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배반
믿음의 배반
이름 : 김혜선(IP:76.100.200.184)
인간의 축복에 대한 갈망과 허기짐에는끝이 없다(잠30:15).인류 역사가 이 축복을 차지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적나라한 기록이며 현재도 진행 중이고 멸망의 날까지계속될 축복의 쟁취 욕구는 결코 그 누구와도 나눌 수도 없고 나눌 생각조차 허용되지 못하며 자신의생존의 욕구를 넘어서 배타적인 탐욕의 결말인 약탈, 학살, 인종 말살 등등으로 나타난다.
인류의 문명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서구 학자들이 전부) 서구 문명이 어떻게 인류를 이끌어 오늘의 찬란함(?)을 이루었는가 하는 자화자찬의 논문이나책에서 그들의 대부분 동의하는 주장 중의 하나는 중세시대까지 동양문명에 한참 뒤졌었는데 약 500년 만에주도권이 서구로 넘어온 데는 기독교 정신이 서구인의 사상을 지배함을 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축복받았다는 이야기이다.
희생, 봉사, 박애, 진취성, 아무튼 좋다고 생각되는 인간의 탐욕을기독교 정신으로 포장하여 그 정신으로 투쟁하고 쟁취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므로 오늘의 인류 문명으로 발전시켰다는 논리이고 동양은 예수 그리스도를믿지 않았기 때문에 서구 문명에 뒤졌으며 뒤진 동양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와 민족들은 자신들의 지도와 편달을 받아야 하며 현재의 상황이 이를 말해주고있고 자신들이야 말로 미개한 지역과 민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명의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믿는다(마28:19-20).
이 논리들이 유럽 열강들의 아시아, 아프리카 침략과 식민지 획득에 대한 논리적인정당성과 합리화의 기본이 되었으며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로 미개한 민족들이 문명을 누리게 되었고 구원받게 되었으며 그들이 행한 약탈,파괴, 억압에는 대의를 위해서 불미스러운 일은 항상 일어나는 것으로 치부하고 침묵했다라고 현대 역사가들은 평한다.
이 사상이 21세기의 한국에서 아주 정확하게 일어나고있음에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을 실감나게 해준다. 한국 교회들이 이들의 정신으로 무장되어서 가난한 나라들과개발 안된 지역을 상대로 서구인들을 뒤따라 이 사상을 조금도 손상 없이 이 순간에도 실행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온갖 곳에 미친 짓들을 저지르고 어지럽히고 있다.
$가이들의 경전이며 구원의 투구로써 어떻게 하면 자신들처럼 단기간에 많이 주어 모을 수 있으며 그 방법과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공식을몸소 보여주어 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고 열광케 하여 자신들은 야곱임을 확신하는 다 목적을 노리는 것이다.
이들은 한 민족이라고 하지만 정신은선교를 가장한 서구인들이며 속셈은 그들도 서구인들과 동등함을 증명하여 비록 지리적인 위치는 동양이지만 서구인의 자리에 앉아 우월함과 예수 그리스도를믿는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물임을 세계에 인정 받는 자랑스러운 기독교인의 모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열등감에서 나타나는 발작적 몸부림 현상이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을 서구인으로지리적이나 정신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정받은들 아무 의미 없는 헛된, 미련한 자들의 뒤를 쫓는 또 다른 미련한 자들로써 불 속으로 휩쓸려 가는구더기들 중에 굴러가는 구더기가 기어가는 구더기에게 자기가 더 빠르게 휩쓸려 내려감을 자랑할 수는 없지 아니한가?
우리는 성경에 애처롭고 가련한장면들 중의 하나인 에서가 이삭에게 축복을 눈물로서 호소하는 믿음의 배반 장면을 만날 수 있다(창27:38). 축복은 당연히 장자인 자신의 몫이며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팔았다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차례가 바뀔 수는 없다는 것이다.정당한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신21:17).
이삭이 야곱에게 모든 축복을 주었으므로에서에게 줄 축복은 남은 게 없다는데도 끝까지 눈물로서 간구하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하신 장자의 축복은커녕 말씀을 믿음에대한 배반인 저주가 그의 몫이다.
또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의 배반을볼 수 있다. 예례미아가하나님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는 장면으로 평강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칼을 보내신다니 이런 배반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렘4:10).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이세상에서 축복은 자신들의 몫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기도를 들으셔야 하고 자신들에게 반드시 축복을 주셔야만 하고 당연히 믿는 자들을 도우신다는것이다(창12:2-3).여기에서부터 에서처럼 인간들의 애처로운 고통과 괴로움과 절망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부터잘못된 출발로서 인간의 출발은 저주이며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는 자비 외에는 어떤 것도 바라볼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건지신 자만이 믿는자이며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진리를 자신들에게 확대 적용하는 무식함과 용맹함으로 무장하여 절대 가련한 존재인데도 믿는 자라는 오해를 전제로 얻지 못한 축복에 대한불만과 원망의 일생이며 자신들의 기도와 요구는 이루어 주신다는 확신에 찬 미신과 허망한 꿈과 막연한 근거 없는 기대감이 인생 전체를 파멸과 피폐함으로몰고 가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이는 것으로 증명하려 하며 성경의 말씀으로 각색하는 눈물겨운, 정말로 눈물을 흘리며 일생을 보내게 된다.
자신을 중심으로 이 세상과 하나님의역사가 일어난다고 간주하는 오해가 평생을 지배하며 이끌어 하나님의 중심은 인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일하신다는것을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눈을 감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진실은 하나님께서 눈을 감기심이다.사6:10.)
자신들이 원하던 이루어지지 않은축복으로 인해 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기도를 이루어 주시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켜 불행과 역경을 지나왔다고 자신들의 믿음을자찬하며 하나님마저 자신들의 믿음에 감탄하게 만들며 자신들의 삶을 영웅적으로 미화시켜 불행한 삶에 대한 합리화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자신들의 불신을감추는 위장의 가면으로 사용하여 믿음의 주재자이신 하나님마저도 웃으실 수 없는 코메디 상황을 연출하고 마지막까지 자신은 믿는 자라는 자기 기만으로불 속으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몸과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믿는다는 인간들에게 저주를 주시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주신 것임을(창27:27-29) 확정하시었고 욕구와 욕망을 위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몫이 아니며그나마도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인간들이 바라는 축복이나 평강이 아니라고 말씀 하신다(마5:3-10; 요14:27).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는 배반으로나타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말씀대로 실행하시며 주님의 창세 전의 예정하심에 의한 선택(엡1:4)으로 야곱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믿음으로 야곱이 되는 것이 아니며(롬9:13)인간들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은 모두 가짜임을 들어 내신다(롬3:4).
믿음은 인간에게 그림의 떡일 뿐이며어떤 희망도 없다는 절대 절망이 기쁜 소식이다.
Wednesday,September 12, 2012
이근호(IP:119.♡.78.175)
12-09-13 09:19
저주는 믿음에 대한 배반으로 주어진다는 점을 '에서'의 경우로 설명한 것이 마음에 새겨지네요.
김대식(IP:124.♡.85.34)
12-09-13 09:38
구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전혀 없는 뻔뻔스러운 사귐 (미쁘심)
내가 구지 예수님을 전혀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 뻔뻔스럽게 사귐으로써 다가온 주님의 미쁘신 사랑해 주심때문이고,
반대로 내가 기여히 예수님을 믿고야 말겠다고, 예수님을 사랑하고야 말겠다고 나서는 것이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워서 전혀 못믿겨워서 믿고자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두려움이란 결국 인간 자신이 주체가 되겠다는 자기 숙제로써 행함을 발동한다.
그 인간이 주체가 된 행함이 또는 믿음이 발현되면 정당성을 가진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내가 정당하면 정당할수록 더더욱 그 괴리를 좁힐수가 없다. 더더욱 죄인이 된다.
타인의 얼굴은 곧 예수님의 얼굴이다. 그 고통의 얼굴을 외면하고, 유대인들은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기는 커녕
자신들의 목적만 달성하는 검소하기 짝이 없는 경건한 삶으로 블랙홀에 빠져버렸다. 어쩌면 유럽인의 광기에 촉매역할을 했으니 남탓할수가 없다. 둘다 똑같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였던가? 누워서 침뱉기 한 셈이다. 물론 이런 레비나스의 말도 인간자체에 대한 정당성 추구다.
결국 정당성을 갖추고자, 인간이 정당하면 정당할수록 두려움이 온다. 행하면 행할수록 두려움에 자기자신에 연민하고 시험들게 된다.
아무리 자신에게 두려워 하지마 라고 최면을 걸어도 그 두려움은 누가 뒤짚어 씌우는 부조리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자신의 정당성 외에는 붙들것이 없고, 앞장세울 것이 없다.
그래서 행위를 내세우면서 그 행위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주고받는 소통으로 흐름(만남)으로 만들고자 한다.
행함으로 구조를 만들고자 하는 역사성을 추구한다.
그 역사(행함)의 정통 정당성의 최종결론은 죄책감과 살인의지이다.
예수님에 대한 살해로 이어지는 것 외에는 다른 결과는 없다.
그러나 복음은 비역사다. 역흐름이다. 반대의 이중성이다.
과거를 삭제하기에 정당성을 세울려고 해도 세울수가 없다
도리어 정당성이 전혀 없어서, 행한 것이 전혀 없는 전무하기에 오로지 긍휼만을 불쌍히 여겨주심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서는 그 사귐을 참으로 뻔뻔스럽게 주 안에서 자랑한다.
사랑은 나의 행함을 나의 두려움을 내어 쫏아내었다고 말이다.
인간에게서 믿음이 불가능하기에 그것을 가능케 만들어 줄려고
온갖 가능한 장치는 손에 쥐어주고 납득이 되도록 하고
설명이 가능하도록 눈에 보이는 장치인 교회 등등을 손으로 세운다.
얼마나 안 믿겨지면 믿겠다고 행동에 나서고 그 행위가 축적이 되어서
그렇게 정당화 된 것이 정통이라고 불려지는 역사성이다. 곧 정당성이 역사성이다.
얼마나 앋 믿겨졌길래 역사화 했을까? 두려워서 행동으로 나선다.
얼마나 앋 믿겨지면 행하겠다고 나설까? 불안해서 하나님과 같이 동일시 일치성을 추구한다.
얼마나 사랑을 못 받았으면 사랑하겠다고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안 버리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일까?
신념이 오기가 되는 것이다.
미덥지 못해서 증거물을 축적하는 것이다.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숙제를 확증받을려고, 자신의 믿음을 확인 시켜 줄려고
그래서 단절 속에서 사랑은, 사랑의 이중성을 실행한다. 오히려 그 치이의 차이가 너무 너무 신나고 놀랍고 미쁘게 다가와서 뻔뻔스럽게 용감하게 그 차이의 간격을 즐긴다. 차이의 단절을 누린다. 너무 너무 차이 나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싸가지 없이 만끽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이 예수님의 숙제 대상, 예수님의 믿음 대상이 되어
죄인 중의 괴수로 죄인의 이중성을 누린다. 바로 이런 특이성이 저들에게는 반드시 거짓으로 악령으로 비춰지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아도 저들의 정당성 저들의 역사성인 저들의 신념인 오기 즉 저들의 믿음에 위기로 작용하게 된다. 이단 척결로 이어진다. 두려워서 이다. 그래서 반드시 행동으로 실행한다.
가만히 있어도 사귐 때문에 죽도록 되어 있다. 가만히 있어도 저들에게 미움 받도록 되어 있다.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이유는 딱하나 두려워서, 그 두려움의 불안을 카바하고자
자신들의 숙제로 마련한 무화과나뭇잎으로 가리고자 함이다.
그 제사는 그 행위는, 더 나은 제사, 곧 순종(대상이 됨)에 그 속내가 들통난다.
우물가의 여인의 두려운 공포를 그 어떤 누구도 생명으로 인도할 자가 없다.
어떤 누구도 영생수로 목마른 갈증을 채워줄수가 없다.
그 과거의 허물을 씻겨줄자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숙제를 펼치심 때문에 내 남편이 없다 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방적인 용서 때문에 참으로 뻔뻔스럽게 나의 과거를 씻겨주는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동네방네 외친다.
그 만큼 그 미쁘심 때문에 참으로 뻔뻔스럽게 사귐을 누린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자신의 숙제를 하기 바쁘다.
그 숙제에 예수님을 끌여들여 대상화 한 것이 도리어 혹부리(법)을 떼는 것이 아니라 혹을 더 붙이는 꼴이 된다.
어찌하여 다시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자신의 숙제로 여전히 착각하고 있다.
그러니 도저히 넘을수 없는 선에 툭 걸려 넘지를 못한다.
그냥 주님 쪽에서 넘어오심을 뻔뻔스럽게 바라는 우물가의 여인과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이래 알려 줘도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방언이요 비밀언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두려워서 믿고자 행하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해서든 그 갭을 좁히고자
그래서 자신의 숙제 대상화 일치하고자 동일성을 추구하고자 열심이 특심을 펼친다.
그러나 십자가의 십자가는 그 차이성의 간격을 더더욱 벌려서
그 벌어진 틈의 간격을 누린다. 그 빈자리를 더더욱 만끽한다.
빈자리를 앉을 이유가 없다. 어차피 미끄러진다.
그래서 가인은 놀지 않고 제사를 드렸고
에서는 놀지 않고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할려고 사냥에 전념했고
맏아들은 그래서 쉬지 않고 아버지 곁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이 일했으며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분주히 열심을 다했으며
가룟유다는 쉬지 않고 유대 독립운동을 펼쳐 이스라엘 해방을 꿈꾸며 실천에 실천을 더 했다.
이렇게 유대인은 쉬지 않고 자나 깨나 성전생각 하나님생각 율법생각 천국생각만 했다.
그 신념이 아니면 참혹한 현실에서 더 이상의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려워서 절망스러워서 불안해서 말이다.
행함으로 행하기 때문에 두려움만 더 증가가 되는 혹부리를 오히려 하나 더 달게 되는 꼴이다.
단절을 격기 보다, 되도 않는 행함으로 잇고 이어서 지금까지 전전긍긍 명맥을 이어서 왔다는 자부심 그 정당성만 가득하지 정작 그 두려움을 배가가 되어 증폭이 되었다. 톡 하고 건드리면 바로 그 완악함은 탄로가 난다.
이렇게 혹을 하나 더 달게 됨으로써 그 부조리가 옳았군요 라고 긍휼을 쳐다보는게 아니라(단절을 직시함으로써 쳐다봄)
오히려 자신의 행동, 그것도 아주 지극히 정당하고도 정당한 행동, 그런 행동이면 행동일수록
점점더 혹은 더 더 더 달게 된다.
혹을 떼어내어 할례 당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점점 더 손 할례로 혹(법)을 더더욱 온 몸에 붙이는 꼴이다.
그러니 강도만난 자를 율법과 일치할려는 행함이 가득한 자 일수록
그 강도만난 자를 피하고 빙 돌아서 가는 것이다.
선함이 아니라 악함이다.
악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온 몸에 달았다고 선하다고 우긴다. 행함의 정당성이다.
햄하면 행할수록 더욱더 나는 정당해 진다.
그래서 행함에 집착한다. 허상에 빠진다.
실상인 예수님의 믿음을 쳐다볼 이유가 없다.
두렵기 때문에 못 쳐다본다.
그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못 쳐다본다.
시험에 빠져 버렸기에 오로지 쳐다볼것은 자신의 행함 뿐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불안해서 영혼까지 잠식된 상태다.
십자가는 오히려 더더욱 죽음을 적나라 하게 까발리게 하니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에 빠진다.
그래서 대체 대안이 행함이다. 행함의 이중성이다. 행함으로 행함을 이을 뿐이다.
얼마나 안 믿겨지면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십자가의 사귐이 덮쳐진자는 그 다 이루심을 누린다.
그 완료를 누리기 바빠서 책임 질게 없다.
그 누림이 바로 차이성이다. 자기유익이 아니다.
참혹스럽게 그 차잉성을 격는다.
죄인 중이 괴수라는 죄인의 이중성을 십자가의 피의 이중성 때문에 격게 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일방적으로 사귐당해 버린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예수님의 믿음의 이중성이다. 믿음의 증폭, 믿음의 무한반복이다. 얼마나 미쁜가?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후 1:18, 개역)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살전 5:24, 개역)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래서 놀기 바쁘다. 무지 무지 놀기 바쁘다. 줍는 놀이에 푹 빠져서 자신을 돌아볼 관리할 겨를이 없다.
그 정도로 뻔뻔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진 썩지 않는 양식인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기 바쁘다.
너무 너무 뻔뻔하다. 무슨 자격으로 먹냐 말이다. 그러게 말이다. 무슨 자격으로?
그런데 주님이 먹고 마시라고 온 세상에 피 범벅으로 주님의 살로 온 산과 바다를 다 덮어버렸다.
다른 양식이 있으면 말해 봐라? 그냥 뻔뻔스러울 뿐이다.
이 용감함은 아버지의 숙제로 그 차이를 격었기에 ,
되도 않는 자신의 숙제가 거들났기 때문이다.
진작 거들 났어야 할 자아였다. 되도 않는 자아를 쳐다보다가 비로소 다른 인간 차이나는 진짜 인간이 나타났으니
이제는 게임 오바다.
선지자 시므온이 그래서 외쳤다. 이제서야 내 숙제 끝
빨래 끝 ~~~~~~~~~~~~ 거룩이 와버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미뻤으면 손을 떼 버렸을까?
이제 자아를 쳐다볼 이유가 전혀 없다.
예수님을 믿겠노라고 나설 이유가 전혀 없다.
행할 이유도 사라졌다.
그저 사랑에, 피 흘리심에 피 뿌림 당하는 일 밖에 없다.
그 사랑이 벌리는 폭력
곧 행함을, 불안을, 두려움을 내어 쫏는 그 차이의 차이를 겪는, (죄인 중의 괴수로써) 뻔뻔스러운 사귐만 있을 뿐이다.
(딤후 2:11, 개역)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딤후 2:12, 개역)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딤후 2:13, 개역)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