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벧후2장20절(마술과 말씀)120914b-이 근호목사
안양-벧후2장20절(마술과 말씀)120914b-이 근호목사
이름 : 공은주(IP:211.211.128.214)
안양-벧후2장20절(마술과 말씀)120914b-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하나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밤에 꿈을 꾸지요. 꿈은 계획 따라 꾸는 것이 아니라 그냥 꿈이 발생되지요. 꿈이 발생될 때, 제가 묻습니다. 꿈이 나를 이용해서 꿈이 나왔습니까? 아니면 내가 꿈을 꾸겠다 해서 꿈이 나왔습니까? 꿈이 나를 이용해 나온 거지요. 그럴 때 나의 존재는 소외되잖아요.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프로이드란 사람은 꿈이 인간의 조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식’이라고 집어넣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 하겠다, 계획 잡는 것. 이걸 의식이라고 집어넣어 버리고, 의식에서는 누가 주인공입니까? 내가 했고, 내가 공부하고, 내가 돈 벌고, 전부 내가 주인공이지요. 나한테 발생되는 현상이면서도 내가 임의로 조정할 수 없고 내가 미처 생각 못한 게 있다고 보고 그걸 꿈을 통해서 그 세계를 무의식으로 본 겁니다.
그렇게 해서 프로이드는 뭘 생각했느냐 하면, 현대에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갈 때에, 이게 정신병이 주어지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나는 내 뜻대로 되어야 하는데 내 뜻대로 안 되니까 탓을 누구보고 가슴을 치는가 하면 킹콩처럼, 자기 가슴을 치는 거예요. 누구 가슴만 아픕니까? 지만 아프지요. 지만 술 먹고. 지만 횡포 부리고, 그러니 이것은 모든 현대에 있어서의 개체중심, 자기 개별중심에 있어서의 병은, 신체적인 병은 수술하고 째고 하면 되는데 더 심각한 병이 정신적인 병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과학이 관여하기가 한계에 이르는 거예요.
그래서 과학 말고 다른 방법으로 과학이 소용되는 정신적인 병을 고칠 수 없을까 나온 게 뭐냐 하면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시작이 된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하느냐 하면, 성경에서 주인공이 인간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인공이거든요. 예수님이 주인공인데,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요. 그래서 나온 용어가 무슨 용어냐 하면, 예수님이 지적했지만, 산상설교에서 얘기했지만 뭡니까? ‘맹세’지요.
사람이 맹세하겠다는 말은 지가 스스로 다짐을 하는 것을 맹세라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자기보고 대화하는 거예요. “나, 너 괜찮은 너지? 너는 견딜 수 있지? 할 수 있지? 그럼 우리 약속했다아~ 반드시 이것은 한다. 약속했다아~” 그런데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맹세한 것을 지킨다고 해서 바리새인 너희들이 그렇게 가르쳤는데, 원래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모세의 뜻은, 아예 뭐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이것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모세의 글에 보면, 신명기에 보면 니가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하는 구절이 있어요. 니가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고 한 말을 잘 들으세요. 중요하니까. 바리새인들, 쉽게 말해서 구약의 정통한 사람들 학자들, 신학자들은 우리보고 이야기했다고 하는 거예요. “얘야!” “예, 하나님” “니가 맹세할 수 있지?” “예, 있습니다.” “반드시 지켜. 어렵더라도 지켜.” “예, 알겠습니다.” “지키면 그 만큼 의를 저축할 수 있는 거야.” “죄보다 의만 모으면 양이 많으면 천국 가는 거야.” “감사합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의 의식이고, 오늘날 모든 교회 다니는 교인들의 의식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이 본디 그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누가 황당하겠습니까? 바리새인이 황당한 거예요. “어, 예수, 당신 이리 와 봐!” “글자 보자, 니가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이것은 백이면 백, 어린애라도 배우고 못 배우고 관계없이 천명이면 천명이 봐도 이 해석은 하나의 해석이에요.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 이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 부분이 그 뜻을 품고 있느냐, 그 뜻은 일체 맹세하지 말아라, 란 뜻이에요. 아~~ 2000년 기독교 역사 다시 다 바꿔야 됩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가운데 사람들은 명령하고, 명령받는 것 밖에 몰랐어요. 교인들이. 목사는 명령자요, 교인은 명령받고 하면 교회에서 세례 받고, 학습 받고, 성찬 받으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구원 받는다. 이것만 배웠습니다. 그래서 물 뿌리는 것, 떡 떼는 것,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구약 해석 하나 제대로 못 하지요. 그걸 명령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누구처럼? 바리새인처럼. 예수님 해석을 못 하는 거예요. 그 말은 일체 명령하지 말라, 라는 것이 원래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본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뜻은 뭡니까? 우리가 일체 맹세하지 말라, 라는 말은 그러면 그 말씀은 무효 되는 겁니까? 무효 될까요? 안 될까요? 무효 안 되지요.
그럼 그 맹세는 누가하고 누가 지키는 겁니까? 예수님. 예, 바로 그게 정답이지요. 예수님이 모든 성경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하여 증거 한 것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한 거예요. 예수님이 혼자 다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누가 인터셉트 가로채지요? 중간에 필히 인간이 나섭니다. 왜, 인간은 나서기를 좋아해요. 하나님과 자기 앞에 중보자 나서는 걸 싫어해요. 중보자를 알았더라도 알고 그 다음에 배척하고 자기가 직접 나서는 걸 좋아해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걸 제일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중보기도 하지 말고, 지가 지꺼 중보기도 하고서 자기 중보기도의 능력을 실험해서 과연 내가 믿는 자 맞느냐 안 맞느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보거든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나선 겁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하니까 예수님을 곱게 여기지 않지요. 결국 그렇게 했던 예수를 누가 죽입니까? 노숙자가 죽인 게 아니고, 세리와 창기가 죽인 게 아니고, 누가 죽이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 죽였잖아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이 사회에 전혀 쓸모짝이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니까지 거 하나 없어도 내가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거예요. 이제는. 왜? 자기가 알만큼 알고 자기가 의로운 만큼 의롭고, 믿을 만큼 믿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챙길 만큼 챙겼으니까. 예수 믿고 아직도 예수, 예수 할 이유는 없다 말이지요. 예수 알았으면 이제 예수 치워버리고 내가 직접하니까, 맞상대로 나가면 된다는 것이 우리 바리새인들의 심보인 거예요.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어요. 누가 와서 자꾸 간섭하는 거 싫은 거예요. 아니 시어머니 간섭하는 것도 싫은데. 인간은 자율성 자립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예수를 죽였습니다. 죽이고 난 다음에 그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났지요. 죽였던 자를 살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에 창자국과 못 자국이 있는 이상, 있는 상태에서 살아났다는 말은 주님을 만나볼 때마다 뭘 생각하느냐 하면, 과거는 흘러갔다, 이게 아니고 오히려 과거가 어떠한 진실이 나의 과거를 꽉 채웠는가를 이제는 제대로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시기가 시작된 겁니다.
그건 뭐냐, 우리의 생각, 주어진 십자가 앞에서 죄였다는 것,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죄인 중에 괴수인데 구원받은 것은 창세전에 은혜로 택정함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디모데전서1장, 디모데후서1장, 둘 다 1장이에요. 둘 다 연계시켜 놨어요. 죄인 중에 괴수를 창세전에 선택해서 건졌다는 것, 그러면 우리가 중간에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선택이 안 되었으면 아무리 내가 무슨 발악, 노력을 해도 선택의 힘이 아니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이 안 된다는 것. 더 나아가서 선택했다는 말은 선택받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구원되기로 선택되지 않았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미운 짓, 고운 짓, 한 적도 없는데 아무것도 한 적도 없는 이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하고, 미워하기로 작정한 거예요.
그렇다면 에서와 야곱이 살아갈 이유는 주님의 미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서로 태어나야만 했고 야곱은 사랑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장에다 우리를 집어넣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내가 내 자리를 따로 마련해가지고 로마서9장 본문보고, 욕심나는 거예요. 내가 내보고 “니 에서자리에 가지 말고, 니 그 자리 사랑받는 자리에 슬쩍 밀어 넣는 고러한 또 시나리오를 쓴다니까요. 시나리오를 써서 주여,자비를 베푸소서. 집어넣어요. 마치 요번에 칸느영화제의 피아타처럼. 신의 자비를 도와주소서. 하는 것처럼.
신의 자비를 구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구원을 안 받았으니까 아직도 뭐가 필요하다? 자비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보세요. 얼마나 자기 위주입니까? 지금도 자비를 베풀잖아요. 지금도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햇빛과 공기 한 달에 얼마 냈습니까? 계량기해서 얼마 냈어요? 안 냈지요. 전에 가락강의에서 했잖아요. 가을이 오는데 우리가 얼마나 기도해서 가을이 겁니까? 가을 오는데 기도한 적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해도 가을 오지요. 우리가 기도 안하면 가을 안 오고 바로 겨울로 가는 겁니까? 뭔가 꿈처럼, 아까 프로이드의 꿈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손을 넘어서는 영역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넘어서는 순간, 우리가 우리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해석의 요점이에요.
내가 내 위주로 성경해석을 할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나는 어떤 전체의 부분이지, 내가 알맹이, 핵심이 돼 가지고 전체를 내 위주로 끌어서 주워담을 수 없는 겁니다. 내 바구니에 담을 수 없는 거예요. 증권 투자하는 사람은 한 바구니에 계란을 담지 말라 하는데 우리는 뭐든지 내 위주로 바구니에 담잖아요. 백화점 세일한다 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박고 담아오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뭘 놓치는가 하면, 내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닌데, 우리는 평생 동안 뭐라고 오해를 하는가 하면,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 여기 있다. 벌써 시작부터가 반칙이에요. 벌써 레드카드. 벌써 시작부터가 이미 해석이 틀려먹었어요. 바리새인들의 해석이 틀려먹었어요. 그래서 아까 꿈이야기를 계속 이야기하게 되면 에스겔, 예레미야에도 나오는데, 아까 여자들이 에스겔에서 봤지요. 여자들이 하나님께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심령대로 자기 지껄이고 싶은 대로 한다 하지요.
그 말씀을 생각해 보면, 설교하는 사람뿐만 아니고, 일반교인들도 말할 때, 굉장히 무서워요. 주께서 주지도 않은 것을 주의 뜻이라고 우기는 게 아닌가라는 것을 스스로 자기를 생각해 봐야 돼요. 주의 뜻도 아닌데 내가 성경 아는 걸 주워 모아서 주의 뜻이라고 남한테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강요하면서 그에 대한 효과가 내가 설교하니까 구원 받더라 라는 멋드러진 효과, 내가 설교해서 내가 전도해서 구원받으면 나는 아직 이 땅에 쓸모짝이 있다는 셈이 되고, 쓸모짝이 있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은 다 죽여도 설마 하나님이 나를 아프게 하거나 병들게 하거나 하지 않고 곱게 귀한 집 자식처럼 키울 것이라는 은근한 희망과 소망을 일방적으로 내가 챙겨보는 게 평소 생활이 아닌가 자기를 돌아봐야 돼요.
그럼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이 그런 심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눈치 채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적 사고방식, 희망을 보여주고 일곱 번 넘어져도 8번 째 일어난다는 식으로 계속해서 꿈을 키워주는는 식으로 결국 커미션 챙겨서 예배당 지어서 지 밥벌이하고 가족 먹여 살리는 그런 짓거리에 우리가 그들을 편성해 주지 않았는가, 다시 말해서 주체가 없는데, 아까 꿈 이야기 했지요. 주체가 영향력이 한계가 있어요. 그러면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인데, 분명히 고린도전서15장에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은혜라고 하는 것은 누가 이야기합니까?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그동안 조심스럽게 신앙생활 잘 해서 지금의 나를 이만큼 이룩했다는 그러한 사도가 이야기한 것과 정 배치되는 쪽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머리 좋은 사람은 더 꼼수를 써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나는 대단한 우수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버리지 마옵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이중트릭과 3중트릭을 써가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는 쪽으로 간다 이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이것은 우리는 설교하나, 강의하나, 이게 전부다 결국 사기꾼이 되는 거예요. 마호메트만 사기꾼이 아니고, 교인들도 사기꾼이지요. 사기꾼.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이중적인 것을 자기가 알면서 남한테는 안 들키는 식으로 내가 많이 알고 똑똑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기꾼으로 살아가는 거죠.
그 다음에 3장에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이리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취지는 뭐냐 하면, 이 성경말씀을 우리가 안다고 해서 찢어버릴 수는 없다는 거예요. 원래2012년도에 알았잖아요. 그럼 2013년도에는 이제 성경 알았으니까 이 성경 버릴까요? 이거 덮을까요? 알았는데 이것만 지울까요? 2013년도까지 살면 다행이지만, 하여튼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습니다만, 2013년도 7월에 이 본문다시 보게 되면, 여기서 또 뭘 느끼겠습니까? 새롭게 ”아~ 이것도 나한테 적용하는구나!“ 다시 느끼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말씀 속에 세계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서 계속 역사해서 말씀이 나로 하여금 이 말씀에 적합한 인간이라는 것을 딱 연결시키도록 말씀이 지금도 쉬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늘 말씀이 우리에게 덮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밤을 잘 때도 가을밤은 싸늘해지잖아요. 에어컨 몇 대 틀었어요? 인덕원에 에어컨을 몇 대 틀어야 가을밤처럼 서늘해집니까? 우리가 틀었습니까? 전기세 내서. 아니지요. 그것처럼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가을 속에 잠기게 하잖아요. 말씀이.
하나님이 주님이 살아계셔서 우리를 가을 속에 살도록 만들어요. 단풍은 떨어질 거예요. 우리는 단풍을 줍기만 하지만. 그것처럼 우리의 매일의 삶이라 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대로 되어 감을 깨닫는 식으로, 누가? 우리가? 아니에요. 누가? 주께서. 주께서 말씀으로 하여금 말씀에 적합하도록, 말씀과 일치되도록 살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할 때, 사랑하는 자라 하는 것은 결국 뭡니까? 그 사랑한다, 할 때에 2012년도 가을 돼도 이 사랑이 어떻게 됩니까? 원래 못 느낀 사랑을 다시 한 번 사랑이라는 게 일방적인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우냐 이 말이지요. 일방적 은혜라는 게.
사랑하는 자들아, 2012년도에 미처 느끼지 못한 그거, 2013년도에 가면 사랑하는 자들아, 또 2014년도에 가면 또 사랑하는 자들아, 결국 우리는 사랑만 있으면 자식이 생일 못 챙겨줘도 상관없지요. 그만큼 우리가 자식이 못 챙겼다는 이유 때문에 화를 냈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은 안 중요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그것이 나한테 사랑을 대체물로서 그걸 내가 신봉해 왔다는, 평소에 내가 미처 몰랐는데 막상 주께서 사건을 터지게 해서 조립해보니까 “아!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소홀히 대했구나! 십자가에 대해서 너무 헐하게 봤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2절에 봅시다.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관심사가 우리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가가 아니고 뭘 귀히 여긴다? 말씀. 선지자는 자꾸 말씀 중심이에요. 말씀을 꿈이라고 봅시다. 꿈은 만들었지만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내일은 내가 꿈을 이렇게 꿔야지. 이렇게 해서 만들 수가 없습니다. 꿈은 꿨지만, 내가 꿈을 만든 제작자는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몸을 가지고도 내가 밤이나 낮이나 내가 주인공이 아닌 거예요. 그걸 마치 낮에는 주인공처럼 살지만, 밤이 되면 우리는 낮에도 내가 주인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것처럼 그렇게 세상을 내 편의 위주로 재구성하면서 일방적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니 그걸 사랑하는 자들아, 할 때 우리는 그것도 사랑이 내거라고 막 끄집어 당겨요. 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고, 우리가 모든 걸 놔 버렸을 때, 사랑만 있으면 십자가만 있으면 모든 게 뒤떨어지고 치매 걸려서 오줌 싸더라도 그것도 멋드러진 사랑받는 자태입니다. 그것조차도. 그 정도로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나의 피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산상설교 매일 어깁니다. 하지만 주께서 그걸 다 이루셔가지고 죄인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준거예요. 다 이룬 걸로. 우리는 이 고마움을 잊어버리면 개가 토했던 것으로 되는 겁니다. 아까 베드로후서 2장 말씀 딱 우리보고 한 거예요. 세상에 남 탓하지 마세요.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인데 심한사람도 있지요.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3절을 봅시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행하여 앞에 뭐가 있습니까? 앞에 정욕이라는 말이 있지요. (정욕) 행하며, 이 정욕 개념이 또 어려워요. 개념이 어렵다는 말은 우리가 보통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3가지 욕구에서 인간은 음식에 대한 욕구, 생식에 관한 자기 DNA를 건들고 싶은 욕구, 그리고 쉬고 싶고 편해지고 싶은 몸에서 나오는 욕구, 이제 정신에서 나오면 자기가 최고의 신이 되고 싶고, 남한테 꿇리지 않고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높이자, 성경이야기보면 참 재미있지요. 우리의 본심이 우리 속의 탑돌이 하고 있다 말이지요. 매일 지가 만든 탑을 아침마다 돌고 있어요. 아침마다. 그걸 또 그대로 겨냥한 것이 불교고, 그 안에 내장된 것이 기독교거든요. 매일 탑돌이하고 있는데, 그것만을 정욕이라 하는데 정욕이 그것만이 아니에요. 그래서 어렵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정욕은 사적인 욕심을 말하는데, 이 정욕이 뒤에 보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합니다. 인류의 시나리오 있잖아요. 시나리오 자체도 다른 시나리오로 바꾸는 그것도 정욕에서 나온 거라 보면 됩니다. 우리의 정욕이 사적인 욕심에 멈추는 것이 아니고 정면적인 신의 계획 자체에 대해서 부인, 거부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에스겔12장 24절 다시 한 번 봅시다. '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아첨하는' 그 다음에 '복술' 이지요. 모든 미아리에 있는 점쟁이들이 결국 앞에 형용사를 붙인다면 ~~하는 점술, 복 친다? 아첨하는, 아부하는, 복술을 하지요. 이게 아까 마술이지요. 이걸 경건하게 만들려면 종교, 종교라 했잖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획에 사람들이 정면으로 반발하는 것은 평소에 내가 나한테 아부하는 식으로 자기 인생을 조작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가 있습니다. 그 과거도 현재 자기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조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여고생 앨범 중에서 남 사진은 좋은데 매직가지고 얼굴에다가 시커멓게 칠하고 가위로 자르고 그리고 자기 때린 선생님한테는 아예 칼로 난도질 쳐났어요.
그리고 자기 미운 동창생 있잖아요. 자기한테 도움이 안 되면 코를 못생기게 만들고 들창코를 만들던지, 가위가지고 동그라미 뚫어서 너는 내 인생에 없어! 너는. 이거 다 누구 좋아라고 하는 겁니까? 누굴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한테 아부하는 거예요. 남한테 그렇게 오려 놓고 그 친구가 나한테 잘해주면 '어우, 내가 왜 사진을 찢어놨지? 미안하다. 친구야.' 다시 붙여놔요. 붙이기 바빠. 그러니 시나리오를 누구 위주로 짜야 돼요? 모든 인류사가 내 위주로 짜여줘야 돼요. 그게 진화론입니다. 현재 진화론하고 창조론하고 문제가 있는데. 당나귀에서 말나왔다 해서 문제가 있어요. 당나귀와 말이 종이 다르거든요. 못 나오거든요. 못 나오는 것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하니까 증거가 없는 거예요. 증거가 없으니까 이게 다 정욕에 속하는 겁니다. 나한테 아부하는 식으로.
진화론이 왜 기분 좋게 하느냐 하면, 나의 발전에 기대를 갖기 때문에, 모든 게 진화한다는 말은 모든 게 변화한다는 뜻인데, 다윗은 말하기를 발전한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것이 자꾸 변화한다 이런 뜻으로 했는데, 뒤에 사람들은 그걸 진화로 많이 써버렸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좋은 쪽으로 발전한다고 본 겁니다. 다윗은 절대로 좋은 쪽으로 발전한 게 아니고 상황에 맞도록 발전한다, 그러니까 멍게가 그렇게 못 생겼잖아요. 우리가 보기에 못 생겼는데, 멍게가 왜 못 생겼느냐 그 상황에 맞도록 못 생겨야 생존이 돼요.
그러니까 인간은 지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만드는 거예요. 이게 진화론이라니까요. 환경이 만든 것이 진화론인데, 사람들은 진화론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환경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노력만 하면 진화될 수 있습니다.” 라는 식으로 엉터리 같은 진화론을 한 거예요. 그래서 생물체에서 진화론이 인기가 있는 이유가 자기한테 희망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희망을.
인류가 이리 있는데 옛날에는 원숭이에서 인간이 됐다 이리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요새 진화론은 문제가 하도 많으니까 지금은 이렇게 안 가르쳐요.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면, 원숭이에서 여러 가지 갈래로 갈라져 나왔다. 사다리 타기 알지요? 사다리 타기해서 다 당첨되는 게 아니잖아요. 한 사람만 되듯이. 계속 갈라져서 화석이 나왔다. 그러면 인간과 연관시켰는데, 화석이 나와서 이게 갈라지는 거예요. 네안데르탈인그거하고 크로마뇽인하고 원래 같이 나온 게 아니고 서로 다른 것으로 나왔다 보는 거예요.
인류는 뭐냐, 호모사피엔스 지혜로운 호모 유인원 뜻에서 한 줄기에서 진화인데, 진화론은 여러 갈래 중에 하나라,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어떻든 간에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나왔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원숭이는 어디서 나왔느냐, 원숭이는 양서류에서 나왔어요. 땅과 바다를 오가는 양서류, 거기서 조류 나오고, 한 쪽은 조류로 가버리고 한 쪽은 포유류로 나와서 원숭이가 됐다고 하는 거예요. 양서류는 어류에서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어류는 어디서 나왔는가, 어류는 콜라겐이라 해서 갑자가 세포와 세포사이에 접착제하는 역할들이 갑자기 바다에서 많이 생겨가지고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되면서 제일 먼저 등장한 게 어류라는 거예요. 단세포는 어디서 나왔는가, 단세포는 녹조라는 데서 거기서 산소가 만들어져서 거기서 세포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세월이 몇 년 걸렸는가, 세월이 총47억년 걸린 거예요. 우주는 137억년이고 지구의 나이는 46억년내지 47억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수학자들이 계산해 보세요. 47억년가지고 수학적으로 그렇게 나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아요. 우주의 137억년 다 합쳐도 생명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수학적 확률로 계산해 봐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억지예요. 억지.
그러니 인간의 정욕이라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욕은 사적인 개인적인 용도로 쓰여 지는 것이 아니고, 정욕은 사실은 적그리스도들, 예수님이 하시는 세계, 모든 계획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력이 우리에게 내 담당으로 정욕과 욕심을 이렇게 배당시켜 준 겁니다. 그래서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 이 말은 맞아요. 그런데 그 환경이 물질적인 환경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 환경도 거기서 더 넓게 더 확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영적환경이 오늘날 우리를 영적 인간으로 만든 겁니다. 예수님하고 니고데모가 이야기할 때, 니고데모가 지가 말한 것에 모순이 생겼어요. 모순이라 하는 것은 같은 지점에서 충돌되는 두 가지 개념을 모순이라 합니다. 뭐냐 하면 자기가 육적인 것을 이야기해 놓고 내 몸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갑니까? 내 몸도 육이거든요. 천국도 내 몸이 들어가니까 천국도 물리적인 세계로 본 거예요. “내 몸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갑니까?” 라고 하니까 주님이 답변하기를 물질적으로 답변하면서 영적으로 담았어요. 니가 몸이 다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하니까 그 이야기하니까 니고데모가 평소에 이야기했던 것이 육적에서 이야기했던 것이 표시가 나버렸어요. 어떻게 내가 모친의 몸에서 다시 나옵니까? 이 말은 결국은 주님께서 “니고데모야, 니가 영적인 인간, 하늘나라, 천국을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육적인 이야기했잖아. 빨리 표시 내.” 그런 뜻이란 말이지요.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이런 식으로 질문하지 말고 다른 식으로 질문을 해야 됨을 요구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신 질문을 요구받으면서 우리는 나 자신의 오해했던 질문의 틀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육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영적인 것으로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자체가 육적으로 표현해도 그게 전부다 영적인 질문이 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거듭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 제가 묻겠습니다. 제 애가 공부를 잘하는데, 애가 법대 쪽으로 갈까요? 어디로 갈까요? 남들 보기에는 기복신앙처럼 보이고 굉장히 물질적으로 보이지요. 하지만 영적 거듭난 사람은 그런 기도를 해도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영적인 질문을 하는 겁니다. 영적인 질문. 다시 말해서 의대를 하던, 법대를 하던, 그것이 내 손에서 끝나버렸습니다. 주님의 계시수준에서 말씀이 작용하는 말씀이 말씀대로 적용하는데 어느 쪽인지를 우리가 알고 싶습니다. 그런 쪽으로 기도하고 질문을 던진다고 보면 돼요.
결혼을 못 했다. 그럼 기도하세요. 갑자기 이 근호목사 기복신앙으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키는 몇 센티로 하고 몸무게는 몇 킬로로 하고 이야기해야 돼요. 눈은 누구처럼 닮았고, 얼굴은 작았으면 좋겠고, 하란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항상 뭘 염두에 두는가 하면, 이렇게 할 때, 주께서 거기에 대해서 어떤 되받아 오는 질문을 받을 수 있는 바탕으로 깔고 하란 말이지요. “주여, 기도했습니다.” 손 털고 돌아서지 말고, “자, 내가 요런 식으로 질문을 던졌는데, 주님한테 지적받을 게 어떤 것을 지적받아야 되고 뭘 고쳐야 되고 뭐가 문제이며 내가 기도한 게 어떻게 잘못됐습니까? 응답받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질문을 하란 말이지요. 그런 질문은 속에 있는 그대로거든요.
딸이 결혼 안한다. 신랑감을 구한다. 이게 평소에 남들한테 이야기하지 말고 그걸 그대로 주님한테 이야기하면 될 거 아닙니까? 주님 앞에는 미안해서 이야기 못하고, 남들한테 해야지.“그러면 이거는 둘이 모순되지요. 딸이 결혼식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세상이 말씀으로 만든 것이 물로서 망하지요. 처음 천지창조부터 뭐가 담겨 있었다? 물로서 심판 받는다, 담겨 있었지요. 물로서 심판받는 것처럼 그 다음에 뭐가 있다? 불로서 심판 받는 게 있지요. 그렇게 해 놓고 우리는 그럽니다. 그러면 두 달 뒤에 우리 딸이 결혼식 하는데 그 전에 갑자기 하늘에서 불내려버리면 우리 딸 결혼식 예약 취소하면 예약금 날리잖아, 이리 나온다 말이지요. 그런 소리 나오잖아요. ”주께서 그런 질문하라고 해서 이 말씀 있는 거야. 너희들은 부분이고 나는 전체고“ 부분이 부분인 것을 아는 것은 전체와 부분을 대조해 볼 때 아는 겁니다.
주님의 생각이 전체가 와서 덮을 때, 그러면 내가 두 달 후에 딸 결혼식인데, 두 달 후에 주께서 재림하시지, 라는 생각을 끄집어내면서 우리는 항상 내 나름대로의 정욕대로 산다는 것이 여전하구나! 라는 것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 니가 정욕대로 한다는 이 말이 남의 이야기 아니고 누구 이야기하는 겁니까? “야~~ 딱 나에게, 또 다시 나에게 하는 이야기구나!” 속으로 쾌재를, 박수를 칠 수 있는 겁니다. “주여, 모든 말씀이 내 보고 하는 거군요.“
정욕대로 행하며, “주님이 강림한다고? 아이구, 한두 번 속아야지, 주님께서 1984년도에 온다고 해놓고 안 오잖아, 거 봐, 안 오잖아. 언제? 언제? 언제 와? 안 온다고. 구라야, 구라.” 라는 생각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남들이 하는 것뿐만 아니고 내가 그걸 하게 되고 또 하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계해서 자기 차례가 왔을 때, 곗돈 찾을 때는. 조그만 공책에 마지막 도장 다 찍었는데, 이거 하면 700만원 타는데, 이거. 날리면 안 되잖아요.
항상 우리는 정욕이라는 것이 늘 있어서 우리는 주의 말씀과 그런 식으로 접촉하도록 주께서 정욕을 살리는 식으로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쉽지요? 우리 속에 있는 정욕을 늘 인식시키면서 말씀을 말씀대로 결부를 시켜줌으로서 말씀이 우리를 살리지, 내가 살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조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뭐가 아니다? 주체가 아니다. 꿈을 내 맘대로 못 꾸듯이 니는 안개니라, 안개 되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내 정욕대로 살게 하시면서 “아이고, 쪼다야, 안개다. ”안개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안개는 소용없습니다. 안개는 어제안개, 오늘안개 똑같잖아요.
매일매일 생일인데, 특정 날만 생일이라 하는 것은 안개 입장에서는 끝장났다 이 말이지요. 아마도 내년쯤 바라기는 우리 따님이 일부러 또 생일날 모른다 할 때, 엄마가 화내 가지고 끙~할 때, “어머님, 제가 은혜를 받고 보니까 어머님은 안개네요.” 할 때, “아! 그래 이 때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니가 뭔가 대처할 때 말씀으로 말씀의 성령으로 대처하게 되면 내 평생 생일상 안 차려도 괜찮아. 내가 이게 소원이었다.” 이런 때가 오면 좋겠지요. 뭐든지 말씀에서 서로 부부가 말씀으로 만나야 되지, 떡으로 사는 게 아니잖아요. 말씀으로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절에 봅시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우리 속에 있는 정욕이 말씀을 거부하는 성질이 있다 말이지요.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그 다음은 뭡니까? 멸망하지요. 이 멸망이야기가 항상 우리의 바탕에 깔아야 돼요. 제가 수요일인가 했잖아요. 사람은 죽음을 바탕으로 해서 살아간다고. 그러니까 죽음이란 공책에서 문안이 떠오르면 그게 진리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죽음이란 바탕과 더불어서 거기서 글자가 떠오르면 전광판처럼 죽음을 바탕 해서 항상 말씀이 나오게 돼 있지, 그냥 내가 살기위해서 나오는 말씀은 엉터리해석입니다. ”이미 나는 죽었는데, 어? 말씀은 살아있네!“ 이렇게 나올 때, 그 때 제대로 성령을 통해서 지금 받고 있다 이리 보시면 됩니다. 죽음을 통해서.
이미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물이와도 괜찮고 불이와도 괜찮은 거예요. 고물암장 오르다가 죽은 자가 오르는 거거든요. 올라가도 죽은 거고, 떨어져도 죽고. 사모님, 애들은 골치 아프겠지만, 죽었다는 것에.
그러니까 주께서 이미 말씀의 그물을 다 쳐놓은 거예요. 우리가 떨어져도 말씀의 세계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는 말씀이 전부이고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하나의 부분으로서 움직이고 있지요. 하나의 부속품으로 말씀세계에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불이와도 괜찮고 물이와도 괜찮아요. 멸망 되도 괜찮아요. 우리는 보험하나 잘 들어놨어요. 집에 불이 나도, 뭐가 돼도 다 괜찮아요. 그걸 가지고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하는 말은 그 ‘자’속에 성령이 집어넣어줘야 우리는 사랑하는 자들아 라는 박스 안에 들어가지 우리가 죽도록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가지고 사랑하는 자들아 안에 넣어주질 않습니다.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어서 그냥 들어갈 때는 주체를 죽이고 들어가요. “니는 부분이고 내가 전부야.” 라는 마음으로 집어넣어버리면 이래도 사랑하는 자들아, 저래도 사랑하는 자들아.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과거가 우리를 밀어주는 게 아니고 미래가 우리를 당긴다고 봅시다. 부부가 있는데, 남편 아내가 있으면 우리는 보통 결혼식을 어떻게 합니까? 남편아내 하나 돼 가지고 둘이 한 몸 돼 살아가잖아요. 이거 백날해도 둘이 하나 안 됩니다.
그런데 미래에 하나의 점이 있다 합시다. 하나의 점을 향하여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한 점에, 초점에 모아졌다면 그 부부는 갈수록 한 몸 되지요. 갈수록. 예수님이 남편이고 우리가 아내라면 우리는 돌아서면 예수님 생각 안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으로 니가 내안에 네가 내안에,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너희가 나와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계속 잡아당기고, 누굴 만나게 하고, 모이게 하고, 또 어떤 때는 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전부다 만나게 하는 거예요.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안 되지요. 제가 수요일날 이야기했잖아요. 이상적인 부부라 하는 것은 그저 아내를 웃기게만 하면 되고, 아내는 웃기만 하면 되고, 얼마나 좋습니까? 남편은 아내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매일 웃기는 기라, 제일 웃기는 게 뭐냐 하면, 보너스 받았을 때, 돈만 가지고 오면 돼요. “돈이야!” 하면 마누라는 까르르....웃지요. 돈만 갔다주면.
남편이 제일 쉽게 웃기는 것은 돈만 갔다주면 되니까 일단 돈 벌고. 돈만 갔다주지 말고 술, 담배 안해야 돼. 맨정신으로 와야 돼. 그냥 또 오면 안 되고, 이벤트를 벌려서 재롱을 떨어서 아내의 옛날 동화책의 그리웠던 왕자님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웃겨야 돼요. 그러면 아내는 그냥 앉아서 웃기만 해. 오늘도 이벤트 벌려봐라, 한 번 웃어볼게. 까르르 웃으면 그게 이상적인 부부사이. 없지요. 그렇게 되려면 일단 돈이 먼저 받쳐줘야 돼. 돈 없으면서 웃는 것은 앞에 농약 갔다놓고 마지막으로 웃는 거예요. 마지막 죽을 때 그렇게 해요. 한평생 살아온 거 마지막 하하하 웃으면서 김국환의 타타타 웃으면서 죽으려고 그 짓하지.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웃게 하기 위해서 돈을 번다는 자체가 뭡니까? 온 몸이 망가진다니까요. 정신까지. 망가져서 파김치 돼서 들어오니 이거는 걸레도 아니고 발로 차 버려요. 발로 차면 뚜루루 구르고. 돈은 좋다마는 저 인간은 싫은 거예요.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그러니 다 갖출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니는 나의 신부이고, 나의 아내라 하는 것은 지금 당장 현재 승부 보자는 게 아니고 말씀이 다 이루어질 때, 다 마감될 때, 그 때는 니가 내와 한 부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이게 바로 사랑하는 자들아, 그러니까 천년이라 하는 것은 하루라 하는 것은 과거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신부가 알고 있는 날짜 개념이에요. 시간개념이에요. 하루하루 구분되고, 천년 구분되니까.
그런데 위에서 잡아 올려 당기는 크레인 입장에서 보면, 그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이고 그거 의미 없다는 거예요. 니와 내가 하나된 것,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한다. 그거면 됐지, 부부가 사랑하면 됐지, 몇 년 사랑했습니까? 몇 년 지냈습니까? 그거는 의미 없다는 거예요. 비가와도 걱정 없고, 불이 떨어져도 걱정 없고, 번개 지진이 나도 관계없고, 요한계시록의 모든 것 일어나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은 안 믿는 사람 겁주기 위해서 일어나는 거고.
우리 사랑하는 자에게는 이런 일터지고 저런 일 터져도 이미 사랑받으면 그 사랑이 모든 걸 넉넉히 이기는 겁니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다 이루었다 했는데 몇 번이나 이렇게 이야기해도 우리는 걱정하고 염려하고 세상 정욕 때문에 내 소망을 따로 챙기고자 조마조마하며 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저희들 조마조마하지 않도록 모든 일이 주의 뜻대로 주와 하나 되기 위해서 벌이는 일인 것을 저희들이 굳게 감사함으로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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