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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돌아온 다윗 120921강의에스겔

돌아온 다윗 120921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서경수(IP:14.♡.106.224)

12-10-08 10:49

광주 강의(2012. 9. 21) 34-1

에스겔 34장 22-23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목자로 세우신다고 했는데, 에스겔의 이러한 이야기가 그 당시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요즘도 이 성경을 보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이 깨끗한 맛에 살잖아요. ‘내가 이만큼 잘났고 이정도로 대단하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목자가 꼭 필요할까요?

목자를 기대했는데 목자를 주셨다면 즐거워하겠는데, 내가 대단하고 훌륭하고 깨끗한 것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목자를 보내겠다.’고 하면, 잔소리꾼이 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지요.

그리고 이전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린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 욕망대로 살겠다고 해서 우상을 섬기면서 유리하는 양이 되었는데, 이미 그 인간 자체가 독립적으로 살겠다는데 그런 자들에게 목자를 주면 그것이 어떻게 좋은 관계로 엮일 수 있겠습니까? 희망이 없지요.

인간 속에는 자기 외의 모든 것에 대해 반발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목자를 준다고 하면 전혀 반갑지가 않지요. 왜냐하면, 나는 목자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거예요. 목자가 와서 설치면 오히려 짐만 되고 귀찮을 뿐입니다.

전에 망했던 이유가 목자의 말을 듣지도 않을뿐더러, 제대로 된 목자도 없었고, 또한 근본적으로 목자를 줘도 목자를 거부하는 이유가 다른 데 마음이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지요.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자에게 이미 한 번 실패를 봤는데 또 목자를 보내면 보나마나 또 실패할 거란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께서 한 목자를 보내셔서 ---’ 할 때 “야, 좋겠다.”라는 사람은 없어요. 이런 사람이 있다면 예초부터 목자를 버릴 리가 없지요. 전에 보내준 목자나 지금 목자나 같은 것인데, 전에 있는 선지자나 지금 선지자나 다 같이 예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같은 소리를 내뱉을 건데, 전에는 싫어하다가 새로운 목자가 왔다고 해서 환영하겠어요? 처음부터 그랬으면 아예 배반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목자 다윗을 보낸다.’는 말은, 너희가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당연히 멸망당해야 하고, 당연히 고생해야 되고, 너의 자녀와 소유물이 불타야 될 이유를 새로운 목자와 한 번 차근차근 따져보자는 거예요. “넌 이래서 문제야!” 라고 타져보는 것.

누가 소곤소곤 우리의 문제점을 낱낱이 알려준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굉장해 감사하지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 신랑은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아름다웠어?” 하지만, 이 광경을 본 디자이너가 와서 “아가씨, 옷 길이를 조금 줄이고, 레이스는 좀 더 달아야 할 것 같고 ---”라고 했어요.

신랑 될 사람은 지금 이대로도 좋다는 거예요. 하지만 드레스를 만든 사람은 신부를 돋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옷을 돋보이는 신부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참 못됐지요? 디자이너는 다 그래요. 옷을 만들고 무엇을 만들 때 만든 자기 가치가 높아질 때 보람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목자를 보내준다는 것은 두 번째 목자는 잔소리하려고 오는 목자가 아니고 새로운 이스라엘, 다윗과 이스라엘이 일치성을 가질 때만 ‘진짜 너희들은 내 양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목자와 양, 양과 목자가 다 같이 인간의 육신을 띠고 와서 같은 생각, 어떤 동질성을 보여 줄 때 비로소 새로운 이스라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전에 있는 목자는 뭐냐 하면, 말씀이 그들 밖에 있어요. ‘최선을 다해 목자 말을 한 번 들어보자.’ 하는 식이지만, 사람 마음 자체가 자기 영광과 가치만 챙기는 입장이기에 자기 외에는 다 귀찮아요. 그런 입장에서 목자가 한 소리하면 듣는 척만 하지요. 하지만 그 목자와 동질성을 가질 마음은 없어요.

그러면 두 번째 온 목자는 그것을 용납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용납하면 안 되지요. 용납하면 또 목자를 버리니까.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만들기를 실패하게 됩니다. 목자가 왔다는 것은 그냥 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실패로 망해버린 그 이스라엘을 이제는 두 번 다시 망하지 않는 완전하고 영원한 진짜 천국백성 만들기의 책임자로 하나님이 다윗을 보내는 겁니다.

이 다윗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다윗을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왔을 때,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간단합니다.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 자신의 행함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까? 이것을 낱낱이 알려주세요.” 이러면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들고 짜증난다.’ 이러지 마시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로 하여금 나의 모든 누룽지를 다 긁어내는 작업에 우리를 하나의 냄비로 맡기시면 됩니다.

수면 내시경 할 때 우리는 잠자고 있고 그 때 의사는 내시경으로 우리 속을 다 들여다보지요. 나중에 “이러이러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라고 알려주지요. 그렇게 맡기는 거예요. 그런데 수면 내시경과의 차이는 수면 내시경은 잠자고 있으면 되지만 우리는 된 통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 다르지요.

의사가 수면 내시경 하는 것은 전문가로써 자격증을 가지고 하지만, 우리의 의사 예수님은 그냥 수면 내시경 들고 오신 것이 아니고 본인이 우리보다 더 혹독한 시련과 아픔과 고난을 이 땅에서 받았지요. 이 땅에서 군대 생활했다고 보면 됩니다.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해병대 군대생활을 지독하게 하신 거예요.

의사는 청진기로 진찰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마음가짐을 샅샅이 다 알기 위해서, 죄에 있다는 인간이 이 땅에서 얼마나 지독하게 고생해야 하는가를 체휼하셨어요. 그러기에 수면 내시경처럼 ‘잠자다가 구원 받았다.’ 이럴 수는 없고, 주님이 경험하신 그 경험이 새롭게 우리 속에 밀려 들어와야 되지요.

이번 특강에 [야고보서와 로마서에 나오는 행함과 믿음의 표현의 차이]에 대해서 강의할 것인데, 교재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거기에 제가 욥을 거론했어요. 욥의 행함이 뭡니까? 욥은 신앙인 맞지요? 에스겔에도 나와요. 욥을 의인으로 봤어요. 그 신앙인이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 이것이 행함이었어요.

그럴 때 친구들은 미쳤다고 여겼어요. ‘나는 안 아픈데 저 친구는 왜 아프지?’ 그것이 바로 믿음에 따른 행함입니다. 이쪽 믿음 없는 인간은 납득이 안 돼요. 도대체 욥이 왜 고함을 치고 발악을 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그러니까 ‘믿음’도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행함’을 가지고도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지요.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굶주릴 때 네가 먹을 것을 주었다.” 천국 가는 사람이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네가 하는 모든 행함이 바로 믿음에 따른 행함이었다.”는 거예요. ‘악’하고 비명을 지르든지 몸부림을 치든지 그 모든 것이 목마른 예수님께 물 한 그릇 대접하는 행함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 믿는 본인도 이해 못합니다. 왜? 자기 행함을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이번에 십일조 했다. 나는 전도도 했다.” 이런 식으로 자기 행위를 챙긴 적이 없어요. 그냥 믿고 살면서 행동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 믿는 사람도 이해 못할뿐더러 안 믿는 사람도 역시 믿는 사람이 믿음의 행동이 나온 것이 믿음의 행함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너나 나나 사는 것이 똑같네.’ 이렇게 볼 뿐이지요.

똑같은데 똑같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목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마를 때 네가 마실 것을 주었다.”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그래, 잘했어!” 이것을 느낍니까? 아니죠.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내가 한 것이 뭐가 있다고 내가 한 것으로 말씀하시다니?” 이렇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새로운 목자와 양답습니다. 양은 “제가 뭐 한 것이 있다고?” 목자는 “네가 한 것이 내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한 거야.” 이 이야기를 오늘날 교인(불신자)들이 도무지 납득을 못해요.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도 나와요. “너는 천국 사람이야, 땅의 사람이야?” 라고 성도에게 물으면 “나는 하늘의 사람도 아니고, 땅의 사람도 아닙니다.” 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라고 다시 물으면,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되지요.

세상 사람들이 성도가 납득이 안 되기 이전에 예수님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있으니까, 자기는 도저히 예수님을 못 믿겠는데 성도라는 자는 왜 그것을 믿는다고 하느냔 말이지요.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어제 신문에 하버드 대학의 여교수가 예수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파피루스를 발견했다고 해요. 그런 주장의 책들은 시중에 늘려있어요. 결코 새로운 주장이 못 됩니다. 제가 지난 수련회에서 강의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당시부터 해서 ‘예수 안 믿기 운동’이 ‘예수 믿기 운동’과 나란히 전개되었습니다. 이게 뭔가 하면 검증하기입니다. 예수님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니까 검증해 보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검증하고 나섭니다. “예수님이 진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시체를 무덤에 숨겨놓고 부활했다고 사기 쳤어!” 이런 대립적 주장은 오늘날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대립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어두운 가운데서 빛을 발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빛이라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같이 믿는 거예요.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예수님이 빛이라면 세상은 자동적으로 어두움이 된다고. 그냥 “예수님은 빛이다.” 이것만 말하지 말고 “내가 속한 이 세상은 어둠입니다.”라는 것을 같이 말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태풍 한 번에 다 날아갑니다. 그런데 영원히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예수님의 나라가 따로 있습니다. 세상이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마호메트는 사기꾼이다.”라는 말을 해줘야 그들이 어둠의 티를 내는 거예요.

다시 정리해 봅시다.
양은 목자(선지자)를 거부한 양들입니다. 그러니 이 안에 뭐가 있다? ‘나는 목자는 사양하겠습니다.’라는 목자 거부 능력이 이미 담겨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라는 목자가 온단 말이지요. 이 다윗이라는 파견된 목자가 무슨 재주로 이 사람들을 양으로 만듭니까?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양들의 고집은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오면 선지자를 거부하고 죽이는 그런 양입니다. 말은 양인데 무서운 이빨을 가지고 있는 그런 자들입니다. 이런 양을 신참 목자가 와서 다룰 수 있겠습니까? 어떤 학급에 말썽 피우는 학생으로 소문이 났는데 초임 교사가 오면 그 학생이 교사의 말을 듣겠습니까? 그 교사는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아이디어를 내어보세요. 양은 보통 양이 아닙니다. 이방 신만 좋아하고, 잘 사는 것만 좋아하고, ‘이스라엘 신은 별 볼일 없다.’ 이렇게 나오는 그 완악하고 강퍅하며 이마가 단단한 그런 양을 신참 목자가 무슨 재주로 그들을 순한 양으로 만들겠습니까?

이 양이 백지상태라면 감동, 감화가 되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목자 거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양이기에 오실 다윗은 기존의 순교 당했던 목자와 어떤 점에서 차별화 되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잔 말입니다.

제가 객관식 문제를 낼 테니까 답을 말해보세요. 이 둘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1) 너 같은 깨끗한 존재는 이런 더러운 곳에 오지 마라. 2)나 같은 깨끗한 존재에 너 같은 더러운 것이 올 수 없다. 이 문제를 풀려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는 양인데 목자가 오시면 구원 받는다.’라는 것을 깨야 합니다.

‘다윗이라는 목자를 줄 테니까 너희들은 그의 양이 된다.’고 할 때, 그 양이라는 것이 목자가 바라보는 양이 따로 있고, 양이 바라보는 목자가 따로 있어서 이 두 가지 길이 안 맞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양이다. 그러니까 날 구원하기 위해 어떤 목자가 와야 된다.” 이것은 정상적인 양이 아니라 마귀의 양입니다.

마귀를 구원하는 목자는 많아요. 오늘날 교회잖아요. ‘우리를 구원해줄 메시아를 찾겠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 이것은 세상에 많아요. 그런데 ‘나라는 양 자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찾는 목자는 사실은 악마임을 지적해 줄 수 있는 목자.’ 그 목자를 알아 본 자만이 진짜 목자에 합당한 양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내용을 간추리면, ‘누구든지 죽음을 대가로 치르지 않으면 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타인은 내가 아니잖아요. 내가 아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문제가 많아요. 내 속에는 이미 ‘목자는 싫어. 나는 스스로 자립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욕망에 따라 살 거야.’ 라는 그 양. 그 양에서 내가 정신 차려서 그 양이 아닌 다른 양, 타인의 양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라고 상상해 봤자 그것은 그냥 혹이 난 거예요. 한 대 맞아서 부풀어 오른 것으로 자기의 확장일 뿐입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불교가 도를 닦는 것은 자기 영역 확장이에요. “아, 나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놀랍구나!” 이것은 타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그냥 도 닦아서 연장전에 접어든 거예요.

장로교, 감리교 전부 도 닦는데 열중합니다. 천주교도 그렇고. 모든 종교가 다 그래요. 도 닦는 것 접어두자는 것은 순복음 밖에 없어요. 우선 돈부터 챙긴 후에 도 닦자고 나옵니다. 건전하다고 평가 받는 집단, 한국교회가 섞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대부분 도 닦자는 주장을 합니다.

내가 나를 예상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예상하든 주님은 엉뚱한 자리에 있습니다. 이것을 가락교회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이삭이 나올 것을 예상했습니까? 예상 못했기 때문에 이름이 이삭(웃기네!)입니다.

이것은 ‘내가 예상 못한 것을 왜 네가 하느냐’는 것이지요. 욥이 자기 자식 10명이 죽을 것을 예상했습니까? 못했지요. 세상 다 날아갈 것도 예상 못했지요. 하루아침에 폭삭 망할 줄은 정말 예상 못했어요. 그리고 자기 몸이 만신창이 될 줄도 몰랐지요. 그동안 얼마나 착한 일을 적금 넣어 놓았는데.

하나님께 정성껏 제사 드리고, 자식들 죄 짓지 않도록 기도한 본인이 저주받는 모습이 된다면,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하늘나라에 덕이 안 돼요. 전도에 덕이 안 되지요. 베드로가 고넬료 만나기 전에 자기가 예상 못한 일을 당합니다. 보자기에 먹지 못할 부정한 음식이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먹는 것에 굉장히 신경을 씁니다. 지금도 유대교인들은 그래요. 독수리, 박쥐도 못 먹고, 유별난 사람은 청어도 안 먹고, 갈치도 안 먹고, 굴도 안 먹고, 게도 안 먹고 --

왜 그렇게 합니까? 타인이 없어서 그래요. 미우나 고우나 정들었던 내가 좋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좋고, 내가 그리는 미래상을 원하는 겁니다. 이것을 가락교회 강의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아가 있으면 자아 속에 빙글빙글 시간이 돕니다.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도는데, 돌아봤자 자기 몸이 중심에 있습니다.

자기 몸은 안 변하고 시간만 흘러갑니다.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 미래에 가봤자 돌아서면 이것이 과거가 됩니다. 그러니까 미래라는 것은 자가를 벗어난 미래는 없어요. 시간의 뿌리를 시간 속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고 싶다. ‘옛날에는 이랬었지. 지금은 이래. 나중에는 이렇게 되고 싶다.’ 말은 하는데 정작 내가 누구인지를 도대체 몰라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죽음의 대가를 치르지 아니하면 내가 아닌 타인이 될 수 없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아시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 다음에 나오는 나는 뭡니까? 독자적인 나는 더 이상 없고, 누가 나를 건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건드렸어요.

그러면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내가 예상치 못한 다른 타인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입니다. 따라서 이삭은 흔적을 지녀야 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받쳐야 합니다. 왜? 이삭에게 죽음의 흔적이 있어야 그 자식이 내(아브라함)가 예상한 내 자식이 아닌 약속의 자식이 되고, 어느 누구도 약속의 자식이 아니면 천국에 못 갑니다. 이삭처럼 그렇게 태어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갑니다.

약속이 주도권을 쥐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내가 예상 못한 타인이 되지 못해요. 그러면 왜 주님은 양을 그렇게 만드는가? 목자 자신이 양의 자리에 먼저 들어가요. 양은 자기 죽음의 대가를 치르지 아니하면 새로운 양이 될 수 없지요. 바로 그 작업을 율법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예수님이 우리의 운명으로 가버려요.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의 대가로 주가 되십니다.

이런 말을 하면 또 이런 의문을 품습니다. ‘죽음의 대가로 내가 거듭난다면 내가 자살하고 주께서 살려주면 되지 않겠는가?’ 즉 ‘내가 죽게 되면 내 죽음을 대가로 이전과 다른 새로운 나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 것이 아닌가?’ 그것은 자신이 자신의 계획을 믿는 것이니까 주님의 계획에는 없는 거예요.

‘네가 죽어야 산다’는 그 계획이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 계획이 아니고, 이 말씀은 목자 되시는 예수님이 홀로 지킨다는 것을 양 될 사람에게 통보한 거예요. 양은 재주도 능력도 없지만 목자가 대신 다 해줬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 미리 준 거예요. 전에 온 목자는 이게 안 돼요. 대신이 안 되니까.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이 사람은 대신할 수 없어요. 모세도 대신할 수 없었어요. 율법이라는 것은 복음에 비해서 완전치 않은 거예요. 그래서 율법의 완성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우리에 비해 율법은 완전한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인간의 숨겨놓은 본색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율법 앞에서 죄를 안다는 것이 아니고, 그 정도 죄라면 말을 안 합니다. 율법이 오게 되면 율법을 지켜 의인으로 만드는 죄를 지어요. 이것은 다윗이 본을 보였습니다. 어떤 부잣집에 손님이 왔는데, 자기는 양이 많고 이웃집에는 양이 한 마리뿐인데, 자기 양은 그냥 두고 이웃집에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할까요?

율법에는 네 배로 갚아주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율법을 아는 겁니까? 이 때 나단 선지자는 뭐라고 합니까? 이미 율법을 알고 율법이 장착되었기에, 그 율법(말씀)이 나를 의인되게 만든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이건 성신이 오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요.

내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이 죄라는 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요. 예수 믿는 것이 죄인 줄 아는 것은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어제 유튜브에 올린 것은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가 지옥이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성령 못 받은 인간들이 하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보고 성경대로 이야기했는데 뭐가 잘못인데?”라고 합니다. ‘바울 서신에 하라는 명령이 있어서 내가 하라고 했는데 뭐가 잘못인가?’ 라는 거지요. 잘못이 없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잘못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안 잘못하겠다는 그것이 잘못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못 안 저지르고 살 수 있습니까?’라는 발상 자체가 잘못입니다. 목자가 다 했어요.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옛날 목자입니다. 모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율법이 우리 밖에 있었잖아요.

이 소리를 수 십 년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어요. 앞으로 몇 년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착해지려는 것은 아직도 목자가 필요치 않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잔소리만 하고 그 잔소리 듣고 내가 멋있게 내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을 찬양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못 고치는 병입니다. 이것은 약도 없습니다.

못 고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죽이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공평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죽음입니다. 평등 사회를 구현한다? 간단해요. 다 죽이면 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인도 죽고. 평등 사회를 구현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 세상에 무슨 평등이 있습니까? 얼마나 불평등했으면 평등을 외치겠어요?

이 세상에 두 가지 평등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은 죄의 노예라는 것. 이 두 가지 외에는 평등이 없습니다.

어떤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남북전쟁 때에 어떤 백인이 흑인 노예들을 잡아놓고 흥정을 해요. “네가 팔려간 집에서 탈출하게 되면 내가 다시 너를 다른 집으로 팔아 1만불을 받으면 그 반인 5천불은 너에게 주겠다. 그리고 네가 그 집에서 또 탈출하면 또 다른 집에 너를 팔아 그 수입의 반은 너에게 주겠다.” 이런 제안을 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예요.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불행으로부터의 탈출을 돈에 의지해서 시도하는데 과연 그것이 돈에 더 얽매이는 것인가,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인가를 묻고 있는 거예요. 저는 더 나가서 돈 문제뿐만 아니고 인간은 노예인데 자신이 어디에 갇혀있는지도 모르는 노예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무조건 방황하고, 무조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데,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모르는 거예요. 이런 인간들의 실존을 작가는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팔려가서는 또 탈출해야 돼요. 안 나오면 돈이 안 생기니까. 직장생활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나와서는 다시 새로운 직장을 찾아요. 그렇게 들어가서는 또 힘들다고 나오고. 여기에 다 돈이 결부되어 있는 겁니다. “나는 돈 없이 한 번 살아볼래.” 이런 소리는 못해요.

이것은 결국 평등함에도 불구하고 평등하지 않은 다른 자아를 상상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갇혀있으면서도 마치 안 갇힌 척하고 살아가는 거지요. 아이들이 K-pop을 좋아하고, 강남스타일에 열광하는 것은 그만큼 쫓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에 쫓깁니까? 경쟁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출세에 쫓기고, 부모들의 기대치에 쫓기기 때문에 숨통을 트고자 게임을 즐기고 가수들의 춤과 노래에 빠져듭니다.

게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확실하게 드러나지요. 그러면 만날 지는 게임이라면 계속하겠습니까? 아니지요. 자신이 이길 수 있는 게임을 찾아 몰두합니다. 결국 뭐냐 하면, 나는 패자가 되기 싫고 어느 한 구석에서는 승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이런 환상을 꿈꾼다는 것은 현실에서 심하게 추궁당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해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누구도 답변해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라는 그 이미지가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탈출해봐야 탈출했다고 생각하는 그 미래마저도 결국은 내가 지어낸 자아이기에 그것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자아가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와야 됩니까? 목자는 어떻게 와야 됩니까? 생각지도 못한 그런 모습으로 오셔야 되지요. 여기에서의 모습은 외형이 아니라 그런 기능으로 오시는 겁니다. 성령의 기능은 우리가 예상한 모든 것을 다 차단하고 예상 못한 결과만 자꾸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네가 생각하는 너 말고 주님이 생각하는 네가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해 주는 겁니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뭔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고 하시지요. “너희들은 말을 많이 해야 그 기도를 들을 줄 생각하는데 너희가 말하기 이전에 나는 너의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

이제 10분 쉬고 두 번째 강의에서 할 것이 뭔가 하면, 목자가 다 해줄 때 우리는 그냥 박수치고 관람하고 도망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 그런 꼼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다며. 그럼 우리는 구경만 하다가 천당 가면 되겠네.” 이럴 수는 없다는 것을 목자와 양 사이에서, 특히 다윗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0분 쉽시다.

(2012. 10. 8. 10:05 녹취 마침)

서경수(IP:14.♡.106.224)

12-10-23 09:55

광주 강의(2012. 9. 21) 34-2

“인간이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죄가 용서된다면 저는 그 구원 작업에서 손 떼렵니다. 목자가 훌륭하셔서 모든 것을 다 하셨으니까 저는 할 일이 없네요.” 라고 할 때, 주님은 “내가 구원한다는 것이 너에게 공포가 되느냐?”라고 묻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거예요. 예수님은 구름타고 오실 분이니까.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니까. 예수님 당시에 몇 개의 파들이 있었지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쿰란 공동체, 열심 당원 등등. 그 파 중의 하나가 나사렛파가 있어요.

나사렛파는 나사렛 예수를 믿는 무리들입니다. 좀 이상하죠? 그러면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안 믿는 유대인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바로 나사렛파인 동시에 이단의 괴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파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 나사렛파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로마가 유다를 칠 때 패트라라는 지역에 피신을 했어요.

패트라에 피신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데, “마지막 때가 되거든 산으로 피신하라.” 그럴 때 다른 파들은 뭘 했는가? 다른 파들은 로마와 맹렬하게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에 의지해서 패트라에 살다가 몰살당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진짜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이겠어요? 그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들이 자신들이 이미 짜놓은 판, ‘메시아는 이러이러해야 하고, 우리나라는 이렇게 하면 구원 받는다’는 판을 스스로 부정하지 않지요. 그 판에다 젓가락만 하나 놓았을 뿐이지요.

우리의 짜놓은 판은 정상이지만 여기에서 빠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만 첨가하면 온전해 진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산으로 피신하면 천국 백성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기에서 뭐가 문제입니까? 그 판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본인이 수용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셨으니까 우리는 그냥 구원 작업에 가담하지 말고 열매만 따겠습니다. 라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내장되어 있던 본질의 판이, 그 판 자체를 안 건드리고 거기다 젓가락 놓듯이 십자가 피로 구원이라는 것은 첨가해서 화룡점정, 그림의 마지막 부분을 짜 맞춘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면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에스겔 34장 24절입니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러분들이 이 성경구절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는 이렇게 보여요. 치매 걸린 노인이 집에 가만히 있으면 그나마 고맙지요. 그런데 이 노인이 지팡이 집고 돌아다니면 온 식구가 찾아 나서느라 생업에 지장을 받고 난감합니다. 설치면 곤란하지요? 그런데 24절 말씀을 보니까 지금 누가 설친단 말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직접 설치지요.

하나님이 직접 설치다면 이 하나님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럴 분이 아니지요. 실 가는데 바늘가지요. 목자가 가는데 양이 따르겠지요. 누가복음 15장 보세요. 분명히 양 있는 곳에 목자가 있고, 목자가 있는 곳에 양이 있지요. 그러면 목자가 설치면 어쩔 수 없이 양이 따라다녀야지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주님이 직접 나서서 설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죽었어요. 우리 마음대로 못해요. 목자가 설치는데 양이 가만히 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는 겁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제 뭘 알면 됩니까? 양이 말 안 듣는 양이지요. 이미 목자를 버린 양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선한 목자가 왔다고 해서 그 양이 목자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턱이 없지요. 그래서 양은 제 갈 길로 가지요. 그럴 때 진짜 목자가 원하는 양이라면 끝까지 찾아가서 데리고 오겠지요.

그러면 성도가 해야 할 일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냥 노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항상 잘못된 선택을 하는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요? 우리의 늘 잘못된 선택을 하는데, 그 잘못된 선택을 죽는 날까지 계속 해야 됩니다.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 주님에 대한 오해. 이 숙제를 우리는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숙제를 하면서 힘들어요. 힘들지만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은, 우리는 늘 잘못된 선택을 하기에 우리에게는 전혀 기대할 것이 없다는 점에서 뭔가 홀가분하지요.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면, ‘내가 어떻게 하면 어린이들을 바르게 교육해서 이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를 키우지?’ 라고 생각하고 교단에 서지만 뒤돌아보면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라.

아이의 생각도 모르고, 그의 환경도 모르면서 내 나름대로 그에게 필요한 것으로 그를 교육하고 사랑을 쏟아 부었지만 아이는 그것은 역이용해서 점점 더 엇길로 갑니다. 이럴 때는 [천사의 천택](아침 TV드라마)을 하면 됩니다. 천사의 선택은 우리가 잘 하는 대로 선택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악마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늘 악마의 선택을 하는데, 이 잘못된 선택을 천사의 선택으로 바꾸는 작업을 목자가 함으로써 그 목자 없이는 내가 악마의 종인 것을 밝혀내지 못하기에 우리는 목자의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합니다.

“제가 어째서 죄인인데요? 제 선택이 왜 잘못된 선택입니까?” 따라다니면서 물어야 해요. 교회 올 때마다 “제가 어떤 점에서 죽어야 마땅한 죄인입니까?” 이런 식으로 나와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왜냐? 사람들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 즐기고 싶은 것만 선택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것을 묻는다는 것이 이상하지요.

옛날에 제가 기존 교회 다닐 때 성경 외우기 대회를 했어요. 로마서 8장을 다 외웠는데 상품을 받았어요. 제가 1등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잘 못하겠는데, 상을 받고 보니 “야, 교회 다니는 맛이 바로 이 맛이구나!”하는 것을 느꼈어요. 제가 어디에 가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대우를 받겠습니까? 평생 상장 한 번 못 받은 제가.

그런데 교회에서 로마서 8장을 틀리지 않고 다 외울 때에 봉화00교회 그 교인들이 박수쳐주고 목사에게 칭찬 받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바로 사람들이 자긍심을 위해서 교회에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목사의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교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그런 것만 잘 챙기면 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전부 잘 하는 선택을 하게 되면 목자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을 이유가 없어요. 한 번 죽고 난 뒤에는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놓듯 ‘주님이 내 죄 위해 죽었다’는 이것만 상에 얹어놓고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그 이후에는 자기 잘 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개혁주의 신학을 믿는 교회의 실상입니다.

세상은 성과주의입니다. 그 사람의 성과를 가지고 미래를 측정하는 것이 모든 직장, 모든 사회에 통용됩니다. 학교든 병원이든 백화점이든 모두가 성과주의입니다. 이 성과주의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천국에 대해 이야기 할게. 아침 10시에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에 온 사람도 있어. 오후 5시에 온 사람도 있어. 이들 중 누가 가장 천국을 잘 보여주었는가?” 오후 5시에 온 사람이지요.

그러면 아침 10시에 온 사람이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뭘 아십니까? 이 세상이 성과주의, 자기 존재 가치와 다른 사람의 가치를 비교해서 우열을 나누는 곳인 줄 아시고 이것이 바로 천국과 반대되는 지옥의 모습이란 것입니다.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지옥 갈 사람으로 지금 이 세상에서 훈련받고 있습니다. 마귀에 의해서. 그런데 그 훈련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네 모습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때의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목자의 목자 됨을 위해서 우리는 전혀 고칠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 죽으신 목자 앞에 다 비치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목자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주님이 양으로 선택하신 이것이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취하셨을까요? 1) 거룩한 생활을 하고 금욕적으로 악한 것을 버린다. 2) 최상의 것에서 최악의 것을 추려내는 방식으로 거룩을 유지한다. 3) 영적으로 시선이 고정되었기에 불결한 것에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거뜬히 이겨낸다. 이 셋 중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정답은 이 셋 중에는 없습니다.

그럼 정답은 뭡니까? 간단합니다. ‘죽음’입니다. “주여, 1번으로 할까요?” “너는 죽었어.” “주여, 2번으로 할까요?” “너는 죽었어.” “그럼 3번으로?” “너는 죽었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다 못하면? “죽었어.” 그럼 다 하면? “그것도 죽었어.” 결국 정답은 뭐냐?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원 받아요.

우리는 안 죽고 싶어도 예수님 죽음 속에 이미 우리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인감 도장’이라고 합니다. 이마에 새기는 인(도장). 지금 도장에는 이름을 새기잖아요. 옛날 도장은 그 보증하는 권세자의 얼굴이 새겨집니다. 로마의 모든 도장에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마에 예수님의 인을 박았고, 불신자에게는 악마의 도장이 있다고 했지요. 유대인 같으면 이 말씀 듣고 바쁠 겁니다. 길 가는 사람 붙들어놓고 “아가씨, 이마 잠시 보겠습니다. 어, 없네.” 이마에 아무 것도 없으면 요한계시록이 틀린 것이잖아요.

나에게 그리스도의 인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만, 성경대로 하면 불신자에게는 악마의 인, 666이 있다든지 뭔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마에 아무 것도 안 보이면 성경이 틀린 것입니까? 이 모습은 성경을 젖혀두고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 보니까 성경이 엉터리인 거예요.

이 말은 뭔가 하면, “원래 내 판단은 옳아!” 라고 지정해 놓고 “성경은 내 판단에 따라 평가할거야!”라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돼요. 자,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다윗이 오게 되어 있지요. 분명히 다윗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왔습니까, 예수님이 왔습니까? 다윗이 온 게 아니고 예수님이 왔습니다. 다윗은 무덤에서 흙으로 변해 없어졌어요.

그런데 에스겔 34장 23절에 보면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그분이잖아요. ‘그분이 다시 오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지요.

만약 친구 이름이 ‘정식’이라면 “정식아!”라고 부르면 그 정식이 정식이지 다른 정식이 있습니까? 엄중하신 하나님이 ‘다윗이 온다.’고 했으면 다윗이 와야 되잖아요. 결국은 다윗이 다윗으로 옴으로 우리들이 알았던 그 선입견, 우리들의 해석 자체가 새로운 다윗에 의해서, 옛날 다윗이라고 여겼던 사고방식 자체가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불신자마다 이마에 도장이 찍혔다.’고 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도장은 찍게 되면 표면에 뭔가가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에 다니는 사람의 이마를 아무리 살펴봐다 도장 찍은 흔적이 없단 말이지요. 그러면 누가 틀렸단 말입니까? 성경에 틀렸든지 우리가 틀렸든지 해야 되는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가 맞다고 우기는 그것이 맞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성경 해석을 잘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해석 잘못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오기가 있어서 “제대로 해 볼게요.”라고 하고, “제대로 해 보겠다는 그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쩌라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는다니까.” 이제 이해되지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는 것을 우리는 그 피를 내 소유로 만들어야 안심을 하겠다는 그 사고방식은 옛 사람이 갖고 있던 구원 방식, 종교적인 품성입니다.

2,000년 모든 신학이 로고스에서 다 나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이 잘못된 선택을 죽을 때까지 계속 하면 됩니다. “하면 된다고 해서 하긴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해서 구원 못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혹시 구원 안 되면 어쩌지?’ 라는 것은 내 몸 안에 빙빙 돌고 있는 내 시간을 믿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는 거예요. 예수의 영이 안 오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내 상에 차려진 다 이루심으로 변경해서 믿고 싶은 거예요. 신학화 시키고 문서화 시켜서. 바다에다 글씨를 써 보세요. 바다에다 먹물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쓰도 물결이 일렁이면 글씨는 사라집니다. 심지어 해변의 모래위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쓰도 파도가 밀려오면 글씨는 없어집니다.

인간은 내가 어느 정도로 나쁜 사람인지 몰라요. 항상 근사한 나만 상상하니까.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얼마나 추한 죄인인지 도무지 상상을 못해요. 욥도 상상을 못했어요. 내가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당할 대로 다 당해서 주님께 원망할 만도 한데 재를 뒤집어쓰고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겠어요? 주님이 목자이기 때문에 양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왜? 죽으라고. 죽음이 뭐냐?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그 저주의 죽음에 우리를 동참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내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노라. 이 말을 알아듣는 것은 내 양이고, 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내 양이 아니니까 그들은 나를 목자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내 양을 알기에 아무도 나에게서 내 양을 빼앗아갈 권세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누가 아는가? 놀랍게도 양이 안다는 겁니다. 양이 알기에 그 양이 어떤 양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같으면 예수를 포기할 만한 상황으로 주께서 몰고 가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주님이 뒤에서 목을 졸라요. 십자가에 죽게 되면 온유, 화평, 자비가 막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알 때 어떤 열매가 맺히는가? 우선 프로이드와 라캉 이야기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라캉은 프로이드의 제자니까 유사한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의 욕망 문제입니다. 인간의 욕망, 꿈같은 것은 인간이 다룰 수 없잖아요. 오늘 밤에 이런 꿈을 꾸겠다고 다짐해도 소용없어요. 왜냐? 깨어있을 때는 이런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잠이 들면 내가 관여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미 꿈꾼 것을 내가 취소할 수도 없어요.

꿈은 내 말을 안 듣습니다. 내 말 안 듣는 것이 나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프로이드에게는 놀라운 겁니다. “야, 이거 주인이 따로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지요. 나보다 더 쌘 괴물이 내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어쩌면 그 괴물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지 외부적으로 나타난 모습은 흥정과 타협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정신병자를 치료하면서.

이런 접근으로 치료가 되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거예요. 만약 치료가 안 되면 이런 소리를 못하겠지요. 치료방법은 간단합니다. 무엇 무엇인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인이고, ‘나는 이것이다.’ 라고 밀어붙이면 정신병자입니다. 이게 치료방법입니다. 남들이 가면 쓰고 사니까 너도 가면 쓰고 살아야지, 남들은 다 가면을 쓰는데 자기는 그 가면을 벗으면 그것이 정신병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 이것이 정상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었다.’ 이러면 그것이 정신병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4대 성자 중 한 분이다.’ 이러면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치료입니까? 치료가 아니고 대세를 따라가도록 한 거예요.

정신병은 병이 아니고 소수자에 해당되는 것을 병으로 규정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회는 분업화 되어서 서로 같은 취지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제대로 된 제품이 생산되고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정신병자란 대다수가 정신병자가 아닌 것을 전제로 그 대다수에 합류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자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정신병과 신경병은 달라요. 신경병은 두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신병은 그것이 아니고 다수에 합류하지 못한 소수자가 정신병입니다.

어찌했건 병이니까, 사회에 기여를 못하니까 이것은 문제이지요. 그런데 그 정신병 속에서 우리가 감추고 있던 실체가 드러나는 거죠. 그것이 욕망인데, 그것을 조사해 보니까 물리적으로 아빠와 엄마에게서 나왔다고 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프로이드는 자신만만하게 주장합니다.

아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잖아요.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까지의 그 기간에 미성숙한 그의 정신세계에 누가 깊숙이 관여했는가를 보는 겁니다. 누가 관여했겠어요? 부모지요. 그러면 이 아이가 성장할 때의 모든 환경은 부모가 조성한 그 세계에 그냥 적응한 것뿐이죠.

그런데 엄마, 아빠는 둘 다 여자가 아니고, 둘 다 남자가 아닙니다. 아빠에게는 부성이 엄마에게는 모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의 정신은 부성과 모성이 어떻게 타협점을 찾아서 현재의 나를 이루었는가를 보면 여기에서 해답이 나오는 거지요. 장성한 사람에게는 부모가 관여를 안 하지요. 그렇지만 어릴 때의 과거가 누적되어 있어서 어디로 날아가지 않고 남아서 꿈의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꿈을 분석한다는 것은 그 밑바탕에 아빠, 엄마에게 들은 것을 실재로 오늘날 자기가 사회에 나가서 경험했던 것과 합해서 다루는 방법에서 아빠, 엄마를 통해 가정교육 받은 것과 자신이 사회에 나가 경험한 세계 사이에서 그냥 다루는 것이 아니고 각각 살아온 가정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다른 것을 드러내는 그것이 사회적 삶이 되지만 밤에는 꿈을 통해서 자기의 억압된 것이 막 폭발하는 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 물리적 방법의 설명입니다.

두 번째는 죽음에 대한 충동입니다. 이것은 아빠, 엄마와 관계없어요. 이상하게 사람에게는 죽음의 충동이 있더란 말이죠. 뭔가 모르게 허무하고, 내가 왜 사는지 막연하고, 살아있으면서 산다는 자체를 테두리 쳐서 그것을 몽땅 부정해보고 싶은 그런 충동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모든 동물들의 특성으로 타고난 것이라고 합니다.

밤에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가 낮에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살아야겠다는 것과 투쟁을 하면서 죽어가는 내가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이야기하는 ‘상징’ 또는 ‘상징어’, 다르게 표현하면 ‘질서’에 순응하고 싶은 욕구로 등장합니다. ‘내가 사장님께 고분고분하면 승진할 수 있겠다.’ 이것.

천사가 아부하는 것 봤습니까? 천사는 안 죽기에 아부할 필요가 없어요. “죽이지 마세요.” 이런 것 없잖아요. “살려주세요!” 한다는 것은 평소에 “죽으면 안 돼!” 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이미 기존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언어와 질서와 권력에 고개 숙이고 힘들지만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뭐냐? 상징과 꿈에 나오는 물리적인 부모로부터 받은 욕망, 상징 두 가지가 된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뭐냐? 주체 또는 주체성, 자아의 정체성이 여기서 발생됩니다. 이런 것이 발달함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에 부합하는 주체성이 멋있게 나왔어요. 자본주의는 성과주의죠? 그리고 경쟁 사회지요? 살아남는 놈만 살아남고 안 될 놈은 안 돼! 구제는 성장의 결과로 나온 것인데, 구제와 성장이 나란히 할 수가 없어요. 한쪽이 돌아가면 뒤에서 빼먹는 열매가 복지지, 둘이 나란히 갈 수가 없단 말이지요.

결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주체를 공고히 하는 자는 살아남고 주체가 흐리멍덩한 자는 남에게 이용당하다가 끝납니다. 전과 25범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재벌 2세면 그렇게 안 되었겠지요. 다 밥먹고 살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밥먹고 살려고 하면 재능이 있어야 되고, 성과를 내야 합니다. 성과도 없는데 인정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점점 더 딱딱해 집니다. 돌멩이처럼 단단해져요.

더불어 사는 것은 없고 전부 자기밖에 없습니다. 요즘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전 세계에 돌풍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나는 이런 스타일이야. 알아줘!” 이거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돈이니까 얼마나 경쟁과 성과에 시달립니까? 특히 지금 청소년들이. 그들이 이런 노래에 탄성을 지르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서기관이 질문합니다. “예수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물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이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이웃을 사랑하면 마치 주체가 있는 것 같지만 ‘나’라는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경과해야할 통로로만 있을 뿐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래도 이웃으로 흘러가야 된다.’ 이것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못합니다.

우리 육은 ‘강남 스타일’밖에 모르기 때문에, 육은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못하지요.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의 주체가 죽지요. 죽을 때 이유를 알고 죽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죄인이니까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그 순간 주변에 누가 있든 그것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내가 아니라 사랑해야 될 이웃이 그 순간 말씀에 의해서 떠오르는 겁니다. “어, 당신이 있었네?”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또다시 우리가 사는 시대에 주님 스스로 자기 공로를 증명하는 식으로 우리를 배치하고 사용하십니다. 그럴 때 이웃이 “예수 믿더니만 정말 착합니다.” 이런 소리를 상대가 오해해서 한다면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알려주어야 되겠지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멋진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을 자기가 했다고 해서 본인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이 그런 일을 일으킨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거론하십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살아난다.”고 하시니까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하고 나섰지요. 그 때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이 말의 의미는, “결국 너는 사람일 수밖에 없어.” 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한 말은 너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룰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다윗이 온다’고 할 때, 죽었던 다윗이 그 말을 듣고 “주님, 제가 또 살아납니까? 군대(세상)에서 제대했는데 또 다시 군대생활 하란 말입니까?” 이렇게 나오지 않을 거예요. 이미 한 바퀴 돌면 같은 다윗이란 말을 하더라도 그 다윗이 옛날 다윗이 아니지요.

그러면 옛날 다윗과 전혀 관계없다면 다윗이란 말을 쓰면 안 되잖아요? 어떤 연관성은 있어야 되잖아요?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다윗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잖아요. 언약 맺을 때 부수적인 것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 성전 개념 나오지요, 왕 개념 나오지요, 시온 개념도 나오는데, 이 모든 개념이 다윗과 언약을 하면서 다윗을 대나무 통으로 사용해서 그곳을 통해서 뭐가 쏟아져 나왔습니까? 성전, 왕. 시온 이런 것이 나온 거예요. 거기다 성신까지 나와요. 그 다음에 제사 개념 나옵니다.

다윗이란 사람을 통해서 뭔가 우루루 많이 쏟아졌어요. 다윗은 이것을 실패했잖아요. 다윗은 자기 개인과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했는데, 주님은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주체 개념은 사라지고 ‘우리’라는 개념. 다윗은 자기 자신만 ‘나’라는 말을 쓸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나’라는 말을 쓰면 안 되고, ‘우리’입니다.

‘우리’로 구원 받지 ‘나’로 구원 받는 법은 없어요. ‘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지 우리는 ‘나’를 사용할 수 없어요. 우리의 ‘나’는 십자가와 함께 이미 죽었어요. 그리고 ‘우리’로 다시 태어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와 함께 구원 받을 사람이 누구야?’ 라고 묻지요. ‘내가 너를 전도할까, 말까?’ 이것이 아니고, 고넬료와 베드로는 주님이 각자를 ‘우리’로 만들어서 구원한 거예요. 누가 누구를 구원할 자격은 없어요. 왜? 다들 주체가 아니니까.

“주께서 우리로 만든 그 우리끼리 같이 모입시다.” 뭘 보기 위해서? 우리 서로를 보지 말고 유일하게 ‘나’되시는 분을 바라보기 위해서. 그분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교회의 머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고.

그런데 목사들이 건방지게 자기를 ‘나’로 등장시켜요. 주님은 머리고 자기는 목이라고 해요. 그래서 모든 머리는 목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미친 소리지요. 요한1서 2장에 보면 나오지요.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 이게 이미 다윗을 통해 쏟아진 그 본래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자기 구원을 위해 왕노릇 하면 안 됩니다. 왕이란 개념을 다윗을 통해서 살펴보면, 새로운 왕은 ‘우리’만 만들 뿐이지 ‘나’를 만들지 않는 그런 분으로 오시는데, 왜 그런가? 오직 예수님만 ‘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오셔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찾아 나서는 거예요.

목자는 하나지만 양이 다수가 되는 방법은 ‘이웃’이란 개념을 완성하면서 우리는 그냥 통로로 사용될 뿐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이 괜히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모세, 예레미야, 에스겔이 그냥 우연히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님 증거하라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광주에 저희들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하나됨을 증거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 10. 2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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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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