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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209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28-에스겔자유게시판에스겔

201209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28-에스겔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09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28-에스겔

(강의:이근호 목사)

에스겔 해봅시다. 여기 교재에 보면, 에스겔은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추방당한 자로서 예레미야와 여러 면으로 비교해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시작하지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에스겔 BC597년에 여호야긴과 추방되었다. 유다가 멸망하기 11년 전에 바벨론에 잡혀갔다고 돼있는데 이러한 역사적 상황으로 에스겔의 진면목을 알 수 없어요. 교재는 그렇게 돼있지만 에스겔 1장을 보게 되면,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오 일이라”

여호야긴이 잡혔다는 역사는 어디에 양보를 해야 되느냐 하면, 하늘이 열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이상, 기이한 현상을 보는 것에 대해서 그 내용을 양보해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어쨌다, 저쨌다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그걸 먼저 전제로 하고 내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을 뛰어넘는, 무색케 하는 새로운 환상이나 계시, 이것이 에스겔 강의의 초점이 돼야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같은 역사 선상에서 너는 그렇게 보고, 나는 이렇게 본다는 견해는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다 쓸데없는 거죠.

그래서 에스겔 전체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에스겔은 역사적 의미에서 제거당하는 존재에요. “두 발 그 땅에 떼!” 이런 식이란 말이죠. 실제로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의 권능이 임해서 에스겔 마치 크레인으로 끌려오는 것처럼 능력에 의해서 다른 장소로 홀연히 이동하는 그런 대목들도 나와요. 신기한 거죠. 마치 빌립 집사가 갑자기 광야에서 내시를 만나는 것처럼 그러한 기이한 현상이 에스겔에 벌써 나오는 겁니다.

에스겔 3장 12절에 보면,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그러니까 이건 “에스겔에 대해서 당신 어떻게 평가합니까?”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에스겔의 역사적이고 자신의 기대나 포부 이런 것들은 주님에 의해서 완전히 삭제당하는 인생, 그게 적절하죠. 그래서 에스겔처럼 산다는 것은 말씀 속에 있다면 내가 세상에서 날마다 제거돼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말씀이 중요하지 내가 이 세상에 어떤 특정 존재로 여기 있다는 것은 안 중요한 게 되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중요한 것은 말씀이 중요하고 나라는 존재가 나이가 얼마며, 지금 직장은 뭐며, 가족은 어떻게 되며, 이런 것은 이상스럽게 에스겔에게 말씀이 오면서 그런 것은 뭔가 희미하게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탈색하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락스로 빨래 때 빼듯이.

여기는 말씀으로 돼있지만 사실 따져보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적인 실존이라든지 이런 것은 생각할 여유조차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말씀이 중요하게 되면, 여기 에스겔 3장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만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생각 안 해버리면 그 다음에 사회에서 어떤 현상을 보이느냐 하면, 사람이 무섭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본인 자체가 제거대상이라면 자기 앞에 둘러싸인 얼쩡거리고 자기 앞에 밥 먹고 있고 운동하는 모든 사람들도 자기와 동일하게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제거될 대상에 불과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에스겔이 공연장에 갔는데 거기서 미스코리아 진선미를 뽑는다 할 때 에스겔에서 “저기 진선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거대상입니다.” 이렇게. 보통 사람 같으면, “이번엔 얼굴이 예쁘네요. 아주 똑똑하네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예쁘던, 똑똑하던 관계없이 제거대상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번에 대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굴 찍겠습니까?” “둘 다 제거대상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말씀 앞에서 제거대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으로 자기를 비춰보는 식으로 저쪽 사람들도 주변 사람들도 같이 비춰보면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으면 사회가 중요하지 않지요. 사회가 중요하지 않으면 국가도 중요하지 않지요. 그러면 중요한 건 뭐냐? 하나님의 언약인데 말씀 속에 된 하나님의 일관된 밀어붙이는 계획이 중요하죠.

에스겔에게 “당신은 목회 잘 했습니까?”라고 묻게 되면, 에스겔은 목회를 참 잘 했어요. 그러나 목회 잘한 사람은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에스겔이 목회를 참 했지만 목회 잘 한 사람은 존재는 아닌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행동, 동사죠.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이 움직였는데 동사가 뭉쳐져서 명사, 그러니까 에스겔이라는 훌륭한 목회자라는 명사를 낳는 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먼저 염두에 둬요. 나는 훌륭한 목회자가 되겠다고 염두에 두면, 여기서 나온 동사는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잘 되기 위한 수단으로서 목회 잘하기가 나와 버린 겁니다. 이걸 에스겔 내용에 보면 나옵니다. 그걸 ‘거짓 목자’라 해요. 삯꾼 목자지요. 돈을 밝히는 것만 삯꾼 목자가 아니라 “나는 삯꾼 목자 안 돼야지” 하는 그것도 삯꾼 목자에요. 거짓 선지자에요.

명사가 아니고 동사라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됩니다. 그걸 염두에 둬야 돼요. 매일같이 움직이는데 그 움직이는 취지는 뭐냐 하면, 나를 삭제해나가는. 뭐로? 말씀으로. 말씀만 있다는 게 아니고 그렇게 되면 말씀이 명사가 되잖아요. 말씀은 명사가 아니고 말씀은 움직이죠. 말씀의 움직임에 따라 가다보니까 내가 어느 정도냐,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냐? 그걸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아요. 그리고 용서해주지도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먼저 서론을 던지는 것은 에스겔을 할 때 하나님의 계획만 뽑아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에스겔은 의외로 쉬운 책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만. 에스겔은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느꼈을까? 그런 걸 따지면 그것은 에스겔에 관심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우수한 설교자, 우수한 목사 되고자 하는 명사로 자리 잡으려는 수상한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자체를 에스겔이 거부하고 배척해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짓 목사의 모습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좀 더 이야기해봅시다.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이 나간다면 쉬운 예를 굴을 파는 굴착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굴착기 예를 드는 이유가 있어요. 굴이 있는데 앞이 뾰족해서 돌아가는 무서운 기계인데 기계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굴을 파낸다고 합시다. 이 굴착기가 가는 곳에 안 파이는 곳이 없겠지요. 심지어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도 철광산이라도 이 굴착기로 다 파이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어떤 걸 드러내느냐 하면, 무엇이 세상을 파느냐? 세상을 파고 들어가는 게 무엇이냐? 이것 하나 하고, 이것만 알면 안 돼요. 파일 때 여기서 쪼개서 나오는 것이 어떤 것들이냐? 이 두 가지가 에스겔 전체 내용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철광석, 금광석 같은 이 세상을 파고 들어가면서 광부가 팔 때 드릴 때문에 쪼개진 파편들이 어떤 모양새냐 말이죠.

한 가지 예를 들면, 뜯겨져 나온 파편들을 보니까 오홀라, 오홀리바 이런 것 있잖아요. 이스라엘과 유다는 사실은 창녀였다. 그것은 말씀이 와서 쑤셔야 그게 나와요. 그리고 그 당시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왕들의 패역과 백성들의 완악함. 표현하기를 철판인 것처럼. 그래서 에스겔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솥에다 각종 것을 납이고 뭐고 다 녹여버린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솥에 집어넣고 유다나라를 모든 것을 녹여버릴 정도로 무서운 진노로 다 녹인다는 것도 나오고 그 가마솥조차도 녹아버리죠. 얼마나 불길이 셌으면. 나중에 솥이 녹이는 기능을 다하고 난 뒤에 남아있는 솥마저 불길에 물처럼 녹아져버리죠.

또 뜯겨져 나오는 예가 뭐냐 하면, 주변에 그렇게 유난을 떨면서 선진국이라 하면서 나를 의지하라고 큰소리쳤던 애굽, 암몬, 모압, 바벨론 전부다 멸망한다는 것, 그것도 뜯겨져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뜯어내는 파쇄기 역할을 하는 이게 뭐냐? 움직이는 성전으로서의 에스겔 1장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뭔가 움직여요. 보통 가구에 바퀴달린 가구 있잖아요. 피아노도 묵직하지만 잡아당기면 바퀴가 달려서 움직이거든요. 바퀴란 외부에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거기에 어떤 손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바퀴를 움직이는 사람의 모양새가 있어서 하나님의 신이 하나의 파쇄기를 만듭니다.

그러면 파쇄기에 해당되는 재료가 뭡니까? 벽돌입니까, 철입니까? 아니죠. 천사로 돼있고 그 기초는 단단하게 각자의 기능에 따라서 네 생물이라고 돼있습니다. 네 생물이 사면을 장식하면서 이것이 하나의 3D로 입체적인 모양새로 나타나죠. 성경해석에서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데 성경 말씀에서 입체로 나와 버리면 그 동안 수평으로 있던 것도 같이 입체가 돼버립니다.

제가 예를 들면, 구약성경 미가 4장을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이렇게 돼있지요.

지도와 실제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지도는 아무리 정교하게 잘 그려도 그게 2차원적이에요. 수평적이죠. 하나의 종이니까. 그런데 실제로 보면 윤곽이 3차원적이죠. 아까 읽은 미가 같은 경우에는 2차원적으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있고 주변나라와 구분이 되면서 이스라엘나라는 거룩한 공간으로 대변되고 주변의 나라는 속된, 더러운 우상을 섬기는 멸망 받을 나라가 되겠죠. 이렇게 2차원적으로 이스라엘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나눠집니다.

그걸 설명하면, 이스라엘한테는 거룩한 제사장이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있으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가 되죠. 거룩한 제사장 때문에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면,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제사장과 관계있는 모세언약 때문에 거룩하다면, 모세언약이 없고 제사장이 없는 나라는 자동적으로 뭐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안 거룩한 게 아니고 더러운 나라가 되는 거예요. 중립지역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성경적 안목에서는 상당히 난해한 거죠.

더럽다, 아주 더럽다, 약간 더럽다 우리는 이렇게 따지길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거룩 아니면 다 더러운 거예요. 이것은 나중에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고. 천국 있고, 지옥 있고, 천국도 지옥도 아닌 어중간한 것 있고. 이런 게 없어요. 연옥이란 게 없거든요. 양 있고 염소 있지 양도 아닌 것이 염소도 아닌 것이 그런 것 없단 말이죠. 우리는 없는데 자꾸 그 자리를 원하죠. “하나님, 나 믿음 없습니다. 너무 거룩하면 부담됩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안 믿겠다는 건 아니고.” 자꾸 회색지역, 중간지역을 찾아가는 경향이 있어요.

에스겔 선지자의 외침은 속히 포로 잡히도록 재촉하는 느낌이 있어요. 내 말을 안 믿게 돼있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너희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거룩과 먼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이야기하게 되면 그들이 관습, 관행적으로, 버릇처럼, 하루 일상이 버릇 아닙니까. 인간의 일상이 반복이니까 반복돼왔다는 그 질이 어떤 질인가를 새삼스럽게 밝히는 게 되기 때문에 그들이 온다면, 에스겔이 거기에 마주 선다면 에스겔은 마치 바바리맨 같아. 그 에스겔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잖아요. 가는 그 방법이 뭐냐? 바로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멸망시켜서 포로 잡아가는 그 방법이 되는 겁니다.

어떤 특정 행동 잘했다는 게 아니고 평소에 일상적인 삶, 생활, 사고방식 이것이 그들은 종합정리가 안 돼요. 그걸 에스겔을 보내셔서 정리해주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창녀다. “어이 창녀, 이빨 잘 닦아. 그러면 구원해줄게.” 이런 것 없잖아요. 창녀란 사고방식 자체가 더러운 남자를 헐떡이면서 욕정과 색정을 느끼면 더러운 남정네만 찾고 있단 말이죠. 생식기 큰 걸 찾는다고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이러한 점잖지 못한 용어로 설교한다는 것은 아마 그런 설교하면 앞에 있는 장로님부터, 권사님부터 일어나 다 나가버립니다. 나갈 때 에스겔은 뭘 하느냐 하면, 박수를 치는 거예요. 왜? 본인도 삭제당하니까. 본인도 지가 전하는 말씀에 의해서 붕 떠서 맨날 장애인이라. 장애인올림픽 나가야 돼. 땅에 붙었다가 잘라내고. 나라는 명사를 매일같이 잘라내고 말씀의 동사만 있는 입장에서 누구 눈치보고 할, 누구 눈치 본다는 것은 내가 명사로 구축하기, “나는 괜찮은 목사일까?” 구축하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훌륭한 목사일까? 하고 사람을 다루려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파쇄기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천사가 와서. 그럴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면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그들은 생각도 안 하고 평소대로 살아가면 그것이 더러운 거예요. 오늘도 더러운 일 해야지. 그래서 더러운 게 아니고 그냥 서로서로 웃으면서 계모임하고 평소대로 사는 거예요. 부산 오면 맨날 롯데야구하고.

그러니 새삼스럽게 뜯어고치라는 말이 아니고 뜯어고쳤다고 안 더러운 게 아니거든, 그게. 사람이 뜯어고친다는 말은 기준점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바빠서 게을러서 못했다. 나는 이렇게 될 수 있다” 하고 자기 자신의 모델을 설정할 때는 뜯어고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에스겔은 명사가 아니에요. 에스겔 자체가 동사기 때문에 뭔가 모델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본받을 생각하지 말고 네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 말처럼. 니 주제파악을 하라. 주체파악을 하라고 도와주는 거예요. 말씀을 줘서. 에스겔의 입장에서 이미 수평적으로 이스라엘과, 에스겔이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마지막 대목에 보면 땅 분배할 때 열셋으로 분배하면서 땅 하나는 제사장 땅으로 남겨둡니다.

이것이 지도처럼 구분되는 것이 하나님의 파쇄기가 입체로, 3D로 등장하게 되면, 아까 미가 이야기처럼 그 지형도 드디어 3D로 바뀌면서 수평적으로 어느 동네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느냐, 아래 있느냐? 수직적으로, 3D로, 말씀의 모양새가 입체로 달라지게 돼있습니다. 바꿔지게 돼있어요.

침멀리의 교재를 읽어보면, 초장부터 그는 역사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치중하는 것은 3D로 가지 못하고 지평선, 2D, 그냥 수평선, 2차원적으로 펼쳐서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를 면적으로 펼쳐서 예수님의 시대까지 이걸 끌고 가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2차원을 선으로 바꾸면 역사가 되겠죠. 역사에서 예언된 것이 예수님 시대에서 완성이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침멀리뿐만 아니고 모든 신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가는 겁니다. 신학자들이 그만큼 믿음이라는 건 없는 거예요.

믿음이 뭡니까? 그냥 납득되는 식으로 하는 거죠. 지난 주일오전설교에 납득되는 것과 성령 받은 것의 해석의 차이점이 뭐냐? 납득되는 것 이야기했고, 성령 받은 것 두 가지 이야기 다했어요. 이렇게 하시면 구원됩니다. 이건 납득이 돼요. 그런 식으로 납득이 되면 구원받은 나란 명사가 남아요. 그리고 천국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내 손에서 지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하고 자기만 치중하고 자기에만 몰두하는 그런 사람에게 성경의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가 왜 납득이 안 되겠습니까? 다 나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데. “여러분 예수 믿으세요. 여러분 좋으라고 한 소리입니다.” 그게 왜 납득이 안 되겠어요. 이해가 되지요. “저 사람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이렇게 하면 나는 구원받는구나. 아, 나 좋으라고 하는 소리이구나.” 성령은 그게 아니고 너를 잊고 예수님 생각만 하세요. 이건데 이게 어떻게 납득이 됩니까? 어떻게 나를 잊을 수 있어요. 이게 말이 안 되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특징이 뭡니까? 자기 생각을 할 여유를 주께서 허락을 안 한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지 생각했습니까? 그러면 자기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그냥 봤다, 느꼈다. 그런 거거든요. “어, 주님의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네.” 스데반 집사가 이야기했잖아요. 그리고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우리는 목격자라. 그리고 베드로후서에 보면, 우리는 그때 영광 중에 변화산에서 주님과 엘리야와 함께 있었던 걸 보았다. 또 사도 바울 같으면, 나는 다메섹에 내려가다가 주님을 만났지요. 그걸 교육을 시키는 게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은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요.

이게 자기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왜 그러냐 하면, 파쇄 하는 그 말씀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가 들어있거든요. 자기를 부인하라는 그런 상추쌈에 쌓여서 모든 말씀이 담겨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말씀을 해석하면 반드시 뭘 통과하게 돼 있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는 죄인의괴수라는 이걸 통과해서 말씀 해석이 바깥으로 나오게 돼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이 자기 부인이 안 된다면 그것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상태죠. 일반 무식한 할머니들이 여기서 반발하는 것도 있지만 목사들이 반발 더 심해. 신학교수는 더 심해.

에스겔 1장에 보게 되면, 역사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3D, 3차원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하늘이 열렸으며 하나님의 이상이 왔다. 자, 이걸 경험하라는 이야기에요? 아니면 이 경험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냥 내가 하나님께 이런 지시를 받았다는 거죠. 그렇다면 에스겔은 텅텅 비어있는 파이프 또는 대나무줄기 같은. 대나무줄기 불면 나팔처럼 울리잖아요. 그 나오는 소리는 불어준 분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악사가. 그러면 대나무가 하는 역할은 뭡니까? 그냥 바람을 통과한 역할이요.

물론 통과를 잘 해줘야지요. 통과할 때 손을 막아서 도레미파솔라시도 가락이 나오지만. 어쨌든 껍데기 아닙니까. 껍데기에 바람 통과하니까 소리가 나오더란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말씀을 본인이 통과한다는 것은 본인 자신이 그런 말씀을 가로막다가는 태풍에 쓰러지게 돼있죠. “어딜 감히 내 뜻을 가로막아.” 하고 아주 혼나게 돼있지요.

이런 송풍기 같은 역할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시작했단 말이죠. 이 바람은 누가 막습니까? 아무도 막질 못하죠. 에스겔도 못 막고, 유다도 못 막죠. 다만 에스겔, 유다나라의 축복이란 것은 바로 그들이 먼저 이런 바람을 알고 받았다는 사실, 받았고 하나님이 이런 뜻이란 걸 알았다는 그 사실만 해도 이미 새로운 언약에서 거룩한 백성입니다. 새로운 차원에서. 이것은 2D, 지평선, 수평적인 면이 아니라 수직적인 면, 평면적인 면이 아니라 입체적인 면에서 새로운 축복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으며 우리는 이미 땅에서 죽은 자요 우리는 땅을 보지 않고 위를 본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 있잖아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벌써 에스겔에서 입체적인 바람이 불었으니까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도 입체적으로 받아야 되는데 처음에 제자들이 성령을 못 받아서 그걸 입체로 받은 게 아니고 그냥 평면으로 받은 거예요. 역사만 생각해서 하는 말이, “예수님,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가 언제입니까?” 질문을 자기 자신을 평지 속에 존재하는 같은 평지의 일부로 보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 안에 역사라는 것으로 뭉쳐져서 자기를 조성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못 받아서 그렇지요. 나중에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바로 그 마지막 때라는 게 구약의 마지막 때, 아까 미가에 나오는 마지막 때 일어날 모든 상황이 벌써 주변에서 터지고 있는 거예요.

거듭나야지. 어떻게 거듭납니까? 그것 때문에 골몰할 이유가 없어요. 거듭날 방법을 찾기 위해서 니고데모는 그렇게 애가 탔지만 성령 받은 사람은 거듭남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나로 거듭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다시 만들어주면 그것이 거듭난다는 사실,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그걸 내가 만들려고 하니까 미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거듭나게 하려니까 환장할 지경이에요. 되지도 않아요. 자꾸 명사가 되고 말아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내가 구원받은 나를 만들려고 하니까 힘든데 내가 구원받은 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사람 되면 되거든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숙제가 아니고 내 책임이 아니고 주님의 책임이에요. 주님의 권한으로 성령이 와버리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직업도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자체가 완벽해요. 다 이루었다가 되는 거예요.

육신으로 우리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요. 빨래를 할 줄 알겠습니까? 난을 하나 키울 줄 알겠습니까? 설거지를 제대로 할 줄 압니까? 다 어설픈 것밖에 없지요. 점점 나이 들면 다 까먹어버리고. 우리 모임시간도 여섯 시던가, 일곱 시인가 그것도 까먹고. 어설프기 짝이 없지요. 요한복음 할 것은 로마서라 했다가, 마태복음이라 할 걸 누가복음이라 했다가, 성경도 엉터리로 이야기하고.

그게 육에 있을 때는 아무리 완벽해도 완벽이 안 되는데 성령이 임했으면 이미 다 이룬 게 돼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다 이룬 게 되면서 “주여, 주 앞에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아주 기쁨이 넘치는 항상 제거될 수 있는 만반의 마음 준비로 살아가는 거예요. 살랑살랑 존재의 가벼움 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지요. 그게 거듭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데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에스겔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란 바로 하나님의 천사 또는 하나님의 신이 이야기한 모든 것은 에스겔은 다 해냈습니다. 왜? 지는 텅텅 비어있는 대나무 통이니까. 뭘 했다, 안 했다 할 것도 없어요. 대나무 통이라고 하고 있으면 다 이룬 게 돼요. 뭘 통과했는데 뭘 통과했는지 모르겠어. 쓸려 내려갔는데 보니까 자기 마누라 쓸려 내려갔어. 바이바이. 울지도 않아.

에스겔 초반에 보면 에스겔이 390일 동안 누워있어요. 이건 북쪽 이스라엘을 위해서 누워있고, 40일 동안 유다를 위해서 누워있어요. 북쪽 이스라엘이란 여로보암부터 망할 때까지 390년이고, 남쪽 유다의 40이란 요시아의 종교개혁 있었잖아요. 그때부터 망할 때까지. 그러니까 유다가 요시아 종교개혁 이후에 40년 지나서 망했다는 말은, 유다나라 자체가 이미 2D, 평지의 계시 역할은 유다가 한꺼번에 다 보여주고 이걸 돌돌 말면 3D가 돼요. 입체가 되죠.

이걸 돌돌 말아서 바벨론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바벨론은 유다가 받았던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키우는 인큐베이터 역할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이방나라지만 바벨론을 진두지휘하고 모든 계획을 수립해서 그대로 지시 명령하는 것은 바로 유다나라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시거든요. 하지만 눈앞에 유다나라가 포로 잡혀서 마주치는 것은 늘 일상으로 대하는 것은 바벨론을 대하는 겁니다.

쉽게 하면 이런 거죠. “그렇게 바벨론 좋아하더니만 가보니 좋디? 너희들이 그렇게 스마트폰 좋아하고, 골프 치기 좋아하고, 세상 것 좋아하고, 교회부흥 좋아하고, 화려한 명품 좋아하고, 고급아파트나 차 좋아하고, 인기 좋아하고, 명예 얻고, 존경 얻고, 권력 얻고 하는데 니가 자본주의사회에서 흡입하니까 그게 좋아 그래?” “죽겠습니다.” “정말?”

그건 우리가 평소에 좋아했던 것이 하나님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한 게 아니고 멸망당할 바벨론처럼 나도 근사한 괜찮은 나, 가치 있는 나, 훌륭한 목회자 이것 하나 욕심이 되어서 결국 우리 사는 목적이 되어서 살아온 거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거리를 그냥 지식으로 그런 것 좋아하지 말라가 아니라 아예 그런 것들로 듬뿍 들어있는 인큐베이터에 집어 넣어버려요. 완전 진액 속에 헤엄치게 만들어요. 온 천지가 세상적 좋아하는 것에 풍덩 집어넣어 버려요. 네가 거기서 마음껏 그걸 탐하고 그것 못 가져서 설음 당해보고 그것 없어서 가정이 파탄 나고 이혼해보고 자식들 아버지 싫어하고 가출하는 자식 만들어보고 그렇게 하면서 인자는 머리 둘 것도 없구나 하는 말이 이제 무슨 의미인지를 자기를 부인하라는 게 무슨 뜻인지를 알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주위에 구경삼아 아줌마들 왔을 때 막 우는 기라. 예수님 안 됐다. 저 청년은 안 됐다고 하지만 주께서 뭐라 했습니까? 나 보고 울지 말고 네 딸내미, 니 집구석 보고 울어라. 지금 우리가 어디에 속했는지 분간도 못하고 있어요. 기적을 베풀어보라고요?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거기에 나오는 용어가 음란이죠. 에스겔에서 음란이란 말을 굉장히 많이 다루고 있어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내가 보여줄 기적은 죽음이다. 너희들에 의해서 죽었는데 살아난 거죠.

그러면 요나의 기적에서 요나를 누가 죽였습니까? 뱃사람이죠. “요나 당신 때문에 배가 뒤집어지려하니까 우린 살고 싶으니까 당신 하나님한테 버림 받아라.” 그래서 잠자는 요나를 집어던졌잖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래서 뱃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그게 뱃사람의 훌륭한 믿음이에요?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성전의 의미를 알았고 죽음이란 게 뭔지 안 거에요. 죽어봐야 죽음을 아는 거예요. 그냥 죽어야 지옥뿐이고. 진짜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죽였던 그 죽음에 성령을 통해서 참여해 본 사람만이 땡 잡은 사람이에요. 이것은 자살해서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예수님의 십자가 버림받음에 함께 참여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에 내가 죽었으니까 아니죠. 사도 바울이 그냥 죽으면 안 되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되는 거예요. 함께 죽어야 그게 요나가 경험했던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진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죽음으로 다룬다. 장차오실 메시아의 죽음의 시선에서 세상이란 것은 왜 존재해야 되고 세상의 일들은 일어나야 되는가? 그것은 모든 것이 예수님의 원수의 죽음과 관련돼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점에 있어서 에스겔도 역시 마찬가지로 어디에 동참하는가? 에스겔 본인이 원하지 않는 말씀에 제거당하는 죽음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거기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에스겔 1장에 보면 천사의 활동으로부터 나온다는 이야기. 그 안에는 물론 하나님의 힘이 천사 안에 있어요. 1장에 보면 천사들 설명돼있고, 내가 본즉 해서 뒤에 보면, 또 하나의 사람 손이 있어서 그걸 움직이고 나중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3장에 보면 나오죠. 3장 13절에 봅시다.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 곁에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주의 신이 나를 들어올려”

그렇다면 정리해봅시다. 1장에서 천사들이 활동하잖아요. 그러면 그냥 구경하면 안 됩니까? 박수나 치고 놀면 되지 천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신이 왜 꼭 임해야 되는가? 이건 뭐냐 하면, 에스겔이 제사장이고 에스겔을 부를 때 호칭이 ‘인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렇다면 일을 나눠서 이야기해요. 하나는 에스겔을 데리고 그 당시 유다나라에 말씀을 전하는 일도 하면서 동시에 에스겔 자신에게 뭔가 일을 집어넣는. 그러니까 곱창에다 순대 만들 때 집어넣잖아요. 일종에 에스겔이 곱창이에요. 창자에다 쑤셔 넣어요. 쑤셔 넣고 흔들어대고. 또 쑤셔 넣고 흔들어대고.

그러니까 에스겔은 결국 장차오실 예수님이 살아야 될 이 2D, 평지에서 세상에서 역사라는 인식 속에 살아야 될 인자의 모습인데 그 인자의 모습을 담는 것은 묵시에서 오는 거예요. 묵시적 존재가 결국 인간의 육신 속에 담기는 인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면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유다라는 개념 자체가 다윗언약 개념 자체가 두 개를 다 포함하고 있어요. 하나는 역사 속에서의 다윗언약과 그리고 3D, 수직적인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의 다윗언약의 개념이 다같이 나와야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보게 되면, 에스겔 37장 24절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여기 다윗이 나오네요. 다윗 죽은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역사적, 평지 입장에서. 다윗은 죽었다니까요. 내 종 예수 아니잖아요. 다윗이에요. 그러니까 역사적 평지 입장에서 보면 그때 죽었던 다윗이 다시 와야 돼요. 그것도 맞고. 그리고 다윗이라는 역사적 개념이란 틀 안에다가 낯설고 낯선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 담겨서 오게 된다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등장해야 된다 말이죠. 그는 누구냐? 여호와에요. 여호와가 왕이 되시고, 다윗도 되시고 그리고 목자도 되시고. 이것이 바로 인자되는 에스겔이 안고 있는 말씀의 파급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는 사도 바울은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냥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이죠. 그렇다면 그 사람의 존재는 분명히 눈에 보이는 밥 먹고 하니까 육체를 갖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육체를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이상한 소리를 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 옷은 내 몸에 안 맞는 옛, 헌 옷인데 현재 내 안에 있는 내용과 부합되려면 헌 옷을 더러워서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현재 내 몸의 본질과 그 옷이 딱 일치가 된다고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누구도 이야기하라는 겁니까? 성령 받은 우리가 해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맨날 고급 옷 찾지 말고 하늘나라 옷을 입는 것을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 입는 옷보다 더 고대해야 된다는 말이죠. 그게 내 본질에 부합되는 거예요. 만약에 세상 옷과 맞는다면 그 사람은 그 본질이 세속적인 경우에는 세상 옷이 맞지요. 그러나 본질이 하늘나라 속한 몸이라면 입을 옷은 세상적인 옷이 아니고 하늘에서 입혀주는 옷이 알맞은 거예요. 그러한 운명, 인생 그걸 에스겔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20910a 부산강의.hwp (50.0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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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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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