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대구강의 20] - [피 81] - 선택과 필연
[12 대구강의 20] - [피 81] - 선택과 필연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2 대구강의 20] - [피 81] - 선택과 필연
12,10,2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주의 원동력인가?
오늘은 교재 249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책제목이 '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피' 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흐르는 일부 액체를 두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육체 안에 들어있는 그 액체의 일부가 어떻게 온 우주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는지,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수많은 논리적 근거도 필요하고, 이야기들도 많이 덧붙여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몸 안에 있는 피는 예수님 몸의 생명과 관련이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래도 우리에게는 그것이 흡족한 답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자연 속의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대자연에서 하나의 일부분의 차지하고 있는데, 그러니 대자연의 운명과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과 무슨 관련이 있겠냐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대구 팔공산에 등산을 했다고 하면, 우리가 등산을 하든 말든 간에 팔공산은 그 자리에 옛날부터 그렇게 있어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올라간다고 해서 팔공산이 반갑다고 하고, 또 내려간다고 해서 섭섭하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어떻게 우리 몸이 팔공산과 관련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기에는 갭이 너무 크지 않느냐고,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손에 잡히는 형식과 모델을 !!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잘 믿는다. 신앙이 좋다. 천국에 가는 백성이다" 라는 이야기들의 모델이, 과연 어떤 것을 가져야만, 어떤 정도가 되어야만, 즉 어느 정도의 레벨이 될 때 "믿음이 좋다. 신앙이 좋다. 영생을 얻는 사람이구나. 야, 정말 당신은 천국에 가겠습니다" 라고 할 수가 있는지,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형식과 모델을 사람들은 가시적으로 손에 잡히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느 교회에 목사가 새로 왔는데, 전에는 20명 정도가 모이다가 지금은 무려 2,000명이 넘게 모인다고 하면, "야,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구나" 라고, 그렇게 누구나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교인수가 100배나 늘어날 수가 없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에 저렇게나 쏠리는 구나. 그러니 나도 저기에 가담해서, 천국에 가는데 안심을 푹 놓고서 한번 가보자" 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앞에서 제가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예수님의 피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 피를 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입장에서 모델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피가 곧 자기 생명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피와 어떤 집단 !!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예는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의 어떤 집단을 이룬다는 것이다. "과연 예수님의 몸의 피 흘리심이 참된 신앙의 대상이 되는가?" 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갑자기 불어난 어떤 특정한 집단, 즉 "교회라는 이름의 집단이 믿음이 좋다" 라는 것의 모형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의 피 흘리심이 말이다.
물론 우리는 정답을 이야기하는데, 즉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갑자기 우리교회가 부흥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더 땡긴다는 말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피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라는 것은 별로 땡기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몸의 피와 기적적인 것의 간격이 너무 많이 벌어져 있는데,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니 믿기는 믿지만, 솔직히 마음으로는 영 그게 부럽지는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나도 예수님처럼 순교해야지" 라고 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큰 교회를 만들어야지" 라는 것은 완전히 땡기는데 말이다. 외롭게 순교해야한다 것은 마음에 와서 닿지도 않고 땡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마을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들이 하는 말이, 십자가 복음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마을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자기들 신앙심과 간격이 너무 많이 벌어져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 마을에서 진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보고 싶은데,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다.
◈ 삼성 + 괜찮은 교회 = 신의 축복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삼성전자에 부장으로 있다고 하면, 서울에 가면 본사건물이 있는데, 47층 짜리 복합건물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높은 사람이니 윗층에서 근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부인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5일은 회사를 다니고 일요일에는 아내의 권유로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에서는 삼성의 부장의 왔다고 대우가 각별한데, "조금만 더 다니면 장로를 시켜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그런데 그 사람이 교회에 나가고 난 뒤에 무엇을 포기하지 않겠는가? 자기가 삼성그룹의 부장이라는 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까, "내가 다니는 회사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직장인데, 이 교회도 그렇게 최고의 교회로 한번 키워볼까? 내가 돈을 내든지 해서 말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의 격에 맞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는 삼성에서 알아주는 사람인데, 그런데 그런 사람이 다니는 교회가 이렇게 하꾸방처럼 초라해서 되겠느냐는 말이다. 삼성그룹에서 임원들을 전도해서, 교회도 옆에 있는 교회보다 더 크게 짓고 하면, 그렇게 될 때 그는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하게 되는데, 그런 것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샘숭은 아무 것도 아니야 !!
다음과 같이 하지는 않는데, 즉 여기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삼성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말이다. 자기가 그 정도의 수준이 되니 거기에 곁들어서, 여기서 '곁들어서' 라는 것이 중요한데, 즉 교회는 하나의 부록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가쉽이고 덤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굳이 다니지 않아도 되는데, 죽어서 내세가 있다고 하니 한번 다녀보자는 것이다.
그러니 '삼성' 이란 본래의 덩치는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그런 덩치에 맞는 교회로 괜찮게 만들게 되면, 기존의 자기 지위에다가 교회도 괜찮은 교회를 더하게 되면, 그렇게 합하면 그게 신의 축복으로, 신이 베푼 기적으로 접수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을 자기에게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모델로 삼고 싶고, 그리고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인간의 행함은 항상 노림수를 !!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물론 믿음에서 행함이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하지만 행함에서 믿음이 나오는 경우에는, 그때의 그 행함은 이미 뭔가 기대치를 언제나 노리고서 들어간다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말이다.
지난번에 여기 대구강의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안개는 목적이 없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삼성의 부장에게 "당신은 삼성의 부장이지? 그렇지? 그러면 당신은 안개야"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기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자기는 더 많이 끌어 모으고, 더 크고 싶어서 교회에 왔는데, 그러니 "나는 안개다" 라는 것을 알려고, 그런 기적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자기 부인(否認) !!
그래서 제가 혼자 생각해보기는, 신앙생활에 근본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것은 제가 이미 수천 번을 이야기했지 싶은데, 그 기본적인 장애요소가 바로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자기 부인이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하나님을 시인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유튜브 동영상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그 전제가 곧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시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말이다. 전혀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도 유튜브 강의를 보지 않은 모양인데, 싸이의 강남스타일만 봅니까? (ㅋㅋ)
아무튼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지, 자기를 시인하면서 동시에 예수님도 시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끝에 가면 결국 두 개의 패가 남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시인할 것인가? 예수님을 시인할 것인가?" 라고 말이다. 물론 결국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몰아가신다는 것이다.
◈ 너무나도 강렬한 '나' 라는 존재 !!
그러니 신앙이 좋고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것을, 그것을 성경말씀에 비추어서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무엇인가? 기존의 자기는 전혀 포기하지도 않고, 자기가 얼마나 우수한 존재로서 남에게 과시할 거리가 있는지, 그것을 신앙의 모델로 삼고서 성경도 보고 교회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예수를 20년이 믿었는데 내세울 것이 뭐꼬?" 라고 하면, "바로 이것이다" 라고, 그렇게 자기가 내세울 만한 장기를 하나님으로부터 챙기고 싶은 심보, 즉 "예수를 믿고 나서 집안이 잘 되었다" 라고 하든지 말이다. 그러한 것이 너무나 강렬하게 믿음의 대상으로 합류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강렬하게 말이다.
그것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아무리 십자가와 복음을 이야기해도, 또한 이렇게 자기 부인을 강조하고 해도, 그런 것을 덧입혀도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그것이 흔들어버리면 그냥 줄줄이 나가떨어진다는 것이다.
◈ 추억의 미드, '헐크'를 아십니까?
과거 미국 TV드라마에 '헐크' 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평소에는 아주 얌전한 사람인데, 물론 옷차림도 차분하고 말이다. 그런데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다가 사고가 나서 자기 몸의 DNA에 문제가 생겼는지 몰라도, 갑자기 화가 나게 되면 몸집이 커지면서 헐크라는 괴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괴물로 변하게 되면 그 사람이 평소에 입고 있던 옷들이 '우두둑' 하면서 모두 다 터지고 만다는 것이다. 런닝을 비롯해서 와이셔츠나 바지들이 말이다. 물론 핵심부위는 TV 화면에 나오지 않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니 그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겸손하게 살아야지. 마음을 낮추면서 살아야지. 주님의 말씀대로만 살아야지" 라고 하다가도, 막상 자기가 정말로 꿍치고 있는 것을 건드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졸지에 헐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우두둑 터지는 헐크가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하던 목사나 장로들도 교회를 떠나갈 때 보면 그만 헐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잘먹고 잘살아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믿은 것을 따로 있었고, 그동안 남에게 자기가 믿음이 좋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포장지를 가기고 수십 수백 층으로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는 것이다.
◈ 예수님 말씀하시는 신앙의 모델은?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다시 여러분에게 물어보겠는데, 물론 저 자신도 포함해서 말이다. 과연 신앙의 모델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신앙이 좋다고 하는 그 모델이 말이다. 그것이 교재 249페이지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249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기대와 너무나 어긋나게 실현되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이다.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이것이 곧 내 몸이고, 내 피니라 !!
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설명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언약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내 몸이다. 이것이 내 피다"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신앙모델로 삼기에는, 지금 우리는 너무나 현실적인 기적이나 축복 덩어리를 간절하게 원하고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현실적인 기적이나 축복에 대해서 너무나도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새언약에, 이 새언약에 우리 믿음의 대상이 전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인데 말이다. 그렇지 않나요?
◈ 너무너무 굉장히 이상해요 !!
알다시피 저도 여러 군데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는데, 강의를 하면서 그들의 듣는 표정을 보면 이미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하, 낌새가 심히 수상하구나. 관심사가 엉뚱한 곳에 있구나. 이제 얼마 있으면 나오지 않겠구나" 라고 하는, 그런 느낌이 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과연 내가 무엇을 전했지?" 라고 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데, 혹시나 잘못 전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으라고 했고, 그리고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살펴본다는 것이다.
물론 강의내용이 이미 녹음이 되고 녹취가 되어있으니, 다시 한번 더 확인하게 되는데,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굉장히 이상한데 말이다. 너무너무 이상한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듣던 분들이 말이다.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이다.
◈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마태복음 20장 22절에 보면, 예수님은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하셨는데,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누가 기적을 많이 따내고 축복을 많이 따낼 수 있는지 경쟁에 나서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돗대가 되고 모범생이 되며, 또한 누가 열등생이 되는지, 거기에 대한 논쟁이 굉장히 심했다는 말이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인고 하니, "지금 너희들은 너희 미래에 대해서 믿고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자기 장래의 우수하고 질 좋은, 자기 자신의 제2의 탄생된 모습을 믿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내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여기에서 또 다시 간격이 벌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 저도 그 잔을 마시고 싶어요" 라고 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신 그 잔을 말이다.
(마 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 저도 마시고 싶어요 !!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거기에 대해서 "저도 마시고 싶어요" 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람의 고백은 무엇이겠는가? "저의 믿음은 저의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다 비우고 오직 주님이 주신 것으로만 소복소복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마시라고 하면, "주님, 저에게 또 마실 것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어보자. 그런 것은 믿음이 좋을 때 하는 이야기들이고, 지금은 별로 마시고 싶지를 않은데,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슬슬 계산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주님, 가만히 있어보세요. 지금 저의 믿음잔고로는 그게 감당이 되지 않는데, 그것을 조금 있다가 마실 테니, 일단은 제가 원하는 것을 조금 채워주시면, 그때 가서 제가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모델이 무엇입니까?" 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 고린도후서 13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이것을 듣고 나서 다음에 나오든 말든 그것은 그 사람의 몫이고 말이다. 이제는 구자근 사모님의 말씀대로, 정말로 지긋지긋하다는 것이다. 와서는 가버리고, 또 와서는 가버리고 말이다.
◈ 강추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
여기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라고 되어있는데, 저는 정말로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강하게 되고 싶어서 환장한 분들에게 말이다. 그런 것이 우리의 미래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돈까스 집을 해도 아주 번창한 돈까스 집, 교회를 해도 아주 큰 우리교회, 그러한 것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 마귀가 심어준 세 가지 축복 !!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의 모델은 무엇인고 하니, 살아있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싶어서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세 번 시험을 받을 때, 이미 마귀가 사람들의 심성에 모두 심어준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심어놓고는, "그러면 너거들의 합당한 메시야를 한번 기다려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귀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에게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세 가지의 조건인데, "먼저 너거들이 밥 먹고 살아가기가 힘들지? 그러니 힘들지 않게 해주는 메시야를 찾고, 또한 기적이 있어야 천당에 간다는 느낌이 들지? 그러니 기적을 베풀어주는 능력이 있는 메시야를 찾고, 그리고 세상의 부귀와 영화가 부럽지? 그러니 그것을 보너스로 맞장구를 쳐주는 찾아라" 라고 말이다.
그것을 이미 마귀가 온통 이 세상에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집어넣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교회에다가 말이다. 천 명이 모이면 천 명에게, 또한 만 명이 모이면 만 명에게, 물론 열 명이 모이면 열 명에게 다 말이다. 그것이 세 가지 축복이란 것인데,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녹취자 - 목사님, 삼박자 축복은 들어봤습니다. ㅋㅋ)
◈ 아줌마, 조금만 더 버티세요 !!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우리 강하지 맙시다" 라고 하면, 아니 "우리 강하지 말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뒤에 앉아있던 두 사람은 벌써 나가고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교회에서도 지난번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하지만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뒷자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몰라도, 새로 온 부부가 또 다시 그 자리에 앉는다는 말이다. 아마 여러분은 보지를 못했지 싶은데, 10분이 지나고 15분이 지나도 그때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온 사람은 15분만에 퇴장을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부부의 경우에, 설교를 시작한지 20분, 30분이 지나니 아줌마가 드디어 웃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남자는 아직까지 굳어있는데, 하지만 아줌마는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하, 버티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 속으로 "아줌마, 지금 나가지 마시고 복음을 모두 듣고 나가세요" 라고 외쳤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아줌마가 언제 활짝 웃었는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시편 105 편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를 할 때인데 말이다. 말씀이 응할 때까지, 즉 "믿음도 행함도 아닌 말씀이 응하는 대로 요셉은 난데없이 이끌렸다" 라고 할 때 그 아줌마가 웃었다는 것이다.
(시 105: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시 105: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 105: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물론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라고 했을 때도, 그 아줌마는 자기가 아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서 그런지 몰라도 활짝 웃었고 말이다. 설교자의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 별이 지금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주님에 어디에 계시겠는가? 다른 곳이 아니라, 말씀이 이끄는 대로 가면, 거기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 다시 한번, '강하지 말자' !!
바로 그런 말씀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강하지 말자' 라는 것인데, 해병대에 가도 전방이 아닌 후방에 가려고 하지 말고, 그런 좋은 곳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가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이다. 자기의 미래에 내세울 것이 있다고 하는, 그런 자아상을 자아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내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라고 하는 말씀이,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에 믿음을 보겠는가?" 라고 하는 말씀과 겸비해서, 오늘날 신앙의 기적적인 모델을 갈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전히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제가 해답을 덜렁 던졌는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떤 논리를 밟아서 그게 해답일 수밖에 없는지, 그 논리를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간격이 너무 많이 벌어졌으니, 그 간격을 메워줄 논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 만사형통을 바라는 집안과, 약해지자는 집안 !!
먼저 이쪽 집안부터 이야기를 해보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사 죄 용서를 해주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아서 만사 형통케 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이 모두 이쪽 집안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축복을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힘들게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죄 용서는 예수님의 피로서 받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자들에게는 약속된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야곱처럼 말이다. 욥이 비록 엄청나게 고생은 했지만, 나중에는 이전보다 재산이 더 많이 불었는데, 바로 그러한 것을 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쪽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말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다 말이다. 비록 교회에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나오는 자라고 해도, 바라보기는 오직 그쪽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적만을 말이다. 혹시 자기도 아다리가 될까 싶어서, 마치 로또복권을 구입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곧 제가 정답이라고 이야기한 것인데, "강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약해지자" 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약해지심으로서, 아버지의 능력으로 살림을 받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더욱 더 약해지기 위한 요건들이었다는 말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비롯해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 귀신을 쫓아내신 것 등등, 그런 것들은 모두가 다 예수님을 더욱 더 약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즉 아버지의 능력이 아니라고 하면 아무 것도 의지하기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 강하고, 강하고, 강해지자 !!
그런데 요즘 교회는 어떠한가? 만약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을 근거로 해서 돈을 빼먹으려고,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해서 이제는 강해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자기 교회를 키우려는 밑천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병 고침을 받았다고 플랜카드를 걸고, 그리고 사법고시에 누가 합격이 되었다고, 그런 식으로 홍보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머리카락도 새롭게 돋아나고, 또한 상한 이도 금니가 된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역대하에 있는, 소위 야베스의 기도가 어떻고 하면서 자기들 지경을 넓히게 해달라고 하면서 철야기도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두가 다 하나같이 강해지는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 대자연으로부터 챙길 것은 챙기고 !!
그렇다고 하면, 여기 반대편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약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어떤 논리가 있어야지 여기로 건너올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 논리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이렇게 인간이 있고 대자연에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내세우는 논리는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으로부터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가기 위해서 자기를 키우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대자연을 자기를 위한 상대자로 둘러쳐져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대자연으로부터 챙길 것은 챙기겠다는 것이다.
◈ 대자연이 아닌, 예수님의 몸과 관련되어서 !!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6장에서 "이것이 내 몸이다. 이것이 내 피다"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대자연으로부터 무엇을 뽑아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예수님의 몸의 피와 관련되어서, 직접 아버지의 뜻과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 이쪽은 '인간 + 대자연' 이라고 하면, 왜냐하면 인간은 대자연이 없이는 살지를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반면에 여기 예수님 쪽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의 몸이 곧 아버지의 뜻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작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 대자연에서 필요한 것을 빼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작업이 예수님의 몸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몸을 사용할 때 무엇과 관련이 되는고 하니, 즉 "하나님의 뜻은 저기에 있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빼먹겠다" 라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뭔가 두리번거린다는 것 자체를,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가 직접 조정하고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즉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우리 자신이 빼먹기 위한 세상이라고 하는, 그러한 우리의 마음가짐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고방식을 계속해서 지속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만약에 우리 자신의 마음만 바뀐다고 하면, 이 세상이란 것은 모든 것이 다 은혜가 되는 것이지, 우리가 빼먹기 위한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옥죄는 대자연 !!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적이 있었는데, 그러면 그 물 위라는 것은 자연이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잠잠케도 하셨는데, 그 바다도 역시 자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제가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것은, 그것은 물 위를 걷고 바다를 잠잠케 해서 자기 제자들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 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마 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그러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약해져서, 나의 자생적인 힘을 쏙 빼버리고, 오직 아버지의 능력으로만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주가 되는가?" 라고 하는데, 거기에 필요한 요건들을 대자연으로부터 가지고 올 수 있는, 바로 그러한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자연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자립하고 자족하도록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고 부수고 약해지고 허물어지고 안개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아버지께서 대자연을 통해서 예수님을 옥죄고 있고 밀어 넣고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
예를 들어서, 어떤 제자가 예수님에게,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가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 제자는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따로 있다고 여겼는데, 즉 그 제자에게는 집이 따로 있고, 또한 예수님도 따로 있어서, "그러면 내가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까?" 라고, 그렇게 되는데, 물론 자기는 중립이고 말이다.
◈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선택을 필연으로 !!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인고 하니, 이게 참으로 어려운 말인데, 즉 "인간의 모든 선택을 필연으로 바꾸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이다. 그러니 "그 제자의 아버지는 그때 그렇게 죽어야만 했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제자가 되고 난 다음에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 니가 떠나기 직전에 아버지가 죽은 것은, 그것은 바로 너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장례를 치르는 자식으로서의 책임이 중요한지, 아니면 예수님의 영생이 중요한지, 그것을 일부러 가르치기 위해서 대자연을 동원해서 아버지의 목을 졸라서 죽였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죽이셨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연한 일은 전혀 없는데, 그러니 그 제자의 죽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제자 됨의 의미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잔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 즉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라는 잔소리를 듣기 위해서 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가 말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참새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지금 제자들이 자기들은 그대로 있고, 자꾸만 예수님이나 대자연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서, 즉 "어느 것을 선택하면 나에게 유리할까?" 라고, 그렇게 자꾸만 선택의 대상으로 삼다가보니, 정작 자기는 변하지 않고,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 돼 ♬
그렇게 사람들이 강해지려고 하는 것을 교회에서 얼마나 이용해먹는지 모르는데, 그렇게 강해야 마귀를 이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귀를 이기는 것은 약해져야 이기는데 말이다. 노래도 있는데,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누가 부른지 아세요? 유명했던 여자수영선수와 결혼한 남자가수가 있는데, 아무튼 매일같이 약해지면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더 약해져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셨는데, 즉 쓴 잔을 마시게 해달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선택'에서 '필연'으로 !!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너거들이 나의 쓴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라고 하시는데(??), 물론 제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자들은 예수님 쪽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서있기 때문에 말이다. 즉 "누가 누가 강한가?" 라는 쪽에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너거들이 필히 마실 수밖에 없도록 하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은 그야말로 완전히 조져놓은 인생이 되는 것인데, 즉 제자들 본인의 선택을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오늘강의에서 이것 하나만은 제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인간의 모든 선택은 결국 주님 안에서 무엇이 되는고 하니, 선택이 아닌 필연이라는 말이다. 절대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이라는 것이다. 마치 요셉처럼, 요나처럼 말이다.
◈ 친구야, 교회에 다니면 예뻐져 !!
사람들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렇게 믿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지요" 라고 말이다. 그러면 제가 물어보는데, "그렇게 받아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제가 원하는 것을 받으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잘 믿는 보람을 느끼겠지요. 그리고 그런 보람으로 남들에게 전도를 하면 술술 잘 되겠지요. '봐라,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잘 되었잖아. 나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얼굴도 예뻐져' 라고 하면 되겠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전도해서 여고 동창생이 교회에 나왔다고 하면, 그 동창생은 절에 다니다가 교회에는 처음 나왔기 때문에, 당연히 "친구가 교회에 다니면 예뻐진다고 했는데, 아이 너무 좋아라. 이제 얼마나 더 예뻐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예뻐진다는 것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그녀는 교회에 다니던 자기 친구가 예뻐진다고 했으니, 목사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전에 이야기한 그 뒷자리에 앉게 되는데, 그런데 목사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쓴 잔을 마셔라!" 라고 하니, 그만 뛰쳐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예뻐진다고 해서 교회에 나왔는데, 쓴 잔을 마시라고 하니, 더 이상 교회에 다닐 이유가 전혀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는 고생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려고 교회에 나왔는데, 오히려 교회에 다니면서 고생을 사서 하게 되었으니, 교회에 다닐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전도를 하면서 처음부터 "쓴 잔을 마시세요" 라고 해야하는데, 그런데 예뻐진다고 해놓았으니 잘못하면 배상이라도 해주어야 될 판이라는 것이다(ㅋㅋ).
어떤 교회가 부흥집회를 하는데, 그래서 교인들에게 한 사람 당 다섯 명씩 데리고 오라고 해놓고는, 강사가 "쓴 잔을 마시세요"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한 이벤트를 연다고 돈만 수천 만을 날리고, 최수종이나 차범근을 불러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기존의 다니던 사람들도 나가고 마는데, 그러니 그런 손해보는 장사를 왜 하겠느냐는 말이다. 마지막 날 밤에 헌금도 나오지 않고, 그러면 그 강사의 사례비는 어디서 나오겠느냐는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모든 선택은 그야말로 철딱서니가 없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필연으로 가는데, 그 필연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강력하게 잡아당기는 방향이 어디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우리 몸 자체의 생명, 즉 피를 지적하고 지목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몸 속에 피가 들어있는 것처럼 우리의 몸 속에도 피가 들어있는데, 하지만 그 피로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을 받는데, 그래서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내 몸이 받아먹어라. 그리고 이것이 나의 언약의 피니 마시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가?
그렇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되면 제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스도의 몸과 한 몸이 되는데, 그러면 성령께서 그렇게 추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즉 "저 인간을 어떻게 그 인간으로 남겨두지 않고, 연약하신 예수님의 몸으로 바꿀 것인가?" 라고 하는, 성령께서 그렇게 개입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방법? 이유?)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데, 성령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가? 만약에 예수님의 몸에서 그 키가 175cm라고 하면, 그런데 여기에 있는 여자는 키가 159cm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남자이고 이 사람은 여자인데, 그러면 이 여자가 어떻게 예수님의 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성령께서 개입하시는데, 사실 성령이 개입해도 문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여자의 몸에서 남자의 몸으로 바뀌고, 또한 키가 159에서 175로 바뀌느냐는 말이다. 즉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께서 개입했다고 하면, 그 개입한 순서와 절치를 낱낱이 밝혀주어야만 "아하, 이렇게 되었다가, 이렇게 되고, 또 이렇게 되었구나.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구나" 라고, 그것을 밝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말이다.
◈ 성령께서, 성령께서 !!
지금부터 그것을 한번 설명해보겠는데, 성령이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령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몸에서 성령이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하고, 성취하시는 몸이었는데, 그냥 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몸이 아니고 말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집대성되어있고 담겨있고, 그 몸의 모든 움직임은 그 자체가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권세가 있는 말씀' 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살아있는 말씀' 이라고 하고 말이다. 우리의 골수와 심령을 쪼개는 말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러니 이 말씀을 우리가 지켜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다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몸 자체가 말씀을 증거하는 몸으로 편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몸으로 구성이 된다는 말이다. 즉 우리 몸이 다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고 하면, 예수님의 몸과 말씀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고 하니까,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몸으로 발현이 되고 드러났다는 것이다.
◈ 성령께서, 성령께서 !!
물론 성령께서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영은 아니었는데,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 예수님을 다룰 때는, 아버지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실현하도록 다루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병을 고칠 때도 성령이 충만해서 그렇게 하셨고, 또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것도 성령이 충만해서 하셨다는 말이다.
물론 사도바울이 로마를 가든 그 어디를 가든 성령이 충만해서 갔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성도들이 자기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이 되어서, 성령께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간다는 것이다. 쩌벅쩌벅, 그렇게 움직이는 일종의 로봇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령께서 조종하는 하시는 말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그것을 두고, 그냥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라고 해버리면, 자기가 무슨 짓을 하든지 성령의 역사라고 하게 되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온 말씀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다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죄를 지을 수가 없는데, 즉 예수님은 말씀에 위배되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방금 제가 뭐라고 했는가? 성령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성령은 우리를 쩌벅쩌벅 로봇처럼 움직이되 어떻게 움직이게 하시겠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의 취지와 완성에서 벗어나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니 말이다.
◈ 먼저 구약을 살펴보면 !!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하게 되면 또 갭이 생기게 되는데, 먼저 구약부터 살펴보자는 것이다. 구약에는 율법이 있는데, 즉 언약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 이스라엘의 경우에 모세가 있고 그 백성들이 있는데, 물론 다윗도 있고 예레미야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이 말씀이 어떻게 그들을 움직이게 했는지, 그것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다윗과 사울의 경우에, 한쪽은 성신이 임했고, 혹은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것이다. 다른 쪽은 악신이 임했고 말이다. 특히 사무엘의 경우에, 그 모인 장소가 성신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민수기 19장이지 싶은데, 거기에 보면 70명의 장로가 나온다는 것이다.
19장이 아닌가요? 19장이 아닌 11장인데, 거기 25절 말씀을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 70명의 장로가 성신을 받아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만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이상하지 않는가? 성신이 임하면 발작을 일으키던지, 아니면 무거운 것을 들든지, 그렇게 해야하는데, 그런데 장래의 일에 대해서 예언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계시이고 곧 말씀인데, 즉 성신이 왔는데 튀어나오는 것은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다.
(민 11: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민 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
한 군데만 더 찾아보면, 누가복음 마지막 대목인데, 24장 45절에 보면,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라고 한 다음에, 49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 곧 성령인데, 그러면 그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면 제자들의 키가 갑자기 모두 175가 되고, 또한 여자들은 남자가 되는가? 도대체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 그 증거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이 44절에 나오는데, 즉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간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란 말이다. 바로 그것이 성령을 받아서 기록한 것이 사도의 편지인데, 그러니 예수님도 마찬가지이고, 성령을 받는 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또한 구약의 70명의 장로들도 성신을 받아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 사도들이나 성도들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온 우주가 말씀의 세계
성령을 받게 되면 온 우주가 말씀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즉 '필연'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선택도 말씀이라는 필연 속에서 움직이는, 그야말로 뽀글뽀글 거리는 거품방울과도 같은 선택이 있을지언정, 그 전체는 절대적인 필연으로서, 거기서 나오는 하나의 선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곧 완료된 말씀의 나라, 즉 완료된 성경말씀에서 나오는 우물로서 피어난다는 것이다.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떻게 말씀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런 논리를 한번 보여달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닌데, 그래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어떤 소리를 들었는데, 그게 어떻게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 즉 그러한 절차와 과정을 나에게 설명을 해봐라"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 아예 처음부터 설치된 말씀의 시스템 안에 !!
다시 말해서, "어떤 말씀을 전하니 내가 그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고 깨달았다" 라고,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그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그 말씀이 무엇을 펼치는데, 낙하산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말씀이 이런 뜻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이미 설치된 말씀의 장치와 그 시스템 안에 우리 자신이 작게 놓여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특정한 말씀만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온전히 전체 말씀대로 다 이루어지는데, 즉 자기가 말씀을 모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나중에 소급해서 그런 것도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야,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는 과정이 움직이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요셉의 경우도 그렇고, 그리고 요나도 다시스로 도망을 하는데, 그만 주님께서 눈치를 채고 풍랑을 일으키셨는데, 그래서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어서 "나는 죽고 당신들은 사세요" 라고 하면서 바다로 뛰어들고 했는데, 그런 모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그 어디를 가도 주님의 손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죽어도 안 되는데, 무덤 속에서조차도 주께서 부르시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한군데 찾아보겠는데, 자신이 없으면 찾으면 안 되는데 말이다(ㅋㅋ). 아모스서 9장 말씀인데, 2절과 3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암 9:2)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암 9: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 우리를 존재케 하는 모든 것이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숨어도 찾아내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숨든 숨지 않든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모든 것이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성신이 구약에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성신이 아닌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 무엇을 해도 오직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라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오늘도 등산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참, 좋겠다!!)
그렇다면 등산을 하는 것과 예수님의 피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언약, 즉 말씀의 체계 안에서는 예수님의 몸의 피의 기능과 역할을, 즉 피가 곧 생명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마지막 때까지 우리를 이렇게 끌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때는 "제가 산에 등산을 가서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라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즉 "니가 산에 갔는가?" 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니가 십자가 피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을 물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라고 하신 것은 "이제 니 몸은 니 몸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보조 기능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재료에 불과하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십자가의 확대, 그게 곧 !!
그러니 십자가가 '쭈욱' 늘어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십자가가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도들의 몸이 되고 손이 되고 발이 되어서, 글도 쓰고 전도여행도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상태에서 글을 쓰는데 잉크가 줄줄 나오게 되면, 그게 곧 십자가 복음에 관한 사도들의 편지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도 변화산에서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 언제 별세를 하십니까?" 라고, 그렇게 예수님의 별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의 성도들도 별세, 즉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이다.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 십자가는 이제 그만 잊자 !!
그러니 여기 예수님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가? 이 세상의 욕망에, 즉 악령에 사로잡혀있는 자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하는가? 십자가로 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만하면 되었고, 이제는 그만 잊어버리고 앞으로 어떻게 챙길 것인지, 그렇게 해서 주님의 복을 받는 자로서 살아가 줘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된다는 것이다. "야, 교회에 나가니 복을 받는구나. 나도 가야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전도의 효과도 있으니 십자가는 그만 잊자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바로 이제 자기가 얼마나 강한 자인지, 똑똑한 자인지, 무엇이든지 남에게 나설 때 부족함이 없는 인간으로 세워지는, 거기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자는 것이다. 자기가 존재할 만한 보람을 느끼도록, 즉 "야, 이런 재미로 예수님을 믿는구나" 라고, 그런 즐거움을 느끼도록 말이다. 즉 남들에게 기가 죽지 않는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자들에게는 회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물론 반성은 가끔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자들은 십자가와는 이제 이별을 고하게 되는데,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핍박을 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 될 것이니 !!
하지만 조금 전에 본 누가복음 24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47절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는 왜 자꾸만 너의 선택을 믿는가?"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기로 했습니다" 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런 자기의 선택을 믿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믿음조차도 필연에 속한다는 것이다. 선물이 주어질 때, 그 선물의 결과가 곧 믿음인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 믿음을 자기의 믿음으로 가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 도대체 당신은 무엇이 보고 싶은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쪽에 뭐라고 하는가? "목사님, 물론 그 말이 맞기는 맞는데, 그렇게 해서 몇 명이나 전도를 하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해서 교회가 제대로 되겠느냐는 말이다. 기존의 있는 사람들도 다 떠나지, 도대체 몇 명이나 남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을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인가? 몇 명이나 남았는지, 그것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전해서 몇 명이 남았고"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들끼리 하려고 하니 교회재정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돈을 내는 사람들을 더 끌어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부담금이 줄어드는데, 그러니 결국 돈 문제라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보기 위해서 믿느냐는 것이다. 쓴 잔인가? 결코 그들은 쓴 잔을 먹으려는 것이 아닌데, "쓴 잔을 먹을 테니, 내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게 해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복음을 믿을 테니, 돈까스 집이 잘 되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예수님은 절대 절망에 !!
하지만 예수님은 점점 더 약해지는데, 어디까지 약해지는가? 아버지의 능력이 아니라면 절대 절망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데, 그것이 바로 쓴 잔의 지경이고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쓴 잔에서 우리는 그냥 입맛만 다실 뿐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장희빈인데, 즉 그녀처럼 사약을 마실 수밖에 없는 말이다. 사랑했던 남편인 왕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그래도 그 순간까지 장희빈이 노린 것이 무엇인가? 그래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를 용서해줄 것이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바램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코인데,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사랑했던 자기 아들을 잡는 것을 한번 보라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올인하는데, 즉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곳에다가 말이다.
◈ 우리의 몰빵을 거부하시는 주님 !!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하면, 자식이 힘들 때 빚을 내서라도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물론 자식이 그것을 알 리가 없지만 말이다. 아쉬울 때는 부모를 찾지만, 잘 되면 다 자기가 똑똑해서 그런 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제전문용어로 '몰빵' 이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 인간이 몰빵한 것을 그만 걷어 차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겠는가? "주님, 그렇게 하시면 나는 무슨 재미로 삽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쓴 잔이라는 것이다. 그게 곧 사도들이 갔던 순교의 자리이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도저히 질 수 없었던 십자가를 주님께서는 필연적으로 지게 하셔서, 즉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데, 그것을 주님께서 하셨다는 말이다.
◈ 그러니 '막 마세요' !!
아직까지 제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닌데, 그렇게 우리가 몰빵한 것을 주님께서 차버리고 나면, 그러면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특별히 인생을 살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여기에서 그 유명한 "막 사세요"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