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6,7) -예수님 시인, 헌금 121018
유튜브강의(6,7) -예수님 시인, 헌금 121018
이름 : 이근호(IP:117.55.1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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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례(IP:203.♡.41.16)
12-10-19 12:58
6강-YouTube강의(예수님 시인)121018-이 근호 목사
이제부터 제 6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강의는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 어떤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인가?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마태복음 10장 32절에 보게 되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돼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에 합당한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성경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그냥 골방에 들어앉아서, 또는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단독, 예수님과 단독으로 ‘예수로서 예수님을 인정합니다.‘라는 것을 예수님의 시인으로 보지 않고, 이 본문에 보면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람 앞에서’란 말을 구태여 넣어서 예수님 시인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을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부인 하는 것이 전제로 돼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여기 ‘사람 앞에서‘라 했는데 그 사람들이 자신과 더불어서 예수님을 시인할 것 같으면 구태여 ’사람 앞에서‘라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나 골방에 앉아서 단독으로 하늘을 향하여 ’나 예수님 인정합니다.‘ 하나 별 차이가 없는데 여기 ’사람 앞에서‘라고 이걸 집어넣은 것은 사람들은 원래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런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걸 배경으로 삼으신 겁니다.
사람들이 믿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믿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이건 어디까지나 선별적이고 본인이 그렇게 선택하고 판단해서 선택하는 겁니다. 자기한테 불리하다고 생각하든지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까지 사람들은 믿을 의향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것을 믿고자 할 때는 저걸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느냐를 항상 고려해서 믿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사람들의 이런 속성을 익히 아시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사람들의 속성과 그리고 나, 예수님을 시인하는 너의 속성이 일치되는지 일치되지 않는지를 먼저 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자 하든지, 혹은 하나님을 믿고자 할 때는 절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 하나님을 시인하는 게 아닙니다. 항상 자기를 시인하고 자기를 시인한 상태에서 예수님도 받아들이고 하나님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같은 경우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나를 따를 수 없다“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싶지 않은 것이 어떻게 우리자신 내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나와 똑같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인간은 자기를 불리하게 한다든지 스스로 자기의 보존을 위태롭게 만드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게 돼 있습니다.
구약 성경 미가 3장 5절~6절에 보면 구약 때부터 이미 여호와 이름의 종교라는 게 있습니다. 그 종교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고객들을 모으고 종교 행사나 종교 예배나 집단을 이루는데 있어서 거기에 소위 종교 전문가들, 성직자들이 어떤 식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했느냐 하면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입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인들이 또는 신자들이 교회 올 때 무엇을 원하고 어떤 것을 기대한다는 것을 오늘 날 뿐만이 아니고 옛날 구약에 있는 성직자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축복과 평강을 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 교회 온다든지 성전의 예배에 참석하고 이러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긍정주고 자기를 키워줄 수 있는 목회자, 성직자, 그런 기독교, 그런 천주교, 그런 신을 찾고자 온 겁니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이미 성직자도 교인들이 그런 걸 노린다는 것을 알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선지자에게 뭔가 먹을 것 주고 돈을 부여하면 그들은 축복을 외치고, 평강을 외치고, 신의 자비를 외치고, 그러나 그 입에다 뭘 물려주지 아니하면 저주를 외치고, 전쟁을 선포하고 그들의 미래가 벌 받는다고 이렇게 협박 공갈을 하게 된 겁니다.
이것은 그 당시 거짓 선지자를 욕할 게 아니라 이미 교인들이나 일반 신자들이 오히려 그러한 성직자를 이미 찾고자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런 목회자를 갈구했던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부인하기 싫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37절~38절, 여기에 보면 “누구든지 아들이나 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될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건 ‘나는 지금 당장 십자가 지고 죄인으로서 규정받고 저주받아도 합당합니다.‘라는 경우에만 십자가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내리는 징벌이고 그 징벌은 징벌의 입장에서는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기 부인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입장에 설 때만 우리는 주변의 사람의 시선이나 눈치나 안목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외부의 누구와 거래하든지 누구와 만날 때는 반드시 손해나는 짓은 안하는 법입니다. 반드시 자기한테 어떤 축복이란 이익을 챙길 경우에만 그 교회 헌금을 하고 그 교회 출석을 하는 법입니다. 만약 어떤 교회 갔을 때 ‘당신은 저주받아 합당합니다. 당신에게 축복이라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영생이라는 것은 기대할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습니다.’라고 외쳐버리면 아무도 그 교회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식으로 외쳤던 것이 구약의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과, 진짜 예수님과 성령으로 연결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외치는 것이나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외치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라. 이 말은 저 사람들과 같은 류냐,를 묻는 거예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축복을 기대하고 오는데 자기의 미래의 희망이나 기대, 그리고 자기의 욕망과 욕구의 달성,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자기가 미처 못 하는 것을 수월하게 달성하고자 하는 그런 기대치, 이런 걸 갖고 올 때 과연 그들이 스스로 그들의 생각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긍정하는 것인지를 똑바로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를 시인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궁극적으로 ‘예수님이냐, 나냐’ 할 때 반드시 자기 자신을 선택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미워하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그런 의사는 추호도 없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0장 32절, 33절 말씀은 어떤 인간도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지시고, 십자가 영이 오게 되면 바로 이렇게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한 당사자가 나 자신인 것을,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저주받아도 합당한 인간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닫는 그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말씀대로 만들어내는,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내고 영생의 사람으로 이끄시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주도하시는 대상으로서의 참된 성도인 것입니다.
이한례(IP:203.♡.41.16)
12-10-20 09:19
7강-YouTube강의(헌금)121018-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제 7강 헌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헌금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봐야 될 구절은 시편 50편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너희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이 말씀을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너희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그 이유가 나와 있는데 “네 제물,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라는 시편 50편 8절의 말씀, 이것을 중심으로 헌금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쳐버리고 현재 우리 인간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누구나 상상의 산물로서 관념의 산물로서 누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상상하는 그 하나님을 제켜 버리시고 진짜 나타나셔서 어떤 작업을 하시는데 그 작업이 뭐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이 땅에 남겨두셨습니다.
왜 남겨두었을까요? 참된 하나님이라는 경로를 내가 신을 생각한다고 조물주를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하나님이라고 성급하게 나설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주고받는 관계를 통해서 참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그걸 먼저 전제로 하고 염두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냥 여타의 민족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라고 보여줄 수 있는 계시로서 특수하게 이 땅에 등장한 민족입니다. 따라서 그 이스라엘 민족은 두 가지의 기능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인간이 신을 섬길 때 어떤 솜씨와 어떤 기능을 다 총동원해서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신에게 감사하고자 신에게 소통하고자 그렇게 애쓰는가를 인간의 측면에서 다 보여주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적인 애씀과 종교적인 경건성과 거룩과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대처해서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키느냐, 그 멸망시킴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뜻이 거기에 등장하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항상 위기에 몰아넣어서 위기 가운데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위기에 직면하지 않으면 자기는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그것이 합당하고 정당하고 의롭고 경건하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을만하다고 그렇게 항상 자부심을 갖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위기에 처해버리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는 그러한 존재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헌금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고, 여기 오늘 본문에 있는 시편 50편의 문제는 바로 제사의 문제입니다. 번제에 관한 문제입니다.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는 필요한 제물들이 많고 여기에 동원되는 그러한 땅의 생산물들이 여기에다 집약이 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빈손으로 나올 수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여 깨끗하다고 구별된 것들을 거룩한 칭호를 붙이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시편 50편 8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번제를 인하여 너를 책망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시편 50편 그 뒤에 보면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을 특별히 구별한다고 했지만, 사실 하나님 보시기는 공간이동에 불과합니다. 자리이동에 불과합니다. 산에 있는 사슴이나 산에 있는 양이나, 양이 살아있더라도 그건 하나님 것이고, 그것을 끌고 잡아서 성전에서 제물로 바친다 할지라도 그것도 하나님 것입니다. 산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것이 아니었는데 새삼스럽게 그걸 끌고 성전에 들일 때만 하나님의 것이 되는 그런 것은 없다는 거죠.
그렇다면 진정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드리라는 의미는 뭐냐, 그것은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렸고 제물을 드렸던 것과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같이 두 가지 기능을 같이 비교해서 또는 견주어서 합쳐서 우리는 이해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돈을 받는 게 아닙니다. 돈 받고 구원하는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돈 받고 축복해 주는 하나님도 이 세상에 어디에도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내게 되면 하나님이 돈 받고 돈 양만큼 축복해 준다는 인간들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실제로 성경이나 이스라엘 민족에서 찾은 것이 아니고 인간 대 인간의 정, 정 나눔, 이 세상에서 인간 대 인간 사회에서 서로 좋은 게 좋다는 그런 정 나눔과 사랑 나눔에서 유발된 겁니다.
우리가 이웃 간에 이사 와서 떡을 해주면 그것은 하나의 사랑의 표시요 그 사랑을 받고 난 뒤에 받은 게 있으면 사람이 양심이 있는 이상은 그냥 받고 입 싹 씻는 법이 없거든요. 그만큼 채워주는 겁니다. 바로 사람 대 사람 사이에 그것을 일반 사람들은 그걸 어디까지 이어졌느냐 하면, 하나님까지 이어 가지고 설마 이렇게 귀한 제물과 헌금을 드렸는데 설마 하나님께서 그걸 받고 난 뒤에 저주를 하시겠는가, 내 앞에 어떤 사업의 미래가 보장되지 못하고 불안한데 여기에 대해서 미리 돈으로 교회 갖다 바치고 선교헌금 내면 십일조 내면 하나님께서 그걸 받으시고, 앞에서 혹시나 주어질 그런 재앙이나 어려움을 미리 제거해줄 것이라는 일종의 뇌물성 헌금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바치게 되는 겁니다.
교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뭔가 자기가 큰 실수했다고 생각한다면, 예를 들면 작은 실수나 큰 실수나, 큰 실수 같으면 범죄 수준이고 작은 실수 같으면 예배에 좀 늦었다든지 성가대 연습을 안 했다든지, 또는 교회 행사하는데 구차 없이 빠졌다든지 그럴 경우에는 미안한 마음에서 그 다음에는 헌금에 만 원짜리 하나 더 추가시켜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누그러뜨리고 그래서 평화로운 관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심보, 그런 것은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도 아시고 특히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을 알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심성으로 그들은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오해에 대해서 일체 거절하시고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내가 받는 것은 너희의 번제나 소제나 화목제, 이런 제물이 아니라 내가 받는 것은 시편 51편에 보면 너희들의 상한 심령이라 했습니다.
이 의미는 뭐냐, 우리가 상한 심령을 내게 되면 그 상한 심령과 주께서 친히 준비한 제물이 있어요. 그게 뭐냐, 주께서 친히 꺾으신 뼈가 있습니다. 주께서 친히 꺾으신 뼈는 어떤 뼈냐 하면 바로 우리가 우리의 본성대로 신을 기쁘게 하고 축복받고자 어떤 착한 일하고 경건한 일이라고 한 모든 것 때문에 오히려 탄식하시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그러한 종교적 행위로 버림받으신 분의 희생과 그 처절한 운명과 그리고 상한 심령 된 우리와 만나서 그 자체가 만나서 하나님의 받으시는 율법에 기록된 진짜 제물로서 받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상한 심령 주의 받으시는 그 제사에 가담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로 인하여 꺾으신 뼈가 되시는 분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꺾으신 뼈가 되고, 우리는 그 앞에서 천하에 죄인이 되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이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상한 심령으로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에 보면 사도바울은 ‘난 이방인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친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칠 때는 거기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새롭게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한 그러한 우리 자신의 삶 자체가 제물로 가담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정도가 아니라 날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그 헌물에 의해서 오히려 헌금을 받고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돈을 내놓는다는 것은 그것도 일종의 헌금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돈을 하나님 일에 쓰는 것이 아니고 주의 돈을 주의 돈답게 쓰는 겁니다.
따라서 그 헌금을 하기 전부터 우리가 애들 피아노 레슨 한다든지 침대를 사는 것까지 전부 다 주께서 우리에게 먼저 주신 헌금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고, 그 중에 일부가 복음전파 하는데 쓴다면 그것도 주께서 주의 일에 쓰여 지기 위해서 헌금한 겁니다. 따라서 헌금해서 추가적인 복을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십자가 복음으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마땅한 도리기 때문에 추가적인 제물이나 이런 것을 우리가 따로 소유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 자체가 복이 있나니, 선지자들도 그같이 죽었다고 한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희생당하고 고난 받는 그 자체가 성도가 보여줄 수 있는,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주께서 주신 헌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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