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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20907a 울산강의-출애굽기 24장 : 해답과 질문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20907a 울산강의-출애굽기 24장 : 해답과 질문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0907a 울산강의-출애굽기 24장 : 해답과 질문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24장 1절에 보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이렇게 돼있지요. 여기 “여호와에게로 올라와”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 사태가 따져보면 수평적이죠. 산에 올라가 봤자 산 자체가 나름대로 수평이잖아요. 산이 있다면 산에 기어 올라가면 이 자체로 보면 수평이잖아요. 올라가봐야 계속 수평이잖아요.

성경에서 위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무리 높은데 해봐야 항상 2차원으로 만들 수 있거든요. 3차원도 따지고 보면 2차원의 연속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올라오라? 하나님이 어디 있는데 올라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저 인간들과 인간들이 수평을 이루는 곳이죠.

만약에 아파트가 있다면, 아파트가 우리 보기에는 높아 보이지만 막상 올라가면 이 자체가 전부다 수평이란 말이죠. 이 밑에서는 올라가는 게 되지만 막상 올라가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냥 나란하죠. 아파트 9층에 올라가선 한 집에서 마주보잖아요. 수평 아닙니까. 수평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간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그래서 옛날에는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거예요. 어떤 장소가 있으면, 인류문화에 보면 그런 게 나와요. 신성한 곳을 성소라 하는데, 신성한 곳이 고도가 높은 게 아니고 같은 수평이 되는 겁니다.

AD6세기 경 마야문명이 있는데, 마야문명에도 피라미드가 있어요. 피라미드에 처녀나 아기를 산 채로 신에게 바쳤습니다. 바친 이유가 가뭄 때문에. 지형상 편서풍 때문에 가뭄이 많아요. 그래서 바쳐야 공양을 해야 비 좀 줘서 신의 뜻으로 옥수수가 잘 됐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곡식 중에서 밀을 키우느냐, 옥수수를 키우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밀을 키우면 정성을 다해서 자기 집 정원을 가꾸듯이 신경을 많이 써야 됩니다. 그래서 밀을 키우는 데는 종교가 발달하지 않아요. 그런데 옥수수는 정성들입니까? 그냥 간격대로 뿌려놓으면 알아서 자라잖아요. 그러면 나머지 시간에는 뭐할 겁니까? 나머지 시간은 신에게 제사한다든지, 고기를 키운다든지, 딴 짓 하겠지요. 시조를 읊는다든지, 민요를 하든지, 판소리를 하든지 하겠지요. 종교가 그만큼 발달할 여지가 많은 겁니다.

예수님 태어난 시기가 고구려 건국 2년 후라고 보면 돼요. 그 시대에 고인돌 알지요. 고인돌이 장례풍습인데요. 그나마 지면에서 약간 뜨게 만들어서 육은 땅에 묻혀도 영혼은 땅과 격리된 높은 세계에 영혼이 들어간다고 그런 식으로 티를 내고 싶어서 고인돌이라는 유전을 만들었단 말이죠. 하지만 올라가봐야 몇 센티 되겠어요? 얼마 안 되거든요. 무거운 걸 어떻게 들겠습니까? 고인돌 제작방법을 제가 본 적도 있어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모든 종교라는 것은 어떤 수평적인 지점인데 특정 지점을 거룩하다고 해놓고 그 다음에 여기에 울타리를 쳐놓고 여기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거룩함과 세속을 수평적으로 울타리로 분리시키는 방법으로 신이 계신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상식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출애굽기 24장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올라오라고 한 거예요. 이제부터 중요한 합니다. 과연 올라오라가 성사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 올라오라 했을 때 올라 갈 수 있습니까? 못 올라가죠. “얘들아 나 있는 곳에 너희가 올라오라” 해도 우리가 갈 수가 없습니다. 왜? 너무 무섭기 때문에 접근이 안 돼요. 그리고 하나님도 그걸 아시고. 모세만 올라오고 나머지는 대기상태에 돌입하고 마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쉬운 거예요. 제가 구분해볼게요. 성령을 받아서 믿는 것과 납득이 되어서 믿는 것이 성경적으로 원래 차이가 나게 돼있죠. 성경에서 분명히 차이가 난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우리는 성령 안 받아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 식으로 믿고 싶어 해요. 성령 없어도 신으로부터 어떤 영을 안 받아도 우리가 따져서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한다고,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너는 못 올라온다는 거예요. 나 있는 곳에 못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데 너희들은 나 있는 곳에 올라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못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못 올라가는 상태에서 이 사람들은 성령을 못 받아서 납득이 되는 식으로 믿으니까 올라가지는 못 하지만 올라가는 시늉은 하겠지요. 이게 바로 종교라는 거예요.

실제로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아마 어디 계시겠지 하고 납득을 한다니까. 스스로 그걸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니까요. 이것은 성령을 받은 거예요? 성령 받은 게 아니에요.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식으로 하나님과 연결시켜보려고 애를 쓰는 게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간단한 문제입니다. 뭐냐 하면, “종교적으로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지?” “예.” 그렇다면 못 올라온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인간이 들으면 인간 입장에서는 답답한 게 이래도 못 올라오고, 저래도 못 올라오고 어차피 못 올라가는 건 마찬가지에요. 납득이 되는 것은 엉터리 종교라고 그런 것은 안 믿겠다고 가만있어도 하나님 못 만나는 건 마찬가지고. 내 쪽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뭔가 만들어서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하나님 교회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도 하나님 못 만나기는 마찬가지고. 둘 다 아무 소용없는 것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방식은 뭐냐 하면, 여기서 뭘 내세우느냐? 중개인, 중매인. 같은 뜻이라 봅시다. 이 사람을 내세웁니다. 그럼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걸 정리하면, 결국 중개인과 중매인이 하는 역할이 뭐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께 접근을 못 하는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너 혼자는 나한테 올라와.”라고 허락받은 사람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중개인이 되어서 다시 어디로 내려가죠? 지금 하나님 못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 틈 속에 그 사람이 와서 섞여버리면 그 사람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겁니까? 하나의 본드죠. 못 만난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를 뭔가 엮으려고 하는 하나님 쪽의 새로운 시도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상식적인 이야기를 할 테니까 이건 성령 안 받아도 되는 이야기니까 들어보세요. 15, 16세기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처음 발생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로 나누겠습니다. 시장경제가 자본주의가 차이가 나요. 일반사람들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구분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마켓, 시장중심으로 무역과 교환이 이뤄짐으로 경제가 발달하는 그것이 결국 자본주의가 되는 겁니다.

이게 세밀하게 하면 구분이 돼요.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를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 있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고기를 잡았다 합시다. 저쪽에서는 밭에서 채소를 키웠다. 고기는 많이 잡았어요. 이걸 잉여 또는 잉여생산물이라 합니다. 내가 먹을 만큼 이상으로 많이 잡았어요. 놔두면 썩잖아요. 저쪽에선 밀을 키우는데 자기 식구가 먹을 만큼 이상으로 더 많이 키웠어요. 이걸 어떻게 처치할까요? 얘는 간 고등어 먹고 싶다 하고, 이쪽은 빵 먹으면 좋겠다고 할 때 방법은 하나밖에 없죠. 만나야죠.

서로가 만날 때 이미 전통적으로 쌀 한 부대에 고등어 세 마리라고 정해져있어요. 만나는 장소가 시장이 되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물물교환이 되겠지만 나중에는 화폐로 바뀌어서 구매자와 생산자가 같이 만나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시장경제라는 겁니다. 이건 어렵지 않죠.

자본주의가 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밀가루부대 들고 가기 전에 먼저 아저씨가 그 마을에 방문해요. 여기 밀 농사했지요? 요새는 고추. “고추농사 많이 했지요. 고추를 나한테 파소.” “당신한테 뭐 있는데?” “고등어 있어, 오징어 있어, 뭐 있어?” “저는 현찰이 많습니다.” 현찰이 많을 것 같으면 구태여 고추 사 들고, 밀가루 사 들고 갈 이유가 없잖아요. 무거운 배추 사 들고 갈 필요 없단 말이죠. “배추 밭떼기로 미리 파소. 현찰 줄 테니까.” 그러면 이 사람은 상인한테 배추, 고추 다 팔았지요.

그 다음에 저쪽 상인이 어부한테 가서 비린내 나고 운반하기 힘든데 나한테 파소. 그러면 원래 시장에서 100을 받아야 될 고등어를 현찰박치기로 80 받으면 팔 수 있단 말이죠. 원래 100을 받아야 될 배추를 50 받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50에 산 상인과 80에 산 상인과 둘이 만나서 100으로 바꾸면, 각각 20과 50이 남지요. 이게 자본주의에요. 결국 돈 놓고 돈 먹기가 되는 거예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 놈이 번다고 이게 자본주의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배추 사고, 어부한테 고등어 사지요. 이걸 상업자본주의라 하거든요. 더 발달되면 금융자본주의가 돼버리면, “배추 농사하는데 일꾼 필요하죠. 일꾼 삯을 내가 줄 테니까” 하고 노동자까지 고용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 시장이 형성돼버리면 이것은 제품 자체를 쓰는 것이 아니고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를 사게 돼요. 이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중개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강의하면서 하나님과 인간 만남에 중개인이 있다 했지요. 자본주의 발달에서 중개인이 들어가죠. 여기서부터 중요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중개인이 들어가면 중개인이 알고 있는 것을 농부나 어부가 그 검은 속셈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그러니까 자본주의에서 중개인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악인, 부정정인 존재가 돼요. 그리고 이쪽의 농부나 어부도 장사하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아무도 모릅니다. “남는 것 없습니다.” 이러거든요. 남는 게 없으면 장사를 왜 합니까?

이게 결국 농부는 자기가 피땀 흘린 배추에 관심 있고, 어부는 폭풍을 무릅쓰고 잡은 고등어에 관심 있다면 중개인은 어디에 관심 있겠어요? 바다도 관심 없고, 배추밭도 관심 없고, 무엇에 관심 있겠습니까? 돈이죠. 그걸 두 자로 늘이면 자본. 그래서 자본주의. 애매한 것 확실히 했습니다. 자본주의란 결국은 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모든 노동의 현장을 돈 될까요, 안 될까요? 그런 가치관으로 탈색/변색 시키는 그래서 모든 것이 자본가 중심으로 시장을 재편성할 때 그게 자본주의라는 겁니다.

15세기, 16세기부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된 증권거래소가 전 세계 곳곳에 있어서 어음을 미리 결제한다든지, 새로운 화폐의 통화량을 조절해서 저희들끼리 돈 놓고 돈 먹는 그걸 노리는, 환율 차이를 노리는 또 다른 중개인이 또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결국 중개인 천지가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면 농사지면 못 살겠네 하는데 농사를 짓되 자기가 애 쓴 만큼 돈 번다고 하면 그건 돈 못 벌어요. 이걸 사용가치라 합니다. 농사를 그렇게 지어서 돈 못 벌고 교환가치로서. 내가 만들어놓고 창고 집어넣고 나중에 값 오르면 파는 자기 나름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스스로 자본가 행세를 할 수 있어야, 그런 안목이 있어야 돈을 버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학원을 한다. 애들 잘 가르치면 되지. 그것은 학원이 하나밖에 없을 때는 통하죠. 잘 가르치는 노동의 대가로. 그런데 잘 가르치는 학원이 옆에 수십 개 생기면 잘 가르친다는 자기의 애씀의 가치를 내세워서는 학원 운영이 안 되죠. 그러면 뭐 해야 됩니까? “저쪽 학원은 질이 나쁘더라. 저쪽 학원은 진학을 못 시키더라.” 하고 사기를 쳐야 자기 학원 얘들 안 빼앗기고 더 몰릴 수가 있죠.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기가 노동한 것이 아니고 항상 교환, 모든 아이들을 상품으로 모든 대상으로 돈으로 보는 그것이 바로 인간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자본주의를 형성시키는 중개인으로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목사도 예외는 없죠. 똑같죠. 사람들이 헌금을 낼 수 있는 설교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게 되겠죠.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정리해봅시다. 제가 강의한 게 그냥 한 게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거예요.

처음에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끼리 거룩한 장소와 속된 장소를 구분해놓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면 거룩하고 나가면 세속이라고 봤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무엇이 거룩한 겁니까? 중개인이 있는 곳이 거룩하다 했지요. 여호와에게 모세가 올라가잖아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중개인이 누구라 했습니까? 누가 중개해서 나한테 돈을 벌어주는 거예요? 중개인이 누구에요? 자기 자신 아니에요. 하나님을 빙자해서 우리를 키우면 되는 거예요. 뭐든지 내가 제일 중요하죠. 내가 중개인이니까.

내 인생의 중개인은 나인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다 하나님을 거론하고 예수님을 거론한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위한 게 아니고 결국은 누구를 위한 거다? 자본주의사회니까 나에게 돈을 주면 착한 신이고 나에게 돈을 빼앗아 가면 나쁜 신이 되고. 전부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시다바리가 되는 거고. 이게 뭐냐? 납득이 되는 거예요.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납득이 되는 하나님은 나에게 돈 벌어주는 좋으신 하나님일 경우에만 납득이 되고 그래야 교회가 부흥되는 겁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이야기하세요.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바로 그 교회를 위해서 오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을 만들어내는 중심에 서있으니까 중심에 서있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시다바리 역할을, 보조역할을 나한테 듬뿍해달라는 거예요. 해주면 지분의 얼마 떼어 헌금할 용의가 돼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로 올라간다는 것이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올라가면 골치 아파. 안 올라가도 복 받으면 되잖아요. 올라갈 필요 없는 것. 그런데 오늘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올라오라 했죠. 이것은 뭐냐? 지상에 깔아놓은 우리의 모든 터전을 포기하라는 거죠. 하나의 위기죠.

결국 성경이란 성령 없으면 해석이 안 되는 것을 보여줘요. 성령 없이 해석을 해버리면 성경의 어떤 구절을 봐도 나 자신을 위해서 성경을 볼 수밖에 없는, 납득이 되는, 상식적인 그러한 종교생활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죠. 그때부터 모세만 하나님을 알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겁니다. 오늘 강의는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모세는 알고, 백성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앎과 모름의 마주침에서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는 거죠. 이점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하겠습니다.

적어볼게요. 모세는 안다. 하나님을 안다. 백성들은 모른다. 누구를? 하나님을 모른다. 모세가 안다 할 때는 위에서 내려오는 식으로 계시를 전하겠지요. 그런데 모르고 있는 백성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아래에서 올라가는 방식으로 하겠지요. 아래에서 올라가는 방식이 맞느냐? 이건 상식적이고 납득이 되는데 아니면 위에서 내려오는 게 맞느냐? 이 싸움을 출애굽기 24장에서 하게 되는 겁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안다고 나갈 때 스스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중개인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도 하나님에 대해서 압니다. 제가 상식적으로 알거든요. 이런 식으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죠. 그래서 헌금하고, 예배드리고,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면 하나님이 기쁜 쪽으로 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얼마든지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안다고 우기면서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막상 한들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그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은 전부다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르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부흥강사 특징은 간단하죠. “내가 하는 모든 짓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는 짓입니다.”라는 것을 알면 되겠지요. 말이 어렵습니까? 내가 하는 모든 짓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짓거리를 내가 내 몸을 통해서 벌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돼요. 그 인정한 사람은 자기 행한 것은 믿겠습니까, 자기 행한 것을 안 믿겠습니까? 믿는다? 안 믿는다? 안 믿죠. 그게 바로 믿음인 거예요. 믿음이란 자기 자신의 어떤 행동도 하나님께 도달될 게 없다는 그걸 믿는 거예요. 이걸 쉽게 이야기해서 갇혀있다고 하는데 갇혀있는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영광이 안 되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게 바로 성령을 받았기에 알 수 있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한 것도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중매인이 한 것만 받는다는 것. 우리에게 중보자가 계시잖아요. 그 중보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하나님은 예수님만 받아요. 심지어 모세도 하나님이 안 받아요. 왜냐하면 모세가 보고 온 것이 제한적이고 전부 다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변화산에서 보면 모세도 구원받았거든요.

모세가 하나님의 일부를 안다 할지라도 모세가 구원받은 것은 일부 안 것 때문에 구원받은 게 아니고 누구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죽으심의 공로로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도 똑같은 입장이에요.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안 통합니다. 하나님께 뇌물 줘보세요. 그 뇌물 안 받습니다. 어떤 재롱을 피워도 하나님이 기뻐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기뻐할 게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제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는 것,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예요. 참 쉽지요. 결국 제가 지금 강의한 걸 보면 중매인 싸움입니다. 누가 안다? 모른다? 이 싸움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만 달랑 구원하십니까? 그것 때문에 모세를 보낸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모세를 통해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냈잖아요. 백성들은 엉뚱한 짓하고 있는데요? 지금 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는데.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꼭 아는 체 해요. 송아지 섬겨놓고 이게 여호와라고 우긴다니까요. 예배당 지어놓고 여기서 예배드리면 복 받는다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헌금 해놓고 복 받는다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어요. 그게 복이 안 옵니다. 헌금한다고 복이 안 와요. 이건 제 손에 장을 지을게요.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할 때 했어요. 우리도 모르는 새에 너무 많은 행운들이 우리에게 붙었다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 우리가 중매인이니까. 내 행동으로 복 달라하는데 우리가 나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행운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에게 왔다가 가고, 왔다가 가고, 매일같이 우리를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착해서 그런 복을 받는 거예요? 거저 받는 겁니까? 거저 받지요.

제가 가락교회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어제 선선했거든요. 여러분, 가을 되면 우리가 기도해서 가을 됐습니까? 가을은 누가 되게 하신 거예요? 봄 다음에 여름, 여름 다음에 가을, 가을 다음에 겨울, 누가 되게 하는 겁니까? 우리가 몸부림치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주께서는 우리가 한 행동 보지도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가을 되게 하신 거예요. 우리는 그냥 혜택을 입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재롱 부려서 복을 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아까 민중이가 포도 먹었지요. 민중이가 포도 먹을 짓을 한 게 있어요? 오줌 싼다고 해서 포도 안 먹입니까? 오줌 싸는 놈은 먹을 자격도 없어 하고 안 먹입니까? 이것은 엄마 마음이지 애가 엄마에 대해서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아무 상관이 없다니까요. 네가 엄마로 부르던, 아줌마로 부르던 관계없이 나에게는 무조건 내 아들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걸 언제 알아요? 그걸 알 때 어머니는 흐뭇한 거예요. 니 노는 레벨과 하나님이 노는 레벨이 달라요. 우리는 개뿔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우리 인간들 레벨로 낮춰놓고 하나님을 주물럭거리고 있단 말입니다. 값없이 그냥 주고 있는데 우리는 값을 치러야 자기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대인 관계하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이 떠오르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원하는 내가 기대하는 그런 모습으로 힘주어서 내가 원하는 나를 자꾸 살려내고 싶은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느냐? 그것은 관심이 없어요. 내가 기쁘면 그만이야. 내가 기쁘고,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즐기고 싶고 그거면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안중에 없어요. 무조건 내가 교회 갔으면 하나님은 무조건 복 줘야 되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한 대로 주께서 응답해야 되고. 이것은 내가 할렐루야야. 하나님은 시다바리, 종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그 이야기를 안 했어요. 모세가 하나님을 알았다. “모세, 너 혼자 구원받으면 그만이겠네.” 모세를 보낸 것은 백성들을 구원시키려는 것인데 백성들은 모르고 있어요. 모르고 있는 인간들에게 모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 것이냐? 이 문제가 남아있어요. 이 문제를 지금부터 이야기해드릴게요. 모세 혼자 알고 백성들은 모르고, 모르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하느냐?

제가 물어볼게요. 성공 비결을 알면 성공됩니까? 누가 이렇게 하니까 성공했다. 어떤 학생은 하루에 다섯 시간 자고 공부했더니만 서울대학 들어갔다. 그게 성공비결이에요. 나는 공부하는 게 제일 쉬웠어요. 그래서 서울대학 들어갔다고 합시다. 성공비결을 알면 성공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사흘 만에 부활했죠. 그것 알면 부활합니까? 이게 선교단체의 약점이에요. 이건 치명적인 거예요.

어떤 방법을 알면 그 방법이 나와 엮여진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우깁니다. 주님이 하는 방법은 주님에게만 엮여져요. 우리와는 안 엮여집니다. 산상설교요? 예수님만 이룰 수 있어요. 우리는 그것 알아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예수님만 구원받으면 안 되니까 우리도 구원받아야 되니까 구원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그 문제까지 진척이 돼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문제없이 해답만 있다고 그것이 해답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수학 주관식 시험 치는데 3번, 8이라고 적었어요. 선생님이, “어떻게 해서 8이 나왔어?” “무조건 8입니다.” “어떻게 푸니까 8이 나온 거야. 전개과정을 보자니까.” “저는 믿습니다. 무조건 8이라는 걸.” “예수님 어떻게 됐어?”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데?” “믿습니다. 예수님 죽은 것을.” 거기다 보태서 “우리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죄 때문에 죽은 걸 믿습니다.” “네 죄가 뭔데?” “모르겠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어서 구원한다고 해놓고는 그러면 당신 죄가 뭔데? 하니까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 평소에 죄 진 게 없거든. 어릴 때 오줌 싼 게 죄라면 죄에 포함되겠지만. 구체적으로 죄 진 게 없다니까요. 그러면 죄 지으러 가야 됩니까? 사창가로. 문제가 없으면 해답이 없거든요. 하나님이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해답은 만들어졌는데 문제가 안 만들어진 거예요. 우리 죄를 위해서 메시아가 죽었다는 게 해답이잖아요. 그러면 문제는 뭡니까? 아직도 이 사람들은 자기가 의인 행세한다는 거예요. 문제가 있을 때 해답이 아귀가 맞는 거예요. 그러면 모세의 율법이 하는 일은 뭡니까?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겁니다. 같이 끌고 다니면서. 구약 쉽지요. 이제 구약 풀렸지요.

중개인이, 이 세상에서 수평이라. 인간에게 오른다는 게 없어요. 인간은 태산은 높다하되 못 오를리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로 올라오라. 등산하는 사람만 올라갈 수 있습니까? 나에게로 올라오라고 해놓고 너는 올라오지 말라고 해서 결국 하나님 만나는 것이 하나님은 올라가도 못 만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못 만나는 하나님은 질색이라. 싫어요. 가인의 제사가 그런 거예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드렸잖아요. 하나님께서 응답을 안 했지요. 그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원하는 하나님이 나는 되기 싫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납득이 되고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식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모르는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해서 내가 보낸 중개인이 또는 중보자가 너희들이 중매를 납득이 안 되는 식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너희들에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그 방법이 뭐냐 하면, 해답은 이미 갖고 있는데 문제가 안 만들어졌어요.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우리 죄가 피로 인하여 깨끗하게 용서받는 게 해답이잖아요. 문제가 뭐냐 하면, 어느 누구도 자기를 죄인으로 간주 안 하고 있다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어느 누구도 자기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 안 하고 있는 상태에 있어. 남의 집구석은 망해도 우리 집구석은 잘 돼야 돼. 왜? 나는 망할 정도로 죄인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꼼수를 써요. “하나님이여, 저는 망해도 싸고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한 것을 알고 있으니까 다시는 저한테 저주 안 떨어지겠지요?” 아주 놀고 있어요. 온갖 가진 수단 다 부리는데 그것 주님한테 안 통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수직적으로 올라오는 것을 수평적으로 나란히 했을 때는 오늘 제일 중요한 부분 나왔습니다. 아까 올라오라 했을 때 수직적으로 못 올라오죠. 못 올라오는 것을 나란히 수평적으로 옆에 있으면 갈 수 있다고 되겠지요. 나란히 있게 되면 못 올라오는 게 아니고 죽음이 벽이 되어 가로막습니다. 그게 어린양의 죽음이에요. 어린양의 죽음은 어느 누구도 어린양과 같은 신세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주님의 사자에 의해서 저주받고 심판된다는 거예요. 심판받고 저주받는 인간이, “나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해서 살려주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성폭행했기 때문에 18년 선고한다. 피고가, “맞습니다. 저는 18년 감옥살이해도 마땅합니다.”라고 해서 18년 면제. 이렇게 해주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18년 다 살아야죠. “그래 알아요? 그럼 18년 박세게 살아봐. 너는 감형 없다. 네가 인정했으니까.”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우리에게는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건 없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될 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구원되는 거죠. 내 이름으로 구원되는 법은 성경 어디에도 없어요. 그리스도 소유가 되었다는 전제 하에 누구나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너무 구원, 천국에 기대하지 마시고 내 몸이 아직도 내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서 내가 그리스도의 소유냐? 그것이 관건입니다. 이 말하는데 너무 돌아왔어. 세월이 너무 길어요.

우리는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안 되는데 구원된다는 것은 사기꾼들이 하는 소리에요. 우리 것으로 구원 안 되고 주님의 것으로 전환될 때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데려가는 방식으로 우리는 구원되는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공들여서 햇빛 주시고, 공기 주셔서 키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아까 목사님 댁에 가니까 화초가 있어요. 사모님이 화초를 하나 샀는데 이 화초가 아주 천재적인 화초가 되어서 목사님이 공부하신다고 잊어버려서 물 안 줬을 때 화초가 줄기를 뻗어서 싱크대 물주고 크면 결국 이 화초는 누구 것이 되겠어요? 목사님의 것이 아니고 화초 본인이 것이 되겠지요.

우리가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보고 그것을 자기가 흉내 내서 자기가 행동을 만들어서 자기한테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자기한테 다 퍼붓고 있어요. 헌금할 헌금하고, 예배 참석할 때 예배 참석하고, 봉사할 때 봉사하고, 전도할 때 전도하고, 기도할 때 기도하고, 새벽기도에 나와서. 지가 자기에게 물주는 지가 자기를 키우는 화초가 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정말 화딱지 나는. 이걸 오늘날 교회에서는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안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세요. 없지요. 다 그 짓하고 있지요. 주께서 그 짓하도록 그렇게 허락하신 겁니다. 왜? 바로 그것이 주께서 기다렸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죄인인 티를 팍팍 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하고 싶은 대로 그냥 하시고 그냥 사세요. 주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괜히 꼼수로 자기 행동을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보이고 위장한다고 해서 주의 것 되는 것 아닙니다. 주의 것은 성령이 임할 때만 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에게 느끼는 느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자신의 피로 죄인을 용서했다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철저하게 죄인으로 본격적으로 만들어 가시는 작업을 지금 주께서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가 죄인의 괴수됨을 알게 되는 그 기쁨, 이게 바로 복음으로 인한 기쁨이에요. 이걸 오늘 출애굽기 24장에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의 계시, 율법으로 설명합니다. 이것만 설명하고 10분간 쉬도록 하겠습니다.

4절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이렇게 돼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그냥 위로 올라와. 위로 올라갔던 모세가 위에서 자기가 듣고 본 거예요. 위에서 본 것을 아래에 오게 되면 아래는 사람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고 왜 너는 어린양의 피, 어린양의 죽음, 피로만 용서가 되는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느냐를 이제는 말씀으로 두고두고 반복적으로 확인시키는 작업에 모세가 나서게 되는 겁니다.

모세가 중매인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중매인이에요? 모세입니다. 왜? 그는 하나님을 직접 봤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 모세보다 마음이 더 낮은 사람은 없다. 겸손이라는 게 부족합니다, 이게 겸손 아니고 하나님 보고 난 뒤에 이제는 내 인생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가는 인생인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겸손한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20907a 울산강의.hwp (49.5K), Dow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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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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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