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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철학적 허무주의와 성경적 허무주의강의-

철학적 허무주의와 성경적 허무주의Ⅰ. 철학적 허무주의1789년 프랑스에서 시민 혁명이 터지자 이웃나라 독일에서도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시민 의식이 미약한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자민족 중심으로 정치적 상황에 재 편성 된다. 상대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후진성을 띤 독일은 1848년 3월 혁명을 통해서 의회 중심의 근대국가 형태를 요구하게 되나 결과적으로 흐지부지되고 프로이센 민족으로 독일이 영합되는 처지로 바뀐다. 이는 독일 민중의 열등의식과 실망감을 강한 민족적 국수주의에서 위로 책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나타난 두 가지 사상이 있었는데 하나가 포이에르바하를 중심으로 한 급진주의적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쇼펜하우어를 중심으로 하는 염세주의 철학이다. 그러나 어쨌든 두 사상 모두 다 비합리적이고 비 객관적인 색채를 띤다. 독일의 상대적 후진성을 정신적으로 보상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여기서부터 철학적 허무주의가 실제적으로 표면에 등장되고 정리된다. 민중들은 자기네들의 정치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추상적인 현실 비판을 하면서 도피를 구했다. 여기에 대해 지식인들은 그들에게 도피처를 마련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정치와 사회와 직접 무관한 사상을 그들에게 흘려 보낸다. 개인주의에 빠지게 하고 주관주의적 성향을 지닌 사상이 쉽게 대중들에게 용납된다.종전만 해도 인류역사의 변천과 우주의 보편 정신의 발전을 고대했던 그들에게 이런 거창한 주제와 이별하도록 하고 이제는 자아의 심리적인 갈등을 주제로 하는 철학으로 돌아서게 한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물질과 정신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다는 것을 먼저 가르쳐야 했다. 정신으로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태도는 실수임을 알려주고 있다. 정치의 변동과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서 진정 인간이 도전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은 자아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사회구조의 변혁을 추구하지 말고 그 동안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던 자아의 재 발견에서 의미를 찾아라고 촉구한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 사회 활동에 대한 무의미성은 사회의 전반적 모순에 대한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비참한 절망 의식은 비단 독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가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참된 운명이라는 것이다. 다만 독일만큼은 이 진리를 미리 알고 있는 영특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독일 민족이 자신의 후진성을 정신으로 극복해 보려는 국수주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모든 시민들의 특징이며 이 시대의 본질이기에 숨기거나 거부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비 현실적인 사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기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이기주의적 성향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 것이 관권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일상적인 이기주의와 숭고한 이기주의로 나눔으로서 이기주의 폐단을 극복했다고 보고 있다. 숭고한 이기주의는 모든 사회적 의무로부터 이탈되어 도덕적 신비주의 색채를 띄고 있기에 거의 종교화되어 있다. 자기 양심에 충실한 초월성과 해리감이 사회 구조의 변혁에 희망을 걸던 그 당시 지식층에서 좋은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한 셈이 된다.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허무주의와는 달리 그 후에 나온 니체의 허무주의는 오히려 정 반대의 성격을 띠고 등장된다.프로이센 군사 정권에 의해 강압에 짓눌려 있던 이 정치적 낙후성을 세계 만방에 무엇이라 변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 혁명 실패의 후유증 중의 하나이다.자 국가의 정치적 후진성을 자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합리화시켜 줌으로 타국가를 능가하는 국가로 성장시키기 위해 계기를 삼고자 했다.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 복종된 채 지니는 이 상태를 오히려 전 세계 역사의 흐름상 타국가에 비해 훨씬 앞서가고 있는 형태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상만 등장하면 된다. 즉 복종에 대해 자발적인 순응이 안정되고 성숙된 시민 정신이라고 누가 바람을 불어넣어 주기를 은근히 대중들은 기대 했다. 이왕 반항할 처지가 못 되면 완벽한 변명이라도 있으면 큰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니체가 등장해서 압제 당하는 국민들과 압제하는 압제자의 마음 모두를 흐뭇하게 했다. 물론 이 흐뭇한 감정이 도가 넘쳐 세계 대전을 야기시킨다.니체의 허무주의는 공격하는 힘의 집결로서의 허무이다. 허무를 통해야만 비로소 역사 발전의 힘이 생겨난다는 원리를 갖고 있다. 니체는 세계의 본질이나 신의 문제 등을 인간의 사변 속에서 유출하려 할 때는 필연적으로 허무주의가 발생된다고 본다. 도달될 수 없고 파악될 수 없는 것을 영원한 관심의 대상이 될 때, 인간의 현 존재는 그런 허구 의식의 노예가 되며 그 환상에 의해 간섭받게 됨으로 자신의 본래성을 위축시키게 된다. 본성은 그렇지 않은데 자신이 추구해야 될 것이 자기 외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 허구와의 격차로 인해 허무가 발생된다. 고대로 부터 인간을 무 의식적으로 지배해 온 윤리와 도덕이 바로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본래의 정열과 용기를 위축시켜 왔다. 고상하다고 설정한 도덕들에 의해서 인간의 원형을 상처 입혔다. 늘 쉴 사이 없이 출렁이는 인간의 의지력이 그런 신비성에 의해서 모두 균일화되기를 강요받았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을 같이 취급하고 같은 모양새를 내도록 강요해 왔다. 결코 평등하지도 않는 인간을 억지로 평준화시키기 위해 노예 근성의 덕을 장려해 왔다. 사랑이라니 동정이라니 하는 것이 선으로 간주되었고 전쟁이나 지배나 하는 것은 악한 것으로 미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가상의 세계를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따져서 존재할 것 같은 본질의 세계는 기만이며 현상의 세계만이 유일하다. 이 현상계는 각자의 의지와 충동으로 넘실거린다. 이러한 의지에도 강한 의지와 약한 의지가 있고 서열화 시킬 수 있다. 강한 의지란 권력에 대한 집착력이 강한 것을 말하고 약한 의지란 복종하는 편이 편하게 느껴지는 의지이다. 따라서 정치란 강한자로 하여금 약한 자를 지배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그래야 허무주의가 보편화된 이 사회에서 이것만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정치형태이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 의해 소멸되고 지배되는 것은 악이 아니라 도리어 선이 된다. 만약 강한 의지나 약한 의지가 다같이 동등하게 대접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악이 된다. 세계란 의지의 변화와 운동으로 진전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권력 의지를 최고도로 발휘해서 초인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더욱 더 잔인하게 때로는 더욱 더 약한 자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창의성이 간섭받지 않아야 한다. 세계는 권력의지의 강도에 따라 서열화 되어야 하며 이것이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종교가 남기고 간 허무의 흔적을 매꾸어 나가야 한다고 니체는 외치고 있다.이러한 니체의 외침에 부응해서 히틀러는 독일 민중에게 호소하기를 "우리가 현 시대를 주도 할 엘리트 민족이 되자" 고 외쳤다. 세계의 역사란 권력 의지를 먼저 찾아낸 민족에 의해서 다른 민족이 지배받음으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나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절대 선으로 간주했다. 타민족에 대한 박대와 박해는 대단한 도덕을 수해 하는 것이기에 나치 군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잔인하면 할수록 초인의 민족다운 행세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은 세계 역사에 보탬이 안되는 약자들을 제거하기에 이웃 사랑이 된다. 전쟁은 하나의 자연법이며 세계를 구원하는 숭고한 행위이다. 세계는 이제 경제 계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마다 각각 의지의 차이 있는 것처럼 종족들 사이에도 의지의 차이가 있고 서열이 매겨질 수 있다. 사랑과 동정에 얽매여 인간 고유의 의지를 말살하려는 유대 종족과 기독교를 신봉하는 종족은 약한 의지를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소멸시켜 마땅하다고 나치들은 믿었었다. 약한 자는 도태되고 강한 자만 남는 세계, 오직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국가가 될 때 그 때 비로소 세계 속의 모든 변화가 무죄가 되는 시점이 된다. 그 어떤 행위도 무죄이며 전쟁도 무죄이며 착취도 무죄가 되는 세상이야말로 더 이상 신이 필요 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이처럼 철학에서의 허무주의란 염세주의도 있지만 반 염세주의적 성향도 나타난다. 신의 은총을 마다하면서 까지 용기도 있어 보이고 배짱도 두둑한 자들도 사실은 자기 나름대로의 허무주의자들이다 .자기 속의 허무를 배짱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능성과 창조성을 그 어떤 경우에도 포기 못할 자들도 허무주의 자들이다. 사실 그 동안 인류는 깊은 자기 내부의 허무를 감추기 위해 고상한 도덕과 종교와 윤리로 치장해 왔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깊은 본성과 배치된다는 것이 니체에 와서 폭로가 되었으며 세계 대전을 거쳐 시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한계에다. 철학에서 말하는 허무주의란 신의 간섭 없이 살고자 하는 인간들의 자기 신격화 작업을 뜻한다.Ⅱ. 성경적 허무주의구원받기 위한 인간의 의지는 사실은 탐욕의 소산이다. 죄인은 징벌의 대상이지 구원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구원받기를 소원하고 기독교로 몰려온다. 그러나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은 구원자의 죽음이라는 역설과 불 합리이다. 구원해야 할 자가 도리어 이 세상에서 매 맞아 죽어 버렸다. 이것은 구원의 성공이 아니라 실패이다.여기서부터 사이비한 기독교는 십자가의 거침돌을 빼 버리려고 한다. 그 방법으로 등장되는 것이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사변적인 탐색이다. 십자가에서 구원관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성에서 구원관 시작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죄인을 벌하실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공의로움과 사랑, 둘을 들고 잇지만 끝에는 공의 쪽을 놓아 버리고 사랑만 들고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둘의 속성은 상호 상충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둘 다를 말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변적 사이비한 기독교는 신의 속성을 신의 계시 활동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과 연관시켜서 이해하려 든다. 이렇게 되니 세상을 버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이 거추장스럽기에 버리게 된다. 그들은 말하기를 세상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말한다. 왜 세상이 헛되어야 되냐고 물으면 자기가 그 속을 이제 떠났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서 헛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자기에 불필요하다. 초월적 존재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마음을 몰두시킴으로 세상은 더 이상 자기에게 도움이 않게 된다. 그래서 세상을 기피한다. 세상은 더이상 나를 살려내지 못한다. 세상은 더 이상 나의 동반자도 아니다. 세상은 더이상 나에게 위로할 것이 없다. 그래서 세상을 버리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죄 때문에 헛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자기에게 매달려 있은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죄인 자신을 끝까지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죄이다.(요 12:25)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죽을 때 자신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갈 2:20) 이렇게 되니 자기 구원에 집착해 있기에 세상을 도피하여 피안의 세계로 나아 갈려는 의지는 죄악의 의지이며 십자가를 거치지 않는 구원이기에 효력이 없다. 자신의 죄 문제를 자신의 의지에 의한 신앙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바로 죄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이것은 사이비한 기독교인 동시에 종교로 위장한 철학적 허무주의의 한 단편이다.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 자신의 허무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뜻하는 세상에 대한 기피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세상은 죄로 하나님께 벌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인간은 죄악된 세상은 미워하면서 죄인 된 자신은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 여기서 죄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죄인 된 자기에게 계속 집착을 함으로 계속 심판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자기 죽음으로 이해해야 될 십자가를 자기 위로로 이해하기 때문에 왜곡된 십자가 속에 놓이게 된다. 이 왜곡된 십자가의 토대 위에 전개되는 기독교는 니체에 의한 야무진 공격의 표적이었다.십자가 사건이나 뒤이은 부활 사건, 또 승천과 성령의 강림 사건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심판의 표적들이었다. 우리보고 세계를 포기하라는 심판이 아니라 너도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하나님의 의사 표시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있어 대립되는 두개의 주체를 보게 된다.단순히 나와 타인이라고 구별되는 주체의 대립은 '나'라는 의식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발상은 '하나님의 나라'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독자적인 고유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걸림돌이며 장애물도 인식된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리를 물러 주어야 되고 그러기에 언젠가는 소멸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허무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따라서 기존의 세상 나라에 소속된 모든 것은 그 어떤 것도 허무하다. 여기에 '나'도 포함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에 비교해서 죄악된 것으로 정죄해 버렸을 때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나'도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정죄된다. 따라서 기존의 세계에 태어나서 기존의 세계를 의지하고 거기에 기대어 살려는 본능으로 가득찬 '나'는 소멸되어야 하고 허무해야 한다.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알아야 한다. 현 세계를 정죄할 만한 권한을 지니게 된 이유가 규명되어야 한다. 그 나라는 참된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참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다. 내세를 내세우는 종교라고 해서 다 허무주의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 완성과 온전의 모습을 지니지 못하는 내세는 환상이며 허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나라가 될 때 허상이 아니라 비로소 실제적이며 유일하게 실제적이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섕각과 이상들도 그 아들의 완벽함 앞에서 무력하다. 도저히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라의 선택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새계약 안에서 양자가 되는 은총을 입었을 뿐이다. 이로서 우리는 새로운 나라가 우리 곁에 있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날마다 죽음에 넘기는 의식이다. 이것도 단지 자기의 구원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이미 신분상 하늘에 소속된 그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새 계약이라는 법칙을 성령은 끊임없이 성도들에게 권유하고 있으며 그것이 성령의 기도로 효과적으로 이루어져 간다. 여기서 허무란 이미 허무가 아닌 세계 안에 들어와서 보는 바깥 풍경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기쁨에서 나오는 무관심의 표현이다. 그래서 세상을 보고 허무를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가 아니라 계약 완성에 동참하여 그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비계약적 상태에 대한 견해를 두고 말한다. 결코 자기 입장에서 허무를 규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결론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교회에서 부르짖는 천국이 과연 구약에서 미완성 부분을 만족시키는 천국인지 아니면 인간들의 종교 욕구와 신비 욕구와 삶의 욕구의 집합체로서의 천국인지 냉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만약 조금이라도 오늘날 교계에서 나타난 움직임이 구약부터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님 본래의 정신과 위배되어 나타난다면 그 교회에서 외치는 천국도 실제로는 극락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허위 천국일 공산이 크다. 아무리 내세를 바라보고 아무리 예수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해도 참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죄가 과연 무엇인지를 근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천국이 아니다. 구약에서부터 늘 말씀하신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결여에 대해 자기 죄악과 부족함을 절감하고 애통하는 자가 아니면 주님이 강림하는 시기에 그 사람들은 여지없이 탈락된다. 소위 기독교라는 또 하나의 인간 종교를 신봉한 자로 분류될 뿐이다.세상을 보고 허무를 느낀다로 다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진정 하나님 나라에 이미 소속된 신분으로 기존 세계가 옛방식대로 지탱하려는 그 사고방식들을 정죄하는 가운데 올바른 허무감이 생기게 되며 동시에 천국의 기쁨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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