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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교회-다니엘4장10절(무너진 공간)121018-6강a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다니엘

가락교회-다니엘4장10절(무너진 공간)121018-6강a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1.16)

가락교회-다니엘4장10절(무너진 공간)121018-6강a -이 근호 목사

제 6강a

다니엘 4장 13절 읽습니다.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라고 돼 있죠? 순찰 자가 있다는 거죠. 여기 보면 느부갓네살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꿈에 순찰 자가 내려오는 걸 봤다는 말은 평소에 뭐가 빠진 채 살아왔다는 말입니까? 순찰 자가 빠진 채 살아왔죠. 순찰차가 아니고 순찰 자! 평소에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왕으로 살면서 뭐가 빠진 인생을 살았느냐 하면 순찰 자가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채로 세상을 본 거예요.

순찰 자라는 것은 감사예요. 관찰 자, 정찰하는 그런 자신의 모든 것을 정찰하시는 분. 그런 분이 빠진 채로 그동안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께서 꿈을 준 것은 뭐냐, 순찰 자가 있다는 것에 화들짝 놀란 거죠. 그러면 순찰 자를 집어넣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감시받는 왕, 순찰 당하는 왕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느부갓네살이 ‘나는 누구다.’에서 ‘이 세상은 내 세상이다.‘가 되거든요. ’나는 누구다‘에 대해서 뭔가 오해했고 곡해했다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평소에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자부했는데 그건 뭐가 빠졌다? 순찰 자가 빠진 입장에서 ’나는 이렇다.‘고 주장한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은 여기 16절에 보면 짐승이 되죠.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이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이러한 지시를 받았죠. 순찰 자가 없을 경우에는 자기는 사람이었는데 순찰 자가 등장하고 난 뒤에 ‘너는 짐승이 되어라’고 한다면 진정 느부갓네살은 인간입니까? 짐승입니까? 어느 쪽 이예요? 짐승에 불과했다.

어제 수요설교에서는 이걸 짐승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 했느냐 하면 이걸 가상의 세계라 했죠. 인간은 자기가 뭔가 자기에 대해서 안다고 여기고 자기 위주로 세상을 만들어 보니까, 실제 세상하고 다른 가상의 세계 속에 둘러싸여 자기가 살아온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어려운 거 해봅시다. 둘 중에 하나 묻겠습니다. ①번, 공간이라는 것은 비어있다. ②번, 공간은 내가 만든다. 몇 번입니까? 공간이 비어있다는 이것은 물리적 공간이라 합니다. 자연세계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찰 자를 집어넣으니까 그동안 이 자연세계에서 ‘내가 임금이다.’라고 여겼던 그것이 가상의 세계, 잘못된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공간은 내가 여기 있으매 내 위주로 어떤 세계가 형성된 거예요. 이걸 우리는 공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새 공간이란 개념 앞에 많이 붙어요. 세면 공간, 국회의원들의 공간, 공간이라는 것이 하나가 아니고 다수가 돼 버렸어요. 그걸 흔히 사회적 공간이라 하는데 그런데서 사람들은 물리적 공간은 사회적 공간이 아무리 많더라도 북한도 있고 현재 유엔 가입국이 193개국이거든요. 193개 나라가 각자 자기국가란 공간을 점유하잖아요. 하지만 그 모든 나라가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것은 뭐냐, 이러한 사회적 공간 말고 국가적 공간 말고 우리들끼리 공간 말고 자연세계는 두 개다? 하나다?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잘못 이예요. 그게 가상의 세계라.

왜냐하면 과학에서 20세기 천문학 중에서 제일 충격적인 사실 하나가 (물리학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지만) 뭐냐 하면,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사고방식 이예요. 여러분, 우주에 중심이 있습니까? 이거 듣고 정상상태를 주장하는 천문학자가 화를 냈어요.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말은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우주에 중심이 있으면 우주는 한 중심에서 전부 다 퍼져나갔다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이건 인간의 상식에 어긋난 거예요.

여기 중심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비어있는데, 우주는 비어있고 중심이라는 게 없잖아요. 우주는 중심이 없다니까요. 우주가 왜 중심이 있어요? 중심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사는 그 동네에 중심이 있지, 내 중심, 니 중심. 중심이란 말은 인간들이 납득이 될 때 중심이지 우주에 중심이 있어야 중심을 잡지, 우주는 중심이 없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빅뱅이론이 나오고 난 뒤에는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이야기 듣고 천문학이 충격 받아버렸어요.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말은 모든 우주가 한 지점으로 모인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하늘이 중심이 있습니까? 이게 우리의 그냥 상식의 인식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잖아요. 무슨 이야기냐, 중심이라 하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국가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야, 성도 나와라, 중심이 여기 있다. 중심 잡아라.’하는 이야기는 인간들이 있을 때나 인간들이 결집하고 단결할 때 하는 거예요. 가정을 아버지 중심으로 모여야 된다. 이럴 때 중심이지, ‘어, 별아, 중심에 모여라.’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별에 중심이 없는데. 별은 그냥 물질 덩어리인데. 중심이란 인간이 논할 때 중심이다 말이죠.

그런데 우주에 중심이 있어버리게 되면 결국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중심을 이 지점도 아니고 이 지점도 아니고 어떤 특정 지점을 중심이라고 한다면 이 특정 지점을 중심이라고 잡았던 어떤 분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과학에서 멀리 쫒아 보냈던 그 신을 다시 호출해서 불러올 판 이예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중심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지정해줄 때만 중심이 있는 거예요. 중심이란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 5명 중에서 누가 중심이 될까? 대장은 누가 될까?’ 인간들이 그럴 때 중심과 관계있을 때만 중심이 되는데, 우주라 하는 것은 우주 한복판에 어떻게 인간이 있습니까? 인간도 없는데 왜 중심이 등장하느냐 이 말이죠.

그렇다면 성경에 뭐라 돼 있느냐, 성경에는 모든 것이 누구 중심으로 돼 있습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모든 만물은 예수님 중심이잖아요. 예수님 중심이 돼 버리면,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동안 인간들끼리 ‘중심 잡자’ 이 말이 전부 다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주님한테 허락도 안 받고 자기들끼리 우긴 게 돼요. ‘우리들끼리 중심이다. 우리 대통령이십니다. 임금이십니다.’해도 진짜 임금이 오셔서,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임금이다.’ 해버리면 자기들끼리 투표해서 임금된 것은 무용지물이 되잖아요. 아무짝도 소용없잖아요.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말은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그건 하나마나한 짓을 해온 거예요. 평생 90평생 동안 계속해서 하나마나한 짓을 해온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거야.’ 하나마나한 존재라는 거예요. 있으나마나한 존재라는 겁니다. 교회를 세우거나 절에 가든지 뭐를 하든지 그건 다 씨잘 데 없는 짓, 헛짓한 거예요. 교회는 왜 세우는데요? 교회를 세우면 교회를 세운 사람이 그 교회에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인정받습니까? 인정 못 받습니까? 인정을 못 받거든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중심이라 하는 것은 나한테 의미가 있을 때 우리는 중심을 찾게 돼 있습니다. 가정이 흔들릴 때 ‘가장이 돼서 흔들리면 안 되지.’라고 할 때는 그 가족의 아내가 되든지 자식이든지 연관된 사람일 경우에 그런 거예요. 남의 집 가정이 흔들리는 것하고 우리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내 가정이 흔들릴 때 ‘중심 잡아야지’ 이런 말 나오듯이, 회사가 흔들릴 때는 ‘사장님 중심 잡아야 됩니다.’라고 나오듯이 남의 회사는 망해도 관계없는 거예요.

다 나하고 연관돼 있는데 그동안 느부갓네살이 순찰 자가 오기 전에는 누가 중심이었습니까? 자기가 중심이었다고요. 그런데 순찰 자가 와 버리니까 자기는 중심이 아니고 짐승이야 짐승!

이 말은 니가 생각하는 공간은 니가 자연세계에서 느부갓네살 니가 제일 우두머리니까 국가질서 차원에서 니가 중심이라고 여기는 모양인데, 그래서 11절에 보면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해서 분명히 느부갓네살이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중심 국가라는 것이 분명하죠. 중심 국가에서 중심 자는 누구냐, 느부갓네살로 돼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한 게 어렵지만 다시 한 번 약간 어려운 부분을 해보면 분명히 우리는 국가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한테 이야기하죠. 국가한테 이야기 안하죠? 느부갓네살한테 이야기하죠. 이건 뭐냐 하면 이 국가라는 이 추상적인 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국가를 뭐로 번역해 버린다? 국가를 하나의 인물화 시키는 겁니다. 이걸 뭐라 하느냐, 국가를 인물화 시킨다는 말은 그 국가를 교체할 때 교체하고 그 국가를 없애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떤 국가라는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인물로 나타나요. 인물이 누구죠? 예수님 아닙니까?

다윗언약이 뭐냐 하면 국가 이전에 인물이라는 거예요.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은 국가로 알고 있잖아요? 출애굽기 4장에 보세요. 아들입니다. 이 대목 해결하는데 제가 옛날 신학교 다닐 때 고민 많았어요. 4장 22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게 도대체 풀리지 않는 거예요.

어떻게 나라가 아들이 됩니까? 아들은 사람이고 나라는 추상적 질서체제인데, 나라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모인 결과로 이야기하잖아요. 여러분, 나라는 없어요. 나라는 없고 그 안에 구성원들이 있을 뿐이죠. ‘여기 나라 하나 주세요.’ 하면 나라 줍니까? 나라 자체가 없잖아요. 학교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학교 가면 교수 있고 학생 있고 캠퍼스 있고 행정직원 있지, 학교가 어디 있어요? 그런 게 결과적으로 모여서 학교라 하잖아요. 회사라는 게 없잖아요. 회사 건물 있고 직원들이 있잖아요. 회사 사장님 보고 ‘아이고, 회사 나오십니까?’ 이건 바보 같은 소리인데.

이 출애굽기 4장 22절에 보니까 이스라엘을 뭐라? 내 아들이라. 도대체 이걸 어떻게, 주석 봐도 나올 리가 없고, 이걸 해결할 신학자도 없고, 혼자 끙끙 앓는 거예요. 성경 보고 혼자 끙끙 앓던 구절 많습니다. 굉장히 나름대로 고민했던 구절들이 논문 쓰면서 많았어요. 어떻게 이게 아들이냐? 아들하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그래서 그 당시는 해결이 안 되고 해결이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몇 십 년 전에 그걸 알았죠. 아! 바보같이 언약을 빼놓으니까 해결이 안 되지.

언약이 뭐냐 하면 아들이란 말은 아버지가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숨어있는 거죠. 숨어있는 아버지가 일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들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식이 있을 때 아들이죠. 딸이나 아들이나. 인간이 모여서 국가를 이루잖아요.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도 아들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이렇게 본다는 거죠.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았죠. 자기들. 인물이니까. 우리가 모인 국가라는 건 인물이 아니고 자기가 아들이니까 ‘하나님, 아들 여기 있습니다.’ 이런다 말이죠. 오늘날 교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이 문제가 언약을 통해서 풀렸어요. 뭐냐 하면 언약이 없는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언약이 없다는 것은 아버지의 관계가 끊어진 걸 말합니다. 그래서 언약이 없이 봐버리면 본인도 누군지 몰라요. 내가 있고 하나님 섬겨버리면 이건 언약이 아니고 이건 비 언약, 로마서 첫 번째 설교 때 했지만 비 약속, 약속이 아닌 상태에서는 항상 출발점이 누구다? 나부터 출발해요. 내가 있고 ‘하나님, 저 어떻게 아들 됩니까?’ 지가 아들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아들은 없어요. 아들은 없고 아들이 아들로서 기능을 다할 때 아들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역할을 다할 때 결과적으로 나오는 것이 뭐냐,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구약은 이 결론부터 이야기한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아들(예수님)은 숨어계시는 거예요. 어떻게 숨어계시는가? 이걸 가지고 주의 이름, 하나님 이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누굴 부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이스라엘은 그냥 국가적인 개념체가 아니고 아들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언약에 의해서. 언약에 준해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와 똑같은 법칙이 뭐냐,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신약에 교회라는 게 있죠? 그런데 신약의 교회라는 것은 개념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배당 있고 사람 있고 그거 교회 아닙니다. 역시 새 언약에 의해서 예수님을 부르는 그 사람들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제 이해가 쉽죠? 주의 이름(예수님)을 부르는 자들이 교회예요. 요걸 구약에 의하면 그 당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그 당시에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아들이라 하는 것은 내가 불러서 아들이란 말이 아니고, 아들이란 말은 언약에 의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 집단을 아들로 규정한 겁니다. 왜냐 하면 그 안에 진짜 아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설명해도 설명이 더 어렵네.

지금 설명이 더 어려운 이유가 우리가 언약에서 출발하지 않고 ‘나 여기 있는데 신이시여 나 어떻게 행복하게 나 죽고 난 뒤에 천당 보내줘서 행복해 줄 거요?’ 이렇게 나오니까 모든 성경이 다 뒤돌아 물러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짜들만 죽 모여오는 거예요. 성경 이렇게 껴 맞추고 이러하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이러하면 복 받습니다. 전부 다 이런 가짜들만 우르르~ 몰려와서 ‘그래, 그래 납득돼. 그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부터 출발하지 않고 나는 이미 죽은 몸이고, 왜 누가 나를 죽였느냐, 왜 죽였느냐, 언약에 의해서 죽었다고 한다면 내 죽은 자리에 누가 우뚝 서있습니까? 예수님이 딱 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서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되시는 예수님과 두 분 사이에 의논할 문제지, 내가 거기 끼어들 수가 없어요. 바로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새 언약을 고백하는 거예요. 그게 교회고 그게 구약에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장에서는 ‘내가 아들 되게 하겠다.’는 말 이예요. 정답은. 내가 이스라엘을 아들 되게 하겠다. 하지만 너희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그냥 이방나라와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멸망당하잖아요.

이야기를 계속 이어봅시다. 여기에 순찰 자가 들어왔습니다. 순찰 자가 들어옴으로서 이 세상은 느부갓네살이 세상 중심이었죠. 세상에 큰 나무가 자라서 하늘에 닿는다 했으니까, 느부갓네살이 세상의 중심인데 그 중심에 순찰 자가 옴으로서 이 느부갓네살 세상에 순찰 자가 온 게 아니고, 이 자체 중심성이 날라 가 버린 거예요. 순찰 자가 보내신 그 분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공간이 열리는데 그 공간이 천국입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대 자연이 비어있다고 그게 공간이 아니고, 그곳에 예수님이라는 인물의 모든 영향이 그 공간을 꽉 차고 있다고 믿을 때 그 공간은 천국이 되는 겁니다. 변화 산 같은데 올라가 보세요. 전 안 올라갔습니다만 지금 변화 산 올라가 보면 나무 있고 자갈 있고 똑같아요. 여기 있는 관악산이나 대구 팔공산이나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변화 산이 졸지에 뭐로 바뀌었습니까? 천국으로 바뀌었죠. 왜 바뀌었습니까? 그 변화 산에 누가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 변화 산이라는 공간은 인간이 아는 그 흔해빠진 그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는 그 여러 산 중에 산이 아니라 예수님이 있다 해서 그 공간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건 천국이 되고 엘리아 등장하고 모세 등장한 겁니다.

그래서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든지 하나님의 나라’예요. 하늘나라가 오기 전에 하늘나라를 다니엘에서는 뭐로 표현하느냐, 공간 중심 성 가지고 이렇게 표현하는 대목에 우리가 여기에 놓여 있는 겁니다. 하늘나라를 공간으로 설명할 때는 중심 성의 변경이 일어난다. 그러면 아까 일본 주소가 어떻게 된다고요? (김 권사님이 어렸을 때 일본 살았던 주소) 도쿄또 하찌까와시 아끼모노쬬 이쪼매 하지쥬 3번지, 그 번지는 일본 천왕이 정한 거예요. 일본의 공간 이예요. 일본의 공간인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는 그 일본의 공간을 인정을 해줍니다. 왜, 인간과 인간들끼리는 그러할 권리가 있다고 보고, 각기 민족은 자기 국가를 세울 권리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여기에 만약 순찰 자가 떠버리면 그 주소는 의미 없는 주소가 돼 버립니다. 그곳은 하늘나라가 될 수 있고, 지옥이 될 수 있고, 그것은 왜냐 하면 우리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살아가고 있느냐가 비로소 밝혀지거든요. 사람 사는 것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뭔가 보이지 않는 이 공간 중심 성에서 오는 은혜와 배려와 혜택으로 우리가 살거든요. 머리카락 세는 것도 그리고 발걸음도 세는 것도 이건 그분께서 다 주신 건데,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고만고만한 인간들의 교육을 받아놓으니까 각자 자기 몫의 공간을 차지하면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꺼. 여기서 여기까지는 니꺼 인정해 줄게. 그러니까 손 떼고 여기는 내꺼야.’라고 자기 공간만을 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느부갓네살 짐승 같은 인간의 재탕 이예요. 이게 짐승의 본성입니다. 요 공간에서는 내가 최고가 되고 싶은 거예요. 왜, 뭘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여기 선악과, 생명나무 이야기를 해봅시다. 선악과, 생명나무가 인간하고 차이점은 선악과, 생명나무의 존재는 이게 상당히 당당합니다. 굉장히 당당해요. 그런데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당당하지를 못하고 숨어버리죠. 그러니 우리는 사실은 중심이 될 수 없었던 거예요. 중심되려면 당당히 나서야 되는데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니까 숲 속에 숨었죠. 그것도 그냥 숨지 않고 무화과로 치마 만들어 입고 숨었다 말이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숨어버리는 아담과 하와, 그것을 원래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취지를 담아내는 공간의 일부로 채택이 돼서 여자의 후손과 그 다음에 뱀의 후손이라는 새로운 시나리오를 집어넣어 버려요. 새로운 계획을 여기다 쏘옥 집어넣어버리면 그 공간에 있던 모든 피조물들은 요 두 노선에 의해서 한쪽은 S극, S극, N극 붙듯이 각각 자기 성질대로 달라붙게 돼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도와주느냐, 땅이 도와줘요.

땅이 도와줘서 땅에서 뭐가 솟구쳐 올라오느냐 하면 엉겅퀴와 가시가 올라옵니다. 그러면 아담은 이마의 땀을 훔치죠(닦죠). ‘에이, 왜 이리 땀이 나는 거야? 왜 잡초는 뽑아도 또 나는 거야? 아유, 힘들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여러분, 제가 어제 ‘쌍용자동차와 하버마스의 철학과 복음‘이란 글을 올렸어요. 쌍용자동차의 사태와 복음과의 관계는? 고 중간에다 하버마스의 철학을 집어넣었습니다.

하버마스의 철학은 뭐냐 하면 소통의 철학, 대화의 철학입니다. 인간이 대화로 해서 해결 안 되는 것 없다. 협상하고 타협하고 서로 양보하되 서로 자기의 존재를 준중해 주면 모든 문제는 긍정적으로 풀리게 돼 있다는 게 하버마스의 철학입니다. 대화! 누가 특정 진리를 주장하면 안 되게 돼 있어요. 진리를 주장해 버리면 이건 동일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동일성을 없애버리고 비 동일성이지만 항상 서로의 대화가 이끌어내면 임시적으로 동일성이 되고, 다시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비 동일성으로 돌아가자‘ 하는 헤겔의 상호 인정의 정신에 입각해서 하버마스의 철학을 했습니다.

여러분, 쌍용자동차 사태 아시죠? 장부조작해서 부채비율을 168%에서 561%로 돌려서 2046명의 해고자를 재무구조 악화됐다고 잘라버리고 그 다음에 상하이 자동차 기술, 하이브리드 기술, 국가에서 돈 주고 한 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리고 기업합병(M&A)해서 팔아넘기고 투자자는 이익보고 그리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다 쫓겨나오고 심지어 쌍용자동차 2046명만 쫓겨난 게 아니고 거기에 하청업자까지 숫자까지 계산하면 수만 명이 다 해고가 된 거예요. 그 해고할 때 77일 동안 파업할 때 그때 조 현호 검찰총장이 나서서 강제로 했고 검찰총장이 됐고 거기에 엉터리 재무구조에 의해서 해고를 인정해줬던 그 법관은 대법관이 돼 버리고 전부 다 주체해버리고, 해고해버렸는데.

하버마스 철학에서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거기는 결국은 이 공간이라 하는 것은 순찰 자가 없이 결국 인간들만 있는 공간이다. 이것만큼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자. 하면서 시작되는 거예요.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 지성적인 그런 것은 없다고 본다 이 말이죠.

하지만 여기서 뭐가 일어났습니까? 22명 죽었죠? 22명 화병으로 자살해서 죽었잖아요. 죽음이 있더란 말이죠. 결국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난 뒤에 그것을 한약 짜는 것, 천을 이렇게 막대기로 싸서 비틀어 짜는 것, 한약을 짤 때 짜야 나오잖아요? 하나님은 죽음을 짜내는 거예요. 죽음을!! 그 뒤에 창세기 4장에 보면 누구 피를 짜냈습니까? 아벨의 구원 피를 짜내는 거예요. 짜내고 주님께서 ‘짝짝짝’ 잘했다 하시죠. 짜내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아까 유튜브 두 번째 했죠? 마태복음 5장 12절 보면 복이 뭐예요? 만약 내 공간 내 영역이 있다면 챙기는 게 복입니다. ‘요기까지는 니꺼, 여기까지는 손대지 마. 내꺼.’ 그럼 축복이라 하는 것은 그 내꺼 가진 것으로 내가 생존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더 끌어 모아야 되고, 더 확장해야 되고, 더 쟁여야 되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 5장 12절에 보면 복은 뭐던가요? 복음과 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그것이 뭐다? 복이다. 복 나왔잖아요. 스데반 집사가 복이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하고 돌멩이 날아와서 돌멩이가 스티로폴 같으면 맞아도 튕기고 괜찮은데 진짜 돌멩이예요. 하나님은 봐주는 것도 없어요. 뭐 대역 쓰는 것도 없고 엑스트라 대역도 안 쓰고 이건 진짜 때리니까 진짜 주연급 배우가 죽어버렸어요. 그걸 보고 주님께서 일어나서 ‘짝짝짝’ 꼭 김일성 박수치듯이 ‘짝짝짝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굿! 잘했어. 어서 오너라.’ 하고 스데반 집사는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알았어. 용서해 줄게.’

이게 뭐냐 하면 가상의 세계에 가려져 있던 진짜 현실은 뭐를 짜내야 갈 수 있다? 피를 짝짝 짜낼 때 피를 매개체로 해서 가상의 세계와 현실 세계는 구분 되는 겁니다. 이게 언약입니다. 제가 지난주일 오후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상식 같으면 교회 가서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 ‘야, 믿음 좋다. 정말 너 잘 믿는구나.’ 하는데, 믿음이냐, 아니냐의 그 설비 장치를 누가 정해줍니까? 우리가 ‘믿습니다.’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믿음의 장치를 만들죠. 그 만든 장치가 뭐냐 하면 ‘니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 데리고 오고, 칼 준비하고, 그 다음에 바치는 거 준비하고 니 제일 사랑하는 아들 데리고 불쏘시개 가지고 모리아 산에 오너라.’ ‘왜요?’ 내가 믿음이란 이런 거라고 내가 정해 놓은 장치에 의해서 합당해야 그게 믿음이 되기 때문에. 우리 같으면 그거 안 하고 그 아들 죽이는 대신 교회 가서 철야 하면서 ‘믿습니다.’ 1000번 하면 그걸로 대충 때워주면 참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니가 가장 사랑하는 것, 정말 걔 없으면 니가 자살하고 싶은 것, 고거, 그거 없으면 자살하고 싶은 그게 뭘까요?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었습니다. 그건 더 천명하죠.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자식은 나보다 더 소중하잖아요. 자식의 DNA에 내 DNA 50%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엄마한테 받았지만 50%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기적인 유전 법 보면 거기 계산법이 나와 있는데. 최소한 25%라고 보게 되면 난 안 죽었어요. 자식이 살아있다면 나는 살아있는 거예요. 만약에 자식이 죽어버리면 아휴, 나는 DNA가 죽어버리고 그러면 나는 뭐냐, 대가 끊어지죠. 그 대가 끊어지는 것이 한약 짜서 피, 단절을 보여주는 것, 너는 어떤 경우라도 너의 공간에서 못 벗어나고 죽어야 벗어나요. 그렇다고 자살하면 안 돼요. 자살하지 말고 주께서 죽으라는 자리가 있어요. 고 자리에 엮어져서 죽어버리면 너는 너의 생명 말고 흙에 속한 생명 말고 하늘에 속한 생명을 받기 때문에 영생을 받게 됩니다.

그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게 뭐냐, 고마운 하나님께서 뭘 주셨느냐 하면 율법을 주셨어요. 율법은 율법이 없이 죽은 것은 그냥 헐떡거리는 숨이 약해서 죽은 거지만, 율법이 있어서 죽어버리면 죽는 이유 알고 죽게 돼요. 아, 그게 또 율법의 좋은 점이라. 율법을 주니까 뭐한다? 입을 막고 율법이 우리를 저주케 하죠. 율법을 지킬 인간 없으니까. 그러니까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를 알고 죽으면 그게 영생이라. 그게 바로 믿음 이예요. 율법에 의하면 ‘내가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그걸 아는 게 영생 이예요. 그게 이미 구원은 개시됐습니다.

이미 그 작업이 우리 속에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약 적으로 아들로서 대우받고 있다는 거예요. 언약이 오게 되면, 아들이 아들로서 대우받게 됩니다. 그러면 진짜 아들 예수님이 이루었던 것이 언약을 통해서, 파이프를 통해서 우리한테 전부 다 주어져서 우리가 아들도 될 수 없는 것이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 영을 받아서 양자의 역할로서, 자격으로서 아들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구약에서 이런 용어가 어려워요. 상급 또는 기업이라고 해요. 이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상속, 유산이라 하는데 그냥 유산, 상속이 아니고 이건 뭐냐 하면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해야 돼요. 뭐냐 하면 아들에게 상속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 만드는 자에게만 상속하는 거예요. ‘나 아들입니다.’해서 주는 게 아니고 ‘까불지 마, 니는 내 아들 아니야.’ 아들은 제치고 아들 되게 만드는 작업에 말려든 사람에게만 상속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한 푼도 못 가져가고 에서도 한 푼도 못 가져가죠. 그럼 몽땅 누가 다 가져갑니까? 둘째 아들 야곱이 다 가져가죠. 왜, 야곱은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에서는 지가 태어났다는 그것을 자기 공간이라고 여겼지만, 야곱의 맏이 되는 공간은 자기한테 없어요. 자기는 항상 2인자고, 항상 둘째예요. 둘째가 차지하는 복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야곱을 죽여서 이스라엘 만들어서 이스라엘이 에서를 제치고 맏이 되면 되겠죠. 이스라엘이 누구냐? 예수님이 이스라엘 이예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고 야곱은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이라서 예수님이 가졌던 그 아브라함의 복을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축복이라는 겁니다. 그게 스데반 집사가 갔던 축복.

성경은 모든 전체 내용이 나 여기 있는데 뭐 챙기느냐,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자기 공간이 확보돼 있기 때문에 이것은 저주가 주어져요. 내 공간이 확보돼 있으면 안 됩니다. 내 공간의 경계선은 허물어져야 돼요.

이 어려운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쉽게 하려고 쓴 글이 아까 쌍용자동차와 하버마스 철학에서 세 번째 복음 글에 나와요. 뭐냐 하면 성경 세계 속에는 죽어야 들어간다. 죽어야 갈 수 있지, 산 채로 가버리면 성경을 기웃거리고 있는 거예요. 성경 본문에 어디 있더라. 기웃거리기만 하지, 성경 세계 속에 풍덩 뛰어드는 것은 죽어야 되는데 자살해도 되지 않아요. 그것도 써놨어요. 베드로가 자살한다 할 때 ‘아서라 말아라.’ 했잖아요. 자살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죽여주는 출구가 있어요. 고 방식에 따라서 죽었을 때만 비로소 그 사람은 말씀의 세계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전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요한계시록 할 때 플라스틱 장식품에 보면 여기 조그만 물고기도 있고 상어초도 있고 플라스틱으로 딱 굳어져서 장식품 있죠. 쉽게 하면 거울 속이라 하죠. 거울 속에 무슨 수로 들어갑니까? 우리가 거울 속에 못 들어가죠. 들어갈 수가 없죠. 육으로 난 것은 거울 속에 못 들어갑니다. 거울 속에 들어갔다가 튀어 나왔다가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죠.

그게 안 되는 이유를 아는 자만이 그가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 이예요. 천국은 예수님이 계시는 나라기 때문에 말씀이 완성되지 않은 사람은 그 속에 못 들어갑니다. 완벽한 의인이 아니면, 예수님 같이 완벽한 의인이 아니면 아무도 못 들어가요.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처럼 완벽한 의인이 될 수가 없고 오히려 완벽한 죄인들만 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피를 주셔서 자기 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 말은 결국은 주께서 우리를 이 안의 세계로 이미 신분상 고정시켜 놔버렸다. 이제는 여기서 들어가는 것도 내 맘대로 못 들어갔지만, 이건 나오는 것도 빼도 박도 못해. 조져놨어요. 우리는 구차 없이 천국에 가야 돼요. 가기 싫은데 가야 돼요. 가면 심심할 텐데, 그래도 가야 돼요. 지루할 텐데 그래도 가야 돼요.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보고, ‘아브라함님’ ‘왜요?’ ‘저 면회 갔다 오겠습니다.’ ‘어디?’ ‘지옥에’ 지옥에는 면회 안 됩니다. 군대는 돼요. 교도소도 가끔 되는데 지옥은 면회도 안 돼요. 면회하면 몰래 손수건에 물 적시어서 갖다 주니까, 사회 인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사람이 자기한테 구박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면 그때 자기 의는 업 되죠. 미워하는 남편을 오히려 더 석고대죄하면 아! 하는 의로운 게 있잖아요. 얼마나 멋있습니까? 권사님 말씀 잘해줘서 주일날 잘 써먹었습니다.

지옥에는 면회가 안 된다니까요. 그러니 지금 친하게 잘 지내세요. 마지막 얼굴이라. 이제 헤어지면 못 만나요. 왜냐하면 마이클 잭슨이 죽기 전에 췄던 춤이 뭐냐 하면 이런 춤 이예요. 특수 신발 신고 처음에는 뒤로 걷는 것부터 하지만 앞으로 넘어질 듯해도 분명히 넘어져야 되는데도 특수한 신발을 신어서 안 넘어지고, 춤 봤습니까? 마이클 잭슨 춤추는데 요렇게 기울어지는 거예요. 기울어져도 너~무 기울어졌어. 엄청 기울어졌는데 안 넘어가요.

우리 성도가 그래요. 분명히 이건 죄짓고 지옥에 가야 되는데 이게 안 넘어가는 거예요. 왜, 뿌리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뽑히질 않아요. 우리 맘대로 양말 벗고 신발 벗고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아~무리 죄를 져도 지옥에 갈 수가 없어요. 이게 언약 적 사고방식 이예요.

언약이 빠져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예수 믿어도 혹시 안 믿게 되면 지옥 갈 거야.’ 이게 바로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마지막 함정입니다. ‘니가 과거에 예수 믿었어도 지금 벌써 예수 안 믿잖아. 그러니까 니는 지옥 가는 거야.’ 이게 악마의 마지막 함정 이예요. 악마는 언약을 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을 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언약을 빼고 이야기하다 보니까 모든 행위의 주체는 나 이외는 달리 행위 주체는 없어요.

그런데 언약이 돼 버리면 우리는 말려든 거예요. 행위 주체가 누굽니까? 나를 나 되게 하시는 행위가 있잖아요.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우린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지? 그거만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인생사는 거 편하죠? 얼마나 편합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날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말이죠.

여기서 뭐냐 하면 다양성인데, 많은 다양성을 유발해도 결국은 그것이 중심이 되는 예수님 중심으로 가게 돼 있다 이 말이죠. 모세가 엘리아가 아니고 엘리아가 모세가 아니죠? 하지만 구세주는 누구다? 둘 다 이구동성으로 ‘예수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라고 예수님 죽으심에 대해서 변화 산에서 이야기했잖아요. 모세가 엘리아가 아니고 엘리아가 모세가 아닙니다. 따로 있지만 그들의 중심은 뭐였다? 예수님이었죠.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발, 손 뭐라 하지만 우리는 손 있고 발 있고 다 다르지만 한 성령을 마시고 오직 주님만 고백하게 된다고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하고 그 뒤에 나온 이야기가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누가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 잘났다.’라는 자체가 이게 성사가 안 돼요.

왜냐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가는 게 아니고, 인간이 어디 거쳐서 가다 보면 이미 예수님을 거쳐서 이미 나는 죄인으로 가기 때문에 ‘어! 나는 죄인인데, 어, 당신도 죄인이야? 우리 둘 다 예수님 아니면 희망 없겠네.’ 이럴 때 이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느부갓네살 같은 짐승을 벗어난 거예요. 짐승은 세계에 중심에 있지만 그게 짐승으로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있는 거죠. 짐승은 이게 관계가 끊어져 있고 우리는 주님을 거쳐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의 원리는 어떠냐. 세상의 공간원리를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기리고차‘라는 게 있어요. 발명품인데 발명품 년도는 지금부터 600년 전 1400년 경 장영실이라는 사람이 기리고차라는 걸 발명했어요. 기리고차는 뭐를 하느냐 하면 말 그대로 하면 쉬워요. 길이를 재는 차. 태코미터라는 게 택시마다 있어서 특히 밤에 타면 말 잘~ 달리죠. 미터기 올라가는. 태코미터의 원리가 600년 전에 장영실에 의해서 이미 실제로 만들어졌어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수레가 있고 여기 종이 있고 북이 있고 거기에 두 개의 톱니바퀴가 있어요. 수레가 1800회전을 하게 되면 연결된 톱니바퀴 하나가 150회 회전되고 뒤에도 또 150회 회전되면 뒤에는 1회 회전이 되고, 이 원리가 뭐냐 하면 수레가 1800회 회전하면 2킬로미터인가 돼요. 이게 한번 돌 때마다 종이 한번 땡 쳐서 이건 수레 달리면서 거리 측정하는 걸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택시 탈 때 바퀴가 큰 걸 타야 요금이 적게 나와요. 회전수와 관계되기 때문에. 작은 차타지 말고 바퀴 큰 걸 타는 게 요금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지금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보세요. 1회가 여러 개 모이면 북을 한 번 쳐서 전체 숫자를 아는데 장영실 이 사람 똑똑한 사람 이예요. 이 사람이 물시계를 세계 최초로 만든 사람인데. 이게 숫자 1이 여기 1800회전하잖아요. 그럼 뭐만 하면 됩니까? 1800에다 톱니바퀴 2개지만 여기다가 열댓 개를 놔버리면 이건 바로 공간분할이 되겠죠. 세분화 되겠죠. 이게 과학이고 합리화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상에서 천국까지 어떻게 올라가죠? 계속해서 천국은 1이니까, 유일자이니까, 하나밖에 없으니까 이게 다양성 아닙니까? 다양성을 계속 서열화 시키고 계급화 시키는 거예요. 대표 뽑아요. 대표는 성직자, 성직자의 대표를 또 뽑는 거예요. 또 뽑고 또 뽑고, 제일 마지막에 있는 사람이 땡~ 하고 하나님의 천국에 있는 종을 치면 되겠죠? 이것이 바로 인간세계, 인간들이 만든 우리들끼리의 인간 공간의 원리고 법칙입니다. 과학입니다. 합리화입니다. 모든 학문이고 이게 또 사업이 되겠죠. 고객들에게 회사가 더 세밀하고 친절하고 에프터 서비스가 더 완벽하게 갖춰지게 되면 나중에 종을 땡 치게 되죠. 그래서 진리라 하는 것은 아무리 진리가 있다 할지라도 인간 쪽에서 다가서면 아무리 태산이 높다 하되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는 그 정신, 세 글자로 바 벨 탑! 이것이 바벨탑과 그리고 다니엘의 만남.

공간이라 하는 것은 하늘의 인물이 만들지, 너희들이라는 인물이라는 집합체로서 이 세상은 내가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느부갓네살 안에 누가 포로 잡혀 있습니까? 이스라엘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게 얼마나 재밌는 일입니까? 옛날 이스라엘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다. 언약을 받았다. 율법을 받았다. 우리의 모세는 직접 하나님께 십계명 받았다. 이걸 하나님 여기 계시고 여기 시내 산 있다면 여기의 대표자가 누굽니까? 모세가 올라가서 종을 땡! 친다고 본 거죠. 그러니까 백성들이 어려움만 있으면 누구한테 달려옵니까? ‘모세야,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라. 모세야 우리를 위해서 기도 해라.’ 만날 이렇게 기도했다 이 말이죠. 심지어 예레미야도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사람들은 자꾸 예레미야한테 가서 ‘예레미야야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라. 예레미야야 하나님의 계시가 뭐냐.’ 그들은 이러한 모든 바벨탑에서 출발했던 이 자체가 자기 자신이 그런 권리가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한테서 내려오는 것이고 그것도 어떤 모습으로? 핍박받는 모습, 아벨처럼 피를 짜는, 피 흘리는 모습으로 왔는데 이걸 모르고 사람들은 어떤 하나의 체계를 갖추어서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경건하고, 경건하고, 훌륭하고, 훌륭하고, 계시 받은 사람이 올라가서 결국 하나님 나라의 종을 땡! 하고 종을 칠 수 있다는 이 의식, 지금도 교회가 그 짓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이제는 그것은 무너져야 되고 부서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짐승 적 사고방식이고 이런 사고방식 가지고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본 겁니다.

결국은 느부갓네살을 여기다 세움으로서 이것이 여러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결국은 한 인물(人物(덧말:인물)) 이라는 것, 인물이고 여기에 마중 나오셔서 ‘에라이’ 하고 ‘전부 다 짐승이야’ 하고 심판하는 것도 한 인물이고. 그래서 숨어있는 순찰 자, 숨어있는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로 꿈을 꾸게 하셨고 꿈의 해석을 바벨론에 포로 잡힌 다니엘로 하여금 이 꿈을 풀게 함으로 말미암아 다니엘의 노선이 이쪽 올라가는 노선이 아니고, 다니엘은 내려오는 노선, 다른 노선이 이미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진짜 현실을 아는 사람이고,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그냥 가상세계의 꿈꾸는 그런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이 세상에서는 유용하게 보이지만 어느새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 쪽으로 내려오시는 분을 잊게 만들고, 잊어버리게 만드는 그러한 훼방의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염두에 둬야 돼요. 뭐가 잘 될 때 혹시 내가 교만하지 않은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조선시대의 거리측정장치 기리고차**

기리고차는 일정한 거리를 가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는 조선시대의 반자동 거리측정 수레이다. 장영실(蔣英實)은 왕명을 받아 중국에 유학하며 기술을 배워서 기리고차를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개량하였다. 세종 때 각도 각읍 간의 거리를 조사하여 지도를 작성하는데 기리고차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문종 1년 지금의 서울 강남구 지역의 제방공사를 시작함에 앞서 그 거리를 기리고차를 이용하여 재었다는 기록이 있어 토목공사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측량 및 지도 작성 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 측정이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자나 막대기를 가지고 재는 척측법이나 발자국으로 재는 보측법을 이용하였다. 이후에는 약간 더 발전된 승량지법을 사용하였는데 초기에는 새끼줄로 측량을 했고 후기에는 새끼줄이 신축성이 많아서 노끈이나 먹줄 등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오차가 많아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척(尺), 보(步), 리(里)를 주로 사용하였다. 흔히 쓰는 자는 일반적으로 주척(周尺)을 썼다. 주척의 단위는 ‘6척을 1보, 360보를 1리’라 하여 3,600보를 10리(약 4㎞)로 나타냈다.

조선시대에 거리를 측정하던 장치. 반자동이며 수레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중국으로 유학을 간 장영실이 이전의 중국에 있었던 거리 측정장치를 조선에 들여와 개량하여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수레가 1/2리를 가면 종을 1번 치게 하고 수레가 1리를 갔을 때에는 종이 여러 번 울리게 하였으며, 수레가 5리를 가면 북을 올리게 하고 10리를 갔을 때는 북이 여러 번 울리게 하였다. 마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렇게 들리는 종과 북소리의 횟수를 기록하여 거리를 측정하였다. 국립과천과학관에 옛 문헌을 토대로 복원된 기리고차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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