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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3강-에스겔5장 1-4(선지자의 신체)121031-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에스겔

13강-에스겔5장 1-4(선지자의 신체)121031-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83.105.195.252)

13강-에스겔5장 1-4(선지자의 신체)12103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5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5:1-4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가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가지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가져 네 옷자락에 싸고 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고 아주 특이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가지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오늘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들에게 개망신 당하는 행동에 불과한 겁니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남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때 이런 식으로 과격하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멀쩡한 자기 수염과 머리카락을 잘라서 그것을 가지고 저울에 달아서 그 3분의 1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또 그 3분의 1은 칼로 치고 그 3분의 1은 바람에 흩어버리고, 이게 무슨 미친 짓입니까?

말로 해도 되잖아요. 사람들에게 말과 글이 있는 이유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라고 있는 것인데 왜 이렇게 하는 겁니까? 말로 해서 될 것 같았으면 진작 말로 했지요. 하나님의 계시의 뜻이 그냥 말한다고 사람들이 순응하는 차원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모든 것이 말로 해서 안될 만큼 이미 끝났다는 말입니다. 끝 지점입니다. 끝 지점에 와서 이 선지자가 이런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것은 선지자가 하나의 수류탄처럼 폭발해 버린 겁니다. 선지자가 폭발함으로서 선지자가 담고 있는 그 내용은 선지자 개인의 의견이라든지 또는 성장과정에 있었던 트라우마 같은 것 때문에 예언자 행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선지자가 수류탄 터지듯이 폭발해 버리면 그 튀는 모든 파편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미래의 작업이 개시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좋은 말로 해서 알아듣고 말고 할 시기는 이미 지나난 거예요. 2절에 보면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예루살렘 성이 이미 포위가 되어 있다는 그 말이에요. 그런데 예루살렘이라 하는 것이 바벨론 나라 입장에서는 그냥 흔하디흔한 마을에 불과한 겁니다. 조그만 성 예루살렘에 비해서 큰 성, 큰 도시도 많아요. 예루살렘 성 하나 무너졌다고 세상이 끝이라고 하는 생각이 그 성을 포위한 바벨론군대입장에서는 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이 망하는 것이 어떻게 세상 끝을 보여주는 징조가 되느냐, 우리가 그 점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인류역사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 죽는 것이나 강감찬, 오랑캐중의 하나, 어떤 북한군이 귀순하려고 죽인 그 군인이나 하나의 인간이 죽는 것은 흔해 빠진 일이라는 말이지요. 지금도 장례식장에 가보면 많은 사람이 죽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은 의미가 없고 왜 하필이면 나사렛 예수라는 그 청년이 죽는 것은 그토록 중요하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이라는 것은 차별화입니다. 예수님과 그 외,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과 그 외 나머지 모든 일은 차별해야 된다, 구별해야 된다, 달리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예수님과 그 외의 일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그 외, 할 때 ‘그 외’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하면 바로 본인 자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찬란한 역사가 포함되어 있고 자기가 고생고생하면서 살아왔던 인생의 모든 여정이 ‘그 외’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만 높여 버리고 그 나머지는 쓰레기로 버리려고 하니 그 쓰레기 속에 자기 자신이 담겨 있으니 기껏 인생 산다는 것이 쓰레기 안 되려고 살았는데 쓰레기 취급이나 받을 것 같으면 “누구야? 날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 누구야?”라고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돋보이기 위해서 넌 쓰레기 돼야 돼.” 이렇게 되거든요. 결국 ‘예수 믿고 완전무시당해라.’ 하는 원칙이 여기에 자리 잡는 겁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예, 믿습니다.” “개망신당하세요.” 그런 당연한 원칙에서 도망치거나 도피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만 높이겠다는 것이 하나님 뜻이에요. 거기 곁들여서 우리도 한 다리 끼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 높일 때 같이 높임 받는 사람은 현재의 우리가 아니가 그 우리를 죽이시는 우리를 높이시는 겁니다. 타고난 에스겔의 똑똑함, 이런 것을 높이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개망신을 당하는 에스겔을 주께서 높이시는 거예요. 에스겔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높임을 받으려고 자진해서 머리카락가지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 받고 한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받고 한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와 언약이 자기에게 집중해서 오니까 에스겔은 그 언약을 위해서 자기를 도구로 제공해야 되고 그 제공된 도구는 주님에 의해서 난도질을 당하는데 한쪽은 예루살렘 성안에서 그리고 또 한쪽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또 다른 하나는 바람으로 흩어져 버리는 모양새로 자기를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해석을 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만 해도 기초만 닦는데 몇 시간을 해야 돼요. 왜 그러냐하면, 흩어져 있는 모든 일들을 에스겔이라는 그 위치에 모으는 그 작업을 설명하려 들면 한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 흩어져 있는 모든 것을 에스겔에게 집중시키는 그것.

왜 에스겔로 집중해야 되느냐하면, 지금 에스겔이라는 자리가 예루살렘이라는 자리거든요. 지금 예루살렘을 예언하고 예표 하는 자리라는 말이지요. 보통 사람 같으면 에스겔이 그런 행동을 하면 “어이, 에스겔! 너 무슨 짓이야? 빠져줘. 너 때문에 예루살렘 본래의 모습이 안보이잖아.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이벤트와 퍼포먼스를 벌리면 되겠어? 비켜, 비켜! 지금 예루살렘 사진 찍는데 너 때문에 안보이니까 비켜.”라고 했을 때 에스겔은 뭐고 예루살렘은 뭡니까? 이 문제가 풀려야 돼요.” 자기가 뭔데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는 겁니까, 자기가 뭔데? 선지자 네가 뭔데 함부로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느냐 그 말이지요.

이 말이 어렵게 들리잖아요? 이것을 쉬운 말로 고치겠습니다. “예수 당신이 뭔데 우리 집안을 이 꼴로 만들어놓았느냐?” 하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에스겔이 삭발을 하는 것은 애도와 슬픔의 표현입니다. 에스겔이 삭발하는 것은 애도와 슬픔의 표현인데 이 것 자체가 어려운 이야기가 되는 이유가, 사람이 어떤 경우에 슬프다고 말을 할 때는 이 전 상황과 후의 상황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일반사람들이 슬프다, 하는 것과 지금 에스겔이 머리 깎으면서 슬프다고 하는 것이 같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일반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슬프다는 거예요.

그런데 에스겔의 슬픔 곧 하나님 보시기에 슬픈 것은 뭐냐, 이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가지고 슬퍼하는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에스겔이 머리 깎는 그것을 슬퍼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길가는 데 장례식장이 있어요. 거기에 가족 네 명이 모여서 울고 있어요. 내 집안사람이 아니라서 그냥 지나가는데 장례식장에 있는 사람이 나를 부르더니 “내가 슬퍼하는데 당신은 슬퍼하지 않습니까?”라고 시비를 건다면 경찰에 고발해야 되지요. 당신 집안일로 슬퍼하는데 내가 왜 덩달아 슬퍼야 됩니까?

제가 어렵다, 어렵다, 한 이유는 사람이 슬퍼하거나 즐거워하거나 기뻐하거나 희망이나 소망이나 어떤 믿음을 가질 때는 반드시 그 전에 기존의 자기 역사와 자기자리가 있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하는 겁니다. 무엇이 어려운가, 주님께서 희망하시고 주님께서 슬퍼하시고 주님께서 사랑이니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가 예수님한테서 나온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뭐로 해석하느냐하면 기존의 내 것을 건재하게 유지시키고 지속시키고, 내 것을 빼앗기지 않고 단단히 당도리 하는 입장에서 ‘주님이여, 왜 슬퍼합니까, 가만 있자. 내가 무슨 손해가 났지? 주님께서 뭘 소망하지? 아, 내 것을 키우라는 모양이구나. 주님께서 믿으라고 했으니 믿으면 내 것이 커지는 모양이다. 주님께서 사랑을 하라고 하니 내 것 가진 것이 더욱 빛나라고 사랑하라고 한 모양이다.’

전부 다 자기 것을 기본으로 깔고 주님 주신 계시를 해석하다 보니까 이게 엉터리라는 말이죠. 노선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노선인데 우리는 내가 여기 있다, 여기 있습니다, 하는 노선에서부터 맨날 성경을 보니까 백날 QT 해도 전부 다 그게 엉터리에요. 주님의 뜻하고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어렵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개망신이라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에스겔은 하나님 뜻에 의해서 사람들 눈앞에서 개망신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반대입니다. 개망신 안당하기 위해서 하나님 믿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믿고 망신당한다면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 차후에 새롭게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인생이 이렇게 조져도 계속해서 교회 나오고 계속해서 주님 사랑 할 것인가, 하는 그것에 있어서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나에게 집중한 것이거든요. 설교 초반에 했지요. 이 본문 설교하려면 기초 닦는데 한 시간이상 필요하다고. 왜 한 시간이 필요한지를 설명했지요. 모든 것을 끌어 모아서 그 에스겔에 집중해야 되는데 이미 우리는 기존의 역사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가지고 나 잘되기 위해서 나에게 집중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나에게 집중이 되어 있는 그 나를 철폐시키고 에스겔, 예수님 중심으로 모아지려고 한다면 이게 얼마나 힘겨운 작업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이야기할 것은 또 해야 됩니다. 나름대로 쉽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이 사라진다는 것은 뭐가 없어지는 것인가, 땅이 없어지는 거예요. 지구온난화에 의해서 히말라야나 빙하가 녹아내려서 벵겔만이나 방글라데시같은 곳의 강물이 불어났습니다. 강폭이 무려 32킬로미터까지 불어났어요. 섬에서 수천 년 동안 농사지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인데 일 년이면 1킬로미터까지 흙이 내려앉아서 농지가 강물에 휩쓸려서 없어져 버립니다.

땅이 없어요. 땅이 없으면 환경난민이 되어버립니다. 땅이 없으면 살 곳이 없습니다. 방글라데시 주민들은 위태롭게 그것을 지금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이 유다나라는 땅이 없어요. 왜, 빼앗겼으니까.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나라 차지해 버리니까 땅이 없다는 말이지요. 일제 강점기 때는 원래 조선 사람들이 살던 곳이니 계속 살되 세금이나 왕창 매기고 일본군대에 징집하는 식으로 했으니까 숨통이라도 트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땅 자체가 없어요.

멀쩡하게 살던 집인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쳐들어 와서 살던 집에서 쫒아내 버립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어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유다나라가 평생 동안 하나님 믿고 예배하고 제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켰다는 이 모든 작업을 계산해보니까 마지막에 ‘너는 땅 없음’ 이 계산이 나온 겁니다. 우리는 현재 땅이 있기 때문에 성경 시시하게 보지만 그 당시 유다나라에서는 심각한 문제지요. 땅이 없으면 애를 어디서 키웁니까? 어떻게 키우지요? 쫓겨나가는 판국인데.

에스겔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땅이 약속의 땅의 의미를 그동안 가렸다는 겁니다. 기존에 땅이 있어야 산다는 그 생각, 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을 그냥 땅으로서 여겼던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 땅은 그냥 땅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 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과 땅의 차이를 몰랐던 거예요. 언약의 땅과 땅의 차이를 몰랐던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나그네라는 그 의미를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라를 만드시고 선지자들이 찾아와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했던 그 모든 것이 약속의 땅에 관해서 한 이야기였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뭘 로 이해했느냐하면, 기존에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더 풍요하게 살기 위해서 축복된 말씀을 주셨다고 이해한 겁니다.

그런 이해 말고 우리가 다른 이해를 하고 싶어 할까요? 다른 해석이 있어도 우리는 그 해석을 배격해 버리고 내가 원하는 해석만 얻고자 할 따름이에요. 교회 왔다, 그래서 잘 됐다, 우리는 그것을 원한다는 말이지요. 내가 현재 이만큼 가졌는데 가진 것을 더 많이 갖기 위해서 하나님 사랑해주세요, 우리는 그것만 기대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들 앞에서 에스겔이 우리 다 같이 울자는 식으로 삭발하고 삭발한 머리카락 가지고 불사르고 칼로 치고 바람에 흩날리는 겁니다.

그러니 에스겔 저양반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당신 미쳤어? 당신 왜 그래?”라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 행동, 이것을 말로 설명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에스겔은 뭐냐, 너희들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지금 나한테 일어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거예요. 여기 동원된 것이 불이지요. 에스겔의 머리카락이 불과 연관되고 또 하나는 칼과 연관되고 또 하나는 바람과 연관됩니다. 불과 칼과 바람, 이것은 마지막 때에 ‘뭔가 있다’는 것을 소실시키는,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데 동원된 상황들이지요.

정읍에 있는 내장사 대웅전이 불에 타버렸다는 거예요. 대웅전 자리가 시커먼 잿더미로 변했어요. 에스겔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3분의 1만큼 홀라당 태웠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에스겔의 3분의 1일 날라 가 버린 거예요. 에스겔의 3분의 1이 날라 가면서 그 3분의 1은 어디 가 있느냐? 약속의 땅에 가 있지요. 약속의 땅에 가 있는 거예요. 또 3분의 1을 가지고 이번에는 성읍 사방에서 칼로 쳐버리니까 이제 3분의 1만 남고 3분의 2가 없어졌어요. 어디로 갔을까~요? 약속의 땅에 가 있는 거예요. 마지막 3분의 1의 털을 바람에 날려버렸습니다. 이젠 찾지도 못해요. 그 3분이 1이 어디로 갔을까요? 약속의 땅을 만들기 위해서 갔지요.

유다백성들에게 에스겔을 전면에 내세워서 에스겔의 행동을 통해서 그들의 땅과 연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불과 칼과 바람은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내린 조치였습니다. 그 조치가 우선적으로 에스겔에게 먼저 도달했어요. 에스겔에게 도달함으로써……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하나님의 그 취지가 에스겔에게 도달했다는 말은 전에는 유다 백성들과 상대하던 하나님이 더 이상 유다백성하고는 상대를 안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하고 상대 안 해, 이렇게 되면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것은 단절입니다. 다리가 끊어진 거예요.

쉽게 말해서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나는 내 약속과 언약, 에스겔과 상대해서 그 언약의 지속성, 언약의 완성코스로 갈 거야.”라고 에스겔을 붙잡아버리면 이미 하나님과 자기백성사이의 관계는 끊어진 관계라는 말이지요. 에스겔만 없다면 이런 저런 것들이 없어져도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이 보여주는 것은 이겁니다. 내가 바로 너희들이 그토록 원하던 유다나라, 이 에스겔 몸 하나가 내가 바로 유다나라다, 라는 거예요. 나에게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 특별한 일을 통해서 나를 그냥 개인으로 보지 말고 유다나라의 운명을 나타내고 있다고 믿으라는 말입니다.

내가 불타거든 유다나라가 불탄다고 보고 내가 칼 질 당하거든 유다나라가 칼 질 당한다고 보고 내가 흩어지거든 너희 백성들이 온 나라에 다 바람같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다 가족도 뿔뿔이 헤어졌다고 보라는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집단인데 어떻게 이것이 에스겔 개인에게 응축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제가 아까 단절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에스겔이 자기 머리카락을 자를 때에 요즘 사람들 생각으로 하면 ‘저 사람이 머리가 너무 길어서 머리를 자르나?’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길,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이 없고 하나님과 엮이는 수단, 아무 대책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길이 없는데 웬 미친 인간 하나 등장해서 뭔가 퍼포먼스를 하는 그것이 뭐냐 하면 유일한 길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보통 길이 나 있잖아요. 길이라는 것이 평소에 사람이 자주 다녔다는 거예요. 누가 다녀도 다녔다는 겁니다. 산에 길이 나 있다는 것은 앞서서 어떤 인간이 그 길로 가서 발자국의 무게로 눌려서 길이 되었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에스겔은 의도적으로 길이 없다는 것을 언급하는 거예요. 에스겔이 그런 행동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에스겔의 행동을 사진 찍어서 자기도 머리카락 자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러면 길이 됩니까? 그것은 길이 아니지요. 전에 언젠가 이야기했잖아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뒤에 방주주식회사가 만들어졌습니까? 노아방주는 노아 때만 적용되는 거예요. 그 뒤에는 방주라는 방법이 안 통하는 겁니다. 또 다시 길이 없어요.

홍해가 갈라졌다, 그 말은 ‘야, 홍해가 갈라지니 길이 생겼다.’ 이렇게 보시면 안 되고요, 홍해가 가로막혔다는 것으로 보시고 길이 없었다는 고백을 해야 된다니까요. “저, 집사님은 천국 가는 길을 어떻게 알았지요?” “길이 없어요.” 그렇게 답변해야 돼요.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길을 열어 줬지요.” “누가요?” “예수님이!” 그래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이 너무 많이 유행했어요. 너무 유명해졌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길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예수님은 길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길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분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길이라고 하면서 길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길을 열어줄 때만 ‘예수님이 친히 길을 열어줬구나.’라고 믿으라고 주신 말씀이라는 말이지요.

‘나는 길이요’라는 그 말씀은 우리가 실천에 옮기는 말씀이 아니고 주께서 ‘나는 길이요’라는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그 현장에서만 그 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말씀이 어려운 거예요. 제가 아까 끝이라는 말을 했는데 에스겔이 이런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은 이게 끝이에요. 끝이라고 할 때 끝 다음에 뭐가 있겠지, 하는데 끝 다음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렇게 했잖아요. 커튼 뒤에 뭐가 있겠지, 커튼 뒤에 아무것도 없고 막혔어요. 에스겔의 모든 퍼포먼스는 이 커튼 역할이에요. 없다는 거예요. 끝났다는 거예요.

그럼 뭐가 시작인가, 이 에스겔이 시작이지요. 설교 다시 해보겠습니다. 항상 우리가 슬프다든지 기쁘다고 할 때는 그 전에 어떤 상황이 있어요. 그 상황대로 안 되니까 슬픈 거예요. 어떤 상황에서 기대하는 바가 있었고 소망이 있었는데 그게 뜻대로 안되니까 슬픈 거예요. 하지만 그 슬픔이란 하나님이 원하는 슬픔이 아닙니다. 왜냐, 자기의 욕심과 욕망에서 나온 기대치이기 때문에 그것은 슬퍼할 가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머리를 홀라당 깎는 것, 애도의 표시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슬픈 거예요.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면서도 언약을 모르고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약속의 땅의 취지를 모른 채 기존의 이방인처럼 그저 땅 있기에 밭 갈고 사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없으면,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면 그것은 죽은 거예요. 오늘도 길거리 나가 보세요. 버스 타 보세요. 온통 언약과 복음을 모르는, 예수님의 피를 모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울었다가 웃었다가, 소망했다가 기뻐했다가 행복을 느꼈다가 불행을 느꼈다가, 아파트 15층에 소녀 셋이 우르르 올라가서 뛰어 내리고, 그냥 뛰어내린 것도 아니고 참 이슬 처먹고 뛰어 내리고, 무슨 삼천궁녀도 아닌 것들이. 아무도 에스겔의 의미를 몰라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기에 너무나 개탄스럽고 한탄스러워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칼로 쳐버리고 다 소멸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에스겔을 통해서 비로소 숨겨놓은 하나님의 언약의 진수가 드디어 발현됩니다.

그리고 에스겔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인자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자기호칭이 뭐냐, 아시는 대로 ‘인자’입니다.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라. 마지막으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합니까?”라고 물으시면 이것을 그대로 예수님 한 마디 한 마디에, 예수님의 산상설교 한 마디 한 마디에 이것을 다 집어넣으세요. 예를 들면 ‘심령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구절,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구절에다 이것을 그대로 다 집어넣으세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세상 끝이라고 말씀하시는구나.’ 세례요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결국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자기 모가지가 잘려서 쟁반에 올려 져서 국가권력에 개망신당하는 식으로 세상 끝냈고 예수님의 그 한 마디 한 마디와 그 모든 행적이 벌거벗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가시면류관 쓰고 옆에 달린 강도들에게 모독당하는, 공개적으로 개망신당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운명을 재촉했습니다. 에스겔이나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사도나 거꾸로 십자가에 달렸다는 그 사도나 혹은 참수 당했다고 소문난 사도바울이나 도대체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다 같이 이 땅에서 개망신 당한 거예요. 단절입니다. ‘너희에게서 출발하는 그것은 길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다. 진짜 길과 진리와 생명은 오직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그 끝 자체가 곧 시작이요 그것이 영생이요 진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끝 날에 저희들을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셨는데 우리는 맨 날 우리가 만들어낸 희망과 소망과 사랑에 부풀어서 그것 채워달라고, 야망 채워달라고 주께 빌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에스겔처럼 사용하셔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의 끝임을 알려줄 수 있는 도구로 쓰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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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아(IP:180.♡.96.90)

12-11-02 10:22

예수님이 길이니까 나는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줄로 알았고 예수님이 진리니까 나는 그 진리를 알수 있는 줄로 생각했고 예수님이 생명이니까 나는 그 생명을 소유한 줄로 여겼다. 왜? 나는 철저하게 예수님을 믿었던 자였으니까...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막혀 있었고 예수님의 진리는 알기는 커녕 찾을수 조차도 없었고 예수님의 생명은 도리어 죽음을 통보해 주었다. 단절...방사선 약을 먹고 1인실 통제구역에 갇힌 고급스런 구제역을 할 때에 밖에서 밥 세끼 넣어주기 위해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된 상태속에 있어야만 했었다. 편하게 티비 보면서 밥 세끼 챙겨주는대로 먹고 내맘대로 하면서 쉬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참을 수 없는 것은 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통제였고 차단이었다. 겨우 이틀이니까 버티고 나왔겠지...어쩌면 이 세상은 가끔씩 어떤 계기에 의해 갇힌 차단이나 단절됨을 느끼며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영원히 차단된 상태 또는 단절된 상태인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정녕 모를 것이다. 지옥에 갇혀서 천국이 단절된 상태이거나 아니면 천국에 갇혀서 지옥이 단절된 상태이거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것도 철두철미하게 믿는다는 자부심하나만으로 전부 다 내것이 되어야만 하는 나를 비롯한 한국 교인들만의 독특한 행태는 그 예수를 누가 믿게 했는지 정말로 참으로 모르겠다. 창세전에 언약대로 주님이 열어 주시고 주님이 보여 주시고 주님이 되어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영원한 단절속에서 끝장난 단절을 영원히 맛볼 것이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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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6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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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