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2b 울산강의-출애굽기 24장 : 시간의 출처
20121102b 울산강의-출애굽기 24장 : 시간의 출처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1102b 울산강의-출애굽기 24장 : 시간의 출처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강의 다시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모읍니다. 불러 모은다는 말은, 네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둘째 문제에요.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백날 해도 실제로 하나님께서 내리는 말씀이 없으면 그것은 지가 상상한 거예요.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어떻고 좋은 건 다 갖다 붙이고 사랑과 인자가 많으시고 어떻고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네가 무슨 소리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준 말씀에 의해서 네가 지금 작업에 들어갔느냐? 만들어지고 있느냐는 거예요. 말씀대로 살라는 게 아니라 내 쪽에서 말씀이 너로 하여금 변화를 일으키고 다른 인간으로 바꾸는 작업에 네가 말려들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이번에 미국에 허리케인이 왔을 때 멀쩡한 맨해튼이 물난리가 났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허리케인이라 봅시다. “어이, 뉴욕 시민들, 거리에 물 좀 찼지?” “찼습니다.” “그렇지. 내가 준 말씀이야.” 이렇게 된다 말이죠.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덮치는 거예요. 참새가 스스로 살아야지. 이런 참새 없고, 들풀이 나는 들풀로서 몇 년 더 살지? 이런 거 없단 말이죠. 그냥 들풀이 돼야 됐기에 그냥 덮치는 겁니다. 그 덮치는 통로로서 모세가 동원된 겁니다.
그 다음에 24장 16절부터 이야기할 것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간단하죠. 휴전선이죠. 이북과 남한의 마주침. 하늘나라에서 준 것과 지상에 있던 것과의 마주침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 마주침, 충돌 또는 갈등. 이게 있으면 택한 백성이고, 이게 없으면 택한 백성 아닙니다. 이방인한테는 이게 없어요. 이방인은 그냥 신 섬기고 농사짓고 살면 그만이지 이방인에게 “너는 왜 안식일을 안 지켰어?” 이런 소리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일을 왜 안 하는 거야?” 할 일이 없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친히 만드시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들어오게 할 때 여기에, 이런 게 어려운데요. 이게 하나님 말씀입니다. 말씀이 모세를 통해서 주어질 때 이건 언약인데, 말씀이 언약을 통해서 주어질 때 비로소 이쪽에서 숨어있던 반발심이 이제는 고개를 쳐들게 됩니다. 말씀이 없을 때는 점잖은 사람인데, 복음을 듣기 전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인데 십자가 복음을 듣는 순간 발작을 일으키는 그런 현상, 이게 오늘날 교회고 모든 사람들의 현상이죠.
십자가란 뭐냐? 이렇게 정리되거든요. 예수님을 우리를 대표해서 저주받았다는 거예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지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는 식으로 예수님이 저주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모습을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 모습을 보니까 우리가 그 자리에 아버지 앞에 나무에 달려서 저주받아야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날마다 확인하면 되는 겁니다.
저주받아야 되는데 집에 가니까 냉장고에 김치가 있다. 그러면 저주받아야 되는데 김치가 있고 삶은 땅콩이 왜 있는 거예요? 어려운 문제 아닌데. 십자가 생각하면 저주받아야 되는데 삶은 땅콩 있고, 맛있는 감자가 있고, 밑반찬이 있다. 왜 있는 겁니까? 그게 하나님의 은혜죠.
특히 이라크는 이슬람 나라잖아요. 저주받아야 되는데 봄, 가을철에 단비가 왔다. 그 단비 왜 오는 겁니까? 마태복음 5장에 나오죠.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심으로서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라고 드러내죠. 그걸 죽기 전까지 알아채야지 나중에 죽어버리면 핑계치 못한다. “네가 내 것 처먹어놓고 이래서 어딜 천국을 가. 한 번 당해봐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미리 눈치 채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시고 십자가에 달린 진짜 우리 모습,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마지막 심판날 오기 전에 눈치 채게 만드는 겁니다.
저주받아 마땅한데 공짜로 인생을 산다는 사실, 우리는 깨닫게 되죠. 우리가 건강하다고 교만할 때 주께서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예상치 않은 병과 아픔을 주고, 만사가 잘된다고 느긋해 할 때 갑자기 예상 못한 어려움을 주심으로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러한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십자가로 하죠. 구약에서는 언약, 하나님의 말씀, 율법으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말씀을 주니까 여기서는 아우성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가 무슨 수로 그 어려운 말씀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느냐고 반발과 아우성이 나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상당히 정당하게 보이죠.
새순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만 만약에 새순교회에 목사가 바뀌어서 마귀의 종이 왔다고 합시다. 봉투를 날립니다. 십일조 봉투, 건축헌금 봉투, 주정헌금 봉투, 봉투의 사나이, 뒤에다 봉투만 날리고 장로는 이 선까지, 집사는 이 선까지, 권사는 이 선까지 해냈어요. “이런 것 안 하면, 당신은 하나님 은혜 받고 염치없는 인간이니까 지옥 갑니다.”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했을 때에 교인들이 복음을 알게 되면, “우리가 참 저주받은 인간 맞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헌금을 안 하죠.
그런데 복음을 모르면 자기 의를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목사한테 사랑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지킵니다. 십일조도 하고. ○○○목사가 “이 양들은 먹히는 양들이네.” 하고 과도하게 하는 거예요. 세미나 가는데 차비 줘. 내 차 바꿔야 되겠다. 사택 새로 해줘. 얘, 공납금 대줘. 이런 식으로 계속 뽑아내는 거예요. “누가 믿음 좋은가 보자.” 이런 식으로 공갈치면서 “누가누가 잘하나 봅시다. 돈 많이 내면 신앙 좋은 것, 돈 없으면 신앙 나쁜 것.”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하다보면 나중에 교인들이 반발하겠지요. 반발한다는 자체가 목사만 나쁜 게 아니고 그 교인들도 그동안 지가 자기 의로움을 챙기고 있었다는 것이 들통 나버리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율법이란 것은 그냥 두 손, 두 발 들고 항복하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김 집사는 어디까지 지켰어요? 나는 여기까지 지켰는데.” 자꾸 믿음 경쟁, 비교 경쟁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마귀 종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들에게 어떤 율법을 줄 때는 반드시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하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 이것이 이스라엘 진영 안에 하나의 성막이 있잖아요. 그 성막에서 뭐 합니까? 쇼 합니까? 뭐하는 장소입니까? 죽는 장소죠.
하나님 계신 곳은 산 자가 볼 수 없다고 했죠. 그러면 그 나라는 죽음의 나라에요. 공동묘지가 아니에요. 공동묘지에 죽는 것은 원래부터 죽는 거고 그것 말고 그들이 모르는 죽음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 죽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죽는 것이고 하늘나라에 속한 흠 없는 분이 죽는 그 죽음의 세계를 죽음밖에 없는 세계 한 복판에 한 진영에다 거기다 집어넣고 너희의 죽음은 이쪽 가운데 있는 죽음을 인하여 너희가 생명을 얻는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죄인 되어서 괜찮아요. 뭐 때문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잖아요.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충분히 죄인 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는 그 능력은 살리고 싶어서 살리고자 하는 능력입니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막 사는 겁니다. 막 안 살기가 안 돼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막 사는 거고, 이것은 막 안 사는 것이라고 구분 지을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런 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사람은 자꾸 자기에게 회초리를 드는 버릇이 있어요. 너무 자기에게 과도한 것을 요구해요. 자기가 자기를 벌세우고 때리고.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자꾸 이런 거야. 정신 차려야 돼. 하나님의 사랑 받고 그런 짓해서야 되겠어? 주의 백성이 그런 짓해서 되겠어?” 지가 지한테 회초리 들고 때리는데 처음에 때릴 때나 아프지 한두 번 맞아보면 몽둥이도 굵어져요. 아프지도 않아.
“나만 그랬나. 울산사람 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때리는 것보다 변명이 더 진화됩니다. 변명의 수완이 발달에 발달을 거칩니다. 변명하는 재주가 아주 늘어요. 그런 사람을 장로라고 합니다. 초신자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울고 앉아있는데. 장로는 “나, 그것 오년 전에 들었다.” 성가대 옆에 앉아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이 거기서 나온 이야기 아닙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거예요.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것.
주께서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질책하지 않습니다. 그냥 죄인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걸 이해할 뿐이지 왜 이것 안 했어, 저것 안 했어. 하고 나무라지 않아요. 주께서 책망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 네가 눈을 어디다 돌리느냐? 그것 때문에 책망하는 거예요. 우리가 엉뚱한데 우리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냐. 거기다 눈 돌리면 책망 받는 거예요. 주님만 바라보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가당치도 않은 은혜를 받고 있는 겁니다. 저주받아야 되는데 진작 죽어야 되는데 오늘도 살리고 내일도 살리고.
그래서 유튜브 이번에 녹화하면서 그랬어요. 왜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이냐? 이틀 분도 아니고 일주일분도 아니고 왜 일용할 양식이냐 말이죠. 해질녘까지 살았거든 오늘도 살렸다고 생각하란 말이죠. 우리를 위해서 살리는 것이 아니고 살리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어느 날 우리가 죽거든 우리 때문에 죽인 게 아니고 죽이는 분이 따로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우리는 죽는 거예요.
살리고 죽이시는 것은 다 누구 소관입니까?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시기도 하시는데 자꾸 살리는 것만 생각하고 죽이는 하나님은 빼먹어요. 하나님은 낫게도 하시고 그 다음에 아프게도 한다는 걸 빼먹어요. 자꾸 낫게도 하시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은 살려주시고, 살려주시고, 살려주시고. 하나님은 낫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항상 건강한 것도 아프게 하시고 멀쩡한 것도 죽이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놀 때 노는 남자, 놀 때 노는 여자. 강남스타일 아닙니까. 놀 때 머리 풀고 논다 하잖아요. 말춤 춰야 알겠습니까? 다 알죠. 주께서는 다 모든 것이 때가 있음에 우리를 말씀의 사람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예상 못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네 인생은 네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너를 관리한다.
그 말씀이 뭐냐고 물으면, 어린양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로 하여금 어린양 주변에서 죽어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존재로서 살게 하는 겁니다. 죄 짓는 일을, 어떤 종류의 죄들이 있는가를 보여줄 역할을 우리가 담당할 때 그 엮여진 것이 믿음이고, 그 엮여진 것이 언약입니다. 그 엮여진 것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의 독립적인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연결된 선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 쪽에 자를 수가 없어요. 이걸 자르기 위해서 마귀가 있는 겁니다. “너, 그런 짓하면 지옥 간다.” 매일같이 꿈속에 나타나서 너, 그러면 저주받아. 우리는 이미 저주받았어요. 받을 저주도 없어요, 이제는. 십자가에 함께 죽을 때 이미 받을 저주는 다 받고, 이제는 내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그 여유로움이 축복이에요. “난 저주받아 마땅해.” 이러면 마귀가 우리를 다루는 재미가 없어요. “살아야 돼. 기도해야 살까, 성경 읽어야 살까.” 이러면 마귀가 사람을 놀리는 재미가 있는데, 저주받았는데 뭐.
요한복음 8장에서 중요한 말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뭐라고 합니까? 네 주변에 누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때 여자가 뭐라고 합니까? “없나이다.” 하죠. 예수님만 보게 되면 주변에 사람은 없습니다. 없스무니이다. 아무도 없습니다. 나로 하여금 나 되게 하시는 분은 나 자신도 아니고 주변에 있는 나를 진짜 나 되게 하시는 것은 네 주변에 누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되게 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간통해도 천국 간다. 그 말씀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는 그 말씀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여인은 그때에 간통을 해야 했고 간통도 몰래한 게 아니고 들켜야 했었고 들켜서 돌에 맞아 죽어야 되는데 바리새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끌고 와야 했었고 끌고 와서 주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다 헤쳐 보내야 했었고 그리고 그 여인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음성을 들을 때 그 여인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을 위하여 동원된 하나의 동원 예비군이죠.
그래서 그 여인은 두 번 다시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죠. 왜? 이미 자기는 주홍글씨니까. 나는 간음한 여인이니까. 그런데 이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개망신 당한 것, 개망신 당했다는 이것이 아예 이름도 주홍글씨로 이름도 바꿔야 돼. 개망신 당했다는 느긋함, 이 고마움, 개망신 당하면서까지 구원해주시는 주님의 넓은 사랑. 그 여인을 사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죠.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여인은 자유를 본인이 누리는 게 아니고 자유가 그 여인을 만들어낸 겁니다. 이게 자유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내가 다 해줄게.”
에버랜드에 나오는 그 급류가 미리 여기에 어린양, 성막에서 매일같이 아침저녁마다 상번제로 죽어나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진영의 한 가운데 있음으로 동서남북 사각형으로 포진돼있던 이스라엘 전체가 오직 아침마다, 저녁마다 누구만 바라보게 돼있습니까? 거기서 피어오르는 연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처럼 그 연기. 그리고 그 불기둥은 성막에 스톱돼있어요. 그 불기둥이 이동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중요한 대목 나옵니다. 그 가운데 언약궤, 언약상자가 이동할라치면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거기에 덩달아서 같이 이동하는 거예요.
사열하는 육군사관생도들 보면 모자에 깃털이 있지요. 멀리서 보면 모자만 있는 것 같아. 그처럼 언약궤 위에 모자처럼 우뚝 솟은 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에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뭘 하느냐? 이 단체는, 이 집단은, 이 공동체는 그들 안에 언약궤가 있다. 언약궤는 피가 담긴, 피로서 살려내는 집단이 여기 간다. 길을 비켜라! 피 때문에 살아난 집단이 여기 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런 집단이 없다. 모압이고 암몬이고 모든 아랍 나라야, 길을 비켜라.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교회는 뭐냐?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 피로 값 주고 샀기 때문에 교회라고 이름하려면 피만 이야기해야 돼요. 왜 피만 입니까? 인간의 모든 행함은 죄가 되기 때문에. 마음 놓고 교회에서는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마음 놓고 이혼에 대해서, 간통에 대해서. 아주 웃으면서. 이 말도 좀 이상하다. “집사님, 어제 바람 두 번 피었는데 얼마나 신나는지.” 이럴 수는 없는 거고. 그걸 자랑 삼아 이야기할 수는 없는 거고.
그러나 자랑삼아 이야기하든 예수님 말씀에 뭐가 있습니까? 마음속에 간음해도 간음죄고, 마음속으로 누굴 미워해도 살인죄고. 우리가 일부러 미워하지 마세요. 주께서 미워할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정 미워할 사람 없으면 아침 드라마에 미워할 사람 나옵니다. 그것 보고 대리만족하면 되지요. 어디 미운 놈 없나. 인간이 생겨먹은 것은 누군가 지 손에 잡아 죽일 놈 없으면 사는 맛이 안 나게 돼있어요. 강아지를 패든지, 쥐를 잡든지. 연예인을 씹든지 해야 돼요.
얼마 전에 어떤 40대 남자가 이영애와 결혼 안 해 준다고 행패를 부린 모양이라. 미쳤어. 결혼한 아줌마에게 지와 결혼 안 해준다고. 박근혜와 약혼했다고 한 허경영이도 있고. 온갖 게 있는데 그게 인간입니다. 뭔가 발작을 하는 거예요. 그 발작은 뭐냐? “나만 살리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제발 내 손에 살해당해줘.” 이게 마귀가 집어넣으니까 신이 되려면 자기만 신이 돼야지 같이 라이벌 생기면 안 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가족을 이룹니다. 누구든지 천하 아비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 성경말씀이 진실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결혼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 안 한 사람은 아직도 몰라. 지가 왜 하나님과 원수인지 모른다니까. 이야기 많이 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하루 종일 이야기하다가 진 다 빼죠. 잘 안 했어. 아침부터 기 싸움하니.
24장 끝에 보면, 구름이 6일 동안 산을 가리죠. 그리고 제7일에 여호와께서 부릅니다. 40일 40야를 산에 가있죠. 그래서 산에만 올라간 날은 34일 되겠죠. 여기서 6일 동안 쉬고 7일째 올라갑니다. 베이스캠프 6일 동안 있고 공격기지로 올라가는 거예요. 이 40일의 의미가 뭐냐는 겁니다. 출애굽 초반에 40일 의미가 뭐냐 하면, 성경에서 40일 의미를 광야 40년으로 봤잖아요.
광야라는 수평적 지평은 뭘 보여주는 겁니까? 인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차 들어갈 땅과 합당한 백성이 아닌 것을 본때를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필요한 기간이 40년이었습니다. 40년 동안 결국 하나님께서 얻고자 한 것은 그래서 너희들은 너희 힘으로 천국에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 맞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의 모세한테 반발하는데 그 반발은 어디서 배우고 들은 거예요? 애굽이죠. 그러니까 몸은 애굽에서 빠져나왔지만 마음은 애굽이에요. 애굽의 성향, 애굽의 문화, 애굽의 사고방식이란 말이죠.
그런 사람 있었죠. 자기 백성을 구하겠다고 애국심이 발동한 모세죠. 모세가 안중근 의사처럼 독립투사 되겠다고 설칠 때 그 모든 하는 행세와 사고방식은 바로 애굽에서 나온 거예요. 애굽에서 애굽으로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서 주님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돼요. 왜냐 하면 애굽에 속한 우리가, 여기에 속한 우리를 빼낼 수 없다면 우리는 구원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거예요. 없다면 어떤 식으로 구원시켜줍니까? 구원 안 받아야 되죠. 구원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구원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입니다. 구원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인데 구원된 것은 우리가 구원되려고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언약 자체를 보여주는 도구로 쓰이려고 우리가 거기에 말려들다보니까 구원된 거예요. 하나님의 작업이라니까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잖아요. 이게 창세전에 아직 에서도 야곱도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됐단 말이죠. 그 결정 난 사항을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뒤늦게 야곱은 태어나야 되고 에서도 태어나야 되고 저와 여러분도 태어난 겁니다.
태어나서 하나님의 언약궤, 언약궤란 그냥 상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피가 묻힌 상자, 하나님의 죽음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살았다는 말이거든요. 살았는데 뭘 또 살아요. 우리가 살 이유가 없잖아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했으면 그 자체가 산 건데 우리가 살려고 살아서는 안 되죠.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죽으려고 살면 되는 거예요.
유튜브 녹화에서 기도할 때 기본 정신이 뭐냐 하면, “하나님, 이 내용대로 제가 죽게 하옵소서.”라고 해야지 이 내용대로 내가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면 안 된단 말이죠. 예를 들어 “하나님이여, 우리 딸이 시집을 안 갔는데 시집가게 하옵소서.” 그럼 하나님께서 “시집 보내줄 테니까 너 죽을래?” “아니요.” 그러면 그 기도는 주문이지 진실로 기도한 게 아니다. 그런 기도 할 필요 없다. 지도 살고 이것도 되고. 무슨 이런 욕심 사나운 기도가 다 있느냐 말이죠.
“주여, 이걸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내놓겠습니다.” 이래야 그게 기도가 진정성이 있지. 되면 되고 안 되면 말고. 그러면 그게 넋두리, 한풀이지 무슨 기도겠어요. “하나님, 제 목숨 가져가시는 대신 이것 이뤄주시옵소서.” 이럴 때 그 기도는 기도가 되는 거예요. 응답은 물론 안 돼요. 응답은 하나님 마음대로 인데 적어도 기도하는 자세는 그래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면 하나님께서 “스톱. 너 하나님 이름을 위해서 네 목숨 내놓겠느냐?” “한 번 생각해보고요.” “그럼 기도 계속 하지 마. 하지 마. 장난하나. 이게.”
그런데 어떤 경우에 정말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천사가 찍어서 하나님께 보냅니다. “하나님, 저 인간 희한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 목숨 내놓겠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조치했어.” 성령이 임하니까 그런 거예요.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간 것처럼 자기 생각이 없고 하나님의 뜻만 가득 차는 순간이 와요. 2초 내지 3초 정도. 5초도 안 넘어 가. 하나님의 뜻만 2~3초 가다가 2~3초 지나면 “이런 인간이니까 나는 더 살아야지요. 이렇게 훌륭한데 죽으면 안 되지요. 나 죽으면 내 자식들이 고생하는데.”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다시 은혜 시마이.
이걸 늘 물결, 바다의 파도가 얼음이 아니잖아요. 액체 아닙니까. 밀려갔다가 밀려왔다가 장난치고 하잖아요. 이처럼 늘 성령은 사람 손에 잡힙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소유물이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밀고 당기고 때로는 우리가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태어날 때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으면 슬퍼할 때가 있고, 전쟁할 때가 있으면 평화로울 때가 있고.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입니까?
그래서 여기서 잠시 결론 내리면, 나는 없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40일 동안 있으면서 자기 생각을 할 이유도 없었고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을 가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거예요. 말씀을 타게 되면 나는 없으니까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어요. 내가 없는데. 나는 없고 주께서 결과적으로 만들어지는 내가 있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40일 하는 것이 분명히 시간이거든요. 40일이란 시간은 무슨 의미가 담겨있다 했습니까? 인간의 죄를 들춰내는 기간이란 의미가 있다 했지요. 40일이란 누가 정한 겁니까? 모세가, “하나님 마음 추스르고요.” 이랬습니까? 하나님께서 6일을 그 다음에 34일, 40일의 의미를 죄를 들추어내는 기간이 40일이라 했지요. 광야에서. 그렇다면 40일이 다시 말씀을 타고 이 땅에 내려오게 되면 인류의 모든 처음부터 끝까지의 역사가 40일입니다. 이 세상은 광야에요. 처음부터 광야에요. 내 인생이라면 그것도 40일이고, 한국역사도 40일이고, 인류 전체도 40일이고. 이 땅 자체를 시간으로 표현한다면 40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 평생 우리 죄를 다 드러내야 될 있는 대로 다 드러내어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구원된 것은 노력해서 된 게 아니고 다른 분의 효과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분의 희생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내가 주님 위해서 희생해서 구원받지 않는다는 걸 다 드러내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 희생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던 그 자체가 숨겨진 나의 죄였음을 고백하는 기간, 이게 40일 기간이에요.
나라는 것은 주께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는 오해했습니다. 나라는 인간을 내가 만들어서 내가 간직해야 될 대상이라고 자꾸 오해를 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40일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죄를 그런 식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어요. 모든 죄는 어디서부터 하느냐? 바로 말씀이 40일이라는 의미를 잃어버릴 때 시작되는데 왜 그러냐 하면, 40일이라는 의미를 잊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나는 나가 돼버려요. 모든 것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냐, 나에게 무슨 보탬이 되느냐, 나한테 뭐가 유리하냐? 다 이래 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이번에 유튜브 강의할 때 했는데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보는 생각, 이것 잘못된 거거든요.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 했지요. 이것 오해한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선한 분이 아닙니다. 좋은 분이 아니에요. 좋은 분은 우리 이웃에 있습니다. 하여튼 좋은 사람들 많아요. 주님은 선한 분도, 좋은 분도 아니에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을 뒤집어놓는 분입니다. “부자야, 너 부자야?” “부자입니다.” “네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이게 부자 청년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겁니다. 노숙자한테 그런 것 안 합니다. “노숙자야, 네 모든 걸 버리고 나를 따르라.” “예. 따르겠습니다.”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람에게 주님께서 이런 말씀 안 합니다. 주님 제자 되겠습니다. 따라 와. 네가 죽은 자를 죽은 자로 장사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을 언제 하느냐 하면, 따르는 날이 내일인데 오늘 돌아가신 거예요. 환장하겠네. 그래서 제자가 하는 말이 뭐라고 합니까? 따르긴 따르겠는데 아버지 장례하고 따르겠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옳다구나.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하고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그 말씀 이루기 위해서 안 죽던 아버지가 하필 그 사람이 제자로 따라오기 직전에 주님께서 죽여 놓고 그 말씀 들춰내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말씀을 말씀 되게 하기 위해서 벌여놓은 하나의 기계 같은 거예요. 우리가 기계로 놓여있는 겁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기계를 압축시키면 한 진영, 진영 안에 있는 성막으로 돼있고 그 성막이 확대되면 이스라엘 진영 되고, 이스라엘이 나중에 멸망되어서 온 천지에 퍼지면 이것이 온 인류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수류탄 파편처럼 깨지면 흩어진 곳에 율법대로 살았다가 망했다는 소식이 온 천지에 퍼지게 만들지요. 율법대로 살다가는 망한다는 것, 율법대로 안 살아도 망한다는 것.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다는 사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를 살려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율법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많은 원성과 반발심을 유도하신 겁니다.
25장 봅시다. 모세가 하나님과 독대해서 명령을 받습니다. 25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지금 모세가 받았던 말씀은 시내 산에서 모세와 하나님만 아는 건 아닙니다. 그대로 눌러앉아야 돼요. 김포시 뮤직홀인가 공사 중에 상판 내려앉았잖아요. 그래서 한 명 죽고, 네 명 부상당했다고 하잖아요. 시내 산이 내려앉아버립니다. 모세가 봤던 그것이 그대로 내려앉아서 이스라엘 중심을 차지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은 시내 산을 떠나서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이 말씀 따라서 모세 따라서 이스라엘 한 복판에 동거한 거예요. 촌에 있는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예고도 없이 보따리 싸서 아파트에 침입한 거예요. 아파트 신랑, 신부 침대 치워버리고 차지해서 내가 이제 여기 산다고 눌러앉은 겁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시아버지, 시어머니 온 것도 힘들어 죽는데 하물며 완벽하게 거룩하신 분이 흠도 티도 없는 거룩한 분이 그것도 가만있는 분이 아니잖아요. 잔소리를 해대잖아요.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라? 몸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지요. 이 잔소리가 하루만 하고 맙니다. 눈 뜨면 다음날 또 하죠. 신명기에 보면 테필라라 해서 끈으로 해서 신명기에 보면, 머리에다 그 말씀을 몸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둘둘 감아요. 지금도 유대인들이 둘둘 감아요. 말씀을 둘둘 감고 이걸 제사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가서 가르치는 거예요. 가정의 아버지가 랍비니까 우리는 이 말씀대로 지켜야 된다고 하니까 이 잔소리가 보통 잔소리겠습니까? 사람이 어지간해야지.
그것도 율법이 한두 개라면 말도 안 해요. 꿈쩍거리면 걸려. “그러면 안 돼.” 신명기에 이런 말씀도 있어요. 누구든지 자식이 엄마 말 안 들으면 마을회관에 데려가서 마을 어른들한테 돌에 맞아 죽도록 해라. 이렇게 해요. 얘가 유치원 가는데 잠간만 와 봐라. 마을회관에 가면 벌써 소문 듣고 짱돌 들고 “네가 그렇게 엄마 말 안 듣는다면서. 에이. 죽어라.” 할 때 “하나님에 영광” 이러란 말입니다. 이게 제 정신입니까? 이게 정신장애 1급이나 하는 짓이지 제 정신이에요. 그걸 누가 지킵니까?
모든 것을 빼앗아가도 자식한테 손대면 이거는 완전히 하나님이라도 손목 물어버립니다. 자식 앞에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자식 앞에 예수가 무슨 소용 있어요? “나는 자식 지키기 위해서 교회 나갔지 자식 다치게 하려고 교회 나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꽉 물어버려요. 임재범이 불렀던 고백이란 노래에 나오잖아요. “내가 어떤 벌도 달게 받을 테니까 저 여자를 허락하소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하나님과 거래할 일 있습니까. 이제 십자가가 안 보일 때는 내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자꾸 챙기려고 하고 하나님과 거래에 나섭니다. “하나님이여, 이건 가져가되 이건 가져가지 마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요구하면서 믿음이 이것이라고 보여줍니까? 뭘 요구합니까? 자식, 그냥 자식 아니에요.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는 자식을 바치게 만들어서 비로소 네가 믿음의 조상이다. 너 같은 믿음의 노선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남의 자식이 아니라 내 몸에서 태어난 내 자식 아닙니까.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자식이잖아요. 그걸 죽이라는 말은 그것도 강요에 의해서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죽이는 것, 바로 이 공간, 이 시간, 그 공간과 그 시간이 있으면 사건이 터지는데 그 사건이 뭐냐? 바로 유일하게 하나님이 등장하는 사건, 십자가 사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바쳐주는 그 사건 안에서 천국이 개시됩니다.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아주 희한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비롭고 전능하시고 인자하시고 그런 상상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사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세상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다니,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을 버려. 바로 그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마귀가 만든 가짜 하나님입니다. 날 닮은 하나님, 나를 흉내 내고 내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모방해서 만든 날조된 하나님을 오늘날 교회에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버렸던 그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선 이렇게 합니다. “그 십자가 너, 알지? 그렇다면 너도 그 십자가를 구경하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걸 질 수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걸 되게 하실 때 주님은 얼마나 위대한 주님이냐. 내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나서서 “너, 못하지?” “못합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마지막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베드로가 어부였습니다. 고기를 못 잡았습니다. 고기가 없어서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했지요. 그때 베드로가, “아차 실수! 그 생각을 왜 못했지? 바보야.” 이랬습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어부라는 직업이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 순간 주님께서 고기에게 일단 베드로 배 옆에서 다 철수시킨 겁니다. 주님께서 고기 정도는 충분히 명령할 수 있어요. 그 고기 가운데서 동전 하나 물릴 재주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전 물린 고기만 잡히게 하세요. 그래서 성전세 냈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죄인이라는 말씀을 하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물고기가 잡히지 않게 했다면 오늘날 우리 각자각자에 따라서 주께서는 어떤 상황을 채택하시겠어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내가 우상처럼 사랑하는 것, 나는 예수님보다 이게 더 좋아.”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만들어내십니다. 가만히 하나님께 맡기세요. 맡기시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데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는 걸 만들어내게 하세요. 그것이 어떻게 나를 실망시키게 만드는지 주께서 또 조치를 하십니다.
처음부터 기대를 안 하면 되는데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합니다. 자식들 많지만 너마저 그런 인간인 줄 몰랐다. 네가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하는구나. 그런 경우가 생기게 만들어요. 저 같이 자식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생기고 하여튼 사랑하되 너무 사랑하는 걸 만들어내요. 해놓고 브라우니에게 물어! 물어! 해서 물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현재 살아있다는 것, 심장이 뛰는 것, 머리카락 자라는 것, 발걸음 세는 것,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나온 것을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강도가 구원받았죠. 우리는 강도 아니잖아요. 강도 되게 하십니다. 매일같이 강도 못지않게 되게 하셔서 왜 하시는가? “주여, 주의 나라에 저를 생각해 달라.” 제가 강도 안 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강도 되든 안 되던, 창녀가 되던, 간통하든 관계없이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이미 구원이 이뤄졌음을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매일같이 들쑥날쑥 파도가 임하게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던, 인생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던 그게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주께서 십자가 바라보게 하기 위한 조치인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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