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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120830b-마12:38(요나의 기적)31강-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대전120830b-마12:38(요나의 기적)31강-이 근호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35)

대전120830b-마12:38(요나의 기적)31강-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마태복음12장 38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간단한 문장이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로 포함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입니다. “예수여!”대상체가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 이것도 하나의 대상이 있는 겁니다. 이 ‘우리에게’도 스스로 대상이 됩니다. 독립된 겁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할 때는 나에게 하는 것보다도 우리가 설쳐놓은 우리의 인생관, 현실관, 세상관, 우리 주변에 설치되어 있는 이 모든 공간, 우리 설쳐놓은 공간, 여기에 예수 당신이 기존을 통해서 우리 속에 합류되기를 원합니다. 또는 관계가 있기를 원합니다. 다리를 놓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다리가 놓아 줘야 우리가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이 우리를 이해할 게 아니냐 말입니다.

이 ‘다리 놓기’ 주님과 우리사이에 다리 놓기, 이걸 어떤 식으로 다리 놓으면 좋겠습니까? 이게 오늘날 교회가 여기에 올인 하는 거예요. 전부 다 여기에 박히는 거예요. 내 식대로 하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면.

그러면 여기 다리에다가 튀어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교육이고 특히 교회에서는 교육이라 하지 않고 다른 말로 하면 양육, 교육을 통해서 또는 단계, 제자 훈련 단계, 천주교에서는 이걸 가지고 피정(세상에서 정을 피하는 것) 교회에서 말하는 부흥회, 영성훈련 이런 것을 통해서 주님이 갖고 있는 것과 우리와 뭔가 통하는 파이프처럼 통하듯이 터널을 뚫어나가는 인간 쪽에서 뚫어나가든 주님 쪽에서 뚫어나가든 그래야 우리는 그리스도와 화목이 되고 하나가 되어서 주님의 나라에 간다, 이런 방법론을 제시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우리가 오늘 본문을 모른다 치고 우리는 어떤 답변을 기대하느냐가 먼저 중요하겠지요. 왜냐 하면 질문을 먼저 했으니까. “예수여,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할 때 이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모순입니다. 왜 말이 안 되는지, 엉터리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적이라는 게 뭐냐 하면, 우리 쪽에서는 해내지 못하는 것이 기적이잖아요. 흔히 쉽게 말해서. “야! 기적이다. 불에 타는 것은 기적이야. 아~ 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려하다 바로 섰다. 기작이야.”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기적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걸 기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그 판단은 기적에 해당 됩니까? 안 됩니까? 제가 질문을 너무 어렵게 하지요. “야, 이런 음료는 처음 먹어 봤어!” 이것은 이미 과거에 이런 음료는 안 먹어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는 인정해 달라. 이거 빼놓고 다 먹어봤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적을 보여 달라는 것은 일단 챙긴 것에 대해서는 주께서 탓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어느 정도로 겸손 하느냐 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당신을 향하여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당신을 향하여 마음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하는 거예요.

이 마음열기 교회에서 많이 들어봤지요. 여러분, 구원받기 위한 첫 번째 요인은 무엇을 열어야 된다? 마음을 열어놔야 된다. 계시록3장 끝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두드리거든 후닥닥 빨리 가서 지체하지 말고 후닥닥 문을 열면, 너와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비로소 그것은 한 집안 패밀리, 한 식구가 된다. 그런 식으로 다리를 놓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깔아놓은 하나님을 포착하기 위해서 깔아놓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일단 주님께서는 긍정적으로 봐 주셔야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원 받고 싶어 하고 애쓰는 이러한 성의나 애닮, 기다림, 노력함, 간절함, 열성, 열의, 이것은 일단 주께서는 인정해 주셔야 됩니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결론부터 할게요.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강팍’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성의, 노력을 주님께서는 그걸 강팍하다고 보는 겁니다. 강팍하다고 본다면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했지요. 논리가 아니고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했지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주님 쪽에서 나오는 그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뭐되게 한다? 우리의 이러한 모든 성의가 강팍임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기적이 주어지겠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기적은 내가 기적을 요청하는 그 마음은 굉장히 대견스럽고 훌륭하고 겸손한 마음이고 진짜 믿음이 아주 멋진 아주 충실한 그러한 태도라고 일단 인정해 주고 이러한 여기에다가 덧붙여서 우리가 못해낸 것을 보상차원에서 해주시면 우리는 그걸 기적으로 바라겠습니다, 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진짜 기적은 니가 그 따위 식으로 하는 모든 것이 바로 강팍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강팍은 힘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지우개가 있지요. 이 지우개를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학교선생님께서 질문하고 있는데 학생이 딴 짓하고 휴대폰 본다 할 때, 지우개를 던져 버리면 이 지우개는 뭐가 돼요? 이게 힘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되겠지요.

사람들은 자기를 긍정하지 않을 때는 자기 긍정이 타인을 피해 입히는 무기가 됩니다. 그걸 첫 번째 시간에 걸림돌이라 했잖아요. 마태복음 21장 봅시다. 요 본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이 본문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있거든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44절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이 대목, 다시 읽겠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이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하면 뭐로 깨진다? 가루가 된다 이 말이지요. 우리가 다가서도 가루되고, 주님이 우리 쪽으로 오셔도 가루되고, 가루라 하는 것은 자기 자아성, 주체성이 손실되는 것을 말하는 거죠.

아까 첫 째 시간에 파라핀 양초를 녹인다 했지요. 그러면 죽이 되지요. 그러면 나만의 나는 국회의원다, 뭐다, 그것이 녹아져서 아담 안에서 모두 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죄인들이 되는 거죠. 그래서 사람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도 그게 구원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죽인데요. 그것도 시커먼 죽인데.

이 마태복음 21장을 잠시 설명해야 기적이 제대로 풀릴 겁니다. 옛날 국민학교 때 미술시간에 이런 기법을 선생님이 알려 줬을 거예요. 도화지에 바탕색을 먼저 여러 색을 칠하고 그 위에다 까만색을 덧입히지요. 이걸 긁어 버립니다. 긁어보면 칼 댄 그 자국마다 밑에 있던 색깔이 나오면서 대비가 되면서 아름답게 하지요. 주님은 놀랍게도 십자가 끝이 뽀족하잖아요. 십자가 끝을 가지고 이걸 긁어내요. 이걸 긁어내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이전에 내가 이 땅에 왜 태어났는가, 근원적인 원초적인 것이 거기서 들어납니다.

나는 이거 갖고 싶어! 아니야, 그 이전부터 나는 이걸 왜 갖고 싶어 하는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했었어. 그 이유가 발견되는 겁니다. 나는 빵이 먹고 싶다. 나는 왜 빵을 좋아할까? 빵을 싫어해도 되는데 왜 좋아할까? 나는 왜 말씀을 좋아해야 돼! 이상해! 말씀을 좋아한다가 아니라 말씀을 왜 좋아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이 긁는 방법이 뭐냐 하면 믿음이 무엇이냐가 아니고 언제 믿음이냐고 바뀌는 거예요. 언제 긁어주면 믿음이 나와요. 우리는 안 긁어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런데 와서 확 긁어줘 버리면 “나, 우짜라고? 우짜라고?” 하지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나는 나만 생각하고 나 잘된 것만 생각하고. 나는 나만 천당 가면 되고. 아까 그 모든 은사는 누굴 위한 것이다? 개인용이 아니라했잖아요. 개인용이 아니라고 백날 이야기해도 소용없어요. 그런 소리 가운데서도 나는 나 밖에 몰라~

이것이 우리 밑바닥에 깔려있는 각각 색깔의 우리 모습이에요. 시커먼 속에. 누가 와서 우리를 긁어줘야 본색이 들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덧입고자 하는 거예요. 찬란한 색깔을 더 입고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번 주일날 설교에 뭐라 했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덧셈이 아니고 뭐라 했습니까? 뺄셈이라고 했지요. 계속 더하면 천국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에서 하나, 둘씩 빼나가면서 이런 것까지 내가 주님을 방해한 것이구나! 죽을 때까지 계속 이런 것이 바로 이단이고, 이런 것이 바로 내 죄구나! 뺄 수 있는 여유, 그 자유, 맘껏 내 죄를 스스로 빼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앞으로 어떤 사태로 누구를 만나던지 간에 내가 만나는 가운데 죄가 팍팍 튀어나오지요. 아, 저런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내 대신 죄 씻어주기 위해서 죽어야 되는구나! 그래서 예수의 피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다, 하는 것을 그 때 믿게 되면 우리는 믿음은 언제냐 하는 거죠.

믿음이 있는데 믿음이 들어날 때만 그 때 믿음이 이미 있다는 것을 표내는 믿음으로 발산되는 겁니다. 그 때만 믿는 게 아니고, 이미 성령에서 깔아놨는데 그동안 지 잘난 체 한다고 덮었잖아요. 그걸 긁어낼 때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의 아름다움이 거기서 튀어나온다 이 말이지요.

자, 기적을 해 봅시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어려워서. 돌멩이가 있잖아요. 주님께서 마태복음 21장에서 돌이 주어졌고 그 돌멩이를 누구한테 줬느냐 하면 바리새인에게 던졌습니다. 제 말이 아니고 그 뒤에 보면 있어요. 45절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돌멩이에 깨어진다는 것이 예수님 자신이 돌멩이고 “너희는 전부다 나한테 오기만 하면 깨어지게 되어 있어” 하는 거예요. 그 깨어지는 현장이 구원받는 유일한 현장입니다. 깨어져야.

가루가 되어야 돼요. 안 되면 양초처럼 형체가 돼 버려요. 여기서 여기까지 나답다! 이게 된다고요. 그래서 목사가 그렇게 위험해요. 목사가 구원받는다 하면 보통 축복받은 게 아닙니다. 왜냐 하면 깨기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교회 나온 지 한 2주일 됐다, 그럼 깨지기 쉽잖아요.

그런데 교회해 가지고 목사인데, 교인수가 6천명 됐다. 이러면 내가 6천명 모았는데 그게 전부 다 죄였다. 그걸 진실로 고백하기가 얼마나 힘들어요. 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그걸 부정하기가 불가합니다. 남편이 바람피우고 돈도 안 벌어주고 자식이 우이 컸는지도 모르고 그럴 때 아내가 맛있는 거 해주면 되게 고마워요. 그런데 아내가 늘 비실비실 아프고 집에 들어가서는 돈 많이 갔다, 주고 돌봐주면 그 남편 깨지기 굉장히 힘듭니다. 왜? 너무 잘났으니까. 너무 남편으로서 완벽하니까. 얼굴 되지, 돈 되지, 성격 되지, 국민남편이지, 넝쿨째 들어왔지, 춤도 잘 추지. 그 인간 깨지기 힘듭니다. 그러니까 니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어디에 못 간다? 천국에 못 가지요.

어린애들은 만날 손 벌리며 다오, 다오, 하잖아요. 스스로 살지 못하고 만날 의존적이고 기생하고 빌붙고 조금만 무서워도 품에 안기고, 어른은 자립적이고, 독자적이고, 자기 가치를 항상 늘 챙기고, 다듬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항상 때 빼고, 광내고, 자기만의 힘을 그 안에서 축적하고, 저장하고.

그리고 자기와 가짜자기 주체지요. 자아와 주체를 구분해서 주체는 사회에 내세우고 자아는 숨기고. 주체라 하는 것은 사회에서의 자기 자신이고, 자아라 하는 것은 욕망 속에 형성된 진짜 자기로서, 남 대할 때는 주체로 대하면서 그 순간 자아는 안 들키도록 숨기고. 확~ 긁어버리는 거예요. 칼로 긁어내서 본색 드러내고.

여기서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기적을 보자고 했을 때, 행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행했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인간이 뭘 노리는 걸 가지고 이게 쓸데없다고 갔다 버리는 것이 아니고 충실하게 이용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를 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기도, 돼지 머리 놔놓고 차머리에 안수하고 차사고 나지 말라고, 그 말도 안 되는 짓들을 전부 다 버리지 않고 다 거두어요.

우리는 쉬지 않고 무시로, 무시로 기도해야 돼요. 다 쓸데없는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 다 응답돼요. 모든 응답되지 않는 기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응답됩니까? 우리가 예상한 게 섞이는 응답이 아니고 주님이 바리새인에게 했던 주님 쪽에서 내밀었던 돌에 깨어짐 속에 합류된 걸 가지고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주니까 기도는 내 맘대로 해놓고 응답받을 때는 “주여, 이런 거 저런 거 안 줘도 주의 십자가만 있어도 저는 고맙고 감사합니다.” 라는 주님의 증거로서 응답이 주어집니다. 그게 모든 기도의 마감처리입니다. 마지막 인테리어의 마감처리가 그겁니다. 공장 트랜드해 놓고 터키시스템해서 딱 키 꼽아서 탁 돌리면 그 시설한 사람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엄청난 수조원을 해놓고 키 팍 꼽아서 돌려버리면 그 주문자가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윙~하고 공장 돌아가잖아요.

전기불설치하고 스위치 눌러서 불이 켜지면 기분 좋지요. 만약에 주님께서 자기 기적 딱 집어넣고 키 넣고 돌려버리면 “주여, 나는 살아있는 것도 나한테는 은혜입니다. 내가 더 이상 무얼 바라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밖에 없는데.” 라는 번쩍 번쩍 불이 들어오면 그게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성과 성령의 열매가 그런 겁니다.

그게 아니거든 지가 지 맘대로 계속 지껄이는 기도를 계속 해대는 거예요. 그거 되기 전에 제거해요. “이거는 기복신앙이야.” 라고 빼지 마시고, 그거 뺐다고 괜찮은 기도 하겠습니까? 기껏해야 기복신앙입니다. 백날해도 기복신앙입니다. 괜찮은 기도해 놓고 은근히 그 보상 기대하는 기복신앙에서 우리는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 이 바리새인 이야기가 오늘도 이런 기적이 우리가 은근히 주님 앞에서 있기를 노리고 있다 말이지요.

자, 마태복음 시작해 봅시다. 궁금합니다. 기적이 뭐냐, 마태복음 12장 39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아~~ 참, 이거 아까 유대인들이 말씀 풀어서 말씀으로 나아간다 했지요. 그거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이 말씀에서 말씀으로 나아가는데, 말씀으로 나아가는 이 파이프가 바로 택한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말씀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누가 꼭 필요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이방민족 다 망해도 어느 나라는 안 망하겠어요? 택하신 우리 이스라엘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 이게 이런 말씀에서 말씀으로 나오면서 인간의 이스라엘 해석은 이게 오늘날 교회들이 자기 교회 세워 놓고 이런 짓들을 그대로 여기다가 적용시키는 겁니다. 자, 여기에 요나의 기적을 주께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요나의 기적을 어떻게 푸는가 구경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말씀에서 말씀으로 나아가면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존재의 근본적 가치를 뽑아낸다 했지요. 그러면 우선 예수님은 치워놓고 유대인들이 말씀을 가지고 뭘 뽑아내겠습니까? 예수님이 요나에 대해서 언급 했잖아요. 그 이야기를 듣던 유대인들이 요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석을 나름대로 해 내겠느냐 말이에요. 요나를 가지고. 초점이 달라요.

그들은 요나를 가지고 뭘 뽑아냈느냐 하면, ‘말씀은 영원하다’를 뽑아내요. 주의 말씀은 요나를 가지고도 이스라엘은 요나 선지자가 그렇게 실패해도 하나님 말씀은 기어이 요나를 살리시고 또 이스라엘을 이와 같이 살리신다. 쪽으로 해석하지요. 여러분! 오늘날 교회에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긍정적 사고방식’ 이라 합니다. 긍정적 사고방식.

인간은 희망 없이는 못 삽니다. 20세기초반의 철학자 블로흐라는 사람은 희망의 철학이라는 것을 내세웠어요.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이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니고 희망이 인간을 더욱더 매일같이 살아나게 하는 힘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 아픈데도 없고 누가 와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강도가 와서 칼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스스로 알아서 자살하게 됩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육체에서 탄수화물, 단백질 이렇게 지방질, 어떤 생물적으로 영양학적으로 인간은 그렇게 산다, 라는 유물적이고 물질적으로 따지는 그런 식으로 인간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옆에 먹을 게 많고 단백질, 탄수화물에다가 소고기, 돼지고기 있더라도 사람은 뭐가 없으면 죽어버린다? 희망이 없으면 꿈을 잃어버리면 그거 놔두고 한강에 가서 빠져 죽어요. 약 먹고 죽어요. 그리고 희망이 없으면 맛있는 걸 먹어도 살로 가지 않고 점점 더 밥맛이 없어지면서 쓰러집니다. 참 신기하지요. 인간.

이 사람 말 들으면 이렇다하고, 저 사람 말 들으면 그렇다하지요.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세포로만 자꾸 생각하고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분석하고 짜개고 해부한다고 해서 인간이 밝혀지는 게 아니다, 실제로 인간이라 하는 것은 꿈이라는 거, 그런데 블로흐 이후에 철학자들은 더 나아가요. 그 꿈이라는 게 어디서 만들어지느냐 하는 문제를 따집니다. 미셀이나 미셀쿠프에 의하면 인간의 꿈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지가 만들어 낸 게 아니고 지가 속해 있는 사회가 그 사람에게 그걸 요구했던 사항이라는 겁니다.

니는 남자다워야 돼! 니는 남편다워야 돼! 니는 아내다워야 돼! 니는 자식을 잘 키우는 어미다워야 돼! 니가 시어머니 잘 섬겨야 돼! 이런 것들이 미흡할 때 인간은 자살합니다. 그 말도 인리가 있지요.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서 나를 그렇게 조작해 버리는 거예요.

한 때 인기 있었던 연예인들이 인기가 떨어지고 난 뒤에는 고급 아파트에서 자살해 버립니다. 왜? 그 때 그 당시 인기가 없다고 해서. 우리 같으면 농사지으면 되지, 파출부하면 되지, 때려 죽어도 파출부 안 합니다. 한 때 연예인이었는데 인기가 인생을 조저 버렸어요. 차라리 그 때 인기가 없었으면 서하람 선수가 펜싱선수가 16강에서 떨어졌으면 앉아서 안 울었을 거예요. 결승전에서 그놈의 1초 때문에 묵시적인 시간 아닙니까? 시간이 멈췄어요. 메달을 날렸다 말이지요. 앉아서 계속 우는 거예요. 유명해졌습니다.

그 다음에 서하람 선수가 다음에 어디 나가서 16강 탈락해 보세요. 그땐 악플 걸리고 실력이 그것 밖에 안 돼. 그 다음부터는 인기를 대체해서 악플이 막 딸리게 되는 거예요. 도대체 나는 16강이 나 입니까? 8강이 나 입니까? 어미로부터 우는 게 나입니까? 그라운드에서 예선 탈락한 것이 나 입니까? 어디서 내가 되는 거예요? 나는 어떤 순간에서 나와 도킹하게 되어 있어요. 그 순간이 그 환경이 나를 새롭게 짜깁기해서 보내는 겁니다. 고름 짤 때 어떻게 합니까? 양 쪽으로 해서 꾹 누르면 고름 나오지요. 주변에서 나를 주변에서 요구하는 나로 가만두지 않고 짜내는 식의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남자들이 결혼하고 난 뒤에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모든 관계를 끊고 일찍 집에를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가서 아내를 기쁘게 해 주는 게 고린도전서7장에 나오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차라리 아내를 기쁘게 하려거든 차라리 그냥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라, 혼자 살아서 주님을 기쁘게 하라, 혼자 산다고 주님 기쁘게 합니까? 이래나 저래나 지 생각하는 거 마찬가지인데.

긍정적 사고방식 이것은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희망이라는 거, 이것만 준다면 까짓 거 십일조가 문제입니까? 돈 주고도 그 희망만 사면되는 거예요.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꿈에 아가씨가 어떤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봤다, 하니까 “그 꿈 내가 돈 주고 사겠습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그 꿈을 돈 주고 사겠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교회 왔잖아요. 목사는 간파합니다. 왜 왔겠느냐?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아서 온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원하는 꿈을 제공하게 되면 그 사람들은 돈으로 그 꿈을 사가게 됩니다. 상품이 꿈이고 비전이 상품이고 그 골라, 골라, 잡아, 잡아 해서 돈 주고 사는 겁니다.

처음에는 목돈 내지 않지요. 조금 내가지고 십일조하고 천원짜리 내가지고 해보면, 되게 되면 만원짜리 내고 그 꿈을 가지고 그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30배, 60배, 100배를 찿기 위해서 십일조라는 그 엄청난 비용을 내면서 그 꿈을 가지는 거죠. 그것에 탈락한 사람은 십일조 소용없다고 주장하고, 그 문턱을 넘은 사람은 십일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기고. 십일조 없는 사람을 어린애 같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고.

그러니 교회가 뭐냐 하면, 물질의 세계, 돈의 세계가 변화된 겁니다. 기적을 모아 놓고 자랑께나 하는 구역예배, 전부 다 물질과 관련된 그것이 바로 교회지요.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유대인들이 요나를 설명할 때는 결국은 우리가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주께서 우리를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비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기어이 우리를 일곱 번 째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으켜 세워 준다는 쪽으로 해석을 해 버립니다.

이 해석을 우리가 외면할 수가 없어요. 왜? 모든 교회가 이런 희망적인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여기에 동조했으면 예수님은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식으로 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감춘 장밋빛이지, 장밋빛스카프가 되지, 절대로 가루로 만드는 십자가는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했습니까? 내 돌에 부딪힌 사람은 전부 다 오면 뭐가 된다? 가루가 돼 버립니다.

결국은 이런 해석이 뭐냐 하면, 진짜 주님이 제시한 율법해석에 의하면, 가루가 되어야 마땅한 거짓된 거짓선지자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해석하기 전에 우리가 성경구절 예레미야 보겠습니다. 예레미야29장 31절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로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스마야 선지자는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아닙니다. 누구를 보냈느냐, 예레미야를 보냈거든요. 그런데 예레미야를 보내니까 사람들이 거부했잖아요. 뭐가 없기 때문에? 긍정적 사고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생각이 같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스마야 선지자는 뭐냐, 예언하니까 사람들이 되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면 물어 봅시다. 그러면 목사가 문제입니까? 교인이 문제입니까? 결국은 목사가 교회를 만드는 게 아니고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를 그들이 조성한 겁니다. 누굴 탓할 수가 없어요. 옛날에 삼신 섬기던 그것이 뾰족한 예배당으로 바뀐 거예요. 그리고 성령 받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와르르 몰려온 것은 절에 가면 멀잖아요. 가까운 절에 간 거예요. 그래서 긍정적 사고방식이 그런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기다려요? 유대인들이 요나를 해석하고 말씀을 해석하고,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고 유대인의 긍정적 사고방식이 전통이 되어 가지고, 그게 기독교가 오늘날 꽉 차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희망을 원해요. 왜? 인간은 희망 없이는 죽을 지경이니까. 당장 죽을 지경이니까. 이것도 안 되고 고민거리를, 교회 나가다가 교회 안 나가서 벌 받았어! 이게 사람들의 기복이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면 인간 믿을 자가 없고 잡을 것은 누구 밖에 없어요? 하나님밖에 없고 “하나님 봐 주소. 하나님 능력이 무한대잖아요. 뭐합니까? 하나님! 내 그동안 죄 지은 거 회개할 테니까 봐 주소!” 아까 회복이라는 게 뭐라 했습니까? 불행한 시점에서 다시 어디로 돌아온다? 옛날 좋았던 그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서 교회 온다 했잖아요. 그냥 들을 때는 그냥 듣지만, 다 연관이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냐, 요나를 죽었다는 사실을, 쉽게 말해서 요나처럼 죽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요나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자, 그러면 요나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겠습니다. ①번 요나가 해변가에서 죽었다. ②번 요나가 집에 있는 풀장에서 죽었다. ③번 요나는 죽는 폼만 냈다. ④번 요나는 깊은 바다에 빠졌다. 거기에 배가 이미 풍랑에 말려들었지요. 요나를 안 죽이면 누가 위태롭게 죽습니까? 배 통째로 위태로울 정도로 배 전체가 못 헤쳐 나오는 위험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폭풍 속으로, 태풍 속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에 놓여 있는 겁니다.

빠져 나옵니까? 못 빠져 나옵니까? 못 빠져 나오지요. 빠져 나올 수 없어요. 이 뱃사람이라는 사고방식에서 우리는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 살기위해서 니 하나 죽어라, 되게 복음적으로 보이는데, 이게 바로 니가 하나 죽어서 우리가 살자, 긍정적 사고방식을 대변해 줍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교인들이 십자가를 전적으로 부인한다고 공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하나의 경로에 불과하고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부활의 새 생명을 믿는다는 거예요. 부활의 새 생명이라 하는 것은 뭐냐, 십자가는 그냥 거쳐 지나가고 결국은 우리가 이렇게 승리했잖아. 우리가 부활의 새 생명 열매 따 먹으면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원하는 너희들이 원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합치되는 이론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뱃사람들이 생각한 겁니다. 니 하나 죽고 우리 살자는 거예요. 결국은 자기 이익 되는 쪽으로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뱃사람은 구원 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이 사람은 그 바다 폭풍에서는 구원 받았는데 지옥 갔지요. 그런데 막상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떠밀려서 물에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요나가 바다 속 그 현장에서 누가 기다립니까? 고기가 기다리지요. 주님이 바로 물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사람 눈에 띠이지 않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나서지 않는, 너무 무서워서, 저기 들어가면 100%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아는 그 현장에서 주님께서는 “이리와 봐! 이리와 봐!” 물속에서 손짓하지요. 누가 들어갑니까? 아무도 안 들어갑니다.

베드로요? 들어가려고 하다가 헐~ 했지요. 나, 저 사람 모른다고. 기겁을 했지요. 베드로를 둘러싼 것은 권력이라는 폭풍 속이었습니다. “니 저 사람과 한 패였으면 니는 죽었다!” 심지어 어린아이 하나까지 모닥불 쬐는 그 소녀까지 그들은 모두 뱃사람입니다. 요나도 사실은 뱃사람 중에 생각이 같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본인 능력으로서는 요나는 피할 수 없어서 이 바다 밑에서 끌어당기는 주님의 힘에 에너지에 요나는 지 어쩔 수없이 빠져 죽은 겁니다. 사실 말려든 거예요. 오~ 할 새도 없이 그냥 말려든 겁니다. 어쩔 수 없는 거예요.

태풍에너지를 어느 누가 그걸 막습니까? 난파가 됐다. 태풍에 과수원에 과일 떨어졌잖아요. 그것도 나라 책임입니까? 왜? 나라가 태풍을 못 막았으니까. 나라가 100% 못 막았으니까. 어선이 파괴되었다. 그것도 나라 책임입니다. 이민가야 돼요. 나라가 군대 동원해서 왜 못 막아요. 태풍을 막지 못하는 인간, 이게 우리의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 힘에 못 벗어나면서 벗어난 척 하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되지도 않는 베짱의 한계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세신다 했는데, 우리의 발걸음이야 우리는 내가 알아서 내가 선택한다고 하잖아요. 이런 태풍 속에서 이런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주님의 기적은 첫 번째, 우리는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기존의 에너지에서 세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두 번째, 강제로 거기서 주님의 죽으심에 끌려 당해야 된다. 세 번째, 거기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살아날 때 같이 살려주는 그 능력만이 같이 살 수 있다. 그 세 가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빨려 들어갈 때, 뭘 챙기면서 들어갑니까? 빨려 들어갈 때 보따리든지, 배낭이라도 준비해야 됩니까? 뭘 버려야 돼요? 교회를 버려야 되지요. 또 뭘 버려야 됩니까? 가정을 버려야 돼요.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저주받는다. 그것 보다 더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나를 버려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나를 버리는데서 딱 멈춰버리지요.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왜? 나를 버리는 나를 또 생기니까. 나를 버린 나라고 또 자아가 규정하니까. 버릴 수 없는 거예요. 결국 나를 버릴 수 없다는 말은 내 가정을 못 버리고, 내 가정을 못 버린다는 말은 내 몫으로 세운 내 교회를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나의 과거의 기도했던 모든 가치를 버릴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원하는 기적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의 기적이 여기에 와서 태풍을 일으키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침범할 수밖에 없어요. 내 쪽에서 저 쪽으로 건너갈 수 있는 능력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우리가 기존교회 싫다고 나와 봤자, 개척교회 가봐야 똑같아요. 마찬가지예요. 우리교회는 괜찮은 교회입니다. 왜 괜찮은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우리교회는 거듭난 사람만 모였습니다. 이거는 지방교회에서 주장하는 거예요. 워치만리 교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모든 이단들은 신천지보고 후천지든지, 선천지든지, 만찬가지고 전부 다 우리라 하거든요.

아까 성경에 뭡니까? “예수여, 우리에게” 그러니까 뭐를 못 벗겠다는 거예요? 우리라는 테두리를 안 버리도록 기적을 해 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우리라는 것을 버리라는 거예요. 아니 교회이름 자치가 우리라는데 버릴 게 뭐가 있어요. 말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기적을 고대하고 거기서 힘과 꿈을 갖는다는 자체가 우리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우리가 태어날 수밖에 없는 이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 만나서 희망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그 희망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든 겁니다. 그것도 세 번 씩이나. 그래서 베드로는 지 갈 길로 갔잖아요. 그러면 베드로가 다시 주님을 만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다니느라 애먹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있는데, 그냥 찾아오신 거지요. 찾아오면서 뭐냐 하면,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으로 이야기하잖아요. 사랑이란 말은 뭐냐 하면 니 쪽에서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거예요. 니 쪽에서 준비할 게 없다 말이에요. 안 믿는 사람들은 제사 지낼 때, 준비할 게 굉장히 많아요. 밤도 깎고, 많이 해봐야 지가 먹을 거예요. 다 갈라 먹고 할 건데. 옛날 우리 할머니 같은 경우는 작년에 올린 거 뒀다가 끄집어내어 또 올리고. 또 올리고.

주님과 우리 사이의 십자가는 십자가가 있다는 말은, 우리 쪽에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니가 죽어서 나한테 올 수 있다? 없다? 올 수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죽어서 네게 가게 되면 너희의 살았던 자리가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현장이 된다는 겁니다. 곧 죽음의 자리가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주일날 설교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뭘로 바꾸자. 죽음이란 덩어리로 바꾸면 이것이 바로 기적을 댄 통으로 당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지요. 죽으러 가자, “야, 우리 주님과 같이 죽으러 가자!” 그런 이야기 하지요. 그래서 주님과 우리 사이의 기적이라 하는 것은 기적을 니가 기대할 잽이 못 된다, 그런 자격이 없다. 니 하고 내 사이는 오직 너는 죽을 자고, 나는 너희를 죽이는 자다, 하는 그 죽음 빼놓고는 다른 모습으로 소통될 수가 없는 거예요.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안다. 요한복음 10장 이야기하면서 무슨 대목이 나오느냐 하면, 나는 너희를 위해서 죽노라, 나를 위해서 누가 죽는다하는 그것만이 우리가 목자와 양이 유일하게 연결되는 점이에요.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의 음성을 아는 자는 너희를 지키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니 양됨으로서 뺏어갈 어떤 권력에도 없다는 겁니다. 어떤 권력자도 죽음으로 서로 내통하는 이 관계를 그 누구도 그걸 훼방하거나 철수시키거나 취소시키거나 어떤 권세라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해 봅시다. 유대인들은 요나를 설명하면서 뭘 끄집어냈습니까? 긍정적 사고방식을 끄집어냈지요. 요나를 봐라,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도우신다, 라는 말은 살아있는 나를 더욱 더 살게 만드는 식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은 뭡니까? 살아있다고 우기는 우리를 뭐로 바꿉니까? 살아있는 게 아니고 지금 죽어가고 있는 거죠. 죽어가고 있는 것을 그냥 방치해 버리면 도리어 저주의 죽음으로 돌변해 버리지요. 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같이 죽음으로서 살아있을 때 가는 그 출입구가 아닌 죽었을 때만 발견되는 그 출입구 쪽으로 우리를 데려가지요. 이게 좁은 문이고 좁은 길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와서 같이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사람 눈에 띠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라는 자체가 기쁜 소식이 되려면 주께서 오셔서 우리를 살아도 사실은 죽은 자야, 라고 알려줄 때만 그 죽음이 부활로 통하는 유일한 노선이라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식사 때 기도해야 할 것은 이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로 깨닫게 하는 식사기 때문에 먹어야 되죠.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금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밥 먹어 가면서 금식하는 거죠. 먹어가면서 금식하는 거예요. 잠자면서 철야하고, 이게 뭐냐 하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나로 죽은 자임을 확인시키는 그런 주께서 배치돼 있는 재료들이에요.

그래서 누가 우리에게 칭찬하게 되면 전혀 우리한테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자식이 나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 나는 우리 엄마와 같은 아내를 만나고 싶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해줘요. “니, 아빠 믿나?” 그러지요. 아빠는 전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됩니다. 엄마는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됩니다. 다 같이 죽어가는 입장에서는 누굴 모델로 삼습니까? 아무도 모델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긍정적 사고방식에서는 누구처럼 되면 된다고 자꾸 모방을 하려고 하지요. 아까 권집사님이 국수 먹고 구원 받는다면 전부 다 국수 먹으러갈 거예요. 사도바울이 손수건 들고 죽은 자 살렸잖아요. 그 손수건 어떻게 했을까요? 요즘 같으면 그 손수건요, 박물관에 뒀을 거예요. 그 손수건으로 기적을 베풀었다는 것은 전혀 손수건이 기적이 손수건에서 안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손수건을 사용한 거예요. 그저 때 묻은 콧물 묻은 손수건마저도 내가 사용하면 손수건도 기적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자신도 기적을 만들 만한 그런 가치를 가졌다고 한다면 그건 전혀 주의 기적을 이해 못하고 있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은 기적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하는 그것이 그 자체가 이미 기적 받은 사람에게 나오는 고백이에요 “나 같은 인간이 무슨 주의 일을 해.” 우리는 주의 일이 안돼요.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을 통해서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 주의 일도 안 되는데 주의 일이 되네.” 이러면 주의 일이 안 되는 거예요. 말이 복잡해 버렸는데. 그런 겁니다.

그래서 요나의 기적이라 하는 것은 요나가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그걸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은 그것은 죽은 요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매일같이. 여기 오늘 강의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죽고, 매일같이 새롭게 주의 손에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새로운 날을 주께서 창조하니까 그 창조성에서 우리는 주님의 작품으로서 그냥 주께서 다 일으켜 만들었습니다. 하고 고백하면 그게 성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주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신 그 사랑에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뭔가 기대하고 소망을 품는 거, 긍정적인 인생을 계산하는 거, 그런 계산하는 것을 주께서 충분히 이해하시면서 그걸 피해서 그게 얼마나 죄고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식으로 주의 십자가의 긍휼만 귀한 보물로서 자리 잡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대전120830b-마12장38절(요나의 기적)31강-이 근호목사.hwp (63.5K), Down: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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