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YouTube강의(예수님 시인)121018-이 근호 목사
6강-YouTube강의(예수님 시인)121018-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1.16)
6강-YouTube강의(예수님 시인)121018-이 근호 목사
이제부터 제 6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강의는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 어떤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인가?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마태복음 10장 32절에 보게 되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돼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에 합당한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성경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그냥 골방에 들어앉아서, 또는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단독, 예수님과 단독으로 ‘예수로서 예수님을 인정합니다.‘라는 것을 예수님의 시인으로 보지 않고, 이 본문에 보면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람 앞에서’란 말을 구태여 넣어서 예수님 시인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을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부인 하는 것이 전제로 돼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여기 ‘사람 앞에서‘라 했는데 그 사람들이 자신과 더불어서 예수님을 시인할 것 같으면 구태여 ’사람 앞에서‘라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나 골방에 앉아서 단독으로 하늘을 향하여 ’나 예수님 인정합니다.‘ 하나 별 차이가 없는데 여기 ’사람 앞에서‘라고 이걸 집어넣은 것은 사람들은 원래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런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걸 배경으로 삼으신 겁니다.
사람들이 믿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믿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이건 어디까지나 선별적이고 본인이 그렇게 선택하고 판단해서 선택하는 겁니다. 자기한테 불리하다고 생각하든지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까지 사람들은 믿을 의향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것을 믿고자 할 때는 저걸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느냐를 항상 고려해서 믿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사람들의 이런 속성을 익히 아시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사람들의 속성과 그리고 나, 예수님을 시인하는 너의 속성이 일치되는지 일치되지 않는지를 먼저 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자 하든지, 혹은 하나님을 믿고자 할 때는 절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 하나님을 시인하는 게 아닙니다. 항상 자기를 시인하고 자기를 시인한 상태에서 예수님도 받아들이고 하나님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같은 경우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나를 따를 수 없다“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싶지 않은 것이 어떻게 우리자신 내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나와 똑같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인간은 자기를 불리하게 한다든지 스스로 자기의 보존을 위태롭게 만드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게 돼 있습니다.
구약 성경 미가 3장 5절~6절에 보면 구약 때부터 이미 여호와 이름의 종교라는 게 있습니다. 그 종교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고객들을 모으고 종교 행사나 종교 예배나 집단을 이루는데 있어서 거기에 소위 종교 전문가들, 성직자들이 어떤 식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했느냐 하면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입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인들이 또는 신자들이 교회 올 때 무엇을 원하고 어떤 것을 기대한다는 것을 오늘 날 뿐만이 아니고 옛날 구약에 있는 성직자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축복과 평강을 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 교회 온다든지 성전의 예배에 참석하고 이러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긍정주고 자기를 키워줄 수 있는 목회자, 성직자, 그런 기독교, 그런 천주교, 그런 신을 찾고자 온 겁니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이미 성직자도 교인들이 그런 걸 노린다는 것을 알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선지자에게 뭔가 먹을 것 주고 돈을 부여하면 그들은 축복을 외치고, 평강을 외치고, 신의 자비를 외치고, 그러나 그 입에다 뭘 물려주지 아니하면 저주를 외치고, 전쟁을 선포하고 그들의 미래가 벌 받는다고 이렇게 협박 공갈을 하게 된 겁니다.
이것은 그 당시 거짓 선지자를 욕할 게 아니라 이미 교인들이나 일반 신자들이 오히려 그러한 성직자를 이미 찾고자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런 목회자를 갈구했던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부인하기 싫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37절~38절, 여기에 보면 “누구든지 아들이나 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될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건 ‘나는 지금 당장 십자가 지고 죄인으로서 규정받고 저주받아도 합당합니다.‘라는 경우에만 십자가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내리는 징벌이고 그 징벌은 징벌의 입장에서는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기 부인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입장에 설 때만 우리는 주변의 사람의 시선이나 눈치나 안목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외부의 누구와 거래하든지 누구와 만날 때는 반드시 손해나는 짓은 안하는 법입니다. 반드시 자기한테 어떤 축복이란 이익을 챙길 경우에만 그 교회 헌금을 하고 그 교회 출석을 하는 법입니다. 만약 어떤 교회 갔을 때 ‘당신은 저주받아 합당합니다. 당신에게 축복이라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영생이라는 것은 기대할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습니다.’라고 외쳐버리면 아무도 그 교회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식으로 외쳤던 것이 구약의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과, 진짜 예수님과 성령으로 연결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외치는 것이나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외치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라. 이 말은 저 사람들과 같은 류냐,를 묻는 거예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축복을 기대하고 오는데 자기의 미래의 희망이나 기대, 그리고 자기의 욕망과 욕구의 달성,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자기가 미처 못 하는 것을 수월하게 달성하고자 하는 그런 기대치, 이런 걸 갖고 올 때 과연 그들이 스스로 그들의 생각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긍정하는 것인지를 똑바로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를 시인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궁극적으로 ‘예수님이냐, 나냐’ 할 때 반드시 자기 자신을 선택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미워하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그런 의사는 추호도 없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0장 32절, 33절 말씀은 어떤 인간도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지시고, 십자가 영이 오게 되면 바로 이렇게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한 당사자가 나 자신인 것을,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저주받아도 합당한 인간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닫는 그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말씀대로 만들어내는,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내고 영생의 사람으로 이끄시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주도하시는 대상으로서의 참된 성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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