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목전에서 121107
이방인 목전에서 121107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이방인 목전에서 (겔 5:8-11)
이근호
12-11-07 21:05
이방인 목전에서
2012년 11월 7일 본문 말씀: 에스겔 5:8-11
(겔 5:8, 개역)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저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희 중에 벌을 내리되』
(겔 5:9, 개역) 『네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내가 전무후무하게 네게 내릴지라』
(겔 5:10, 개역) 『그리한즉 너희 중에서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그 아비를 먹으리라 내가 벌을 네게 내리고 너희 중에 남은 자를 다 사방에 흩으리라』
(겔 5:11, 개역)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한다” 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더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랑 하는 것을 위하여 인간들을 소비시킬 정도로 애써 지키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소입니다.
성소를 더럽혔다는 이유만으로 사정 봐주지 않고 자신의 택한 자들을 처참하게 망가지게 합니다. 자기 백성에 대한 심판과 저주가 강렬하면 할수록 성소 귀중함을 더욱더 분명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인간의 존엄성라니 인간성의 가치라는 것은 내세울 여지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가치가 추락하는지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것도 자기 백성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그 아비를 지경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도대체 인간이 품고 다니는 인간성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 백성들을 혹독하게 다루시느냐 하면, 사람들이 자기 야심에만 관심을 두고 진정 성소에서 일어나는 의미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소를 끼고 사는 유다 나라백성들마다 이방인들이 추구하는 식으로 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미약하게 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본문 11절 끝에 보면, 자기 백성을 ‘미약하게’ 만들겠다고 나서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까? 거기에서는 ‘죽음’이 매일같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죽음은 흠없는 제물에게 가하시는 대리 심판이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이 가치가 자신의 생존 가치보다 우선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축사하셔서 무려 남자만 해도 5000명이나 되는 인파들을 배불리 먹이고서 남은 광주리가 12광주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진정 우리를 배불릴 수 있는 왕이다”고 여기서 임금삼기 위해서 계속 뒤따라 왔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예수님께서 자기 곁을 떠나지 않은 12 제자 앞에서 행하신 축사는 사람들이 양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였습니다. 즉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음”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양식으로 여기고 늘 먹고 마시는 자가 진정 생명을 얻은 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먹고 마시는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는 논리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앞에서 자기 백성들을 형편없이 심판에 몰아세우시는 이유는, 성소가 내뱉고 있는 있는 진정한 심판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심판이란,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상충되어 만나는 그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유다 백성들이 혹독하게 심판을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밀어붙이듯이 살아오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유다 백성들이라고 해서 결코 이방민족보다 더 나은 점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앞에서 보이도록 조치하셨습니다.
더 나은 것도 없는 족속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유다 백성의 우수함이 아니라 성소 자체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취지 때문에 그러합니다. 과연 그 취지가 무엇일까요? 신명기 9:5-6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 할수록 자꾸만 자신들이 얼마나 목이 곧고 악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함을 쏟아져나오도록 조치하신다는 겁니다. 이방민족에게는 이런 계기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민족이기에 그들만큼은 자신의 악함과 교만함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저희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구원하십니까? 우리들이 다른 사람보다 우수한 것이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바로 이런 고백이 오늘날에도 계속 튀어나와주는 자들이 바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답을 내리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위함이다” 그렇다면 그 아브라함의 취지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창세기 15:13-16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다루시는 원칙이 나옵니다. 약속의 땅을 차지해야 될 자들은, 그들의 가치 때문에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끄시는 약속의 위력을 증거토록 하기 위해 차지하게 됩니다.
즉 약속의 가치에서 가나안 땅 원주민들은 모두 배제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계획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이 원대한 계획에 휘말려들어간 것 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모두 다 약속의 땅이 갖는 속성 때문입니다. 의로운 제물의 죽음이 죄인들을 살린다는 그 취지 말입니다.
창세기 3:15에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나옵니다. 그 만남에서 무서운 심판이 주어집니다. 이 심판을 유일하게 아는 민족으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겁니다. 이 무서운 심판에 미리 참여한 자만이 구원될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행위도 없어 심판받아 마땅한 자인데도 구원하시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축복기도 덕분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1-08 15:27
13강-에스겔5장 8-11(이방인 목전에서)12110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5장 8절에서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5:8-11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의 중에 벌을 내리되 네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내가 전무 후무하게 네게 내릴찌라 그리한즉 너의 중에서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그 아비를 먹으리라 내가 벌을 네게 내리고 너의 중에 남은 자를 다 사방에 흩으리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사람은 죽이고 성소는 살리겠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은 죽든 살든 내 예배당은 살리겠다, 라는 것으로 들려질 수가 있겠지요? ‘네가 감히 어디서 거룩한 성소를 훼방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취지와 뜻을 어느 누가 헤아리겠습니까?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일의 시작을 자기로부터 시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방향이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어떻게 잘되는가, 그쪽을 따지면서 ‘하나님이여, 내 뜻 이루게 해 달라.’라고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마저 자기역사 속에, 하나님마저 자기생활 공간속에 억지로 잡아당기려고 하는 거예요.
엄마와 어린 아들이 같이 장보러 가면 엄마는 엄마가 사고 싶은 것으로 자꾸 고개가 돌아가고 아이는 자기가 사고 싶은 장난감코너를 지나치지 않도록 자꾸 엄마를 잡아당기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의 뜻은 뭐냐, 내 성소를 더럽혔기 때문에 네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내 성소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했기 때문에 너를 저주하고 심판함으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의 성소를 얕보는 자는 누구든지 이와 같이 되리라, 내가 본때를 보여주겠다, 그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자기성소 사랑이지 하나님의 인간사랑 아니거든요.
하나님을 인간을 사랑해요? 이것은 인간들이 지어낸 것이고 성경 에스겔 5장 10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성소를 사랑해요. 자기가 만든, 자기가 기거하는 장소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성소를 얕잡아보고 우습게 봤던 사람에 대한 징벌은 뭐냐, 10절에 나옵니다. “그리한즉 너의 중에서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그 아비를 먹으리라.” 아버지가 아들을 먹고 그 아들이 아버지를 먹고, 어떤 경우가 이런 경우가 다 있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먹을 때……, 이것은 참 생각하기도 끔찍한 것인데, 먹을 때 머리부터 먹을 때 팔 다리부터 먹을지, 이것이 개구리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참새 튀겨 먹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을 먹는다고 하니까 이것은 분명히 건장한 아버지인데 아들은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는, 자기 방어능력도 없는 갓난아이일 가능성이 많지요.
두 번째 보세요. “아들이 그 아비를 먹으리라.” 이럴 경우에는 아들은 건장하고 아비는 치매 걸린 노인이거나 뒷방 신세를 지고 있거나 사지가 불편하거나 한 경우, 어쨌든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고 살아남겠다는 이 처참한 지경으로 간 이유가 개인적으로 심성이 나쁘다든지 혹은 개인적으로 성격이 잘못되었다든지, 사적으로 가정형편이 안 좋았다는 것이 아니고 그 이유를 어디서 찾느냐 하면, 인간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쪽에서 원인을 끄집어내서 그 결과로서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고, 가족이 가족을 잡아먹고, 사랑하는 자식을 아버지가 먹고, 효도해야 할 사랑하는 부모를 자기 양식으로 처분하는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으로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전이 뭐고 하나님의 성소가 도대체 뭐 길래 인간을 그렇게 처참하게 다루어도 충분할 그 정도로 하나님의 성소가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성, 천하보다 귀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했건만 그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조차도 천하보다 귀하지 않게 처리해야 될 정도로 중요성이 하나님의 성소에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느 인간이 눈치 챘습니까? 에스겔 5장에 이렇게 나와 있지만 이것을 그대로 오늘날 목사나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이야기했을 때에 ……,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별 가치 없습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소입니다.”라고 했을 때 누가 거기에 선뜻 동의하겠습니까?
대우받지 않으려고 교회 나왔어요? 인간대우 안 받겠다고, 나 같은 것은 짓밟아 달라고 애걸복걸 하면서 교회 나왔습니까? 반대잖아요, 반대. 안 짓밟히려고, ‘하나님이여, 저는 가치 있습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존재가치를 뽐내기 위해서 교회 나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반대로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도대체 하나님의 그 숨어 있는 뜻은 무엇이며 그것으로 어떻게 에스겔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심판이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겁니다.
심판이라 하는 것은 서로의 뜻이 대립되면서 그 대립된 뜻이 만나는 지점에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의 뜻을 너희들이 자제할 수 없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속뜻으로 노리는 것은 따로 있어요. 인간은 자기가 노리는 바, 자기 원하는 바를 숨길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신의 이름이든, 인간의 이름이든 관계없이 평소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기의 속을 털어내면서 살아가기 마련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을 펼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자기 뜻을 펼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서로 상반된 속성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만났는데 그 가운데 심판이 일어났다는 그 말은 평소에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은 같지 않았다는 겁니다. 틀렸다는 겁니다. 그 틀린 것에 대해서 인간은 스스로 극복하거나 넘어설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제 뜻이 잘못되었으니까 제가 알아서 손들고 벌을 서서 주의 뜻으로 제가 알아서 건너가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은 되지를 않아요. 안되게 되어 있어요. 온갖 아양과 뇌물과 위선과 겸손을 떨면서 헌신의 모습, 거룩의 모습, 경건의 모습으로 치장에 치장을 더해서 여자들 분바르듯이 처발라 놓고는 실상 노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이런 것들을 앞장세워서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본래의 숨겨진 자기 뜻이 있어요.
자기 앞에 내세운 경건과 고상함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나를 이쪽 세계에서 주의 세계로 건너뛴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소용없고 의미 없는 겁니다. 십자가를 앞장세운다는 말은 그런 인간이 이 세상에 없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축복하신 거예요. 축복 하실 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남자만 숫자를 세었는데 5천명이라는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음식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떡과 고기에 축복하실 때 열두 광주리라는 결과를 얻었어요.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제가 하나님 같으면 딱 맞게, 남는 것이 없이 배부르다고 할 때 야무지게 끝내야 하는데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은 하나님이 나를 보내서 완성케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물고기와 보리떡 다섯 개를 축사하시는 주님께서 얼마가지 않아서 어디에 축사하는가하면,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축복하십니다. 어디에서, 열두 제자 앞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자기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잔을 가지고 축복하십니다. ‘이 떡과 잔을 마셔라. 이것이 너희를 살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새 언약이다.’ 그렇다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축복하셔서 남는 것이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이었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확장시키고 그것을 실제화 시킬 때 자신의 살과 피를 축복했다는 말은 모든 세상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와 엮여서 하나님께서 의미 있게 앞으로의 일을 진행시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와 엮여서 일을 벌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것은 예수님이 죽지 않은 경우에는 그런 일이 없거든요. 예수님이 살아 있는 채로 스스로 살과 피를 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 오병이어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배고프다, 배고프면 죽게 되어 있거든요. 배고프다, 배 안고픈 상태에서 살게 해 달라, 좋다 떡 주고 고기 준다, 해서 떡과 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사람들은 ‘야, 이런 식으로 사람이 사는 것이 맞구나.’ 해서 예수님을 따라왔고 예수님은 뒤 돌아 보면서 “왜 따라 왔느냐? 너희가 날 따라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라고 했고 그들은 “예, 그렇습니다.”했고 예수님은 “내가 주는 떡은 그런 떡이 아니고 새로운 양식을 주는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이다.” 하니까 사람들은 뭔가가 더 있는가 싶어서 “그게 뭡니까?” 하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했습니다.
길게 했지만 이 말은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너의 심판을 네가 먹게 되면 너희가 영생 얻는다, 그 말입니다. 내게 향한 주님의 심판을 내가 마음껏 배불리 먹으면 그것이 곧 영생이다, 그 말입니다. 그 말을 달리하면, 하나님이여, 저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라고 할 때 이미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십자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소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성소가 어떤 성소냐 하면 죽음을 실제화 시켜서 그 죽음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살려내는 그 중심지가 성소였습니다. “이스라엘아!” “예!” “너희는 내 백성이냐?” “예, 맞습니다.” “그러면 네가 내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기존의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성소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들이 살거든요.
성소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냥 토실토실한 어린양이 아니고 죽은 어린양이에요. 어린양이 죽어서 나와서 하나님께서 인정한 그 죽음이 이스라엘 사람을, 유다 사람을 살려 내는 겁니다. 그런데 현재 유다사람들은 성소에서 나오는 그 죽음보다도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계속 연장시켜서 이왕 살아 있는 것, 이런 뜻으로 계속 가서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여유롭게, 풍요하게, 부자 되어서 당당하게 살아보겠다는 그것이 무엇과 충돌을 일으키느냐하면, 성소에서 나온 하나님의 취지와 정면충돌되니까 그 가운데 심판이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양식이 그립더냐?” “그립습니다.” “그러면 네 자식이나 먹어라. 네가 그렇게도 배가 고파? 그러면 네 병든 애비나 먹어라.”
연약한 자식을 먹고 병든 아비를 먹는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네가 살고자 하는 그것이 결국은 스스로 네가 저주받는 짓 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네가 한 번 살아보겠다는 말은 스스로 지옥 간다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가 된다는 거예요. 11절 마지막에 보면 “나도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성소 안에서 하나님의 그런 심판이 나왔다는 것은, 그들의 뜻이 뭐냐, 미약은 싫고 강하게 대단한 존재로 살고 싶다는 그 취지입니다.
올 초에 서울시장 투표하는데 박 원순 씨한테 안철수가 양보를 했어요. 얼마나 대단한 미약입니까? ‘나 서울시장 안할래.’ 사람들은 그 안 철수 씨를 칭찬했지요. 왜, 자신이 넘지 못할 영역에 속한 사람이라고 그렇게들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보다 더 합니다. 죄도 없는데 자진해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따라 올라야 따라 올 수가 없어요. 바로 그 분에 의해서 살았다는 말은 우리는 그 분의 영역을 넘볼 수도 없고 쳐다볼 자격도 못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고 주여,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 맞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유일하게 천국 가는 사람들이요, 유일하게 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소에서 나왔던 그 모든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해서 마음을 낮추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본문 6절이나 7절을 보게 되면 ‘너희들이 율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만도 못해요. 이방인들도 자기 신들에 대한 법칙은 지키는데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고 우리의 신은 진짜 참 하나님이라고 해놓고 그 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 없는가, 겉으로만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지 속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되는 뜻이 작동하고 있으니까 행동으로 나오는 모든 것이 주의 뜻과 같을 수가 없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도 다 갋을 수가 있는데 왜 자기 백성에게 의도적으로 이렇게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아비를 먹는, 그것도 누구 앞에서, 이방인 앞에서 그렇게 저주를 하겠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이방인 앞에서 웃음거리를 만들겠다는 말이지요. 8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의 중에 벌을 내”린다는 이 말은 참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꼴 좋다, 하는 창피의 창피를 가중시키는 행동입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은 그랬었어요. 자식을 때리되 동네방네 보란 듯이 때렸습니다.
애가 이불에 오줌을 누면 키 뒤집어쓰고 동네방네 소금 받으러 다니게 했어요.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기 자식을 때림으로서 내 자식을 이렇게 내 자식이라고 편애하지 않습니다, 저는 엄격하게 다른 자식은 유하게 다루되 내 자식은 보다 더 엄하게 적용시킵니다,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유다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죄를 더 지어서 그런 것인지, 왜 이렇게 심하고 입에 담기도 어려운 저주를 베푸시는 겁니까? 그 이유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9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9장 5절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 보면 ‘이스라엘아, 내가 이방인들을 네 앞에서 쫒아낼 것이다.’ 해놓고 그 다음에 4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하지 말라, 요새 식으로 한다면, 다른 사람은 예수 안 믿는데 나는 예수 믿고 다른 사람은 헌금 안하는데 나는 헌금하고 다른 사람은 전도 안하는데 나는 전도하고 그래서 누적된 쌓이는 나의 의로 인하여 나는 천국 가서 상급 받는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물러가게 하는 것은 너의 의로움도 아니고 네 마음의 정직함도 아니다, 5절에 나옵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뭐냐, ‘이 민족들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쫓아낸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지옥 가는 백성보다 더 착하다는 이유 때문에 저쪽을 지옥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이 말은, 나에게 그렇게 될 만한 요소가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 편 이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 소리를 듣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나은 것이 없고 저들이 벌 받을 때 우리도 벌 받아야 마땅한데 우리에게는 왜 벌이 안 떨어지고 우리는 왜 저주를 안 받습니까, 라고 물을 때 앞으로 그런 질문을 평생토록 하면서 나를 쳐다보라는 말입니다. 교회 나왔다, 10년 믿었다, 목사 되었다, 장로 되었다, 할 때 계속 물어야 돼요. 하나님이여, 제가 구원 받을 자격도 없는데 왜 자꾸 구원해 주십니까, 라는 질문을 쏟아내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라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이것을 뭐로 바꿉니까? 이렇게 해서 복 받았습니다, 저렇게 해서 복 받았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복 받을 이유를 자생적으로 자신이 소지하고 있다고, 자질 적으로 있다고 그렇게 가르쳐요. 그러니 이것은 완전히 상황이 역전된 겁니다. 그렇게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는 대표자가 누구냐,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인간들이었고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 예수님께서 말하기를 ‘너희가 떡과 고기에 축사한 것을 가지고 나를 따라오는데 진정 너희들은 나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축사하는 그런 분으로 기억하지 말고 너희들에 의해서 죽임당한 이 살과 피를 축사하는 여기에 초점이 있고 이쪽이 영생이라는 것, 그런 일이 이 땅에 내가 온 진정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내 심판이 너희 속에 가득 차라, 그렇다면 그것이 너에게 생명이 되리라,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입니다. 그냥 오지 말고, 맨손으로 오지 말고. 헌금하지 말라고 하니까 헌금 안하고 맨손으로 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면 기도 안하고 그냥 맨손으로 오는데 그러지 말고 십자가 지고 오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어떻게, “왜 주님이 나를 구원하십니까, 왜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 나쁜 놈인데 어지간하면 나를 버리지 왜 저를 버리지 않고 구원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거예요.”
주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너를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너를 위함이 아니라는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머쓱하게 만들지요. 너를 위함이 아니고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맹세를 이루게 하려 하심이라, 신명기 9장 5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뭐냐, 나는 내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 지신 자가 주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십니다, 라는 것을 진정으로 네가 너의 속에 들어온 십자가로 인하여 고백해 내야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야기를 더 진전시켜 보겠습니다. 왜 저를 이렇게 구원해 주십니까, 이 말은 우리가 뭘 느껴야 되느냐하면, 나의 모든 행동이 결코 나로 하여금 구원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눈 돌리게 하는 식으로 평소에 내가 행동을 했고 또 내 마음도 십자가 없는 쪽으로 자꾸 눈이 돌아가게 주께서 이끄신다는 겁니다.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그것이 왜 그리도 눈에 많이 띄는지, 가을이 되면 새로 가을 옷 사 입고 싶고 겨울 되면 백화점 세일한다는데 거기 가보고 싶고, 누가 차 바꿨다 하면, ‘이 나이 되도록 차도 못 바꾸고’ 하고 누가 아파트를 넓혔다 하면, ‘자식 보기 부끄럽구나.’ 하고 누가 대통령 나왔다고 하면 ‘이 나이에 대통령도 못되고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이 모든 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여기에 초점이 쏠린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럴 때 제가 창세기 15장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 드리면 마음이 굉장히 편하게 될 거예요. 창세기 15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언약에 속했잖아요. 언약에 속했으니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라고 봅시다.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19절에 보면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브라함아, 네 자손이 함의 땅에 갔다가 4대만에 돌아오는데 그 때 돌아와서 이 가나안 열 족속을 내어 쫒는다.’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사용하시는 것, 사실 우리는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입장이 못 됩니다. 못되지만 먼저 전제적으로 거기 들어가기 전에 ‘너도 그 땅에 들어갈 자격이 못돼.’라는 그러한 사항을 충분히 우리 속에 집어넣어 줘요. ‘그래, 나는 천국 갈 수 없는 인간이야. 나는 탕자야.’ 라는 마음을 집어넣은 자로 하여금 기존의 사람들을 쫒아내고 교체시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오잖아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 이 영적전쟁에 들러리로 그냥 가담했을 뿐인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만남은 반드시 여기에 심판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전쟁이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라고 했을 때 어느 누가 그 심판을 진정한 심판이라고 이해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이 말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자손들을 통해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이 전쟁사는 이게 헛소리가 아니고 실제로 너의 역사 속에 발현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속에 있는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마주치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이 주신 심판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심판현상을 통해서 뜻이 다른, 대립되는 그 접선지점에 심판이 주어진다는 말은 원래 인간의 뜻하고 하나님의 뜻과 원래 다르구나, 그런데 어떻게 다르지, 왜 다르지, 무엇 때문에 다르지, 다르게 만든 이유가 뭐지, 그럴 때 아브라함언약과 창세기 3장 15절의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겁니다.
‘아하, 나의 구원 때문에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동참되어 있구나.’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이 뱀의 후손의 천지로 비로소 눈이 열려서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믿게 된, 성령 받아 십자가를 믿게 된 그 사람들만 여자의 후손의 계통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우리가 반길 수 있지요. 그렇다면 나의 소박한 소망, 이 세상적인 비전과 꿈과 희망이라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니고 기껏해야 내 뜻이고 그런 것은 이방인들도 다 같이 꿈꾸고 있는 동일한 꿈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미약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합시다. 하나님이 심판을 할 때 아비가 자식을 먹었으니까 자기자식 먹고 단백질 보충해 봐야 나중에 그것이 그 인생가운데서 그것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겠습니까? 자기 살겠다고 자식 먹은 아비라는 것이 남한테는 들키지 않더라도 죽을 때까지 계속 응어리로 남아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미약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양식대신 자식 먹고 자신은 구사일생 탈출해서 장사를 해사 나중에 큰 부자가 되었다 할 때 “아이고, 아저씨는 참 재주도 좋아요. 축복도 많이 받았네요. 이렇게 하나님이 복 주시니 얼마나 고맙겠어요? 분명히 아저씨는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이런 복을 받았을 거예요.” 하면 자식 먹고 살아남은 그 아저씨는 속으로 뭐라고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아, 속사정도 모르고 그런 소리 하지도 말아라. 내가 이 꼴 보겠다고 내 자식 죽인 인간이다.”라고 할 때 그것이 자기부인이고 그것이 바로 외부로서는 부자가 되어도 실상 미약한 겁니다. ‘주님이여, 항상 저는 죄인입니다.’하는 거지요. ‘내가 바로 가해자고 내 아들이 피해자입니다.’ 바로 그것이 심판의 재료로써 그 자식과 연로한 부모는 양식으로 바쳐져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과 피를 먹으라는 것도 이런 차원이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하는 것도 ‘십자가 앞에서 네가 미약하고 네가 죄인인 것을 안다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전파하는 증인으로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이 이런 예언을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놀림감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에스겔이 이런 것을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하나님이 진정으로 귀하게 여기는 그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 그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도적으로 죄인으로 몰아세운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인 안 되고 싶어도 항상 세상 사람하고 똑같이 세상 것들, 그것을 음흉하게 노린다는 거예요. 종교적으로 아무리 고상함과 거룩함과 열심가지고 포장해도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나도 저들처럼 잘 살아봤으면 좋겠다, 나도 저들처럼 인기 얻었으면 좋겠다, 나도 저들처럼 칭찬 받으면서 살고 싶다, 나도 저들처럼 사랑받고 다복한 가정 행복한 가정 웃음이 넘치는 가정으로 구원되는 교회가 되고 싶다는, 미약보다도 뭔가 강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은 심정이 있지요.
그러나 그런 심정이 일어날 때마다 내 안에서 십자가와, 강해야 된다, 성공해야 된다는 그것과 내부에서 에스겔 5장의 이 말씀은 지금도 티격태격 살아서 매일같이 역사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 말씀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뜻도 버릴 것이 없고 주의 말씀도 버리지 말고 우리 안에서 대결을 붙여서 우리가 얼마나 교만하고 위선 적이고 얼마나 우리 자신만 사랑하는지를 까발려 주시는 그 말씀의 작동을, 말씀의 작업을 우리는 축복이라고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