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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마술과 말씀 120914강의에스겔

마술과 말씀 120914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공은주(IP:211.♡.128.214)

12-09-19 15:28

안양-벧후2장20절(마술과 말씀)120914a-이 근호목사

베드로후서2장 20절입니다. 19절 읽어보겠습니다.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성경에서 멸망 나올 때, 듣는 사람 기분 굉장히 나쁩니다. 이번에 이집트나 리비아에서 또는 예맨이라든지, 지금 사태가 일어난 게 뭐냐 하면, 마호메트가 사기꾼이라고 영화에서 나온 거예요. 사기꾼 맞잖아요. 우리가 보면 사기꾼 맞는데, 그 쪽에서는 마호메트가 예수님 쪽의 레벨인 거예요. 그 쪽 동네에서.

마호메트가 사기꾼이라는 말은 더 나아가서는 뭔가 하면, 마호메트를 믿는 사람은 멸망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마호메트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마호메트에 빠지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예수에 빠지는 게 아니고, 내가 왜 멸망 받아야 하는가에 사람이 기분 나쁜 거예요. 내가 왜 멸망 받아야 되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면 출발점이 뭡니까? 나는 이래나 저래나 절대로 멸망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거죠. 나는 무조건 멸망 받아서는 안 되고 나는 무조건 지옥 가서는 안 되고가 기본으로 깔려 있지요. 그럼 종교란 뭐냐 하면, 결국 누구 좋아라 하는가 하면, 결국 나 좋아라 하는 것이 종교라는 거예요. 종교의 기본이 뭐냐 하면, 나는 절대로 멸망 되서는 안 될 존재라는 그것을 전제로 깔고 들어간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나는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게 성경에 나옵니까? 절대로 안 나오지요. 성경에는 ‘나’라는 게 없잖아요. 성경에는 ‘나’라는 게 없어요. 아브라함 이야기하고, 아브라함은 ‘나’가 아니잖아요. 에스겔 나오고, 예수님 나오고, 사도 바울 나오고, 내가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을 어떻게 이용해서 내가 살까,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벌써 성경을 보는 자체가 성경을 잘못된 해석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성경에는 내가 없는데, 나는 성경을 앞에 두고 ‘자, 한 번 보자, 어떻게 하면 내가 멸망하지 않을까?‘ ’어떤 대목을 알면 나로 하여금 천국가게 할까?‘ 시작을 한다는 자체가 성경하고 아무 상관없는 자기 좋아라고 보는 거와 똑같은 겁니다.

이건 이스라엘 사람들이 코란 읽는 거나, 옛날 기독교 오기 전에 한국 사람들이 삼신할메 한테 비는 거나,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성경 보면서 나한테 유리한 거, 복 받는 거, 이런 거 찾는 거나 사방이 전부 다 동일한 거예요.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자기가 임의로 집어넣어서 그것만 통해서 좋은 것만 뽑아서 자기한테 유리하게 해 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장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체계를 잡으면 이렇습니다. 성경안의 세계가 있는데 말씀안의 세계, 한 번 해 볼게요. 성경은 '나'라는 게 없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나오지, 나라는 게 안 나오거든요. 성경에는 성도만 나오지 나라는 게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반드시 성도되어야 된다는 것이 성경에는 없어요. 제가 이근호 거든요. 성경에 이근호라는 게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안 나오는데 이름을 여기다 집어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오히려 성경은 반대로 나와 버립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내 이름을 삭제하는 용도로, 니 생각을 접어야 된다는, 주님의 생각으로 구원되는 것이지, 내 생각에다가 주님의 생각을 합쳐서 구원을 이루어서 구원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천국은 순수하게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고 누구 나라가 돼요? 내 나라, 내가 중심이 되는 나라, 내가 설치는 곳, 내 자랑과 내 성과와 내 공로와 그걸 떠버리는 그러한 이상한 동네가 돼 버리지요.

성경에서는 말씀 속의 세계, 말씀 속의 세계에서는 누가 주인공이 되겠습니까? 제가 방금 세자로 ‘주인공’이라 했지요. 주인공이란 말 했지요. ‘공’자 떼어버리고 ‘인’자 떼어버리면 뭐만 남습니까? ‘주’만 남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는 세계가 성경 속의 세계지요. 이거에 대한 예언은 잠언서8장에 보면 나옵니다. 8장에 보면 태초에 내가 있었다. 태초에 하나님 곁에 누가 있었다? 내가 있었다. 그 8장에서 나라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혜 또는 지혜자 되어 있고, 8장 마지막에는 이리 되어 있어요. 내가 있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내가 없는 자는 사망을 사랑한다. 쉽게 말해서 저주 받는다. 이런 뜻이거든요.

잠언서 8장35, 36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내가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내가 없는 자는 사망이 있다. 그럴 경우에 재미있는 것은 그 본문을 딱 떼어서 이걸 누구한테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잠언서 8장 35절, 36절을 딱 떼어서"‘자, 들어봐! 들어보고 너는 주의 해! 예수 믿으란 말이야." 라고 강요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말씀 속의 세계에서는 누가 주체가 되느냐 하면, 말씀 속의 세계는 누가 주인공이에요? 예수님이 주가 되지요. 예수님이 주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부활하셔서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활동하고 계시는 분만이 잠언서 8장에 있는 그 말씀, 내가 있는 자는 생명을 얻고, 내가 없는 자는 생명을 잃는다, 는 그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권한이 그 분한테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그 이야기를 듣고, "아, 나도 저거는 전도할 수 있겠다" 해 "‘예수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우리는 동업자니까 저는 하청업자니까 주님 전도 많이 해서 주님에게 사람 많이 보낼 테니까 저한테 시키세요." 하고 그 말씀을 들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경우에 주님이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너, 누구지?” “니가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할 수 있지?” "아이~ 내가 주님한테 잘 보이려고. 주님 좋아라고~ 주님하시는 일에 내가 협조해 드리려고 내가 자진해서 나섰습니다." “내가 언제 내 일을 너한테 맡긴 적이 있느냐?” 이 말이에요.

사람들의 심보는 뭐냐, 주님의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어떤 호의를 받고 호응을 받고 주님한테 뭔가 예쁨을 받을 수 있는 어떤 기회를 얻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은 자기 일을 누구한테 하청준적이 없거든요. 동업한 적도 없습니다. 12사도에게 자기 일을 맡긴 적이 없어요. 사도들에게 물어보세요? "주님하고 같이 동업했지?" 사도들이 "당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말씀 속의 세계는 우리마저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부분은 전체를 움직일 수 없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부분은 전체를 움직이지 못한다.

말씀 속의 세계 바깥에는 무슨 세계가 있겠습니까? 말씀 밖의 세계지요. 말씀 밖의 세계를 두 자로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크게 쓸게요. ‘마술’이지요. 마술은 뭐냐 하면, 마술은 내 능력이나 언어를 통해서 세상의 현실세계를 조작하고 내 원하는 대로 미리 수정이 가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려고 애쓰는 세계, 그게 마술의 세계입니다. 마술의 세계.

이 마술의 세계 안에 마술의 세계를 아주 고상하게 포장한 것이 뭐냐 하면, 릴리젼(religion) 종교라는 거예요. 그 종교에는 천주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흰두교, 마호메트교, 토속종교, 모든 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종교란, 마술을 경건스럽게 성스럽게 포장한 것인데, 왜냐하면 포장을 해야 옛날에는 국가적인 이미지, 국가 이미지가 항상 전쟁할 때, 신을 앞에 세웠거든요. 그걸 마술사를 세웠다고 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고상하게 신께서 앞서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해서 나서거든요. 구약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멸망한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뭘로 바꿨다? 마술하는 하나님으로 바꾼 거예요. 마술은 항상 초점이 뭡니까? 현실세계, 이 세상 모든 돌아가는 것이 누구 좋아라고? 복습합시다. 나 좋아라고. 왜? 내가 중심이니까.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니까. 내가 신이니까. 선악과 따먹고 내가 신이니까.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내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유치원 아이들 달리기 할 때, 내 자식은 1등해야 되고, 남의 자식은 엎어져도 고소하고, 신나고, 내 자식은 안 넘어지고 1등하고 공책 타 올 때, 그 때 누구에게 감사한다? 신에게 감사하지요. 신에게 감사한 거예요. 이런 심보, 이런 심보는 태어날 때부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요. 이미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근본 심성이 그걸로 부터 출발해요. 근본 심성이.

마가복음 7장 18,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에게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면 사람 속에 먼저 기본적으로 깨끗한 게 들어있다는 말입니까? 더러운 게 들어있다는 말입니까? 더러운 게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이 행동이나 말할 때 마다 그냥 입술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속에 들어있는 장착된, 내장된, 저장된 것들이 입을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오는데, 그것이 어떻다? 더럽다는 거예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더러운 것이 바깥에 나왔기 때문에 더럽다는 거예요. 원래부터.

원래부터 더러운 게 뭐냐 하면, 바로 여기,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이 이야기를 누구한테 한 거예요? 그 당시에는 바리새인보고 했지요. 바리새인들이 대외적으로 하는 일이 뭐였습니까? ‘인간은 말씀으로 깨끗하게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더러운 인간도 주의 능력이 임하면 사람이 깨끗하게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이 이야기했다고요.

그러면 주님이 이 바리새인하고 안 맞고 정면으로 틀린다면 그러면 주님의 취지가 뭡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몰랐던 내가 이만큼 더러운 존재인 것을 비로소 까발리게 된다. 이게 능력 아닙니까? 그게 능력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까발리고 능력으로 한다면 우리는 말씀 속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슨 세계? 마술 속의 세계, 다시 말해서 뭐가 더러우냐 하면 나쁜 짓해서 더러운 것이 아니고 세상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내 좋아라고 세상이 움직여 줘야 그것이 사랑의 하나님이고,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그런 식으로 신을 내 위주로 내 좋아라 위주로 신을 생각하는, 그 엮여진 관계, 그 자체가 이미 더러움에 응축이라, 볼 수 있는 겁니다.

요즘 아침에 TV보면 연세 많으신 분들이 보는 프로그램 중에 '걸어서 세계 속으로' 라는 게 있어요. 한 두 개가 아닙니다. EBS, KBS 걸어서 세상 속으로 보게 되면, 외국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든지, 고상한 풍경이라든지, 그리고 아프리카의 못 사는 이야기, 중국의 오지 이야기 죽 나오잖아요. 보게 되면, 즐겁지요. 아, 저런 것도 내가 몰랐네. 아, 저렇게 사는데. 저런 풍경은 우리나라보다 아름다운 것 같아. 여러 가지 풍경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 풍경들은 나의 바깥에 있는 겁니까? 나의 내부에 있는 겁니까? 나의 바깥에 있는 거죠. 그렇지요? 크로아티아라든지, 우즈베키스탄 보면 유목민들이 사는 것 보면 굉장히 평화롭고 좋잖아요. 물론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너무 불편하기 때문에. 하지만 한 번 쯤은 여행 갔다 오면 뻥 뚫리는 것 같죠.

또 산이란 프로가 일요일날 아침 KBS2에서 온갖 등산에 대한 이야기는 다 나오잖아요. 굉장히 아름다워요. 그게 뭐냐 하면 나를 둘러싼 하나의 아름다운 환경이잖아요. 우리는 그걸 보고 아름다운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얘야, 지리산 좋지?” “좋습니다.” “태백산?” “아주 멋집니다.” “그리고 후지산은?” “멋집니다.” 이런 거 하면, 우리가 동감이 되겠는데, “남태평양 어떻습니까?” 이렇게 묻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어보자, 니 마음을 들여다보자.” 현미경 들고 우리 마음을 찾아보게 되면 아까 성경 말씀 나오잖아요. 광패와 시기와 미움과 음란과 질투, 이게 나왔을 때, 이게 아름답습니까? 아름답지 않습니까? 더럽지요.

결국 사람들이 바깥으로 등산 다니고, 여행 다닌다는 것은 뭐를 감추는 용도입니까? 결국은 자기 속의 더러운 것을 자기도 꼴보기 싫으니까 바깥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서 나는 아름다운 세상을 통해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그렇게 뒤집어쓰고 싶은, 그런 환경 속에서 나라는 것을 저 아름다움과 일치하고 싶은, 그런 욕구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교도소에서 살랍니까? 성당에서 살랍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살랍니까? 어디서 살랍니까? 교도소보다 성당이 낫지요? 왜? 거기는 믿음 좋은 사람, 기도도 많이 하는 사람, 성경도 많이 아는 사람, 그것도 성당 건물 보세요? 얼마나 모자이크, 인간 예술의 최고치를 보여주고 있잖아요. 큰 교회가면 파이프오르간도 있고 그것도 사찰집사가 청소를 깨끗이 해서 먼지하나 없게 만들고 특히는 주부들이 할 일 없는 모양이라, 성당에 가면요, 그야말로 휴지하나 없습니다. 만날 닦고 또 닦고 해서 성당가면 느낌이 깨끗해요. 절에 가면 지저분한데, 성당은 깨끗해요. 그 깨끗한 환경이 내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는 그러한 희망을 갖고 성당을 들어가면서 마리아에게 먼저 절하고 들어간다 말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일을 선배 격으로 먼저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바리새인이지요. 사두개인은 성전을 지킨 사람이고,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생활화하자, 사두개인은 성전을 보수하고 유지하고 관리하고 거기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의 타락한 신앙에 대해서 회개를 촉구하면서 말씀은 지식이 아니고, 말씀은 실천해야 되고 생활화하여야 된다고 외쳤던 그 사람들이 누구다? 바리새인이에요. 오늘날 목사들이에요. 똑같아요. 목사랑 똑같습니다. 그거를 전문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 성경을 항상 적으면서 성경을 유지 보존하는 서기관들, 이러한 세 가지 부류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단정을 내렸습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다.” 얼마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단출합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다.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는 말씀 밖에서 기껏 열심히 해봐야 바리새인을 능가할 수 없고, 사도개인을 능가할 수 없고, 서기관을 능가할 수 없는 입장에서 내가 온 힘을 다하고 행함과 실천력을 다 동원하고 경건이란 경건은 다 끄집어내서 신에게 모든 고상함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멋진 정숙된 마음과 절제된 마음을 다 드려도 마귀 새끼란 욕설을 듣는다면 그럼 나보고 더 이상 뭐~ 어떻게~ 어쩌란 말이냐, 이리 나오겠지요.

여기서 성령이 나옵니다. 성령은 말씀 바깥에 있는 세계와 말씀 안의 세계와 이어지는데, 성령이 주어지는데, 성령은 스스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다루어졌고, 그 전에는 성신에 의해서 제사장들이 다루어졌고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는 비로소 주가 되고 난 뒤에는 성령님도 누구 말을 듣는가하면, 주의 말을 듣습니다.

주의 말을 듣는 이유가, 주님의 영으로 있어줘야 주님께서 말씀 속에 세계에 집어넣는 사람에게만 성령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방주와 그 크기로 봐서는 아마 수백 명 들어가도 남아요. 크기로 봐서는 엄청난 크기지요. 크기는 그렇게 크게 만들어 놨는데 몇 명 탔습니까? 동물 빼놓고 달랑 8명이지요. 그것도 말이 8명이지, 따지고 보면 1 훼밀리, 한 가족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크게 만들려는 이유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일종의 낭비잖아요. 크게 지은 이유는 분명히 수천 명 몰려 올거라고 생각하고 노아가 전도를 했는데, 아무리 전도해도 결국은 옆집도 구원 못 해요. 옆집도.

기껏해야 자기 며느리하고 자기 아들하고 토탈 합해서 8명밖에 안됐다 이 말이에요. 노아가 지금 실수한 겁니까? 노아 큰 잘못을 저지른 거예요? 너무 이기주의적 구원만 외친 겁니까?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노아가 책임추궁 당해요? 크게 만들어서 망한 사람 건지라 했더니만 결국 니 영업실력이 이것밖에 안 돼! 8명이 뭐야? 8명이. 8명 같으면 너희 식구 같으면 전도 안 해도 되겠다! 그동안 뭐했어? 니가 이래서 니랑 동업하겠어? 하고 책망 받았습니까? 칭찬 받았습니다. 노아가 당대에 뭐라 했습니까? 의인이지요.

의인이란 의미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선과 악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되심에 대해서 철저하게 지시에 따라서만 행동한다는 겁니다.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만 행동한다는 겁니다. 마치 성령님이 주님 따라서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에스겔 12장24절, “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 다음에 13장3절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찐저”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기 심령에 따라 예언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우리의 심령이 남에 대한 사랑과 “아, 저 사람 구원 받아야 돼! 나 혼자 가면 미안해. 우리 엄마는 절에 가는데, 우리 엄마를 빨리 전도해야지.” 이런 심령이 나쁜 겁니까? 그것조차 성령의 역사로 하는 열매로 보면 안 되겠어요? 성령의 역사해서.

“아이고 딸 하나가 있는데, 교회도 안 가고 남자친구랑 돌아다니고 저거 구원 받아야 되는데. 어떻게 구원 받을 방법이 없나? 하나님 어떻게 나를 보내셔서 중보기도 하던지 어떻게든지 해서 저 딸에게 전도하게 하옵소서. 이것도 주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견하지 않습니까? 아주 기특하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그게 성령의 역사고 성령의 열매고 아주 애끓는 사랑의, 저 사람의 영혼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그 사랑, 그 자비심, 그게 성령의 열매 아니고 뭐겠습니까? 라고 교회들마다 목사들마다 이야기하지요.

그게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자기 심령에 따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 말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감정이 있어요. 동물도 감정이 있는 반면에 사람도 있어요. 사람도 따지기 이전에 먼저 마음속으로 느껴지는 게 있어요. 아무리 내 자식 아니라고 호적 파가라 해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이고, 민재야, 돌아 오거라. 보고 싶다.” 그렇게 해요. 민재란 이름은 연속극에 나와요. 천사의 선택에 보면.

그렇듯이 내가 예수 믿고 좋으면, 좋은 걸 남한테 나눠주고 싶은 갈급한 심정이 있잖아요. 그걸 성령의 헐떡임, 성령의 갈구함으로 봐주면 안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아닙니다. 봐주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해 버리는 것이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사람 꼬시는 영업하는 전략입니다. 여러분들은 중보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왜 사용하지 않습니까? 성령 받았으면 공짜로 받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전도하라고 준 성령인데 왜 은사를 여러분들은 놔 버립니까? 달란트 받은 사람들이 달란트 안 써먹다가 나중에 멸망 받은 거 아시지요? 나중에 임금이 열달란트, 다섯달란트 썩어있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 욕 얻어먹잖아요. 왜,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있는데 그걸 썩이고 교회 봉사도 안 하고, 헌금도 안 하고 그래가지고 어떻게 천국 가겠습니까? 천국은 믿음으로 가겠지만, 상급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 한다 말이지요.

다 거기에 말려들어 갔습니다. 속아 넘어 갔습니다. 그런 줄 알고. 그게 에스겔에 의하면 뭐냐 하면, 자기 심령을 따라 하는 거예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그래서 이 말은 뭔 뜻인가 하면, 사람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고 아무리 성령을 받아도 역시 사람에게서 툭! 튀어 나오는 것은 이 욱~ 하는 성질이에요. 욱하는 성질. 교회에서 연말에 가서 자, 전도상 드리겠습니다. 열 명 전도한 사람 나오세요. 냉장고. 5명 전도한 사람 금 목걸이 줄 때, “김 집사님은 몇 명 전도했습니까?” “바쁘다보니까 아무도 전도 못하고.” “아~ 그래도 그러면 내년에 하세요.” 목사가 말은 좋게 말해도 교인하나 심령상해서 교회 안 나오면 돈이 안 나오니까, 하지만 돌아서서 “아이구, 집사가 돼가지고 지 남편도 하나 구제 못하고, 무슨 믿음 있다고, 아이구 믿음 있는 체하고, 금요철야 하는 거 보니까 믿음 있는 체 하고, 믿음이 뭐가 있어? 사람을 데려와야지, 사람도 안 데려오고. 머리수도 못 채우면서 그게 무슨, 예배당 크게 지어놨는데, 내 집을 채워라 했잖아요. 채우지도 못한 게 그게 무슨 믿음 좋은 거야?” 라는 식으로 예배당에서 이미 성당에서 이미 세뇌를 꾸준히 받다보니까 프로가 아니고 아마츄어인데 내가 성경에 대해서 신학도 안 받은 사람이 뭐 알겠느냐, 신학 받은 목사들이 그렇게 하니까 오는 강사마다 그렇게 하니까 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성경이 다 옳은 줄 아는데, 그게 바로 마술입니다.

전도 많이 하면 고부간의 갈등도 전도하다 보면 스스로 풀렸고, 애 성적이 나빴는데, 전도 열심히 하다 보니 교회 다니다보니까 갑자기 애가 정신 차려서 “어머니, 아버지 교회 가겠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서 그런 기적을 저 사람만 받지 말고, 여러분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만 갖고 있으면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해 보세요.” 라고 희망을 주고 하는 그것이 교회에서 영업하는 전략이에요.

노아방주에 몇 명 들어갔다 했습니까? 8명. 노아가 그런 거 안 해 봤겠습니까? 노아의 의인됨, 바로 그것이 악한 것임을 안 거예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되지, 내 쏠리는 대로, 내 느끼는 대로 해놓고 뒤에서 이게 성령의 역사라고 갔다 붙이는 반칙은 이것은 인간의 엄마로부터 타고난 내 죄성의 일부라 하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성령께서 말씀 속에 있는 세계, 이걸 방주라 해 봅시다. 말씀 밖에서 8명을 뽑든 1명을 뽑든 2명을 뽑든 이것은 성령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성령께서는 누구한테 오는가, 말씀 속에 들어갈 8명이 됐든, 2명이 됐든 숫자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교회 헌금이 10억이 나오든 20억이 나오든 예배당 짓다가 무너지든 그런 것들은 말씀 속의 세계가 아닙니다.

말씀 속의 세계에는 예배당이 없고 헌금액수가 없고 사람숫자가 없어요. 여기는 부자 되고 시험에 탈락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이런 게 말씀 속의 세계에는 없습니다. 말씀 속의 세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다? 주시다.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절에 다니던 사람이 술고래인데 내가 전도해서 교회 오다가 그만 돌에 넘어져 그만 뇌진탕 걸려서 중풍 걸렸다. 신이시여! why me? 나에게 하필이면 이런 저주를. 교회 다니도록 전도하려하는데, 주위 사람에게 덕이 안 되고. 우리 남편이 잘돼야 "야, 교회 가니까 복 받는구나!" 이래야 몇 명 더 꼬실 건데. 교회 생전에 안 가던 사람이 오다가 돌부리에 넘어져서 머리 뒤 깨어져서 중풍 들렸을 때, 있는 보험 다 털어서 다 날렸을 때, 이래서는 남한테 덕이 안 되지요.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빛과 소금의 역할도 못하고 그럴 때, “why me? 왜 하필이면 저에게?” 라고 나올 때, 아까 제가 얘기한 그게 내가 미처 몰랐던 내 안에 내장되어 있던 광패 또는 죄 시기, 질투 잠복돼 있던 나의 그동안 안 들킬 줄 알았던 나의 죄가 비로소 주에 대한 원망으로서 팍 나오지요. 얼마나 감사한지! 마지막 남아 있던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서 다 뒤집어져요.

결국은 예수님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말씀 바깥의 세계에서 마술, 내 위신과 체면과 내 영광을 위해서 온갖 희생도 감수할 용의가 되어있는 오직 나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 타고난 악마의 본성, 주께서 그걸 까발려 주시는 그 축복, 이러한 축복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내가 바로 마귀라는 사실을 비로소 엑스레이 찍듯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단층촬영 하듯이 온갖 것들이 다 드러나지요.

이 쪽 말씀 속의 세계는 오직 하나, 그 돌부리도 내가 마련했고 남편 중풍 들린 것도 지가 엎어진 게 아니고 내가 밀었다. 모든 것을 누가했다? 내가 해서 협력해서 뭐를 이룬다? 선을 이룬다. 그게 선이었습니다. 내가 주인공처럼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니 애비가 마귀다" 하는 이유로서 등장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주님은 뭐라 합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뭘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복음을 안 상태에서 오늘 베드로후서 본문을 봅시다. 베드로후서2장19절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이리 되어 있지요. 내가 죄 지은 게 아니고, 내가 부모의 죄안에서 죄 열매로서 죄 작품으로서 부모 죄, 부모는 그 위에 죄, 결국 아담의 죄지요.

아담의 물려받은 작품의 죄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상태가 이미 말씀 속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말씀 바깥의 세계가 어떤 세계라는 것을 알지요. 그렇다면 말씀 속의 세계는 예수님에게서 죄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승리한 거잖아요. 그러면 이 쪽 세계자체가 저 쪽 말씀 밖의 세계에 대해서 뭐냐 하면 승자, 이긴 자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미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저 쪽 말씀 밖의 세계는 사람들은 이 쪽 말씀 속의 세계를 모르지요. 심지어 신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 천국 세계가지고도 누구 좋아라고? 오직 자기 자신 하나 좋으면 되는 거예요. 자기 좋아라고. 전도해도 지한테 잘해준 사람에게 전도하고, 지한테 못해 준 사람에게는 지옥가라고 속으로 아주 기도를 하고 그렇지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제가 대학 캠퍼스에서 노방 전도할 때, 저는 안 그랬습니다만,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나는 모르죠. 그 때 마음은 기억이 안 나니까. 다른 남학생들은 못생긴 여자한테는 전도를 안 해요. 야들은 선교단체는 전도를 하는 게 아니고 전도 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좀 예쁜 사람들, 장래 자기 신부감 될 사람한테나 적극적으로 밥 사준다 뭐해준다 하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성령보다도, 심령이 느끼는 대로 아름답다, 추하다, 나는 좋아, 이것은 타고난 건데 이걸 누가 속입니까?

아니, 어느 성당에다가 악마의 얼굴만 모자이크한 성당에 누가 있겠어요? 사실은 그래야 정상인데. 천사도 예쁘고, 마리아도 예쁘고, 예수도 예쁘고, 그 말은 뭐냐 하면 주의 계시가 아니고 자기 심령의 계시에요. 나는 진선미, 나는 예쁘고 진실하고 착하고 그래서 드라마도 꼭 착한 것만 찾아. 꼭 착한 것은 최후에 승리해서 지 좋아하는 재벌3세 남자와 결혼해야 되고. 못 생기고 못 된 것은 낚아채도 가방 들고 교도소가고 떠나잖아요. 그런 드라마 흔하잖아요. 모든 게. 착한 것 좋아하고, 선한 것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 좋아하고, 진.선.미. 대구 경북여고 교훈이 진선미예요. 그 좋다는 진선미를 싫어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깡패도 노숙자도 다 좋아해요.

그 진선미를 구현하는 것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정반대로 오셔서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예수님을 흠모했느냐, 이사야 53장에. 아무도 그 분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못 믿을 것이 성령이 오지 않으면 이 말씀 속의 세계를 모르게 되어 있고, 합류 못하는 것이 원래 주님의 말씀 원칙이에요.

이 원칙을 깨고 우리가 어떻게 경건과 기도와 열심과 헌금과 십일조, 교회 봉사하기, 백날 쑤셔봐야 이 세계에 들어갑니까? 못 들어갑니까? 못 들어가지요. 못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고요. 말씀 밖의 세계가 확장해서 이 쪽 세계로 들어와 버리면 이 세계가 예수님의 주가 되는 세계가 아니고, 입은 벌리면 주여, 주여 하지요. 하지만 그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예수를 믿는 내가 주인공이에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거예요. "주여, 저 예수를 이렇게 잘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 잘 합니다." 그걸 되받아서 믿는 거예요. 이래 놓고 교회 가서 뭐하느냐, 남하고 경쟁하는 거예요. 경쟁.

목사가 또 잘한다고 불질러놓고. 누가 누가 잘하나 시합을 붙여 놓고. 마치 금메달 걸고, 그 위에 은메달 걸고. 다들 장난도 아니고. 통일교 같으면 웃겨요. 그 복장이 뭡니까? 사람이 관하나 써서 왕건도 아니고 문선명 복장 보세요. 금실로 해서 옷 만들어서 삼국시대에 영화 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통일교의 그 짓이나, 김수환 추기경이 쓰고 있는 그 번쩍이는 모자나, 교황모자나 추기경 모자나, 신부들 복장보세요. 로망칼라해서 재서 하는 거나, 감리교 목사들이 십자가하고, 제가 교회를 뭐라고 했습니까? 애들 손꼽놀이 하는 거예요. 퇴행이에요. 퇴행. 정신연령이 점점 더 후퇴하는 거예요. 마귀가 금식 하는데 지겠습니까? 마귀가. 그거 바리새인이 다 한 거예요. 사두개인이 다 한 거 아닙니까? 옛날에.

사람 속에 마음속에 동화 들어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트라우마가 있어가지고 부모로부터 유복한 가정이 못 되가지고 점점 더 동화책 봐가지고 백설공주 만나고 백설공주 만나고 싶어서 총각들이 결혼도 안 하는 모양이라~. 또 말 타는 왕자 만나기 위해서 12시에 신발 벗고 도망치다가 신데렐라 같은 경우에 그런 동화 같은 세계를 자꾸 염두에 두는, 동화하고 에덴동산하고 결부시키고 동화하고 자기 아름다움하고 결부시키니까 세상전부가 뭐냐 완전히 꿈의 세계, 환상의 세계가 되고만 겁니다. 그 환상을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조작해 내는 장소가 교회 예배당이에요.

목사가 속이는 게 아니고 교인들이 속고 싶어 해요. 내 숨어있는 꿈들을 끄집어내서 그걸 실현시켜 주면 나는 그 실현에 대해서 나는 헌금할 용의가 되어 있다. 십일조 낼 용의가 돼 있다. 가정만 다복하게 해 준다면. 우리 돈 놓고 돈 먹기, 주고받기 하자, 우리 장사하자, 흥정이에요. 흥정.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여호와랑 떡칠했어요. 모든 게 여호와라, 그 여호와한테 이스라엘이 뭐했습니까? 저주받지요. 나는 그런 이스라엘을 키운 적이 없다. 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진정한 승자가 악마라는 사실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이걸 죄라고 하겠지요. 악마라 하는 것은 현실의 지배자를 말하고 죄라고 표현할 때는 아까 설명 드린 거 바깥의 크로아티아 양치는 것을 보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뭘 본다고 했습니까? "나는 바깥 풍경보다 니 풍경이 더 볼만하다." 돋보기 들고 우리의 마음 속 풍경을 보니 광패와 음란과 육의 열매 나오잖아요.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수군 수군과 아니, 이것 없는 인간 어디 있어요? 인간은 요 재미로 사는데.

제가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부러움이 죄를 유발 시킨다. 부럽다는 것은 지금 죄지을 보일러가 휙휙 가동되고 있는 거예요. 뭔가 부럽다는 것. 모든 범죄는 부러움이에요. 수요일날 예를 들었잖아요. 자기 아내가 늦게 들어온다고 죽여 버렸잖아요. 이 말은 뭐냐, 그 남자가 아내 늦게 온다고 죽인 것은 왜, 다른 가정에서는 아내가 일찍 와서 저녁밥 지어놨는데 니는 뭐한다고 돌아다니느냐고 하잖아요. 그러니 뭐가 부러운 거예요? 다른 가정이 부러운 거예요. 늦게 들어오는 아내보다도 일찍 들어와서 밥 차려 주는 아내가 부럽기 때문에 그것이 결국 연차 연차해서 뭘로 이어졌다? 살인죄로 이어진 겁니다. 그 부러움이 안 되니까 술 처먹은 거예요. 극복하는 거예요. 부럽기는 부럽고 현실은 갭이 있고 간격이 있으니까 그걸 술이 아니면 메울 수 없으니까 전체적으로.

이 부럽다는 말은 아직도 어린애인 거예요. 환상 속에서. 아직은 백설공주 찾고, 신데렐라 되고 싶은 겁니다. 우리 젊었을 때에 연세 60, 70 되면 부러울 것이 없을 거다, 생각하는데, 있지요. 젊어지려고 악을 쓰지요.

그러니까 이게 간단한 문제예요. 구원 받는다는 것은, 성령이 오게 되면 니가 하는 게 아니고 이미 다 이루었다. 우리 주님이 폼으로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는 백날 고쳐도 안 되는 것을 주님이 이미 다 이루어서 완제품으로 선물로 성령을 준 거예요. 주게 되면 이미 우리는 어떤 죄를 지어도 어디 안에 있다? 심지어 죄 짓는 것까지 어디 법칙 안에 있다? 말씀 세계 안에 주님만 주님으로 높이기 위한 죄를 짓게 만드시는 겁니다.

베드로후서2장 20~22절 이 대목을 2가지로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기존의 목사들이 해석하는 것과 그 다음에 성경에서의 해석을 해 보겠습니다. 기존 목사의 해석부터 하면,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 말을 주일날 설교라고 보고 목사가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교인들이 글자 다 볼 수 있으니까 다 보고 있잖아요. 목사와 같이 보고 있으면서 이 해석을 합니다. 이거 해석할 게 뭐가 있어요? 이 성경 보는 자체가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요. 쉽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 본문을 성령이 임한 사람이 보는 본문과 성령이 임하지 않고 이 마술에 모든 것이 내 좋아라고 있는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말씀까지 훼방하는 식으로 이렇게 "나 믿는 자, 여기 있다! 물렀 거라!" 하는 식으로 지가 믿음의 대장인 줄 착각해서 하는 해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본인에게 적용시키겠습니까? 안 시키겠습니까? 안 시키지요.

자기 믿음 좋은 사람에게 적용 안 시키고 누구한테 적용 시키겠습니까? 팔뚝 옷을 걷고 "한 번 보자, 우리교회에서 나오다가 안 나오는 사람 어디 보자, 우리교회 나와 가지고 또 바람 피워서 5년 안 나오다가 회개하고 나온 사람 누가 있지? 우리교회 나오다가 십일조 돈 아까워 안 하다가 두달 전에 한 사람 누가 있지? 2년 뒤에 철야한 사람 누가 있지? 우리교회 나오다가 목사 뒤에서 헌담 하다가 사업 망한 사람 보자, 그 사람 지금 술집한다고 하던데, 복음 안다고 까불다가 들어온 사람 누가 있지?" 누굴 찾습니까? 자기 빼놓고 누굴 찾아요? 남을 찾지요. 그래야 자기는 상대적으로 신앙이 우수하고 저쪽사람들은 심하게 멸망당한 대상으로 저쪽으로 밀어치움으로서 나는 상대적으로 점점 더 2층, 3층으로 올라가는 돋보이는 반대급부를 노리는 거죠.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이 말씀 남 줄 것 없어요. 이걸 아예 액자로 만들어서 우리 집에 붙여놔요. 우리 집에. 왜 그러느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왜 그러느냐, 매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갑니다. 매일 한 번도 빠짐없이 매일 이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딱! 내 모습이에요. 이 모습이. 남 볼 것 없어요. 목사 욕할 것 없고. 통일교, 천주교 신부 욕할 것 없어요. 딱! 내 모습이라~

이럴 때, 이 사람이 누굴 부러워하겠습니까? 누굴 겁내겠습니까? 아무도 겁낼 사람이 없어요. 왜, 자기가 죄인의 자리에 있으면 어느 누구도 겁나는 게 없을 때, 그 다음은 이긴 자가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은 비로소 죄를 알기에 죄의 이긴 자가 되는 겁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하는 짓은 죄만 짓고, 아무 의를 행함이 없음을 알 때, 그 사람이야말로 비로소 죄로부터 이긴 사람이에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어요. 그 사람에게는 비로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에요. 오직 누구만 감싸겠습니까? "주여, 이런 더러운 인간에게 꽃을 피우다니? 괜찮은 사람, 믿음 좋은 사람, 천당 보내야지, 나 같은 인간에게 왜 찾아오십니까? 나 같은 인간 안 찾아와도 되는데." 주께서 “더럽기 때문에.” 주님의 주되심의 은혜가 꽃을 피우는 겁니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듯이. 장미가 더 윤기 나듯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를 부르러 온 거예요.

우리가 죄인임을 느끼면 느낄수록 주님의 은혜가 점점점 더 높아지는 겁니다. 죄가 많은 곳에 뭐가 넘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은 누구의 역할입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과부된 지, 84년입니까? 과부된 지 84년 된 사람, 그 친척들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아이구, 이 불행한 여인아, 다른 사람처럼 남편만나서 호강하고 살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84년 동안 남자 만날 기회가 없어, 이게 뭐~~ 나이만 먹었나, 84년 동안."그럴 때, 한나가 뭐라 했습니까? 나는 나한테 이만한 것도 고마운데, 니는 나처럼 될까봐 바들바들 떨고 있으니까 누가 죄의 종이고, 누가 죄로부터 벗어난 사람인가, 버들버들 떨고 있는 저가, 저 사람처럼 안됐으면 좋겠다고 버들버들 떨고 있는 그것이 근심과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와 악마가 뒤집어씌운 모든 것 뒤집어쓰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면서 천상 죄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안나는 "주여, 과부보다 더 심한 것 터트려 줘야 죄에 합당하겠습니다. 뭐 과부 이 정도의 권한은 나한테는 원 없습니다. 더 센 거 없습니까? 더 센 거. 과부됐는데 다 낡아빠진 과부 있잖아요. 더 센 거 없어요? 나 같은 죄인은 지금 살아 숨 쉬는 것도 나한테는 과분한 은혜입니다." 후~ 후~ 호흡도 주께서 주신 은혜로 느끼는 거예요.

주위 사람들은 벌벌벌 떨면서 시커먼 마귀가 목덜미를 잡고 있어요. 완전 개예요. 마귀의 죄가 돼 가지고. 십일조 안 해서 벌 받고, 목사 헌담 해서 벌 받고, 개척교회 몇 명 왔어요? 그래, 그래 저주받는 거야. 계속 앙금처럼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올 때는, 나 원래 이렇게 사는데, 성령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날 때는, 그래, 그래, 내가 마음속으로 너무 간음을 많이 했지, 마음속으로 누굴 음란했지, 아이구 내가 벌을 받겠구나! "주여, 내가 벌이 무서우니까 착한 마음가지고 저주가 확 깨서 복으로 오게 하옵소서!" 이런 쓸데없는 기도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럼 주께서 뭐라 하시는가, "그럼 니 죽을 건데 복 받아서 뭐할 건데?"하면 "복 받아야 남한테 믿음 있다고, 교회 가서 자랑하려고. 내가 기적 받았다고 자랑하려고."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또 니 자랑, 니 자존심, 또 니 영광." 결국 하나님도 시다바리고, 예수도 시다바리고, 전부 다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좋은 건 다 주워 모아났어. 들었던 풍월, 십자가, 복음, 언약, 좋은 건 다 해가지고 결국 자기 영광 꽃다발 만들어서 피워내어서 남들에게 “내 앞에 무릎 꿇어! 믿음 없는 것도 끓어! 기도해봐라, 기도 짧게 하는 인간도 끓어!” 뭔가 자기가 돋보이는데서 사는 보람을 느끼겠다는 악마적 품성. 그게 바로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기존 목사들은 강단에 서게 되면 그 다음은 전부다 장로부터해서 교인들 다 준 욱 들어요. "장로가 돼서 말이야, 교육관을 짓는데 말이야, 2천만원이 뭐고? 내가 보니 유산 받아서 5천만원 내야지, 장로가 고삐를 매고 소에다가 업어가지고 벳세메스 소가 장로가 먼저 지팡이를 들어줘야 교회가 될까 말까 하는데, 장로가 교회 목사 손을 잡아서 있는 지팡이도 잡아당기니까, 교회가 될 리가 있나? 이 본문 좀 봐라. 개가 한 번 복음 안다 해 놓고 다시 돌아서가지고 또 더러운 걸 먹듯이 저러니까 자식들이 앞으로 차사고 나서 교회 봉사 안 해서, 헌금 안 하고, 봉사 안하니까 자식이 그렇게 못되지, 정신 차려!" 하면 그런 줄 알고 고개 숙이고 있지요.

목사도 나쁘지만, 이미 자기 위주로 교회 온 교인들이 더 나빠요. 교인들이 목사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교인들이 주님에 대한 관심이 없고, 오직 어떻게 하면 절에 가서 비는 것처럼, 교회 온 거예요. 절에 가면 머니까. 교회 가서 내 좋은 쪽으로, 내 가정 잘되는 쪽으로, 그런 식으로 기도하기 때문이에요.

목사가 도사거든요. "저 인간, 어떻게 하면 내 밑에 꽉 쥐고 있을까?" 그 수법에 교인들이 스스로 말려들어가는 겁니다. 그것 밖에 모릅니다. 결국, 성경 전체를 모르고 백날 해도 말씀 바깥의 세계에 그냥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그게 바로 내가 미처 몰랐던 죄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1.♡.128.214)

12-09-28 17:58

안양-벧후2장20절(마술과 말씀)120914b-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하나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밤에 꿈을 꾸지요. 꿈은 계획 따라 꾸는 것이 아니라 그냥 꿈이 발생되지요. 꿈이 발생될 때, 제가 묻습니다. 꿈이 나를 이용해서 꿈이 나왔습니까? 아니면 내가 꿈을 꾸겠다 해서 꿈이 나왔습니까? 꿈이 나를 이용해 나온 거지요. 그럴 때 나의 존재는 소외되잖아요.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프로이드란 사람은 꿈이 인간의 조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식’이라고 집어넣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 하겠다, 계획 잡는 것. 이걸 의식이라고 집어넣어 버리고, 의식에서는 누가 주인공입니까? 내가 했고, 내가 공부하고, 내가 돈 벌고, 전부 내가 주인공이지요. 나한테 발생되는 현상이면서도 내가 임의로 조정할 수 없고 내가 미처 생각 못한 게 있다고 보고 그걸 꿈을 통해서 그 세계를 무의식으로 본 겁니다.

그렇게 해서 프로이드는 뭘 생각했느냐 하면, 현대에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갈 때에, 이게 정신병이 주어지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나는 내 뜻대로 되어야 하는데 내 뜻대로 안 되니까 탓을 누구보고 가슴을 치는가 하면 킹콩처럼, 자기 가슴을 치는 거예요. 누구 가슴만 아픕니까? 지만 아프지요. 지만 술 먹고. 지만 횡포 부리고, 그러니 이것은 모든 현대에 있어서의 개체중심, 자기 개별중심에 있어서의 병은, 신체적인 병은 수술하고 째고 하면 되는데 더 심각한 병이 정신적인 병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과학이 관여하기가 한계에 이르는 거예요.

그래서 과학 말고 다른 방법으로 과학이 소용되는 정신적인 병을 고칠 수 없을까 나온 게 뭐냐 하면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시작이 된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하느냐 하면, 성경에서 주인공이 인간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인공이거든요. 예수님이 주인공인데,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요. 그래서 나온 용어가 무슨 용어냐 하면, 예수님이 지적했지만, 산상설교에서 얘기했지만 뭡니까? ‘맹세’지요.

사람이 맹세하겠다는 말은 지가 스스로 다짐을 하는 것을 맹세라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자기보고 대화하는 거예요. “나, 너 괜찮은 너지? 너는 견딜 수 있지? 할 수 있지? 그럼 우리 약속했다아~ 반드시 이것은 한다. 약속했다아~” 그런데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맹세한 것을 지킨다고 해서 바리새인 너희들이 그렇게 가르쳤는데, 원래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모세의 뜻은, 아예 뭐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이것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모세의 글에 보면, 신명기에 보면 니가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하는 구절이 있어요. 니가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고 한 말을 잘 들으세요. 중요하니까. 바리새인들, 쉽게 말해서 구약의 정통한 사람들 학자들, 신학자들은 우리보고 이야기했다고 하는 거예요. “얘야!” “예, 하나님” “니가 맹세할 수 있지?” “예, 있습니다.” “반드시 지켜. 어렵더라도 지켜.” “예, 알겠습니다.” “지키면 그 만큼 의를 저축할 수 있는 거야.” “죄보다 의만 모으면 양이 많으면 천국 가는 거야.” “감사합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의 의식이고, 오늘날 모든 교회 다니는 교인들의 의식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이 본디 그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누가 황당하겠습니까? 바리새인이 황당한 거예요. “어, 예수, 당신 이리 와 봐!” “글자 보자, 니가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이것은 백이면 백, 어린애라도 배우고 못 배우고 관계없이 천명이면 천명이 봐도 이 해석은 하나의 해석이에요.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 이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 부분이 그 뜻을 품고 있느냐, 그 뜻은 일체 맹세하지 말아라, 란 뜻이에요. 아~~ 2000년 기독교 역사 다시 다 바꿔야 됩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가운데 사람들은 명령하고, 명령받는 것 밖에 몰랐어요. 교인들이. 목사는 명령자요, 교인은 명령받고 하면 교회에서 세례 받고, 학습 받고, 성찬 받으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구원 받는다. 이것만 배웠습니다. 그래서 물 뿌리는 것, 떡 떼는 것,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구약 해석 하나 제대로 못 하지요. 그걸 명령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누구처럼? 바리새인처럼. 예수님 해석을 못 하는 거예요. 그 말은 일체 명령하지 말라, 라는 것이 원래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본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뜻은 뭡니까? 우리가 일체 맹세하지 말라, 라는 말은 그러면 그 말씀은 무효 되는 겁니까? 무효 될까요? 안 될까요? 무효 안 되지요.

그럼 그 맹세는 누가하고 누가 지키는 겁니까? 예수님. 예, 바로 그게 정답이지요. 예수님이 모든 성경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하여 증거 한 것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한 거예요. 예수님이 혼자 다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누가 인터셉트 가로채지요? 중간에 필히 인간이 나섭니다. 왜, 인간은 나서기를 좋아해요. 하나님과 자기 앞에 중보자 나서는 걸 싫어해요. 중보자를 알았더라도 알고 그 다음에 배척하고 자기가 직접 나서는 걸 좋아해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걸 제일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중보기도 하지 말고, 지가 지꺼 중보기도 하고서 자기 중보기도의 능력을 실험해서 과연 내가 믿는 자 맞느냐 안 맞느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보거든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나선 겁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하니까 예수님을 곱게 여기지 않지요. 결국 그렇게 했던 예수를 누가 죽입니까? 노숙자가 죽인 게 아니고, 세리와 창기가 죽인 게 아니고, 누가 죽이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 죽였잖아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이 사회에 전혀 쓸모짝이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니까지 거 하나 없어도 내가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거예요. 이제는. 왜? 자기가 알만큼 알고 자기가 의로운 만큼 의롭고, 믿을 만큼 믿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챙길 만큼 챙겼으니까. 예수 믿고 아직도 예수, 예수 할 이유는 없다 말이지요. 예수 알았으면 이제 예수 치워버리고 내가 직접하니까, 맞상대로 나가면 된다는 것이 우리 바리새인들의 심보인 거예요.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어요. 누가 와서 자꾸 간섭하는 거 싫은 거예요. 아니 시어머니 간섭하는 것도 싫은데. 인간은 자율성 자립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예수를 죽였습니다. 죽이고 난 다음에 그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났지요. 죽였던 자를 살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에 창자국과 못 자국이 있는 이상, 있는 상태에서 살아났다는 말은 주님을 만나볼 때마다 뭘 생각하느냐 하면, 과거는 흘러갔다, 이게 아니고 오히려 과거가 어떠한 진실이 나의 과거를 꽉 채웠는가를 이제는 제대로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시기가 시작된 겁니다.

그건 뭐냐, 우리의 생각, 주어진 십자가 앞에서 죄였다는 것,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죄인 중에 괴수인데 구원받은 것은 창세전에 은혜로 택정함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디모데전서1장, 디모데후서1장, 둘 다 1장이에요. 둘 다 연계시켜 놨어요. 죄인 중에 괴수를 창세전에 선택해서 건졌다는 것, 그러면 우리가 중간에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선택이 안 되었으면 아무리 내가 무슨 발악, 노력을 해도 선택의 힘이 아니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이 안 된다는 것. 더 나아가서 선택했다는 말은 선택받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구원되기로 선택되지 않았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미운 짓, 고운 짓, 한 적도 없는데 아무것도 한 적도 없는 이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하고, 미워하기로 작정한 거예요.

그렇다면 에서와 야곱이 살아갈 이유는 주님의 미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서로 태어나야만 했고 야곱은 사랑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장에다 우리를 집어넣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내가 내 자리를 따로 마련해가지고 로마서9장 본문보고, 욕심나는 거예요. 내가 내보고 “니 에서자리에 가지 말고, 니 그 자리 사랑받는 자리에 슬쩍 밀어 넣는 고러한 또 시나리오를 쓴다니까요. 시나리오를 써서 주여,자비를 베푸소서. 집어넣어요. 마치 요번에 칸느영화제의 피아타처럼. 신의 자비를 도와주소서. 하는 것처럼.

신의 자비를 구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구원을 안 받았으니까 아직도 뭐가 필요하다? 자비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보세요. 얼마나 자기 위주입니까? 지금도 자비를 베풀잖아요. 지금도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햇빛과 공기 한 달에 얼마 냈습니까? 계량기해서 얼마 냈어요? 안 냈지요. 전에 가락강의에서 했잖아요. 가을이 오는데 우리가 얼마나 기도해서 가을이 겁니까? 가을 오는데 기도한 적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해도 가을 오지요. 우리가 기도 안하면 가을 안 오고 바로 겨울로 가는 겁니까? 뭔가 꿈처럼, 아까 프로이드의 꿈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손을 넘어서는 영역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넘어서는 순간, 우리가 우리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해석의 요점이에요.

내가 내 위주로 성경해석을 할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나는 어떤 전체의 부분이지, 내가 알맹이, 핵심이 돼 가지고 전체를 내 위주로 끌어서 주워담을 수 없는 겁니다. 내 바구니에 담을 수 없는 거예요. 증권 투자하는 사람은 한 바구니에 계란을 담지 말라 하는데 우리는 뭐든지 내 위주로 바구니에 담잖아요. 백화점 세일한다 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박고 담아오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뭘 놓치는가 하면, 내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닌데, 우리는 평생 동안 뭐라고 오해를 하는가 하면,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 여기 있다. 벌써 시작부터가 반칙이에요. 벌써 레드카드. 벌써 시작부터가 이미 해석이 틀려먹었어요. 바리새인들의 해석이 틀려먹었어요. 그래서 아까 꿈이야기를 계속 이야기하게 되면 에스겔, 예레미야에도 나오는데, 아까 여자들이 에스겔에서 봤지요. 여자들이 하나님께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심령대로 자기 지껄이고 싶은 대로 한다 하지요.

그 말씀을 생각해 보면, 설교하는 사람뿐만 아니고, 일반교인들도 말할 때, 굉장히 무서워요. 주께서 주지도 않은 것을 주의 뜻이라고 우기는 게 아닌가라는 것을 스스로 자기를 생각해 봐야 돼요. 주의 뜻도 아닌데 내가 성경 아는 걸 주워 모아서 주의 뜻이라고 남한테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강요하면서 그에 대한 효과가 내가 설교하니까 구원 받더라 라는 멋드러진 효과, 내가 설교해서 내가 전도해서 구원받으면 나는 아직 이 땅에 쓸모짝이 있다는 셈이 되고, 쓸모짝이 있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은 다 죽여도 설마 하나님이 나를 아프게 하거나 병들게 하거나 하지 않고 곱게 귀한 집 자식처럼 키울 것이라는 은근한 희망과 소망을 일방적으로 내가 챙겨보는 게 평소 생활이 아닌가 자기를 돌아봐야 돼요.

그럼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이 그런 심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눈치 채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적 사고방식, 희망을 보여주고 일곱 번 넘어져도 8번 째 일어난다는 식으로 계속해서 꿈을 키워주는는 식으로 결국 커미션 챙겨서 예배당 지어서 지 밥벌이하고 가족 먹여 살리는 그런 짓거리에 우리가 그들을 편성해 주지 않았는가, 다시 말해서 주체가 없는데, 아까 꿈 이야기 했지요. 주체가 영향력이 한계가 있어요. 그러면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인데, 분명히 고린도전서15장에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은혜라고 하는 것은 누가 이야기합니까?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그동안 조심스럽게 신앙생활 잘 해서 지금의 나를 이만큼 이룩했다는 그러한 사도가 이야기한 것과 정 배치되는 쪽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머리 좋은 사람은 더 꼼수를 써서 뭐라고 하느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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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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