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20121025b-마12:46(마리아의 입장)33강-이 근호목사
대전20121025b-마12:46(마리아의 입장)33강-이 근호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63)
대전20121025b-마12:46(마리아의 입장)33강-이 근호목사
마태복음 12장 46절부터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어렵습니다. 뭐가 어려운가 하면, 예수님하고 모친과 동생이 나왔지요. 지금 이 관계가 성립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것부터 따져봐야 돼요.
예수님과 모친은 어떤 관계냐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가족 관계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어렵다고 한 거예요. 그럴 때, 제가 어렵다고 이야기한 것이 예수님께서는 ‘~이라.’고 이야기해주면 우리는 어렵지 않아요. 이것을 납작 지식으로 받아먹으면 되는데, ‘~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 아니다.’ 라는 것이 평소에 우리가, 때려 죽여도 ‘~입니다.’ 라고 우리가 우겼던 그것을 끄집어내어서 ‘그것이 아니다.’ 라고 먼저 선수치고 들어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다.’ 하면 우리는 안 들키고 이것, 저것 모든 것 끌어 모으고 자기 것은 안 들키면 되거든요. ‘~이 아니다.’라고 들어오니까 이거는 들어오는 것보다 있는 게 노출되고 발각이 된 셈이에요.
‘~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렇습니다. 이것도 좀 어려운데요. 인간의 전체 가운데 A, B, C, D 요소가 많은데, 한 쪽 A가 ‘~이 아니다.’ 라고 되어버리면, 우리는 요걸 ‘이것은 아니지만, B는 ~일 것이다.’ 라고 우기는 버릇이 있어요.
그런데 ‘~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은 딱 듣는 순간, 이것만 ~이 아닌 게 아니고, 이것 언급하지 않은 모든 것도 ~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이 기분 나쁜 거예요. 선생님이 아이보고 “너는 수학을 잘 못하는구나!”이것은 애들은 용납해요. “니는 돌대가리야.” 이렇게 돼버리면 무슨 문제가 되는가 하면, 이것은 수학을 하든, 체육을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아이를 몽땅 절망에 빠뜨리는 겁니다. 어른이 그렇게 만들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야, 너는 미술하나 끝내주게 잘하네, 기타하나 잘 친다.” 이렇게 해서 너 못한다는 아픔을 트라우마를 지워주는 쪽으로 긍정적인 교육방법을 동원하라고 페스탈로치 교육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긍정적이고 하나의 자의식을 구축하는데,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자의식을 하지요. “아이고, 돌대가리야, 느그 아버지나 느그 엄마가 돌대가리인가보다.” 이리하면 집안까지 몽땅 다 조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이 보기에 분명히 모친이고, 동생은 예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다리를 브리지를 잘라 버립니다. 이 말은 뭐냐, 지금까지 내가 한 소리는 너희들이 헛소리로 들었다. 너희들은 완전히 기존 자기 생각에 빠져서 오해했다는 겁니다. 대구강의에서 한 이야기인데, Timing문제인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를 때, 너는 이제부터 나를 따르라 하니까 어느 제자가 따르겠다고 해놓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장사하고 따르겠습니다.” 그 타이밍이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래? 나는 몰랐네. 아이고, 미안하이, 장사하고 다음날 오게.” 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그 제자의 기존의 자기 세계관, 생활관이었는데, 익히 안다는 식으로 뭐냐 하면, 그럴 줄 알고 아버지 내가 죽였다는 식으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따르고자 하는 것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아니고 여기에서 너를 끄집어내어주는 이런 세계관에서 너를 다른 세계관으로 끄집어내는 쪽으로 나보고 따르라 하는 것이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예수도 따라야 되고, 이것도 나의 업무 중에 하나고 저것도 업무 중에 하나고, 니가 어떤 업무를 하던지 간에 그것은 이미 잠겨있고 갇혀있는 업무다. 니가 나를 따르라하는 것은 나중에 알 것이다. 아버지를 왜 죽은 자로 하는지, 니가 왜 죽은 자 속에 있는지를 나중에 알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이렇게 기존 관계를 끊고 하는 겁니다. 끊고 할 때 이것을 구약에서 찾아봅시다. 구약에 언약이 동원 됩니다. 언약이 동원될 때, 제일 먼저 언약이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노아언약이지요. 노아언약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가 이렇게 피어 있습니다. 무지개는 은혜로 보호한다. 자연 질서를 내가 정상적으로 잡히도록 내가 보호해 주겠다는 식으로. 그 무지개가 있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결국 악한 인간을 팽개치면 물로서 저주받아야 될 세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은 너 때문이 아니고 내가 희생제물을 보고 내가 특별히 보호해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희생의 피를 근거로 해서 너를 보호해 주겠다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개인적인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지구 전체에 대한 보살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추가 될수록 범위가 좀 더 구체화되고 좁혀집니다.
마지막 언약으로 좁혀지게 되면, 오직 누구한테 가는가 하면, 오직 예수님을 손으로 지적하는 언약이 돼요. 이 말은 마지막 언약이 새 언약인데,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하는 거잖아요. 이 살과 이 피를 마셔라, 이것이 새 언약이다. 이 말을 거꾸로 소급하게 되면, 예수님을 필름 통이라 보고 이걸 화면발로 쫙 당겨버리면 결국, 옛날에 있었던 노아언약에 있었던 희생의 화목제물의 피라 하는 것은 사실은 따라가 보면 누구의 피였다? 예수님의 피로서 그동안 악함에도 불구하고 보호를 받는 거예요. 예수님 피로.
언약은 모든 걸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시 한 번 필름을 풀어버리면 확장해 보면,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뭘 모르는가 하면, 네가 지금 심장이 뛰고 햇빛과 공기를 마시는 것이 도대체 누구 덕분이야? 이리 되는 겁니다.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성폭행 범도 그들이 잘 때는, 주께서 지켜주시고 심장을 뛰게 한다 말이지요. 독재자 김정은부터 해서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보험 사기범도 많고 차있는데 뛰어드는 사람, SBS 월요일 7시 45분에 블랙박스에 나오는 거 보면 가관이 아니에요. 보험사기 해먹으려고 차가 지나가고 있는데 확 들이민다고요. 그걸 잡아서 모가지를 확 비틀고 싶은데, 비틀 수 없는 것이 누가 그 사람을 살게 하셔서 누가 안 아프게 하셔서 들이미는 모션을 누가 치게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거든요.
선인과 악인을 상관없이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 말이지요. 지금도 알라신 섬기는데 가면 풍랑을 이루고 있어요. 햇빛과 공기를 줘서 농사가 잘 되게 한다 말이지요. 지금도 공산주의 국가 중국가면 벼농사 잘되고 수수밭에 가면 엄청난 수수밭이 끝이 없어요. 세상에 그런 축복을 받아놓고 그들은 누구한테 돌립니까? 중국의 홍콩사람, 대만사람 가보면 만날 조상한테 드린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의 관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런 언약을 모르고 기껏 옳은 게 뭐냐, 조상이에요. 조상이 키워줘서 씨족이 되고, 씨족이 커져서 부족이 되고, 부족이 커져서 국가가 되는 겁니다.
국가라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뭐냐 하면, 혈연중심, 혈연관계에요. 물론 다민족 국가가 되면 혈연관계에서 이익관계로서 사회가 돼요. 게만 샤르크 해서 테니스란 사람이 그렇게 정해놨는데. 현대 국가에서 물론 다국적 기업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가서는 결국 믿을 것이 뭐냐, 조상인 거예요. 조상.
불교의 회심곡 같은 경우는 사람에 대한 뿌리가 있는데, 그 뿌리라 하는 것은 니가 뿌리를 모르고는 니가 인간이라 할 수 없다. 뿌리가 누구냐, 조상이란 말이지요. 어떻게 조상을 잊어버리고 니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 우선 니부터 챙길 때는, 모든 이가 잘되고 하는 것은 조상 덕이니까 먼저 조상부터 챙기고 죽은 조상도 챙기지만, 살아있는 조상도 섬기고 그래야 니가 복을 받는다. 그래야 짐승으로 사는 게 아니고 사람으로 사는 거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민족을 한민족이라 하지요. 단일민족이라 하잖아요. 언제부터 단일민족이지요? 인간 세포내에 미토콘드리아 있고, 미토콘드리아 안에 DNA가 있어요. DNA를 조사해 보면 한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고 북방계통과 남방계통 둘이 합친 겁니다. 쌍꺼풀 쪽은 주로 남방계통 베트남 계통이고, 쌍꺼풀 없고 얼굴 길쭉한 것은 북방계통에서 온 거예요. 둘이 합친 거예요. 우리나라 역사에 보면 삼한시대 있지요. 마한, 진한, 변한, 그 시대에 보면 그 당시에 이미 중국에서 떼로 밀려온 거예요. 전쟁 통에 밀려온 거예요. 특히 주몽 같은.
그러니 여기서는 씨족에서 부족으로 넘어갈 때는 이미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고 추상적인 이념관계로 바뀝니다. 이념으로 바뀌면 혈육+경제적 이익이 되는 겁니다. 그 때는 이제는 돈 있는 사람이 돈 없는 사람을 종으로 부려 먹고, 종은 잘사는 집에 가서 빌어먹고, 그렇게 하면서 그 중심은 그 씨족 잘사는 쪽으로 재편성이 된다 이 말이지요. 편성이 되면, 조상도 자기 조상 버리고 자기를 키워주고 자기를 살려준 잘사는 그 쪽 조상이 나의 조상보다 우수한 조상으로 인정해줘야 됩니다. 잘사는 권력 있는 조상의 그 조상을 조상되게 한 그것이 뭐냐, 우리가 아는 바로 ‘신’이에요.
모든 신은 반드시 그 뒤에 뭐가 있느냐, 신화가 따릅니다. 신화로 만들어지면 그 때는 단일국가가 돼요. 이제는 우리 조상 훌륭했다, 그런 것은 교과서에 안 실리고 우리 민족의 신화, 우리 민족의 조상은 교과서에 실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이씨 집안의 조상은 퀵 하고 고개 숙여야 돼요. 저 쪽 어른 신에게 우리 조상신은 양보를 해야 됩니다. 10월 3일날 개천절을 위해서 우리 조상은 양보해야 될 때에 양보 좀 해야 돼요. 자기 조상 제사일 이라고 국기 달고 이러면 법에 걸리고 안 됩니다. 이게 바로 적응이에요. 우리가 그 사회에 밥 먹고 살려하면 빌어먹으려하면 큰 데 몸 바쳐야 돼요. 큰 데 집단에 몸 받쳐야 됩니다.
자, 이렇게 될 때, 제가 왜 이런 말 하는가 하면, 마태복음 하면서 왜 이런 말 하는가 하면, 육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육체로 시작하였던 것이 하나의 ‘국가’ 이걸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어느 인간이 국가를 이깁니까? 예수님이 살해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한테 살해당했습니까? ‘육의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국가라는 힘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반발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반발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반발 안해야 된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해서는 반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가 밥 먹는 것보다 더 철칙으로 우리는 익히 온 몸으로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에 들어오면 문 안 열어줍니다. 그러나 경찰이라 하면 우리는 문 열어주게 돼 있어요. 왜? 경찰이니까. 경찰에게 문 안 열어주게 되면 불이익이 오게 되고 어느 중에 우리는 경찰이 우리 집에 안와도 경찰이라는 그런 배경 안에 우리는 살고 있는 거예요. 뭔가 집안에 일이 있으면 112에 전화하는 겁니다. 왜? 경찰이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에.
그런데 이방인들, 외국인 노동자들, 이 사람들은 경찰을 못 부릅니다. 부르면 불법 이민자로 걸리면 들통 나기 때문에, 미국에 오래 산 사람은 미국 경찰을 부르지만, 미국에 갓 이민 간 사람들은 다른 국가를 찾는 것이 아니고 같은 일가친척을 찾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찾다가 오래 살면 일가친척보다도 힘이 누가 더 세다? 미국이 더 세기 때문에 하루 빨리 시민권내지 영주권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한국에 있는 아버지는 “야, 야, 거 미국에 있지 말고 빨리 군에 가라.”하면 조금만 있으면 영주권 얻어서 군에 안 가도 돼. 이리 나오지요. 제가 말하는 모든 것은 육은 육이 만들어 놓은 육이라는 그 가마솥을 안에 놓여있는 육으로 이해해 달라는 거죠. 육이라 해서 내 육체만 육이 아니고 이 육체는 진공 속에 그냥 포장된 육이 아닙니다. 들끓는 팥죽 속에 그냥 오르락, 내리락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러한 작은 알맹이에 불과한 것이 육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육이라 하는 것은 이 육의 세계 전체를 이야기하고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예수님에게 저 뒤에 모친과 동생이 와있습니다. 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소리 한다는 자체가 자신의 육신을 환경과 더불어서 봐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자기 육체만 달랑 따로 떼어서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지금 예수님은 우리가 육에 있는 환경전체를 통괄해서 보고 있는데 예수님 이야기를 그냥 환경은 제쳐놓고 “저 말만 내가 믿으면 돼.” 하고 자꾸 자기가 어디에 속해있는가를 감안하지 않은 채 예수 믿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거, 그걸 지금 지적해 주는 거예요. ~이 아니다, 라는 쪽으로 예수님은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니는 니가 선택하고 결단내리면 다 니거 되는 줄 아는데, 니는 니 결단 이전에 결단과 상관없이 니가 지배받고 있는 어떤 권력과 세력 속에 놓여있다는 거예요. 그걸 주께서는 일러 주는데 그 권력은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광야에 갔을 때, 아무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누가 나타났는가, 성령이 나타났었지요. 성령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혼자 뒀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예수님과 맞상대하기 위해서 누가 등장했습니다. 누굽니까? 예수님이기 때문에 악마가 등장한 거예요. 다른 것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가만히 놔둬도 자기 안에 자기 수하인데 자기 쫄다구인데 나갈 이유가 없잖아요. 늘 상 악마의 지시받고 사는데 새삼스럽게 나갑니까? 늘 악마 시키는 대로 하는데.
예수님이기 때문에 악마가 등장하는데 이걸 누가 주선했는가, 성령님이 주선했습니다.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악마와 붙으라 해서 예수님을 마귀에 맞닥뜨리게 했습니다. 왜 예수님과 마귀가 만나야 하는가 하면, 그동안 인간들이 헤어날 수 없게 된 이유가 마귀가 그 정보를 가지고 와요. 세 가지였습니다. 이걸 세 가지 시험이라 했지요. 시험이나 test라 하는 거예요. 이 테스트는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이걸 보는 게 아닙니다. 이 테스트는 현재 예수님의 신분을 예수님의 위치, 예수님의 자리, 이것을 더욱 더 분명히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건드려 보는 식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마귀로 하여금 활동케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누굴 시험했습니까? 아브라함을 시험했지요. 믿음을 줄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믿음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들을 받치라 했잖아요. 니가 아들을 사랑하지만, 니가 받은 믿음은 니 아들보다 더 중요한 요소다 이 말이지요. 니가 사랑하는 아들보다 더 중요한 믿음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들 죽이라고 그야말로 그렇게 한 거예요. 우리에게 환난과 핍박이 오는 것은 환난, 핍박보다 더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환난과 핍박이 오는 것처럼, 전부 다 그런 환경 속에 있는 겁니다.
자, 이렇게 할 때,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예수님 말은 듣지 말고요, 마귀의 말을 들어보세요. ①사람은 떡으로 산다. ②메시아 일은 성사 되어야 된다. ③세상은 모두 가치 있다. 이 세 가지가 마귀가 이야기했는데 한 번 분석해 보겠습니다. 산다는 거, 결국 마귀가 이거 가지고 다 조져 났어요. 우리가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이 말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는 것이 말씀이라면 당연히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뭐냐, 말씀이 살아있을 때를 산다고 하지, 지금 살아있는 이것을 가지고 산다고 하지 않는다 이리 본 거예요. 인간으로서 이걸 보면서 우리는 누구 편을 듭니까? 결국 우리는 마귀 편을 들 수밖에 없지요. 왜? 우리는 이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안에 속해 있는 육이기 때문에 “그래, 떡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돈으로 산다, 사람이 돈이 있어야 돼! 돈 없으면 죽는다.” 아주 편하게 생각하잖아요.
돈 벌라 하면 노동 있어야 하고, 노동은 내가 하니까. 내가 나를 살리는 식이다 이 말이에요. 마귀가 그렇게 교육을 시켜왔던 겁니다. 사실은 이 말 말고는 다른 상상을 할 수가 없어요. 그 다음 두 번째는 메시아 일은 성사 되어야한다. 니는 메시아다 이 말이지요. 마귀가 이야기합니다. “당신 메시아잖아.” 메시아 같으면 메시아답게 기적을 베풀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한테 몰려오도록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세 번째는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도 의미 없는 게 없고 다 의미 있고 다 중요한 것이라는 겁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그거 다 피땀 흘린 것이고 하나 버릴 게 없다는 거예요. “부귀영화 나한테 전하면 모든 걸 의미 있는 것으로 느껴 줄게.” 하는 거예요. 방금 우리가 마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럼 문제를 내 보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을 해야 되는가, 솔직하게 답변해 보세요. 메시아는 실패하는 게 성공이죠, 떡으로 산다는 것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모두 가치 있다는 것은 떠나는 것이 사는 것이죠. 지옥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지옥이기에 떠나고, 실패해 버리고, 죽는 것, 이걸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려고 교육 받은 적 없습니다. 우리는 이걸 상상조차도 하기 싫어요. 행여나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서 우리는 겁내서 교회로 점치러 오잖아요. 이리 되는 게 싫어서 오잖아요. 마귀에게 부딪혀서 마귀 만나러 교회에 온 셈이 된 거예요. “마귀여, 도와주소서!” 그러니 우리는 예수고, 부처고 예수 믿는다 하지만 못 하고, 내편 돼주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고, 내 뜻에 거슬리면 난 그 사람을 반대할 것이다. 조국이라는 거, 민족이라는 거, 그것도 다 핑계예요. 나한테 잘해주면 그것이 나의 제2의 조국이 되는 것이고, 나를 힘들게 하면 나는 그 조국을 배신할 것이다.
독일인이 독일을 반대해서 독일과 싸웠던 사람이 1만명 됩니다. 기생 라합만 그런 게 아니에요. 기생 라합은 배신한 게 아닙니다. 2차 대전 때, 독일을 반대해서 영국으로 피신한 사람이 영국군과 합세해서 독일을 향하여 대포를 쏘고 밀어 붙이고 영국군과 합세한 사람이 일만 명이 넘어요. 처음에는 영국군에서 이 사람들이 공명부대였어요. 전투에 참여 안했습니다. 나중에는 독일의 기밀이 필요해서 들어가서 혁혁한 공을 많이 세웠어요.
그러니 인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마귀일 수밖에 없는 것은 오직 누구만 사랑한다? 나는 나만 사랑한다. 나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걸 아시고 뭐라 하시는가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이 말씀은 이 세 가지 속에 다 포함되어 있어요. 떠나자, 따라오라,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니까 자기의 포부와 기대와 뜻을 포기하고 실패하자, 그 다음에 십자가 지라,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죽어라. 결국 예수님이 하신 말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야, 우리는 때려 죽여도 이 말은 못 지키는구나!” 아시면 그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참 쉽죠.
그러니까 악령 받은 사람은 이걸 지키겠다고 나설 때, 이것은 뒤에 있는 악마가 잘한다! 잘한다! 자꾸 부추겨 주는 거예요. “야~ 인간의 지혜가 높아진다, 우수한 존재가 되는 거야, 이젠 누구한테 기죽지 않아, 그 정도 믿음 같으면 칭찬받고 복 받을 수 있어. 조금만 하면 복 받게 돼, 조금만 하면 가정이 잘 풀리고, 자식이 잘되고, 잘할 수 있어.” 자꾸 격려로 마귀로부터 도와주는 거예요.
마귀가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고 했으니까, 말씀보고 QT하고 이러면 그게 늘 살려준다. 말씀 보는 것은 좋은데, 산다는 의미가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지가 원하는 멋들어지게 한 번 보란 듯이 복 받는 식으로 한 번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그런 야심을 말씀공부하면 그걸 복으로 채워주는 쪽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부흥사가 사치치는 것에 말려든 겁니다. 부흥사 좋아서 부흥사한테 온 사람 없어요. 저 부흥사 말대로 하면 지금 내 고민거리를 어떻게 해결되는가, 해결 보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진짜 부흥하려면 강도가 와야 돼요. 강도가 오고 세리, 창녀가 와야 돼요. “제가 창녀 짓을 했지만 구원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해야 된다고요. “내가 남자 여럿 고셨습니다. 나한테 안 넘어 간 남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식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이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면 목사들이 성질내며 덤벼든다고요. 무슨 일이든지 참되며, 무슨 일이든지 정결하며, 이걸 빌립보서에 나오는 것을 막 대고, 마지막 때는 항상 거룩하라, 했으니 거룩하라고 막 집어대는 거예요. 그런데 목사들이 그 말들을 들이댈 수 없는 이유가 그 말씀은 들이대는 니도 그걸 지킨다? 못 지킨다? 너도 못 지킨다고 주신 말씀이에요. 그러면 그 창녀가 “목사님, 그러면 당신은 지켰습니까?” “당신도 나한테 고셔볼래요?”
주홍 글씨, 호손이 지은 책을 보면, 작가가 한심스러워요. 기독교가 아니라 청교도예요. 청교도와 기독교는 반대거든요. 그 사람은 청교도를 가장 참된 기독교로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기독교가 아닌데, 목사가 가슴에 주홍 글씨 쓰고, 그러니 악마가 빙그레 웃는 거예요. 그게 놀아나는 겁니다. 마귀의 시험에 놀아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청교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청교도처럼 살아서 내가 나를 원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게 아닙니다. 절대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청교도 되었다는 그 자체를 사랑하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은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서 멋있게 된 나를, 자신의 격조 높은 나, 우수한 나, 누구에게도 끌리지 않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완결한 나,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 그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지금 그 교육을 제자들이 받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보고 모친과 동생을 연결시켰습니다.
그 다음 중요한 문제는 그러면 막상 모친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 오늘 본문에 안 나오지요. 모친은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해서 천주교는 마리아를 주장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화가 나니까 개신교에서는 마리아 까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과연 마리아가 욕 얻어 먹을 위인이 되느냐가 문제예요. 그것은 하도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등장시켰는데, 천주교가 등장시킨 이유를 제가 이야기했지요. 요번 수련회 때 했잖아요. 국가교회에서 어떤 신앙을 할 때는 신앙이 아니고 민족을 집단적으로 개종시키는 거예요. 민족을. 진짜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게 있어요. 바다를 향하여 돌격해서 전부 다 일개중대를 세례 준 적이 있다는 거예요. 로마군대가. 수련회 때, 했는데 책 나오면 보세요.
국가종교라 하는 것은 신앙이 문제가 아니고 군주의 종교가 모든 백성들이 다 따라줘야 나라꼴이 돼요. 다시 한 번 해볼까요? 몸은 태어나서 혈육이 되고 혈육은 씨족이 되고, 씨족은 부족이 되고, 부족은 국가가 되고 이럴 때, 국가라 하는 것은 각 개인의 성씨를 무시하고 제일 권력이 있는 왕이지요. 왕의 혈족에 다른 사람들이 전부 다 따라줘야 되는 거예요.
이씨조선이라 하는 것은 일본이 그렇게 말하는 거지만, 이씨 노선의 전주이씨 앞에 나 같은 경주이씨는 잽이 안 되는 기라, 전주이씨 모시는 사당은 거창해도 경주이씨는 산속으로 해서 초라하게 할 수밖에 없어요. 어디 감히 나라님의 조상님에다가 나라님의 조상도 아닌 것이 어떻게 대들어요. 그냥 국가단체가 이미 서열화, 계열화 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자진해서 백성들이 동의를 한다니까요. 동의 아니면 경찰이 와서 잡는데요. 뭐~
현직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이 만약에 다른 집 아들이었다면 경찰이 와서 대번 잡아가야 돼요. 대통령 아들이기 때문에 경호원 붙여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한다고요. 나 같으면 탁 멱 잡고 잡아당기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왜? 대통령이기 때문에.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았다는 말이거든요. 나의 권한을 당신한테 위임하고 나의 주가 되어 주세요. 라고 선택해서 뽑은 거예요. 이런 국가라는 구조 안에 이미 예수님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철도 없이 “우리 예수님의 제자다. 나는 예수님 믿어. 예수님 말씀은 다 속속히 들어와!” 속속히 들어올 것 같으면 니 아우라는 마귀한테 쳐져있는데.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아까 노아에서 아브라함에서 새 언약까지 간다 했지요. 가면 갈수록 범위를 넓혀버립니다. 전체 지구상을 보호해 주는데 그 보호가 어디서 나왔느냐 아까 했지요. 점점 더 세밀화 되면서 죄가 이 세상에 있는 구조의 죄를 죄의 측면에서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세밀하게 들어가게 되면 노아언약 바로 지나서 그 다음에 뭐가 되는가 하면, 어떤 종족은 축복받고 어느 종족은 저주 받고, 가나안과 함은 저주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 받고, 그 다음에 더 나아가면 아브라함 중에서 이스마엘은 저주 받고, 이삭은 살고, 점점 좁혀가면서 세상이 점점 더 죄라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비멜렉 추장 같은 경우는 아브라함의 부인을 범하지도 않았어요. 범할 뻔했는데 그 집안의 여자들 전부 다 수태를 못해버려요. 그러니까 세상 움직이는 것은 나의 노동과 나의 선택이 아니라 누구 하나 중심지에서 조정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조정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몰라요. 세상 사람들은. 사실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인데. 예수님에 의해서 세상은 움직이는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선택, 노동에 대한 대가가 없을 때는 자살해 버리고 아, 더러운 세상 나 죽어 버려야겠다. 이리 하잖아요.
중심을 모르니까 중앙을 모르니까 뭐든지 내가 선택해야 돼요. 종교도 내가 선택하고, 예수 믿을까? 석가 믿을까? 이것도 내가 선택하고, 교회도 내가 갈까? 내가 선택하고, 그런데 진짜는 모든 선택은 뭐로 바뀐다고 했습니까? 결국은 필연으로 바뀐다. “전부 다 예수님께서 하셨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것도 다 예수님 몸에서 나온 십자가의 공로로 됐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수시로 그걸 느끼게 한다 이 말입니다.
그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모든 전체를 정육면체라 할 때,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이 파고 들어가서, 제일 중앙에는 예수님이 계시니까, 점점 더 파고 들어가면 여기서 무슨 요소가 보이는가 하면, 저주의 요소가 확대되고, 축복의 요소도 여기에 보여 지고, 더 파고 들어가면, 축복이라고 여긴 곳에 또 저주가 있고, 축복이 있고, 또 들어가면 축복받았다는 이스라엘 속에 저주가 있고 축복도 따로 있고, 축복 받았다는 다윗언약 속에 또 저주가 있고, 또 축복이 있고, 유대나라에 다윗지파잖아요. 유대나라 사람들이 자기가 축복 받았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워 놔라, 니가 못가고, 이방인들이 찰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항상 예수님이 말씀하는 곳에 항상 범위를 “우리가 이만하면 축복입니다.” 하는 것도 뭐로 바꾼다? 저주스러운 것으로 바뀌는 거예요.
마리아 같은 경우에 봅시다. 마리아는 자기가 임신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고 덜컥 임신이 됐어요. 임신이 됐는데, 마리아의 임신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랑하는 남자 있었지요. 요셉과 약혼만 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요셉과 동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임신을 시켜버린 겁니다. 그러면 요셉의 역할은 뭐냐 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 마리아를 보통 아가씨로 보는 역할을 요셉이 해야 되는 거예요. 제가 마리아이야기를 할 때, 항상 예를 드는 것이 뭐냐, 구미공단 여공을 하는데 제가 왜 하는가 하면, 대구살고 공단에 살아봤기 때문에 공단에 보면 출퇴근시간에 아가씨들이 머리에 수건 묶고 굉장히 많이 나와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아가씨 거기에 다가있어요. 공장에 다가있어요. 마리아는 그 공단의 아가씨들 중의 한 명이에요. 너무나 평범해요. 특이한 사항이 없습니다. 그 눈으로 누가 봐야 한다? 요셉이 그런 눈으로 봤다는 증거로서 요셉이 등장해야 돼요. "우리 마리아 사랑하지만 특별한 아가씨는 아니야."라는 고백을 요셉이 해줘야 한다 이 말이지요.
그렇게 해놓고 결혼을 하니까 임신을 하니 누가 당황스럽습니까? 요셉이 당황스러운 동시에 요셉이 얼마나 침착한 사람인지, 요새 그런 남자 없어요.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했지요. 요셉이 벌일 수 있는 일은 다했어요. 요즘 성령 받은 남자라면 이렇지요. “어떤 남자 임신했어?” 요번에 주례사 했던 내용 봤습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할 때, 아무런 조건보지 않고 사랑했다는 것을 평생 결혼생활하면서 다 보여줘라, 여자가 어떤 짓을 해도, 그래 그런 조건보고 처음부터 당신의 조건보고 고려해서 결혼하지 않았어. 무조건 사랑했어, 라는 그런 조건이 나올 때마다 그런 식으로 남자는 여자를 배려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지요. 말도 안 되는. 더 무섭지. 일체 어떤 조건보지 않고, 탓하지 않고, 무조건 무조건이야, 이게 결혼인데, 사랑인데.
요셉 같은 경우에는 그러지는 못하고 남의 남자라고 해서 가만히 끊고자 했다 말이지요. 지금 요셉이 성령 받아서는 안 그래요. "뭐? 니가 바람피웠어? 바람 피워도 좋아! 나는 니 사랑해, 애는 내가 키울게." 적어도 이리 나와 줘야 그게 성령 받은 사람다운 거지요. 호세아에 나오잖아요. 호세아.
호세아 알지요? 여자가 바람피워 애를 낳으니까 자기 자식처럼 봐주잖아요. 데려와 값을 내가 치러줄게. 그 호세아의 값이 뭐냐, 사흘 만에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우리가 하나님도 모르고 평생 동안 엉뚱한 짓을 해놓고 그 대신 그 값은 예수님이 다 치러서 구원 받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요셉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마리아는 새로운 세계에 도립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요셉과 결혼하면서도 사실은 결혼의 의미가 없이 되어 버렸어요. 자식을 낳더라도 자식 이전부터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의 관계는 이미 주님으로 결혼이 아닌 셈이 돼 버렸어요. 한마디로 마리아는 훌륭한 여인이에요. 세상에서 볼 때. 엘리사벳은 옆에서 약 올리고 있지요. "복된 여인아! 니가 복된 분을 메시아를 잉태하다니? 세상에, 저렇게 복이 있다니."하고 사촌언니가 그렇게 하지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주변의 제자들이나 남편들이나 온갖 수모와 오해를 한꺼번에 다 받으면서 살아야 될 그런 여인입니다. 그런데 지 수모당한 걸로 구원 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이게 중요한 거예요. 천주교에서는 이걸로 구원 받는다는 거예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지 지 수모당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또 마리아가 요한복음2장에 보면, 예수여, 이 결혼식에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했을 때 예수님은 그냥 이야기하지 않고,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그 때, 마리아가 삐졌습니까? 삐진 게 아니고 종들 보고, 저 분이 시키는 대로 다 해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 결혼식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예수님과 우리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마리아는 알지요. 그래서 마리아는 끝까지 중간에서 육의 사람과 영의 예수님의 사이에서 애매하게 수난 받는 자리에 마리아가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애매하게 수난 받지요. 그리고 마지막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는 마리아가 그 자리에 갑니다. 예수님 시신 찾기 위해서 가지요.
그 다음에 동생들, 동생들은 요셉하고 낳은 자식들인데, 밖에 섰을 때에, 48절에 봅시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야~ 이 말이 어려워요. 거기에 혹시 연세 많은 아줌마가 있습니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럼 동생들은 젊은 사람을 이야기했습니까?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구, 모친 오셨네요." 나이 많은 사람보고. 예의상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모친과 동생들이 왔습니다. 하고 제자들이 모친과 동생의 용어를 동원시켰잖아요. 그 동원시킨 데다가 뭘 묶어버리느냐 하면, 육의 속한 것을 한꺼번에 다 묶어버리는 거예요. 이 좋은 예가 뭐냐 하면, 엿판에 보면 하얀 엿도 있지만, 중간 중간에 땅콩이 섞여 있지요. 땅콩도 투명하게 보이고 엿도 중간 중간에 있잖아요. 이 땅콩이 바로 모친과 동생이라면 거기에 같이 달라붙어있는 엮여져 있는 모든 엿은 사람들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런 육의 관계에 엿 같은 육의 관계에 나를 끼워 넣는 식으로 나를 이해하지 말라, 나는 따로 편성하는 거예요. 새로운 관계, 이 새로운 편성이 뭐냐 하면,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이냐, 누가 내 혈육이냐, 나와 관련이 있느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모친이라 했습니다. 야~ 이 말씀 난처한 말씀입니다.
왜 난처한 말씀이냐 하면,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때려 죽여도 그 사람은 예수님의 한 형제가 될 수 없고, 천국 갈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려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야기한다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한 명도 천국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너희가 너희를 만들지 말라.’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드니까 예수님하고 어떻게든 엮여보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엮였다가는 너희가 생각하는 너희세계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고 누가 만드는가? ‘내가 만든다.‘ 뭐로 만드는가? 말씀대로 만들어내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모친이요,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고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성령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간단히 말로 되어 버리잖아요. 이 복잡한 말이, 긴 말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으로 간단히 돼버려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 것이 해답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은 “안 만들어주면 어떻게 하느냐?” 안 만들어 주는 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요. 예수님이 만들건 안 만들건 예수님 소관이지, 왜 나한테 묻습니까? 나한테 묻는 것은 예수님은 안 믿어지고 나한테 뭔가 아이디어를 얻겠다는 게 되거든요. 그거는 나는 십자가를 진 적이 없습니다, 이리 되지요. 사도바울처럼 나는 십자가를 진 적이 없다. 자꾸 나한테 시비 걸고 나한테 달려오지 마라. 예수님이 이렇게 해야지, 날 믿고 날 믿고 이렇게 하지 말라, 이런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만듭니까? 예수님이 자기 형제와 자매와 모친을 예수님이 어떻게 만드느냐? 여기 나오잖아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되면, 인간이 육입니다. 이 육은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요. 왜냐? 사람들은 신을 믿지, 예수님의 아버지를 모릅니다. 예수님만 알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라요. 하나님은 숨어 계시고, 인간이 찾고 있는 여호와 이런 것은 그냥 신입니다. 신.
육에서 만들어 낸 조작된 신이기 때문에 이건 아무 상관없지요. 지금 육을 가지고 사실은 배후에 악마가 있지만, 육을 가지고 예수님과 엮여지려고 하니까 예수님이 차단시켰습니다. 그래서는 내 형제가 될 수 없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야 된다. 그러면 이 자리는 비워 놓읍시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 그 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쳐서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을 다 이룹니다. 아버지 뜻을 다 이루게 되면 예수님의 형제가 발생이 돼요. 예수님의 형제가.
예수님의 영,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1장에 나오는데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지요.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온 음성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세례 줄 분이기 때문에 미리 예수님께서 성령을 세례를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달랑 예수님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형제를 만들기 위해서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서 성령을 받은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는 말은 나는 구원 받았다! 하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아버지 뜻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구원 받을 사람을 필히 건지시는 것까지 포함해서 아버지 뜻을 이루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대속 또는 대신해서 죽었다.’ 가 성립이 돼요. 이게 요한복음 17장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버지여, 감사합니다. 내가 아들을 아들 되게 하기 위해서 저런 사람들을 아버지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옳소이다. 이게 아버지 뜻입니다. 하는 게 나와 있어요. 요한복음17장에 보면.
그러니까 예수님의 형제 만들기는 하나님은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예수님의 가지가 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뭘 주목하느냐, 뭘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은 혈육인데, 이것을 끊고 어떻게 예수님께서 형제를 만들어 내는가, 그 작업에 우리가 눈독 들이면 돼요. 그게 말씀에 나와 있어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은, 성령이 부르시고, 의롭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하고, 그러니 십자가 피, 성령 여기에 관심 두는 사람은 이미 작업이 흘러 여기에 같이 있다 이 말이에요. 같이 있으니까 바로 예수님의 하신 일에 주목이 되는 거예요. 이게 떨어져 있으면 내가 하는 일에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하고, 내가 전도하고, 자꾸 자기 하는 일에 의미를 두게 돼요.
그러나 성령이 있는 사람은 누구한테 내가 하는 일은 ~가 아니요, 백날해도 이것은 말씀 지키는 것이 안 되고, 못 지키고, 예수님이 하는 일은 되는데, 그 예수님이 하는 일은 뭐냐,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시고 성령주시고 지금도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고 말씀으로 우리의 골수를 쪼개시고 우리로 하여금 환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지 않게 하시고, 이 모든 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로 우리는 늘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하면, 예수님이 이걸 하셨다, 이 이야기를 해야지, 자꾸 우리가 이거 합시다, 합시다, 이리 돼 버리면 이것은 이미 주님과 형제간이 아니에요. 주님의 가족도 아니고, 패밀리도 아니고, 사람을 배나 더욱 더 지옥 백성 만드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관심사가 우리가 열심히 밥 먹고 살려고 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지만, 성령이 역사해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것, 햇빛과 공기주시고 숨 쉬게 하시고 모든 것을 살게 하시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서 오는 은혜고 선물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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