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2. 9. 21) 2강 녹취록
광주 강의(2012. 9. 21) 2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4.44.106.224)
광주 강의(2012. 9. 21) 34-2
“인간이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죄가 용서된다면 저는 그 구원 작업에서 손 떼렵니다. 목자가 훌륭하셔서 모든 것을 다 하셨으니까 저는 할 일이 없네요.” 라고 할 때, 주님은 “내가 구원한다는 것이 너에게 공포가 되느냐?”라고 묻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거예요. 예수님은 구름타고 오실 분이니까.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니까. 예수님 당시에 몇 개의 파들이 있었지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쿰란 공동체, 열심 당원 등등. 그 파 중의 하나가 나사렛파가 있어요.
나사렛파는 나사렛 예수를 믿는 무리들입니다. 좀 이상하죠? 그러면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안 믿는 유대인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바로 나사렛파인 동시에 이단의 괴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파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 나사렛파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로마가 유다를 칠 때 패트라라는 지역에 피신을 했어요.
패트라에 피신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데, “마지막 때가 되거든 산으로 피신하라.” 그럴 때 다른 파들은 뭘 했는가? 다른 파들은 로마와 맹렬하게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에 의지해서 패트라에 살다가 몰살당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진짜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이겠어요? 그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들이 자신들이 이미 짜놓은 판, ‘메시아는 이러이러해야 하고, 우리나라는 이렇게 하면 구원 받는다’는 판을 스스로 부정하지 않지요. 그 판에다 젓가락만 하나 놓았을 뿐이지요.
우리의 짜놓은 판은 정상이지만 여기에서 빠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만 첨가하면 온전해 진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산으로 피신하면 천국 백성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기에서 뭐가 문제입니까? 그 판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본인이 수용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셨으니까 우리는 그냥 구원 작업에 가담하지 말고 열매만 따겠습니다. 라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내장되어 있던 본질의 판이, 그 판 자체를 안 건드리고 거기다 젓가락 놓듯이 십자가 피로 구원이라는 것은 첨가해서 화룡점정, 그림의 마지막 부분을 짜 맞춘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면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에스겔 34장 24절입니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러분들이 이 성경구절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는 이렇게 보여요. 치매 걸린 노인이 집에 가만히 있으면 그나마 고맙지요. 그런데 이 노인이 지팡이 집고 돌아다니면 온 식구가 찾아 나서느라 생업에 지장을 받고 난감합니다. 설치면 곤란하지요? 그런데 24절 말씀을 보니까 지금 누가 설친단 말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직접 설치지요.
하나님이 직접 설치다면 이 하나님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럴 분이 아니지요. 실 가는데 바늘가지요. 목자가 가는데 양이 따르겠지요. 누가복음 15장 보세요. 분명히 양 있는 곳에 목자가 있고, 목자가 있는 곳에 양이 있지요. 그러면 목자가 설치면 어쩔 수 없이 양이 따라다녀야지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주님이 직접 나서서 설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죽었어요. 우리 마음대로 못해요. 목자가 설치는데 양이 가만히 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는 겁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제 뭘 알면 됩니까? 양이 말 안 듣는 양이지요. 이미 목자를 버린 양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선한 목자가 왔다고 해서 그 양이 목자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턱이 없지요. 그래서 양은 제 갈 길로 가지요. 그럴 때 진짜 목자가 원하는 양이라면 끝까지 찾아가서 데리고 오겠지요.
그러면 성도가 해야 할 일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냥 노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항상 잘못된 선택을 하는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요? 우리의 늘 잘못된 선택을 하는데, 그 잘못된 선택을 죽는 날까지 계속 해야 됩니다.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 주님에 대한 오해. 이 숙제를 우리는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숙제를 하면서 힘들어요. 힘들지만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은, 우리는 늘 잘못된 선택을 하기에 우리에게는 전혀 기대할 것이 없다는 점에서 뭔가 홀가분하지요.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면, ‘내가 어떻게 하면 어린이들을 바르게 교육해서 이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를 키우지?’ 라고 생각하고 교단에 서지만 뒤돌아보면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라.
아이의 생각도 모르고, 그의 환경도 모르면서 내 나름대로 그에게 필요한 것으로 그를 교육하고 사랑을 쏟아 부었지만 아이는 그것은 역이용해서 점점 더 엇길로 갑니다. 이럴 때는 [천사의 천택](아침 TV드라마)을 하면 됩니다. 천사의 선택은 우리가 잘 하는 대로 선택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악마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늘 악마의 선택을 하는데, 이 잘못된 선택을 천사의 선택으로 바꾸는 작업을 목자가 함으로써 그 목자 없이는 내가 악마의 종인 것을 밝혀내지 못하기에 우리는 목자의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합니다.
“제가 어째서 죄인인데요? 제 선택이 왜 잘못된 선택입니까?” 따라다니면서 물어야 해요. 교회 올 때마다 “제가 어떤 점에서 죽어야 마땅한 죄인입니까?” 이런 식으로 나와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왜냐? 사람들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 즐기고 싶은 것만 선택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것을 묻는다는 것이 이상하지요.
옛날에 제가 기존 교회 다닐 때 성경 외우기 대회를 했어요. 로마서 8장을 다 외웠는데 상품을 받았어요. 제가 1등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잘 못하겠는데, 상을 받고 보니 “야, 교회 다니는 맛이 바로 이 맛이구나!”하는 것을 느꼈어요. 제가 어디에 가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대우를 받겠습니까? 평생 상장 한 번 못 받은 제가.
그런데 교회에서 로마서 8장을 틀리지 않고 다 외울 때에 봉화00교회 그 교인들이 박수쳐주고 목사에게 칭찬 받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바로 사람들이 자긍심을 위해서 교회에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목사의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교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그런 것만 잘 챙기면 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전부 잘 하는 선택을 하게 되면 목자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을 이유가 없어요. 한 번 죽고 난 뒤에는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놓듯 ‘주님이 내 죄 위해 죽었다’는 이것만 상에 얹어놓고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그 이후에는 자기 잘 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개혁주의 신학을 믿는 교회의 실상입니다.
세상은 성과주의입니다. 그 사람의 성과를 가지고 미래를 측정하는 것이 모든 직장, 모든 사회에 통용됩니다. 학교든 병원이든 백화점이든 모두가 성과주의입니다. 이 성과주의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천국에 대해 이야기 할게. 아침 10시에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에 온 사람도 있어. 오후 5시에 온 사람도 있어. 이들 중 누가 가장 천국을 잘 보여주었는가?” 오후 5시에 온 사람이지요.
그러면 아침 10시에 온 사람이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뭘 아십니까? 이 세상이 성과주의, 자기 존재 가치와 다른 사람의 가치를 비교해서 우열을 나누는 곳인 줄 아시고 이것이 바로 천국과 반대되는 지옥의 모습이란 것입니다.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지옥 갈 사람으로 지금 이 세상에서 훈련받고 있습니다. 마귀에 의해서. 그런데 그 훈련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네 모습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때의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목자의 목자 됨을 위해서 우리는 전혀 고칠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 죽으신 목자 앞에 다 비치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목자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주님이 양으로 선택하신 이것이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취하셨을까요? 1) 거룩한 생활을 하고 금욕적으로 악한 것을 버린다. 2) 최상의 것에서 최악의 것을 추려내는 방식으로 거룩을 유지한다. 3) 영적으로 시선이 고정되었기에 불결한 것에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거뜬히 이겨낸다. 이 셋 중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정답은 이 셋 중에는 없습니다.
그럼 정답은 뭡니까? 간단합니다. ‘죽음’입니다. “주여, 1번으로 할까요?” “너는 죽었어.” “주여, 2번으로 할까요?” “너는 죽었어.” “그럼 3번으로?” “너는 죽었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다 못하면? “죽었어.” 그럼 다 하면? “그것도 죽었어.” 결국 정답은 뭐냐?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원 받아요.
우리는 안 죽고 싶어도 예수님 죽음 속에 이미 우리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인감 도장’이라고 합니다. 이마에 새기는 인(도장). 지금 도장에는 이름을 새기잖아요. 옛날 도장은 그 보증하는 권세자의 얼굴이 새겨집니다. 로마의 모든 도장에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마에 예수님의 인을 박았고, 불신자에게는 악마의 도장이 있다고 했지요. 유대인 같으면 이 말씀 듣고 바쁠 겁니다. 길 가는 사람 붙들어놓고 “아가씨, 이마 잠시 보겠습니다. 어, 없네.” 이마에 아무 것도 없으면 요한계시록이 틀린 것이잖아요.
나에게 그리스도의 인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만, 성경대로 하면 불신자에게는 악마의 인, 666이 있다든지 뭔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마에 아무 것도 안 보이면 성경이 틀린 것입니까? 이 모습은 성경을 젖혀두고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 보니까 성경이 엉터리인 거예요.
이 말은 뭔가 하면, “원래 내 판단은 옳아!” 라고 지정해 놓고 “성경은 내 판단에 따라 평가할거야!”라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돼요. 자,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다윗이 오게 되어 있지요. 분명히 다윗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왔습니까, 예수님이 왔습니까? 다윗이 온 게 아니고 예수님이 왔습니다. 다윗은 무덤에서 흙으로 변해 없어졌어요.
그런데 에스겔 34장 23절에 보면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그분이잖아요. ‘그분이 다시 오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지요.
만약 친구 이름이 ‘정식’이라면 “정식아!”라고 부르면 그 정식이 정식이지 다른 정식이 있습니까? 엄중하신 하나님이 ‘다윗이 온다.’고 했으면 다윗이 와야 되잖아요. 결국은 다윗이 다윗으로 옴으로 우리들이 알았던 그 선입견, 우리들의 해석 자체가 새로운 다윗에 의해서, 옛날 다윗이라고 여겼던 사고방식 자체가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불신자마다 이마에 도장이 찍혔다.’고 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도장은 찍게 되면 표면에 뭔가가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에 다니는 사람의 이마를 아무리 살펴봐다 도장 찍은 흔적이 없단 말이지요. 그러면 누가 틀렸단 말입니까? 성경에 틀렸든지 우리가 틀렸든지 해야 되는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가 맞다고 우기는 그것이 맞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성경 해석을 잘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해석 잘못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오기가 있어서 “제대로 해 볼게요.”라고 하고, “제대로 해 보겠다는 그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쩌라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는다니까.” 이제 이해되지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는 것을 우리는 그 피를 내 소유로 만들어야 안심을 하겠다는 그 사고방식은 옛 사람이 갖고 있던 구원 방식, 종교적인 품성입니다.
2,000년 모든 신학이 로고스에서 다 나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이 잘못된 선택을 죽을 때까지 계속 하면 됩니다. “하면 된다고 해서 하긴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해서 구원 못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혹시 구원 안 되면 어쩌지?’ 라는 것은 내 몸 안에 빙빙 돌고 있는 내 시간을 믿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는 거예요. 예수의 영이 안 오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내 상에 차려진 다 이루심으로 변경해서 믿고 싶은 거예요. 신학화 시키고 문서화 시켜서. 바다에다 글씨를 써 보세요. 바다에다 먹물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쓰도 물결이 일렁이면 글씨는 사라집니다. 심지어 해변의 모래위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쓰도 파도가 밀려오면 글씨는 없어집니다.
인간은 내가 어느 정도로 나쁜 사람인지 몰라요. 항상 근사한 나만 상상하니까.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얼마나 추한 죄인인지 도무지 상상을 못해요. 욥도 상상을 못했어요. 내가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당할 대로 다 당해서 주님께 원망할 만도 한데 재를 뒤집어쓰고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겠어요? 주님이 목자이기 때문에 양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왜? 죽으라고. 죽음이 뭐냐?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그 저주의 죽음에 우리를 동참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내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노라. 이 말을 알아듣는 것은 내 양이고, 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내 양이 아니니까 그들은 나를 목자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내 양을 알기에 아무도 나에게서 내 양을 빼앗아갈 권세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누가 아는가? 놀랍게도 양이 안다는 겁니다. 양이 알기에 그 양이 어떤 양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같으면 예수를 포기할 만한 상황으로 주께서 몰고 가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주님이 뒤에서 목을 졸라요. 십자가에 죽게 되면 온유, 화평, 자비가 막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알 때 어떤 열매가 맺히는가? 우선 프로이드와 라캉 이야기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라캉은 프로이드의 제자니까 유사한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의 욕망 문제입니다. 인간의 욕망, 꿈같은 것은 인간이 다룰 수 없잖아요. 오늘 밤에 이런 꿈을 꾸겠다고 다짐해도 소용없어요. 왜냐? 깨어있을 때는 이런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잠이 들면 내가 관여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미 꿈꾼 것을 내가 취소할 수도 없어요.
꿈은 내 말을 안 듣습니다. 내 말 안 듣는 것이 나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프로이드에게는 놀라운 겁니다. “야, 이거 주인이 따로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지요. 나보다 더 쌘 괴물이 내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어쩌면 그 괴물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지 외부적으로 나타난 모습은 흥정과 타협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정신병자를 치료하면서.
이런 접근으로 치료가 되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거예요. 만약 치료가 안 되면 이런 소리를 못하겠지요. 치료방법은 간단합니다. 무엇 무엇인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인이고, ‘나는 이것이다.’ 라고 밀어붙이면 정신병자입니다. 이게 치료방법입니다. 남들이 가면 쓰고 사니까 너도 가면 쓰고 살아야지, 남들은 다 가면을 쓰는데 자기는 그 가면을 벗으면 그것이 정신병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 이것이 정상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었다.’ 이러면 그것이 정신병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4대 성자 중 한 분이다.’ 이러면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치료입니까? 치료가 아니고 대세를 따라가도록 한 거예요.
정신병은 병이 아니고 소수자에 해당되는 것을 병으로 규정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회는 분업화 되어서 서로 같은 취지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제대로 된 제품이 생산되고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정신병자란 대다수가 정신병자가 아닌 것을 전제로 그 대다수에 합류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자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정신병과 신경병은 달라요. 신경병은 두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신병은 그것이 아니고 다수에 합류하지 못한 소수자가 정신병입니다.
어찌했건 병이니까, 사회에 기여를 못하니까 이것은 문제이지요. 그런데 그 정신병 속에서 우리가 감추고 있던 실체가 드러나는 거죠. 그것이 욕망인데, 그것을 조사해 보니까 물리적으로 아빠와 엄마에게서 나왔다고 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프로이드는 자신만만하게 주장합니다.
아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잖아요.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까지의 그 기간에 미성숙한 그의 정신세계에 누가 깊숙이 관여했는가를 보는 겁니다. 누가 관여했겠어요? 부모지요. 그러면 이 아이가 성장할 때의 모든 환경은 부모가 조성한 그 세계에 그냥 적응한 것뿐이죠.
그런데 엄마, 아빠는 둘 다 여자가 아니고, 둘 다 남자가 아닙니다. 아빠에게는 부성이 엄마에게는 모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의 정신은 부성과 모성이 어떻게 타협점을 찾아서 현재의 나를 이루었는가를 보면 여기에서 해답이 나오는 거지요. 장성한 사람에게는 부모가 관여를 안 하지요. 그렇지만 어릴 때의 과거가 누적되어 있어서 어디로 날아가지 않고 남아서 꿈의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꿈을 분석한다는 것은 그 밑바탕에 아빠, 엄마에게 들은 것을 실재로 오늘날 자기가 사회에 나가서 경험했던 것과 합해서 다루는 방법에서 아빠, 엄마를 통해 가정교육 받은 것과 자신이 사회에 나가 경험한 세계 사이에서 그냥 다루는 것이 아니고 각각 살아온 가정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다른 것을 드러내는 그것이 사회적 삶이 되지만 밤에는 꿈을 통해서 자기의 억압된 것이 막 폭발하는 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 물리적 방법의 설명입니다.
두 번째는 죽음에 대한 충동입니다. 이것은 아빠, 엄마와 관계없어요. 이상하게 사람에게는 죽음의 충동이 있더란 말이죠. 뭔가 모르게 허무하고, 내가 왜 사는지 막연하고, 살아있으면서 산다는 자체를 테두리 쳐서 그것을 몽땅 부정해보고 싶은 그런 충동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모든 동물들의 특성으로 타고난 것이라고 합니다.
밤에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가 낮에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살아야겠다는 것과 투쟁을 하면서 죽어가는 내가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이야기하는 ‘상징’ 또는 ‘상징어’, 다르게 표현하면 ‘질서’에 순응하고 싶은 욕구로 등장합니다. ‘내가 사장님께 고분고분하면 승진할 수 있겠다.’ 이것.
천사가 아부하는 것 봤습니까? 천사는 안 죽기에 아부할 필요가 없어요. “죽이지 마세요.” 이런 것 없잖아요. “살려주세요!” 한다는 것은 평소에 “죽으면 안 돼!” 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이미 기존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언어와 질서와 권력에 고개 숙이고 힘들지만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뭐냐? 상징과 꿈에 나오는 물리적인 부모로부터 받은 욕망, 상징 두 가지가 된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뭐냐? 주체 또는 주체성, 자아의 정체성이 여기서 발생됩니다. 이런 것이 발달함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에 부합하는 주체성이 멋있게 나왔어요. 자본주의는 성과주의죠? 그리고 경쟁 사회지요? 살아남는 놈만 살아남고 안 될 놈은 안 돼! 구제는 성장의 결과로 나온 것인데, 구제와 성장이 나란히 할 수가 없어요. 한쪽이 돌아가면 뒤에서 빼먹는 열매가 복지지, 둘이 나란히 갈 수가 없단 말이지요.
결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주체를 공고히 하는 자는 살아남고 주체가 흐리멍덩한 자는 남에게 이용당하다가 끝납니다. 전과 25범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재벌 2세면 그렇게 안 되었겠지요. 다 밥먹고 살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밥먹고 살려고 하면 재능이 있어야 되고, 성과를 내야 합니다. 성과도 없는데 인정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점점 더 딱딱해 집니다. 돌멩이처럼 단단해져요.
더불어 사는 것은 없고 전부 자기밖에 없습니다. 요즘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전 세계에 돌풍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나는 이런 스타일이야. 알아줘!” 이거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돈이니까 얼마나 경쟁과 성과에 시달립니까? 특히 지금 청소년들이. 그들이 이런 노래에 탄성을 지르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서기관이 질문합니다. “예수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물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이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이웃을 사랑하면 마치 주체가 있는 것 같지만 ‘나’라는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경과해야할 통로로만 있을 뿐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래도 이웃으로 흘러가야 된다.’ 이것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못합니다.
우리 육은 ‘강남 스타일’밖에 모르기 때문에, 육은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못하지요.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의 주체가 죽지요. 죽을 때 이유를 알고 죽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죄인이니까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그 순간 주변에 누가 있든 그것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내가 아니라 사랑해야 될 이웃이 그 순간 말씀에 의해서 떠오르는 겁니다. “어, 당신이 있었네?”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또다시 우리가 사는 시대에 주님 스스로 자기 공로를 증명하는 식으로 우리를 배치하고 사용하십니다. 그럴 때 이웃이 “예수 믿더니만 정말 착합니다.” 이런 소리를 상대가 오해해서 한다면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알려주어야 되겠지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멋진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을 자기가 했다고 해서 본인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이 그런 일을 일으킨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거론하십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살아난다.”고 하시니까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하고 나섰지요. 그 때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이 말의 의미는, “결국 너는 사람일 수밖에 없어.” 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한 말은 너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룰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다윗이 온다’고 할 때, 죽었던 다윗이 그 말을 듣고 “주님, 제가 또 살아납니까? 군대(세상)에서 제대했는데 또 다시 군대생활 하란 말입니까?” 이렇게 나오지 않을 거예요. 이미 한 바퀴 돌면 같은 다윗이란 말을 하더라도 그 다윗이 옛날 다윗이 아니지요.
그러면 옛날 다윗과 전혀 관계없다면 다윗이란 말을 쓰면 안 되잖아요? 어떤 연관성은 있어야 되잖아요?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다윗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잖아요. 언약 맺을 때 부수적인 것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 성전 개념 나오지요, 왕 개념 나오지요, 시온 개념도 나오는데, 이 모든 개념이 다윗과 언약을 하면서 다윗을 대나무 통으로 사용해서 그곳을 통해서 뭐가 쏟아져 나왔습니까? 성전, 왕. 시온 이런 것이 나온 거예요. 거기다 성신까지 나와요. 그 다음에 제사 개념 나옵니다.
다윗이란 사람을 통해서 뭔가 우루루 많이 쏟아졌어요. 다윗은 이것을 실패했잖아요. 다윗은 자기 개인과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했는데, 주님은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주체 개념은 사라지고 ‘우리’라는 개념. 다윗은 자기 자신만 ‘나’라는 말을 쓸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나’라는 말을 쓰면 안 되고, ‘우리’입니다.
‘우리’로 구원 받지 ‘나’로 구원 받는 법은 없어요. ‘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지 우리는 ‘나’를 사용할 수 없어요. 우리의 ‘나’는 십자가와 함께 이미 죽었어요. 그리고 ‘우리’로 다시 태어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와 함께 구원 받을 사람이 누구야?’ 라고 묻지요. ‘내가 너를 전도할까, 말까?’ 이것이 아니고, 고넬료와 베드로는 주님이 각자를 ‘우리’로 만들어서 구원한 거예요. 누가 누구를 구원할 자격은 없어요. 왜? 다들 주체가 아니니까.
“주께서 우리로 만든 그 우리끼리 같이 모입시다.” 뭘 보기 위해서? 우리 서로를 보지 말고 유일하게 ‘나’되시는 분을 바라보기 위해서. 그분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교회의 머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고.
그런데 목사들이 건방지게 자기를 ‘나’로 등장시켜요. 주님은 머리고 자기는 목이라고 해요. 그래서 모든 머리는 목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미친 소리지요. 요한1서 2장에 보면 나오지요.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 이게 이미 다윗을 통해 쏟아진 그 본래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자기 구원을 위해 왕노릇 하면 안 됩니다. 왕이란 개념을 다윗을 통해서 살펴보면, 새로운 왕은 ‘우리’만 만들 뿐이지 ‘나’를 만들지 않는 그런 분으로 오시는데, 왜 그런가? 오직 예수님만 ‘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오셔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찾아 나서는 거예요.
목자는 하나지만 양이 다수가 되는 방법은 ‘이웃’이란 개념을 완성하면서 우리는 그냥 통로로 사용될 뿐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이 괜히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모세, 예레미야, 에스겔이 그냥 우연히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님 증거하라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광주에 저희들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하나됨을 증거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 10. 2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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