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21012b-벧후3장5절(물의 심판)-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후서

안양-20121012b-벧후3장5절(물의 심판)-이 근호목사

이름 : 공은주(IP:61.100.205.105)

안양-20121012b-벧후3장5절(물의 심판)-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6절,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물이 넘치는데, 처음에 2월 10일에 시작돼서 그 다음해에 2월 27일에 끝났어요. 노아홍수가. 창세기에 읽어보면. 들어가서 당장 온 게 아니고 문 닫자마자 비가 후두둑 온 게 아니고 일주일간 기다리다가 비가 떨어졌고, 비가 40일 동안 그냥 내리부었고, 물이 150일 동안 줄지 않고 꽉 차 있다가, 그 다음에 줄어드는데 150일이 걸렸어요. 물차고 빠지는 데만 벌써 1년이 걸렸어요. 300일. 옛날에는 1달을 30일로 했으니까. 근 1년 가까이 했고. 그 다음에 물 빠지고 난 뒤에 처음에 까마귀 보냈잖아요. 까마귀 보내고 비둘기 3번 보내고, 그리고 물이 마른 걸 알고 난 뒤에 딱 1달 27일을 더 기다렸어요. 땅이 말라야 되니까. 땅이 말랐구나 알고 난 뒤에도 계속 기다려요. 1월 2일에 알았으니까 1달27일 뒤에 방주에서 나와서 번제를 드렸어요.

하나님 앞에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를 드리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표시로 무지개 떴고, 그리고 그 무지개 의미가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겠다,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모든 게 악하기 때문에 물로서 심판했다. 인간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악했어요. 악한 존재가 땅에 있다는 것은 일종에 함정에 빠진 겁니다. 함정에.

“어, 땅 괜찮네, 형, 우리 여기서 땅에서 삽시다.” 라고 했는데, 물이 넘칠 줄은 몰랐지요.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도 말씀이 쫓아냈는데, 말씀이 계속 따라왔는데, 이제는 에덴동산 벗어나니까 우리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긴 거예요. 이 말씀이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하루, 하루 살면 이게 사는 거야 생각했지, 진정 우리가 누구 안에 갇혀있으며 어떤 구조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생각을 못 한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는 사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말씀의 끝이 예수님이 와야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 중간 절차에 그만 인간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끼인 거예요. 유원지에 가면 구름다리 있지요. 축 늘어진 다리 중간에 가다가 무섭다고 못 간다고 하잖아요. 에덴동산 추방부터 해서 예수님 오실 때 해서 축 늘어진 구름다리 있는데 여기에 중간에 인간이 온 거예요. 와서 에덴동산과 예수님을 모르는 거예요. 말씀으로 된 걸 모르고 그냥 코앞에 눈앞에 있는 거, 재미있는 거 보고, 배고프면 돈가스 시켜먹고, 그게 전부라, 시험 봐서 점수 잘 보면 행복이라, 애 낳고 애 키우고 애 시집장가 보내고 죽으면 이게 전부에요. 말씀 속에서 작용 받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이거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말씀이 말씀대로 티를 내느냐, 하면 돼요. 임무 끝나는 거예요. 손 털면 되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냉혹하지요. 거미줄에 곤충이 말려든 거와 똑같은 신세예요. 앞뒤 분간 못하고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요. 지금 노량진 고시원 마찬가지입니다. 판사, 변호사 마찬가지예요. 세상 철수고 안철수고 다 몰라요.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요. 지가 대통령 되려고 설칠 뿐이지.

여기에 보면, 그렇게 할 때, 여기서 우리가 한 번 봅시다. 물이 어떻게 홍수가 내려졌고, 어떻게 사라졌는가, 그 과정과 불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같은 말씀의 취지니까 공통점이 있을 것이지요. 공통점이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 하면, 결론부터 내려 보겠습니다. ‘죽음 안에서의 삶’ 산다는 것은 죽음에 포위된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산다는 게. “아이고, 살았어!” 이건 죽음 안에서 에요. 암벽 등반하다 실수해서 죽 내려가잖아요. “아휴, 살았어!” 죽음 안에서의 죽음 유보된 거예요. 유보된 거에 불과한 겁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늙어 죽지요. 평생을 동영상으로 찍어놓고 빨리 돌려 봅시다. 빨리 돌리면 1분 내에 늙어죽는 게 나오지요. 태어나서 우드드 하다 죽어요. 빨리 돌리면. 그래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하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흙이라 하는 것은 흙 성분을 말하는 게 아니고 에너지 덩어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말씀에 비춰볼 때, 흙이고 그리고 하와가 그냥 생명이 아니라 말씀에 비춰볼 때, 생명이라는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노아홍수라든지 그리고 번제라든지, 무지개 모든 것은 말씀과 엮여서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자재였고 하나의 교육장비들 이에요. 교육 장치들. “자, 이래도 말씀이 없느냐, 이거 보고 말씀 속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라.” 라고 하는 그 설치 장비들이 뭐냐 하면, 번제라는 걸 드렸어요. 번제를 하나님이 흠향했고, 하나님은 안 보여요. 안 보이니까 지상에 있는 것만 나열하면, 번제 드렸고 그리고 하늘이란 이름의 땅, 하늘, 궁창은 땅에 속해요. 무지개 떴고, 그 다음에 지상에 뭐가 있느냐 하면, 초기 율법, 선악과 따 먹지 말라 하는 거 있지요.

선악과 따 먹지 마라는 여기 와서 뭐로 발전하는가 하면, 생물을 피 있는 걸 먹지 말라, 그 죽음은 니가 다룰 성질이 아니다. 죽음이 너를 다루어야지 니가 죽음에 대해서 피동적인, 수동적인 처지에 놓여있다. 필요할 때마다 죽일 테니까 니가 죽은 자나, 니가 스스로 죽는 거나, 남을 죽이거나, 죽은 것을 먹거나 하지 마라, 너는 죽음을 위해서 너가 살아야 한다. 진짜배기 죽음을 위해서 니가 살아 있어야 한다. 왜냐, 번제가 있기 때문에. 번제는 죽음이잖아요. 거봐라, 그의 죽음이 너를 살렸잖아, 왜? 너희는 날 때부터 악한 인간이기 때문에.

물이 홍수가 아니라 매일같이 홍수 맞아도 당연한데, 다시는 매일같이 홍수 내리는 것을 대신해서 번제를 드린 것으로 매일같이 홍수 맞고 있다는 것을 늘 느껴라, 이 말은 니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봐줘서 살아간다. 이 불쌍한 것들아!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깡패들 같으면 뿌드득~ “아이고, 내 주먹이 운다.” 이런 말이지요.

이걸 마태복음 5장 45절에 보면, 내가 선인과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리지요. 거기에 놀랍게도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줘버리면 문제가 생겨요. 뭐냐 하면, 악인인지 선인인지 햇빛 많이 받고 적게 받고가 측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그걸로 가름이 안 되지요.

그러면 다 같이 비를 받고 다 같이 햇빛을 받았으면 다 같이 선한 사람이라 해야 되는데, 악인과 선인에게 그랬다고요. 비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악인 따로 있고, 선한 사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뭐냐 말이에요. 그 기준이. 오래 사는 거 안 되지요? 오래 살아도 역시 악인도 오래 살게 하기 때문에. 건강한 것도 안 되지요? 시편73편에 나오잖아요. 내가 미끄러질 뻔했다. 어떻게 악인은 벌 받아야 되는데 저주 받아야 되는데 악인이 재벌3세라, 악인이 더 잘사는 거예요. 늘 행복하고, 죽을 때도 고통 없이 죽고, 세상에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처음도 끗발이고, 끝도 끗발이고.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행복하게 살면서 지옥간다는 거예요.

천국 갈 때는 거지돼 가고, 지옥 갈 때는 실컷 부자 되어 가가지고 거지는 이 땅에서 물 귀한 줄 알지만, 지옥 간 부자는 물이 이만큼 귀한 줄 몰랐지요. 세상에 손가락에 물 묻혀 달라고 그게 얼마나 가겠어요? 불꽃에너지가 얼마나 강한데. 맛보다가 입만 버리는데. “아! 이 맛이었는데. 살아있을 때, 이 맛이었어. 이 물맛이었어.” 그런데 문제는 뭔가 즐거웠다는 것이 현재 없음에 더 고통스럽게 만들지요. 아름다웠던 것 때문에 지금이 더 비극스러운 데요. 차라리 그걸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노래가사에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괜히 사랑했어. 괜히. 괜히 사랑해서 떠나 가버린 그 사랑이 더 그리워지고. 괜히 알았어. 이렇게 사랑이 아픈 줄 몰랐었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 심판을 내리실 때는 인간은 이미 노아홍수 때, 처음부터 인간은 죽어있었다는 겁니다. 죽어 있는 걸 숨 쉬도록 해주니까 마치 저희들이 살아도 당연한 자격자인 것처럼, 살아도 마땅한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촐랑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떤 글에 손수건처럼 촐랑댄다. 아가책의 머리말로 짧은 글을 썼어요. 손수건처럼 촐랑대고, 레코드판 위에 얹어놓은 바늘처럼, 그게 세상인데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촐랑대다가 자기 나중에 힘 빠지면, 지 풀에 지가 죽는 걸. 인생이라는 것은. 염탐해 보라, 우리 속에 내가 없다는 사실을. 이 비어있는 곳에 아가의 사랑이 넘치기를 바라며, 이런 식으로 글을 썼었어요.

그러니 지금 죽어있는데, 왜 인간은 지가 죽어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말이에요. 노아는 알았지요. 뭘? 번제를 드렸으니까. 이 번제 드린 짐승아! 니가 내고, 내가 니고. 현재 주변에 주의 하나님의 말씀 속에 만들어진 환경 속에 있으면 진실한 내 모습은 너의 운명, 너의 모든 것이 진짜 내 모습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로 이 세상에 뛰어 들어 갔다 말이에요. 외계인처럼 뛰어 들어갔어요. 어떤 사람이 낙하산 안 매고 스카이다이빙해서 그걸 신기록 세우겠다고 성층권에서 뛰어내리는 거예요. 대기권을 벗어난 성층권. 성층권에 올라가서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거예요. 그리되면 마하 속도가 음속보다 빠르답니다. 끝에 가서는 낙하산 펴겠지요. 하여튼 세계신기록에 환장했어요. 그 모습이 바로 죄 속에 뛰어든 예수님 모습입니다. 예수님 출생이 그 모습이에요. 이거는 마하보다 더 빠르게. 아기 예수로 태어나서 그걸 세상에 눈치 챈 자가 있었다는 거예요. 아무도 모르는데 하여튼 귀신은 귀신이라, “주여,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왔지요?” 대번에 예수님 알아보는 거 보세요.

“이 분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을 찾은 분이다!”해가지고 귀신들린 자가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니까 가까이 붙으면서 “ 이분은 구원의 길을 전하는 사람이다!” 우리 같으면 구원의 동업자인 줄 알겠는데, “저리가, 저리 가, 마귀 저리 가!” 계속 따라오면서 하잖아요. “이 악한 인간아, 니 음란한 멸망자니까.”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이 분은 그리스도의 종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전합니다.” 하는 것이 우리는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마귀가 그런 소리하는 것은 보탬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구원의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식으로 평준화시켜 버리는 거예요. 이 사람은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누구나 예수님 믿을 수 있다는 뉘앙스를 안겨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믿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되거든요. 성령이 임해야 되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고 이 사람처럼 이런 고백을 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이것을 마귀지어서 그걸 그냥 교육용으로 할 수가 있어버려요.

그러면 교회에서 제자훈련해서 전부 다 성도 다 만들어버려요. 오늘날 교회도 그 짓하잖아요.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성령 안 받고 천국 가는 법은 없어요. 왜 진실로 복음 전하는 사람을 미워하는가 하면,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기를 안치기 때문에 그래요. 사기를 안치면 사람들은 싫어해요. 대통령 될 후보가 사기를 안치면 표 없습니다. 허경영처럼 국회의원 하면 누가 표 찍어줍니까? 안 찍어주지. 너무 진실하기 때문에 찍어줄 수 없어요. 너무 진실한 것은 너무 깨끗하면 사람들이 거북스럽습니다. 시어머니 깨끗해보세요. 며느리 힘들지요. 이게 뭐야? 먼지가? 이리 나오면, 골치 아픈 거예요. 적당히 사기치고 적당히 거짓말 쳐서 다가서기에 부담 없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짓선지자를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사람에게 높음 받는 것은 하나님에게 미움 받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와요. 바리새인보고 하는 말이에요.

자, 하늘 안 보입니다. 하늘 안 보이고 그냥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왔을 때, 그들이 눈에 보는 것은 그냥 아기예수예요. 그러나 동방박사가 동사무소 가서 아기예수 찾은 게 아니지요. 누가 인도했습니까? 별이 인도했지요. 그 별이 베드로후서1장에 샛별 뜬다 했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우리 성도라는 것이 있을 수 없어요. 없는데, 별이 떠서 성도 만들어 놓고 우리보고 니가 살았던 세상과 니가 새롭게 된 니가 가야 될 세상과 한 번 주님의 나라와 비교해 보면서 이 땅을 마감하라는 거예요. 나그네 생활을 마감하든지 끝내든지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동안 우리를 우리 되게 만들었던 세상의 꼬라지를 보라는 거예요. 그들은 말씀이 없고 니 속에도 말씀이 붙잡고 끌고 가는 거예요. 동방박사처럼. 말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죽음의 위력 속에, 죄의 위력 속에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부정적으로 본다.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봐서 누가 믿겠느냐, 누가 믿으래? 싫으면 말고.

긍정적으로 해야 사람들이 모이지요. 아는 사람이 하지만, 특히 누가 많이 이야기하느냐 하면, 목사와 관련된 사람들, 일가친척들, 누가 하나 목사 됐다하면 “아이고, 목사 되면 지 혼자는 좋긴 좋은데 아가 셋이나 돼가지고 지가 안 되면 우리가 또 품돈 뒤를 데 줘야지. 목사해서 지가 스스로 하려고 하면 교인들 200명 정도 돼야 되는데 저 인간 언제 200명 되가지고 지 안식구를 먹여 살릴고. 걱정된다. 지는 좋다마는 지는 복음 전하다고 하지 마는 지 남은 일가친척은 밑 빠진 줄 알기 때문에 ”내가 무슨 팔자고?” 이리 나온다니까요. 그게 피에타 아닙니까? “아이고, 예수야! 니는 세상 구원해가지고 니는 참 빛내고 좋다마는 내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죽인 이 어미의 심정을 니가 알긴 아나?” 이게 피에타에요.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비탄, 슬픔, 그런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이 없으면 반드시 이 세상은 일단은 살기 좋다. 죽음? 어디 죽음 있는데? 죽음 없어. 그런데 하나님이 역설적으로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무지개로 보여준 거예요. 이게 얼마나 역설입니까? 그토록 아름다운 무지개, 실은 극도의 아름다움 이상으로 실정은 현실은 극도의 처참이라는 거예요. 극도의 처참을 극도의 아름다움으로 묘사한 겁니다. 그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은 니가 착함이 아니라 내가 희생해서 내가 니 대신 너희들이 제일 싫어하는, 죽는 걸 제일 싫어하잖아요. 니가 제일 싫어하는, 그것도 죄가 있어 죽으면 들 억울하지, 죄가 없는데 죽음, 흠 없는 양의 죽음이 무지개를 만든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 성전에 보면 무지개가 떴어요. 어린양의 보좌에 무지개가 뜬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에스겔도 무지개 뜨지요. 하나님의 성전에 무지개가 환하게 뜨지요.

왜 이렇게 훌륭하고 양심적으로 남한테 해코지 안하고 담배피우는 것도 싫어하고, 주차위반한 사람 있으면 지적하고, 꽁초 있으면 다 줍는 이 착한 내가 어떻게 저 사람과 똑같은 죄인으로 합당한가, 이렇게 훌륭한데. 고귀하고 가치 있고 옳은 일하고, 주의 일하는 내가 어떻게 지금 당장 내가 죽어도 당연한 조치인 것처럼, 그것도 그냥 저주받아 죽어도 마땅한 것이 어찌 그런 것인지, 그것은 바로 주께서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습니까? 아름다운 죽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꽃다발 하나 없었어요. 조화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결별이었어요. “마리아야 수고했다.“ 거기까지. 니 선은 거기까지. 이쪽은 이제 천사가 와서 관리해야 돼요. 남양 공원묘지 450,000원 주고 하는 그 거, 그 사람들이 하는 거 아닙니다. 묘지하나 하는데 900만원 주고 하는 그런 거 아닙니다. 끝났어요.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어? 혹시 묘지지기 십니까?” 현대에는 “공동묘지 관리인이십니까?” ”회비 냈잖아요.“ 와 똑같은 거예요. ”아닌데요.“ ”누구신데요?“ ”천사인데요.“ 우리가 이걸 믿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말씀은 말씀으로 우리가 만들어 진 것을 인정하게 되면 믿어지고, 내가 예수를 선택한다면 절대로 못 믿습니다. 우리는 나한테 합당한 이치에 맞는 것만 골라서 선택해서 나한테 유리하다고 싶어서 골라 바구니에 담는 식으로 우리가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 중에서 믿을 건 챙기고, 안 믿을 건 내려 두는 이런 식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수법에 넘어가지 않고 믿든, 안 믿든 그냥 덮쳐버립니다. 대문에서 석고대죄하고 눈이 쌓이도록 다 맞고, 그 이야기 듣고 소녀의 기도 생각했어요. ‘오늘도 무사히’ 이거는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통고예요. 통고.

자, 그러면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서” 여기서 한 번 봅시다. 왜 불로 사르느냐 말이지요. 왜 불이냐 말이지요. 물은 땅과 관련되어 있어요.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싹쓸이하기 위해서 물을 준겁니다. 그런데 불은 이거는 땅뿐만 아니고 범위가 넓어져요. 하늘까지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위 아래로 완전히 압축이 돼버려요. 하늘과 땅이 날아가 버리면 그 하늘에 걸려있던 해와 달과 별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이유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 헌 하늘과 헌 땅의 기능이 역할이 마감되기 때문에 그래요. 필요 없기 때문에 그래요. 쇼 끝났어요. 연극무대 끝나고 막이 내리는 거예요. 해와 달과 별이 날아가 버리면, 뭐가 날아가 버리는가 하면, 시간이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지상의 시간으로 이걸 표한한 겁니다. “시간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 말입니다. “시간이 없어도 시간 따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 말이에요.

이 말은 성도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성도 속에 내장되어 있는 말씀은 성도는 시간에 맞추어서 스케줄에 맞추어서 하루 세끼 챙겨야 하겠지만, 성도 안에 있는 말씀은 들어온 완성은 그런 것은 이미 먹어봐야 죽은 목숨이고, 이미 죽은 우리를 밥 먹어도 죽는 우리를 살려내는 위력이 시간에 부여받지 않고 작용합니다.

그래서 50돼서 죽으나, 51돼서 죽으나 성도한테는 별 의미 없습니다. 아침에 죽으나 저녁에 죽으나 의미 없어요. 아침 10시에 와서 노동하고 죽으나 오후5시에 놀다가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품삯은 똑같아요. 전부 다 한 데나리온씩 다 받습니다. 우리 인생은 품삯, 영생 받아놓고 시작하는 인생이에요. 그걸 사도바울은 십자가 성령으로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안에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는 분이 있어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생을 살기 때문에 우리가 시간 때문에 울고, 공간 때문에 울면, 우리를 나무라지요. 성령이 책망한다고요. “뭐? 뭐? 눈물이 아직도 안 말랐나? 울 일이 뭐가 있다고? 뭐 어쨌다고? 내가 어쨌다고 우나?” 막 나무라지요.

그래서 아까 제가 우리의 인생은 욥이라 했지요. “이러니 태어나지 말게 해주시고, 제 생일을 저주합니다.” 하나님께서 “ 뭐, 뭐, 뭐, 뭐, 내가 어쨌는데? 뭐” 입을 막고 “할 말이 없습니다.” “니가 해를 만들 때, 관여했나? 해를 누구 때문에 만들었는 줄 알아?” “니 때문에 만들었어?” “달 만들 때 니 있었어?” “황무지에 비 내릴 때, 니한테 허락 맡았어?” “이게 어디서 시비야?” “와, 입 벌리고 해보지?” “왜, 잘 났다 해보지?” “없습니다. 없습니다.” “제가 무지한 인간 중에 하나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망한 백성 중에 하나다.” 이사야처럼.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접어라, 이 말이거든요. 별 인생 없고, 우리가 기대하는 희망,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제일 기대하는 것이 그거잖아요. 막 멋있어 보이는데 가보면 단풍은 멀리 있을 때나 아름답지, 가까이가보면 별로 아름답지 않아요. 뭔가 모일 때나 아름답지, 낱개는 별로 아름답지를 못해요.

영화배우들 예쁘지요. 민낯해 보세요. 아침에 세수하고 보면 화장발이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것도 늙어가고 있습니다. 탈랜트 한 번 오래간만에 나오게 되면 처음에는 못 봅니다. 너무 늙어서. 그것도 자꾸 보니까 이순재도 볼만하지, 처음 나이70넘은 사람 나와 보세요. 저 할아버지 왜 나오지? 하지요. 꾸준히 나오니까 익숙해져서 그 미묘한 차이가 감춰져서 그렇지 갑자기 만나 보세요. 어릴 때 첫 사랑 만나 보세요. 완전 늙어빠졌지요. 하지만 같이 10년 살다보면 못 느끼지요. 아이구, 이쁘다하고 나오지요. 하여튼 뭐든지 장기간 해야 돼요. 장기간.

인기가 빌보드 2등 올라가도 소용없습니다. 시간이 그게 다 헛되고 헛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그러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이미 우리 속에 잊지 않도록 내가 조치해 났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을 잊지 않으려면 하나님 조치가 뭐냐 하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세상을 지독스럽게 온 몸으로 체험해야 됩니다. 제가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제일 이해 못하는 것이 십자가를 이해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달린 그 십자가만 아니고 캄캄한 속에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반대하는 진흙탕 속에서의 십자가를 생각 안 하고 십자가로 온 사람이 다 반대한다는 그걸 환경을 깔고 십자가인데, 그걸 제거하고 십자가만 달랑하면, 이건 연극하는 거나 똑같은 거예요. 연극 무대에.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에 휩쓸려서 주님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형편에서 십자가가 들려져야 돼요.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제가 로마서 첫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이 약속이란 말을 한 것은 이 세상은 비약속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약속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꾸 자기를 중립지대에 놓고 거기다가 약속을 석류 따듯이 하나 딱 따가지고 집어넣으면 구원되는 줄 알아요. 그게 아니에요. “야, 내가 비약속이구나. 내가!” “내가 주님을 미워하고 핍박했구나.” 이걸 아는 거예요.

두 번째 로마서 설교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냐 말이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는 버림받은 예수예요. 버림받은 예수를 믿겠다는 뜻은 무슨 뜻이에요? 나도 이 세상에서 버림받아도 좋습니다, 하는 그런 의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 믿고 버림 안 받으려고, 앞, 뒤가 뭐가 이상히 됐어요. 볼트가 안 맞는 볼트라, 맞지를 않아요. 예수를 믿겠다하면서 자기는 버림받지 않겠다, 예수님 버림받은 것은, 니가 버림받을 인간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버림받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 인생하고 내 인생하고 별개 문제라, 예수님은 유대인이고, 나는 유대인 아니고, 이상한 생각이라, 예수님은 대학 안 나왔고 나는 대학 나왔고. 차이나는 게 아닙니다.

‘버림받았다’ 하는 것은 제대로 내가 누군지를 몰랐었는데, 그래서 제가 설교한 적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오병이어 행하고, 물위를 걸으시고, 병을 고친 것은 전부 다 그런 것들이 버림받는 모습이에요. 버림받는 모습.

주님께서 구원할 때, 그냥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병 주고 약주고 하는 식으로 구원하지요. 처음부터 소경 안 되게 하면 되는데, 소경되게 해놓고 진흙 발라라, 그 대목 보고 그 아저씨 진흙 바를 때, 얼마나 따가웠을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실로암에 가서 “아이고, 찐득 찐득 해라, 아이고 씨~ 병 낫는 것도 좋지만, 이런 짓 안하고 조용히 살면 안 되나?” 우리 이런 생각 들지요. 그게 뭐냐, 버림받아야 될 인간에게 자비가 왔기 때문에 “아, 내가 버림받을 인간이구나.” 비로소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 버림받는 것에 춤춰라 이 말이에요. 내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내가 죄인된 것을 춤춰야 될 문제를 가지고 이 근호 목사는 “누구든지 이단이라 하고, 죄인이라 하더라.”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 근호 목사 말 들으면 영원히 피폐한답니다. 여기 피폐한 사람 있네요. 다 피폐했어요? 피폐해야 됩니다. 피폐해야 짤 릴 사람이거든요. 피폐 더 할까 싶어서 나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는 우리보고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근거로 해서 구원하십니다. 예수님 방식이 아니면 구원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것들이 인간들의 인기가 어느 쪽에 쏠리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기적을 베풀었고,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결국 예수님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자기 이익 때문에 그걸로 만족한다는 사실, 니가 나를 따르는 까닭이 뭐냐,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잖아. 그런 식으로서는 천국에 살 수가 없어요. 지만 지 좋으면 뭐합니까? 들어가서 살지를 못하는데. 매일 빙빙 돌면서 “집 좋다.” 남의 집인데.

들어가려면 죽어야 들어가요.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죄인 값을 해서 죽어야 당연하다는 그것을 수용하면서 가야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반성 해봐도 반성하는 자기를 아까워해요. 이만큼 반성했는데 이 반성마저 헛되이 하면 난 싫어.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반성이 안돼요. 이상하지요?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자기를 버릴 수가 없어요. 그동안 회개한 게 너무 아까워서. 세례 받은 것도 아깝지, 십일조 특히 아깝지, 머리에 물 뿌린 것도 아깝고, 성찬식 떡 먹은 것도 아깝지, 떡을 몇 번 먹었겠어요? 일 년에 2번씩 먹어도 얼마나 먹었겠습니까? 피가 다 예수님 피로 다 교체된 거 같아요. 투석을 해도 그런 투석이 없어요. 그런데 그게 전부 다 소용없는 짓이고 오직 예수님 피로만 구원받는다니까요. 우리가 얼마나 쓸데없는데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깡그리 보여주시면서 구원하니 이걸 사도바울은 그게 뭐냐,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감당 못할 정도로 사랑이 우리에게 퍼부어 주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의 구원방식대로 주께서 천년을 하루 같이 살아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힘든 인생을 살았지만, 예수님은 이런 것은 어려우니까 그려보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가 이리 있잖아요. 우리 눈에는 뭐가 보입니까? 우리는 예수님만 보이지요. 이리 하면 안 보일 수도 있어요. 베드로가 더 클 수도 있으니까. 키 큰 베드로 앞에 키 작은 안철수 이리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과 베드로는 뭔가 끊어져 있어요.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제가 목숨 바치겠습니다.” 할 때 “아서라 말아라.”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고 있어요. 뭐가 천국인지 구분 못하고 있어요. 죽으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우리하고 똑같아요. “죽으면 천당 가겠지.” 천국은 그렇게 가는 나라가 아니에요. 인간은 죽으면 자체가 지옥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과 아버지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야곱의 사다리가 예수님의 인자의 머리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그랬지요. 아버지 관계라면 베드로는 아들이 아니에요. 아들은 이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 제자들보고 하는 말이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한다. 만약에 아들을 공경하지 않고 바로 하나님으로 들어가는 신은 아버지가 아닌 줄 아시기 바랍니다. 악마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겁니다. 예수님 거치지 않고 하나님 거치고 예수님 뒤 늦게 아는, 붙여놓는 부록이고, 2000년 기독교신학 다 이런 겁니다. 카톨릭, 개혁주의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은 누구나 안다는 거예요. 참 기가 찬 이야기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세상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 더하기 예수까지 알아서 그 점에서 세상 사람과 차이 나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거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복음 알기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요. 설마 하나님마저 거짓이겠나? 거짓입니다. 그 하나님이 거짓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었잖아요. “너희 애비는 마귀다.” 악마를 하나님이라고 섬긴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예수 믿는다고 핍박할 때, 자기는 하나님께 그렇게 충성을 다 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핍박하는 짓이었습니다.

동방박사가 찾아올 때, 하나님 있으면 뭐하러 찾아오겠습니까? 바로 아기 예수. 신이시여, 받으시옵소서. 들판에서 그냥 몰약, 황금 드리면 되지, 무엇 때문에 아기 예수 합니까? 그리고 만약에 아기 예수를 성령 없이 받아버리면 아기예수와 하늘과 연결성을 논리적으로 제시해 보세요. 없습니다. 지금도 없어요. 아기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대라, 논리 없어요. 이건 오직 언약 관계예요. 언약 관계.

언약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 아들이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둘만 알아요. 두 분이 다 해버렸어요. 우리는 끼지도 못해요. 성령이 와야 비로소 둘 사이 속에 우리가 끼일 수가 있어요. 베드로는 이것도 모르고 자기 죽으면 예수님 옆에 딱 붙어있으니까, 설마 당신과 나 사이에 불과 몇 센티 사이잖아요. 테이프로 본드로 붙여도 안돼요. 안된다니까요. 안 돼!

성령이 온다는 것은 그 관계를 말씀의 관계, 언약 관계라 하는 겁니다. 언약 관계가 성령의 이름으로 오게 되면 그 아버지와 아들에게 이루어진 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이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뭘 알 수 있느냐, 모든 것이 말씀으로 돼 있다, 이 세상이 천지창조도 말씀으로, 모든 구체적인 것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사렛 예수라는 33살 먹은 청년을 위하여 된 겁니다. 마하매트를 위하여가 아니라 석가모니가 아니라 나사렛 청년, 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교회가 너무 몰라요.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를 위해서 라니까요.

신을 위해서 같으면 사도바울이 그렇게 복음 들고 외치지 않습니다. 뭐 유대인과 똑 같네, 기독교나 유대교나 같은 형제네, 이렇게 돼 버려요.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형제간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은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뜻이에요. 유대인이. 여호와 믿는 자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니까요. 신을 아는 할머니들, 교회 다니는 교인들 하나님을 알잖아요. 그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라니까요. 예수님 원수들이에요. “그래도 교회 나가는 게 낫지.” 아이고, 그건 장소이동이죠. 같은 인간이 장소이동 해봐야, 유원지가나, 교회가나 마찬가지잖아요. 산에 갈까요? 교회 갈까요? 너 같은 인간 산에 가나 교회 가나 아무렇게 가나 마찬가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예배당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간에 있으나 산에 있으나 마찬가지지. 아까 했던 우리의 몸이 기록입니다. 우리의 몸이 욥이에요. 욥. 산에 갈까요, 교회 갈까요, 갈등하는 그 모습이 바로 이게 성전이에요. 갈등하는 모습이 성전이라니까요.

그래서 7절 끝에 보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여기 경건치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 자체를 그리스도의 안목으로 볼 때, 전부 경건치 않아요. 모든 게.

베드로후서에서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야 경건하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경건해요. 예수는 모르는데 경건하다, 이것은 도무지 예수의 사도가 아닙니다. 그냥 사도가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종 된 사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 관계를 가지고 경건이라 하고 그 외는 전부 다 비 경건이에요. 더러운 거예요. 이걸 구약으로 보면 노아처럼 은혜를 받은 자를 의인이라 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악인 되는 겁니다. 선과 악은 그 당시의 언약의 기준해서 선과 악이 결정되고, 거기에 대비해서 선악과에서 인간들이 상식선에서 계시 받지 않더라도 아는 그런 상식선에서 나온 선, 악 체제와 대결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인간인 이상 로마서2장에 보면 모든 인간이 양심이 있어요. 양심이 있으면 선악을 알게 아닙니까? 그것과 그것에서 기껏 나온 게 유대교밖에 안돼요. 유대교가 그들의 양심적인 입장에서 극단적인 최고의 의로운 자는 바리새인인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깔딱 깔딱 천국지점에 이르렀는데, 여전히 멀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 단계보다 더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바로 그런 입장에서 여기 경건이란 말은 바리새인보다 더 보태라, 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 쪽에서 와버려요. 그럼 예수님에 속한 어떤 인간도 이 쪽 어떤 인간보다도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의인이 되어 버려요. 왜 경건 하냐, 자기 자신을 생각 안하니까 경건한 거예요. 자기 생각해서 자기 반성해 버리면, 경건한 자기를 또 믿기 때문에 아직도 경건이 멀었어요. 늘 경건에 목말라. 완전히 히딩크 같아. “나, 아직도 목마르다.” 사람은 오기가 있어서 경건도 한 번 경건해 보면, 그 쪽에 또 목표가 생겨요. “아니, 아니야, 아직 멀었어.” 더 완벽한 경건, 철저한 경건. 아주 표백제를 달고 다녀요. 채소 씻을 때, 채소 빵구 다나요. “아니야, 박테리아가 있을 거야, 박박 씻어요.” 먹을 게 없겠다. 흐르는 물에 씻어라, 퐁퐁도 못 믿겠다. 유별나게. 예수님께서 “제자 이리 와 봐!” “베드로 이리 와 봐, 이것도 채소야.” 이리 따졌습니까? 주머니에 환경봉투 들고 가는 곳마다 청소했습니까? 가는 곳마다 담배 피운다고 간섭했습니까? 그것 때문에 오셨어요? 주차 위반한다고 딱지 떼러 오셨습니까?

인간들이란 선악의 관계, 그것은 다른 권세차원에서 그래야 돼요. 무질서하면 안 되니까. 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주께서 기뻐하는 권세는 그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말씀 속에 우리가 지금 말씀의 작품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이 납득이 돼요. 이게. 낯설지가 않고, “그랬었구나!” 이런 식으로 “어, 진작 이걸 이야기해주지, 이걸 20살 때 알아가지고 19살 때 알았으면 담배 안 피웠을 텐데, 담배 끊지도 못하고.”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말씀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담배 끊으나 피우나 죄는 마찬가지예요.

그 다음에 여기서 ‘멸망’이란 이야기가 있어요. 멸망의 날은 주님 안에서 뭐가 되느냐, 멸망이 되는 사건입니다. 어떤 날에 멸망이 오는 것이 아니고 멸망하는 날이 그 날이에요. 왜냐 하면, 집주인의 시간 입장 개념과 도둑의 시간 개념과 달라요. 집주인은 언제쯤 도둑이 오겠는가? 2시일까? 2시 반일까? 이래잖아요. 도둑은 지가 담 넘는 시간이 그 시간이에요. 그래서 도둑이 생각하는 시간을 생각하자 그 말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되지요. 아시겠습니까? 지가 도둑이라 생각해 보면, 도둑은 지가 마음 내키는 대로 담 넘을 수 있으니까. 항상 내가 도둑이라 생각한다면, 내 끌리는 대로 담 넘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니 도둑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오늘 오셔도 내일 오셔도 괜찮은 거예요. 내가 담 넘는 순간이 그 날이 멸망이에요. 이 말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멸망 말자, 하는 그런 쨉이, 입장이 안 된다는 거예요. 멸망 받아도 벌써 멸망 받고,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너는 멸망 받아야 돼! 라고 결정 난 입장에서 새삼스럽게 멸망 안 받아야 돼, 언제 오십니까? 기다리겠습니다. 멸망 안 받게. 이런 것은 너무 자기가 주제파악이 안 되고 있다 말이에요.

이미 멸망 받아야 된다는 아는 순간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분리하러 오셨지요. 알곡과 가라지, 가라지와 알곡, 멸망의 때가 와야 갈라지지요. 공부 못하면서 공부 잘한다고 하는 것은 시험쳐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담임선생님이 시험 안치면 공부 잘하는 사람 힘들어요. 빨리 시험을 쳐야 구라라는 것이 드러날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기다려라. 천년에 하루같이 기다려라, 티 난다. 티 나! 조금만 기다려. 참아라.”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기다리라는 말은 티 날 때가오니까 기다리라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니 구원에 신경 쓰라는 말이 아니고 “티나 확 나!” 티가 확 날 때, 그 때 감사나 이야기 하라는 말이에요. 재림 때 티가 안 나면 죽어서도 무덤이 열리면서 티 나게 되어 있으니까. 죽음에는 이미 게임 끝났어요. 우리는 죽은 채로 기다리면 돼요. 따뜻한 햇빛 비취는 묘지에 누워서 기다리면 돼요. 꿈꾸고 자든지 잔다 했으니까. 죽을 때는 지루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아브라함 보세요. 아브라함이나 엘리야나 이런 사람들은 지금 편안하게 살잖아요.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주님하고 이야기했잖아요.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팔짱끼고 내려다보면서. “아, 저기 인덕원 모임, 보고 있어, 알고 있어. 까불지 마, 나 안 보인다고.“ 다 보고 있는 거예요. 모세, 엘리야, 베드로도 마찬가지이고. 왜 같은 총회이기 때문에. 히브리서에 보면 같은 총회이기 때문에, 같은 형제이기 때문에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이걸 또 이용해서 성도의 기도는 간구라 해서 이상한 소리 하고 있는데, 모든 것이 성자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가 우리를 응답하지 죽은 사람 베드로의 기도가 우리에게 응답하는 거 아닙니다. 나중에 주님의 기도가 힘이 빠져 못 하면, 그 때 베드로에게 부탁하고, 지금 주님의 기도는 생생한데 성령이 말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무슨 다른 기도가 필요합니까? 인간의 우리의 기도는 육이 기도 하라 해서 하는 거예요. 또 하라할 때 또 기도 안하면 안돼요. 하라 할 때는 이유가 있어요. 해보면 우리 속에 이런 욕심이 있다는 것을 파악이 되니까 드러내니까 하라 합니다.

멸망의 날 했고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9절에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회개라는 것은 반성이 아니고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그동안 나를 키워준 세상에 대해서 내가 저항하는 거예요. 이것이 나를 죽였다는 거예요. 나도 원래 나쁜 놈이지만, 나쁜 놈에다가 나쁜 분위기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악마의 세상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욕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를 패역하게 만든 그런 나를 만들었다 하는 것을 분명히 알라 이 말이지요.

그러니 방향이 뭡니까? 주님도 보고 이쪽도 보고 양쪽 다 보는 것이 회개예요. 양쪽 봐야 회개되지 한쪽만 봐서는 회개 안 되잖아요. 10절에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해요. “치, 치, 베드로 지는 우이 아노? 어떻게 아노?” 베드로가 지금 자기 사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성경을 신학자 이름으로 성경을 분석해가지고 이것을 어떤 해석하지 말고 그냥 예수님이 주신 거예요. 그냥 전달하는, 배달하는 택배회사 직원이고. 베드로가 지 개인이 아니고 이거는 뭐냐, 그냥 믿든 말든 니 맘대로 해, 주님은 그냥 가는 거야, 그냥 지금 진행될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그냥 될 뿐만을 우리가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모든 일을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행했사오니 그 진행된 일이 절차가운데서 성령 오셔서 이것이 말씀 안에 있음을 우리가 믿게 되어서 성도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이런 사실이 그대로 진행된다는 것을 주위사람에게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21012b-벧후3장5절(물의 심판)-이 근호목사.hwp (69.0K), Down:16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67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1,992 자유게시판 9강-YouTube강의(믿음 아닌 것)121101-이 근호 목사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2-11-02
11,991 자유게시판 8강-YouTube강의(기도)121101-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2-11-02
11,990 강의 손가락 계시 121101 다니엘 최고관리자 12-11-02
11,989 강의 [12 대구강의 20] - [피 81] - 선택과 필연 [피] 최고관리자 12-11-02
11,988 자유게시판 13강-에스겔5장 1-4(선지자의 신체)121031-이 근호목사 에스겔 최고관리자 12-11-01
11,987 우리교회 선지자의 신체 121031 에스겔 최고관리자 12-10-31
11,986 자유게시판 대전121025a-행17장11(복음과 철학의 만남)42강-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2-10-31
열람 ➜ 자유게시판 안양-20121012b-벧후3장5절(물의 심판)-이 근호목사 베드로후서 최고관리자 12-10-30
11,984 자유게시판 안양-20121012a-벧후3장5절(물의 심판)-이 근호목사 베드로후서 최고관리자 12-10-30
11,983 자유게시판 14강-미6장6-8(하나님이 원하시는 것)121028-이 근호 목사 미가 최고관리자 12-10-29
11,982 자유게시판 5강-롬1장 18-20(하나님의 진노)121028-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12-10-29
11,981 우리교회 하나님의 원하심 121028 미가 최고관리자 12-10-28
11,980 묻고답하기 우상의 형상 로마서 최고관리자 12-10-28
11,979 우리교회 성막 구조 121028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2-10-28
11,978 설교 하나님의 진노 (롬 1:18-20) 로마서 최고관리자 12-10-28
11,977 우리교회 하나님의 진노 121028 로마서 최고관리자 12-10-28
11,976 강의 중심부 121026 에스겔 최고관리자 12-10-27
11,975 묻고답하기 어느 말씀이 옳은지요 - 최고관리자 12-10-26
11,974 자유게시판 가락교회-다니엘4장10절(무너진 공간)121018-6강b-이 근호 목사 다니엘 최고관리자 12-10-26
11,973 강의 사도행전(42강) 마태복음(33강) 121025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2-10-25
11,972 자유게시판 12강-에스겔4장 9-17(인분)121024-이 근호목사 에스겔 최고관리자 12-10-25
11,971 우리교회 인분 121024 에스겔 최고관리자 12-10-24
11,970 우리교회 [일반] 이유없는 반항 [일반] 최고관리자 12-10-24
11,969 묻고답하기 이유 없는 반항 [신학] 최고관리자 12-10-24
11,968 자유게시판 가락교회-다니엘4장10절(무너진 공간)121018-6강a -이 근호 목사 다니엘 최고관리자 12-10-24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