝으로 주기도문 이야기하겠습니다. 주기도문 중간에 보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이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니 나한테 사기 쳤지? 나도 사기 친다 하지 말고 ’내가 너한테 사기 당한 것은, 나도 은근히 너한테 뭔가 나올까 싶어서 기대했던 바에 대해서 니가 먼저 선점해서 내 손바닥을 물었기 때문에 나는 결국 사기 당한 셈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사기 당하게 하신 것은 은근히 세상 것에 뭔가 콩고물이라고 얻어먹겠다고 노렸던 우리 노림수에 대한 주님의 할큄이죠. 그것을 새로운 판에서 그걸 노출시키는 겁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함 같이 주님이여 나한테 사기 친 인간을 제가 용서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희가 이 세상에서 미련 갖고 있는 이 잘못을 주께서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가 자주자주 외우는 하나님의 주기도문 안에 그게 포함돼 있습니다. 매일같이 외우지 말고 매일같이 ‘주여 나 같은 죄를, 나 같은 음흉한 마음을 주여 용서하소서. 제가 영원히 거할 판은 어차피 이 세상은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 판을 짜는데 새 판에 짤만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거기 거주할 수 있는지, 우리가 돈을 매개로 해서 하나님 만났는지, 아니면 용서 받기 위해서 주님을 만나야 되는지, 주의 용서로 우리 사이에 그 용서가 끊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피가 끊어지지 않고, 늘 사랑받고 자비와 용서를 받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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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6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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