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03 특강(야고보서와 로마서에서의 믿음) - 상처뿐인 인생c
20121003 특강(야고보서와 로마서에서의 믿음) - 상처뿐인 인생c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1003 특강(야고보서와 로마서에서의 믿음) - 상처뿐인 인생c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유대인, 이방인 구분이 없어요. 그 구분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율법완성과 이스라엘을 같이 엮어버렸어요. 나머지는 율법에 의해서 옛날 이스라엘이 있었잖아요. 율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율법이 있다는 그림자, 또는 결과로서 열매로서 이스라엘이 있고, 따라서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이 율법 완성하시기 때문에 율법 완성의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예수님 말씀에 합당하게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되어라. 이것 아니에요. 이스라엘 되자. 이것도 아닙니다. 누구야? 이스라엘이. “이중에 이스라엘 손들어 보세요?”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나는 인정 못하겠습니다. 하면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했고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율법의 완성체가 쏟아져 나오는데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비로소 발생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에 행한 대로 드러나면 이스라엘이고, 행한 대로 드러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아닌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로마서에서 이야기한 것과 좀 다르지 않느냐고 언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야고보서의 율법의 내용을 몰라서 그런 오해를 해요. 야고보서에서 율법의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율법이 완성되게 되면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면, 여기서 은사로 주어지는데 이 은사가 하늘의 은사에요. 여기서 야고보서에서 제일 난해한 게 나와요. 하늘의 은사가 주어지게 되면 여기서 일괄적으로 세상은 악마의 나라가 됩니다. 이런 이원론을 이런 이분론을 우리가 인정해야 돼요.
야고보서에 이런 것 나오죠. 세상과 벗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다. 그러니까 세상과 친하게 지내자?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니까 결국은 세상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걸 당신은 어떻게 알았느냐? 율법의 완성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이 버렸잖아요. 그렇다면 세상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사건에 의하면 일괄적으로 세상은 악마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에 보면, 조금만 참아라. 자꾸 참으라고 해요. 이른 비, 늦은 비 오듯이 내가 다시 재림하면 될 것 아니냐. 그러니까 이 세상은 예수님을 추방했고 추방한 것에 대해서 이 세상에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세상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추방하게 되었느냐? 그것은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 됨이라는 것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다녀갔고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고, 그 원수 된 나라에서 하늘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참된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유지하게 된다는 게 야고보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야 되는데 그렇다면 야고보서에서 율법을 이야기할 때 믿는 것 말고 행한 것을 언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는가? 이것은 어려운 것 아니고 간단한 겁니다.
여기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율법완성이라 했지요. 율법완성하고 뒤에 하늘에서 은사가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만들어지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예수님 오기 전까지 두 가지 예를 듭니다. 하나는 기생 라합의 예를 들고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예를 듭니다. 이게 바로 야고보서의 특징이에요. 보통 서신 같으면 아브라함이 먼저고 기생 라합은 나중이죠.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 여호수아 6장에 나오고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부터 나오잖아요. 역사적 순서 상 아브라함이 먼저 나와야 되잖아요. 야고보는 역사적 순서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이 왜 하나님의 원수냐, 율법에 위반되느냐? 그것만 이야기할 뿐이에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산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만이 율법을 완성했다는 이걸 예수님이 행동으로 보여줬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전에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의 행함처럼 예수님과 연결된 행함으로 행함을 보여준 사람둘이 있다 이 말이죠. 두 가지 예를 들었어요. 하나는 기생 라합이고,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입만 살아서 입으로만 믿음이라 하니까 귀신들도 그런 재주는 있단 말이죠. 그것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는데 그 행동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입만 살아서 믿음이라 하는 믿음과 차별하기 위해서 행동이란 고유영역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 행동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에 입만 살아서 예수, 예수 하지 말고 예수님이 보여준 행함을 그대로 은사를 통해서 보여줄 때 그게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구원문제는 아니고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이냐는 겁니다. “여러분 구원받으려면 이스라엘 되세요.” 이 문제가 아니고, “누구야. 이스라엘이? 손들어보세요.” 이 문제란 말이죠. 그러면 행하면 이스라엘 됩니까? 행해서 이스라엘 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 누구냐? 이스라엘 안에 이런 행동이 나오게 돼있지 이런 행동하면 이스라엘 시켜줄게. 이건 아니란 말이죠. 항상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을 이미 했기 때문에 하늘의 은사를 받아서 그런 거예요. 은사가 인간의 행함보다 위에 있는 겁니다.
기생 라합과 아브라함이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면, 기생 라합은 자기 조국을 버렸지요. 아까 두 번째 시간 한 것 해봅시다. 인간은 상태구원이기 때문에, 환경구원이기 때문에 나라는 몸이 성립될 때는 주변에 있는 상황이 현재 나를 만들죠. 그러면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이 기생 라합이잖아요. 기생 라합이 살아왔던 모든 것은 같은 여리고 성과 한 통속이 되어서 그렇게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앞장세워서 공격하잖아요.
결국 기생 라합은 어떤 대상이 됩니까? 이스라엘의 공격대상이 되겠지요. 기생 라합이 공격당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기생 라합이 여호와 하나님께 나빠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 속한 이방민족이기 때문에 공격을 받게 돼있어요. 한 사람씩 나와서 믿음 보자는 게 아니고 여리고 성 자체를 공격한다니까요. 여리고 성에서 착한 사람 나오고, 나쁜 짓 사람 죽이는 게 아니고 여리고 성 있음 자체가 이스라엘을 가로막아 멸망하는 겁니다.
바로 그 자체를 기생 라합이 믿은 거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직업과 관계없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한테 당해도 쌉니다. 이걸 세상에 기생 라합이 행함으로 보여준 거예요. 말로만 아니라. “나는 여호와 믿습니다.” 이게 아니라 나는 하나님께 당해도 싸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보여준 그것이 바로 정탐꾼을 숨겨주잖아요. 자기 조국을 배신한 자입니다. 그래서 기생 라합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과 대결구조로 왔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줬다는 거예요. 그럼 기생 라합이 갖고 있는 행동은 그 안에 누가 담겨있다?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가 기생 라합으로 하여금 그런 행위를 유발시킨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시다. 완전히 미쳤어. 자기 아들을 죽이잖아요.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고 남의 자식 키운 것도 아니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죠. 아들을 사랑한다는 그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까 배웠으니까 응용해봅시다.
인간이란 타인을 통해서 실존에서 존재로 바뀐다. 존재란 나는 무엇이다가 존재에요. 너, 누구야?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이게 존재거든요. 실존은 몸이 실존이고. 몸에서 존재로 바뀌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이 있어야 되고 그 타인은 내가 되고 싶어 하는 게 있어야 돼요. 예를 들면 한나 같은 경우에는 뭘 달라 했습니까? 한나 주변에 아들이 한 명도 없었습니까? 오히려 반대지요. 다른 사람은 아들이 있는데 자기 혼자 아들이 없지요. 그러니까 아들을 달라 한 거예요. 타인이 갖고 있는 것을 나도 아들을 갖고 싶어요. 거의 울다시피 하고 포도주에 취한 듯이 기도를 한 겁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은 아들이 있다 했는데 아들이 없으니까 아들 낳겠다고 이스마엘 얻었잖아요.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준 거예요. 아들을 주니까 아브라함은 버스를 갈아탄다 할까요, 환승한다고 할까요, 자기중심의 세계에서 아들 중심의 세계로 바뀌는 겁니다. 그전까지는 자기 위주가 되었는데 아들이 생기고 난 뒤에는 아들이 나를 대신해서 아들 인생 속에 자기가 같이 먹혀들어가는 거예요. 아들이 잘 되면 나도 덩달아 잘 되는 거예요. 아들 가진 사람 다 공통점입니다. 아들 낳는 이유가 뭔데요.
이걸 세상에서 흔히 말하죠. DNA는 영원하다. 자기의 DNA 퍼센티지가 대대로 흡수가 되거든요. 그러면 비록 나는 죽어도 내 DNA가 자식한테 남아있으면 자기 목숨은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못 났던, 잘 났던 나를 닮은 자식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 애가 나기 때문에. 나의 존재기 때문에. “나는 너 때문에 산다.” 추석 때 안 그러던가요? 그래서 추석에 고향의 부모를 만나는 것은 부모는 자식을 봄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건장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비록 이렇게 늙어가지만 자식은 잘 키웠다. 이걸 통해서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옮겨 탈 수 있는 겁니다. “웃기지 마. 나 이렇게 못났어도 내 아들 의사다.” 이게 뭡니까? 지가 의삽니까? 이게 옮겨 타는 거예요. 나는 누구다가 아니라 나는 누구의 아비다. 자랑 안 하는 척하면 자랑하는. “자식이 얼마나 애를 먹이는지 이번에 승진해서 승진 대접한다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이게 옮겨 타기에요. 그러니까 보드 옮겨 타듯이 자꾸 보드를 옮겨 타고 싶은 거예요. “저 집안 좋겠다. 자식 잘 되서. 이놈의 자식은 대학 졸업해서 오년 째 놀고 있고 어쩌면 좋노. 왜 너는 나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느냐, 이 자식아. 맨날 보증이나 서달라고 하고 내 돈 빼먹을 생각만 하느냐. 나도 네 덕 좀 보자. 나의 DNA야.”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옮겨 탑니다. 이게 창세기 27장에 보면 나와요. 하나님께서 전에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린다 하다가 갑자기 주체가 바뀝니다. 내가 이삭에게 복을 내리겠다. 나중에 야곱 때는 이삭은 날아가 버리고 야곱은 복을 받아서 선조도 복을 받아요. 성경에는 시간이 이상해요. 보통 후손이 복 받는데 자식 하나 잘 낳아서 선조들이 복을 받아요. 그러니까 메시아 등장하면 앞뒤로 전후가 다 복을 받아요. 이것은 바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수직적으로 솟아오른다는 뜻입니다. 수직적으로 묵시적으로. 이런 어려운 말 소화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시나리오가 엉터리인 이유가 십자가 바라보면 구원받는데 요한계시록이라는 종말 시나리오에 맞추려고 애쓰느냐 말이죠. 지금도 미국 가면 맞추려고 땅굴 파는 사람 있습니다. 빨리 죽고말지 더 살려고 하는지 몰라. 이게 바로 신천지나 그런데서 또는 모든 이단들이 그것으로 사람 심리를 조지는 거예요. 믿음 없는 걸 뻔히 알고. 믿음 없으면 일곱 귀신, 백 귀신 막 들어오거든요.
문제는 옮겨 탔는데 아들 사랑이 자기 사랑이죠. 아들 죽으면 자기 죽는 거예요. 그런데 아들을 니 손으로 죽여라.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죽이는 율법의 완성된 행함을 보여주는 거라고 봅니다. 야고보서는.
기생 라합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 나름대로의 혈통이 있어요. 자기 이방민족을 버리고 자기를 쳐들어오는 적군의 정탐꾼을 숨겨줬다는 것은 미친 여자에요. 자기 나라를 정복하는 민족을 숨겨준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뿌리와 혈통을 부정한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원수 된 세상이라는 것을 입술로만 나불거리는 게 아니고 실제로 나는 이 세상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원수 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안개처럼 사라져주는 게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과 행함이란 개인적으로 나의 구원문제, 출발이 이게 제일 문제에요. 내가 구원받는데 믿음으로 할까요? 행함으로 할까요? 믿음+행함으로 할까요? 행함+믿음으로 할까요? 행함하고 난 뒤에 믿는 것도 포함시킬까요? 믿음 난 뒤에 행함을 추가시킬까요? 전적으로 행함으로 나갈까요? 아니면 믿음으로 나갈까요? 어느 것도 다 정답이 아닌 이유가 출발점이, “나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라고 하는 자기 존재의 본성적인 연속성을 그런 식으로 종교적으로 표출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아니고 야고보서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그리고 이스라엘 되게 하신 것은 하늘의 은사, 그 은사는 예수님에게서 온 거죠. 예수님이 주신 은사는 지상에서 갖고 있는 너희들이 은사와는 차이 난다. 이 차이 나는 것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죄가 되고 그래서 야고보서는 율법을 하나를 어겨서 모든 것을 어긴 것이 된다는 말은, 아무도 너의 행함에 대해서 네가 판단할 자격이 안 된다는 겁니다. 똑같은 놈인데 뭘 판단하고 뭘 재단해.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내가 판단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일 되면 내일의 내가 어제의 나를 판단했던 오늘의 나를 또 판단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람은 남이 지적 안 해도 자기가 자기를 지적하고 자기를 괴롭히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하늘의 은사가 없을 경우에는 항상 그런 식으로 갇혀있을 뿐이죠. 그건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야고보서의 뜻입니다.
야고보는 하늘의 은사가 와서 세상은 참 더러운 세상이구나. -끝- 그러면 그걸 말로만 하지 말고 내가 더러운 세상에 더러운 인간이라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건 뭐냐? 나는 주님만 믿습니다. 그런 걸 보여주는 믿음의 행함이 바로 자기 포기로 이어진다 이 말이에요. 이 세상에 대한 자기 부정,자기 부인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너희 인생은 안개라고 돼있죠. 어떤 특정 인생이 아니고 불신자나 신자나 몽땅 다 인생이죠. 너희 인생이 안개라는 것을 믿고 그런 식으로 행한 사람만이 바로 이스라엘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되라,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고, “누구야. 이스라엘이. 너희 중에 이스라엘 손들어 봐.” 안개라 하는 것은 뜻이 뭐냐 하면, 잠시 있었다가 없네. 잠시 있었구나. 여러분 죽어보세요. 김을수 집사님 돌아가셔도 6개월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전부다 누굴 판단하거나 비판할 아무런 자격이 없는 것이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 재판관이냐? 재판관은 오직 예수님뿐이지 재판관은 없다. 재판관에 의하면 너희들은 몽땅 너희 인생은 일괄적으로 안개니라. 끝난 거예요. 맞습니다. 옳습니다. 이러면 그 다음에 우리는 뭐가 됩니까? 늦은 비처럼 기다리는 거예요. 야고보서 5장처럼.
만약에 우리 중에 부자가 있어서 으스대도 너무 부러워하지 마라. 그들이 부자 된 것은 사기 쳐서 된 것이다. 어차피 세상이란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부자가 너의 품삯을 빼앗아 가면 어떻게 대처하느냐? 그냥 기다려. 그냥 참아. 오실 분이 문밖에 서계시니까 올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생각에는 문밖이면 다 왔잖아요. 문만 우리가 열어젖히면 되는데 문은 우리가 안 젖혀요. 계속 기다려줘야 돼요. 판문점도 아니고.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고 공간의 문제에요. 하늘의 은사를 받아버리면 이 세상이 어떻게 살든 우리는 자기를 안개처럼 포기해야 될 그런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방금 한 체계를 교재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2페이지 첫줄은 여러분한테 부탁하고 싶어요. 줄 하나 그었으면 좋겠어요. [벌 안 받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자체가 죄가 되는 이유는]
그 이유는 이미 벌 받고 안 받고를 따질 수 있는 자기 스스로 재판관이 된 자기 의미가 성립돼있고 그 의미가 뭐가 되느냐 하면, 야고보서에서는 그게 믿음의 내용이 됩니다. 나는 내 세계에서 믿습니다. 뭘? 이 세계가 나한테 의미 있다는 걸 믿습니다. 그래서 이미 객관적으로 다져진 세상관, 세계관, 가치관 그걸 믿으면 믿음의 내용이고 그 다음에 행동에 옮기면 의지를 나타내면 이것이 바로 행함이고. 야고보서는 이 세상의 원리대로 의미가 행함으로 옮긴다는 그 체계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너희들의 믿는다 해놓고 왜 행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행함의 의지가 안 나온다는 말은, 현재 네 믿음 자체가 행함을 부정하는 것밖에 안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예로 기생 라합과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여줘서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완성을 믿었다고 보는 겁니다. 야고보는 세상 사람들이 적용하는 믿음과 행함, 행함과 믿음의 경우를 그 시스템을 그대로 도용해놓고 내용만 율법완성으로 일괄적으로 바꾼 거예요. 세상은 악하고 하늘은 선하고. 이 세상은 율법의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되어서 어떤 것도 선한 것이 없음을 그런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차라리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려고 작심을 해라. 작심하거든 세상 것을 좋아하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세상 것이란 백화점에 막 전시된 신상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엇이 세상 것입니까? 세상 것이란 나로 하여금 이스라엘 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 자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하늘에서 왔지 세상에서 온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행동에 나서면서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더 줄이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야고보서 1장에 나오죠.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고.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예수님이 보여주는 율법완성이 아니다. 은사란 선물이거든요. 선물이기 때문에 부득불 할 수밖에 없어요. 엘리야가 부득불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부득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의미가 하늘에 있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서 소급해서 오는 의미는 일체 인정하지 않지요.
내가 판사가 되었다. 의미 없는 거예요. 부득불 할 때만 판사가 나한테 의미가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판사 되게 하셨다. 미치겠다. 정말.” 이럴 때 의미가 있는데 “나, 판사다” 하고 다니면 이것은 의미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아닌 거예요. 기생 라합은 기생 라합이 될 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기생 라합이 아니고 만약에 박근혜 되면 그건 지옥 가는 겁니다. 기생 라합이 돼야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은사를 받아버리면 남의 것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이에요.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안개와 안개가 무슨 비교가 됩니까. 물방울 굵다. 굵게 되려고 노력 많이 했다. 이럴 이유가 없다니까. 굵어도 이 땅에서 없어지고, 짧아도 이 땅에서 없어지고. 그게 무슨 시간이 측정 됩니까? 5초, 3초. 이겼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 2초, 3초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율법이 없는 세상, 모든 걸 지가 재판장으로 판정하는 하나님의 원수 된 세상에서 3초를 견뎠느냐, 5초를 견뎠느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시편 84편처럼 내가 세상의 천 날보다 하늘의 문지기로 하루 있는 것이 더 좋사오니 하는 그 율법적 의미가 야고보서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거기에 합당한 행동으로 보여줘야 된다. 그 행동이란 착함이 아니고 자기를 이 세상에 속했다고 안개라고 완전히 인정하는 거예요.
로마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합니다. 야고보서의 행함과 믿음도 어렵지만 로마서의 행함과 믿음 봅시다. 3페이지 끝에 나옵니다. 어려우니까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유대인이 있고 유대인이 찢어집니다. 찢어진 분량만큼 구원받은 이방인이 나옵니다. 유대인이 행함을 이야기했거든요. 유대인의 믿음은 행함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행함이 찢어져야 그 안에서 진짜 믿음이 나온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행함이 왜 찢어져야 하느냐 하면, 유대인의 행함은 예수님의 행함과 비교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구상에서 예수님의 행함과 비교된 행함은 유대인의 행함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 유대인의 혈통으로 왔거든요.
다음주 설교를 미리하면 곤란하지만 지난 주일설교 들어서 아시겠지만 다윗의 혈통은 죽음과 관련돼있죠. 혈통으로 왔다는 자체는 이미 인간의 혈통은 죽기 위한 육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거죠. 예수님도 그 죽음에 합류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 받을 때 세례요한이, “안 됩니다. 내가 당신한테 세례 받아야 되지 죄인도 아닌데 어떻게 세례를 줍니까?” 할 때 주님께서 죄 속에 풍덩 뛰어들어야 죄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거예요.
만약에 세례요한한테 세례를 안 받으면 예수님 혼자 의인이고 남들은 아무도 구원 못 받게 되거든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스스로 죄 속에 들어오되 의를 가지고 죄 속에 들어와야 되는 거예요. 이제는 죄로 표현되는 의, 남들은 저주받았다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의. 이 말은 죄인들이 알고 있는 의는 정반대가 되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선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악처럼 보이고 죄처럼 보이는 그런 이름의 의를 죄 속에서 영글어내야 되고 만들어내야 돼요.
다윗의 혈통으로 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냥 죽어버리면 이거는 죄 값으로 죽기 때문에 의미 없어요. 아무리 어떤 사람이 죽어도 표현내지 못할 유일무이한 죽음을 예수님께서 혼자 보여주게 됩니다. 이 죽음이 뭐냐 하면, 이 죽음 속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는 그 죽음의 내용을 유일하게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죽음이에요. 이 말은 뭐냐? 아버지로부터 받은 저주죠. 예수님과 아버지와 관계돼야 돼요. 다른 사람은 나가 있어야 돼요. 제자들도 도망 잘 쳤어요. 애들은 가라. 다 보내고 아버지와 아들만 남는 거예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을 때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 알고 나머지는 아무도 모르는 그런 대화와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아무도 몰라요. 심지어 베드로도 몰랐어요. 베드로도 그걸 납득을 못했어요. 어떡하지? 납득이 안 돼. 아무도 모른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 일종에 캡슐에 담겨서 바깥으로 새나가질 않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죠.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된 것처럼 그 날이 오면 성령이 오게 되면 보혜사가 오게 되면 너희도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있으리라. 유일하게 캡슐이 형성돼요. 처소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을 때 죽는다 할 때 아담과 하와는 죽는다는 의미를 몰랐어요. 뭔가 몸이 찌뿌듯하고 감기 기운이 있고 조금 일했는데 땀이 나고 또는 하와는 애 낳는데 몸이 아프고 그리고 이상하게 남자는 여자를 꽥 하는데 그런 남편을 좋아하고, 사모하고. 도대체 이건 아닌데? 처음에 아담은 이런 경우는 아닌데. 뭔가 남남이면서도 남남이 아니고 버리려고 하니까 아깝고 같이 있으려니 버겁고. 이상해. 뭔가 이상해. 서로 욕하면서도 저녁 되면 같이 한 편이 되고. 그러면서도 둘 다 주고받으면서도 남자이름은 죽음이고, 여자이름은 생명이고. 뭔가 말이 안 돼요. 여자이름이 생명이 된 이유는 자식을 낳기 때문에 그렇고. DNA가 유전되어 그것 때문에 생긴 거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모르는데 그 해답은 백날 그 죽음을 되풀이하고 반복해도 소용없어요. 단 한 번에 몽땅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정녕 죽으리라는 의미가 한꺼번에 다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저주입니다. 그 죽음을 근거로 해야만 악마, 뱀의 정체가 비로소 드러납니다. 뱀은 뭐냐? 성경에 나오는 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함 이루심을 흠집 내는 것, 그게 바로 뱀입니다. 그런 요소가 인간들에게는 다 들어있고 인간들은 사주를 받았고, 뒤에서 지시, 통제를 받고 온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되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지는 말라. 믿을만한 위인이 못 된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저 사람이 메시아인가? 혹시 우리 민족을 구원할 사람인가? 하고 기다리고 측정하고 점검하고 했지요. 안철수 점검한 것 이상입니다. 혹시 부동산 팔아먹었는데 가라로 했는지.
모든 것 다 점검하고 내린 결론이 뭐였습니까? 쓸모없는 존재, 이게 결론입니다. 예수는 그토록 쓸모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 없이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살아갈 수 있다.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이러한 적그리스도적인 모습이 우리에게 담겨있어요. 아쉬울 때는 예수님 찾지만 좀 넉넉하다 싶으면 구태여 예수님 찾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자기 잘남을 과시하기에 분주하기 때문에. 언제까지 철없이 어린애 같이 징징대면서 예수를 붙잡고 할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 인간이란 참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밖에 없어요. 천상천하유아독존 그 말이 딱 맞는 말이에요.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없어요. 예수는 항상 뒷전입니다. 그러니 욥이 복 받은 거예요. 얻어맞고 상처받고 복 받은 거예요. 성도도 마찬가지죠. 성도도 그런 소리하다 얼마나 얻어맞았습니까? 얻어맞고 있고.
목회자가 수시로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어떻게 저 사람을 구원시키나 이걸 생각하거든요. 이것은 로마서 6장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에요. 분명히 했잖아요. 내가 택한 자는 아버지가 보낸 자는 잃어버리지 않고 반드시 살린다고 했음에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쓸데없는 걱정하는 거예요. 저걸 어떻게 구원할꼬? 주님께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해낸다.” “나, 예수 못 믿겠어. 어떻게 구원하지?” “내가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우리 엄마를 어떻게 기도해서 돕지?” “내가 한다고 했잖아. 엄마고 아빠고 간에 구원받든, 지옥 가든 쓸데없이 니가 걱정하느냐 말이야.” 왜 중보기도 하느냐 말이죠. 택한 백성 주께서 하시는데. 왜 오바하고. 이건 뭐냐 하면 결국 예수님이 믿음직하지 못하고 내가 설쳐야 안심이 된다 이 말이거든요.
이게 바로 육을 갖고 있는 예수님이 죽어야 마땅한 예수님이 우리가 받을 저주를 위해서 가져갔던 그 죄가 평생 살면서 노릇노릇 구워져가고 있는 거예요. 온 몸 전체가 그게 아닌데 주님 못 믿어. 맨날 주님 못 믿겠데.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못 믿어. 심지어 주기도문하면서 주기도문 소용없다는 거예요. 속으로.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인간 자체를 행함으로 봐버려요. 다시 말해서 찢어져야 될 대상. 그래서 죄 안 짓겠다는 것도 죄가 되는 그걸 만들어요.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이스라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까 야고보서는 이스라엘이 있어요. 예수님이 있으면 예수님이 만들어 냅니다. 로마서는 없어요. 이스라엘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도, 참 이런 게 로마서에서 어려운데 사도 바울이 어렵게 했는데 주님이 어렵게 했는지. 주님이 어렵게 했겠죠.
로마서에서 이방인이라는 것은 유대인을 거론할 때만 등장하는 거예요. 이방인이란 말은 무엇이 아니라는 말로 표현되는 겁니다. 나는 이방인이다가 아니라 나는 유대인이 아니무니이다. 그럼 유대인들은 마음속에 할례를 받지 못하면 모든 게 찢어져야 될 그냥 죄인이죠. 저주받을 백성이죠. 안에 적그리스도 있어서 주님이 쓸데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예수님, 예수님 하는 사람들도, 바나바를 풀어놓을까 아니면 예수를 풀어놓을까? 바나바를 택했단 말이죠. 지금도 교회 실험해보면 알아요. 안철수 할 거냐? 하면
그러니 유대인들이 저주받았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저주받는데 하물며 율법도 없는 이방인들이 구원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유대인들을 찢어버린다는 말은 이방인도 같이 저주받은 거예요. 이걸 로마서에서는 강퍅케 하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강퍅케 하심이에요. 유대인뿐만 아니고 이방인도 마찬가지로 강퍅케 하신 이유는 오직 너희들이 달음박질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 긍휼로만 구원시켜서 그릇에 담아요.
그 그릇이 무슨 그릇이게요? 문제 쉽다. 긍휼을 담는 그릇, 무슨 그릇입니까? 도자기? 도자기 아닙니다. 국그릇? 국그릇 아닙니다. 긍휼의 그릇이에요. 그럼 다른 그릇은 긍휼이 없는 그릇? 아닙니다. 빈 그릇? 아닙니다. 나쁜 그릇? 아닙니다. 무슨 그릇? 진노의 그릇. 로마서에는 극단적으로 밀어붙입니다. 사적으로 착합니다. 덜 착합니다. 더 착합니다. 이게 아니라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이 먼저 나왔기 때문에 그냥 그릇이었지요. 아직 진노의 그릇이라는 게 티가 안 났는데 한쪽이 긍휼 입었다는 말은 가만있다가 갑자기 진노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쪽이 착한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나쁜 사람이 되는데 이게 아니고 착한 사람이 없어요. 착한 사람은 없고 불쌍히 여긴 사람만 있기 때문에 나머지는 불쌍히 여기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서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까 불쌍히 여기지 않은 그전 상태가 뭐냐 하면, 그냥 진노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막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이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했던 십자가 사건을 전 우주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킨 결과죠. 진노의 페인트를 “에이 먹어라” 하고 온 그릇에 뿌린 거예요. 지금 오늘 산부인과에서 애 태어나면 얼굴에 진노가 뿌려졌어. 0살인데 벌써 시커매. 진노가 넘쳐서. 그 다음에 구원되려면 어떻게 합니까? 성령이 와서 긍휼을 입어서 구원되는 거예요. 뭐, 모태신앙? 모태신앙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모태신앙은 없어요. 모든 인간이 태어났다는 자체가 진노 아래 태어난 거예요.
의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것은 구약과는 다릅니다. 구약 에스겔에 보면 욥과 노아와 다니엘만큼은 의인인데 그 사람도 자기 의로만 구원받지 집단구원 안 된다고 나오거든요. 그런데 신약은 그게 아니고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욥과 노아와 다니엘조차도 자기 의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주께서 미리 앞서서 긍휼을 입은 거예요. 그 시대의 언약에 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임한 거예요. 그러니까 수직적으로 올라간 십자가는 과거역사까지 소급해서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을 사람을 택하여 건지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어디 갔습니까? 어디 가기는 하나님 품에 있었죠. 그러면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구원받죠. 아브라함이 구원받는 것은 아브라함을 구원되게 하는 마지막 마무리 사건이 터져줘야 되는 겁니다. 그 사건은 아브라함이 압력을 가한다든지 훈계를 한다든지 기도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일을 완전히 성취해야 될 문제지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하나의 거미라고 본다면 아브라함은 재주 좋게 어디에 걸려든 겁니까? A지점에 걸려든 거예요. 이 관계를 첫째 시간에 믿음이라 했지요. 그래서 믿음이란 선물로 성취하기 때문에 믿음은 은혜에 속하는 거예요.
이쯤 되면 야고보서 행함, 믿음 다 잊어버렸죠. 야고보서는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연속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 이스라엘이란 하늘의 은사를 받아야 되고 하늘의 은사를 받게 되면 어떤 은사가 우리에게 행함을 유발시키는데 그 유발된 행함은 세상은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안개에 불과하니까 세상에 대해서 미련 끊으라는 그런 행함으로 나온다. 반면에 로마서에서는 십자가를 보여주는 행함과 믿음이에요.
로마서 4장 15절,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이 없느니라” 이 말은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율법은 없는 곳에 범함이 없다는 말은, 율법은 죄라는 것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이 올 때는 “야 율법이다. 착하다.”라는 것은 지상에 있는 사람의 큰 오해였고 막상 율법은, “기다려봐. 너 죽었어, 이제.” 이렇게 오는 게 율법이란 말이죠. 율법에 대표적인 게 십계명이잖아요. 십계명이다. 우리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자. 그렇게 하자. 안식일을 지키자. 그렇게 하자. 이렇게 하잖아요. 너희는 죽었어. 탐내지 말라를 어떻게 지킵니까? 못 지킵니다. 율법이 덮쳐온 것은 완전히 시커먼 저주를 인큐베이터 아이한테 갖다 안기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그럼 은혜에 안 속하면 그동안 어디에 속했단 말입니까? 율법에 속하죠. 율법에 속했다는 말은 죄에 속한 거예요. 죄에 속한 것을 벗어나서 은혜에 속해서 구원받음을 보여주는 관계가 믿음으로 나타나죠. 그런데 로마서 4장에 보면, 율법에 속할 때는 뭐로 나타난다? 행위로 나타난다. 이 말을 봅시다.
율법이 올 때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이 행함으로 나온다. 율법 그 다음에 행하자. 율법이 있는 곳에 행하자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믿음은 뭐냐?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는 것도 어디에 포함돼요? 예수님을 믿어라. 명령이죠. 명령이 주어지게 되고 명령을 우리가 수행하게 되면 예수 믿어라가 법이 되고 우리는 행함이 되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유대교적으로 하는 예수 믿기가 되는 거예요.
언젠가 제가 설명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에비온파가 예수를 믿는데 어떤 예수를 믿느냐 하면, 예수님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나라가 다윗의 혈통이 이뤄지고 로마가 물러가고 해방될 것이다. 그 파가 로마가 밀려올 때 BC70년도 있었고 또 한 번 백 몇 년도인가 있었어요. 그때 이 사람들은 그 말씀대로 예수님이 마지막 때가 오거든 산으로 피신하라 했거든요. 페트라라는 산으로 피신했어요. 어떻게 됐을까요? 메시아의 나라가 됐습니까? 다 죽었죠. 몰살당했어요. 바보 같아.
예수는 믿는데 예수의 사도의 말은 안 믿어요. 로마서 믿었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안 믿어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 혈통을 믿기 때문에 그런데 아까 혈통은 이미 십자가에서 판정 났잖아요. 우리의 혈통이 있다는 말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이미 십자가에서 판정이 났는데 그 십자가를 안 믿는 거예요. 이 혈통, 우리 집안은 메시아 덕분에 온전하게 회복해볼까? 이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예배당 지었다. 이 예배당 어떻게 키울까? 이것만 믿는다니까요. 그런데 막상 자기 몸은 이미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판정 났는데 그건 생각 안 하고 주여, 이 예배당 지었는데 무너지지 않게 하시고 교인수가 늘어나게 하시고. 장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당회장부터 어린아이까지 모이면 교회 되잖아요. 결국은 뭘 믿는다는 말입니까? 예수여, 우리 교회 지켜주옵소서. 미쳤나. 그걸 지켜주게. 하나님이여, 우리 여왕을 지켜주소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뭐라고 지켜줘요. 영국국가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세상에 얼마나 혈통적입니까? 그러니 교회가 예수를 막아서요. 차라리 교회가 불탔으면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나 있지 교회 때문에 교회정치 때문에 예수를 못 믿어요. 맨날 기도하는 것이, “우리 교회 부흥되게 해 달라. 선교사 보내 달라.” 선교사 안 보내면 주께서 택한 백성 못 건집니까? 주께서 “선교사 안 보내니까 내가 택한 백성 못 건지겠다.” 이럽니까? 선교는 주님이 알아서 합니다. 괜히 졸업해서 직장도 없으니까 선교사 한다고.
행함이라는 것이 왜 등장해야 되느냐 하면, 절대로 행함이 아닌 것이 믿음이다. 인간이 아무리 믿음을 만들어내도 그걸 믿음으로 쳐주질 않는 거예요. 인간에게 도저히 나오려야 나올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것 하기 위해서 실컷 행해라. 믿든지 소망이든 사랑이든 니 원하는 대로 하라. 몸을 불사르게 내줘라. “주여, 사랑입니다.” 사랑 아니거든. 온 몸을 불사르게 내주고 설교할 때 천사의 말을 하고 멋진 말을 해도 그게 사랑도 아니고. 하여튼 인간에게 나올 것은 죄밖에 나올 게 없어요. 아무리 헌금을 해도 그건 헌금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어요.
십일조 문제는 하나님은 돈을 안 받는다는 문제에요. 이 사람들은 돈을 받는다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돈 받는 천사가 있어요? 회계담당이 있어요? 회계 담당한 가룟 유다는 자살해 죽었는데. 도대체 돈 받고 주는 구원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그 사기를 그렇게 좋아해요. 여러분 헌금 없어도 복 받는다 하면 돌로 때려죽이려고 하고. 바치면 바친 양만큼 복 받는다고 하면 아멘, 할렐루야 하고. 그래서 어느 영화에 보면, 할렐루야는 영원하다. 그 말이 실제로 나왔어요.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에. 할렐루야는 영원하다는 게 뭔 뜻이냐 말이죠. 그것 보고 주인공이 개과천선했지만.
믿음 없습니다. 다만 행함 사람만 있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입니다. 이방인은? 이방인은 없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대신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망했다는 말은,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이 망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망한 사람이고, 모든 사람이 저주받은 사람이고 그나마 대표하는 것이 유대인인데 그 유대인은 행함을 총동원해서 나오려고 했다. 심지어 유대인의 믿음이라는 것도 행함에 불과한 것이다.
로마서 4장 5절에 보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러니까 일단은 뭘 확보해야 그 의가 생산됩니까? 밀가루가 있어야 수제비 되잖아요. 밀가루 역할이 경건한 사람? 안 한 사람? 둘 중에 어느 겁니까? 경건치 않은 사람이죠.
그런데 경건치 않다고 말한 사람은 경건한 사람입니까, 경건치 않은 사람이에요? 경건한 사람이죠. 왜냐하면 경건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그걸 근거로 자기가 경건한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마저 경건치 않은 걸로 치려면 이것은 그 사람한테 따지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율법이 어떤 인간이 말도 주둥이 다물어. 모든 입을 막아버리잖아요. 입을 벌리나, 안 벌리나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제가 십일조 해도 죄가 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십일조 안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십일조 안 한 게 복음적인 교회가 아니에요. 십일조 안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이죠. 경건치 않다는 규정을 자기가 내리면 안 된다고요. 자기가 제대로 판단한 그걸 근거로 해서 자기를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해버려요. 그럼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경건치 않은 사람으로 몰아넣습니다. 그 중에 아까 거미망에 걸려든 사람이 다윗이에요. 다윗이 율법을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양이 많은 사람이 양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의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을 때 이스라엘 나라에서 그러한 해괴망측한 일이 있을 때 왕의 입장에서 어떻게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그런 인간은 죽여 버려야지. 율법대로 하면 네 배로 갚아야 되지만 내 성질 같으면 죽여 버린다. 그때 나단이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다. 그럴 때 다윗이 얼마나 울었는지. 무지무지하게 울었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요가 침상에 떠내려갈 정도로 울었다고 하거든요. 그럼 실험을 해봅시다. 에이스 침대를 놓고 대학실험실에서 학생들 이천 명 와서 눈물 흘렸는데 부력이 어느 정도 될 때 요가 지가 알아서 나가는지.
이러한 과장된 말은, 내가 없다. 실존이고 존재고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나는 신보다 더 넓은 범위를 갖고 있다고 자부했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으로 오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단단한 사물이잖아요. 이것보다 더 큰 사물로서 나에게 덮칠 때 비로소 그 속에서 주의 말씀의 그물에 걸려든 거예요. 이게 축복이라.
사다리 타기 해보세요. 거기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있다는 것, 그게 다윗언약이에요. 다윗언약의 주인공을 따로 있고 나는 거기에 걸려든 하나의 나는 무슨 자격, 입장에서? 죄인의 괴수 입장에서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그러한 고백으로서 이것과 관련될 때 이것이 경건치 않은 자라고 주님 쪽에서 규정했다는 자체가 나한테는 새로운 은혜의 믿음의 역사가 드디어 나한테 계시가 되는 징조가 되는 겁니다. 나보고 경건치 않데.
그러면 그 뒤에는 뭡니까? 경건치 않은 자에게 아무것도 일한 것도 행한 것도 없는 졸지에 의인이 돼버리죠. 그러면 경건치 않은 자기 의인 될 때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의미는 뭐가 발생됩니까? 십자가의 의가 감히 허접스러운 내 몸에서 발휘되는 겁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이 내 몸 안에서 사건이 발현될 때 이게 바로 은혜주신 목적입니다. 날 구원하려고 은혜 준 게 아니고 어떤 사건에 말려들었다는 것.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 그래서 로마서의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에 십자가에 합당한 믿음이 인간의 모든 율법의 행함과 비교해서 십자가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로마서 7장 마지막에 감사하리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양하리로다. 로마서 8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자유의 법으로서 우리의 행함에 얽혀있는 모든 것을 해방시켰노라.
그 해방의 결과가 뭐냐? 우리의 구닥다리 몸은 바이바이. 흙에 속한 몸은 바이바이. 정들고 그 동안 많이 투자했죠. 찢고 째고 닦고 메우고 주름살 하고 찍어 바르면서 얼마나 투자했습니까? 그런데 주의 말씀은 끄덕도 없이 점점 더 집었는데 터지고 모든 부기는 빠지고 물기가 빠지면서 교체작업에 나서는데 이것도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빨리 죽고 내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예수님의 형상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우리 어릴 때 엄마한테 달려들 때가 몇 가지 있어요. 이발하는 것과 목욕시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옷 갈아입는 것, 발악을 합니다. 그러다가 많이 얻어맞잖아요.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지금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우리가 발악을 합니다. 이 옷 얼마 주고 샀는데. 얼마나 발악을 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입은 옷은 타인을 경유한 나의 욕망의 화신입니다. 타인도 내가 원하는 타인, 내가 갖지 않은 걸 먼저 가진 타인. 그래서 청춘남녀 간에 연애할 때는 꼭 내게 없는 것을 저쪽에서 찾아서 나한테 보충하려고 하는 거예요. 누구 사랑입니까? 타인 사랑이 아니고 전부다 자기 사랑이죠. 그래서 타인에게 더 이상 빼낼 게 없다면 등 돌리고 자지요. 볼 것도 없는데 뭐. 뭘 내놓을 게 있어야지. 돈 봉투라도 내놔라. 이제는 이쪽에서 없으면 달라붙어요. 날 떼놓지 말라고 이사 갈 때도 따라붙고 마누라 안 놓치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항상 이러한 나 사랑하기 위해서 타인을 경유하는 이것이 바로 율법을 통해서 이러한 광경을 낱낱이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몸은 사실은 포기해야 되고 버려야 될 몸인데 우리는 아직도 애착을 두고 여기다 투자를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령께서는 성령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이것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성령은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으로 와요. 예수님의 영으로 와서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과 네가 연결돼있다는 걸 말해주는 이 연결고리를 믿음이라 하고 연결고리, 파이프를 통해서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계속 쏟아져야 돼요. 왜? 우리는 계속 죄 지니까. 우리는 내 몸에 관심이 있으니까 그걸 씻어주기 위해서 그리스도 몸으로부터 오게 돼요.
이걸 우리는 선악이라 하고 이쪽은 생명나무죠. 생명나무의 생명이 선악의 죽음을 계속 이기면서 다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으로 주의 몸의 지체로 회수시키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에 반항해야 되는데 세상없이는 나는 죽는다는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예수도 소용없고 하나님도 필요 없고 내 몸 내가 알아서 한다는 철칙, 이 경건치 않은 것을 경건치 않다고 지적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죽었던 이유가 우리가 경건치 않은 것을 마치 경건한 것처럼 착각한데서 왔고 다시 살아난 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인간을 의인되게 하셨으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 크게 느껴지는 그런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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