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굳은 마음 120912
말씀과 굳은 마음 120912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말씀과 굳은 마음(겔 3:1-7)
이근호
12-09-12 21:08
말씀과 굳은 마음
2012년 9월 12일 본문 말씀: 에스겔 3:1-7
겔 3:1, 개역)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겔 3:2, 개역)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겔 3:3, 개역)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겔 3:4, 개역)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겔 3:5, 개역)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겔 3:6, 개역)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겔 3:7, 개역)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꽉꽉 채우십니다. 창자까지 가득 채우십니다. 빈 틈이 없도록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에스겔은 자기 고유의 영역은 모조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점령당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놓고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데리다가 이스라엘 속에 던져 넣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친히 세우실 이스라엘이란 이런 인간상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말씀을 가득 채워진 이런 상태는 에스겔 개인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에스겔을 데리다가 정작 ‘말씀의 위력’이 어떠한가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즉 참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자기 것’이라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는 겁니다.
사적인 나의 소망이나 나의 기대나 나의 꿈 같은 것은 애초부터 용납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타고난 종교성은 말씀의 가득함이 아니라 기도 솜씨의 발휘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즉 창자 속까지 자신의 기도 솜씨로 가득 차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의 욕망과 포부 달성에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작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뜻 구현에만 신경 쓰게 됩니다. 인간들이 바로 이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새로운 이스라엘의 전형으로 전면에 내세우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교류한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제시하는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엄중한 말씀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제시된 그 말씀이라는 것이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의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을 제시합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강력하게 반발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말씀이 없는 다른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의 하나님’은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배척받게 됩니다. 따라서 배척받는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마저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있음을 보이려고 하십니다. 말씀의 작용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이유는, 말씀 자체에 사람들을 저주하는 성질이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잠언 8:35-36에 보면,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마음 맞는 가족들 끼리 오붓이 모여 사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말씀이 들어와 버리면 사람들은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인간의 원천 자리를 발을 잠그야 합니다. 그 원천의 자리란 곧 ‘죽음의 자리’입니다. 사람들의 종교라는 것이 말씀 위주가 아니라 기도 위주로 나아가는 이유는 ‘살고 싶어서’ 신을 찾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의 자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자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살기 위해서 말씀 보는 것은 참된 하나님을 그들 속이 끼어주지 않고 배척하는 양상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생명을 배척하고 미워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잠언의 말씀처럼 ‘사망을 사랑하는 가정’이 됩니다.
이는 저주받은 가정이 되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 매일같이 저주를 퍼 담는 식으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성경 전체로 볼 때의 길게 이어지는 흐름은 곧 ‘죽음의 의미’의 전달이요 연속입니다. 첫 번째는 개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의 집단의 죽음이요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죽음이요 그 다음에는 성도의 죽음입니다.
맨 처음 개인의 죽음은 아담의 죽음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죽었더라, 죽었더라”를 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은 단순한 목숨이 끊어짐을 통해서 보여지는 죽음입니다. 그 다음의 죽음은 ‘집단 죽음’ 곧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는 죽음이란 ‘저주받음’입니다.
이는 곧 말씀에 위배되면 누구든지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는 그런 죽음입니다. 그 다음의 죽음은 단순히 집단적으로 거주와 생존을 위협받는 정도의 저주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저주를 보여주는데 그 죽음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그 다음의 죽음은 성도의 죽음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성도의 안식과 휴식을 나타내는 동시에 성도를 미워하는 이 세상 전체가 얼마나 심판받기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나타내 보여주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를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적인 구원을 위하여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는 저주 기능이 있음’을 전 우주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에스겔로 대변되는 새 이스라엘의 존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한 인생이란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말씀 자체의 개입은 곧 하나님의 개입의 유일한 방식입니다. 말씀을 거부하면서 나름대로 성실과 열성을 내세우는 것은 저주만 유발시킬 뿐입니다. 생명이란 필히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가능하기에, 이는 곧 저주가 있는 곳에만 구원이 있음을 말합니다.
성도에게 있어 복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겁니다. 이 사랑과 생명이란 성도를 죽음의 환경 속으로 집어넣어서 제공합니다. 아담이 그러하고 노아의 방주가 그러합니다. 노아는 방주 속에서 비로소 무지개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형편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의 자식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불가능 속에서 인간은 절망을 느낍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는 순간입니다. 야곱의 험난한 언약적 인생도 요셉이라는 자식이 꿈의 계시대로 움직이므로서 실현됩니다. 즉 야곱의 복은 자기 손으로 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에스겔도 자기 민족과 하나님의 성전이 불탈 때, 비로소 말씀은 인간의 손으로 지탱하거나 지켜지거나 유지될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므로서 모든 인간의 종교적 열성과 행함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일방적인 사랑의 은사로만 구원이 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기 위해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9-13 13:24
6강-에스겔3장 1-7(말씀과 굳은 마음)12091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1-7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에스겔의 몸이라는 것은 마치 순대 같아요. 순대는 돼지 곱창에다 내용물 다져서 꽉꽉 채워 넣는 것이지요. 그처럼 3장 1절부터 보게 되면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고 하고 2절에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신다고 되어 있고 3절에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네 창자에 채우라.” 창자 안을 뭐로 터질 듯이 채우는가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속들이 다 가득가득 채워집니다. 그러면 이 에스겔이라는 존재 자체는 사실은 의미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겁니다. 순대 같으면 곱창껍질 그 정도 되겠지요.
그 속에는 말씀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마치 만두로 이야기하면 얇은 만두피에 내용물을 가득 담은 것, 만두는 속맛이지 만두피 밀가루 반죽 맛이 아니거든요. 에스겔은 푹 쑤시면 퍽 하고 터질 것 같아요. 쑤시면 왈칵 쏟아지는 것이 말씀만 왈칵 쏟아지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그렇게 같이 사귀고 싶거나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렇게 가득가득 채우는 이것은 장차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성도의 모습이 이 에스겔의 모습처럼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내고야 만드는 것입니다. 만두피 속에 다져넣은 것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은 터질 듯이 들어 있어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말씀이 막 나오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 인생이라는 것이 없어요. 에스겔처럼 되면 자기인생이라는 것이 없고 더구나 사도나 선지자들은 이 세상에 부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저렇게 살고 싶다, 라는 부러운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얇은 만두피에 불과하기에 내가 저렇게 하고 싶다, 라는 것이 허락이 안 됩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천사들이 나오잖아요. 천사들이 네 면을 장식하는데 그 천사들 안에 신이 들어 있어서 천사가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갈 수가 없어요. 바퀴가 달려서 하나님의 신이 이리로 가라면 가고 저리로 가라면 그대로 가는 거예요. 에스겔이 꼭 말씀을 가득 실은 수레 같은 역할, 그리고 자체적인 브레이크나 핸들은 없어요. 안에 담겨 있는 말씀이 나름대로 계획이 있습니다. 앞으로 진행될 말씀의 계획을 자기가 담다 보니까 에스겔은 남보다 먼저 고난 받는 이스라엘, 포로 잡혀 가는 이스라엘, 멸망당하는 이스라엘, 멸망당하는 유다, 멸망당하는 성전, 파괴당하는 성전의 아픔을 백성들보다 먼저 앞당겨서 지니고 백성들 앞에 등장하게 됩니다.
내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너희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자기약속대로 자기백성을 만드는데 이런 식으로 만든다, 너희들 식으로는 절대로 이스라엘 아니야, 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가득 담겨줍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 아픈 이야기지요. 왜냐하면 백성들은 말씀 우선이 아니고 자신의 행복이 우선입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 이야기해 봅시다. 행복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마음 맞는 자기들끼리 오순도순 사는 것이 행복이잖아요.
DNA가 닮은 사람들, 자식하고 같이 사는 것, 그리고 남편 아내 자식하고 오붓하게 사는 것, 이것이 소박한 소시민의 최고의 행복이 이겁니다. 항상 웃음이 넘치면서 재벌 안 되더라도 밥 먹고 살 정도의 여유는 되는 그 행복한 가정, 끼리끼리 사는 것. 그런데 그런 소박한 행복, 우리끼리 모여 사는 그 행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희들끼리만 있으면 안 되고 너희들 속에 하나님이 같이 끼어들어야 사는 것이고 만약에 너희들끼리만 있고 거기 하나님이 안계시면 거기는 저주 받는 오붓한 가정이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저주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말씀으로 꽉 채워서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제대로 저주를 언급하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오해가 있어요. 어떤 오해냐, 나쁜 짓 할 때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나쁜 짓 한다고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빠져버리면 그 자체가 저주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면 추상적이니까 다른 말로 말씀이라 합시다. 하나님은 그냥 믿으면 안 되잖아요. 말씀과 엮어서 믿어야 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으로만 가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가는 곳마다 자기 보따리에다 저주를 계속 채우고 또 채우고 꽉꽉 저주를 채워 넣는 지경, 그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버리면 그것이 바로 저주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주라 하는 것은 흔하디흔한 것이지 유별나고 특별한 것이 아니에요. 잠언서 8장 35절, 36절에 보면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말씀되시는 그 분이 없으면 사망이고 그분이 있으면 생명이라, 이미 잠언서 8장 35절, 36절에 규정을 지어놓았어요. 땅, 땅, 땅, 확정지어 놓았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그만큼 생명보다 사망을 사랑하는 품성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어도 취미가 갖고 마음이 맞고 생각이 갖고 얼굴도 닮았고 직장에서 퇴근해서 가족 간에 오붓하게 재미있게 사는 것, 아버지는 술 먹고 행패부리는 주폭이 아니고 엄마는 계모임 안하고 살림이나 조신하게 사는 것, 인간들이 꾸며낼 수 있는 것, 행복이란 이런 요소들이 꽃다발처럼 모이면 행복입니다, 라고 할 수 있을 때에 주님께서 들여다보면서 ‘거기에 내가 끼어들지 않았잖아.’ 그러면 그것은 저주받은 가정 일뿐만 아니고 계속해서 저주가 함박눈 쌓이듯이 쏟아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빠진 가정과 국가와 사회는 저주가 주어진다는 것을 누가 아느냐하면 에스겔처럼 곱창에 내용물 채워서 순대된 것처럼 말씀으로 창자까지 꽉꽉 채워진 사람의 눈에서만 비로소 그것이 눈에 띄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보게 되면 여러분 보기에 이상한 것이 있을 겁니다. ‘에스겔아, 네가 말씀을 채워라.’ ‘채웠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가서 전해라.’ ‘예,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전해봐야 소용없다. 그들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해서 네 말 듣지 않는다.’ 지금 이야기 전개가 그렇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안들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보내기는 왜 보냅니까?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좀 안다 할 때는 이런 점을 알고 있어야 안다고 할 수 있어요. 성경 많이 안다는 사람들 보면 이런 것을 빼놓고 있어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도케 합니다. 왜요,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원칙을 알아야 말씀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들 해요. 실제로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알아듣도록, 요새 말로 소통,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아니거든요. 너희들이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소통 아닙니다. 소통 되지 않는 상태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종교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하는 종교, 또 하는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종교.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복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 말고 다른 것은 뭐냐, 기도를 빡세게 하면 뭔가 뚫리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그 사람들은 자꾸 기도를 앞장세우는 겁니까? 말씀이 듣기 싫어서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들어올 때 말씀을 앞장세워서 들어오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한테 오지 마시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냥 거기 계시고 우리는 기도를 빡세게 하고 열심히 해서 갖다 안길 테니 거기 그냥 계시라는 거예요. 우리끼리, 열심히 기도하는 우리끼리, 이것을 자기들은 행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큰 교회 가면 기도의 용사들 안 많습니까? 삼백용사니 뭐니 많잖아요. 그 사람들은 금요철야 안 빠지고 새벽기도 안 빠져요.
자기들끼리 기도 계모임 하는 것 같아요. 제일 앞자리에 앉아요. 다 늙은 권사들이 잡는 자리가 앞자리로 잡혀 있어요. 목사들은 이야기합니다. ‘당신들 기도덕분에 우리교회가 이만큼 되었습니다. 당신들 기도 멈추면 우리교회 무너집니다.’ 그 사람들 기도하는 제목이요, 신문이나 방송 보면 다 나와요. 독도는 우리 땅, 독도 지키기 위해서 기도하고, 자기 지역뿐만 아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김정은이 빨리 망하라고 기도하고, 굉장히 기도할 내용이 많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믿는 것은 뭐냐,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이 소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것이 말씀의 내용이라는 것을 그들은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은 뭔데?’ 그거야 마귀가 응답했지요. ‘우리 목사님은 기도응답이라고 하는데?’ 그 목사가 마귀의 앞잡이인데요. 그 사람들 창자 속에는 기도발이 꽉 들어 있어요. 그 사람들의 소장 대장 위장 안에, 간과 허파, 콩팥 안에. 기도의 능력이 꽉꽉 들어 있어요.
다른 말로 하면 저주가 가득가득 들어차 있는 거예요. 아예 변비가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그 사람 안에 저주가 차 있음을 어떻게 아느냐하면, 바른 십자가 복음 전하면 그렇게 인자하던 이마가 굳어져 버리고 그렇게 온순하고 겸손했던 그들의 마음이 갑자기 강퍅해집니다. 그동안 그들의 마음이 안 강퍅하고 이마가 안 굳어졌다고 느껴진 것은 아무도 그 사람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훌륭하십니다, 기도 열심히 하십니다, 여러분이 기드온 삼백용사입니다, 이런 식으로 했기 때문에 그들은 강퍅할 새도 없었고 자기 이마 만져 보지도 않아서 딱딱한지 아닌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거기에 말씀을 딱 던져보니까 그들의 강퍅함이 드러난 겁니다. 왜 그런가, 왜 그렇게 인간이 그렇게 되었는가? 성경에서는 모든 출발을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죽음의 자리, 죽음의 자리가 구원의 자리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본래의 자기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살까, 어떻게 하면 더 살까.
맨 날 기도 제목이 ‘죽여주옵소서.’가 아니라 ‘살려주옵소서.’ 내 아들 살려주옵시고 내 딸 살려주옵시고 내 남편 살려주옵시고, 맨 날 나오는 것이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채워서 백성들에게 보낸 것은 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그들이 진짜 놓치고 있는 본래 이스라엘이 출발해야 될 그 자리, 곧 죽음의 자리로 그들을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성경전체 내용은 네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개인의 죽음, 두 번째 집단의 죽음, 세 번째 예수님의 죽음, 네 번째 성도의 죽음, 성도의 죽음은 요한계시록 20장으로 끝나고 개인의 죽음은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됩니다.
개인의 죽음은 아담의 죽음으로 되었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죽음은 이스라엘의 죽음이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죽음이죠. 그 다음에 예수 믿는 성도의 죽음이죠. 성경은 이렇게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첫 번째 죽음은 창세기 5장에 보면 죽었더라, 죽었더라, 연속되잖아요. 누가 누굴 낳고 ……, 죽었더라, ……죽었더라, 연속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죽음은 그냥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 정도지요. 민수기 같은 데 보면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는 돌로 쳐 죽여라’ 그리고 ‘혹시 집안에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말을 안 듣거든 동네 어른들이 가서 그 아들을 돌로 쳐서 죽여 버려라.’
거기에 나오는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 와서는 그 죽음은 진짜 저주받는 죽음,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그 이전에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하거든요.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할 때는 개인의 목숨 끊어지는 죽음이 아니고 이스라엘 집단 자체가 저주를 받아 멸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숨 끊어지는 것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당하고 저주받는데 그들이 저주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는 저주케 하는 기능과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모든 성경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요.
다시 말해서 말씀에는 말씀에 위배되는 것은 필히 저주한다, 라는 것을 알리겠다는 취지가 우리의 구원보다 더 시급한 문제로서 대두되고 있어요. 에스겔 속에, 에스겔 창자 속에 말씀을 집어넣었다는 말이지요. 집어넣었을 때 에스겔에게 사나 죽느냐, 하는 문제는 에스겔에게는 문제꺼리도 안돼요.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고. 네가 속해있는 이스라엘 백성, 유다백성들이 왜 저주받고 왜 멸망 받는가? 그것은 이미 말씀을 받을 때 말씀 안에 내장되어 있는 속성 자체가 저주를 유발케 하는 말씀이다, 라는 것을 증거 하라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백성들을 완악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은 완악해야 되고 에스겔 속에는 말씀이 꽉 차야 되고, 꽉 말씀이 들어찬 에스겔과 완악한 백성들과의 만남에서 뭐가 튀어나오는가하면, ‘야, 말씀은 저주를 유발하는구나.’ 그것을 만개시키고 폭발시켜서 알려주고 온 천하, 온 우주에 폭로시키는 그 역할, 그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입니다. 거기에는 개인구원이나 집단구원 자체도 성립될 수가 없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 유다나라는 아담의 죄를 반드시 풍부하게 지니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장기적으로 계속 밑바닥에 끌고 가는 지속적인 것이 있어요. 그것을 장기지속이라, 브로델이라는 역사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장기지속이라 해서 변동 없이 가는 것이 있고 그 위에 뭐가 있느냐, 순간순간 섬광일 듯이 톡톡 일어나는 단기간의 사건들이 있어요. 홍해가 갈라졌다든지 여리고성이 무너졌다든지 오병이어를 행한다든지 하는 단기적인 사건들이 있어요. 그 단기적인 사건들은 장기지속, 계속해서 밑에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는 원래의 하나님의 취지를 그때 필요에 따라서 반짝 반짝 보여주는 겁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했습니다만 예수님 태어나던 그 때에 베들레헴 빈들에서 목동이 양떼를 치는 중에 갑자기 환한 빛이 비치면서 천사가 나타났잖아요. 그것을 보면서 우리를 생각합니다. 나도 그런 조명발 좀 비춰주면 얼마나 좋겠나, 나도 그런 일 좀 만나면 잘 믿을 것인데, 그렇게 하잖아요. 그게 뭐냐, 장기지속, 밑에 꾸준히 지속되는 그거에 몸 닿지 않고 아주 얄팍하게 윗동네에서만 몸을 담그려고 해요. 만약에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 같으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몸 아픈데 낫게 해주지도 않고 그냥 죽여 버려요. 죽고 난 뒤에 다시 한 나흘 만에 태어나는 것, 이것은 어떻습니까? 한 번 죽어보시고 한 나흘 만에 다시 살아 보렵니까? 천국 갔다가 다시 이 땅,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 볼래요? 군에 갔다가 제대하고 다시 군 생활 해보렵니까?
아찔하지요, 아찔하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이것은 또 어때요? 날 때부터 소경된 것 한 번 해보시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그래서 실로암 물가에서 진흙 발라서 눈 한 번 떠 보고, 그 다음에 유대인한테 끌려가서 욕 얻어먹고, 그거 한 번 해 보시렵니까? 그러면 이것은 어때요? 38년 동안 병자 되는 것, 1972년도부터 2천 몇 년도까지 누워서 지내는 것. TV에 보니까 류머티스 관절염 걸린 사람이 있어요. 27살 때부터 65세까지 계속 아프고 있어요. 계산을 해보니 거의 38년 된 병자에요. 그거 한 번 해 보시렵니까?
저주라는 것이 표면에서 반짝거리는 그것이 저주가 아니에요. 그 장기지속, 꾸준히 이어가는 그 원래의 자리, 우리가 원래 저주받아야 될 자, 아담의 저주 안에서 저주받아야 될 자라는 것을 모르면 그 사람은 병자 되나 안 되나 잘 먹고 잘 사나 상관없이 지금 저주받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유다백성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최고의 발견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저주받는 자구나, 라는 것을 아주 지독하고 아주 혹독하게 느껴져야 됩니다.
무슨 혹독한 사건을 벌여야 되는 것이 아니고 장기적으로 끌고 가는 그것에 우리가 발을 담그면 돼요.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그 발을 담그는 것은……, 잠언서 8장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이 어려워져버렸는데요, 잠언서 8장 35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 기본적인, 우리 밑바닥에 있는, 역사를 끌고 가고 인간사를 다 끌고 가는 이 중요한 원칙에 발을 담근 사람은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게 되어 있어요.
꼭 병이 들고 류머티스 관절염 같은 것 안 걸려도 그냥 설거지 하더라도, 안 그러면 그냥 버스타고 가면서 생각하면서도, 말씀이 꽉꽉 차 있으면요, 이 잠언서 8장도 말씀 속에 함께 들어 있잖아요, 말씀이 꽉 차 있으면 그 말씀이 우리한테 내 뿜는 것은 뭐냐, 잘 먹고 잘 살고, 인생성공이니 실패니, 사업실패고 성공이고 상관없이 예수님 잃어버리면 그것은 저주라는 것이 문득문득 마음에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떠오르는 것은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살면서 만나고 있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너 지금 저주받고 있어, 이 사람아.’라는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성령 주셔서 활용하시는 거예요.
에스겔 창자 속에 하나님의 말씀 들었다, 이 말은 대단한 것 같지만 성령이 임해버리면 창자 정도가 아니라 양동이로 먹물 치듯이 아예 우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왈칵 하나님의 말씀이 부어지는 거예요. 에스겔 말씀이야 아직까지 미완성이지만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것이 십자가 그대로 우리에게 덮쳐 버리면 우리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우리는 살아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식입니다. 이것이 말씀 채우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식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사람이 세상에 누구를 부러워하겠습니까?
세상 모든 범죄는 누구를 부러워하기 때문에 범죄가 일어나요. 술 먹고 행패부리는 주폭도 그렇고 마누라 늦게 왔다고 죽여서 매장하는 그것도 마찬가지고. 이 말은 뭐냐, 왜 다른 가정 마누라는 일찍 들어오는데 우리 가정의 당신은 늦게 들어오는가,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저쪽이 부럽다는 거예요. 저쪽이 부럽고 현재 내 형편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거예요. 줄 담배 피우고 술 먹고,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대부분, 거의 백퍼센트 가까이 내 인생이 불만스럽다는 거예요. 왜 오붓한 가정을 꾸리지 못하는가, 그런 것. 전에 한국투포환 여자대표선수였던 그 사람이 나이 서른셋인데 자기용모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남자들한테 사기를 쳐서 2천5백만 원 빼냈다가 이번에 구속되었어요.
그런데 만약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면 이 정도 생겨도 구원받으면 되잖아, 그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나 구원하려고 준 게 아니고 예수님 없는 자는 저주다, 라는 말을 진짜 신나게, 살아생전에 원 없이 한 번 외쳐보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양동이로 뒤집어씌우듯이 준 거예요. 부럽기는 뭐가 부러운데요? 부럽다는 것은 곧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뭔가 부러운 것이 있다는 것은 시기, 질투, 미움, 그런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는 그런 뜻입니다. 목회자가 목회 성공하면 이미 그것은 구원은 물 건너 간사람 같아요.
예수 그리스도만 있으면 좋습니다, 라고 할 때에……, 그 말씀이 9절에 나옵니다.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내가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한 그 부러운 사람들이 사실은 저주를 듬뿍 지고 그뿐만이 아니고 매일같이 저주를 택배로 담고 또 담고 계속해서 퍼 담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넓은 아파트에 고급차에 그렇게 호화롭게 사는 그 모든 것, 고관대작처럼 사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점점 더 복음을 못 듣게 하는 함정이라는 것, 갈수록 점점 함정에 빠지는 거예요.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점점 더 지옥의 함정이 더욱 더욱 옭아매는 겁니다. 숨도 못쉬게 만들어요. 산다는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겁니다. 왜 예수님 빼놓고 복음 빼버리고 말씀 다 제켜놓아 버리고 우리끼리 오붓하게, 우리끼리 오붓하게! 저는 그래서 가족사진이 싫어요.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안보이거든요. 그런다고 해서 또 뒤에 예수님 계신 것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는데 그것도 또 별난 이벤트니 그럴 필요도 없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죽음에서 비로소 생명이 나오고 살고자 하는 자는 생명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아담이 죽었을 때 저주받았습니까? 아담을 죽임으로써 아담을 살려내시는 하나님, 노아로 하여금 방주 안에 들어가서 방주와 함께 심판받게 함으로써 심판 안에 있어 봤기에 비로소 ‘아, 무지개가 그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깨닫게 하고 아브라함이 자식을 못 낳아봐야 ‘아, 약속의 자식은 내 손으로 낳는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래서 아낌없이 하나님께 자식을 번제로 바쳤잖아요.
야곱, 야곱이 자기 힘으로 복 받는다 하지만 자기 아들 요셉이 꿈을 꿈으로서 비로소 야곱의 언약이 이루어진다는 것, 그것은 내가 나를 살려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다 보니까 파생된 결과로서 우리가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예수님의 부분으로서 우리는 영생의 나라에 간다는 사실, 그런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 그런 관계가 예수님과 나의 관계라는 사실을 에스겔뿐만 아니고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도 세상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말고 자유롭게 원 없이 외쳐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부러운 것이 생길 때 곧 죄가 시작된다는 낌새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어야 되고 예수님이 생명인 것을 머리로는 잘 안다고 우기지만 온 몸으로 체험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