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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2. 8. 24) 2강 녹취록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2. 8. 24) 2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4.44.106.224)

광주 강의(2012. 8. 24) 33-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34장 2절에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했는데, 목자들이 뭐가 잘못 되었단 말입니까? 2절에는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라고 되어 있고, 3절에는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4절에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은 결국 뭔가? 진짜 목자는 이렇지 않은데 가짜 목자는 이렇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목자가 나왔습니까? 안 나왔지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진짜 목자는 나중에 무대에 등장하는데, 자기 앞서 가짜 목자를 먼저 보내는 거예요. 엉터리 목자를 미래 보내놓고 그들이 하는 행세를 보고 뒤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저 인간들은 가짜 목자입니다.” 이런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것을 미리 깔아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의인 되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주께서 깔아놓은 것은 ‘주님 앞에 모든 자는 죄인’이 되도록 하신 겁니다. 죄를 지으란 말이 아니고 어떤 행위를 하고, 말고 이전에 이미 죄인 되도록 깔아놓은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 방식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태풍이 몰려오는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그리고 어떤 인간도 상대를 돌로 칠 수 없다는 것,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미리 깔아놓으시는 그 방식을 이해해야 돼요. 그 방식을 첫째 시간에 ‘상태 구원’이라고 했지요. 어떤 상태? 오직 주님만 의롭고 모든 사람은 죄인인 그 상태 자체를 건져 올리는 거예요.

이 상태는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훼손 안 되려면 모든 인간은 마땅히 죄인 될 때 그 상태가 온전한 상태입니다. 온전한 죄인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죄인이 스스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의인 되려고 애쓰면 안 되는 겁니다.

이사야 53장 4절을 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는 하나님께 벌 받아야 마땅해!’라는 생각을 우리들이 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돼요? ‘예수라는 작자는 벌 받아야 마땅해!’라는 생각을 해야 그것이 제대로 된 우리 모습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이것이 주께서 정해놓은 우리 모습입니다. 이걸 그대로 수용하면 됩니다.

우리가 메시아에 대해 좋게 본다는 것은 우리가 가짜 메시아를 보고 있는 겁니다. 가짜 메시아를 사랑하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진짜 메시아가 오면 너희 손으로 때려죽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제대로 믿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어야 된다니까요. 아무도 없어야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 되지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눈치 채고 성령이 오기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그냥 성령이 바람같이 불어서 우리를 낚아채면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사용할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목자가 살진 양을 잡아먹고, 이런 저런 책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목자 나름대로 양을 다루는 방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목자는 ‘이는 내 양이다.’라고 지목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목자 됨을 위해서 양은 저거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평소에 우리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행동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느 인간이 교회 와서 “주여, 나의 죄인 됨을 폭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까? 그럴 것 같으면 룸살롱에 가지 왜 교회에 오겠습니까? “주여, 남들은 놀러 갔는데 저는 교회에 왔습니다. 예뻐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강아지처럼 쓰다듬어 달라고 교회 오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주여,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나를 부숴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교회 온다면 그것은 기특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왜 기특한 것이 아닌가 하면, 이 세상에 기특한 일은 없고 지정된 말씀대로 될 뿐입니다. 말씀대로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실망을 해야 돼요.

실망을 해야, “너희들은 내가 하나님께 매를 맞고 고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데, 나의 찔림은 너희의 허물 때문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연결이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런 죄인의 품성을 마땅히 보여야 합니다.

서울에서 어떤 분을 만났는데 “나는 자꾸 주님을 원망하는 투로 이야기합니다.”라고 하는데, ‘원망하는 투가 있을 때 그것이 좋은 줄 알아라. 원망할 때 비로소 그 순간만큼은 불꽃놀이처럼 주께서 원망하는 그 때에 나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주님 공로만 100%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우리의 구원에 무엇이 보탬이 되겠습니까? 100% 주님의 공로가 아니고 ‘나도 주님을 좀 생각했는데.’ 이것이 가미되겠지요. 이것이 가미되면 이사야 53장 말씀과 맞지를 않아요. 우리는 늘 이사야 53장 말씀처럼 주님을 원망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기쁨으로 수용해야 됩니다. 내 모습이라고 수용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이 만들어 놓은 지정된 자리로 받아들여야 해요.

여기에 나오는 목자는 특별히 나쁜 목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습입니다. 2절에 나오지요.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 누가 있습니까?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이란에 갔어요. 이란은 서방지역에 대해 반기를 들고 북한과 협력해서 남한 사람인 반 총장을 테러할 지도 모르는데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그곳에 갑니까? 간단합니다. 자기 명예를 위해서.

만약에 이것과 반대로, 예전 총장은 목숨을 걸고 위험한 지역에 가서 15일 동안이나 머물며 그들과 협상했는데 반 총장은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참석했다가 하루 만에 돌아왔다면 반 총장이 욕을 먹겠지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총장으로 세웠는데 당신 자신만 생각하고 --” 이렇게 욕하겠지요.

반 총장은 그것을 알고 예전 총장이 15일을 머물렀다면 자신은 30일 머문단 말이지요. 이런 행동 자체가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입니다. 여기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벗어나는 자가 있다면 이사야 53장의 말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채찍 맞은 것’은 헛수고입니다.

테레사 수녀, UN 사무총장 그 어떤 사람의 행동도 예외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지정된 말씀대로 주님께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의 지정된 장소는 ‘예수는 매 맞아도 싸다.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도 마땅한 자야!’ 라는 심보를 우리 속에 장착하고 있어야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찾는 것은 세상살이가 너무 힘드니까 도와달라고 찾습니다.

사람이 위험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만사가 잘 될 때입니다. 이때는 공중에 붕 떠있어요. 갑자기 귀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저는 변호사인데 김00 노인이 죽으면서 당신께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곳에 사인하시고 재산 상속하세요.” 이렇게 할 때 “주여, 어찌 나에게 이런 심한 벌을 내리십니까?”라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기도했더니 이제야 주께서 응답하셨구나.’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런데 다음 날 변호사가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제가 주소를 착각해서 엉뚱한 분을 찾아왔군요. 미안합니다. 상속자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 뒷집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하는 식으로 자기만 먹이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세상에 어느 목자가 돈 없는 양만 반기고 돈 있는 양을 싫어해서 돈 있는 양이 헌금하면 “제발 헌금 좀 하지마세요. 그렇게 하려거든 우리교회에서 나가주세요.” 이런 목자 봤습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목자를 상상하지만 성경은 모두 자기만 먹이는 목자 외에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이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멸망은 필연적이라는 겁니다. ‘양이 양 되기 위해서는 목자가 좋아야 한다.’ 이 말씀은 ‘목자가 나쁘면 양도 그 양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이걸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제가 찾고자 하는 것이 17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서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면, “나의 양떼 너희여”라는 말이 있는데, ‘너희여’ 속에 기존의 양들이 포함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목자가 문제가 되었잖아요. 그러면 양도 같이 문제가 된 거예요. 왜냐하면, 목자라는 그 개념과 양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나는 양이다. 저 사람은 목자가 되어야 돼.” 라고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목자는 자기만 먹인다고 하지요. 그러면 양은 어떻습니까? 양은 목자를 위해 삽니까? 양도 양 자신을 위해서 살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양이 말하기를 “하나님, 저는 양입니다. 저분은 날 도와주기 때문에 진정한 목자입니다.” 라고 양이 규정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할까요? 그걸 인정 안 해요.

우리는 양들인데 개떡 같은 목사가 와서 교회를 버려놓았다.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제대로 된 목사가 오기를 기도합시다.”라고 기도할 때 그것이 옳은 기도냔 말입니다. 이게 옳은 기도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순간 그 사람은 뭘 생각합니까? 17절에 나오는 것처럼 주님이 나서서 양과 양 사이를 심판해야 할 텐데 그 교회 양들은 자기는 무조건 천국 가는 것으로 결정하고 말았어요.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먹이는 목자와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가 양 맞습니까? 결정할 수 있는 심판의 목자가 오게 하옵소서.”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기도 응답이 안 되면 천만다행인데 만약에 기도가 응답되어서 “너희는 양이 아니었어!” 이렇게 판결이 되면 자신이 어떻게 되느냔 말이지요.

야구 시합하다가 심판과 감독이 싸움이 붙었어요. 심판은 스트라이크라고 하고 감독은 틀림없이 볼이라고 하면서 다퉈요. 그래서 비디오 판독을 하자고 나왔습니다. 괜히 비디오 판독해서 잘못 판정한 것이 탄로가 나면 창피하지요. 그래서 그냥 양보하겠다고 합니다. 사실은 양보한 것이 아니지요. 비디오 판독하면 오심이 들통 날까 싶어서 그렇게 했어요.

우리 인생을 비디오로 판독해 봅시다. 기가 막힐 거예요. 누가 보기 싫어할까요? 우리가 보시 싫어요. 이때까지 거짓말 안 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하나도 없고, 과장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남을 위해 산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이지요. 자기는 남을 위해 안 살아놓고 다른 사람이 날 위해주지 않는다고 얼마나 미워하고 욕했습니까?

농사도 지을 수 없을 만큼 안 좋은 땅이어서 그냥 버려두었는데 갑자기 도로가 생긴다고 보상금 받아가라고 해서 갔더니 보상금이 무려 10억이나 나왔어요. ‘하나님은 은혜다.’라며 너무 좋아하고 있는데, 뒷집 아줌마가 와서 보상금 얼마나 받았냐고 물어서 “우리 땅이 1,000평 인데 10억 받았습니다.” 하니까 그 아줌마 하는 말이 “나도 1,000평인데 우리는 15억 주던데.” 라고 하니까 갑자기 화가 나서 정부를 상대로 고소를 하고 난리가 납니다.

뒷집 사람이 안 찾아왔으면 은혜였어요. 찾아오니까 내가 나만을 위해서 은혜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감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들통 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사람을 보낸 것은 주님이 보낸 것입니다. 주님이 이웃사람을 보내서 나를 고발합니다. 내가 나만 챙기면서 그것을 축복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음을 폭로케 한 것이지요.

이렇게 나만 위해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누가 찾아왔는가? 진짜 양과 가짜 양, 그리고 진짜 양과 염소를 나눌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 진짜 목자가 우리 앞에 등장했을 때 모든 사람이 그를 때려죽이고 말았습니다.

“나쁜 목자여서 죽였습니다. 제대로 된 목자라면 저희도 순한 양으로 그 목자를 대우했을 것입니다.” 라고 우기는 그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진짜 목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 에스겔 34장의 내용입니다.

이런 강의를 하면 당장 나오는 질문이 있어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분명히 ‘나의 구원’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다는 내용은 성경에 없습니다. 내가 뭔데 구원해 줍니까? 주님 말씀은 “너희는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의 구원’이 아니고 집단적 구원입니다. 집단 구원이니까 나를 버리고 집단에 소속되어야 될 텐데, 나를 안 버린 채 집단에 들어가니까 엉뚱한 의문이 생겨요. ‘하나님은 내 편입니까, 집단 편입니까?’

이것은 마치 천국 가서 “하나님, 우리들 중 누가 제일 높습니까?” 라는 물음과 같아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지요. 주님은 너그럽게 “다 내 피로 구원받은 거야.”라고 하시면 사람들은 “아멘!” 해놓고 돌아서면 또 싸워요. “주님은 나와 시선을 맞췄어. 날 더 사랑하셔.”라고 우기면서. 이런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사람이 제일 힘든 것이 뭔가 하면 지루함, 권태입니다. 지루함을 잊기 위해서 사람은 서사(이야기)를 집어넣는 거예요. 인생에서 이야기를 집어놓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며 내뱉는 내용은 다 거짓말입니다. 지루함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나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이것을 플라톤 철학에서는 ‘코라’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혼돈인데 어떤 혼돈상태냐 하면,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은 혼돈상태입니다. 사람이 엄마 자궁 안에 있으면 주체와 객체를 나눌 이유가 있습니까? 없지요. 엄마가 시장에 가면 아이가 우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나와 떨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어른의 입장에서는 엄마는 엄마 몸이고 아이는 아이 몸이니까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아이들한테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처럼 하나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혼돈상태에 있는 것이 원형인데 세상을 살다보면 여기에서 이곳까지 나라는 것을 남들이 요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계룡산에서 수행하다가 50년 만에 하산했다고 합시다. 행색이 초라하겠지요. 초라한 모습으로 서울 거리를 다니는데 경찰이 수상하다고 여기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합니다. “당신이 뭔데 나에게 그런 이상한 것을 보자고 합니까? 나는 나이면 그만인데.”

내가 내 안에 담겨 있으면 주민등록증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까? 필요 없지요. 그런데 내가 관공서에 가서 여권을 발급하려고 하면 주민등록증이 필요하지요. 관공서에서 주민등록증을 요구할 때 “당신이 뭔데 나에게 주민등록증을 요구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상태구원과 자기가 하나가 되어 있지요. 이것이 1번입니다.

이제 2번. 어떤 사람이 나를 납치해서 어느 도시에 던져놓았어요. 내 집은 대구인데 광주에 내가 있단 말이지요. 전혀 낯선 동네여서 경찰관에게 물었어요. “아저씨, 대구에 가려고하면 어느 쪽으로 가면 됩니까?” 경찰관 왈 “그런 것을 왜 내게 물어요?”라고 했다면, 이때 상태는 뭡니까? 나는 작아지고 내가 아닌 바깥 상황이 나를 지배하고 있지요. 이럴 때는 뭐가 필요합니까?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도움을 받으려면 그쪽에서 요구하는 주민등록증을 내가 제출해야 내가 여기에서 도움을 받고 생존할 수 있단 말이지요.

계룡산에서 방금 내려온 사람은 복장도 행색도 이상하니까 경찰이 “주민등록증 봅시다.” “그게 뭔데요?” “(수갑을 채우고)따라오세요.” 그래서 계룡산 도사가 경찰에 끌려갑니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통달한 도사가 수갑의 효력도 몰랐던 거예요.

사람들의 원형은 신이든 예수든 간에 다 자기 발밑에 있어야 돼요. 이웃이고 아버지고 친구고 간에 모두 다 내 발밑에 있어야 돼요. 이게 원형이에요. 이게 ‘코라’상태라니까. 이걸 사람들이 희망하고 있어요.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가니까 그게 안 먹히니까 자기 자아를 축소시켜야 합니다.

그 축소할 때 주민등록증도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도 베풀고 이런 식으로 자기를 압축시켜 줘야 됩니다. 그래서 압축이 되면 여기에서 벗어나는가 하는 문제를 제가 지금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압축되면 여기에서 벗어났습니까? 안 벗어났지요. 혼돈이 나의 원형인데,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내 원형인데.

그래서 중들은 머리 깎고 산으로 가잖아요. “나는 너희들하고 안 놀라. 주민등록증하고는 안 놀라.” 이것이 ‘코라’ 원형의 세계. 플라톤 철학에 의하면 창조되기 이전의 혼돈상태입니다. 그 혼돈의 상태 그 모습을 찾아서 떠나는 겁니다. 성철스님, 법정스님 이런 분들은 고집이 센 사람들입니다.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보통 고집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자기에서 집중하면서 이웃 사랑을 한다고? 이런 상태에서 이웃 사랑을 하면 ‘역시 나는 훌륭해!’ 자기 존재를 부각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응축이 되니까 여기 심판주가 누굽니까? 나만이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잖아요. 여기에 만약 메시아가 와서 경찰이 와서 “잠시 주민등록증 봅시다.” 이것은 만들어서 보여주면 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네 의를 보자.” 이렇게 나오면, 우리는 그 손목을 잘라야 됩니다. 용수철은 누를 수 있어요. 그러나 한계에 다다르면 튕겨나가지요. 이것이 마귀입니다. 우리 안에 마귀가 들어있어요. 마귀는 뭘 싫어합니까?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에스겔 34장 본문에서 다윗의 자손이 목자로 온다는 이 이야기는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어!’ 이런 뜻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윗의 자손 앞에 설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34장 2절을 보면, 나쁜 목자가 있다고 하니까 ‘설마 그 많은 목자들, 그 당시 제사장, 선지자들이 전부 나쁜 자들이겠는가? 한두 명 쯤은 선한 목자도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 목자로 왔다는 말은, ‘단 한 사람도 참 목자가 없었고 전부 자기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슬프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반겨야 하고 기뻐해야 됩니다.

성경은 우리로 회개케 하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합니다. 방향성이죠. 우리로 하여금 ‘내가 죄인인 것을 왜 진작 몰랐을까?’ 말로는 ‘죄인입니다.’라고 수 천 번 했는데 ‘진짜 우리는 죄인이어야 정상이군요.’라고 느낀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습니까?

가락교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불꽃놀이는 1, 2초 동안에 번쩍 터지지요. 찬란합니다. 1, 2초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사라지지요. 우리의 믿음도 이런 겁니다. 불꽃놀이 같아요. 시도 때도 없이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면 재미없어요. 늘 우리가 우리한테 불꽃으로 터지기 위해서 늘 우리의 지정된 자리, 나만 생각하는 자리에 가있으면 주께서 불꽃을 팡팡 터지게 해 주십니다. “죄인 맞잖아. 거봐!” 하면 우리는 “아멘! 우리는 죄인 맞습니다. 나만 생각했군요.”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뭐라고 부릅니까? ‘인자’지요. 에스겔은 되도 않은 인간인데 인자의 이름을 뒤집어썼어요. 이 이름은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인자라고 불렀어요. 이것은 남의 운명을 본인이 뒤집어 쓴 거예요. 진짜 인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미리 에스겔에게 그 운명을 담은 거예요. 그러니까 에스겔이 이런 소리를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핍박 받는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도가 뭡니까? 성도는 인자를 믿지요.

성도가 인자를 믿는다는 말은, 나 자신을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내 본성대로 나만 챙기는 행동은 하지만, 그래도 믿는 것은 인자를 믿어요. 행동은 내가 하고 믿는 것은 주님이고. 이것은 날마다 주님에게 얻어터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저의 죄악 된 행동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이와 같은 소리란 말이지요.

성도라는 말은 신약 시대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도를 대신해서 유다 나라가 있어요. 유다 나라에 뭐가 있습니까? 성전이 있어요. 이 성전이 에스겔 시대에 불타버렸지요. 그래서 성전 대신 뭐가 유다 나라와 함께 있습니까? 그랄 강가에 인자가 등장했지요.

성전이라는 건물 대신에 인자라는 인격체가 움직이고 있어요. 에스겔이죠.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유다에게 이야기합니다. “유다가 망한 것은 목자가 목자 구실을 안 해서 그렇다.” 라고 했을 때, 그래서 유다 나라는 포로 잡혀가고 성전은 불태워집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어디서만 볼 수 있습니까? 유대인은 생각했어요. ‘성전이 있는 이곳은 하나님 나라고, 성전이 없는 이방 나라는 지옥이다.’ 라고. 그런데 정작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성전이 불태워 져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터지는 그 현장에서만 유일하게 지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진정한 지옥은 십자가입니다. 왜? 독생자마저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옥이나 천국 개념은 우리가 있는 지점에서 정하면 안 되고 우리가 죄인의 입장에 서서 십자가에 합류할 때 여기에서 궁극적인 지옥을 경험하잖아요. 그러면 천국은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천국이 지옥 바깥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지옥 사건이 벌어지는 그 현장에서 사흘 만에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천국이 발생되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가장 지옥 같은 생을 살았잖아요. 그런데 나사로가 죽을 때 아브라함 품에 안기잖아요. 그러니까 지옥이 있는 곳에만 천국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가? “내가 바로 지옥 갈 인간입니다.”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그 성도 자체가 천국임을 주님이 선언하십니다. “네가 바로 성도야!” 왜? 이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아니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만 챙기는 자입니다. 과연 그런지를 판정하시는 분이 에스겔 34장 23절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어렵지요? 다윗은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요? 이미 죽은 사람이 왜 등장하지요? 죽은 이순신 장군이 등장해서 갑옷 입고 설친다면 곤란하지요.

죽은 다윗이 다시 등장했다는 것은, 전에 있던 다윗이 역사적이라면 새로운 다윗은 구름타고 올 다윗이기에 묵시 층의 다윗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역사 층에서의 양과 목자 개념이 장차 오실 다윗으로 말미암아 묵시 층에서 새롭게 양과 목자 개념이 형성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 층에서 있었던 양과 목자는 전부 죄가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목자라고 여기는 목사들, 양이라고 여기는 자들 모두가 죄인으로써의 목자고 죄인으로써의 양인 겁니다. 이것은 묵시적인 목자를 만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상당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34장 7-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역사 층에서 보면, 목자도 있는 것 같고 양도 있는 것 같지요? 그런데 문제는 ‘너희는 내 양이라’고 할 때 “제가 바로 ‘너희’에 해당되는 자입니다.”라고 손들고 나와도 그를 양으로 인정해 줄까요? 인정 안 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양으로 여기는가? 그것이 목자가 나타날 때 목자에 의해서 ‘너희’가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주를 아는 것이 양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안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유일한 목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목자는 이 땅에서 죽어야 될 목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목자가 될 수 없어요. 왜냐? 우리는 죽으면 끝이기 때문에.

진짜 목자는 일단 죽었는데,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려주면 돼요.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사적인 목적을 위함이 아니고 에스겔 34장을 설계도로 깔아놓고 모든 것이 지정된 말씀대로 되는 것뿐입니다. 말씀대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고 계셨고.

모든 인간의 역사 층을 다 부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인간들이 나설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양이라고 지정하면(말씀으로 지정되면) 양입니다. “내가 죽어서 너희들이 의인 되었다.”고 하시면 의인이 된 겁니다. 이의 달지 마세요. “정죄함이 없다.”고 하시면 정죄함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관계없어요. 정죄함이 없다고 하시면 정죄함이 없는 거예요. 왜? 우리가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목자로 인정해야 될 자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로 인하여 양이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양이 되었음을 증거하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자리, 그런 상태를 주께서 건져 내었는데, 그 상태를 그대로 받아서 천국 간다면 천국에서 만난 자들이 서로 싸울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싸울 필요가 없어요. 내 구원이 아니고 저 사람이 있어야 상태가 되기 때문에. 천국 가보니까 내 돈 떼먹고 도망친 사람이 천국에 와 있다면, 주님을 찬양하다가 중단하고 그 사람 붙들고 따져야 됩니까?

그럴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 사람이 나처럼 구원 받아줘야 상태 구원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구원되지 않으면 지정된 말씀이 이뤄지지 않아요. 그 사람이 구원에 포함되어야 지정된 말씀이 성취되기에 그렇습니다. 이 묵시적 지평선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이 얼마나 지속되는가? 불꽃놀이 같아요. 1, 2초 반짝 하다가 사라지고, 나만 먹이는 이상한 목자로 변해 있어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주께서 알아서 다 사용하십니다. 주께서 말씀으로 다시 “너는 네가 생각하는 상태가 아니고 다른 상태야.”라는 것을 깨닫게 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볼 때마다 우리가 다른 세계에 있음을 아는데, 돌아서면 다시 내가 생각하는 현실은 냉혹하게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고 내가 나서지 않으면 입에 풀칠도 안 되는 너무나 냉혹한 세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모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주께서 이 세상에서 피 흘려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니, 그 십자가의 믿음이 날마다 우리를 장악하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 9. 17. 12:1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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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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