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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42강) 마태복음(33강) 121025강의사도행전

사도행전(42강) 마태복음(33강) 121025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이한례(IP:203.♡.41.16)

12-10-31 14:18

대전121025a-행17장11(복음과 철학의 만남)42강-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 17장 10절부터 보면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북쪽 그리스죠. 이쪽에 현재 아테네가 있고 고린도가 있고 이쪽 지방에 데살로니가 베뢰아가 지역이 있어요. 지금도 그런 마을이 있는데 여기 바다 건너가 터키거든요. 터키에서 건너 지금의 그리스 쪽으로 나라가 부도위기에 있고 아드리아 반도, 이탈리아 시칠리 섬 이렇게 있죠.

이쪽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보면 사도바울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죠? 이 말은 뭐냐 사도바울이 개인적인 어떤 희망이나 개인적인 그런 계획 같은 그런 것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이것을 이렇게 지도로 그리니까 성령이란 의미가 잘 구분되지 않는데 이것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이 칸이 터키고 그리스고 이탈리아가 이렇게 있다 하고, 그 위에 접촉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쪽에 축~ 늘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축 늘어져서 여기의 끝 지점에, 경계지점에 사도바울이나 실라가 여기 있다고 봅시다. 여기를 내려다본다고, 축~ 늘어진 노인네 턱처럼 축~ 늘어진 여기가 접촉점이 되는 거죠. 영과 육의 접촉!

같은 인간이지만 이 육을 육체라 하지 않고 이걸 육의 세계, 육체로 된 육의 세계라 하고 위는 영으로 된 육체의 세계, 같은 사람 대 사람이지만 한쪽은 영에 속하고 한쪽은 육에 속하고. 이것을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굉장히 강조하죠.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너희에게 나간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다. 나에겐 성령의 역사함으로 말한다.’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하는 성경 말씀을 어떤 사람은 ‘못 믿겠다.’ 하는 사람이 있어요. ‘못 믿겠다.’ 하는 말은 뭣을 인정 못하겠다는 것이냐 하면 요거(위층)를 인정 못하겠다는 거예요. 터키면 터키 그리스면 그리스고 한국이면 한국이지, 이 판때기가 전부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뭐냐 하면, 교회는 여러 가지의 업무와 직종 가운데서 하나가 교회라 이렇게 보는 겁니다. 나는 사업하는 전문가고 너는 교회 다니는 전문가고 너는 농사짓는 전문가고, 이렇게 되면 수직적인 어떤 영이라 하는 것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걸(하나님 나라) 통째로 부정해버리면 너도 어떤 하나의 사견에 불과하다는 거, 니만 그렇게 세상 보느냐, 나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건 여러 가지 종교 중의 이론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겁니다.

이건 뭘 부정하느냐, 하늘나라를 부정하는 거죠. 이걸 성경에서는 뭘 부정하느냐, 영의 세계라 하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영의 세계라고 인간이 아이디어를 그냥 조작해 낸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준비한 답변은 뭐겠습니까? 이거였습니다. 사건이었습니다.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죠.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을 때, 이것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그때, 그때 뿐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께 일어난 모든 사건이 모든 인간도 죽었다가 영의 부활로, 축복의 부활로, 저주의 부활로 다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그것은 인류에게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을 함축해서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지만 ‘제발 교회 믿지 말라.‘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교회는 여러 가지 종교단체 일종입니다. 이건 별 의미 없어요.

이번에 대장간에 책을 맡기고 제목을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라 했어요. 이 말은 기독교는 이건 전혀 의미 없는 취미 활동하는 거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이건 노인네 돼서 심심하거든 점심 먹으러나 가든지. 복음과 기독교는 완전히 차이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복음을 이야기했지 기독교를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은 모르고 뭐만 보느냐, 기독교만 보는 거예요. 나는 불교나 기독교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기독교를 선택하는 건 자기 자유지만 이건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오늘밤에 예수님 때문에 제가 어디 갑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그것은, 같은 강도인데 ‘니가 지금 완전히 미친 소리 하고 있다. 저 양반이 우리와 같이 사형당하는 입장인데 니가 지금 누구보고 도와 달라 하느냐, 니 완전히 또라이 아니야, 정신 차려. 똑같은 인간이야. 그냥 33살 먹은 청년이야. 정신 차리라고.’ 그런데 누가 정상이냐 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정상이고 예수 믿는 사람이 비정상 이예요.

그런데 요새 예수 믿는 사람이 많다 하니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왜 갑자기 비정상이 왜 그렇게 많아졌어요?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분명히 예수 믿는다는 건 사람이 비정상 돼야 돼요. 정상이고 싶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 아니에요. 그건 따지는 사람이지, 따지는 사람은 아닌데 그런데 요새 교회 가면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네요. 그래서 저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어요. 왜 그렇게 목사도 많은지 모르겠어요. 저는 태반이 신자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성령 받아서 신자 된 목사 같으면 교회를 생각 안 합니다. 복음을 생각하지 교회 생각 안 해요. 그러니 이 축~ 늘어진 이것을 열기구 타고 내려온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괜히 제가 과장되게 은유한 것이 아니고, 골로새서 3장 1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너희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있고 지상에 있는 목숨을 그냥 닳아가는 것, 촛불이 시간 지나면 녹아내리듯이 그냥 닳아지는 거예요. 이 세상이 지옥인 것을 구경해 보면서 점점 더 닳아지는 거예요. 가을이 되면 봄보다 벌써 많이 닳아졌어요. 온 전신이 안 아픈데 없고 또 나이 들면 더 닳아져서 부속품도 하나씩 갈아야 되고, 나중에는 완전히 폐차 처분해야 되고.

놀라운 사실은 이미 로마서 6장에 있는 말씀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미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너는 살았다는 거예요. 살았으니까 원 없이 한번 죽어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난 살았다는 말이 도저히 안 믿어집니다.’ 하거든요. 그러니까 니가 못 믿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말을 하는 거죠. 믿지 말라고.

모든 사도바울의 말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해야 돼요. 이해가 되면 안 돼요. 믿어져서 믿어야 되지, 이해돼서 믿어지는 말은 절대로 성령 받은 성도 입에서 나오면 안 됩니다. 하여튼 사람들 믿도록 꼬이면 안 돼요. 못 믿게 하는 게 전도예요. 믿지 말라고 밀어내도 계속 믿겠다고 오면 할 수 없는 거고, 안 믿겠다는데 꼬여서 봉투에 돈 넣어주고 우리 교회 나오면 돈 주겠습니다. 이러지는 말라 말이죠. 그건 장사 속이다 이 말이죠. ‘희망 있습니다. 어떻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말이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렇게 돼 있어요. 제가 놀란 것은 보통은 이 사람들이 사도바울이라는 인간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이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인간성보다 뭐에 집착합니까? 성경말씀 여기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게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건 성령을 받은 사람의 공통점 이예요.

누가복음 마지막에, 제가 누가복음 이걸 마감 설교를 하면서 제가 언급을 했는데 누가복음 24장44절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초점이 뭐냐 하면 ‘나 봐라, 사진 찍어 놔라’ 이게 아니고 어디를 보느냐 하면 ‘내 모습 키가 얼마고 그거 기억해. 몸무게가 얼마인지 기억해, 내가 반찬 뭐 먹는가 기억해.’ 그런 걸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고, 모든 말씀이 내가 한 행위와 관련돼 있다는 겁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해줬죠. 마음을 안 열어주면? 안 열어주면 예수를 못 믿는 그게 아니고 성경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마음을 안 열어줘도 예수님 알아요. 예수님은 어디서 출생하고 제자는 12명이고 줄 줄 줄 뀁니다. 입에서 막 나와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 교회 한 몇 년 다닌 사람은 예수에 대해서 너무 잘 압니다. 마음이 안 열리면, 그냥 예수만 달랑 채택해요. ‘예수 믿을까, 예수가 좋을까, 부처가 좋을까’ 그냥 예수만 하나의 인간으로 봐요.

그런데 마음이 열리면 모든 성경이 예수님과 통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모든 성경이 그냥 쳐져 있다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 여러분들이 어린왕자 삽화 기억납니까? 어린왕자 이렇게 있으면 삽화 보면 망토가 그려져 있죠? 이 망토가 성경책 이예요.

시편, 선지자, 율법, 그리고 거기 어린왕자 되시는 예수님이시잖아요. 바로 모든 일어난 일상들이 성경을 거쳐서 예수님한테 가야 되는데 이게 마음이 열려야 파악돼요. 그런데 마음이 안 열린 사람은 예수님이 키가 얼마, 몸무게가 얼마, 남자, 달랑 누구 지목하듯이 딱 지목하고 나 예수, 이거만 봐요. 망토처럼 세상의 모든 성경이 전부 다 예수님과 관련된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그냥 예수님을 하나의 개인적인 존재로 봐버려요. 그래서 ‘예수여, 나는 친구다.‘ 장난 농담하는 식으로 하고 말이죠.

관심이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됩니다. 신학자 되라는 말이 아니고 목사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은 그냥 보통 신사 숙녀 분들 이예요. 전부 다 목사 되려고 성경공부 한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말씀의 모든 구약 신약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 하게 돼 있다. 그래서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상고한다. 누가복음에 보면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한다. (누가복음 24장 45절)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 그렇게 되려면 누가복음 24장 48~49절에 보면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마음이 안 열리고, 마음이 열리지 아니하면 성경말씀이 예수님과 관련돼 있다는 걸 몰라요. 성령이 안 와도 초등학교 나와서 글자 알면 저절로 믿습니다. 그리고 여기 내용보고 요약하라 하면 머리 좋은 사람 요약 잘 해요.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은 이건 성령을 안 받으면 그건 연관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런 복음 이야기 듣고 이럽니다. ‘니는 성경에서 예수님밖에 모르나? 성부도 있고 성령도 있는데 왜 예수님만 이야기하느냐.’ 는 거예요. 그들은 삼위일체를 이야기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보다도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면 그 안에 예수님도 포함되니까 오히려 더 안목이 더 넓은 것처럼 그렇게 더 범위가 넓게 포괄적으로 아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오버하고 학문적으로 더 깊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위장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성부마저, 하나님마저 오직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합니다. 하나님마저 모든 성경은 예수님 중심 이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성부와 성령 배려해준다고 예수님만이 아니고 성부 성령도 이야기해야 된다고 마치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남들에게 왜곡시키는 그런 위장술을 펼 수 있어요. 일반 교인들이 그런 술책을 이해한다는 것이 힘듭니다마는 성령 받으면 수상하다 생각이 들 거예요.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했잖아요? 그들이 성경을 상고해서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늘어났습니까? 그리고 부부사이가 화목해졌습니까? 자식이 취직이 잘 되고 결혼도 빨리 잘하고 교회 부흥됐습니까? 이렇게 나와 보세요. 부흥은커녕 쫓겨납니다. 그리고 핍박 받아요. 요주의 인물로 돼서 지목받아버려요. 이상하게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요. 마귀가 안다고요. 주위 사람들이 알아요.

두 번째 시간에 할 내용은 마태복음 12장인데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12장에 두 번째 할 대목이 뭐냐 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동생을 데려왔어요.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칭찬받으려고, 예수님을 잘 배려해준다고 우리도 예수님 가족도 챙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신경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동생들이냐?’ 그런데 이 이야기를 모친 된 마리아가 들었다 있을 때 섭섭하겠습니까? 아니면 속 시원하겠습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마리아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시원섭섭할 수도 있고 섭섭 시원할 수도 있고 그럴 겁니다. 그게 바로 피에타예요.

‘니는 세상 죄를 위해서 죽는 건 좋다마는 사랑하는 내 자식 잃은 어미의 심정을 니가 아느냐? 주께서 아시거든요. 주께서 그 심정을 아십니다. 마리아 무릎에 죽은 예수를 뉘어 놓습니다. 그 애통한 비탄, 피에타는 비탄 이예요. 슬픔, 차라리 너를 임신 안 했으면 좋았을 걸, 임신 해놓고 이렇게 하나의 기쁨이 그것이 슬픔으로 변할 때 이 무슨 하나님의 횡포입니까? 차라리 몰랐으면 아픔도 없었을 것을.

전에 했잖아요. 사랑은 아픔이라고. 차라리 사랑을 안 했더라면 이러한 아픔도 없었을 것을. 윤 수일 노래 그런 게 있잖아요. 이다지도 아플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진정 난 몰랐네. 이렇게 아플 줄을.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만나지를 말 것을.

예수님께서 쓴 잔을 마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보고도 쓴 잔을 마시라 했고. 희망 찾지 마세요. 쓴 잔 마시는 게 희망입니다. 다른 엉뚱한 희망 찾다가 괜히 주님 버리지 마시고. 주님께서는 이미 희망을 우리에게 줘요. 쓴 잔을 알약처럼 입에다 집어넣어줍니다. 뭐 프로포폴 집어넣어주지 않습니다. 마취제 의료주사 집어넣지 않고 쓴 잔을 집어넣어요. 요한계시록 10장처럼. 말씀이 입에는 단데 속에 들어가니까 속에서는 완전히 전쟁을 일으키는 거죠. 쓰디 쓴 신앙. 그럴 때 ‘도대체 내가 뭘 먹은 거야?’ 말씀 먹었죠. 성령 먹은 거예요. 성령 먹으면 그 안에 예수님의 고난이 그 안에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으면 복이 있도다. 옛날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고난을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5장 11절~12절. 이게 팔복 중에 들어가 있어요.

우리 한국교회 팔복이 뭔지 압니까? 부자 되는 것, 고부간의 갈등 없는 것, 시집 잘 가는 것, 좋은 아빠 되는 거 이런 거잖아요. 예수님의 팔복은 그게 아니고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내 이름으로 고통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좁은 길로 가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게 도대체 같은 예수인데 이다지도 틀린 줄이야, 어떻게 그렇게 달라요? 아니 같은 예수인데, 그게 뭐냐,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성령 속에 들어가다가 U톤 해 버렸어요. ‘아이쿠, 발 빼야 되겠다.’ 들어가다가 후딱 빼버려요.

그걸 목사들이 캐치해서 ‘내가 성경이야기 안 하고 간증이야기 해 줄게요. 이렇게 하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감사헌금 하시면 나중에 집안 잘 됩니다.’ 자꾸 희망을 줘서 오는 손님 안 놓치려고, 오는 손님 안 놓치는 건 좋은데 있는 성도는 다 나가버리죠. 완전히 ‘지옥행 전세버스’ 만들어 놓고 거기서 좋다고 부흥회 하고 있고.

사도가 이렇게 하늘나라가 축~ 늘어지니까 사도가 외치는 모든 것은 예수님과 성경말씀, 성경말씀과 예수님의 연관성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온다는 것. 네가 천국 보고 싶다고 하지 말고 지옥 보고 싶다고 그런 억지를 부리지 마라, 니 눈앞에, 니 코 앞에 이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이것을 믿는 자는 이것을 믿고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게 로마서 10장에 있어요.

로마서 10장 8-10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굉장히 모든 게 간단하게 풀리는데, 이야기를 안 해버리면 하도 엉뚱한 소리를 많이 듣기 때문에, 어느 이론이 맞는 것이고, 어느 신학이 맞는가, 이렇게 돼 버려요. 그렇게 되면 사람의 선택이라는 것은 자기가 이익이 될 때만 선택을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항상 잘못된 선택이 될 수밖에 없어요. 어느 것이 나에게 이익이고 나에게 희망을 주는지 그런 쪽으로 선택하게 되는데 여기 성경말씀에 들어가게 되면, 나의 선택이 아니라 나의 선택은 아예 애초부터 권한이 없고, 이미 주님의 선택에 우리가 휘둘리고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내 선택이란 없고!!

그래서 지난 대구 공부 할 때 선택은 반드시 뭐로 바뀐다 했습니까? 필연으로 바뀐다 했잖아요. [선택 =>필연] 필연의 성경구절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15장10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현재 ‘나’라는 것은 내가 집적거리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은혜의 산물이고 은혜의 결과물입니다.‘라는 고백을 한다 말이죠. 하지만 그동안에 얼마나 사도바울은 선택을 많이 했습니까? 그 선택은 반드시 필연으로 늘 바뀌게 돼 있습니다. 돌아보면 ’아! 그럴 수밖에 없었었구나.‘ 하는 그것이 주께서 주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이구나, 하는 걸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게 뭐가 있느냐 하면 여러 가지 많습니다만 한 가지 예를 들면, 로마서 8장 30절에 나오는 이야기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요것이 바로 우리 몸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하면 줄게, 가 아니라 우리 행함에서 나온 게 아니고, 행함에서 나왔다는 것은 우리 몸에서 나온 게 아니고 몸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말은 우리 선택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의 진짜 살아있는, 보이지 않지만 그 몸에서 나온 결과적으로 이렇게 우리를 몰아넣는 겁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그런데 우리 몸에서 나온 건 뭐냐 하면, 지금 어떤 분입니다. 서울 살다가 부산 갔다가 지금 통영 갔다가 가끔 대구에 오십니다. 그런 목사님이 계셔요. 한번 비교해 봅시다. 서울 살다가 부산 살다가 통영(충무)갔다가 가끔 대구 온다. 이건 성령 안 받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주거지 변동이잖아요. 이런 것은 ‘아!, 하고 이해가 되죠.

하지만 “아시는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이 코스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뭐 이런 게 다 있나?’ 이렇게 된다 말이죠. 지금 이걸, 여기에 성령 받은 사람을 여기에 올인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서울 갔다가 부산 살다가 통영에서 사기 당해서 대구 가끔 왔다. 이건 여기(성령 받은 일)에 비하면 별로 의미 없는 거죠. 남편이 힘들다. 이런 건 별로 의미 없다니까요. 이것(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이 바로 주께서는 이게 필연이지, 이건 필연이 아니거든요.

이게 또 나와요. 야고보서 4장 13장에도 또 나오죠.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여기에 촌이 있다. 촌에서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 자영업해서 그 다음에 이익을 보리라. 이 생각은 성령 안 받아도 누구나 할 수 있거든요. ‘어릴 때는 도시에 가서 자영업해서 이제는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는 뭐다? “안개니라“ 했다고요. 안개의 특징은 무엇이 없다 했습니까? 목적이 없다 했죠? 안개는 왜 목적이 없느냐 하면, 안개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목적을 만들어 버리면 우리가 안개임이 부정돼 버려요. 말씀대로 내가 안개 되려면 목적을 항상 주께서 가져다주는 그것으로 전환시켜야 돼요. 어떻게? 내가 주의 뜻이면 촌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도시에 가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장사가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이익이 남기도 한다. 여기다 뭘 집어넣는다 말입니까? 주의 뜻이면! 주의 뜻이면! 주의 뜻이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리니.

그러니까 촌에서 자기 자영업 하다가 죽을 수가 있고, 자영업 3년 손해 보다가 4년 째 이익 보려고 하다가 죽는 수가 있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주께 반발하면 안 되죠. 왜, 처음부터 뭘 집어넣었습니까?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리니, 라는 심정을 집어넣어서 촌에서 도시로 자영업을 하러 갔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투정을 부리면 안 됩니다.

어제 제가 글 썼잖아요. ‘이유 없는 반항‘이라고 십자가마을에. 거기 보면 인생이 투정으로 돼 있다. 이런 글을 썼어요. 가만히 보면 투정인데 그 투정이 하나님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 이예요. ’왜 매사가 내 뜻대로 안 됩니까?‘ 하고 투정하는데, 우리 뜻이 뭐냐 하면 서울, 그리고 부산, 통영, 이게 기껏 우리가 결재 내면, 기한 정하면 꼭 이런 식이예요.

15평 서민 아파트에서 35평에서 50평에서 별장, 꼭 이런 것. 이것하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둘 사이에 그야말로 이거는 하늘나라 축~ 처진 것이고, 이건 그냥 터키고 그리스고 그렇죠. 여기 이렇게 그 당시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넓은 집에 살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사도바울이 다가가서 이걸 (로마서8장 30절) 전했더니만 세상에 그들이 마음을 열고 이 세계 속에 들어오니 사도바울이 놀랄 지경이라 말이죠. 과연 그러한가 하여 말씀에 관심을 갖고 이렇게 사는 겁니다.

여기 12절에 보니까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러니 여기 돈 있고 돈 없고는 그건 하늘나라에는 돈 있고 없고 잘 살고 못 살고 가난한 자, 그건 별 의미가 없어요. 하늘나라에서는 그냥 십자가 끝!

이번에 유튜브 ‘헌금’ 할 때 이야기했잖아요. 무슨 하나님이 돈 받고 축복해 주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세상에. 돈 받고 구원해 주는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이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왜냐 하면 내가 가난 하냐, 부 하냐, 하는 것은 하늘나라 조건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뭐 가난하게 돼야 된다고 재산 갖다 바치고 천당 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누구냐 하면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이상해 그 사람은. 그거 한다고 천당 갑니까? 나중에 돈 다 바치고 난 다음에 아까워서 딴 짓하고 있어요. 톨스토이 전기에 보면 희한해요 왔다 갔다 해요. 신앙인인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신앙인이 아니고 무슨 주의라 하느냐 하면 이상주의라 합니다. 산상 설교 대로 살자. 완전히 개혁주의라.

슈바이처도 마찬가지고, 아프리카의 성자 그것도 마찬가지고. 젊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그걸 딱 보게 되면 아이고,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간 것은 할 짓이 없어서 긴 거예요. 아무도 이런 소리 안 합니다. 제가 최초로 이런 소리 하는 겁니다. 아무 할 짓이 없어 재미난 일을 찾아서 간 겁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냥 선택에 불과한 거예요. 사람은 명분을 찾아서 일하지 않고 즐거움을 찾아서 일하게 돼 있어요. 사람은 즐거움과 지 몸 편한 걸 위하여 행동하게 돼 있어요. 즐겁지만 힘들면 안 하고, 좀 재미없더라도 편하면 하게 돼 있고, 지 몸 편한 대로 하게 돼 있습니다. 몸의 컨디션 이예요. 그리고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마귀가 조정하게 돼 있고, 인간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막살 뿐 이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말씀의 세계에 들어오니까 야, 이건 놀라운 기적이죠.

그럼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제일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그 사람들이 어떤 신학에 빠진 사람들입니까? 바리새인이죠.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죠. 그 사람들이 나옵니다. 여기 13절에 보면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거기서 배척했죠. 바울 뿐만 아니고 여기 18절에 봅시다. “어떤 에바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라고 돼 있죠?

여기 ‘에바구레오’란 말은 무슨 말이죠? ‘스도이고’라는 말도 뭐냐, 이게 명칭인데 무슨 명칭이냐 하면 지명이 아니고요. 철학의 파입니다. 앞에는 에피쿠로스학파고, 뒤에는 스토아학파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성경에 나오니까 제가 설명을 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제 글을 보고 ‘너무 철학적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성경에서 이미 철학이 나와요.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하는 바리새인 신학도 철학입니다. 왜 철학이냐 하면 세상은 철학이 마지막 종착점 이예요. 철학이 호박죽 같거나 부글부글 끓는 온천수라든지, 이미 인간은 공백이 아니고 거기에 뭔가 어디에 푹 빠져 있어요.

어디에 빠졌는가, 이미 본인도 모르게 철학에 푹~ 빠져있어요. 재래시장 난전에서 콩나물 파는 그 촌에 있는 아줌마도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어요. 그 철학은 물론 정통적으로 전수받은 철학입니다. 그저 여자는 남자를 하늘같이 떠받들어야 되고, 그런 것을 학교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이미 가정 분위기상 성장과정에서 주위사람들 특히 부모나 일가친척한테 이미 그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죽고 난 뒤에 복 받으려고 하면, 반드시 제사는 챙겨야 되고, 그분들은 어디서 제사하는 법을 배운 게 아닙니다. 그냥 곁눈질로 보고 다 한 거예요. 좌청룡우백호, 그거 다 배우는 겁니다. 명절 날 되면 두루마기 입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요. 친척 중에 우두머리 되는 사람, 집안 어른이라 하는 사람이 가르쳐 줘요. 지가 어른이라고 양반이라고 양반 도리는 해야 된다고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게 꼴 보기 싫지만 다른 걸 배운 적이 없어요. 교회 간 적도 성경 본 적도 없으니까 그분들은 그냥 그런 걸 수납하되 한 가지 그냥 수납하는 게 아니고 한 가지 딱 하나 자기의 선택 사항이 있어요. 그게 뭐냐, 축복, 그리고 내 남편, 내 자식 잘되고 우리 집안 잘 되는 것. 이건 누가 가르치고 자시고 할 필요 없어요. 이걸 성경에서 뭐라 하느냐 육의 본능, 육으로 난 것은 육이죠. 이 육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육의 그 본성과 본능은 감출 수가 없어요. 이건 성령을 받고 뭘 받아도 소용없어요. 육은 계속 있는 한 자기의 경향성, 자기의 방향성의 속성을 유감없이 매일같이 24시간 쏟아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꿈속에도 쏟아내고, 모든 움직임이 육의 충동으로 움직입니다. 이성보다 감성, 감성보다 감정이 우선됩니다.

우리 애가 소풍갔다가 얼굴을 맞았다. 이건 이성을 넘어섰습니다. 이건 감성이 감정이죠. 이걸 한자로 이야기하면 ‘욱’. 프로이드가 이걸 무의식에서 다룬 겁니다. 이 ‘욱’하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냐, ‘욱’하는 것은 화를 낸다. 또는 너무 좋아한다. 사랑한다. 기뻐한다. 충동적이다. 이렇게 하지만, 사실은 이 ‘욱’하는 이 성질은 뭐냐 하면 ‘나의 나됨을 구성하는 작업의 일종이다.’ 그러니까 이게 어려운 게 여기 ‘나의 나됨’이라 하는 것은 정해진 게 있습니까? 정해 진 게 없어요.

어제 수요일 설교에서 했지만,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정해진 게 없어요. 칼은 주부가 쓸 때 칼 하고 도둑이 쓸 때 칼 하고 군인이 쓸 때 다 다르듯이 내 몸이 남이 어디에 나를 불러 사용하게 되면 거기 맞춰서 자신이 스스로 그 환경에 변경에 나서게 됩니다. 그 환경에 적응하고 맞추기 위해서 변경하게 돼 있어요. 누굴 만나면 저쪽에 아부하게 돼 있고 이쪽 만나면 아부하게 돼 있어요. 내 몸도 내 몸이 어떻게 쓰여 지고 어떻게 활용 될지 본인도 장담 못해요. 왜 도무지 나라는 게 종잡을 수 없어요.

그게 왜냐 하면 우리는 어떤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확립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과정 속에 있는데, 그 과정은 생명에서 어디로 가는 과정입니까? 죽음으로 가는 과정 속에 우리 몸이 있거든요. 이 죽음이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죽을 때 죽음이라 하는 것은 그냥 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도 의미가 있거든요. 죽는 이유가 결국은 성경대로 하면 뭣 때문에 죽습니까? 죄 때문에 죽는다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어떤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게 뭐냐 하면 우리는 그냥, 이 말이 적당하죠. 그냥 죽기 싫어서 몸부림치는 그 모습 모습들을 10월 몇 일 날, 10월 24일 날, 또 25일 날 보여주게 돼요. 우리는 매일 하루치의 안 죽으려고 몸부림치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폭행 범이나 또는 애 아팠다고 욱하는 이 모든 것은 ‘누구야? 나로 하여금 죽음의 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누구야?’ 하고 강력한 사수와 저항을 하게 돼 있어요.

바깥에 일어나는 사건이 나를 살리게 하는 일인지, 아니면 내가 사는데 힘들게 하는 일인지를 이건 판단이 아니고 즉각적으로 본능적으로 파악해서 내가 죽는 일이하면 온 힘을 다하여 그걸 저항하고, 사는 쪽이라면 온 힘을 다해서 그것을 빼먹기 위해서 하죠. 사람, 짐승입니다. 그걸 다니엘에서는 뭐라 했어요? 사람을 짐승이라 했죠. 가락강의에 했는데. 사람은 그냥 하나님 보시기에 짐승 이예요. 그리고 짐승이 본래 모습 이예요. 그래서 울 때도 흑흑 울면 안 돼요. 어우~ 하고 울어야 돼요. 이게 맞아요.

짐승이 교육을 통해서 인간인 척 행세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흘만 굶겨보세요. 짐승 본래 모습 등장합니다. 애들 엄마 말, 아빠 말 잘 듣죠? 먹을 거 주면 ‘엄마 좋아. 아빠 좋아. 아빠 엄마 다 좋아.’ 이렇게 까불죠. 나중에 사흘만 굶겨 놓으면 완전히 아빠 엄마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히 짐승입니다. 거기다가 형제간까지 있으면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보면 이건 완전히 마귀입니다.

야곱과 누구하고 싸웁니까? 에서와 싸우죠. 아버지의 상속을 놓고 둘이 치열한 경쟁으로 끝까지 싸움을 합니다. 이건 도저히 인간이 아닙니다. 이건 인간이 아니무니이다. 죽어 마땅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야곱도 죽이고 에서도 죽여 버리죠. 에서를 죽여서 저주케 하고 야곱을 죽여서 축복 받아버리죠. 야곱 이름이 바뀌어야 됩니다.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죠. 이게 축복입니다. 야곱은 잊어라. 이제부터 이스라엘로 다룰 것이다. 이스라엘의 합당한 몸으로.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기능이 이스라엘이거든요. 그래서 인자의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몸이 될 때,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개인 소유가 아니에요.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붙어있으면 그게 축복이고, 그러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모든 그 축복이 예수님 한 몸에서 이렇게 화산 터지듯이 마그마가 땅 밑으로 내려오듯이 화산 분화구에서 시속 60킬로미터로 마그마가 쏟아져 나오잖아요? 그게 죽~~ 흘러내리듯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그 축복이 죽~ 흘러나오는 그것을 에베소서 1장 3절에 보면 이것이 바로 신령한 복이라 했어요. 이걸 성령이라 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분화구, 예수님 십자가에서 나오는 그 생명의 성령이 우리에게 넘치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물 길러 가는 것과 관계없이 계속해서 나한테 샘솟듯이 생수가 나온다고 이야기했어요. 생수가 니 몸에서 계속 나올 것이다. 나는 너를 나의 십자가 분화구로 사용 하겠다 이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가면 우리가 우겨쌈을 당하고 매여 있어도 매이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계속해서 답답한 가운데서도 답답하지 않은 것은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아까 처음 이야기한 지금 축~ 늘어진 거예요. 사도바울은 터키와 그리스에서는 그냥 남들 보기는 보통 아저씨지만 성경 안에 들어가 보면 사도바울은 성령 덩어리로서 그들에게 접촉되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축~ 늘어져서 땅의 나라, 육의 세계와 접촉한 거예요. 접촉하면서 복음 전했더니만 베뢰아 사람들은 거기서 놀랍게도 성경에 관심을 두고 있더라 말이죠. 이게 사도행전의 뜻인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좀 이렇게 많이 외쳤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축~ 처지는데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경계지점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여기에 누가 마중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사람들이 마중을 나옵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이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소크라테스 제자가 플라톤, 플라톤 제자가 아리스토텔레스, 거기서 나온 두 파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예요.

에피쿠로스학파는 이미 앞의 것(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을 섭렵했다.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멍석을 이렇게 깔아놓은 거예요. 그리고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의 공통점은 신을 믿는다. 환장하죠. 신을 믿고 두 번째는 로고스를 믿어요. 로고스는 우리말로 하면 양심, 또는 짐승과 차이나는 면, 그게 뭐냐 이성적인 것, 합리적인 것, 윤리적인 것, 도덕적인 것, 요걸 믿어요. 세 번째 구체적으로 말해서 운명을 믿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짜놓은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신을 믿고, 인간의 양심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님의 형상, 로고스, 하나님의 형상을 믿고 그 다음에 우리의 운명을 믿고, 그래서 여기의 원리가 뭐냐, 우리가 운명대로 살아야, 결대로 살아야 나무가 잘 짜여서 대패가 잘 밀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선한 존재로서 선함이 자꾸 쌓여야 죽어서 좋은 데 간다, 라고 하는 것이 이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입니다.

들어보니까 한국교회와 차이점이 납니까? 똑같죠. 한국에서 사람들이 이걸 몰라요. 그래서 제가 철학을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가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이미 철학자들이 다 이야기해 놨다는 거예요. 그건 사도바울과 접촉을 할 때 사도바울이 외친 게 뭡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십자가 증거 했죠? 왜, 구원은 십자가에 있어요. 그걸 풀이하면 구원은 내가 양심대로 살고 내가 운명을 믿고 신을 믿는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건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 아닙니까? 내 몸에서 내가 가꿔야 되고 보관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가꾸고 보관하고 소지하는 것으로 내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그건 철학이고, 예수님의 몸에서 일어나는 십자가 피가 우리를 의인 만들고 우리를 죄인에서 죄용서 돼서 의롭게 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 옆의 강도처럼 누가 봐도 강도는 강도 몸 따로 있고 누가 봐도 예수님 몸은 따로 있잖아요? 강도가 예수님 몸과 붙어 있었습니까? 아니거든요.

딴 몸인데 놀라운 것은 몸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이게 연결됐느냐 말이죠. 그 연결은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오직 성령일 때만 그렇고 성령은 예수님의 능력의 일환으로서, 예수님의 영으로서 성령이지, 성령은 그리스도 영이 됐어요. 구약은 그냥 여호와 영이지만, 신약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은 그 분의 영이거든요. 십자가 죽으신 분이 부활했기 때문에 십자가 죽으신 분이 우리와 강도처럼 엮여서 나한테 필요한 모든 선택을 깡그리 무시하고 쏟아지는 거예요. 아까 분화구 이야기 한 것처럼 마그마 쏟아지듯이 그 십자가에서 나온 모든 것이 마그마 쏟아지듯이 우리에게 부어지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가득차서 우리는 주님의 나라 천국에,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들어간다. 이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던 겁니다.

그러면 이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하고 복음하고 차이점은 뭡니까? 이쪽은 누가 유지해야 돼요? 나는 누가 관리해야 돼요? 내가 관리하는 반면에, 사도바울은 누가 관리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지금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관리를 주께서 하신다 이 말이죠.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증명이 된다는 것이 베뢰아 사람들이 거기에 마음이 열려서 간 겁니다.

제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둘 사이의 차이점을 이야기 안 했어요. 둘 사이에 차이점은 뭐냐, 스토아학파는 상당히 염세주의고, 허무주의고 비관주의고, 에피쿠로스학파는 낙관주의예요. 요게 차이 납니다.

둘 공통점 중에 네 번째가 뭐냐 하면 둘 다 처세술, 처세술이라 하는 것은, 남에게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느냐와 관련돼 있어요. 모든 것은 이렇게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면 남들이 나를 인정해준다. 내 가정이 나를 인정해주고 직장에서 나를 인정해주고, 그래서 직장에서 나를 인정해주면 나는 승진이 잘 되고 사랑받게 되고 사랑받으면 그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 되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목적을 행복에 뒀어요. 행복은 덕에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 세상의 현재 있는 교육은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어요. 모든 교육학. 학교, 초, 중학교의 교육학은 덕(德(덧말:덕)), 또는 중용이라 하는데, 덕성이 있는 사람이 되는 이유가 스승 플라톤에 의하면, 그렇게 덕성을 갖출 때 좋은 시민, 좋은 국민이 되는 겁니다. 공동체에서 정상적인 구성원이 돼요. 길 가면서 담배 피우지 마라. 이것은 남을 배려한 겁니다. 지가 피우다 암 걸리는 것은 몰라요. 그것은 사회에서 담배를 피우게 되면 저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연기를 맡아서 간접흡연이 되거든요. 이 교육을 학교에서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 거예요. 니 행동 하나가, 니 하고 싶다고 해서 하면 그건 짐승이고, 주위를 보면서 혹시 나로 인하여 피해 보는 자가 있는가, 그걸 따지는 것이 에피쿠로스나 스토아학파에서 말하는 바로 인간 속에 있는 로고스, 합리적 이성적인 것을 깨우치고, 그건 국가가 반드시 인간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모든 인간의 양심을 호소해서 가르치고, 가르치게 되면 이상적인 국가와 사회를 형성하게 되면 인간은 행복한 사회가 되고 그것이 사람 사는 목적이 된다는 거예요.

스토아학파는 왜 비관적이냐 하면, 스토아학파는 불교예요. 사람들이 아무리 행복을 추구해도, 사람이 욕망이 있는 이상 행복해도 자꾸 또 ‘아니야, 이거보다 또 행복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을 해버리면 현재 행복이, 행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의 씨앗이 되는 거예요. 욕심 때문에. 그것마저 버려야 되니까 비관적이고.

에피쿠로스학파가 낙관적이 된 것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마찬가지인데 어차피 운명인데 남한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그걸 선이라 하자. 따지지 말고. 왜 따지지 마느냐, 따지고, 따지고 하면 따질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 집사님 물마시잖아요? 그 물 마시는 거 나이지리아 흑인한테 물어보고 물 마시는 거예요? 지금 나이지리아 흑인들은 물이 없어서 15킬로미터 우물 파고 있는데, 그거 생각하면서 ‘미안하다. 나이지리아, 나는 물 마신다.’ 이렇게 하십니까? mbc 보세요. 우물 파주기 하잖아요.

그러니까 에피쿠로스나 스토아학파는 따져보니까 내가 지금 행동을 옳게 하느냐 따지는 변수(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고 많아도 너~무 많아. 그래서 대충 살자. 왜, 행복하다 싶을 때는 대충 인간의 능력이 그거 밖에 안 되니까. 골라낼 요소가 많기 때문에, 그거 따지면 지가 뭘 해도 죄인 되잖아. 그러니까 따지지 말고 대충 넘어가도록 하자. 구겨진 거 다리미질 하는 것 따지지 말고 동전 시커먼 거 바꿔서 드려야지 그냥 드리면 주께서 ‘어디 때 묻은 동전을?’ 하고 싫어하니까 자꾸 그런 거 따지지 말고 그냥 대충하라는 것이 에피쿠로스학파고, 이걸 따져서 항상 마음을 낮추자, 하는 이것이 스토아학파인데, 그 둘이가 사도바울에게 제의를 하자고 나온 겁니다. 그 결과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합시다.

공은주(IP:218.♡.196.163)

12-11-10 05:16

대전20121025b-마12:46(마리아의 입장)33강-이 근호목사

마태복음 12장 46절부터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어렵습니다. 뭐가 어려운가 하면, 예수님하고 모친과 동생이 나왔지요. 지금 이 관계가 성립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것부터 따져봐야 돼요.

예수님과 모친은 어떤 관계냐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가족 관계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어렵다고 한 거예요. 그럴 때, 제가 어렵다고 이야기한 것이 예수님께서는 ‘~이라.’고 이야기해주면 우리는 어렵지 않아요. 이것을 납작 지식으로 받아먹으면 되는데, ‘~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 아니다.’ 라는 것이 평소에 우리가, 때려 죽여도 ‘~입니다.’ 라고 우리가 우겼던 그것을 끄집어내어서 ‘그것이 아니다.’ 라고 먼저 선수치고 들어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다.’ 하면 우리는 안 들키고 이것, 저것 모든 것 끌어 모으고 자기 것은 안 들키면 되거든요. ‘~이 아니다.’라고 들어오니까 이거는 들어오는 것보다 있는 게 노출되고 발각이 된 셈이에요.

‘~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렇습니다. 이것도 좀 어려운데요. 인간의 전체 가운데 A, B, C, D 요소가 많은데, 한 쪽 A가 ‘~이 아니다.’ 라고 되어버리면, 우리는 요걸 ‘이것은 아니지만, B는 ~일 것이다.’ 라고 우기는 버릇이 있어요.

그런데 ‘~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은 딱 듣는 순간, 이것만 ~이 아닌 게 아니고, 이것 언급하지 않은 모든 것도 ~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이 기분 나쁜 거예요. 선생님이 아이보고 “너는 수학을 잘 못하는구나!”이것은 애들은 용납해요. “니는 돌대가리야.” 이렇게 돼버리면 무슨 문제가 되는가 하면, 이것은 수학을 하든, 체육을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아이를 몽땅 절망에 빠뜨리는 겁니다. 어른이 그렇게 만들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야, 너는 미술하나 끝내주게 잘하네, 기타하나 잘 친다.” 이렇게 해서 너 못한다는 아픔을 트라우마를 지워주는 쪽으로 긍정적인 교육방법을 동원하라고 페스탈로치 교육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긍정적이고 하나의 자의식을 구축하는데,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자의식을 하지요. “아이고, 돌대가리야, 느그 아버지나 느그 엄마가 돌대가리인가보다.” 이리하면 집안까지 몽땅 다 조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이 보기에 분명히 모친이고, 동생은 예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다리를 브리지를 잘라 버립니다. 이 말은 뭐냐, 지금까지 내가 한 소리는 너희들이 헛소리로 들었다. 너희들은 완전히 기존 자기 생각에 빠져서 오해했다는 겁니다. 대구강의에서 한 이야기인데, Timing문제인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를 때, 너는 이제부터 나를 따르라 하니까 어느 제자가 따르겠다고 해놓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장사하고 따르겠습니다.” 그 타이밍이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래? 나는 몰랐네. 아이고, 미안하이, 장사하고 다음날 오게.” 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그 제자의 기존의 자기 세계관, 생활관이었는데, 익히 안다는 식으로 뭐냐 하면, 그럴 줄 알고 아버지 내가 죽였다는 식으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따르고자 하는 것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아니고 여기에서 너를 끄집어내어주는 이런 세계관에서 너를 다른 세계관으로 끄집어내는 쪽으로 나보고 따르라 하는 것이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예수도 따라야 되고, 이것도 나의 업무 중에 하나고 저것도 업무 중에 하나고, 니가 어떤 업무를 하던지 간에 그것은 이미 잠겨있고 갇혀있는 업무다. 니가 나를 따르라하는 것은 나중에 알 것이다. 아버지를 왜 죽은 자로 하는지, 니가 왜 죽은 자 속에 있는지를 나중에 알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이렇게 기존 관계를 끊고 하는 겁니다. 끊고 할 때 이것을 구약에서 찾아봅시다. 구약에 언약이 동원 됩니다. 언약이 동원될 때, 제일 먼저 언약이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노아언약이지요. 노아언약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가 이렇게 피어 있습니다. 무지개는 은혜로 보호한다. 자연 질서를 내가 정상적으로 잡히도록 내가 보호해 주겠다는 식으로. 그 무지개가 있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결국 악한 인간을 팽개치면 물로서 저주받아야 될 세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은 너 때문이 아니고 내가 희생제물을 보고 내가 특별히 보호해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희생의 피를 근거로 해서 너를 보호해 주겠다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개인적인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지구 전체에 대한 보살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추가 될수록 범위가 좀 더 구체화되고 좁혀집니다.

마지막 언약으로 좁혀지게 되면, 오직 누구한테 가는가 하면, 오직 예수님을 손으로 지적하는 언약이 돼요. 이 말은 마지막 언약이 새 언약인데,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하는 거잖아요. 이 살과 이 피를 마셔라, 이것이 새 언약이다. 이 말을 거꾸로 소급하게 되면, 예수님을 필름 통이라 보고 이걸 화면발로 쫙 당겨버리면 결국, 옛날에 있었던 노아언약에 있었던 희생의 화목제물의 피라 하는 것은 사실은 따라가 보면 누구의 피였다? 예수님의 피로서 그동안 악함에도 불구하고 보호를 받는 거예요. 예수님 피로.

언약은 모든 걸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시 한 번 필름을 풀어버리면 확장해 보면,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뭘 모르는가 하면, 네가 지금 심장이 뛰고 햇빛과 공기를 마시는 것이 도대체 누구 덕분이야? 이리 되는 겁니다.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성폭행 범도 그들이 잘 때는, 주께서 지켜주시고 심장을 뛰게 한다 말이지요. 독재자 김정은부터 해서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보험 사기범도 많고 차있는데 뛰어드는 사람, SBS 월요일 7시 45분에 블랙박스에 나오는 거 보면 가관이 아니에요. 보험사기 해먹으려고 차가 지나가고 있는데 확 들이민다고요. 그걸 잡아서 모가지를 확 비틀고 싶은데, 비틀 수 없는 것이 누가 그 사람을 살게 하셔서 누가 안 아프게 하셔서 들이미는 모션을 누가 치게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거든요.

선인과 악인을 상관없이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 말이지요. 지금도 알라신 섬기는데 가면 풍랑을 이루고 있어요. 햇빛과 공기를 줘서 농사가 잘 되게 한다 말이지요. 지금도 공산주의 국가 중국가면 벼농사 잘되고 수수밭에 가면 엄청난 수수밭이 끝이 없어요. 세상에 그런 축복을 받아놓고 그들은 누구한테 돌립니까? 중국의 홍콩사람, 대만사람 가보면 만날 조상한테 드린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의 관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런 언약을 모르고 기껏 옳은 게 뭐냐, 조상이에요. 조상이 키워줘서 씨족이 되고, 씨족이 커져서 부족이 되고, 부족이 커져서 국가가 되는 겁니다.

국가라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뭐냐 하면, 혈연중심, 혈연관계에요. 물론 다민족 국가가 되면 혈연관계에서 이익관계로서 사회가 돼요. 게만 샤르크 해서 테니스란 사람이 그렇게 정해놨는데. 현대 국가에서 물론 다국적 기업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가서는 결국 믿을 것이 뭐냐, 조상인 거예요. 조상.

불교의 회심곡 같은 경우는 사람에 대한 뿌리가 있는데, 그 뿌리라 하는 것은 니가 뿌리를 모르고는 니가 인간이라 할 수 없다. 뿌리가 누구냐, 조상이란 말이지요. 어떻게 조상을 잊어버리고 니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 우선 니부터 챙길 때는, 모든 이가 잘되고 하는 것은 조상 덕이니까 먼저 조상부터 챙기고 죽은 조상도 챙기지만, 살아있는 조상도 섬기고 그래야 니가 복을 받는다. 그래야 짐승으로 사는 게 아니고 사람으로 사는 거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민족을 한민족이라 하지요. 단일민족이라 하잖아요. 언제부터 단일민족이지요? 인간 세포내에 미토콘드리아 있고, 미토콘드리아 안에 DNA가 있어요. DNA를 조사해 보면 한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고 북방계통과 남방계통 둘이 합친 겁니다. 쌍꺼풀 쪽은 주로 남방계통 베트남 계통이고, 쌍꺼풀 없고 얼굴 길쭉한 것은 북방계통에서 온 거예요. 둘이 합친 거예요. 우리나라 역사에 보면 삼한시대 있지요. 마한, 진한, 변한, 그 시대에 보면 그 당시에 이미 중국에서 떼로 밀려온 거예요. 전쟁 통에 밀려온 거예요. 특히 주몽 같은.

그러니 여기서는 씨족에서 부족으로 넘어갈 때는 이미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고 추상적인 이념관계로 바뀝니다. 이념으로 바뀌면 혈육+경제적 이익이 되는 겁니다. 그 때는 이제는 돈 있는 사람이 돈 없는 사람을 종으로 부려 먹고, 종은 잘사는 집에 가서 빌어먹고, 그렇게 하면서 그 중심은 그 씨족 잘사는 쪽으로 재편성이 된다 이 말이지요. 편성이 되면, 조상도 자기 조상 버리고 자기를 키워주고 자기를 살려준 잘사는 그 쪽 조상이 나의 조상보다 우수한 조상으로 인정해줘야 됩니다. 잘사는 권력 있는 조상의 그 조상을 조상되게 한 그것이 뭐냐, 우리가 아는 바로 ‘신’이에요.

모든 신은 반드시 그 뒤에 뭐가 있느냐, 신화가 따릅니다. 신화로 만들어지면 그 때는 단일국가가 돼요. 이제는 우리 조상 훌륭했다, 그런 것은 교과서에 안 실리고 우리 민족의 신화, 우리 민족의 조상은 교과서에 실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이씨 집안의 조상은 퀵 하고 고개 숙여야 돼요. 저 쪽 어른 신에게 우리 조상신은 양보를 해야 됩니다. 10월 3일날 개천절을 위해서 우리 조상은 양보해야 될 때에 양보 좀 해야 돼요. 자기 조상 제사일 이라고 국기 달고 이러면 법에 걸리고 안 됩니다. 이게 바로 적응이에요. 우리가 그 사회에 밥 먹고 살려하면 빌어먹으려하면 큰 데 몸 바쳐야 돼요. 큰 데 집단에 몸 받쳐야 됩니다.

자, 이렇게 될 때, 제가 왜 이런 말 하는가 하면, 마태복음 하면서 왜 이런 말 하는가 하면, 육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육체로 시작하였던 것이 하나의 ‘국가’ 이걸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어느 인간이 국가를 이깁니까? 예수님이 살해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한테 살해당했습니까? ‘육의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국가라는 힘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반발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반발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반발 안해야 된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해서는 반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가 밥 먹는 것보다 더 철칙으로 우리는 익히 온 몸으로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에 들어오면 문 안 열어줍니다. 그러나 경찰이라 하면 우리는 문 열어주게 돼 있어요. 왜? 경찰이니까. 경찰에게 문 안 열어주게 되면 불이익이 오게 되고 어느 중에 우리는 경찰이 우리 집에 안와도 경찰이라는 그런 배경 안에 우리는 살고 있는 거예요. 뭔가 집안에 일이 있으면 112에 전화하는 겁니다. 왜? 경찰이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에.

그런데 이방인들, 외국인 노동자들, 이 사람들은 경찰을 못 부릅니다. 부르면 불법 이민자로 걸리면 들통 나기 때문에, 미국에 오래 산 사람은 미국 경찰을 부르지만, 미국에 갓 이민 간 사람들은 다른 국가를 찾는 것이 아니고 같은 일가친척을 찾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찾다가 오래 살면 일가친척보다도 힘이 누가 더 세다? 미국이 더 세기 때문에 하루 빨리 시민권내지 영주권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한국에 있는 아버지는 “야, 야, 거 미국에 있지 말고 빨리 군에 가라.”하면 조금만 있으면 영주권 얻어서 군에 안 가도 돼. 이리 나오지요. 제가 말하는 모든 것은 육은 육이 만들어 놓은 육이라는 그 가마솥을 안에 놓여있는 육으로 이해해 달라는 거죠. 육이라 해서 내 육체만 육이 아니고 이 육체는 진공 속에 그냥 포장된 육이 아닙니다. 들끓는 팥죽 속에 그냥 오르락, 내리락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러한 작은 알맹이에 불과한 것이 육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육이라 하는 것은 이 육의 세계 전체를 이야기하고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예수님에게 저 뒤에 모친과 동생이 와있습니다. 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소리 한다는 자체가 자신의 육신을 환경과 더불어서 봐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자기 육체만 달랑 따로 떼어서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지금 예수님은 우리가 육에 있는 환경전체를 통괄해서 보고 있는데 예수님 이야기를 그냥 환경은 제쳐놓고 “저 말만 내가 믿으면 돼.” 하고 자꾸 자기가 어디에 속해있는가를 감안하지 않은 채 예수 믿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거, 그걸 지금 지적해 주는 거예요. ~이 아니다, 라는 쪽으로 예수님은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니는 니가 선택하고 결단내리면 다 니거 되는 줄 아는데, 니는 니 결단 이전에 결단과 상관없이 니가 지배받고 있는 어떤 권력과 세력 속에 놓여있다는 거예요. 그걸 주께서는 일러 주는데 그 권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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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6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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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