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역한 족속 120919
패역한 족속 120919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패역한 족속 (겔 3:8-11)
이근호
12-09-19 21:14
패역한 족속
2012년 9월 19일 본문 말씀: 에스겔 3:8-11
(겔 3:8, 개역)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겔 3:9, 개역)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
(겔 3:10,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겔 3:11, 개역)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사람의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성으로 묘사할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지점은 이마입니다. 이마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실은 마음 상태를 평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사람대 사람의 만남에서 드러나는 그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나타나는 마음을 평가하시면서 ‘이마’를 거론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겉 보기에 이마에 주름이 많다든지, 이마를 넓다든지 하는 용도로 하나님게서 이마를 거론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혹은 남을 대할 때 넓은 자비심으로 대하느냐 아니면 악한 감정으로 남을 대해서느냐를 거론하시면서 이마를 동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할 때, 이마를 거론하십니다.
이는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이마’는 인간의 전신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접선하는 특이한 지점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3:8-9에 보면,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 하고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고 되어 있고 15-16절에 보면,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마에 어떤 표시를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민족에게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출애굽을 하게 된 그 민족들에게만 하라고 하십니다. ‘출-애굽’란 애굽에서 탈출한 그 결과적 상황을 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그 결과를 중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엇이 개입되었는지 중요시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과를 따먹을 수는 없고 그 ‘과정의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출-애굽에 있어 과정의 전부는 오직 ‘어린양’에게 돌려져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 흘리는 희생이 문설주에 발리므로서 출애굽이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결과의 백성’이 아니라 ‘과정의 백성’이기 위해서는 그 어린양에 관한 사실을 그들의 이마에서 표시로서 나타내 보여야 했습니다. ‘결과의 모임’이 ‘전체’가 아니라 ‘과정의 모임’이 ‘전체’입니다. 전체를 가지려고 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과정 속에 휘말려들어가는 것이 곧 구원의 전체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과정 속에 들어있음을 보여주는 표시가 곧 ‘어린양’에 관한 내용으로 이마와 손목에 표시해야 했습니다. 이는 곧 ‘결과를 가짐으로서 구원’ 아니라 ‘과정에 합류된 사람으로서 구원’을 말하는 겁니다. 이마에 표시가 백성을 대변합니다. 이런 사실을 신체상의 특정 지점으로 말씀과의 연결점을 마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에스겔 9:3-6에 보면,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현 예루살렘의 형편을 보고서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일치되지 못함을 알고 탄식하고 우는 자에게만 이마에 먹물을 칠해서 표 해놓아라 는 말입니다. 이 표시된 먹물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구체적으로 나와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나 순하디 순한 처녀들이나 힘이 다 빠진 노인네들을 시대를 막론하고 용서와 용납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먹물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노인과 처자와 어린아이까지 거론하시면, “이마에 먹표시가 없거든 사정 두지 말고 아까와 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 말고 다 죽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를 두고 볼 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마란 단순한 인간의 인상이나 인물을 대변하는 신체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백성다움의 표시와 관련 있습니다.
즉 백성은 이마에 적어놓은 표로서 말해야 한다는 겁니다. 백성에게 있어 ‘이마’라는 자리는 단순히 인격의 대변하는 자리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추공당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공한 그 출-애굽의 근거를 여전히 발휘되고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에스겔 당시의 유다나라는 비록 약속의 땅에서 살고는 있지만 여전히 ‘어린양의 죽음’의 취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치심의 중요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자아라든지 주체라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7:3-4에 보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의 인격적 언약적 숫자 속에서 합류가 됩니다. 숫자란 개인적인 개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언약의 동질성만이 성도의 동질성으로 가담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성도의 이마에는 그리스도의 어린양됨의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곧 누가 묻기를 “당신은 어떻게 구원되었습니까?”라고 물으면 오직 “예수님의 피흘리신 공로로만 구원되었습니다”라는 답변이 나와야 하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해주어서 보호하듯이 그리스도의 어린양 표시를 위하여 성도가 존재하는 겁니다. 성도는 구원을 결과로만 따먹는 자들이 아닙니다. 과정 속에 합류된 자로서 구원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개성에 의미를 두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9-21 01:21
7강-에스겔3장 8-11(패역한 족속)1209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장 8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8-11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이스라엘을 언급하면서 이 서방, 김 서방, 이렇게 부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기존의 이스라엘을 통합해서 말하기를 둘로 나눠서 이야기합니다.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라고 해서 이스라엘 족속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스스로 평가하는 것 말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의중에 품고 있는 어떤 구조가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된 구조, 언약의 구조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전체를 보면서 그중에 이스라엘을 바라볼 때에 ‘나는 너를 이마로 보겠다.’ 그 다음에 마음, “이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이 각자 나름대로 직업도 다르고 개성이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마와 마음상태를 가지고 이스라엘은 이러한 족속이다, 라고 규정하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한테 뭘 전달하느냐, 말씀을 전달할 때 이마가 굳어서는 안 되고 마음이 강퍅하면 안 되는 겁니다.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한 것을 같다고 치면 둘 중에 하나를 제거해 버리면 이마가 굳은자가 마음이 강퍅하게 마음이 강퍅한 자가 이마가 굳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마가 굳다는 말에서 이마의 의미가 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전달할 때 접수하는 신체 일부 중에서 말씀의 접수여부를 말할 수 있는 특정지점을 이마로 정해놓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보통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는 얼굴 전체를 다 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전할 때는, 네가 말씀을 잘 듣고 있는지 안 듣고 있는지, 순종하는지 순종 안하고 있는지를 대표적으로 표현하기를 ‘너는 이마가 굳어버리면 말씀을 지금 안 받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그렇게 표현을 하시는 거예요.
말씀이 먹히지 않는다,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네 이마가 굳어져 있다.’ 쉬운 말로 ‘마음이 강퍅하다.’ 같은 말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마라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백성 개개인 전체를 응축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오는 그 태도를 신체의 일부인 이마를 가지고 평가하는 겁니다. 이마라 하는 것은 속에 들어 있는 마음을 바깥의 신체상의 표현으로 할 때 이마가지고 거론하시는 거예요. 이마가 굳었나, 아니면 부드러운가, 그렇게 보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네가 말씀을 전하면 그들의 이마에서 튕겨져 나올 것이다. 이마가 굳은자들이다.’ 왜 이렇게 이마가 굳은 자라로 표현했느냐, 다른 이방민족에게는 그런 표현을 안했는데 이스라엘에게만큼은 그런 특수한 표현을 쓰는 겁니다.
왜 하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이마에 대해서 그렇게 강조하는가, 출애굽기 13장 9절과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전체에 무슨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인가,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일으키지요. 그 출애굽이라는 사건은 사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결과적으로 애굽에서 나왔다, 할 때 출애굽이고 실제로 출애굽 할 때의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 아니고 어린양을 대신 잡아서 문설주에 바르는 유월절 사건이 근거가 되어서 그 결과로 그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사람들 보고 누가 묻기를 ‘당신은 애굽나라 강대국의 그 혹독한 노예생활에서 어떻게 빠져나왔습니까?’ 할 때 사람들은 자기 자랑이라든지, ‘내가 그때 참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이렇게 하면 안돼요. 같은 말로 오늘날 ‘당신은 교회 다니는데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하면 ‘내가 기도와 봉사를 열심히 하고…….’ 이런 식으로 답하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해야 되느냐하면, 어린양의 희생으로 나왔다, 라고 해서 그 근거를 어린양에 돌려야 돼요.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용서)받았습니다. 그래서 천국 갑니다.’라는 말로 돌려야 되듯이 말이지요. 신자들 간의 이야기든지 신자와 불신자들과의 이야기든지 간에 ‘당신은 어떻게 천국 갑니까?’ 할 때 ‘예수님의 공로로 천국 갑니다.’라는 말을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세상에서도 참으로 듣기 힘든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자기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자기 마음가짐, 하나님한테 헌신한 것, 그런 것들이 줄줄이 나오지 예수님의 공로, 그냥 예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면 그 사람은 참 드문 사람이에요. 참 드문 사람입니다. 요즘도 신자가 있나, 참 신기하지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했겠습니까? 늘 마지막이지만 하여튼 신자라는 것이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요. 예수님의 공로라는 말을 하기 참 힘듭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 앞에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이마를 가지고 보신다는 점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왜 이마냐, 출애굽 당시에 출애굽 13장 9절에 보면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고 해서 이마에 기록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6절에도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찌니라.”
그러니까 이것은 어린양이 죽었다는 그 표를 네 이마나 손목에 매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성도하고 또는 이스라엘 백성하고 마주치는 인간의 유일한 신체부위가 이마가 우리 전체를 대표하고 대변하는 장소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선배격인 이스라엘이 그 이마에다가 우리는 출애굽 했다는 표시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출애굽 했다는 그 결과보다도 뭐가 중요하냐면, 출애굽하게 된 그 과정이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한테 일깨워주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의 취지를 여러분이 잘 이해 못할 것이라고 짐작하는데요, 더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만에 동창생을 만났는데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아파트 참 좋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 아파트에 있는 동창생은 말하기를 ‘내가 이 아파트에서 열심히 일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아, 네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니까 돈 벌어서 이 넓은 아파트를 샀구나.’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자꾸만 그 아파트에서 일하는 동창생은 ‘내가 이 아파트에서 열심히 일한다. 너는 이 넓은 아파트라는 결과가 부러운 모양인데 내가 지금도 열심히 일한다는 이것에 왜 관심이 없느냐?’ 과정이 전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천국 간다는 것보다도 어째서 가게 되었는가, 누구 덕분에 가는가, 이것이 하나님 앞에 더 중요한데 우리는 결과만 따먹으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동창생이 하는 말이 ‘실은 내가 이 아파트 주인이 아니고 파출부로 여기서 일한다.’ 하니까 ‘에이,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나와요. 열심히 일하는 과정은 안보고 ‘이 넓은 아파트가 다 너의 집이야?’라는 식으로 결과부터 내놓으라는 식으로 마주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대인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마에 표를 함으로 말미암아 전 신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이마에 박힌 표가 네 구원보다 더 중요하다고 간증하라는 뜻에서 이마에 표를 주는 겁니다.
그 이마의 표는 뭐냐, 어린양에 관한 내용이 말씀으로 거기에 적혀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이마에 표를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자신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전달할 때 특수한 방법으로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죄를 짓고 난 뒤에 남의 동네에 가서 살게 되었을 때에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 ‘만나는 사람마다 날 죽이려 할 겁니다. 차라리 그냥 죽는 것이 낫지 앞으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아득합니다.’라고 나오니까 창세기 4장 15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여기 보면 “가인에게 표를 주사”라고 되어 있어요.
가인이 잘났다는 것이 아니에요. 가인을 만나면 누구든지 그를 죽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버티는 것은 가인이 훌륭해서나 착해서가 아니라 가인에게 특별한 것이 있어요. 그 특별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쳐주시는 표라는 말이지요. 그 표가 하나님이 가인을 지켜주고 보호한다는 뜻의 표거든요.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나중에 이 표가 성도에게 그리스도인으로 표를 해줘서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마에 그리스도의 도장을 박아서 이마에 그리스도의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보호를 받아서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받았던 것이 나다, 사람들은 자꾸 이렇게 나다, 이것을 강조해요. 구원받은 사람은 나다, 거기에 자꾸 관심사를 보이는데 하나님에게는 그 과정이 더 중요하거든요. 누가, 누가 너를 구원했어, 이것이 더 중요한데 우리는 ‘구원받았다, 난 천국 간다.’ 이것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이마부분을 다시 한 번 부각을 시키는 대목이 에스겔 9장 6절에 나옵니다. 에스겔 9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멸망당하기 직전의 예루살렘 성전의 서기관 몇 사람을 불러요. 이들을 불러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도 그렇고 그렇게 출애굽 한 뒤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남은 자를 끄집어내는 방법도 이마에 표를 하는, 먹물로 이마에 표식을 내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마에 특별히 표시를 받은 사람은 예루살렘을 보고서 탄식하고 울고 애통하면서 ‘이것은 아니야. 이래서는 안 돼. 이것은 정말 말이 안 돼.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는 거야.’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다는 의미로의 표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구원할 때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의 흔적을 유지하고 있느냐, 그 여부에 따라서 구원이 되느냐 마느냐, 남은 자가 되느냐 탈락하는 자가 되느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에스겔 9장 6절에서 보게 되면 이마에 먹물 쳤던 그 사람들의 그 위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이것을 보면 놀랍지요.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이마에 표식이 묻은 사람은,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탄식하는 사람은, 또는 ‘이것은 복음이 아니야. 이것은 가짜 복음이야.’ 하고 탄식하는 사람, 그 사람의 이마에 붙어 있는 그 표시는, 그 계시의 뜻은 어느 정도 위력이 있느냐하면, 늙은 자나 젊은 자나 처녀나 어린아이나 부녀를 죽이는데“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갓난애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갓난애가 아무리 불쌍해도 죽이라는 거예요. 저애가 나중에 커서 인물될 건데 아깝다, 아까워하지 말고 죽이라는 겁니다. 정말 예쁜 아가씨, 모든 것이 용서가 될 정도로 예쁜 아가씨, 성형도 안했는데 너무 쌍 커플이 예쁜 아가씨, ‘이 아가씨는 안 죽이고 내 아내 삼으면 좋겠다.’ 이렇게 아끼지 말고 죽여 버리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마에 표 발린 그 위력은 어느 정도냐 하면, 예쁘거나 갓난애라도 다 작살내야 될 그것보다 더 위대한 자기와 긍휼이 품어져 있는 표가 그 이마에 붙어 있는 하나님의 표입니다.
인간적인 관계에서 ‘저 할아버지는 너무 착한 일 많이 했으니까 죽이면 안 돼.’ 라든지 ‘한국의 정치풍토가 너무 개판이어서 모든 정당정치를 치우고 이제는 바르게 해야 된다, 라고 하면서 나온 저 안 철수 씨는 아까워서 죽이면 안 돼.’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네 입장에서 저 사람은 참 귀하다, 착하다, 큰 일 하겠다, 저 사람은 아끼고 싶다, 선한 일 많이 하겠다, 금방 태어난 애라 아무것도 모르고 너무 불쌍하다, 이런 식으로 네 입장에서 그렇게 보는 것 보다 하나님 입장에서 네 이마에 있는 그 표시가 저런 것을 아껴보지 않아도 될 만큼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엄청난 비밀과 내용이 담겨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에스겔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출애굽을 몰라요. 그들은 몸만 애굽에서 나온 것으로 출애굽이 다 된 줄로 알고 있어요. 어린양의 취지, 어린양의 그 의미를 모르고 가치를 모른다면 그것은 전혀 출애굽 된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어린양을 아는 사람 같으면 자기 헌금한 것, 전도한 것, 봉사한 것, 설교한 것, 이것 절대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공로를 자기 이마에 붙어 있는 표의 내용대로 어린양의 공로, 희생으로만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공로로 이 약속의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에 살고 있으면서도 어린양의 공로를 잊어버리고 그냥 일상의 이방사람들처럼 대인관계, 저 사람은 예쁘다, 아깝다는 상식적인 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사람들보고 ‘저건 저주받을 것인데, 저것 망하고야 마는데, 저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라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만 이마에 그 표를 해줬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출애굽이라는 그 결과 전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는 전체라 하는 것은 일종의 허구이고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모든 과정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바다, 넘실대는 그 모든 관계가 사실은 전체입니다. 매일같이 도와주시고 매일같이 말씀주시고 매일 같이 은혜주시는 주님과 우리, 우리와 주님사이의 언약과 말씀의 관계가 넘실대는 그것이 전체지, 나 죽으면 천당 간다, 이 천당을 전체로 보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런 것은 너무 종교적이고 그런 종교욕구에 대한 염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에 불과한 거예요. 죽어서 좋은 맨션아파트 간다, 이런 식으로 하지 말고 과정이 중요해요, 과정이! 현재 지금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시는가? 늘 우리에게 묻는 것이, 너는 지금 누구 덕에 사는가, 이걸 매일같이 묻는 거예요.
사업 망해서 아내와 이혼하고 저는 살아야 되니까 건축현장에 가서 골조 나르고 시멘트 개고 일할 때 땀범벅 되어 있는 노무자에게 가서 ‘당신은 누구 힘으로 삽니까?’ 할 때 그 노무자 대답이 ‘저는 주님의 공로로 삽니다.’라는 말을 할 노무자가 나온다면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진짜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고 ‘당신은 누구 힘으로 삽니까?’ 하니 ‘보면 모릅니까?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이 안보입니까?’ 이마에 흘리는 땀을 보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의 표시라는 것을 창세기 3장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모르지요.
‘아담아, 네 이마에서 땀이 흐를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의 사인이에요, 사인. 표시로서 하나의 과정 속에 녹아져 있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과정으로 날마다 변화되고 또 달라지고 달라지는,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그 변화되는 관계 속에 우리가 그냥 허연 죽처럼 녹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 녹아져 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줄때에 우리는 우리 이마라는 개념이 새롭게 구상이 되고 떠오르게 되지요. ‘저, 주님의 말씀 받는 이마 여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 그리스도의 공로라고 새겨진 이마 여기 있습니다.’라고 우리 가 내 보일수가 있는 겁니다.
그 말씀의 호출에 응답하고 호응이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2절, 3절에 보면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그리스도의 종들이 와서 성도의 이마에 표시를 해요. 도장을 찍습니다. 이게 좀 어려워요. 그렇게 될 때 그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이제는 주체, 또는 나, 자아, 이것은 인 받으면 사라져요.
그것은 없고 뭐가 되느냐, 하나의 숫자로 편입되는 겁니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4절부터 “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이렇게 죽 나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뭐로 달라지는가, 숫자로 달라져야 되는데 우리가 전에는 ‘나는 나다, 우리 아버지는 누구시고 우리 어머니는 누구시고 우리 교인들은 누구며…….’ 이렇게 항상 나, 주체, 자아, 이렇게 내 자아중심으로, ‘하나님은 저를 어떻게 구원시킵니까, 어떻게 천당 갑니까?’ 항상 나 중심에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마로 마중을 나가게 되면 그 이마의 표시로 인하여 자아대신 숫자로 편입이 되어버려요. 숫자로 편입되면 모든 것은 수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관계의 천지, 관계의 바다의 물방울이 되는 겁니다.
이제는 숫자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판사냐 의사냐 국회의원이냐, 이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직업이 뭐냐,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하나의 숫자, 14만 4천에 포함되는 하나의 숫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이마에 표를 하는 것은 각자 갖고 있는 개성이라든지 환경에 따라 타고난 DNA, 또는 부모가 갖고 있는 얼굴색, 이 모든 것을 묵살하겠다는 뜻이에요. 묵살에서 나 나가면 말살이 되어버려요. 말살하는 방법은 뭐냐, 너 대신 죽었던, 그래서 문설주에 피 발렸던 어린양의 죽음에 관한 말씀이 우리 이마에 도달해 버리면 그 때부터 그 이마에 닿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어린양의 효력과 그 효능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언약적인 숫자적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겁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성경자체가 이렇게 어려워요. 역대하 26장 19절부터 보면 거기 웃시야 왕이 나와요. 그 웃시야 왕이 제사장만 만질 수 있는 제단에 가서 향로를 자기가 손으로 넙죽 잡아요. ‘이까짓 향로 놋으로 만든 물건인데 제사장이 쥘 수 있다면 나도 쥘 수 있다.’ 제사장이 만져야 될 향로를 자기가 왕이니까 왕이라는 입장에서 만졌어요. 언약에 속한 것을 제사장이 손으로 만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사장이 손으로 만진 것이 아니에요. 제사장 이마에는 거룩한 흉배를 붙여요.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표시를 한 이마의 표의 자격으로 향로를 만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이마에 있는 거룩과의 연관성이 성립이 되는데 이마에 거룩한 것도 붙이지도 않은 왕이 ‘가만 보니 제사장이 손으로 잡던데 나도 손이 있으니 손으로 잡겠다.’ 만지니까 거기서 문둥병이 피어나는데 어디에 났는가, 역대하 26장 19절, 20절에 보면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였음을 보고 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여기 보면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라고 되어 있고 “급히 쫒아내”었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 언약적관계망에서 너 같은 인간은 추방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문둥병이 이마에 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정하신 그 약속을 네가 함부로 무시했다는 표시를 이마를 가지고 다 바깥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문둥병, 다시 말해서 저주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왕이 왜 그 향로를 만졌을까요? 하나님의 출애굽을 할 때 어린양의 희생에 의해서 형성되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망, 장, 영역, 그런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평소의 사람 대 사람의 만남가지고 그대로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겁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이지요. 가인이 하나님께 벌 받고 난 뒤에 하나님의 표시를 받았기에 다른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했을 때에 가인이 뭘 느꼈겠습니까? ‘역시 난 잘났어. 그러니까 저들이 날 못 죽이지.’ 이렇게 가인이 생각할 수가 없어요. 왜? 그 전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표를 주사 사람들이 너를 못해하게 했다.’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교회에서 이렇게 봉사했습니다.’라거나 ‘내가 뭘 행했습니다.’ 하는 이것가지고 다른 사람을 꾀이려고 할 생각 말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성립되었기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줘야 돼요.
보여주려면 오늘 본문에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보다 더 강력한 관계가 금강석이라고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의 이마가 굳어서 네 말이 안 먹혀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이마를 그 인간들의 이마보다 더 강력한 다이아몬드같이 굳게 만들어서 그들이 패역한 백성이라도 네가 그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그들에게 말씀 전하게 만들겠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네 이마를 강력하게 만들겠다,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달리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기 안 죽어도 될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아, 너는 네 자랑 말고 네 이마를 강력하게 금강석으로 만든 그 말씀의 자리, 어린양의 표시가 기록된 그 자리를 너는 오히려 그들에게 증거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신명기에도 나오고 출애굽기에도 나오는데 이마의 표시라 하는 것이 나중에 점차 이것이 말씀이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말씀 새겨서 띠 두르고 그래요.
유대인들 제사하는 것 보면 제사장이 미간에 말씀을 가느다란 고무줄처럼 해서 붙이듯이 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그 말씀대로 한다고 그렇게 하거든요. 결국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에서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마에 표한, 이마에 박혀있는 그 말씀에 따라서 이미 나의 운명은 확정되었다는 그것, 그것이 사람 대 사람의 끊어지지 않는 강력한 인간의 결합력보다 더 센 힘으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서게 만드시는 겁니다. 우리의 이마는 나의 자리가 아닙니다.
아마 우리의 이마가 나의 자랑하는 자리라면 주께서 후벼 팔 거예요. 후벼 파서 그 자리에 금강석을 박아 놓을 겁니다. 토함산에 있는 불상 이마 금강석처럼 후벼 파서 금강석을 집어넣든지 해야 될 겁니다.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그 어린양, 어린양의 그 능력을, 어린양의 하신 그 일에 내가 박혔다, 그렇다면 내가 천당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백성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이 관계성, 이 사실이 더 우리에게 감사와 고마움이 돼야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마에 그리스도의 인, 도장이 박혔다고 요한계시록 7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께서 주신 것보다 내가 얼마나 출세할 것인가, 성공할 것인가, 남한테 기 안 죽고 자기 자랑할 것인가, 그런 것에 급급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누구 공로로 구원받았는지를 한 시도 잊지 말고 늘 되새겨서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가 있지 우리 구원하려고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님을 날마다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에스겔 같은 사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