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부 121026
중심부 121026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서경수(IP:14.♡.106.224)
12-11-02 16:42
광주 강의(2012. 10. 26) 35-1
에스겔 34장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중심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만나야 됩니다. 만날 때 이질적인 것을 만나서 --- 뉴턴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안 떨어지는가?’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떨어진다, 안 떨어진다. 왼쪽, 오른쪽. 위, 아래.’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중심부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주에는 중심이 없어요. 중심이 있으면 중심을 기준으로 ‘왼쪽, 오른쪽’이 성립되는데, 중심이 없으면 무엇을 기준으로 오른쪽입니까? 특정 기준이 있어야 ‘위, 아래’라는 말이 가능한데 우주는 위, 아래가 없어요. 호일이란 천문학자가 말하기를 “우주는 중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 가는 거예요.
동양철학도 같아요.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 그대로 가고, 변화될 뿐이고, 변화된 것이 또 변하고 --. 새로워지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고 과거에 있는 그대로 간다. 이것이 동양철학도 그렇고 서양도 그렇고 호일이란 천문학자도 이것을 ‘정상상태의 우주론’이라고 했어요.
빅뱅이론이 나왔을 때 이 사람(호일)은 화가 많이 났습니다. 왜냐? 빅뱅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태초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천주교 바티칸에서는 기분이 좋았어요. “그 봐, 성경이 맞잖아! 천지는 창조된 것이 맞잖아!” 이렇게 된 거예요. 우주에서 최초가 발생되어 버린 겁니다. 그것도 20세기에 들어와서.
빅뱅이론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주가 팽창한다고 하는데,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어요. 풍선에 점을 찍어놓고 바람을 넣으면 그 점이 달아나듯이 우주가 빠른 속도로 달아난다고 해요. 달아난다는 말은 언젠가는 모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플린 효과지요. 색깔이 빨간색이면 파장이 길고 자색은 짧고. 이것을 가지고 별을 조사해보니까 별이 달아나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무조건 달아납니다.
달아난다는 말은 어디로 간다는 말이 아니고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중심이 있다는 말이지요. 중심부가 언제부터인가 하면, 지금부터 137억 년 전. 이게 우주의 나이입니다. 그리고 지구는 43억 년 전이고. 137억 년 전에 우주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동일과정설’에 의해서 주장합니다.
‘동일과정설’이란, 지금 일어나는 자연 법칙은 예전에도 똑같이 일어났었다는 가정 하에 시간 측정을 하는 겁니다. 만약 과거가 빠르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년도 측정은 다 깨져버립니다. 그래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은 하나밖에 없어요. ‘동일과정설’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
지금 흐르는 변화와 똑같이 미래에도 흘러가는가, 그렇지 않은가? 변수가 있느냐, 없느냐? 이 싸움인데, 진화론에서는 변수가 없다고 하고, 창조론자는 변수가 있어서 홍수가 발생해서 격변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간에 중심이 있다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우주는 어디에 있었어요? 이것은 창세기 1장을 보고 묻던 질문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으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러니까 과학자가 스스로 딜레마에 빠져 버렸어요. 정답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이론은 ‘우리 곁에 누가 있다.’는 겁니다. ‘평행우주론’이라고 하는데, ‘저쪽에서는 우리를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못 본다.’ 미국 뉴욕에 또는 서울 명동에 같이 길을 가면서도 서로 모르는 거예요. 한쪽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살고 있고, 다른 쪽은 21세기를 살고 있어서. 그러다가 우연히 번개를 맞아서 드라마가 펼쳐지지요.
하여튼 중심이 있으면 그 때부터 ‘위, 아래’ 그리고 ‘오른쪽, 왼쪽’ 그리고 ‘앞, 뒤’가 생겨버리죠. 중심이 없으면 그냥 ‘음, 양’만 있을 뿐이에요. 서로 대비되는 양쪽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물리학에서는 ‘거울 관계’라고 합니다. 보통 거울은 내 한 몸만 있으면 내가 거울이 비치지요. 그래서 거울이 깨지면 나만 있지요.
그런데 물리학에서의 양자 이론은 그것이 아니고 거울 안에 있는 것도 진짜고 거울 밖에 있는 나도 진짜고.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어쨌든 간에 결국 중심이라는 것은 물리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중심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중심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만남을 통해서, 선과 악이 만나는 그 현장을 중심부라고 하는 거예요.
에스겔 34장 20절에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고 되어 있지요. 둘 다 양인데 질이 다르니까 이질적이지요. 그런데 살진 양은 저쪽에 살고 파리한 양이 이쪽에 살면 중심부가 나타나지 않는데, 두 양이 서로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을 주선하는 장소에 누가 계시는가? 심판주가 계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오른쪽은 양, 왼쪽은 염소가 있어요. 양은 양끼리 살고 염소는 염소끼리 살면 중심부를 몰라요. 그런데 양과 염소가 만나가 되면 만남을 주선하는 그 현장에 심판주가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나는 양이다. 너는 염소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앞에 염소가 나타나게 하고 염소 앞에 양이 나타나게 하시는 그분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활동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숨겨진 중심되시는 분의 작업 현장입니다.
기존의 신학자들은 예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천국 갈 것인가, 지옥 갈 것인가?’ 이것만 생각하다 보니까 주님이 중심이 아니라 구원 받을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신학이 예수님께는 관심 없고 자기에게 관심을 두면서 구원 받는다고 우기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무려 2,000년 동안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관심 없는데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예수님께 관심이 없다는 말은 관심사가 따로 있다는 말이고, 그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은 좋은 것으로, 손해가 되는 것은 나쁜 것으로 판정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현실을 날조하는 거예요. 자기가 중심도 아니면서 중심인 것처럼 살아가니까. 이처럼 우리는 날조된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을 상상도 못합니다. 날조되었다는 것이 누구를 속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착각으로 세상을 나 중심으로 보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중심이 된 입장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면 “저리 가!” 하고 외면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마귀가 오면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하면서 반기지요. 그러니 날조된 현실 속에는 일곱 귀신이 찾아와서 우리를 보좌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천사가 와서 보좌하고 있는데).
에스겔 34장 22절에 보면 ‘구원’이란 말이 나오는데, 구원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원래의 현실이 아니 것을 눈치 챌 때 구원이 성립됩니다. 날조된 세계에서는 폭력대신 평화를 원합니다. 이것을 ‘동질화’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 세상에서 인간을 표현할 때 가장 적합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남이 하는 것과 같은 것을 하고 싶고, 광주에 있는 나와 서울에 간 나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동질화입니다.
인간을 표현할 때 “나는 의사다.”라고 한다면, 이 말은 “나는 어디서나 의사로써 동일하다.” 이런 의미입니다. “나는 교사다.”라고 하면, “나는 집에서도 교사고 어디를 가도 교사로서 내 위치는 굳어있다.”는 말입니다. 교사라는 동질화를 항상 유지함으로 나는 나답게 되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 제 설교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그 설교에서, 칼을 주부가 사용하는 것과 군인이 사용하는 것이 다르듯이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성경 공부한다고 여기에 있지만 어떤 특수한 환경에 들어가면 갑자기 내가 달라져서 아부하기 바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갑자기 북으로 납치되어 김정은 앞에 갔다면 살기 위해서는 김정은을 찬양하고 높여야지요. 결국 인간의 동질화라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동질화되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평화로워야 돼요. 바깥에는 아무리 우환이 있고 난리를 치더라도 항상 내 마음은 평화를 갈구할 때 동질화가 됩니다. 그래서 이 동질화는 평화가 깨어질 때 비로소 동질화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는 처음부터 폭력이 있었어요. 이 폭력을 우리는 거부합니다. 폭력이 있으면 나의 동질화가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평화롭기 위해서 동질화를 채택해서 그냥 쥐고 있으려는 겁니다. “집사님, 잘 지내십니까?” “예, 별 일 없이 잘 지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동질화인데, 옛적부터 지금까지 평화로웠다는 겁니다.
내 인생에 위험, 폭력, 혼돈은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폭력을 집어넣었어요. 왜? 폭력을 집어넣어야 피조물 자체적으로 동질화가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피조물이 자체적으로 동질화 되면 안 됩니다. 동질화 시키는 것은 누구의 권리인가?
에스겔 34장 31절에 답이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이란 하나님이 사람이라고 인정할 때만 사람이 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여하는 것은 사람 아닌 자를 사람 되게 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으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도 아닌 자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겠습니까? 아니죠. 왜? 날조된 것이기에. 날조된 세계 속에서는 누가 중심입니까?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고 자기가 중심이에요. 자기를 좋게 하는 하나님이라야 좋은 하나님입니다. 이런 인간도 아닌 것을 진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폭력과 위기와 혼돈을 집어넣습니다. 인간을 혼돈 속에 집어넣어 인간의 동질화를 의도적으로 파괴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남은 일은 만날 놀랄 일만 남아 있습니다.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 못할 때 자기는 스스로 자기의 동질화를 믿지 않게 되지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 것인가?’ 이것과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둘 중에 어느 것에 사람들이 관심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교회 오는 목적이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까?” 이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고 여유롭게 살 수 있을까?”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 옵니다. 즉 ‘내가 나답게 지금의 동질화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어떻게 이 땅에 밥 먹고 살 수 있을까를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어요.
성경은 이방인에게 준 것이 아니고 유대인에게 준 것입니다. 이방인은 처음부터 언약 밖입니다. 언약에 대해서는 곧 이야기할 것입니다. 뭐냐? 언약 없이 구원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언약 없이 구원이 됩니까? 노아 언약 없이 노아가 구원 되겠어요? 안 돼지요. 아브라함 언약 없이 아브라함이 복을 받겠습니까? 안 돼지요.
안 된다는 말을 왜 제가 자꾸 합니까? 언약 없이 단독으로 구원 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꿰여야 됩니다. 코에 꿰이든지 목에 꿰이든지. 25절을 봅시다.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언약 없이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강의한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은 만남을 통해서 중심부를 형성한다. 만날 때 어떻게 만나는가? 이질적인 것으로 만난다. 만약 내가 구원 받는다면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하는데, 그 만남을 주선한 그분이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고, 마주치는 그 현장이 하나님의 작업 현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귀와 만날 때 복음이 가장 복음다운 거예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세 번 시험을 받았지요. 이 때 성령께서 예수님께 시킨 게 있지요? 병원에서 건강 검진할 때 어떻게 합니까? “저녁부터 아침까지 금식하고 오세요.” 라고 하지요. 뭔가 당부하는 것이 있잖아요. 이처럼 성령께서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을 주선하기 전에 예수님께 당부한 것이 있어요. 40일 금식하고 만나게 했지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것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금식 안한 상태에서 마귀를 만나면 마귀의 제안이 그렇게 아쉽지 않게 됩니다. 방금 밥 먹고 왔는데 마귀가 “떡 줄까, 빵 줄까?”라고 하면, “저리 비켜! 너나 먹어.” 이렇게 되겠지요. 금식을 40일 동안이나 했다는 것은 죽음의 접경지점까지 온 겁니다. 초죽음 상태입니다.
옛날에 제가 [미워도 다시 한 번]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떼놓으려고 하는데 아이는 엄마에게서 안 떨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엄마가 있는 중앙지점을 아이는 그리워합니다. 예수님이 금식하신 것은 인간이 그동안 살아온 자리. 그것도 그냥 자리가 아니고 마귀에게 지배받고 있는 인간의 자리로부터 강제로 예수님을 떨어지게 하면, 용수철처럼 인간이 살아왔던 자리를 얼마나 그리워하겠습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세월을 보낼 때 어디에서 떼어놓기 위해서 40년을 보낸 겁니까? 바로 애굽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면서 “아이고, 속 시원하다. 애굽아 잘 있거라!”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애굽에는 수박도 있고 부추와 파도 있고 먹을 것이 많았는데” 하면서 그곳을 그리워하지요.
지리적으로 애굽 떠나면 약속의 땅이 아니고 애굽과 단절시키기 위해 가위로 자르듯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갈 수 있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이런 천국을 우리가 들어가겠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욕심입니다. 어디 감히 천국을 넘봐요.
제가 어제 대전 강의하면서 은혜를 받은 것이 있어요. 예수님 옆에 강도가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가 있고, 강도가 매달린 십자가가 각각 따로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이 그 옆에 있는 강도의 죄를 사해서 예수님이 가신 낙원에 강도가 같이 갈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두 사람을 같이 묶였으면 함께 낙원에 가는 것이 이해가 될 수도 있겠는데, 각각 따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데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어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한 번 따져보잔 말이지요.
강도의 죽음을 예수님께서는 언약에 합당한 죽음으로 편입시키면 예수님 죽음에 강도의 죽음이 포함되고 예수님 부활할 때 같이 부활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강도가 강도짓해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때 이걸 원천적으로 소급해서 내가 강도짓 한 것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선택해서 강도짓 하게 했다고 믿는 거예요.
그냥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라고 믿잔 말이지요. 두 강도가 만나는 그 지점에 예수님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비록 갈보리 언덕에 있지만 이것이 바로 빅뱅이고 우주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다른 차원의 세계입니다. 기존의 눈에 보이는 산과 나무와 바다가 있는 이 피조 세계에 이것이 결합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은 원래 하늘에 계신 분인데 그분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를 믿는 고백과 같은 고백이에요.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라는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규정만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와 관련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고 밥 먹고 잠자고 하는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중심부를 증명하기 위한 소품으로 선택받아 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 중심으로 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입니다. ‘예수님만’은 예수님만 달랑 있는 것이고, ‘예수님 중심’은 예수님과 그 주변부를 다 이야기할 때 예수님 중심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을 말하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고 했어요. 통일된다는 말은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이는 태어나고 어떤 이는 죽어야만 하는 거예요.
믿음이란 완전히 나의 인생이 박탈당하는 거죠.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가스처럼 주입될 때 강도는 이런 말을 했지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 예수님 답변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너는 강도짓 했어야 했고, 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 했고, 죄인과 함께 예수님이 달리신 것은 구약 성경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되신 거예요.
한 편 강도는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봤기에 ‘예수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고 봤고, 구원 받은 강도는 ‘자신이 태어난 것과 죽는 것 이 모두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에 합체되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 또는 화목제물이라고 하지요. 구약에 있는 제사 제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해 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했다는 것은 현재 악마가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 정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예수님도 거기에 놓이게 만듭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현재 주어진 자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후에 마귀와 만나게 됩니다. 40일 금식했으니까 제일 먼저 하는 시험이 뭐겠습니까? “먹고 싶으면 먹으라. 당신은 돌로 떡도 만들 수 있는 메시아니까.” 마귀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메시아니까 메시아의 능력을 보여 보라는 거지요. 이 때 마귀가 실수한 것이 있어요. 평소에 마귀가 인간을 지배하면서 사용했던 용어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살지 못하면 죽고, 죽지 않으면 산다.’는 완벽한 진리. 이것을 예수님께도 적용시키려 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그러나 이 진리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한시적인 진리였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에 놀아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말씀으로 사는 것만이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떡을 안 먹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마귀가 알고 있는 구조에서의 죽고, 살고를 인정 못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든 새로운 체제는 말씀이 있으면 죽어도 사는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떡을 먹어야 산다는 이 원리 원칙에서 벗어나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로 그렇게 사는 자로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나 아닌 다른 분이 만든단 말이지요. 강도가 ‘내 인생 내가 이렇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가 그 사람의 믿음이 되는 거예요. ‘주님과 나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말씀에 근거해서 시험을 합니다. 시편 91편 11절(저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을 인용하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또 마귀가 실수한 게 있어요. 예수님의 행위 자체가 말씀이에요. “모세는 너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할 때 사람들은 “야, 권세 있는 자다.”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 자체가 권세에요. 예수님은 높은 곳에 안 올라가고 평지에 있어도 시편 91편을 이루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내가 못하는 것을 해야 기적’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사람도 마귀와 같은 생각이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말고 여분의 것을 기적이라고 보는데, 예수님은 물을 한잔 마셔도 기적이에요. 예수님 기적 중 제일 놀라운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에요. 예수님이 죽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기적으로 보지 않았어요. 왜? 사람들은 다 죽으니까. 심지어는 자살도 할 수 있으니까. 이것은 말씀대로 죽는 죽음이 아니잖아요.
우리 쪽에서 기대한 것은 기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기적인데, 그 기적 중에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전 강의에서 말했는데, 노래 가사 중에 “대전, 대구 찍고, 부산 찍고 --” 이런 노래가 있어요. 이것을 예로 들면서 사람들은 서울 살다가, 대구 갔다가 목포로 이사 가면, “내 떠돌이 인생 참 험하다.” 고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마귀가 실수한 것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가 와서 받치는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데 예수님은 평지에 있어도 그 말씀을 성취하는 분이에요. 따라서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왜? 예수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거기에서 새삼스럽게 인간(마귀)들이 원하는 식의 기적은 없는 거예요.
이런 것을 기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마귀에게 지독하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마귀는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으면 신이 된다고 속였지요. 마귀는 은근히 우리를 신으로 대우해요. 신으로 대우하면서 빼먹을 것은 다 빼먹어요. “당신은 신이야. 고귀한 신이야.” 해놓고는 결국 죽음의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종으로 삼지요. 인간이 무슨 수로 빠져나옵니까? 못 빠져나옵니다.
여기에서 언약이 등장합니다. 언약은 내가 나에게 어떤 일을 해서 구원될 수 없습니다. 언약을 믿는 자는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되는 방법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살아 있어도 늘 죽은 자이고, 죽은 나를 살리는 것은 이미 내 손에서 떠났고 주님께서 언약을 위해 나를 사용하시는데, 쓰임 받는 그것이 곧 사는 것입니다.
노아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그런데 모두 죽음을 경험해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노아를 건지려면 노아만 빼돌리고 나머지는 다 죽이면 되는데 노아마저 홍수에 잠기게 하잖아요. 150일 동은 홍수로 방주 속에 갇혀 있었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운 분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제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예쁜 백합과 코스모스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어떻게 물속에 다 집어넣습니까? 정말 괴팍한 하나님 아닙니까? 엄마가 부엌에서 칼질을 하면서 맛있는 잡채 요리를 정성껏 만든 후에 그 만든 음식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하나님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함으로 모든 창조는 중심되시는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한 창조일 경우에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폭력을 이해해야 돼요. 스스로 자신이 죽는 그 폭력을 이해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지요. “누가 내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스스로 죽는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너는 죽기 싫지? 나는 스스로 죽는다.” 죽기 싫어하는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죽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기 싫어하는 모양새 자체가 언약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실상은 죽은 자란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언약의 경우는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한테는 언약이란 게 없습니다. 언약은 항상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고, 예수님이 언약을 이루셔서 그 언약의 효과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지 우리가 언약을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수상해요. 우리 믿음은 나를 중심에 두어야 믿게 돼요.
제가 이번 유듀브 설교에서 ‘믿지 말라’고 했어요. “예수 믿지 말라”고 했어요. 예수 믿어서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시지요. 그 관계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선물이기 때문에 선물을 받은 자는 반드시 선물 주신 자를 그리워하게 되어 있지 선물 받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선물 주신 분 누구십니까?” 이렇게 되지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선물을 받고는 “나 선물 받았다.”고 가불었습니까? 아니지요. “주여 누구십니까?” 이렇게 나왔지요. 주님과 만나게 되면 나와 얼마나 다른가를 확연히 깨닫게 됩니다. 내가 생각한 예수님과 진짜 예수님이 이렇게도 다를 줄이야 미처 몰랐지요.
이 세상이 지옥인 줄도 모르고 좋다고 살고 있는 우리에게 천국에 계신 분이 찾아오셔서, 이곳이 지옥이란 사실을 들통 내고 자기 백성을 이곳에서 데려가십니다. 값을 치르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데리고 가십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은 ‘내(예수)가 너를 건지지 네가 너를 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왜? 언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니까. 제발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알아라.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든 그것과 무관하게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기에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사실은 이미 구원 얻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2. 11. 2. 15:35 녹취 마침)
서경수(IP:14.♡.106.224)
12-11-16 14:38
광주 강의(2012. 10. 26) 35-2
두 번째 시간은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언약의 담당자가 따로 있습니다. 언약이 주어졌다는 말은 ‘왜 우리는 언약을 지킬 수 없는가?’ 이것만 알면 돼요. 성경을 봐야 하는데, 보는 이유가 기록된 말씀을 지키려고 보는 것이 아니고, ‘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지킬 수 없을까’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그러면 성경 안 봐도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성경을 안 보면 자신이 바르게 잘 사는 줄 압니다. “인간은 안개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나온단 말이지요. 성경을 안 보면 “내가 왜 안개야?” 이렇게 나옵니다.
자신이 안개인줄 알아야 내가 지금 엄청난 혜택을 받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 혜택 주신 분이 하나님이다.’ 이렇게 끝내지 말고, 혜택 주신 분이 언약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거예요. 나는 인간이고 날 만든 분이 하나님이니까 그냥 혜택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말씀(언약)이 주어지면 우리는 죄인임이 드러납니다. 죄인인데 어떻게 혜택을 입느냐는 거지요.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죄인인데 천국의 복을 누린다는 말은 중간에 뭔가 질적으로 달라질만한 것이 있었기에 된 일이지요. 이게 복음입니다. 죄인인 나 자신만 놓고 보면 슬퍼야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슬퍼야 될 우리가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왜? 죄인이기 때문에. 이것을 ‘즐거운 염세주의’라고 하지요. 또는 ‘신나는 허무주의’라고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그 다음에는 은혜를 입게 하고, ‘저주 받을 죄인을 이렇게 용서하시고 사랑해주시는 당신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라는 사실을 알려줄 때 이것이 모여서 언약을 구성하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그러면 너희가 산다.”
이런 말씀을 듣기 전에 그들은 떡을 먹어야 산다고 생각했지요. “너희들이 나를 따라 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라고 하셨지요. 떡을 먹어야 산다고 하는 생각에 대해서 예수님은 거부하십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백날 떡을 먹어도 죽어요. 진짜 사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아야 사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부활의 나라, 하늘의 형상을 입어야 사는 것이지 좋은 승용차 타고, 고급 양복 걸치고, 넓은 아파트에 산다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대체 이스라엘이 뭔가를 생각해 봅시다. 처음 하나님께서 언약을 줄 때 이스라엘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었고, 이삭이 있었고, 야곱이 있었지 이스라엘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약이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요. 만들어 내니까 언약의 하나님은 누구와 대화하는가 하면 이스라엘과 대화하고, 이스라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은 이방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만큼은 언약의 나라, 언약의 백성이 됩니다.
이스라엘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거룩이 담깁니다. 그러면 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인 됨이 성공합니다. 우리 인생이 언제 감사하게 되는가 하면, 내가 죄인인 것을 느낄 때 그 순간만큼은 인간승리입니다. 그게 몇 초 지속되지는 않지만 죄인임을 느낄 때 인간승리입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다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교장이 날 무시하는 말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인 것을 망각하는 순간 교장이 나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하면 열리 올라오지요. 그럴 때 교장은 일종의 율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나에게 화나게 하는 요소를 계속 자극해서 우리로 하여금 극단의 혼란을 일으켜서 결국 나의 동질화가 성사되지 못해 화를 폭발시킬 때, 주님은 “그게 바로 네 모습이다.”라고 하시지요. 죄인 되는데 성공한 겁니다.
죄인 됨이 성공했다는 말은 드디어 거룩이 작업을 걸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알아서 스스로 죄인이 되면 그것은 인정 안 되고 하나님이 나서서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서서 죄인 되는 방법은 어린양의 죽음뿐입니다.
“어, 저분이 죽었는데 나는 멀쩡하게 살아있네. 저분은 죽었는데 왜 나는 안 죽었지? 아, 저분의 죽음 때문에 내가 사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사는 것은 저분이 죽으신 효과 때문이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지요. 따라서 언약이란 어린양을 죽이고 어린양의 효과를 보기 위해 이스라엘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7월 10일 대속죄일에는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보냅니다. 염소 두 마리를 여호와께 드려서 한 마리는 제물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묻혀 광야로 보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죄를 짊어지고 떠나는 거지요.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로 되는 일이 아니고 언약이 개입해야 성사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스라엘을 언급하는가 하면, 24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23절부터 보면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 계시고 백성이 있는데 이 백성은 어떤 백성인가 하면, 이미 저주 받은 백성, 멸망한 백성, 포로 잡힌 백성, 징벌 받는 백성, 즉 이미 죄인이라고 판정난 자기 백성이지요. 그러면 이 백성은 다 구원 받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이 다윗을 보내서 다윗이 우리의 왕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만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다윗 왕을 보냈다고 했는데, 이것이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돼요. 다윗을 하나님이 보내신 왕으로 믿는 사람은 진짜 백성이 되는데, 만약 하나님이 다윗을 보냈다고 하면 하나님이 보낸 다윗을 백성들이 찾아 나서게 돼요. 그러면 진짜 다윗을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당신은 우리가 원했던 왕은 아니야.” 라고 예수님을 밀치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약속대로 다윗 왕을 보낼 것이다. ‘그분의 출생지 베들레헴에서 유다 자손으로 올 것이고---’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찾아가면 평생을 가도 다윗을 못 찾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숨기고 다윗 왕을 보내셔서 그 다윗을 진짜 메시아로 알고 영접하는 사람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다윗 왕으로 모실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윗 왕을 보낼 것이다.’ 이런 인식의 틀 속에서 예수님을 집어넣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모르고 그냥 예수님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체포되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고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되어 있지요. 저주 받은 사람을 메시아로 본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잖아요.
축복 받은 분으로 오셔야지 하나님에게 저주 받는 자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가 되느냐는 말이지요. 이걸 보면 강도의 믿음은 정말 대단한 거예요. 저주 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했으니까요.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베드로도 예수님을 저주하고 돌아섰어요.
이 말이 뭔가 하면, “내가 너희를 택하였나니--” 예수님 쪽에서 택하게 되면 그 사람은 도망치고 싶어도 왕의 권한으로 도망칠 수 없게 해요. “어딜 도망가? 너는 내 거야!”하고 꽉 잡는 거예요. 그렇다면 믿음의 관계란 뭡니까? 아무리 도망쳐도 도망칠 수 없도록 주께서 붙잡아주는 사람이 믿음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내 쪽에서 붙잡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도망치고 안 믿고 싶어도 주님이 믿어지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하나님의 영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 십자가에 죽지 않았으면 우리에게 올 이유도 없는 그 영입니다. 십자가 증거하기 위해서 오신 영, 그분이 성령입니다.
십자가 앞에 마주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되고, 내가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요. 이 순간은 성령이 임한 상태입니다.
다음 주 목요일에 유튜브 녹화를 하는데 그 때 기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가? 간단해요. 죽으려고 기도합니다. “주여 이런 식으로 죽게 하옵소서.” 이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이런 기도를 하셨지요. “이 쓴잔을 마시게 하옵소서.”
주기도문도 마찬가지고 모든 기도는 반드시 “이것 하다가 죽게 하옵소서.” ‘이것’에 해당되는 것이 뭡니까? 말씀이지요. 예를 들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데 제 목숨을 걸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는 거예요. 누구 이런 기도를 합니까? 아무도 안 하지요.
‘어떻게 기도하면 삽니까?’라는 식으로 기도하면 그것은 사기입니다. 성경 말씀을 놓고 “이 말씀을 위해서 죽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나오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의 점선이 됩니다. 왕을 새로 뽑을 때까지 모든 것은 무효가 됩니다. 예수님이 뽑아 줄 때가지 무효가 됩니다. 그러면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유리한 자는 없습니다. 어떤 기득권 같은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은 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이 살려주시면 살고 안 살려주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안 살려주면 그것은 애굽이고, 살려주시면 이스라엘이 되고 이런 식으로 마지막 때 새 이스라엘을 만드십니다.
여기에서 새언약이 나옵니다. 이 새로운 언약은 하나님 언약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언약이 맺어집니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먼저 언약이 맺어지고, 이 맺어진 언약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만들기에 나섭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 예수님이 불러서 믿어야지 우리가 알아서 믿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믿으려고 합니다.” 이럴 경우에는 다른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농후해요. 내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 믿는 것이 나의 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데, 내가 죄인이 안 되고 예수 잘 믿는 의인이 되면 이런 예수는 가짜가 됩니다. 예수님이 믿게 하면 우리는 죄인이 되고, 우리가 믿으면 의인 되고. 내가 나에게 작업을 걸어서 구원하는 방식은 엉터리입니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 언약의 과정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35장에 나옵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네 얼굴을 세일산으로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여기에 세일산이 나옵니다. 이것은 에돔에 있는 산입니다. 에돔은 요단강 동남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사는 나라가 에돔입니다. 이 나라가 어떤 잘못을 했는가 하면 남쪽 유다, 북쪽 이스라엘 이 전체를 자신들이 차지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 자기 조상이 이삭이잖아요. 아브라함이 자기 조상이잖아요. 이삭에게서 에서와 야곱이 갈라졌잖아요. 그러니까 동생 땅은 형인 내가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어요.
그런데 에스겔 35장에 보면 “너는 아직도 자아를 못 버렸다.”고 해요. 남아있는 자아가 있다는 거지요. 남아 있는 자아를 박살내겠다고 하십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35장에 와서 갑자기 하는가? 그것은 이런 예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커튼 뒤에는 보통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벽만 있어요. 그런데 커튼을 쳐놓으면 마치 그 뒤에 뭔가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것은 앞과 뒤를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앞에서는 뒤를 상상하게 됩니다. “뒤에 뭔가 있을 것이다.” 연극이 끝나면 ‘끝’이란 말 자체가 커튼 역할을 해요. ‘끝’ 그 다음에 아무것도 없으면 ‘끝’이란 말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의미가 있어요. 모든 것을 끝이라고 할 때는 인간이 쳐다볼 수 있는 것의 끝이고, 끝을 끝맺는 것은 다윗 왕이 합니다. ‘너희는 끝(이곳까지). 더 이상 넘보지 마!’ 하고 끝내는 거예요.
구걸을 해도 말을 해야 한 푼이라도 얻습니다. 언어란 반드시 ‘언어에 담긴 내용 + 잉여’, 항상 여분의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끝냄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까지인데 인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뒤에 허구적이고 가식적인 것을 자꾸 유발해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언약으로 건지느냐 하는 겁니다. 세일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서)는 동생(야곱)이 차지했던 땅을 전부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뒤에 많은 내용이 나오는데 이런 것입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을 굉장히 학대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넘어지고, 자빠진다.”고 합니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언어 뒤에 잉여가 있으며 이 잉여가 누구의 몫이 되겠어요? 끝이라고 했는데 커튼 뒤에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누가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겁니까? 커튼을 바라보고 있는 나지요. 그러니 인간은 항상 내가 있으면 끝이라는 말을 해도, 끝 뒤에 있는 천국은 나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자아가 있는 이상은 절대로 자아를 손댈 수가 없어요.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끝이라고 하고 종말을 외쳐도 종말 뒤를 항상 염두에 두고 종말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윗 왕은 어떻게 오는가? 종말을 밀어붙이는 식으로 와요.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을 때 제자들은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어. 그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물위를 걸을 수 있겠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행하면 우리가 농사짓지 않더라도 떡을 먹을 수 있겠다.” 예수님은 끝을 몰고 왔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는 그 다음에 하실 일을 예측하고 그것을 자기 몫으로 챙기려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계모임을 하셨는데, 우리 집에서 계모임을 할 때 평소에 먹지 못하는 맛있는 음식이 차려집니다. 중국집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팔보채, 탕수육, 짜장면 등등. 그러면 손님이 가신 후 남은 음식은 우리들 차지게 됩니다. 서로 많이 먹겠다고 전쟁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끝을 몰고 왔는데, 사람들은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실망해서 돌아설 때 인간의 자아는 한계를 맞이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나오는 축복을 기다렸지요.
그런데 진짜 예수님은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죽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주님이 죽으신 후 부활하시는데 이 부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죽음이에요. 아무도 모르는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아가 부활의 세계까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생각할 수도 없는 세계를 자꾸 상상합니다. 차력사들이 웃옷을 벗고 철근을 배에 대고 밀어붙이니까 철근이 배를 뚫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휘어집니다. 그러면 차력사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죽으시면서 너희도 같이 죽자고 하시는데 이 때 우리의 자아는 의미가 없어요.
다윗 왕은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가는 거예요. 미래의 마지막이 우리에게 덮치는 겁니다. 미래의 심판, 미래의 저주가 우리에게 덮치는 거예요. 그 미래의 끝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때 “내가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되지?”라는 생각은 주님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믿으면 너는 죽고 네 안에 내가 산다.” 우리 자아에서 미래와 장래가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연속성이 우리 자아를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연속성이 뭡니까? 예수님의 출생, 십자가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 이것이 우리 자아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느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 제가 지금은 서울에 있는데 부산으로 내려갈까요, 말까요? 부산 가서 잘 안 되면 다시 목포로 가야 되는데 그러면 너무 내가 초라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우리 자아의 스케줄을 가지고 자꾸 기도제목으로 삼는단 말이지요.
예수님은 우리 자아의 시나리오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계획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버립니다. 여기 ‘한 뿌리(건강 음료)’표지 광고문에 보면 이 안에 인삼 한 뿌리가 다 들어있다는 거예요. 광고대로라면 100% 인삼만 들어있고 물은 한 방울도 안 섞여야 됩니다.
이것이 꼭 성도의 모습입니다. 병뚜껑을 열고 보면 그 안에 예수님의 출생과 십자가 죽으심, 부활, 승천과 재림이 나온단 말이지요. 주님이 하셨던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반대로 우리가 품고 있던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득을 보리라.”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 내쫓김을 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31절을 봅시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양이라고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양으로 본다면, 목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진짜 목자와 가짜 목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이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했다면 그것은 그동안 가짜 목자가 이끌었지요.
그런데 양이라는 의미를 왜 사용하는가 하면, 양의 특징은 어린아이 같아서 자립성, 독자성이 허용되지 못한 존재입니다. 자기 세계, 자기 고유의 영역, 고유의 가치 이런 것은 일체 없고 목자가 있어야 양의 목자가 되는 겁니다. 원래 결혼에서 아내는 고유의 의미를 가질 수 없고 남편의 증거자입니다. “내 남편은 이렇다. 내 남편은 이런 일을 한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내가 있는 거죠.
아담을 위해서 하와가 있는 것입니다. 아담을 위해서 여자가 만들어졌어요. 돕는 배필이 되라고. 그래서 여자는 원래 자기의 독자적인 영역이 없어요.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서열이 지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여자라는 것은 독자적인 자기만의 영역을 가질 수가 없는 겁니다. 물론 죄짓고 난 뒤에는 남자 같은 남자가 없으니 여자도 여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지요. 그래서 여자로 인하여 남자가 사는, 여자의 이름은 생명이고 남자는 죽음이니까 생명이 죽음을 삼킴으로 이기는 그런 것을 보여주지만, 원래 창조할 때는 “내 남자는 이런 분입니다.”라는 식으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여자를 폄하하거나 낮춰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로 그렇게 한 번 살아보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내 남편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내가 그런 남자의 아내로 살게 된 것은 일생의 축복이었어.” 이렇게 여자가 평생을 자랑해도 남편 자랑이 한도 없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의 역할은 뭐냐? 아내로 하여금 계속 남편을 자랑하게 하도록 자랑의 요소를 창조해야 될 의무가 있어요. “내 남편 자랑하려면 아직도 멀었어. 죽을 때까지 자랑해도 다 못해.” 이 정도가 될 때 아내는 보람을 느낍니다.
양이 바로 이런 존재입니다. 양이 자기 걱정은 한다는 것은 목자를 못 만났다는 말입니다. 목자만 제대로 만나면 더 이상 자기 걱정은 필요 없어요. 자기가 어떻게 살며, 어디에서 살 것인지를 걱정한다는 것은 목자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얼마나 믿음이 좋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부족함이 없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와서 그렇게 해 주시는 겁니다. 그 때 양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날마다 깨닫게 됩니다.
35장의 내용은, 에돔이 이스라엘을 얕보고 이스라엘이 벌을 받으니까 “이참에 이스라엘을 접수하자.” 이렇게 나오다가 하나님께 오히려 심판을 받는데, 심판 받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자기는 에서라는 겁니다. ‘나는 ~다.’ 라는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구축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는 양일 뿐입니다.”라는 진짜 이스라엘과 대비가 되지요. 한쪽은 목자가 없으니까 “나는 ~다.”라고 버텨야 하고, 진짜 이스라엘은 “나는 양이에요.”라고 하면서 목자를 증거하지요.
이제 36장을 봅시다. 1절 이하에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대적이 네게 대하여 말하기를 하하 옛적 높은 곳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들이 너희를 황무케 하고 너희 사방을 삼켜서 너희로 남은 이방인의 기업이 되게 하여 사람의 말거리와 백성의 비방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이게 지금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이스라엘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말을 듣게 되면 사람들은 상상을 합니다. 잉여 또는 여분의 것. 그런데 제가 아까 이스라엘은 끝으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끝이 우리를 밀어붙일 때는 우리에게 죽으라고 밀어붙이는데 우리는 자꾸 끝 뒤에 아름다운 것이 있을 것으로 상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상상으로 말미암아 국가라는 것이 생깁니다. 이건 상식적인 것이니까 그렇게 알고 들어보세요. 국가란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 국민이 있고 영토가 있지만 국가는 무엇이 국가인지 내 보일 수가 없어요. 그러면 국가라는 것은 없는 것인가? 이것을 가지고 ‘사회적 공간’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중간에 뭐가 들어가야 하는가 하면, ‘질서’가 들어가요. 그리고 질서를 잡기 위해서는 법이 동원됩니다. 그런데 법은 권력자가 만들고, 권력자가 중심이 되는 사회를 국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든 것은 자기 권력 밑에 질서 있게 정리, 정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예로 들겠습니다. 학교에 권력자가 있어요. 권력자가 있기 때문에 학교가 있는 거예요. 원래 학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실이 있고, 교사가 있고, 학생이 있지요. 학교라는 정체는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권력자가 법을 만들고 질서가 생기면 그것은 사회적 공간이 되지요.
교실 안에 학생이 30명 있고, 교사가 있습니다. 학교는 어디 있습니까?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다면 이전에 있던 학생들과 교사들이 몽땅 이사를 가면 그곳에 있는 부동산은 학교입니까, 아닙니까? 학교 아니지요.
공간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이 아니고 반드시 질서가 있는 곳, 그리니까 공간 있고 인간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어서 인간이 자기가 일할 만한 공간을 따로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간 개념이고 세계관이란 말입니다.
교장 선생님이 화가 나서 “구00 선생님, 똑바로 하세요.”라고 했다면, 교장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음파라는 에너지가 나온 것뿐이지요. 그러면 그 음파를 피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그런데 그 욕을 듣고 기분이 상해요. 왜 기분이 나빠야 합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교장 선생님이 주먹으로 때렸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얼굴 붉히며 화를 냈을 뿐인데 왜 기분이 나쁩니까?
그냥 “저것은 한국말이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까? “저것은 욕이다.” 이것이 아니고, “저 말은 일본말이 아니라 한국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문제없는데, 그 말을 듣고 하루 종일 짜증이 나고 소화도 안 되고 왜 그래요? 따지고 보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게 뭔가 하면, 인간이 공간을 개념화 할 때 반드시 자기가 먼저 염두에 둔 공간이 있어서 그래요. 저 교장 선생님은 무조건 나에게 칭찬을 해야 되고,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용납해야 되고, 이런 것이 먼저 자기가 권력자가 되어서 그런 질서가 있는 학교이기를 원했는데, 막상 학교에 가니까 나보다 더 높은 권력자가 나의 질서에 도전하고 “이것이 법이요.”라고 나올 때, 나만의 새로운 사회적 공간을 만들까(사표 내고 장사나 할까?) 고민에 빠지지요.
왜 제가 국가라는 사회적 공간을 거론하는가 하면, 인간이 스스로 악마와 접선을 늘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주인공이잖아요. 내가 주인공 되는 것을 마귀가 좋아해요. 마귀가 늘 속삭입니다. “네가 주인공이야. 네가 법이야. 교장이 말해도 듣지 마. 네가 신이야.”라고 부추겨 놓고 나와 똑같은 인간을 내 앞에 세워요. 그래서 둘이 싸우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마귀는 “네가 옳아. 지면 안 돼. 너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존재야.”라면서 계속 부추깁니다.
악마는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눈에 보이는 식으로 나타난 적이 있었지요. 창세기 3장에서 뱀으로 나타났을 때 뱀이 악마가 아니라, 뱀이 뭘 요구를 했어요. 뭡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자립하라고 요구했지요. ‘하나님만 신이 아니고 너도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선악과를 따먹기를 요구했지요.
마귀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가 신이 될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국가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스라엘 스스로가 자기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공간 안에서 어린양과 충돌을 일으키게 만들어요. “우리는 이방나라와 달리 복 받는다”고 우기지만 사실 이것은 악마가 그렇게 이스라엘을 부추긴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님이죠.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새로운 법과 질서를 만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속에서 희생적인 모습으로 하나님 자기의 국가 또는 사회적 공간을 따로 유발시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36장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필히 망하고 이방 나라에 당한다. 누가 그렇게 했는가? 하나님이 하셨다. 너희들은 뭘 믿을래? 이스라엘을 믿을래, 아니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나를 믿을래?”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망하는 것을 믿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네 집안 망하는 것을 믿을래, 날 믿을래?”라고 하시면 “내 집안 망하는 것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사람이 있겠어요? 아무도 없지요. 그것은 바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체가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기가 무너질 때, 이방인의 비방거리가 될 때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의 비방거리가 되었다는 것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주님이 바깥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내부에 들어와서 예수님 스스로 사람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어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공격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함몰되게 하는데 그 함몰을 통해서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 내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이 많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왔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움직여서 많은 돈을 교회에 헌금하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라고 생각할 때, 이것은 이미 자기가 아는 사회적 공간 안에 그 사람이 도움 되도록 작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돈 많은 줄 알았던 사람이 빈 털터리였다. 그러면 그 사람을 우리교회에 보낸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은근히 그런 기대를 했다는 자체가 우리는 멸망 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신 거예요.
부자인줄 알았는데 사기꾼이었고, 교회 돈마저 이용하고 도망갔다면, 이것은 평소에 우리가 생각한 내 중심의 사회적 공간이 불합리하고 맞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 조치는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진짜 이스라엘은 이렇게 무너져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그것을 근거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질서와 법이 기존에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법이 아니고 새로운 법, 사랑과 용서의 법으로 새롭게 구성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사기 친 사람을 만나면 “아이고, 반갑습니다. 교회에 나오시지요.” 이렇게 할 수 있겠지요.
그럴 때 “오, 교회 돈을 사기 친 내가 어떻게 다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