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20810a,b (빛과 어두움)―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120810a,b (빛과 어두움)―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IP:210.2.60.38)
서울 의존교회120810a (빛과 어두움)―이 근호 목사
살전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살전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살전 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살전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너희’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희’ 또는 ‘너희’, ‘형제들아’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제가 적어볼게요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저희’ 또는 ‘너희’, ‘형제들아’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을 하나님께서는 표현하려고 하느냐 하면 ‘어두움’이라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어두우니까 심판받았고 멸망되어야 됩니다.
보통 어둡게 표현하려면 도화지에 검은색 크레파스만 있으면 되겠지요. 도화지에 검은 것을 그려 보세요 하면 도화지에 검은 크레파스로 문지르면 새까맣게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너희 저희는 이 사람들은 크레파스가 아니고 사람이죠. 사람을 가지고 어둠을 묘사하고자 하는 겁니다. 어두움과 빛을 묘사하죠. ‘저희는 어두움이고 너희는 빛이다.’ 할 때 도화지로 그림을 그리라하면 까맣게 하얗게 그리면 쉬운데 사람을 가지고 어두움을 표현하고 사람을 가지고 빛을 표현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자신을 어두움으로 표현하고 싶은 사람 손 들으라고 하면 아무도 없을 거예요 왜냐 하면 우리들의 일상 상의 관심사는 일해서 돈 벌어서 밥 먹고 사는데 관심이 있지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동원될 의사는 우리한테 없습니다. 우리 살기도 바쁜데 거기에 왜 동원되느냐 말이죠.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성경 말씀은 네가 어디에 관심 있든지 상관없이 너로하여금 빛과 어두움, 어둠과 빛. 그것을 표현하는데 나는 너희들을 거기에 집어넣겠다. 라는 것이 하나님의 단호한 고집이 있습니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빛과 어두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피조물이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는 전부 다 사적인 생존의 문제가 우선이고 그게 전부입니다. 크레파스라면 검은 색으로 그리면 쉽게 어두움이 되고 하얀색으로 칠하면 빛이 되니까 어렵지 않지요 인간을 가지고 빛과 어두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크레파스가 아니고 사람인데 사람을 가지고 빛과 어두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계 문제, 세상 문제는 하나님의 관심사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 우리가 사는 것이 그냥 일상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뜻에 동의 하지 않는구나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에 대해서만 관심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한 적이 과연 있었느냐? 여기서 우리가 구약이라는게 필요한 거예요 신약에 나오는 빛과 어두움은 상당히 추상적인 것입니다. 손에 잡히지 않아요. 실체가 없습니다. 빛 오백원어치 주세요 이러면 말이 안되잖아요 어두움 두근에 얼마 합니까? 이게 말이 안된다 말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실체가 없다 이 말입니다.
실체가 없는데 너희, 저희, 신월동 시장 통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있잖아요 뱀은 이제 그만 나오게 했지요 뱀 열댓 마리 나왔으면 많이 나온건데 뱀이 나와서 너희, 저희, 형제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 말이죠. 우리가 그냥 빛과 어두움 같으면 뱀, 호랑이가 와도 별로 놀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실체가 아니니까 하지만 뱀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놀라지요 멀리 대구에 있는 나도 걱정되는데 혹시 미아씨 자는데 뱀이 와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무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 되더라구요
이 실체인 인간의 몸가지고 추상적인 빛과 어두움을 묘사하는데 먼저 동원된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구약이 중요한 거예요 구약은 역사라는 바탕위에서 이스라엘 사람이나 우리나 자기 생계 문제, 생존 문제가 우선이에요 생계 문제, 생존 문제가 우선인 그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을 표사하는데 그들은 동원되어서 거기에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 작업에 들어 가면서 그들이 오해들이 왜 없겠습니까? 나름대로 빛과 어두움을 성사 시키는데 나름대로의 오해가 있었죠. 그 오해의 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모세가 생각하는 빛은 자기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서 새로운 증거를 세워서 이스라엘의 중심의 증거를 세워서 자기 백성들을 질곡과 흑암에서 해방시키는 그러한 해방자로서 등장함과 정의 사회를 구현하고 불의가 없고 거기 법대로 바로 시행되는 그런 사회를 그런 세상을 모세는 꿈꾸었습니다. 그게 빛입니까? 아닙니다. 빛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한 그 모세의 행동이 어두움의 세력 앞에 오히려 현상수배범으로서 쫓겨가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하는 그런 정의로 결심과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서 하나님을 생각해서 이 땅에서 이상적인 천국을 이루겠다는 그 사고방식이 놀랍게도 어두움의 다른 형태였고 어두움의 변종이었습니다. 다른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자기 민족을 그런 식으로 해방하겠다는 것은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의 한계입니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기껏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고 하니까 율법지키는 것을 바리새인한테 욕할게 아니라 누구든지 인간으로서 율법을 대하면 그 정도, 그게 전부입니다.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까발리시고 그 한계로서는 오히려 어두움에게 쫓겨 다니는 그런 꼴사나운 꼴이 되게 만들었다 이 말이죠. 어두움은 그대로 건재하고 어두움에서 빛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어요 모세마저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빛을 시절을 만들 때 인간이 기껏 그 정도 실력밖에 안된다면 아예 애초부터 써 먹지를 말아야죠. 이게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믿음 좋을 때는 하나님께서 써 먹을 것이고 내가 믿음이 안 좋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거든요 ‘아이 나 같은 사람은 믿음 없으니까 나 같은 것은 쓰지 마세요’ 마치 기드온이 하나님의 성신이 임할 때 자기는 아주 극구 사양하지요 ‘나 같은 사람은 안 됩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쓸만한 사람을 써야지 나같은 사람은 최고로 비겁한 사람인데 그런데 제일 비겁한줄 알고 찾아 왔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그 빛과 어두움은 빛과 어두움을 묘사할 때 인간의 몸체, 실체가 있는 인간을 빛에 배당하고 어두움에 배당하는 식이 아니고 어두움을 실체로 만들어 놓고 그 어두움이라는 실체로부터 핍박받는 억압당하는 형식이 그게 바로 빛의 자녀가 되는 방식을 사용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빛이 되느냐 할 때 ‘너는 너의 한계만 들어낼 뿐이다.’ 주께서는 그런 식으로 접근을 금지합니다. 어두움이 인간의 몸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발산하느냐를 보여 주는 겁니다. 그러면 애굽이 어둡다고 해서 애굽이 만날 나쁜 짓만 하고 살인만 하고 그랬습니까? 아니죠. 애굽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하면 그냥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는 겁니다. 애굽 나라에 단 하나 빠진게 있어요. 뭐냐하면 출애굽기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요셉의 은혜를 안 지켰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우리 힘으로 살아간다고 여기는 것, 이것 보다 더 큰 어두움은 없다고 주께서는 판정을 내리십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도 만만치 않습니다. 히브리인도 마찬가지에요 ‘애굽 나라가 있음에 우리는 행복하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해 히브리인이나 애굽이나 똑같아요. 그런데 애굽은 애굽으로서 행복하다가 되고 든든하다가 되는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나는 애굽 나라에 그냥 살기만하면 됩니다.’라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허락을 안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신월동에 살고 있는 우리가 빛의 자이냐 어두움의 자녀냐 라는 판정은 간단합니다. 그냥 내가 가진 것 가지고 내가 열심히 번 돈 가지고 내 건강 가지고 그냥 밥 먹고 살면 충분히 천당 가겠다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예외가 없어요. 그 생각에 머물도록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바로 같은 생존과 돈과 권력에 대해서 같이 경쟁하면서 빛의 자녀가 밀리게 되고 손해 보게 되고 당하게 만들고 패배자가 되는 주께서 그런 식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 힘으로 내가 살수 없구나, 그렇다면 나는 살수도 없는 인간이 이 땅에 왜 태어났으며 등장해서 왜 힘들게 이 땅에서 버티어야 되는가? 자기 자신의 문제, 포지션, 영어로 말하면 position 우리말로 하면 어떤 지점, 위치, 자리를 말합니다.
내 자리가 과연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뒤에 그 다음에 자기 자리가 있다고 여깁니다. 내가 있고 내가 옷을 입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 자리가 건전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을 뒤틀어 버리는 겁니다. 자리가 먼저 있고 그 자리에 맞춘 백성을 추후에 생겨나게 했다는 식으로 순서를 바꾸는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순서를 바꾸는 작업은 내가 여기 있고 나를 위해서 어떤 내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로, 소거되고 제거되어야 되고 소멸돼야 해요 쉽게 말서 죽음이고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사라져라 얍’입니다.
내가 있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적절한 자리를 줘야 됩니다. 하는 인간아! 그 인간은 사라져라 얍! 사라질 위인이 없습니다. 안 사라집니다. 한 고집들 하거든요 사라지도록 그런 생각이 자신에게 위기가 초래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무엇을 이용하느냐 하면 어두움의 포지션을 갖고 있는 자들을 충분하게 이용을 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오기 직전에 애굽나라에 열 가지 기이한 자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자연이라 하는 것은 마치 큰 규모의 하우스, 집이에요. 자연은 우리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환경 같은 겁니다. 자연이 변란이 일어나 버리면 주기성이 깨진다던지 반복성이 깨진다던지 갑자기 태풍불다가 갑자기 가뭄된다고 하면 누가 곤란합니까? 날씨가 38도까지 올라가고 서울이 38도까지 올라간게 몇 십년만에 처음 이라 했지요
우리는 지금 자연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의지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이 고요하고 정상적으로 주기가 질서가 잡힐 때 우리는 안전감을 느끼고 생존의 터전으로 의존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애굽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립니다. 10가지를 흔들리라 하지요 흔들리라 하니까 주께서 흔들기 전에는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애굽이나 일본이나 이웃에 살아보세요 떡 하나 나눠주고 하는 그런 사이에요 뭐 감정 생길이유가 없습니다. 음식 쓰레기 대신 버려주고 하는 그런 사이고 택배 오면 대신 맡아주고 다 주는 게 있고 받는게 있는 그런 사이인데 주께서 의도적으로 강제로 빛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를 압력을 가해서 자연을 통해서 그렇게 분류시키고 말았습니다. 당황스러운 것은 양쪽다 당황스러워요
이번 강의 첫 번째 중요한 단어 나옵니다. ‘당황스러움’ 빛의 자녀의 특징이 뭐냐 ‘당황스러움’이 있어야 됩니다. 어, 이럴 수 없는데 이러면 내 포지션이 제로인데 내 위치도 있고 내 자리도 있었고 이 자리는 나를 먹여 살리는 자리인데 이 자리가 제로이면 나는 어떻게 살죠? 나는 뭐하고 살지? 내가 소멸되겠네, 내가 사라지겠네!
안양 강의에서 그런 질문을 했어요. 아담이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답변했습니다. 소명한다는 뜻입니다. 큰 땅덩어리에 작은 부분 땅이 결국 죽어서는 없어져 버려요 땅 속에 그냥 편입된 것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잠깐 있다가 말라비틀어지는 그런 암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이었습니다. 흙에서 왔으면 흙이라는 위치가 우선인데 우리는 몸이 우선이고 흙은 나중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살아있는 게 먼저이고 죽음은 기이한 현상이라 보는데 중요한 게 뭡니까? 우리가 원래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이 삶보다 순서적으로 먼저 있었던 겁니다.
흙이 먼저 있고 흙에서 발생된 것이 우리의 몸체이고 그 몸체는 잠시 있다가 ‘있었나?’ 하는 소리와 더불어 휙 불어버리면 다시 원상 복귀되어 가지고 불에 타고 나중에 보면 아무 것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유가 뭐냐?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을 표현해 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인간이라는 실체가 빛과 어두움이 추상에 불과한데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빛과 어두움은 추상이 아닙니다. 실제로 캄캄한 어두운 세계는 지옥이라고 표현되고 하여튼 어둡습니다. 반대로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니까 천국은 해와 달도 쓸데없더라 해와 달을 조명기구로 주문했는데 가져가라는 거예요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빛 자체가 해와 달의 색깔을 무색하게 만들어요 마치 태양안의 초불처럼, 태양 앞에 초불처럼 태양이 초불정도밖에 안됩니다.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잠시잠깐 눈부심을 경험했습니다. 빛이라 하는 것, 빛의 세계라고 하는 것을 잠시 경험했습니다. 감히 얼굴을 들고 볼 수가 있어요. 너무 빛이 빛나서……. 모세도 잠시 경험했습니다. 빛이 있음에 졸지에 어둠의 세계에서 밥먹고 살려고 애썼다는 사실이 들통난 겁니다. 빛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어둠에 속한 나를 위하여 빛이 있다는 그런 되지도 않는 그런 망상을 꿈꿔 왔던 겁니다. 자기가 우선이 아닌데 하나님이 창조가 우선인데 그 창조를 흔들어 버리니까 같은 창조물중에 하나인 우리도 같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만원버스 흔들리면 내가 흔들리면 다 흔들리잖아요 파도 치면 선장은 안흔들립니까? 다 흔들린다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면서 흔들리라 하는데 어떻게 흔들게 하느냐 하면 첫 번째부터 세 번째 까지는 같이 흔들어요. 네 번째 쉬고 다섯 번째부터는 애굽이 사는 동네와 히브리인들이 사는 동네와 차별해서 하나님의 자연을 다루십니다. 그러면 자연세계라 하는 것이 결국은 해와 달과 우박과 메뚜기라는 것이 실체 아닙니까? 메뚜기가 손에 만져지잖아요 실제로 있잖아요 물체아닙니까? 그 물체 내부에 하나님의 추상적인 빛과 어두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