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2. 10. 26) 1강 녹취록
광주 강의(2012. 10. 26) 1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4.44.106.224)
광주 강의(2012. 10. 26) 35-1
에스겔 34장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중심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만나야 됩니다. 만날 때 이질적인 것을 만나서 --- 뉴턴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안 떨어지는가?’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떨어진다, 안 떨어진다. 왼쪽, 오른쪽. 위, 아래.’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중심부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주에는 중심이 없어요. 중심이 있으면 중심을 기준으로 ‘왼쪽, 오른쪽’이 성립되는데, 중심이 없으면 무엇을 기준으로 오른쪽입니까? 특정 기준이 있어야 ‘위, 아래’라는 말이 가능한데 우주는 위, 아래가 없어요. 호일이란 천문학자가 말하기를 “우주는 중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 가는 거예요.
동양철학도 같아요.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 그대로 가고, 변화될 뿐이고, 변화된 것이 또 변하고 --. 새로워지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고 과거에 있는 그대로 간다. 이것이 동양철학도 그렇고 서양도 그렇고 호일이란 천문학자도 이것을 ‘정상상태의 우주론’이라고 했어요.
빅뱅이론이 나왔을 때 이 사람(호일)은 화가 많이 났습니다. 왜냐? 빅뱅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태초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천주교 바티칸에서는 기분이 좋았어요. “그 봐, 성경이 맞잖아! 천지는 창조된 것이 맞잖아!” 이렇게 된 거예요. 우주에서 최초가 발생되어 버린 겁니다. 그것도 20세기에 들어와서.
빅뱅이론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주가 팽창한다고 하는데,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어요. 풍선에 점을 찍어놓고 바람을 넣으면 그 점이 달아나듯이 우주가 빠른 속도로 달아난다고 해요. 달아난다는 말은 언젠가는 모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플린 효과지요. 색깔이 빨간색이면 파장이 길고 자색은 짧고. 이것을 가지고 별을 조사해보니까 별이 달아나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무조건 달아납니다.
달아난다는 말은 어디로 간다는 말이 아니고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중심이 있다는 말이지요. 중심부가 언제부터인가 하면, 지금부터 137억 년 전. 이게 우주의 나이입니다. 그리고 지구는 43억 년 전이고. 137억 년 전에 우주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동일과정설’에 의해서 주장합니다.
‘동일과정설’이란, 지금 일어나는 자연 법칙은 예전에도 똑같이 일어났었다는 가정 하에 시간 측정을 하는 겁니다. 만약 과거가 빠르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년도 측정은 다 깨져버립니다. 그래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은 하나밖에 없어요. ‘동일과정설’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
지금 흐르는 변화와 똑같이 미래에도 흘러가는가, 그렇지 않은가? 변수가 있느냐, 없느냐? 이 싸움인데, 진화론에서는 변수가 없다고 하고, 창조론자는 변수가 있어서 홍수가 발생해서 격변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간에 중심이 있다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우주는 어디에 있었어요? 이것은 창세기 1장을 보고 묻던 질문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으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러니까 과학자가 스스로 딜레마에 빠져 버렸어요. 정답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이론은 ‘우리 곁에 누가 있다.’는 겁니다. ‘평행우주론’이라고 하는데, ‘저쪽에서는 우리를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못 본다.’ 미국 뉴욕에 또는 서울 명동에 같이 길을 가면서도 서로 모르는 거예요. 한쪽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살고 있고, 다른 쪽은 21세기를 살고 있어서. 그러다가 우연히 번개를 맞아서 드라마가 펼쳐지지요.
하여튼 중심이 있으면 그 때부터 ‘위, 아래’ 그리고 ‘오른쪽, 왼쪽’ 그리고 ‘앞, 뒤’가 생겨버리죠. 중심이 없으면 그냥 ‘음, 양’만 있을 뿐이에요. 서로 대비되는 양쪽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물리학에서는 ‘거울 관계’라고 합니다. 보통 거울은 내 한 몸만 있으면 내가 거울이 비치지요. 그래서 거울이 깨지면 나만 있지요.
그런데 물리학에서의 양자 이론은 그것이 아니고 거울 안에 있는 것도 진짜고 거울 밖에 있는 나도 진짜고.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어쨌든 간에 결국 중심이라는 것은 물리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중심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중심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만남을 통해서, 선과 악이 만나는 그 현장을 중심부라고 하는 거예요.
에스겔 34장 20절에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고 되어 있지요. 둘 다 양인데 질이 다르니까 이질적이지요. 그런데 살진 양은 저쪽에 살고 파리한 양이 이쪽에 살면 중심부가 나타나지 않는데, 두 양이 서로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을 주선하는 장소에 누가 계시는가? 심판주가 계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오른쪽은 양, 왼쪽은 염소가 있어요. 양은 양끼리 살고 염소는 염소끼리 살면 중심부를 몰라요. 그런데 양과 염소가 만나가 되면 만남을 주선하는 그 현장에 심판주가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나는 양이다. 너는 염소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앞에 염소가 나타나게 하고 염소 앞에 양이 나타나게 하시는 그분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활동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숨겨진 중심되시는 분의 작업 현장입니다.
기존의 신학자들은 예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천국 갈 것인가, 지옥 갈 것인가?’ 이것만 생각하다 보니까 주님이 중심이 아니라 구원 받을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신학이 예수님께는 관심 없고 자기에게 관심을 두면서 구원 받는다고 우기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무려 2,000년 동안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관심 없는데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예수님께 관심이 없다는 말은 관심사가 따로 있다는 말이고, 그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은 좋은 것으로, 손해가 되는 것은 나쁜 것으로 판정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현실을 날조하는 거예요. 자기가 중심도 아니면서 중심인 것처럼 살아가니까. 이처럼 우리는 날조된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을 상상도 못합니다. 날조되었다는 것이 누구를 속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착각으로 세상을 나 중심으로 보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중심이 된 입장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면 “저리 가!” 하고 외면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마귀가 오면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하면서 반기지요. 그러니 날조된 현실 속에는 일곱 귀신이 찾아와서 우리를 보좌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천사가 와서 보좌하고 있는데).
에스겔 34장 22절에 보면 ‘구원’이란 말이 나오는데, 구원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원래의 현실이 아니 것을 눈치 챌 때 구원이 성립됩니다. 날조된 세계에서는 폭력대신 평화를 원합니다. 이것을 ‘동질화’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 세상에서 인간을 표현할 때 가장 적합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남이 하는 것과 같은 것을 하고 싶고, 광주에 있는 나와 서울에 간 나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동질화입니다.
인간을 표현할 때 “나는 의사다.”라고 한다면, 이 말은 “나는 어디서나 의사로써 동일하다.” 이런 의미입니다. “나는 교사다.”라고 하면, “나는 집에서도 교사고 어디를 가도 교사로서 내 위치는 굳어있다.”는 말입니다. 교사라는 동질화를 항상 유지함으로 나는 나답게 되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 제 설교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그 설교에서, 칼을 주부가 사용하는 것과 군인이 사용하는 것이 다르듯이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성경 공부한다고 여기에 있지만 어떤 특수한 환경에 들어가면 갑자기 내가 달라져서 아부하기 바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갑자기 북으로 납치되어 김정은 앞에 갔다면 살기 위해서는 김정은을 찬양하고 높여야지요. 결국 인간의 동질화라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동질화되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평화로워야 돼요. 바깥에는 아무리 우환이 있고 난리를 치더라도 항상 내 마음은 평화를 갈구할 때 동질화가 됩니다. 그래서 이 동질화는 평화가 깨어질 때 비로소 동질화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는 처음부터 폭력이 있었어요. 이 폭력을 우리는 거부합니다. 폭력이 있으면 나의 동질화가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평화롭기 위해서 동질화를 채택해서 그냥 쥐고 있으려는 겁니다. “집사님, 잘 지내십니까?” “예, 별 일 없이 잘 지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동질화인데, 옛적부터 지금까지 평화로웠다는 겁니다.
내 인생에 위험, 폭력, 혼돈은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폭력을 집어넣었어요. 왜? 폭력을 집어넣어야 피조물 자체적으로 동질화가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피조물이 자체적으로 동질화 되면 안 됩니다. 동질화 시키는 것은 누구의 권리인가?
에스겔 34장 31절에 답이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이란 하나님이 사람이라고 인정할 때만 사람이 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여하는 것은 사람 아닌 자를 사람 되게 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으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도 아닌 자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겠습니까? 아니죠. 왜? 날조된 것이기에. 날조된 세계 속에서는 누가 중심입니까?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고 자기가 중심이에요. 자기를 좋게 하는 하나님이라야 좋은 하나님입니다. 이런 인간도 아닌 것을 진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폭력과 위기와 혼돈을 집어넣습니다. 인간을 혼돈 속에 집어넣어 인간의 동질화를 의도적으로 파괴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남은 일은 만날 놀랄 일만 남아 있습니다.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 못할 때 자기는 스스로 자기의 동질화를 믿지 않게 되지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 것인가?’ 이것과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둘 중에 어느 것에 사람들이 관심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교회 오는 목적이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까?” 이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고 여유롭게 살 수 있을까?”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 옵니다. 즉 ‘내가 나답게 지금의 동질화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어떻게 이 땅에 밥 먹고 살 수 있을까를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어요.
성경은 이방인에게 준 것이 아니고 유대인에게 준 것입니다. 이방인은 처음부터 언약 밖입니다. 언약에 대해서는 곧 이야기할 것입니다. 뭐냐? 언약 없이 구원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언약 없이 구원이 됩니까? 노아 언약 없이 노아가 구원 되겠어요? 안 돼지요. 아브라함 언약 없이 아브라함이 복을 받겠습니까? 안 돼지요.
안 된다는 말을 왜 제가 자꾸 합니까? 언약 없이 단독으로 구원 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꿰여야 됩니다. 코에 꿰이든지 목에 꿰이든지. 25절을 봅시다.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언약 없이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강의한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은 만남을 통해서 중심부를 형성한다. 만날 때 어떻게 만나는가? 이질적인 것으로 만난다. 만약 내가 구원 받는다면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하는데, 그 만남을 주선한 그분이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고, 마주치는 그 현장이 하나님의 작업 현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귀와 만날 때 복음이 가장 복음다운 거예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세 번 시험을 받았지요. 이 때 성령께서 예수님께 시킨 게 있지요? 병원에서 건강 검진할 때 어떻게 합니까? “저녁부터 아침까지 금식하고 오세요.” 라고 하지요. 뭔가 당부하는 것이 있잖아요. 이처럼 성령께서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을 주선하기 전에 예수님께 당부한 것이 있어요. 40일 금식하고 만나게 했지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것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금식 안한 상태에서 마귀를 만나면 마귀의 제안이 그렇게 아쉽지 않게 됩니다. 방금 밥 먹고 왔는데 마귀가 “떡 줄까, 빵 줄까?”라고 하면, “저리 비켜! 너나 먹어.” 이렇게 되겠지요. 금식을 40일 동안이나 했다는 것은 죽음의 접경지점까지 온 겁니다. 초죽음 상태입니다.
옛날에 제가 [미워도 다시 한 번]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떼놓으려고 하는데 아이는 엄마에게서 안 떨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엄마가 있는 중앙지점을 아이는 그리워합니다. 예수님이 금식하신 것은 인간이 그동안 살아온 자리. 그것도 그냥 자리가 아니고 마귀에게 지배받고 있는 인간의 자리로부터 강제로 예수님을 떨어지게 하면, 용수철처럼 인간이 살아왔던 자리를 얼마나 그리워하겠습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세월을 보낼 때 어디에서 떼어놓기 위해서 40년을 보낸 겁니까? 바로 애굽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면서 “아이고, 속 시원하다. 애굽아 잘 있거라!”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애굽에는 수박도 있고 부추와 파도 있고 먹을 것이 많았는데” 하면서 그곳을 그리워하지요.
지리적으로 애굽 떠나면 약속의 땅이 아니고 애굽과 단절시키기 위해 가위로 자르듯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갈 수 있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이런 천국을 우리가 들어가겠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욕심입니다. 어디 감히 천국을 넘봐요.
제가 어제 대전 강의하면서 은혜를 받은 것이 있어요. 예수님 옆에 강도가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가 있고, 강도가 매달린 십자가가 각각 따로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이 그 옆에 있는 강도의 죄를 사해서 예수님이 가신 낙원에 강도가 같이 갈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두 사람을 같이 묶였으면 함께 낙원에 가는 것이 이해가 될 수도 있겠는데, 각각 따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데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어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한 번 따져보잔 말이지요.
강도의 죽음을 예수님께서는 언약에 합당한 죽음으로 편입시키면 예수님 죽음에 강도의 죽음이 포함되고 예수님 부활할 때 같이 부활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강도가 강도짓해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때 이걸 원천적으로 소급해서 내가 강도짓 한 것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선택해서 강도짓 하게 했다고 믿는 거예요.
그냥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라고 믿잔 말이지요. 두 강도가 만나는 그 지점에 예수님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비록 갈보리 언덕에 있지만 이것이 바로 빅뱅이고 우주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다른 차원의 세계입니다. 기존의 눈에 보이는 산과 나무와 바다가 있는 이 피조 세계에 이것이 결합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은 원래 하늘에 계신 분인데 그분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를 믿는 고백과 같은 고백이에요.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라는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규정만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와 관련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고 밥 먹고 잠자고 하는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중심부를 증명하기 위한 소품으로 선택받아 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 중심으로 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입니다. ‘예수님만’은 예수님만 달랑 있는 것이고, ‘예수님 중심’은 예수님과 그 주변부를 다 이야기할 때 예수님 중심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을 말하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고 했어요. 통일된다는 말은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이는 태어나고 어떤 이는 죽어야만 하는 거예요.
믿음이란 완전히 나의 인생이 박탈당하는 거죠.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가스처럼 주입될 때 강도는 이런 말을 했지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 예수님 답변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너는 강도짓 했어야 했고, 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 했고, 죄인과 함께 예수님이 달리신 것은 구약 성경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되신 거예요.
한 편 강도는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봤기에 ‘예수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고 봤고, 구원 받은 강도는 ‘자신이 태어난 것과 죽는 것 이 모두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에 합체되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 또는 화목제물이라고 하지요. 구약에 있는 제사 제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해 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했다는 것은 현재 악마가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 정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예수님도 거기에 놓이게 만듭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현재 주어진 자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후에 마귀와 만나게 됩니다. 40일 금식했으니까 제일 먼저 하는 시험이 뭐겠습니까? “먹고 싶으면 먹으라. 당신은 돌로 떡도 만들 수 있는 메시아니까.” 마귀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메시아니까 메시아의 능력을 보여 보라는 거지요. 이 때 마귀가 실수한 것이 있어요. 평소에 마귀가 인간을 지배하면서 사용했던 용어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살지 못하면 죽고, 죽지 않으면 산다.’는 완벽한 진리. 이것을 예수님께도 적용시키려 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그러나 이 진리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한시적인 진리였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에 놀아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말씀으로 사는 것만이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떡을 안 먹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마귀가 알고 있는 구조에서의 죽고, 살고를 인정 못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든 새로운 체제는 말씀이 있으면 죽어도 사는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떡을 먹어야 산다는 이 원리 원칙에서 벗어나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로 그렇게 사는 자로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나 아닌 다른 분이 만든단 말이지요. 강도가 ‘내 인생 내가 이렇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가 그 사람의 믿음이 되는 거예요. ‘주님과 나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말씀에 근거해서 시험을 합니다. 시편 91편 11절(저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을 인용하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또 마귀가 실수한 게 있어요. 예수님의 행위 자체가 말씀이에요. “모세는 너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할 때 사람들은 “야, 권세 있는 자다.”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 자체가 권세에요. 예수님은 높은 곳에 안 올라가고 평지에 있어도 시편 91편을 이루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내가 못하는 것을 해야 기적’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사람도 마귀와 같은 생각이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말고 여분의 것을 기적이라고 보는데, 예수님은 물을 한잔 마셔도 기적이에요. 예수님 기적 중 제일 놀라운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에요. 예수님이 죽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기적으로 보지 않았어요. 왜? 사람들은 다 죽으니까. 심지어는 자살도 할 수 있으니까. 이것은 말씀대로 죽는 죽음이 아니잖아요.
우리 쪽에서 기대한 것은 기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기적인데, 그 기적 중에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전 강의에서 말했는데, 노래 가사 중에 “대전, 대구 찍고, 부산 찍고 --” 이런 노래가 있어요. 이것을 예로 들면서 사람들은 서울 살다가, 대구 갔다가 목포로 이사 가면, “내 떠돌이 인생 참 험하다.” 고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마귀가 실수한 것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가 와서 받치는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데 예수님은 평지에 있어도 그 말씀을 성취하는 분이에요. 따라서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왜? 예수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거기에서 새삼스럽게 인간(마귀)들이 원하는 식의 기적은 없는 거예요.
이런 것을 기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마귀에게 지독하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마귀는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으면 신이 된다고 속였지요. 마귀는 은근히 우리를 신으로 대우해요. 신으로 대우하면서 빼먹을 것은 다 빼먹어요. “당신은 신이야. 고귀한 신이야.” 해놓고는 결국 죽음의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종으로 삼지요. 인간이 무슨 수로 빠져나옵니까? 못 빠져나옵니다.
여기에서 언약이 등장합니다. 언약은 내가 나에게 어떤 일을 해서 구원될 수 없습니다. 언약을 믿는 자는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되는 방법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살아 있어도 늘 죽은 자이고, 죽은 나를 살리는 것은 이미 내 손에서 떠났고 주님께서 언약을 위해 나를 사용하시는데, 쓰임 받는 그것이 곧 사는 것입니다.
노아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그런데 모두 죽음을 경험해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노아를 건지려면 노아만 빼돌리고 나머지는 다 죽이면 되는데 노아마저 홍수에 잠기게 하잖아요. 150일 동은 홍수로 방주 속에 갇혀 있었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운 분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제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예쁜 백합과 코스모스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어떻게 물속에 다 집어넣습니까? 정말 괴팍한 하나님 아닙니까? 엄마가 부엌에서 칼질을 하면서 맛있는 잡채 요리를 정성껏 만든 후에 그 만든 음식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하나님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함으로 모든 창조는 중심되시는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한 창조일 경우에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폭력을 이해해야 돼요. 스스로 자신이 죽는 그 폭력을 이해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지요. “누가 내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스스로 죽는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너는 죽기 싫지? 나는 스스로 죽는다.” 죽기 싫어하는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죽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기 싫어하는 모양새 자체가 언약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실상은 죽은 자란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언약의 경우는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한테는 언약이란 게 없습니다. 언약은 항상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고, 예수님이 언약을 이루셔서 그 언약의 효과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지 우리가 언약을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수상해요. 우리 믿음은 나를 중심에 두어야 믿게 돼요.
제가 이번 유듀브 설교에서 ‘믿지 말라’고 했어요. “예수 믿지 말라”고 했어요. 예수 믿어서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시지요. 그 관계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선물이기 때문에 선물을 받은 자는 반드시 선물 주신 자를 그리워하게 되어 있지 선물 받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선물 주신 분 누구십니까?” 이렇게 되지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선물을 받고는 “나 선물 받았다.”고 가불었습니까? 아니지요. “주여 누구십니까?” 이렇게 나왔지요. 주님과 만나게 되면 나와 얼마나 다른가를 확연히 깨닫게 됩니다. 내가 생각한 예수님과 진짜 예수님이 이렇게도 다를 줄이야 미처 몰랐지요.
이 세상이 지옥인 줄도 모르고 좋다고 살고 있는 우리에게 천국에 계신 분이 찾아오셔서, 이곳이 지옥이란 사실을 들통 내고 자기 백성을 이곳에서 데려가십니다. 값을 치르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데리고 가십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은 ‘내(예수)가 너를 건지지 네가 너를 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왜? 언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니까. 제발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알아라.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든 그것과 무관하게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기에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사실은 이미 구원 얻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2. 11. 2. 15:35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