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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예루살렘 그리기 121017우리교회에레미야

예루살렘 그리기 121017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예루살렘 그리기 (겔 4:1-6)

이근호

12-10-17 21:11

예루살렘 그리기

2012년 10월 17일 본문 말씀: 에스겔 4:1-6

(겔 4:1, 개역) 『너 인자야 박석을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겔 4:2, 개역) 『그 성읍을 에워싸되 운제를 세우고 토둔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겔 4:3, 개역) 『또 전철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겔 4:4, 개역)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 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겔 4:5, 개역)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겔 4:6, 개역)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일 일이 일 년이니라』

선지자가 하는 행위는 선지자 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할 행위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이는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은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마음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믿고자 하는 것은 현재 자신을 보존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고 싶지 않는 것은 자기 보존에 지장이 되고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 것을 믿지 않고 피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에스겔 선지자가 그 어떤 행위가 보여주어도 사람들은 선별적으로 믿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전적인 멸망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거북스러운 소식입니다. 어느 누구도 믿으려고 나설 수 없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믿고싶지 않는 것을 제시하면서 믿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위기를 반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도리어 위기를 유발시키려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위기 앞에서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언급하신 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제자들도 예수님과 더불어 있으면서 예수님이 곧 죽으실 분이라는 점을 전제로 해서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유다사람들이나 제자들이나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의 구원의 메시아이지 결코 자기네들에게 저주하고 화내시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선입견으로 인하여 결국 대중들은 예수님을 살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 마음으로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에게 잔뜩 희망을 걸고 믿는다고 말해왔던 것입니다. 이점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되풀이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멸망시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교회 아니라고 저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46년동안 지은 성전이 무너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로서는 그 당시에 도저히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되고 난 뒤에 비로소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자신들이 가상의 세계를 참된 현실로 곡해하면서 살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는 박석 위에서 예루살렘을 그립니다. 이 벽돌 위에 그려진 예루살렘과 그당싱 건재하는 예루살렘성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예루살렘이겠습니까? 가상이나 현실이냐의 결정은 인간들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판가름됩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가상이 한계를 만남으로서 비로소 실제 현실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군사적 전략 요충지는 아닙니다. 무역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비옥한 지역도 아닙니다. 하지만 창세기 14장에 보면, 가상과 현실을 구분 짓는 중대한 접점지점으로 등장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창 14:17-19)

방금 큰 전쟁에서 승리하고 온 아브람은 살렘의 제사장을 만나게 됩니다. 살렘이라는 지역이 일반인들이 봤을 때는 평범한 마을이요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도 평범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아브람은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참된 현실세계의 위상으로 인하여 이 가상세계인 이 세상이 뜻대로 다루어지는 그 접점에 살렘의 제사장이 놓여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십일조를 드립니다.

다윗 시대에 와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주민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참된 현실적 세계라고 오해했습니다.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네 나라를 친히 멸망시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이 가상의 세계를 멸망의 세계로 전환시키므로서 참된 세계로 따로 있음을 보일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셨지만 그들은 그저 예수님을 자기네들 세계에 묶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이 이 세상을 가상의 세계로 멸망당해야 하는 세계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러 오셨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자신을 지키려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그들에게 십자가란 참으로 믿지 못할 내용이 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피해가려고 합니다. 즉 나를 멸망시킬 하나님을 도저히 못믿는다는 투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이 지상을 향하여 분을 내시고 심판에 나서는 자리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를 이어온 것도 참된 하나님 나라가 따로 숨어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서 좌로 390일 동안 눕게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 나라와 갈라선 때인 B.C 931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이방나라에 벌 받는 때인 B.C 541 때까지입니다.

우측으로 40일 동안 선지자가 눕는 것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이후 다시 범죄하고 멸망한
40년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간이 신약시대에 오면 매일같이 이런 위기의 시기가 됩니다. 그것은 매일같이 십자가 의미가 살아서 활약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죄를 안다는 것은 곧 구원 절치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죄가 멸망이 시행되는 현장이 곧 구원의 현상입니다. 오늘날에는 십자가가 매일같이 위력을 발휘하는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매일같이 건져내십니다. 이 가상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될 것만 찾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세계에서 통하는 원리입니다.

부자되고자 하지만 지옥으로 통하고, 거지라고 여겼건만 천국가 있게 됩니다. 무엇이 가상세계인지 무엇이 진짜 세계인지는 오로지 십자가에 못박혀 살아가는 사람들만 아는 바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사하는 그 현장이 곧 천국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0-18 22:23

11강-에스겔4장 1-6(예루살렘그리기)1210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1-6

“너 인자야 박석을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그 성읍을 에워싸되 운제를 세우고 토둔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또 전철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찌니라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 구십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일로 정하였나니 일일이 일년이니라너는 또 에워싼 예루살렘을 향하여 팔을 벗어메고 예언하라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맟도록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에스겔이 이상한 짓을 합니다. 박석이라 해서 이것은 성을 쌓을 때 쓰는 벽돌인데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그것을 가져다가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립니다. 그려놓고 이제는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서 거기에 공성퇴를 둘러 세웁니다. 전철이라 하는 것은 요새 말로 프라이팬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 과자 굽는 팬을 가져다가 쌓아서 성을 만드는 거예요. 프라이팬 같은 것을 쌓아놓아서 그 자체가 성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성을 두고 이런 것들로 에워싸게 되면 성이 뭐가 되냐 하면, 벌건 화로, 뜨거운 화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성이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날 현장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에스겔로 하여금 예루살렘의 장래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 에스겔로 하여금 390일 동안 눕게 하고 그것이 끝나면 또 40일 동안 눕게 하고, 그런 식으로 또 잠자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뭔가 보여줍니다. 이러한 에스겔이 모양새를 보게 되면 이것은 에스겔 본인 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예언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믿고자 해도 믿지 못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에스겔 외에도 이 세상에 믿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뭔가를 믿겠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저것 믿어서 나는 살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뭔가 믿든지 행동하든지 실천에 옮기는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에스겔이 하는 몸짓이나 행동이 저게 나한테 도움이 될까, 안될까를 먼저 판정하고 저것은 내가 살아가는데 도저히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그것은 곧장 안 믿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스겔이 아무리 사람들 앞에서 이 몸짓 저 몸짓을 해도 사람들한테는 먹힐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믿고 있는 바가 이미 구축되어 있어요. 어느 인간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화를 내고 하나님이 그냥 화낸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벌을 주려고 준비되어 있는 하나님을 뭐가 좋다고 서슴없이 믿겠습니까? 안 믿지요. 자기에게 잘 해주고 복을 주고 키워주고 출세시키고 뭔가 하나 받으면 받아 챙긴 대로 꼬박꼬박 보상해주는 하나님이 우리 맘속에 꽉 차있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꽉 차 있는 입장에서 에스겔의 이런 짓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 되는 겁니다.

‘저 양반이 왜 저래? 완전히 돌았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위해서 많은 계시를 주십니다. 주시는데 사람들이 안 믿는 이유가 그것을 믿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안 믿는 거예요. 특히 에스겔 당시에 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나 또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나 아직까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는 시기입니다. 그 멸망하지 않은 시기에 에스겔이 예언을 해서 멸망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자, 서울이 멸망해서 불바다 된다고 칩시다. 허연 수염 난 영감이 서울시청 앞에 싸이가 공연하는 그 장소에 가서 몸을 이리 저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끄집어 내립니다.

미친 영감이라고 끌어내리지요. 거기서 ‘오! 예언자여, 내가 미처 몰랐는데 하나님의 뜻이군요.’ 이렇게 나오는 법이 없어요. 사람은 자기한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않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믿는다는 것은 그만큼 얻을 거리가 있고 이익 될 만한 것이 있다는 자기 판정에 의해서 믿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일방적이에요. 결국 에스겔의 이런 행동들, 에스겔의 이러한 계시들은 사람들에게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은 너희들의 예측을 피해가서 그대로 실시되어서 결국 너희는 다 멸망한다는 점을 차근차근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중에 되돌아가서 보면 ‘아, 그때 에스겔이 그런 짓 하는 것은 이렇게 멸망한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 그랬구나.’ 이렇게 뒤돌아보면서 알지요.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제자들이 이렇게 했어요. ‘이 성전이 이렇게 잘 지었습니다.’ 제자들이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보고 자긍심을 느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어느 제자든 간에 그 46년 동안 짓고 있는 그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지금 큰 교회 예배당이 있을 때 ‘저게 다 불바다 됩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왜, 성경에 지구상의 모든 것이 불바다 된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은 쉬워요. 그런데 ‘여기 있는 교인들 다 지옥 갑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안 믿지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 믿어지는 한도까지만 믿고 그 다음부터는 안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멸망소식을 전한 것은 ‘믿으면 멸망 안할게.’가 아니라 결국은 ‘너희들은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결국 안 믿게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안 믿어서 멸망하는 것이 자기 택한 백성을 건지는 하나의 절차 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위기가 닥쳤을 때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계속 위기를 줘서 네가 진짜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이 아니고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만 골라서 믿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건재해 있는 예루살렘 말고 박석위에, 돌 위에 그려지는 예루살렘, 돌 위에 그려지는 예루살렘은 무슨 예루살렘이냐?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상적인 예루살렘, 있지도 않은, 있을 필요도 없는, 있을 리가 없는 가상적인 예루살렘을 에스겔은 거기에 그린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 생각해 봅시다. 돌 위에, 박석위에 그려진 그 예루살렘이 진짜 가상적인, 환상적인 예루살렘인지, 아니면 그 당시에 현실로 우뚝 서 있는 그것이 진짜 예루살렘인지? 그 질문을 오늘날로 다시 한다면 오늘날 교회라고 간판 있는 것이 교회인지 아니면 그리스도 몸이 교회인지 다시 한 번 성경을 보면서 생각해야 되지요.

우리가 예배당이 없는데 그냥 빈터에서 서리 맞아가면서 예배드릴 때는 예배당에 대한 어떤 미련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돈을 내고 공동출자를 해서 예배당을 세워놓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노심조차 그 예배당이 없어도 교회가 된다는 생각을 못하고 예배당이 있음으로서 교회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예요. 예배당이 없을 때는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예배당이 생기고 난 뒤에는 예배당을 믿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나오는 겁니다. 결국 그 말은 뭐냐, 그 전부터도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를 이렇게 잘 믿을 테니 우리한테 근사한 단독건물, 예배당 건물 달라는 것을 은근히 노렸고 원했다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가 희망하는 그 희망사항을 앞당겨서 계속 고대하고 믿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은 오늘날 다시 한 번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그 하나님의 원칙을 스스로 깨고 위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만큼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주의 말씀대로 가는 겁니다. 진짜 예루살렘, 돌 위에 그리는 진짜 예루살렘에 대해서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주목을 하게 하시는가? 원래 예루살렘이라는 그 지역은 군사적으로 전략적으로 요충지가 아닙니다.

무역통행로에서도 멀고 여름에는 비도 안 오고 덥고 겨울에는 춥고, 그렇답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면 이 요충지도 아닌 예루살렘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살면 몰라요. 이 예루살렘을 멸망당하게 함으로서 비로소 예루살렘을 형성시킨 그 뒤 줄기, 내막이 펼쳐집니다. 그것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기 14장 18절에 보면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그 당시에 우리가 살렘이라는 지역에 방문을 했다면 가봐야 흔히 사막에서 보는 오아시스 비슷한 곳이고 보통 평범한 작은 마을이겠지요.

나무 있고, 사람살고, 집 있고, 우물 있고, 농토 있고, 별 특이사항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별 특이사항이 없는 살렘, 예루살렘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아브라함이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살렘왕 제사장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만나러 나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거예요. 왜 아브라함을 제사장이 만나냐, 그 말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우연한 사건은 없어요.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것을 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기록이 되는 겁니다.

살렘이라는 지역에 있는 제사장이 아브라함이 전쟁하고 돌아오는데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마중을 나왔고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그분에게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그 평범한 마을, 그 마을이 우리보기에는 현실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현실로 보면 그것은 현실이 아니고 가상이 되고 그 예루살렘이라는 마을에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만나는 그것에서 숨어 있는 하나님이 진짜 계획한 현실이 거기서 쏟아져 나오고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이 내막을 알 길이 없는 거지요. 살렘이라는 도시의 제사장이 아브라함을 만나는 그것, 남들이 망원경가지고 본다고 할 때 한 사람과 또 한사람 두 사람이 만난 것 밖에 안돼요.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분을 만났을 때 자기 전리품 가운데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쟁에 참여했고 그 참전한 사건과 승리한 그 전리품을 가지고 나왔고 저쪽에서 아브라함에게 다가온 제사장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의미를 품고 아브라함과 만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이것을 히브리서 7장에서는 ‘그 멜기세덱이라는 분은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히 7:3)고 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분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그 만남의 접점지점을 살렘이라는 지명으로 표기했을 때 어느 누가 그 살렘이라는 그 마을을 그 마을 이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마을이지요. 그 마을에 계시는 제사장이 접촉하고 있는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리품을 챙기도록 다 조치를 했다는 사실을 누가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몰랐지요. 그 살렘에 사는 마을 주민들도 몰라요. ‘우리 집 옆에 제사장이 하나 있던데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하루 세끼 먹고 잘 때 같이 자는데 가끔 예배는 드리던가, 그것뿐이야.’ 이렇게 생각할 뿐이지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멜기세덱이 관계를 갖고 있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이 노선, 이 관계를 모른다고 한다면 그 이웃집 주민들은 가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인생 헛살았다, 그 말입니다. 자기가 눈으로 똑똑히 보고 그 사람 만나서 악수를 하고 식사를 같이 해도 그것은 현실이 아니고 가상일뿐인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가상이기에 불 심판 받아야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불에 타 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동안 유다나라는 가상의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여기면서 섬기면서 그 예루살렘이 있는 이상 우리는 택한 백성이고 멸망 받지 않고 천국의 백성이며 구원받는다고 자부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주께서는 그러한 종교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서 그것은 가상이었다고 선언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예수님한테 비교합니다. 예수님은 키가 몇 센티미터이고 몸무게가 얼마고, 그런 것이 있을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잠을 자고 몸을 만졌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 때 예수님과 함께 떠밀렸으니까 예수님을 봤고 들었고 믿었고, 다 했어요. 하지만 그들이 봤던 예수님은 가상적인 예수였습니다. 보고도 믿지 못하도록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이해하는 식의 인간으로 오신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더불어 살아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막 8:34)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도무지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를 몰랐어요.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하고 똑같아요. 도대체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지를 모릅니다. 교회를 만들어 넣고 자기결집력 다지고 세력 키우기에 급급하지, 거기서 놀기 바쁘지 도대체 십자가가 뭔지 몰라요. 십자가 안 믿어요, 교회 믿어요. 십자가 이야기하면 교인들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교회 이야기하면 교인들 자진해서 돈 내면서 교회 키우려고 합니다. 자기가 노는 친목단체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놀 단체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바른 교회로 구제하고, 주의 영광 돌리고, 예배하고, 전도 많이 하고, 선교 많이 하는 그런 교회를 만들기를 원합니다.

그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우리가 지금 만나도 그냥 보통 사람이에요. 아무 특이사항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갖다 바쳤어요. ‘당신이 지극히 높으신 분과 관련이 있기에, 당신이 제사를 드렸기에 나는 말도 안 되는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앞장세워 놓고 뒤에서 하나님이 다 알아서 작용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열심가지고 이룬다는 것을 제가 고백합니다.’ 그런 뜻에서 십일조를 바친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은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 완전히 웃기는 짓입니다. 잠을 자면 그냥 곱게 자지 왜 390일 동안 모로 눕고 왼쪽으로 구르고 오른쪽으로 구르고,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좌편으로 누워서 390일, 우편으로 누워서 40일. 여기서 390일이라는 것은 BC 931년부터 BC541년까지, 그러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이 둘로 나눠지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멸망 이후까지의 햇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철저하게 가상적인 이스라엘을 이런 식으로 다루었다. 너희는 이스라엘이 그냥 이스라엘인줄 알았지?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야.’ 그것은 언약의 나라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진짜 이스라엘이라고 여기는 생각이 위기를 자초하게 되고 위기에 직면할 때, 있다고 여기는 것이 없어지고 멸망당할 때 비로소 그 인간의 참된 본색은 드러나는 겁니다. ‘사람은 죄인이었구나. 죄인이었기에 진짜 하나님의 뜻은 모르고 가상적인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서 살아 왔구나.’ 하는 것을 특별히 이 이스라엘 사람, 유다한테는 알려주는 겁니다. 어떻게, 에스겔로 하여금 잠을 자는데 좌로나 우로 자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이유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보여주는 겁니다.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십자가를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자력으로 성경공부를 해서는 십자가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성경 시편 같은 곳을 보면 하나님의 처소가 살렘입니다. 그리고 그 처소가 하늘에 있어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데 그냥 가만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처소에서 나오시면 그것이 지상에 대한 분노와 저주의 모습으로 처소에서 일어서서 작업을 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한다는 그 지점이 바로 예루살렘이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속에 살고 있으면서, 거기서 매일 같이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설마 우리한테 저주하고 분내고 불을 내릴까, 우리가 하나님이 분을 살만한 일을 안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분노를 맞이한다는 것은 진짜 구원의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항상 자기사수, 자기 장점 키우고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는 식으로 자기존재를 보호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나를 지키는 이것을 잘 다독거려주고 지켜주고 보호하고 키워준다는 쪽으로 선택적으로 믿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에게 뭐가 필요 없는가, 십자가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십자가가 뭐가 중요해요? 십자가가 아니라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고 독려해서 ‘너의 행함이 주께 영광 된다, 드린 헌금 잘 받아쓰마.’이런 식으로 항상 긍정하고 부정적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비전을 주고 희망을 주는 하나님을 스스로 원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십자가가 왜 들어가는데요. 그런 사고방식, 오늘날 교인들만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도 충분히 생각했었습니다. 그게 파탄으로 끝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를 세 번씩이나 하고.

사람들이 십자가를 안 믿는 이유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믿을만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가 믿을 만한 것을 너무 많이 제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축복 받으세요.’ 하면 안 받을 놈 누가 있습니까? 다 받습니다. ‘저주 받으세요.’ 아무도 안 받습니다. ‘십자가 받으세요.’ 아무도 안 받습니다. 금요철야기도하면서 좁은 길 가게 해달라는 기도 하는 그런 교인은 없어요. 수월하게 인생을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덕 좀 봅시다.’ 그 이야기에요. ‘내 인생 망가뜨리지 말고 곱게 좀 잘 지켜주옵소서.’ 그것 때문에 기도하는 거잖아요.

‘잘 살고 있는 것도 주께서 왕창 망가뜨리시고 부숴버리옵소서.’ 이런 기도하려고 밤새도록 커피 마셔가면서 기도합니까? 세상에 그런 교회 봤어요? 우리 교회 오시면 인생 종칩니다, 이런 교회 표어 봤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했거든요. ‘안 망하려고 하는 인생, 그것이 바로 네가 상상한 가상적인, 너 자신에 의한 잘못된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진짜 너라는 인간, 진짜 너의 참된 현실은 십자가에 매달릴 때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자꾸 십자가에서 기어 내려와서 십자가 쳐다보고, 십자가에 대해서 연구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관찰이나 하고. 십자가에 매달리면 되는데 십자가를 앞에 세워두고 팔짱 끼고 구경하고 있는 거예요.

장례치를 때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사람은 답답해서 미치겠는데 잔디가 깎아주면서, 꽃이 잘 꽂혀 있는가 보자, 이런 식으로, 자기는 죽지도 않고, 죽은 사람만 무덤 속에 들어 있고. 40일이라는 것은 유다의 죄를 이야기합니다. 유다가 요시아 왕 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그 40일, 혹은 나중에 멸망한 후에 다시 돌아오는 그 40일, 그 40일은 분명치 않은데 어쨌든 간에 40일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의도적으로 멸망케 했던 분이 바벨론이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섬겼던 그 하나님이 우리를 쳤다는 그 사실, 그것을 깨닫는 그 기간이 이런 식으로 40일, 그러니까 40년이지요. 390년과 40년.

그러면 그것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다 깨닫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40년과 390년은 시간 지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이 시간은 십자가라는 사건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때는 40년이고 그때는 390년이지만 오늘날은 매일 매일이 390년이고 매일 매일이 40년 되게 하는 것이 오늘날 신약시대의 성령 안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이 말씀이고 계시입니다. 왜, 우리는 매일매일 환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인간의 죄는 현실을 환상으로 보고 환상적인 현실을 현실로 보는데서 비롯되는 겁니다.

가상적인, 현실이 아닌 불타버린 현실에서 출세하려고 하고 부자 되려고 하다가 지옥가고, 이 세상에서 거지 되었다고 비웃음 받을 때 거지 나사로는 천국가고. 예수님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거꾸로 만들어버렸어요. 완전히 뒤집어버렸어요. 에스겔이 이렇게 예루살렘 그리고 390일 동안 옆으로 누우면 에스겔이 일당 얼마 받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당, 품삯이 중요하거든요. 에스겔이 이런 짓을 해서 몇 푼 받았습니까? 남들 보기에 이것은 미친 짓이고 헛수고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저 양반이 왜 저렇게 구르고 있느냐?’ 그것은 바로 ‘그런 눈으로 보는 너희들이 가상세계, 너희들이 헛되고 헛된 세계를 꾸며놓고 거기서 주눅 들어서 살고 있는’ 겁니다.

차라리 에스겔은 자유로워요. 에스겔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에스겔 속에 예수님 영이 들어 있습니다. 내 뒤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 설교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계를 보여주시고 그 한계를 통해서 관계를 이어가는 그 접점지점에 에스겔을 세운 겁니다. 마치 멜기세덱을 아브라함의 접점지점에 세웠듯이. 그 장소가 바로 살렘,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린 그 지점이 우리가 이 세상을, 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나 자신이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달릴 때 주님과 연결되는 그 지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대로 볼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체가 또 하나의 사기이고 위선의 다른 목소리인줄 압니다. 위기 없이, 도리어 위기가 오지 않게 하면서 살려고 기도하는 저희들, 하지만 주님께서는 매일같이 우리에게 위기를 주시고 위기 속에서 다시 주님과의 관계를 확인시키는 하나님의 정확하고 빈틈없는 이 작업을 우리가 받아들여서 우리가 우리 배후에 하늘나라 있다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면서 자유롭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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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6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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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