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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신을 심판함 120916우리교회열왕기상

신을 심판함 120916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신을 심판함(미 4:3-5)

이근호

12-09-16 15:29

신을 심판함

2012년 9월 16일 본문 말씀: 미가 4:3-5

(미 4:3, 개역)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미 4:4, 개역)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미 4:5, 개역)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서 인간들의 기대치는 다 배제됩니다. 항상 하나님 홀로 생각해 놓으신 그 계획이 일방적으로 밀이붙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교회 부흥이나 혹은 개인적 신상에 관한 회복 같은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종결될 때는 각자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앉아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벌어질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 무기로 사용되어질 것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3절에 보면,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전쟁이 평정되고 화목한 상태가 되지 아니하면 여전히 편안하게 여호와 이름을 부를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화목이 주어지려면 먼저 전쟁이 필연적인 절차로서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전쟁없는 평화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무슨 전쟁이며 이 전쟁에서의 적은 누구란 말입니까?

4절에 나오는 대목을 다시 살펴보면,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열왕기상 4:25에 원판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성경에서는 전의 계시를 후에 선지자가 되풀이하는 경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믿음이라는 것이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찾아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대상으로서의 의미’란 쉬운 예를 들면, 피아노를 가지고 “피아노”라고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말고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규칙으로서의 의미’입니다.

‘규칙으로서의 의미’란 쉬운 예를 들면, “손가락으로 누르면 아름다운 질서있는 청아한 소리가 나는 악기”라고 했을 때에 “피아노!‘라고 답변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 ”너희 피아노만 소리나나? 우리 피아노도 누르면 소리난다“라고 대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특정 대상체만을 가지고 피아노라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나온 본문 따라 포도나무나 무화과 나무 농사를 지어야 구원받는는 식으로 ‘대상으로서의 의미’로서 해석하면 아니되고 '어떤 반복적 규칙‘을 얻어내어야 합니다. 그 규칙을 찾아가니 솔로몬 시대가 나옵니다. 솔로몬이 받은 모든 복은 성전을 통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에 담겨 있는 ‘규칙’을 찾아내어야 되겠지요. 성전 짓기를 처음 거론한 사람은 솔로몬이 아니라 아버지 다윗입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제안합니다. 그것은 지상에 모든 신들이 다 신을 모시게 되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그렇고 그런 성전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뭔가 사전에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 그 전쟁의 결과물로서 등장된 성전입니다. 이 전쟁에 다윗이 개입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윗이나 일반 사람들이 볼 때, 다윗과 다른 민족들의 군사들과의 전쟁으로만 보이지만 다윗을 앞장 세우신 하나님 입장에서 단순히 다른 군사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적하는 ‘반(反)-여호와적 규칙’을 지닌 세력과의 전쟁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반-여호와적 규칙이 뭡니까? 그것은 땅과 관련있습니다. 역대상 22:6-9에 보면,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을 불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하기를 부탁하여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특이성은 그냥 땅이 아니라 특이한 땅을 겨냥해서 움직이고 활약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은 인간들이 이해도를 넘어서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땅은 에덴동산에서 그 원판이 있습니다.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는 10재앙을 내리시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민수기 33:4에 보면,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

이 벌받은 신들이 하는 일들이 뭐였습니까? 그것은 진정한 땅의 개념을 흐리게 한 겁니다. 진정한 땅의 개념은 그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심겨진 있는 그 땅이었습니다. 곧 에덴동산이지요. 이 중앙지점은 하늘과 유일하게 통하는 지점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려주는 시건의 개시점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행한 전쟁은 단순한 땅이 아닙니다. 따라서 다윗이 전쟁을 흘린 모든 피는 그 의미를 다하고 제거된 땅이어야 하는 겁니다. 다윗을 피를 많이 흘러 성전을 지을 자격자가 못한다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람이나 솔로몬이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짓는다는 뜻입니다.

세상 신들처럼 하나님도 성전을 갖게 되지만 이 성전은 생명나무나 선악과 나무와 관련된 사건이 유발되는 그 현장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작업에 대한 방해자나 완수자는 결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수습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기껏 선악과 나무를 훼손한 자들의 자손일 뿐입니다.

따라서 거저 주시는 생명나무의 효력은 예수님의 언약 계획에 준해서 사건화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거기에 참여된 사람이요 솔로몬은 그 다윗 언약 완수의 효력을 그저 받은 입장에서 성전을 지은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성전’에서만 ‘하나님이 영원히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 밑에서 성도는 평안히 여호와를 아는 가운데 영생을 누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중앙을 틀어막은 자로서 살지 않고 도리어 우리 자신이 깨어지면서 중앙이 보이는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9-17 14:41

08강-미4장3-5(신을 심판함)1209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4장 3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3페이지입니다.

미가 4:3-5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방금 읽었던 그 대목에서 순전하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획만 쭉 나열할 뿐이지 우리의 소망이나 이런 것은 전혀 반영해주지를 않죠.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 돌아가는 모든 것이 중심이 있다는 겁니다. 부엌 싱크대나 욕조에 구멍이 나와 있잖아요. 물 부으면 물이 빙빙 돌아가면서 물이 구멍으로 빠지듯이 배수구로 흘러 들어가지 않습니까?

이처럼 세상은 뭔가 뺑뺑 돌고 있는데 그 뺑뺑 돌게 만드는 그 출구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출구가 세상 사람들은 어떤 자기 신이 출구라고 여기지만 여기 마지막에 산들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도가 완성이 되게 되면 하늘과 땅을 유일하게 연결시키는 그 배출구는 오직 여호와 이름에 있음을 보여주는 그러한 단체, 그러한 민족, 그러한 백성들이 출현할 것이다, 라는 것이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겁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나중에 마지막 때가 되면 특이한 단체가 일어나는데 그 집단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이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그 자리다.‘라고 외치면서 살아가는 그러한 특이한 집단이 등장할 것이다. 그걸 예언한 거예요.

미가의 이 방금 읽었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우리 사적인 희망사항이나 가정사의 요구사항은 전혀 반영이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뭐냐 하면 물이 빨려 들어가는 중심부를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도 한 사람이 중요하긴 중요한데요. 성도 사적인 인생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신성일씨가 책을 냈는데 보니까 제목이 ‘맨발의 청춘’이라고 했어요. 맨발의 청춘이란 내용은 만날 바람피운 그 이야긴데 그 책을 낸 것은 내 인생이 이렇게 살아왔고 그만큼 남은 모르지만 나한테는 내 인생이 중요합니다, 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신성일씨가 그런 책을 낸다면 경주이씨 우리 집안도 책 쓰면 소설책이 열권 나옵니다. 한번 써볼까요? 우리 삼촌들, 고모들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책 내면 그들은 판매금지 조치 들어올 거고, 난리날 겁니다. 지난여름에 니가 한 짓을 내가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나와 버리면 놀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들은 하나님 뜻에 반영이 안 되고,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가 지금 걸터앉은 그 자리가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통하는 자리에 니가 걸터앉으니까 그러니까 너라는 신분은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내 인생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인생이야 죄 짓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중요한 게 아니고 특이한 민족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들의 방석에 눌러 앉아있는데 그 방석을 떼보면 하늘과 땅이 통하는 유일한 배출구가 거기 있는 자리가 된다, 라는 것을 예언한 거예요.

그렇다면 방금 방석이란 이야기를 했는데 그 방석이 여기 나오네요.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라고 돼 있습니다. 장래 이 사람들이 과수농사 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 과수농사 해야 구원받는 겁니까? 감나무 좀 키워야 구원받는 겁니까? 태풍 오면 다 떨어지고 없는데. 그건 아니다 이 말이죠. 여기 나오는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여기서도 어려운 말씀 나오는데 ‘규칙으로서의 의미’와 '대상으로서의 의미‘로 나눠진다. 이렇게 보면 되거든요.

대상으로서의 의미가 뭐냐 하면 이게 피아노 아닙니까? 이게 피아노라고 할 때 저게 피아노이기 때문에 피아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거 뭐 하자 없고 문제없죠. 당연한 거죠. 선풍기기 때문에 선풍기.

그런데 ‘이렇게 손가락으로 치니까 소리가 나는 그게 뭐게? 손가락으로 치고 발로 누르고 누르면 소리 나는 게 뭐게?‘라고 할 때는 이건 규칙으로서의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거 우리 교회 있는 피아노.‘ 하면 틀린 거예요. ’너희 교회 피아노만 소리 나나? 그럼 우리 집에 있는 피아노는 소리 안 나나?‘ 이렇게 되거든요.

어떤 특정대상을 무시하고 피아노라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규칙, 그 규칙을 믿을 때 나오는 의미, 그게 규칙으로서의 의미인 거예요. ‘나는 어느 권사 은혜 받은 걸 믿습니다. 어느 장로 복 받은 걸 믿습니다.’ 이러면 대상으로서의 의미예요. ‘그런데 그 장로, 그 목사, 그 집사라는 사람의 도대체 뭐를 믿는데? 몰라, 그건 모르지만, 하여튼 복 받는 걸 믿더라.’ 이러면 그건 믿음이 안 돼요. 그건 어떤 특정 대상을 믿는 거예요. 주 기철 목사가 어떻고 손 양원 목사가 어떻고, 이 대상으로의 의미를 강조해 버리면 이건 옛날 중세 때 5세기부터 발달된 게 뭐냐 하면 그 당시의 성자들의 출생지를 돌아다니면서 보는 성지순례에 나섬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그 당시의 성당들, 교회마다 유행이 되었습니다.

교인들에게 믿음을 부여하기 위해서 믿음의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의 순교한 사람들이나 빡세게 기도한 사람들의 그 고향을 돌아봄으로써 믿음이 팍팍 생기게 만드는 목회적인 전략, 이런 엉터리 같은 수법이 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지금 유럽여행을 가시면 곳곳에 명승고적이 있을 거예요. 그 명승고적이 뭐냐 하면 바로 유명한 신앙인들의 출생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나 지금 동유럽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나 이런 데 그들의 일 년 스케줄의 축제일이 있을 거예요. 그 축제일이 뭐냐 하면 그 성자들이 출생한 날 이예요. 제사 날이라든지.

크리스마스가 뭡니까? 크로스라는 자비를 베풀었다는 성자 기념일이잖아요. 참~ 걱정스러워요. 교회 성장의 신앙을 규칙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의미로 다 전락시키고 만 겁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유럽으로 몰려가서 전부 다 에이즈 걸린 것처럼 마스크 쓰고 로마 돌아다니며 보는 게 뭐냐 하면 옛날 유적지예요. 참, 이건 신앙을 오히려 훼방하죠. 전부 다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의미로. 그것만 걱정할 게 아니에요. 오다가 보니까 걱정할 게 생겼어요. 오다가 보니까 401번 타고 오다 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 ‘노태우 생가’ 깜짝 놀랐어요. 얼마 전에는 없었는데. 노태우 생가? 그분 돌아가셨어요? 아니죠.

주님께서 우리보고 귀신이라고 하는 이유가 ‘니가 지금 죽어가면서도 살았다고 하니까 니가 죽은 귀신이다.’는 거예요. 생명이 없으니까 귀신이고 생명이 있는 예수님만 귀신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여기 미가에 나오는 예언도 대상으로서 믿으라는 게 아니고 규칙으로서 믿는데 이 규칙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열왕기상 4장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솔로몬 때예요.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여기 미가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것이 나오죠? 규칙이니까 압축해서 계속 되풀이되는 거예요. 되풀이해서 그걸 이야기함으로서 어떤 ‘규칙은 살아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규칙이 살아있으니까 이런 규칙을 처음 대한 것이 열왕기상 4장 25절, 솔로몬의 통치 기간에 이런 현상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 솔로몬 때 좋았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솔로몬 때처럼 좋게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여호와 이름으로 각기 그 시절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런 내용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솔로몬 때 그때 성전 지으면 되겠네. 여기서 제가 다시 걱정돼서 언급합니다. 성경에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거예요. 사람들로 하여금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해서 ‘솔로몬이 일천 번제 드려서 복 받았으니까 솔로몬만 하는 게 아니고 우리도 하자.‘ 이 말입니다. 어떻게? 양, 소 잡는 것은 번거로우니까 그걸 현찰로 내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새벽기도를 1000일 동안 하는 거예요. 천일의 야화, 1000일 동안 새벽기도를 하는 거예요. 올 때마다 돈 1000원을 내는 겁니다. 돈 1000원을 내면 1000☓1000=1,000,000만원입니다. 그런데 일단 이건 이자 계산을 안 했거든요. 사람들은 말하기를 ’목사님, 100만원 그냥 내면 안 됩니까?‘ 100만원 그냥 내면 정성이 부족하니까 주께서는 정성을 받는다는 거예요. 1000번 나오는 정성과 거기다 나올 때마다 1000원을 내는 정성, 이거 생각하니까 1000번을 접어야 학이 된다는 그 사연, 갑자기 전 용록 노래가 생각나요.

그 솔로몬의 성전에 있어서 각기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고 해서 우리도 솔로몬처럼 해보자, 하면, 이건 또 다시 대상으로서의 의미밖에 안 되잖아요.

그럼 여기서 규칙으로서의 의미가 뭐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겁니다. 이 솔로몬의 성전을 누가 지으라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걸 건성으로 그냥 문자로 보게 되면 이건 아버지, 다윗이 아들보고 부탁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죠. 이것도 역시 대상으로서의 의미입니다. 규칙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규칙은 이렇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성전 지어드릴까요?’라고 했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지을 성전은 없다.’ 했습니다. 분명히 했습니다. 사람이 지었던 성전은 하나님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말은 성전이 필요 없다는 말인가? 그 말은 아니에요. 그럼 뭐냐, 성전이 필요하면 지어드리면 되는데, ‘하나님, 성전을 지어드릴까요?’ ‘니는 못 짓는다.’ ‘그럼 하나님, 성전은 없습니까?’ ‘있지.’ ‘그럼 제가 지어드리면 되는데요.’ ‘니는 못 져.’ 그럼 어쩌란 말 이예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있는데요. 그 성전은 사람이 짓지 못하고 하나님이 친히 짓습니다. 그 말은 달리 바꾸면 사람이 지은 성전은 하나님이 성전을 질 때까지 잠시 있다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박살이 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박살이 날 때 너무 아쉬워하거나 아까워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은 그 예배당, 하나님께 예배드릴 예배당이 필요하거든요. 그 예배당이 진짜 예배당이 뭐냐 하면 금반지 은반지 내서 지었던 그 성전, 그거 사라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 예배당이 딴 데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한번 성전 한번 지어볼까요?ㅎ 규칙은 버리고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한번 찾아볼까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드릴까요?’ 하는 그때에 하나님께서 중요한 규칙 하나를 담아서 못 짓는다고 언급을 해줬습니다. 다윗이 그런 말 안 했더라면 그런 규칙도 발각되지 않을 뻔했어요. 그 규칙이 역대 상 22장 6절에 보면 나옵니다.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을 불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하기를 부탁하여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이 규칙을 우리가 놓칠 뻔 했습니다. 다윗이 ‘성전 지어드리겠습니다.’ 안 했더라면 이런 규칙도 모를 뻔 했죠. ‘성전 지어드릴까요?’ ‘너는 안 돼.’ ‘내가 친히 짓는 거야.’ ‘저 왜 안 되는데요?’ ‘너는 이 땅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렸거든.’

참, 그러면 오늘날 이 규칙을 우리는 해석을 강요받는 거예요. 피 흘린 것이 뭐가 잘못되어서 피 흘린 것과 성전과 무슨 연관이 있어서 피 흘린 것이 성전을 못 짓게 만드는 새로운 규칙으로 등장하느냐, 그리고 그 규칙이 우리가 믿고자 하는 여호와 이름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그걸 우리로 숙제를 받게 되는 셈이죠. 그걸 또 알아야 되니까 관계의 논리를 하면 복잡하니까 결론 정답부터 말씀드릴게요.

정답이 뭐냐 하면 모든 전쟁은 신과 신에 관한 전쟁입니다. 출애굽기 12장 12절에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돼 있고, 민수기 33장 4절에도 보면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

신들에게 벌을 준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신 전쟁이라는 것, 그런데 그 전쟁에 다윗이 개입했다는 것, 그 다윗이 개입해서 이 땅에 피를 많이 흘렸다는 것, 그래서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것, 이게 무슨 관련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다윗이 벌린 전쟁이 사실은 다윗의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와 빼놓고 다른 신들에 대한 전쟁이었습니다. 오늘 미가서 본문에 보면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칼이 보습(쟁기)이 되고 창이 낫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전쟁 무기가 쓸데없는 그런 시절이 온다는 거죠. 그럼 그런 시절이 된다는 것은 ‘전쟁이 종결됐다. 모든 것이 평정되었다.’ 그 말 아닙니까? 전쟁이 평정되었다 그것이 화목인데 그럼 화목 되기 위해서는 그전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전쟁하는 절차가 필요했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전쟁이 없이는 화목도 없다. 그런데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은 인간은 가담하지 못한다. 인간이 가담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앞장세우는 다윗, 다윗이 전쟁에 이겨서 모든 신들이 벌을 받고 신들이 패배당하고 신들이 죽을 때 피를 흘리고, 신들이 죽을 때 피를 흘린다는 말도 이상하죠? 하지만 그 신을 믿는 그 민족의 군사들이 죽으니까 피를 흘리고 어떻게 보면 같은 말인데.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평정이 될 때에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성전을 지었을 때에 그 백성들은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편안하게 안심 푹 놓고 태풍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풍류를 누린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이러한 이야기를, 이러한 규칙을 믿을 때 우리는 놓친 게 있어요. 그렇게 전쟁하고 그렇게 끝나고 난 뒤에 모든 게 평정되고 평정이 되고 난 뒤에 기분 좋다고 성전을 지어서 이제는 적들이 없으니까 편안하게 자기가 가꾼 밭에서 노동한 대가를 받는다. 이렇게는 되지만 뭔가 놓친 게 있어요.

뭐를 놓쳤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 왜 인간과 상대해서 전쟁하지 않고 왜 신들과 전쟁했는가, 그 신들과 전쟁하는 그 취지가 뭐냐, 그걸 하나 놓치고 빼먹고 있죠. 그것은 인간하고 상대하는 이유가 인간이 모르고 있는 것을 신들은 알고 있는 대목이 따로 있습니다. 인간이 손대거나 변경하거나 인간이 가담할 수 없는 인간 능력 밖의 사태가 일어났어요.

그게 뭐냐, 창세기 2장 9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중앙지점 이예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뜻은 하나의 다른 신들을 이겼다는 증거가 아니고 그 지점이 비로소 하늘과 땅이 통하는 중앙지점으로 점유하게 돼요. 말을 쉽게 하겠습니다. 중앙지점이 따로 있고 그 장소를 향하여 누가 차지하는가, 뭐 토끼와 거북이 중에 누가 깃발을 꽂는가, 이런 전쟁이 아니고 다윗을 통해서 전쟁을 벌이는 그것이 어디든지 상관없이 중앙지점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해서 그걸 발생시키기 위해서 벌이는 전쟁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태풍의 눈이 어디 있습니까? 태풍의 눈? 어떤 사람은 필리핀,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태풍이 이동하면? 이동하면 눈이 필리핀에서 떠나가는데요. 성령이 바람같이 불듯이 우리가 사는 지점에서 중앙지점은 없어요. 지금 예루살렘에 가도 예루살렘이 중앙지점이 아닙니다.

중앙지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화평케 했던, 모든 전쟁을 마무리했던 고 지점이 중앙지점이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그걸 십자가로 돼 있어요. 십자가가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케 되는 유일한 중앙지점이 되는 겁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장 16절

그런데 이 중앙지점이 있어야 되는데 이 중앙지점이 막혔어요. 여기 창세기 2장 9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이미 처음에 에덴동산에 인간들이 출발해야 될 에덴동산에 중앙지점이 있었고 그 ‘중앙지점이다.’라는 표시로 나무가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고 하나는 선악과 나무였습니다. 나무가 두 가지죠? 이 생명나무의 취지와 선악과나무의 취지가 같이 규칙으로서의 의미가 드러나면 그것이 중앙지점이예요. 참 어렵죠? 나중에 천국에는 선악과는 없고 생명나무 과실만 열리게 돼 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나무는 이미 그건 따먹었고 생명나무는 우리하고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옛날에 있었었었지? 그냥 옛날 기억은 나는데 그게 현재 오늘날 실제로 그 생명나무의 능력과 선악과의 능력이 어떻게 구현되느냐 하는 그 문제는 언약적인 태풍이 불어줘야 돼요. 그 태풍에 누가 관여하느냐, 다윗 장군이 거기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를 흘렸습니다. 그것이 마무리되는 그 지점에 다윗이 벌인 전쟁이 아니고 사실은 여호와 이름께서 여호와께서 다윗을 앞장세워서 벌인 전쟁이라는 것이 표현되려면 다윗이 최종 승리를 거둬야 되고 그 승리를 거둔 그 지점에다 그 지점이 기드온 도성, 예루살렘, 시온 성인데 거기에 성전이 세워지면 그 성전에서 사람들은 자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 아래서 하나님과 화목 된 상태에서 무기도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상태에서 편안히 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마무리다 이 말입니다.

중앙지점, 그 중앙지점은 지정된 장소가 아니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오늘도 날마다 여러분들이 사는 그 생활공간 속에서 지금도 중앙지점이 피어오릅니다. 그걸 어떻게 피어오릅니까? 생명나무가 뭐며 선악과 누가 따먹었느냐를 발견하면 그게 중앙지점이예요. 우리 조상 선악과 따먹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만날 ‘하나님, 나 착해요? 나빠요? 나빠요? 착해요?’ 만날 선악만 따지면서 복 달라는 그런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의 몸, 그런데 값없이 주시는 생명나무가 그러한 선악과나무 티를 팍팍 내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러한 것이 믿어질 때 그것은 회오리바람, 하나님의 화목케 한 성전의 바람, 성령의 바람이 있는 중앙지점입니다. 비록 과수농사 안 져도 비록 감나무 없어도 우리는 우리 있는 자리가 사건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사건,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사건을 일으키라고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 우리의 기나 긴, 우리의 짧디 짧은 안개 같은 인생입니다. 우리의 그 인생을 주께서는 헛되이 소모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싸움은 세상 돈 싸움이 아니고 실은 보이지 않는 악한 악마와의 싸움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악마는 말합니다. 십자가 필요치 않다고. 성령은 말합니다. 십자가 때문에 살았다고. 저희들 성령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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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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