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에스겔3장 12-15(주의 신)120926-이 근호목사
8강-에스겔3장 12-15(주의 신)120926-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83.105.212.7)
8강-에스겔3장 12-15(주의 신)12092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장 12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12-15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찌어다 하니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 곁에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가에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민답히 칠일을 지내니라.”
보통 자기를 소개할 때 ‘나는 이렇게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자기 행한 것에 대해서 남에게 보이려는 경향을 보이지요. 그런데 에스겔에서는 자기 자신의 애씀과 노력이 아니라 주의 신이 나와 함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하고 게임이 안 되지요.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이만큼 노력했습니다, 나는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는 국회의원 누구하고 친합니다, 나는 미국 대통령하고 전화통화 하는 사이입니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하지요. 내 노래가 빌보드차트에 올라갔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데 에스겔은 뭐라고 하느냐, 주의 신이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은 게임이 안돼요. 주의 신이 없는 사람한테는 게임이 안 될 정도입니다. 하나님과 상대해서 살아온 인생, 어느 인간이 거기에 견줄 겁니까? 이것은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적도 있었습니다. 모세당시에 70명 장로들에게 한꺼번에 주의 신이 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야기했습니다. ‘장차 모든 주의 백성은 이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사람,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사람들의 집합이 될 것이다.’ 그것을 지난주일 오후에 신의 혈통이라고 이야기했지요.
그것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이 ‘주의 신이 나를 감동해서 힘 있게 나(에스겔)을 들어올렸다.’고 할 때 우리는 이것이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나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만약에 우리가 에스겔처럼 주의 신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늘나라 갈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하면 우리가 하늘나라 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다 헛수고다 그 말입니다. 교회 와서 무슨 짓을 해도 하늘나라 못갑니다. 그런데 주의 신만 임하면, 성령이 임하면 갑니다.
성령이 임하면 갑니다.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 권력 센 사람과 좋은 친분관계를 유지한다고 해서 하늘나라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을 무시하고 모독하고 사람취급 하지 않고 따돌리고 그래서 인간대우 못 받는다 할지라도 성령이 임하면 천국 갑니다. 이것은 우리가 근원적으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 것을,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서 새로 정립할 것을 우리한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야, 나도 성령 받으면 하늘나라 가는구나.’ 그러면 성령 못 받은 채로 열심히 교회 다니는 사람, 그것은 당연히 지옥 가는 거지요. 성령 받으면 얼마나 신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막상 성령, 오늘 본문의 주의 신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는 주의 신 받기 전에 생각했던 이 모든 것을 다 잃어야 됩니다. 내 것이라고 여긴 것을 살살 긁어서 누룽지처럼 다 버려야 돼요. 다 잃을 때 다 얻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억지로 자기를 잃고자 해서 될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 자체,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라고 아주 가볍게 그리고 흔하게 이야기하지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이 세상은 나에게는 안 맞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왜 자꾸 놓치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하나님께 맞게 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논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만든 세상인데 우리는 억지를 부리기를 내게 맞는 세상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거예요. 반칙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고 누가 와서 말려야 되는데 너나 나나 다 그러니까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신이시여, 내게 맞는 세상을 허락하소서.’ 이런 기도가 출발부터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맞는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맞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나하고 우리하고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나는 나만 있으면 그것으로 완료입니다. 그것으로 완성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되어버리면 내가 저 사람에게 뭘 해줍니까, 라고 상대방이 발생합니다.
내가 있음은 저 사람으로 하여금 저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에게 주의 신이 임한 것은 에스겔에게 맞춤 세상 만들기 위해서 주의 신이 임한 것이 아니고 에스겔이 봉사해야 되고, 에스겔이 섬겨야 되고, 돌봐야 되고, 외쳐야 되고 활동해야 되는, 우리라는 하나님이 지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바로 에스겔입니다. 우리가 있기 위해서는 우리와 나는 같이 허락되지 못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나라는 것은 삭제되어야 합니다. 나라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됩니까, 이런 기도는 돼요. 그런데 ‘하나님이여, 이 세상은 나를 위한 맞춤세상, 나를 위한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이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되도 않는 기도를 한 거예요. 나를 잃어버려야 되는데 나를 안 잃어버리고 내가 유지되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만드신 그 천지와 우리는 안 맞게 되어 있습니다. 괴로운 것은 본인만 괴로워요.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성경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나한테 이익 되라고 보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고 성경자체가 우리한테 외치는 것은 ‘나에게 맞는 세계라는 것이 성경 안에서 성립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나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을 상대하고 나부터 출발해서 이웃도 사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 가족, 내 처나 자식이나, 하여튼 자기와 관련된, 자기가 예뻐하는 것에서부터 확장해서 나도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웃, 그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부터 우선 챙기고자 하는 자기 속셈을 포기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확장된 자기영역의 확장, 자아의 확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과 마찰과 충돌을 야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전에 안동 성광교회에 잠시 있었습니다. 교인 몇 되지 않았지만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거기 두 부류의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교정직 공무원, 교도소 근무하는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혼자서 공부하기 어려우니까 모여서 학원도 다니고 공부도 같이하는 부류였습니다. 주변에 청송교도소가 있었으니까요. 그 공부하는 사람들이 새벽기도도 나오고 예배참석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를 왜 나올까요? 그들이 안동성광교회에 왜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할 테니까 제발 공무원직을 저한테 허락하소서.’ 그 마음으로 오는 거예요. 내가 어떤 벌도 달게 받을 테니 이 공무원직……, 이 직업은 정년까지 보장받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주로 20대 말에서 30대 초반의 청년들인데 이거 합격해야 돼요. 이거 외에는 눈앞에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곧 교정직 시험이 눈앞에 닥쳤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공부만 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이지요. 공부도 물론 하고 그 앞에 교회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어릴 적 빵 나눠주는 교회에 한 번씩 갔던 경험이 있는 청년들이니까, 그래서 자기 인생의 제일 중요한 시기에 새벽기도까지 나와요.
새벽기도 때 보면 뒤에 건장한 청년들이 죽 앉아 있습니다. 그때 나는 신났지요. 새벽기도인데 사람들이 많이 나오니까. 그들은 교회 청소부터 시작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면서 그들의 희망은 교정직공무원시험에 합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시험에 합격해서 거기 근무하면서 밥도 산 적이 있었어요.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까? 그런 부류의 청년들이 한 일곱 정도 있었고 또 특이한 부류 청년 두 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정직시험하고 상관없어요. 그냥 안동 근처 촌에서 살아오다 보니 부모가 농사를 시키잖아요.
드라마 보면서 거기 나오는 도시 사람들은 부럽고 촌에서 살면서 만 날 소 먹이나 주다 보니 장래가 안 보이니까 무작정 안동으로 와서 신학교도 다닌다고 하고 무엇도 한다 하면서 이것저것 하는데 이 두 청년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헌신하겠습니다. 이것만 해준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어떤 벌도 받고 감수하겠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그냥 노는 거예요. 교회에 탁구대도 있었거든요. 교회에서 예배참석 다 하고 같이 놀고 이야기도 하니까 그것이 그렇게 재미가 나는 겁니다.
직업은 없습니다. 직업은 있는 둥 없는 둥 했어요. 촌에서 농사지으면 그것이 직업인데 거기서 튀어 나왔으니까. 20대 중반쯤 되었는데 군대도 안가는 모양인지 그 둘이 짝짜꿍이 되어서 재미나게 노는 거예요. 아까 그 교정직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청년들은 ‘내가 이 공무원 시험에만 된다면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것만 허락해 주옵소서.’ 이렇게 순종적이라면 이쪽 두 청년은 아주 신이 났어요. 스펙쌓기라고 할까요, 마일리지 쌓기라 할까요, 이 봉사, 저 봉사, 모든 교회 행사에 참여하면서 그 두 청년은 교회 일에 짓눌려서 죽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이 교회 일이에요. 교회 오면 얼굴이 화색이 펴요. 미래도 없고 직업도 없고 장래도 없어요. 그냥 놀기 삼아서 교회 오는 겁니다. 그 때 이후로 40년 가까이 되어서 지난 세월을 보니까 그 두 청년 부류 둘 다 세상을 볼 때 자기한테 맞는 세상이기를 원한 겁니다. 애당초 출발부터가 잘못되었어요, 글러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신이 임한 그 에스겔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구원 안 될 인간은 구원 안 되게 되어 있고 구원 될 인간은 구원 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개인이 얼마나 헌신하느냐, 얼마나 순종적이냐, 전혀 그것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것은 에스겔 자기의 모든 것을 들어내는 겁니다. 완전히 자기 것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다 잃어버려야 돼요. 다 잃어버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만 가득 차다 보니까 자기한테 잘해주고 자기가 좋아하고 예뻐하는 사람에게 ‘당신 구원 받을 거예요.’ 그런 소리는 에스겔 당시에 거짓선지자나 거짓제사장들이나 관료들이나 한 짓이지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눈치코치 보지 않고 죽을 영혼보고는 당신 죽어, 이렇게 지옥 간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살 영혼 보고는 당신 천국 간다고 분명히 이야기하는 그 일을 앞으로 에스겔이 해야 됩니다.
그것이 3장 이후에 계속 나와요. 어째서 주의 신이 임하면 이렇게 되는가? 그 이야기 전에 오늘날 우리가 성령 받았다고 자처합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 과연 에스겔 쪽인가, 안 그러면 제가 아까 예로 든 안동성광교회(지금 안동성광교회는 없어요, 없는데) 청년들 쪽으로 생각하느냐를 보자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세상은 나한테 맞는 세상이어야 한다, 는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면 이것이 에스겔한테 걸려버리면 ‘너는 구원받지 못할 영혼’이라고 단호한 지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단호하게 지적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과연 우리가 성령 받았다면. 성령 받았다면 우리의 의사나 우리의 능력으로서는 차마 그런 지적을 함부로 못하는데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우리는 지적 안하고 싶어도 지적을 해야 되는 겁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쓴 글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사명이라는 것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에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지만. 사명이란 본인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명 감당할 테니 저를 구원해주세요.’ 이런 것도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고 자기를 위한 세상에 불과한 거예요.
제가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내 것은 몽땅 잃어버려야 돼요. 자꾸 내 것을 챙겨버리면 이것은 애당초 하나님이 만든 세상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억지인생을 꾸깃꾸깃 그냥 힘들게 살아가는 것뿐이지 전혀 하나님 뜻과 상관없는 거예요. 자기를 몽땅 잃어버려야 돼요. 자기를 잃어버리면 자기 장래도 잃어버리고, 자기 미래도 잃어버리고, 자기 운명도 잃어버리고, 자기가 근심할 무엇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없어진다면 그 안에 무엇을 채워지느냐, 이제부터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이라는 것이 내게 맞는 세상이 아니라고 제가 벌써 몇 번째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세상은 누구의 맞춤세상이냐를 이제 이야기해야 될 것 같아요. 본문 12절에 보면 “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찌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들어 올리니까 자기 뒤에서 뭐가 보이느냐 하면 광채에 빛나는 하나님의 처소의 영광이 보입니다. 영광스런 소리가 또 들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처소, 성전이지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현재 불타고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성전은 과연 사라졌느냐, 아니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 여기서 사라진 여호와의 처소, 성전이 주의 신을 앞장세워서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주의 성전의 이 모습은 에스겔 1장에 이미 나와 있어요. 그 형상이 주의 신이 임하니 다시 여기서 등장합니다. 그 모습이 13절에 등장합니다.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 곁에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생물 나오지요, 날개 나오지요, 부딪히는 소리 나오지요, 바퀴소리 나오지요, 그리고 주의 신이 나옵니다. 이것은 에스겔 1장 19절부터 20절 보면 상세한 내용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간추려서 말씀드리면 천사들 곁에 바퀴가 있고 하나님의 신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신은 21절에 보면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라고 우리가 물을 수는 없고요,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성전의 면면을 오늘날 우리에게 성신을 통해서 알려주느냐,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 스티로폼이 하나 떠 있다 칩시다. 그런데 파도가 밀려오게 되면 스티로폼이 점점 밀려서 다른 쓰레기와 더불어서 해변 가까지 밀려오지요. 얼마 전에 태풍이 지나가고 나서 해수욕장에 가보니까 해변 가에 쓰레기가 쫙 깔려 있어요. 그것을 밀려오는 파도의 테두리라, 그렇게 볼 수 있어요. 파도가 그렇게 밀어 제쳤으니까.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 바깥으로 나오면서 네 생물이 포진되어 있고 그 네 생물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바퀴가 있다는 거예요.
바퀴라 하는 것은 움직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지요. 그 바퀴 한 가운데 주의 신이 임해 있는 겁니다. 주의 신이 마지막 스티로폼,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던 그 스티로폼이 밀려서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 성전 테두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전에 천사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빈틈이 없을 정도로 거룩한 거예요, 그 거룩함, 하나님의 신의 위력이 바깥으로 밀리고 밀려버리면 마지막에 도달되는 그 테두리지점, 접촉지점에는 누가 있느냐, 에스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스겔에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 본문 15절에 보면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강 가에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민답히 칠일을 지내니라.” ‘민답히’
그리고 14절에 보면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민답(悶沓)’이라는 말은 너무 놀라고 충격적이어서 침묵을 지속하는 것을 민답이라 합니다. 너무 충격스러워서 할 말이 없다는 말이지요. 에스겔이 거룩한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밀리고 밀려서 어디까지 밀려왔느냐 하면, 죄로 인하여 포로 잡혀 온 자기 백성까지 밀려왔을 때 에스겔의 시선의 방향, 거룩한 쪽에서 나오는 소리는 듣지만 그 눈동자 시선은 어느 쪽이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밀어내는 대로 더럽고 추악한 세상이 맞닿는 그 경계지점에 밀려 왔습니다. 무엇에 의해서, 주의 신에 의해서.
이 에스겔을 하나님이 인자라고 불렀거든요. 그러면 장차오실 예수님의 호칭이 뭐냐, 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세례 받을 때 성령이 임해요.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주의 신,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의 언약적 역할을 하는 것은 성신이고 예수님 시대에 와서 그 바통을 성신에서 성령으로 넘기고 성령께서 아들에게 집중해서 작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인자되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그 구원의 근거와 저주의 근거를 마련하는데 성령께서 도와줍니다. 그리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도 아무 일도 못해요.
요단강 세례에서 성령이 임할 때 비록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지만 그 영광됨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우사 종의 형체를 지녀서 이제는 죄 많은 세상 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정리되는 것이 있지요. ‘목사님, 대체 주의 성령이 하는 일이 뭡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생명이 하늘에 있는 자기 백성을 더러운 세상에 풍덩 집어넣고 파도에 밀리는 스티로폼처럼 계속해서 더러운 세상 속으로 뒤에서 우리를 강제로 밀어내는 역할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왜 그래야 될까요?
그것은 바로 세상이 나 위주의 맞춤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날 구원시키고 나만 행복하고 내가 복 받고, 그러기 위해서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의 중심은 이미 있어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세상은 그 성전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그 성전의 소리 나는 영광과 성신의 작업하려는 그 인자되신 그것이 완성의 모습으로서 만날 때 비로소 성령이 구현하는 것은 아들의 나라, 세상 죄를 위해서 모든 일을 완료하시고 완성하신 그 분을 모시는 그 나라 그 천국 하나님나라, 그 나라를 성사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성령께서 역사했습니다.
그리고 성신은 그 예수님 오실 때까지 이미 그림자로서 하나님의 택한 선지자에게 장차오실 예수님의 면면을 우선적으로 그들에게 예고하듯 보여준 겁니다. 세상이라 하는 것, 코끼리나 코스모스나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별과 해와 달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로 보면 전혀 영광스럽지 않고 오히려 탄식하면서 썩어질 곳에 있습니다. 이 썩어져 가는 세상,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그 썩어짐에 그냥 심판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썩어짐에 풍덩 들어오신 분에 의해서 세상은 새롭게 영광스럽게 달라집니다.
세상자체를 위한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에 부합되도록, 하나님의 성전을 찬양하고 성전을 높이는데 합당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겁니다. 성도가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것은 성도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하늘의 형상을 입고 제대로 주님을 섬기라고 해서 우리에게 하늘의 영광스런 옷을 입혀주는 거예요. 그 옷 입고 폼 잡으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섬기라고 하는 거예요. 이 천사들처럼. 천사들 보면 네 날개를 부딪치면서 찬양하잖아요. 그처럼 생물들도 찬양하듯이 그 찬양의 자리에 우리를 거기에 집어넣는 겁니다.
우리를 참여시키는 겁니다. ‘나도 천사처럼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을 찬양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간다는 것을 놀러간다는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김밥 싸서 놀러간다, 이런 식으로 소풍가듯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방종교나 이슬람교에서 그리고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이고 우리 복음에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할 일이 산더미처럼 영원토록 주어져 있습니다. 찬양하는 그 일. 항상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기본이 있어요. 기본은 이 세상, 천국도 다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고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부터가 이미 처음부터 틀어져있다, 잘못되어 있다는 겁니다.
공무원시험 합격하려고 교회 오는 것, 교회 와서 칭찬받고 사랑받고 스펙쌓고 마일리지 쌓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충성했는데 천당 가면 상급 받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유리하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것, 둘 다 세상을 자기 위주로 보고 있는 것으로 크게 잘못된 거예요. 물론 안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쨌든 진리가 중요한 것이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왔다는 것은 파도에 스티로폼 밀리듯이 뒤에서 밀어주는 힘에 의해서 에스겔은 밀려왔다고 보면 되고 에스겔이 밀리고 밀려서 간 그 곳에 에스겔이 ‘나 구원받았다.’ 하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14절에 “근심하고” 그 다음에 어떤 마음이냐 ‘분통을 터뜨리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아이고, 세상 꼬라지하고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추석 대목보고.’ 도대체 세상 하는 것이, 하늘에서 밀려온 스티로폼처럼 그 밀려온 해변 가에 서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바라보니까 분하고 근심하는 심정으로 보고 있는 거예요. 에스겔 뒤에 들리는 소리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천사들의 찬양소리가 들리는데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분통하고 근심되는 마음밖에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성신 받은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보니 ‘민답하고’ 너무 놀라워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아이고, 내가 너희에게 무슨 소리를 하겠나! 한심스러운 것들! 하나님의 영광은 모르고 그저 세상영광 추구하다가 이렇게 망했구나. 이렇게 포로 잡혀 고생해!’라는 한심스러운 심정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신 받은 에스겔의 심정이라면 예수님의 성령 받은 심정이 바로 딱 이와 같습니다. 수시로 기도할 때는 뒤를 돌아보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을 보게 되면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평화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아예 불 지르러 왔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날 위해 울지 말고 네 집구석이나 걱정해라. 날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 딸들을 위해서 울어라.’ 이런 이중적 시선을 가지고 예수님이 일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오순절 성령 받은 열두 사도들은 어떤 세상 관으로 세상을 살았겠습니까? 대통령 한 자리 해 보려고 봉하마을 내려가고 그랬겠습니까? 교회 부흥시켜 보려고, 사람들 꾀어보려고 긍정적 사고방식, 적극적 사고방식, 그런 소리 했겠습니까? 사도들이 외쳤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구원될 자는 구원되고 구원이 안 될 자는 반드시 구원되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들과 타협하고 협상하고 흥정할 어떤 요소도 없습니다.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는 긍휼의 그릇으로 구원받고 지옥가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은 지옥 갑니다. 나한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나한테 그것을 요구하지 마세요. 난 당신들과 협상할 용의가 없습니다. 사람 하나 더 끌어 모으기 위해서 여러분과 흥정할 어떤 의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 나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내가 그리스도 종이 아닙니다.’
이런 일관성이 있는 이 사명은 어디서 온 거예요? 사도바울의 오기입니까? 집념이요 집착이요 해박한 신학이었습니까? 자기절제였습니까? 아닙니다. 성령 받았다고 하는 그 흔하디흔하게 느껴지는 그 성령, 진짜배기 성령 받은 사도의 살아가는 진솔한 모습입니다. 바로 사도들은,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의 신분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죽고 싶은 거예요. 빨리 죽어서 하늘나라에 빨리 합류하고 싶은 겁니다. 왜, 자기 생명은 이 땅에 없고 저 위에 있기 때문에, 생명은 위에 놓아두고 남의 땅에 살려 하니까 사는 것이 참 답답하지요.
빨리빨리 잡아당겨서 데려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과 그런 믿음은 성령의 선물로만이 그런 믿음과 생각으로 살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밀리고 밀려서 그냥 세상의 더러운 곳까지 밀렸습니다. 지옥의 모습, 교회라 하지만 교회가 아니라 지옥 가는 장소,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하고 있는 작태들, 그것들을 보면서 주께서 보낸 이유를 거기서 찾고 성령이 보내신 이유, 우리가 분명히 사명을 감당해서 주께서 맡기신 것이기에 우리가 주저하지 않고 외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8강-에스겔3장 12-15(주의 신)120926-이 근호목사.hwp (64.0K), Down: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