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0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28-에스겔
20120910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28-에스겔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0910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28-에스겔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첫째 시간에 수평적인 지면에서 수직적인 3D, 입체적인 쪽으로 말씀의 의미가 바뀌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했지요. 용어, 성경해석, 개념에 대해서 역사로 해석해야 될 것과 묵시로 해야 될 것 두 개가 같이 나와야 된다는 거죠. 그것은 장차오실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뱉는 모든 언어나 용어에 두 개의 이중성이 다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묵시로만 이야기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 개념을 쓴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요.
그걸 신약성경 사도 바울 편지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역사와 묵시를 다 이야기할 때 이것을 예수님께서 다 이야기해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 같은 게 있잖아요. 그걸 역사적으로도 해석해야 되고 묵시적으로도 두 개 다 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했을 때 역사에서 죄가 나오고 묵시에서는 의가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정리를 했죠.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에게 전부다 죄 아래 있다고 해서 죄 아래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우리는 죄에 갇혀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사도 바울의 모든 용어 자체가 아래 있고, 갇혀있다고 해서 갇혀 놓으려면 가둬놓는 세력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가둬놓는 세력은 갇혀있는 게 역사이기 때문에 가둬놓는 것이 역사일 수는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보는 이유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로 역사적으로 분명히 죽으신 분이죠. 부활되었음을 과연 역사가 담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부활은 역사로 담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적으로 목숨이 끊어졌다가 이어진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것은 소생이죠. 환생, 소생. 나사로가 살아난 것, 베드로 장모가 살아난 그런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이란 예수님을 죽게 만든 세상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죄악 된 세상 전체가 예수님의 부활하심 그래서 주되심을 보여주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부활이 재료 속에 들어갈 이유는 없다 이 말이죠. 여러 가지 재료로 음식을 만들 때 완성품의 음식이 다시 재료가 될 이유는 없는 것 아닙니까. 다만 완성에 있어서 이 재료가 어떻게 엮여졌고, 어떻게 기여했느냐 그것만 밝혀내면 되거든요.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해서 세상 역사는 어떤 식으로 보여주느냐? 그것만 하면 오케이 아닙니까.
그러면 기준점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몸에 있다. 이 몸은 우리의 보통 몸과 항상 대비가 되면서 사도 바울 편지 전체를 다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몸은 아담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몸은 아담의 몸이면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고 모든 인간의 몸, 이게 좀 어려운데, 인간의 모든 몸이 아담 안에 놓여있다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있기 때문에 규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 아니면 규정을 못하는 거예요.
제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몸이 있고 우리의 몸이 있다는 것을 구분하는 우리의 몸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게 굉장히 어렵지요. 내가 보니까 우리 몸 있고 예수님 몸이 있네. 그럼 니 몸은? 내 몸은 둘 다 아는 다른 장소에 있지. 이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우리 몸 따로 있고 예수님 몸 따로 있는 것을 아는 나는 괜찮은 몸이 돼버려요. 그러면 죄가 아닌 게 된다고.
우리 몸은 여기에 포함이 돼있어야 되고, 주님의 몸은 따로 있으니까 항상 주님의 몸의 지배권을 인정해줘야 되지 지가 따로 독립한다면, 예수님 몸한테 지배도 안 받고 나도 복음도 한다고 까불거릴 수 있단 말이죠.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따로 챙겨서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게 돼요.
이게 제가 어제 주일 낮에 이야기했던 납득해서 믿는 것과 성령으로 믿는 것과의 차이점이라 한 거예요. 이렇게 되면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겁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된 사람들 글 쓴 것 보면 답답하지요. 십자가, 복음, 범벅으로 다 집어넣었어. 온갖 좋은 건 다 이야기하는데 보면 이쪽이라.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방금 두 번째 시간 시작하면서 에스겔이 하는 모든 역사 개념 자체에서 번져서 예수님 쪽으로 그리고 사도 바울 편지 쪽으로 연결돼있다.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지면에서 입체로 나올 때에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에스겔이 있는데 에스겔이 곱창이라면 집어넣는 그 내용이 뭐냐? 침멀리도 그런 이야기하는데 에스겔의 주제인 ‘성전’입니다. 하늘이 열려서 천사가 등장했지요.
그리고 에스겔 11장에 보면, 드디어 성전에서 하나님의 신이 떠납니다.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에스겔 나중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다시 들어오니까 성전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물이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성전이 되니까 성전 주변에서 고기들이 뛰놀고, 에덴동산 같아. 그런 식으로 강이 나눠져서 넘치는 거죠.
그렇다면 에스겔을 우리가 다 읽었다 칩시다. 딱 핵심 하나 잡으려면 이것 하나 잡으세요. 성전. 성전이 어떻게 됐단 말이냐? 성전이 더러워서 깨지고 깨진 성전을 대신해서 거룩한 성전 만들기. 그렇게 보면 되겠죠. 심지어 에스겔 끝부분에 보면 성전 만들 때 천사들이 정확한 치수를 잽니다. 그건 뭐냐 하면, 들어오지 않을 사람은 들어오지 말란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억지로 성전 만들기 위해서……
성전이라는 게 사람 모집하기 위해서 만드는 게 아니에요. 성전에 초점을 두고 새로운 성전을 만들 때 만드는 진행과정, 어떤 절차로 어떤 경로로 새로 만드느냐? 그걸 우리가 알아야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이 에스겔이 예언한 성전 만들기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일들을 했고 말씀을 했는지 알 수 있거든요.
그게 교재에 보면 나와요. 침멀리 책에 보면, [에스겔 8장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공격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져 4가지 가증한 것을 보게 된다. 즉 성전 뜰에 있는 제단, 벽에 그린 형상숭배, 성전 문턱에서 바벨론의 식물신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는 여인들, 그리고 여호와 현현의 장소에서 동쪽을 향하여 성전입구에서 절하는 남자들이다.] 이것이 성전을 망하게 한 범죄라고 나옵니다.
에스겔 8장에서 4가지로 구분되어서 에스겔이 성전을 망하게 만든 내용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9장에 의하면 이 심판은 여섯 사람에 의하여 시행되는데 그들은 성소에서 시작하여 한 제사장의 인침을 받지 않은 모든 예루살렘 거민에게 행한다.]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나와요. 뭐냐 하면, 구원받기 위해서 남은 자들이 등장하는데 [예루살렘 가운데서 행하는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을 보는 시선이 같은 예루살렘 성전을 걷고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밭을 간다든지 고기를 잡는다든지 직업은 상관없어요. 똑같은 일을 한다할지라도 한쪽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과 한쪽은 긍정적으로 보는 것의 엄청난 차이, 부정적으로 보는 그것이 바로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것도 인침 받아서. 도장 받아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나오는 행동과 모든 말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예수님 입장에서 그 당시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보느냐 하면, 성전붕괴 원인의 입장에서 보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해서 성전 없는 거룩한 나라, 천국은 없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하늘나라’ 글자 써있습니까? 하늘나라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뭐였던가요? 하늘나라에 보니까 성전이 있더라.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걸 봐서 그건 하늘나라고, 어린양의 보좌 없으면 하늘나라가 아닌 거예요. 지 살기 좋고 골프장 있고 그것 하늘나라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하늘나라다운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야 돼요. 그게 어린양의 보좌, 성전이거든요.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네 생물이 있잖아요. 눈들이 촘촘히 박혀 있잖아요. 눈들이 박혀있는 그 대목에서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북한의 장성들 훈장 단 것 있잖아요. 꼭 그것 같아. 흉측해. 너무 달아서 훈장 달 데가 없어. 그처럼 온 천지에 눈을 박아 놨다 이거거든요. 그 점에 대해서 해봅시다. 나중에 에스겔에서 성전에서 새로운 토지,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새로운 도성이 만들어지잖아요.
그렇다면 세상이란 게 뭐냐?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핵이 있는 거예요. 태풍의 눈이 있듯이. 세상에 움직이는 눈이 있어요. 그 눈이 성전이라는 것이 유다나라의 성전이 붕괴됨으로서 드디어 온 세상에 공개되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유다나라의 성전붕괴는 유다나라뿐만 아니고 그 주변에 있던 모압과 암몬과 블레셋과 바벨론과 모든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유다나라만 망한 게 아니에요. 유다나라와 관계된 애굽이고 모든 나라가 결부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스웨덴은? 필리핀은? 브라질 원주민들은? 볼리비아 모자 쓰고 있는 인디언들은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다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성전을 파괴하는데 참여한 나라, 바벨론의 연속적인 국가에 해당되는 겁니다. 모든 민족의 대변자가 바벨론이에요. 왜 바벨론이냐? 바벨론이 가장 유다나라가 멸망하는데 직접적으로 관련돼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이 유대인들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이라면, 적그리스도, 복음에 가장 반대하는 신학을 펼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 신학이죠. 그러면 성령 받지 않고 납득하고 이해하고 이해해서 인간이 가장 완벽하게 기독교를 구축할 수 있는 그것이 누구 게요? 현대판 바리새인, 개혁주의죠.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적그리스도, 가장 그리스도에게 대적할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신학, 삼위일체 신학, 그게 바로 개혁주의신학. 왜? 개혁주의신학 저희 스스로 모든 신학 가운데 최정상급 신학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바른 전통 속에서 신에 따라서 날마다 개혁한다. 이게 모토 아닙니까. 바른 전통은 변치 않고 그 시대 상황 따라서 새롭게, 새롭게 변해나간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것 곁들여서. 적 그리스도적이죠.
그들의 주장이 에스겔에서 이야기한 성전의 회오리바람 속에 휩쓸린 바벨론이란 존재와 엮여졌다는 이러한 상황을 그들은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바벨론, 옛날이야기지. 옛날이야기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것이 바로 유대인이라면 그 유대나라의 모든 사고방식과 묵시는 바벨론에서 배운 거예요.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유다의 묵시문학. 유다의 묵시문학이 바벨론 철학책에서 나온 겁니다. 점성술 같은 것.
점성술이란 대자연의 변화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면 숨어있던 하나님의 뜻이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인격체가 지금도 세상을 다루고 있으니까 똑같이 반복적으로 할 수 있다. 마치 사람이 인격이 있으니까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보다 더 위대한 어떤 분이 자연세계를 통해서 자기 뜻을 나타내면 그 뜻을 우리가 챙기면 주의 뜻을 아는 게 되죠. 그게 별자리 아닙니까. 별은 항상 제자리에 반복해서 뜨지요. 그렇다면 그 별자리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돼있고, 동방박사가 별보고 왔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이미 유다나라에 속해 있는 그 세계관이 바벨론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벨론 말고 다른 것으로 할 수 없나? 다시 할게요. 유다나라가 바벨론한테 망했지요. 바벨론한테 덮어쓴 겁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죄 안에 갇혀있다는 말을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에스겔은 실재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다나라가 바벨론한테 망했죠. 유다나라가 알았던 여호와는 결국 바벨론이 자기 신을 섬기는 그 아이디어의 연속이 유다나라가 여호와 섬기는 그 사고방식이라 이 말입니다.
어제 주일 낮에 이야기했지만 우상이라는 게 우리 내부로 이미 들어와 있어요. 바깥에 돌부처 안 섬긴다고 우상 안 섬기는 것이 아니고 우상 섬기는 사고방식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나를 좋게 하는 신 또는 자연세계, 이게 바로 우상적 사고방식이에요.
한 국가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를 그 동안 지켜주고 보호해준 그 하나님이 저쪽 하나님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애굽에 신들이 있었죠. 그 신이 자연신인데 여호와께서 열 번이나 조져버리잖아요. 그래서 나는 애굽의 신들을 심판했다고 돼있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반드시 승리한 쪽이 하나님이 패배한 쪽 하나님보다 훨씬 더 진짜 하나님에 가까운 거예요. 그렇다면 바벨론이 유다를 이겼으니까 마르둑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하지만 유다가 섬겼던 여호와는 잘못된 여호와고 사실은 마르둑 신을 섬겼기 때문에 유다가 그 신에게 망한 거죠. 망했다기보다 복속됐다, 흡수통합된 겁니다. “여호와 믿는 척 하지 마. 사실은 마르둑 신이야. 네 본색 드러내. 힘들게 여호와라 하지 말고. 니 본색은 따로 있잖아. 예수, 예수 하지 말고 삼위일체라 하지 말고.” 본색은 절에 가는 것과 똑같잖아요. 본색을 드러내란 말이죠.
그런 가운데서 성전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성전 새로 만드는 방법이 에스겔 전체의 테마로 등장합니다. 성전을 만들 때는 벽돌이란 재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과정이냐 하면, 성전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고 누가 거주하시는 겁니까? 여호와 하나님 자기 아파트죠. 자기 집이죠. 집 없는 하나님이 있습니까? 없지요. 집 따로 있고 하나님 따로 있는 이런 건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은 자기 집 속에 거주하시길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나오죠. 하나님이 자기 처소라 삼으사.
그런데 하나님의 처소로 삼는데 그 처소가 그 동안 수평적으로 시온이라는 곳 특정장소에 지어놨지요. 이제 어려우니까 참으세요. 시온이란 땅에다가 성전을 세웠습니다. 성전을 사실은 하나님이 세우려고 한 게 아니고 다윗이 자꾸 세우자고해서 다윗은 재료 준비하고 아들이 세워서 다윗가문 또는 다윗자손이 세운 걸로 돼있어요. 나중에 신약시대에 성전을 누가 세웁니까? 다윗자손이 세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말도 안 되는 요구조건을 들어주면서 그걸 부정하면서 새로운 그 개념에다 묵시적 개념을 담아서 그대로 이 땅에 세워지게 하는 겁니다.
시온 땅에 성전을 만드니까 이 땅을 떠나면 성전을 떠난 것이 되겠죠. 요나가 뱃속에 들어갔을 때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네가 어디 있든지 응답하겠다. 이 말은 성전이 한 곳에 지정돼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나 정리해봅시다. 시온에 성전이 세워짐으로서 성전은 한 곳에 지정되어있다. 원리원칙 하나 끄집어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나오잖아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죠. 예수 그리스도 말고, 이만희라든지 마호멧, 문선명 같은 사람은 있을 필요 없죠.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중보자도 한 분밖에 없어요. 구약에 보면 성전은 한 곳에 이미 지정이 돼있어요. 이 원칙을 하나 끄집어냈어요.
한 곳으로 지정돼있다 하니까 이것을 2D로 할 것이냐, 3D로 할 것이냐? 이게 남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평지에 있는 지리적인 그 성전, 역사적으로 솔로몬이 세웠던 그 성전을 성전으로 본 겁니다. 단지 나중에 요나는 방향성만 이야기할 뿐이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더니만 기도가 응답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기가 성전이 되는 건 아니고 성전은 따로 있어요. 한 곳에 지정된 곳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지정된 것이 만약에 성전이 비행접시이라면, 이것이 추진력을 받아서 공중으로 뜨면 어떻게 됩니까? 뜨면 지상에 성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떠버렸으니까. 그런데 땅에서 만든 건물이 하늘로 뜰 수 있겠습니까? 못 뜨죠. 그래서 인간은, 한 곳에 있는 성전은 뜬다, 못 뜬다? 못 뜬다. 그런데 하나님은 뜬다가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죠. 그리고 구름이 가리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 8장,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휘장을 찢어버렸잖아요. 자신의 몸이 곧 제물이고 제사장이고 성전이고 성소고.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 되셔서 그리스도의 몸이 땅을 떴다는 말은 성전이 위로 뜬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볼 때 “성전 참 잘 지었습니다. 46년 걸렸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짓겠다.”고 했거든요. 제자들은 지평적인 한 장소로 봐서 불도저로 헐어버리고 사흘 만에 짓는다고 본 거예요. 제자들이 뭐가 문제에요? 46년 동안 지어도 다 못 지은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할 때 제자들이 그 말을 못 깨달은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자기들의 인식의 한계, 자기가 자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간관과 공간관에 문제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3D로 이해 못하고 2D로 항상 역사와 지평적으로만 생각하는 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는 모든 언어를 자기가 아는 시간과 공간관으로 다시 해석해서 알아들은 양 했던 겁니다.
그 몸을 현재 우리가 입고 있어요.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말씀은 그럴싸한데 실제 살아가는 걸 보면 이 땅에서 밥 먹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후다닥 벗어버려야 돼. 우리 마음대로 벗으면 안 되고. 그런다고 껍데기 벗어지는 건 아니고.
우리가 자살하면 안 되는 이유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우리는 산 영이 되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죠. 살려주는 분이 안 살려주면 천 번 거듭나도 소용없어요. 왜? 천 번 거듭나도 살려내는 영이 안 오면 그냥 사는 것처럼 우기는 것뿐이라니까요. 죽어가고 있으면서. 자살해도 소용없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자살이란 살려는 의지라 했습니다. 상당히 역설적이죠. 자살이라는 것은 현재 나는 안 죽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자살할래.”라는 말을 한다는 거예요. 지가 지금 살아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자신만만한 발언이 자살이죠.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그런 말이 있어요.
에스겔에서 성전을 어떻게 만드느냐 그 이야기 아닙니까. 만들려면 문제가 뭐냐? 우리 자신에 문제가 있죠. 시간과 공간관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를 알고 성전을 섬기다 보니까 바벨론한테 된통 당한 겁니다. 결국 우리가 갖고 있는 성전관은 성전을 보면서 성전의 의미를 몰랐다는 우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바벨론 식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성전으로 우겼다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벨론에 잡혀갔다는 것은 잘 된 셈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본색이 기껏해야 바벨론 그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이 들통 났으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옛날 성전은 어떻게 돼요? 깨질 때 어떻게 깨졌어요? 불에 탔지요. 그러면 바벨론적 성전이란 불에 타게 돼있단 말이죠. 불에 타버리면 그 앞에서 양 잡고, 소 잡고, 염소 잡고, 거룩한 기구 만들어서 다 불쏘시개에 불과한 거예요. 그렇다면 그 동안 유다나라가 성전 섬겼다는 것은 사실은 성전에서 나오는 제대로 된 불 심판을 받아야 합당한 사고방식으로 성전에서 깝죽대고 있었던 겁니다. 그 당시 제사장들도 마찬가지고.
그것을 그들은 바벨론을 통해서 고맙게도 내가 누구며, 내가 어느 수준밖에 안 되는가를 폭로 당하는 행운을 얻게 된 거예요. 이걸 저는 주의 말씀 계획안에 흡수되었다고 표현하는데. 가락교회에서 강의했잖아요. 볼트 박아놓고 집 짓는다고. 철로를 깔아놔야 기차가 다닐 것 아닙니까. 그 철로가 언약이거든요. 비로소 언약에 전에는 지식으로 동참했던 그들이 바벨론에 가서 성전 불타고 난 뒤에는 바로 죄인의 입장에서 멸망당해야 마땅한 자 입장에서 고맙게도 언약노선에 놓여지는 혜택을 입은 거예요. 혜택 정도가 아니고 특혜를 입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 지라는 이 말은 네가 이제는 언약이 다니는 철로로 편입됐다 이 말이거든. 내 안에 언약이 작용하는 그것이 깔려있다 이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이 말은. 십자가가 볼트에요. 뭐든지 십자가 볼트로 단단히 조여야 돼요.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이걸 유다나라는 언제 압니까? 바로 자기들의 성전이 자기들 보는 앞에서 불타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불타도 마땅한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전을 허락했다는 걸 아는 겁니다.
그걸 제자들은 몰라요. 46년 동안 졌습니다. 제자들이 그런 소리 했지만 요즘도 만약에 부산 가다 큰 예배당 있으면 부럽잖아요. “교인들 돈도 많다. 언제 졌노?” 나도 저런 교회 당회장 되어서 당회실에서 쩡쩡 울리면서 당회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이 말이죠. 우리가 시기 질투하지만 우리에게 가라면 갈 수도 있는 문제고^^
그런데 바로 그런 성전이 불타버린다는 것을 깨달을 때 거기에 언약이 발생하는 철도노선이 깔리게 되는 거예요. 그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님이 하신 모든 것이 몽땅 주어지는데 그 주어지는 것 안에 옛날 성전 불타버렸다는 내용이 담겨서 우리에게 임하는 거예요. 에스겔 전체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특혜에요. 이건 논산훈련소에서 후방으로 빠지는 것과 똑같아요. 이건 보통 특혜가 아닙니다. 하늘나라 빽써야 빠질 수 있는 겁니다.
다시 설명할게요. 하나님이 성전을 어떻게 만드는가? 성전을 불태워서 성전을 만든다 이 말이죠. 성전을 불태우는 게 재료란 말이 아니고 불타면 없어지죠. 성전의 재료가 문제가 아니고 뭐가 문제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의 마음가짐, 인간 자체가 문제 되는 거예요. 우리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문제가 다른데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 미처 몰랐던 거예요. 더러운 곳이 주님의 거룩한 곳이 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죠.
그래서 에스겔 37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만들 때 재료가 뭐죠? 이스라엘 군대 만드는 재료가 뼈다귀에요. 그것도 세상에 바짝 마른 뼈로 성전 만들 줄이야 상상이나 했습니까. 하나님 같으면 귀한 보석, 나무도 최고급 나무로 만들고 이렇게 성전 짓는다고 생각했잖아요. 솔로몬이. 다윗이 준비한 최고의 재료가 뭐였습니까? 그 당시 레바논 백향목. 우리나라 같으면 춘양목. 또는 영덕에 가면 금강송, 그런 정도. 그리고 보석도 최고급 귀한 수입품들로 성전 만들었을 때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자기 자신의 주제도 파악 못하고, “주님 이 정도 했으면 영광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한 거죠. “너희들이 원하는 성전이 이것 맞나?” “맞습니다. 이 정도 됐으면 우리는 땡 잡은 겁니다.” 이렇게만 생각했지 자기들 속이 시커멓다는 사실을 몰랐죠. 시커먼 속에 성전 만들 줄이야. 이건 하나님 아니면 어느 누가 발상이나 하겠습니까? 죄인 중에 괴수 안에 자기의 거룩한 하나님의 천국을 만들 줄이야 상상했겠습니까? 못 하지요. 이런 발상은 꿈도 못 꿀 발상입니다. 우리는 맨날 죄 지었습니다. 못났습니다. 완벽했으면 좋았을 텐데. 맨날 완벽만 바라지 완벽할 필요도 없이 죄 지은 것 자체로 완벽하다는 생각을 성령 안 받고서야 누가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죄인의 입장에서 십자가 처형당한 비참하게 죽었던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성령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았습니까? 아무도 몰랐지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한 것은 오직 십자가 달린 예수님뿐이다.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알았던 모든 것은 똥이요, 오줌이요, 더러워서 갖다버릴 배설물이라 했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만 증거하나니.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았다 이 말 아닙니까.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깊은 곳을 아무도 통과하지 못하는 거예요. 말을 바꾸면 십자가 알아버리면 하나님 진짜 뜻을 몽땅 다 알아버린 거예요. 더러워라. 그것이 바로 천국이니라. 우리는 아직 충분하게 못 더러워. 아직도 우리는 착할 생각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아직까지 더럽지를 못해요. 세리와 창기가 우리보다 먼저 천국 가는 것에 대해서 시기할 정도에요.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전 만들기는 뭐가 문제냐? 바로 이스라엘이 충분하게 죄가 무르익지 않았다. 충분하게 죄가 무르익어야 그 다음에 충분하게 심판하고 저주를 하시고 그래서 어느 누구도 성전 짓는데 보탬 되었다, 나는 기도 많이 해서 성전을 했다, 그런 소리가 일체 못 나오게 만들어서 모든 인간은 다 거짓되다고 확정된 상태에서 성전은 오직 성전을 만드신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다윗의 자손, 새로운 몸이 준비돼있습니다. 그분이 누구냐? 바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 한 몸이 46년 지은 성전을 대신해서 그분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면 그 안에서 아버지께 이야기하고 아버지께 기도하는 집이 되면서 성전이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걸 다시 하게 되면, 성전이 무너질 때 그냥 무너지면 안 되죠. 죄가 충분하게 숙성돼야 되죠. 그 죄를 인자된 에스겔이 감당하게 됩니다. 에스겔 3장 24절 볼게요. “주의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폐쇄적이죠. 오직 한 곳을 정했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잊지 마세요. 성전은 여러 곳이 아니고 오직 한 곳입니다.
그 다음에 “인자야 무리가 줄로 너를 동여매리니 네가 그들 가운데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지금 에스겔은 죽을 판이에요. 그 다음에 26절, “내가 네 혀로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그러니까 에스겔은 완전히 대나무 빈 통이라. 에스겔 있어도 사퇴해버려야 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은 명사는 하나도 없고 말씀의 동사로만 쓰일 뿐입니다. 말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입천장에 붙어버려요.
그 다음에 4장 봅시다. 박석, 편편한 돌 하나로 그림 그리죠. 그림 그리는 것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루살렘 멸망해서 박살나는 거고. 그 다음에 5절에 봅시다.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우편으로 누우라는 말은 동쪽을 향했을 때 우편이 될 때 그게 북쪽이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성전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 동쪽에서 하나님의 신이 오는 그것을 에스겔이 온 몸으로 받는데 받기 전에 먼저 에스겔이 뭘 보여줘야 되느냐 하면, 이래서 유다나라는 완전히 피 봐야 되고 멸망당해야 된다고 온 몸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가 여기에 에스겔 4장 10절에 보면, 에스겔이 삼백구십 일 동안에 뭔가 음식을 먹기는 먹는데 부실한 음식이라. 성이 포위당하고 어려웠을 때 기근이고, 물도 많이 못 먹어요. 하루에 0.61리터인데 이렇게 먹어야 돼요. 그리고 인분으로 그렇게 해야 되고. 그리고 5장에 보면 인자의 수염과 머리털을 깎아서 1/3씩 나눠서 한쪽에는 성읍에서 불사르지요. 이 말은 1/3은 성읍에서 죽고, 1/3은 사방 성읍에 날리는데 칼싸움하다 죽고, 또 하나는 바람에 날리고. 포로 잡혀 죽고. 이래 죽고 저래 죽고.
그걸 동쪽에서 오는 주의 뜻을 에스겔 한 몸이 다 받아내서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이건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께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 많은 죄를 예수님이 살아가면서 온 몸으로 발산하는 같은 맥락이에요. 같은 인자란 이름으로 에스겔이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에스겔은 목회 잘 했습니까? 이것은 목회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당해야 되죠. 그러니까 성도란 그냥 피동적인 인생이에요. 당하면 당하는 대로 살 뿐이에요. 당하면서 뭘 보여주는가? 바로 나의 죄와 세상의 죄를 우리는 에스겔 입장에서 세상에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런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거에요. 나는 착하고 여러분은 나쁩니다. 이게 아니고 아는 이 정도로 막 삽니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누굴 대표해서? 바로 모든 죄인들을 대표해서 그것을 보여줘야 돼요.
5장 11절에 보면,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다” 10절에 보면,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그 아비를 먹으리라” 잘한다. 집구석. 같이 티비 보면서 호호거리던 부자가 아비가 아들 먹고, 아들이 아비 먹고. 외식할 것 없네.
이걸 먹을 때 우린 생각하기를, “하나님이여 이 정도로 우리가 죄 지었습니까?”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주여, 정말 이 정도까지입니까? 사람이 이 정도로 비참합니까? 적어도 인격이라는 게 있지. 나에게도 인간의 존엄성이 있는데 이렇게 막 살아도 됩니까?” 물으면,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니 죄는 아직도 멀었다. 내가 너한테 네 죄를 갈구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죠. “그럼 어느 정도 돼야 됩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정도다.” 그러면 성도의 삶은 그 정도 십자가의 삶에 참여된 삶.
그러니까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지금도 십자가 못 박혀서 돌아다녀야 될 것이 못 자국 없잖아요. 어제 아침에 책 보다 베서 “다쳤어요. 호호 해주세요.” 하고 있다고. 사실은 손가락 다친 게 아니라 손가락 날아가도 괜찮아요.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종이에 손가락 벴다고 짜증내고 신경질 내고. “이래서 주의 일 못합니다.” 평소에 우리가 도대체 하나님의 뜻과 무엇과 거리가 있는 겁니까? 자기 죄를 모르기 때문에 맨날 너무 심한 곤욕을 치루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
여기 5장 13절의 말씀 들으면 우리가 할 말을 잃습니다.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주께서 본인이 시원하게 하겠다는데 우리가 왜 말이 많습니까? 아직까지 목사님들 가운데 자식 잡아먹은 사람 없지요. 우리의 지은 죄에 비해서는 그 동안 너무 많은 행운과 너무 많은 긍휼과 혜택이 주어졌어요. 우리한테. 제가 가락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우리가 모르는 새에 너무 많은 행운이 왔다갔다고. 우리가 분에 넘치는 돌보심을 받고 있다고. 에스겔 그 시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평소에 유다나라 사람들이 우상 섬길 때 사실은 장난 반, 진담 반이었어요. 그냥 편하게 생각해서 우상 섬겼어요. 재미삼아 봤습니다, 궁합. 이런다고요. 뭐든지 우리는 재미로 해요. 인생사는 게 편한대로 살고 내 재미로 살잖아요. 하나하나 주님의 분노 생각 안 하잖아요. 그래서 십계명 지킨 사람 있습니까?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되죠. 어긴 것 다 갈라보세요. 우리 아들, 딸 잡아먹는 그건 유도 아닙니다.
그걸 에스겔이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그 당시 사람들은 에스겔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렇게 고맙다고 해야 되는데 인 받은 도장 받은 사람만 고맙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에스겔을 배척하죠.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에스겔 하나하나 하려면 끝이 없으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인봉을 하죠. 뭘 봉인하려고 했을까? 뭘 그 동안 감추었는데 폭로되지 않은 비밀이 뭐냐? 그것도 일곱 층으로 압력으로 어느 누구도 떼지 못하게 만든 그게 뭐냐는 겁니다. 그러면 일곱 인봉이 없다고 해서 우리 사는데 지장 있습니까? 없잖아요. 시장에서 콩나물 사고,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데 “실례지만 일곱 인봉 아십니까?” 이것 묻는 사람 없잖아요. 그것 없어도 잘들 살지요. 결국 우리는 일곱 인봉을 모르는 채 살았다는 말은 세상의 근본적인 질을 모르는 거예요. 성질을 몰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곱 인봉을 떼는 사람이 누구죠? 사도 요한도 못 뗐어요. 누가 뗐습니까? 다윗의 자손이 일곱 인을 떼지요. 에스겔과 연관시켜 봅시다. 에스겔에서 다시 오시는 분이 누굽니까? 다윗의 자손이죠. 그러면 에스겔에서 성전을 멸망시키는 이유가 다윗언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성전을 불태웠죠. 그러면 성전을 불태웠던 그 심정으로 일곱 인을 떼는 거잖아요. 일곱 인을 떼신 분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라 했거든요. 누구 죽였느냐? 우리는 안 죽였는데 감추어진 진짜배기 세상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걸 옛 뱀이라 하고 사단이라 하고 마귀라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주유소에 기름 넣을 때 마귀 보입니까? 사람이 기가 약할 때 헛것이 보이는데 그게 마귀입니까? 아니거든요. 마귀, 옛 뱀, 그런 것은 아무도 몰랐는데 예수님만 알았거든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마귀와 싸웠고 마귀한테 죽임을 당했단 말이죠. 죽임을 당했다가 살아나셨다는 말은, 이제는 진짜 이 세상의 본질을 폭로할 시점이 왔다 해서 일곱 인을 떼는 거예요.
이제부터입니다. 일곱 인을 뗄 때마다 천사들이 출몰하죠. 천사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심판과 저주지요. 그러면 뭐냐 하면, 성전이라는 개념이 특정 장소의 성전이 아니고 성전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것을 성전과 관련 있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바벨론, 암몬, 모압, 전부다. 아까 태풍의 눈이라 했지요. 모든 게.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이런 걸 몰라도 목욕탕에 자주 가고 운전해도 관계없잖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뭡니까? 태풍의 눈의 멸망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이 와서 진짜 성전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존에 성전과 관련된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그러한 역사가 남아있는 역사라는 것을 제가 이야기해드리는 거예요.
그것과 에스겔 끝부분과 연관시켜 봅시다. 결국은 에스겔에서 유다나라가 망하잖아요. 그게 유다나라만 망할 거냐 이 말입니다. 에스겔은 그게 아니고 유다나라가 망하듯이 유다나라를 망하게 한 여호와께서 나머지 모든 나라를 다 유다나라 망한 것처럼 멸망시키고 그걸 대체해서 나온 게 뭐다? 나라부터 나온 게 아니고 성전부터 먼저 나오고, 그 성전이 만들어지면 거기에 혜택을 입는 에덴동산처럼 물이 영생수가 넘치는 새로운 여호와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는 새로운 나라가, 새로운 이스라엘이 건설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백성은 누굽니까? 바로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하고 수긍하고 내가 지은 죄는 이것보다 더 혹독한 징벌, 아니 지옥을 가도 마땅하다고 받아내는 그 사람만이 바로 세상을 보고 슬프게 우는 인 맞은 사람에게만 도장 맞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현실을 영적으로 다시 봐서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께서 보신 것처럼 날마다 그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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