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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에스겔 120910강의에스겔

에스겔 120910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한윤범(IP:14.♡.134.60)

12-09-15 22:01

201209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28-에스겔
(강의:이근호 목사)

에스겔 해봅시다. 여기 교재에 보면, 에스겔은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추방당한 자로서 예레미야와 여러 면으로 비교해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시작하지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에스겔 BC597년에 여호야긴과 추방되었다. 유다가 멸망하기 11년 전에 바벨론에 잡혀갔다고 돼있는데 이러한 역사적 상황으로 에스겔의 진면목을 알 수 없어요. 교재는 그렇게 돼있지만 에스겔 1장을 보게 되면,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오 일이라”

여호야긴이 잡혔다는 역사는 어디에 양보를 해야 되느냐 하면, 하늘이 열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이상, 기이한 현상을 보는 것에 대해서 그 내용을 양보해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어쨌다, 저쨌다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그걸 먼저 전제로 하고 내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을 뛰어넘는, 무색케 하는 새로운 환상이나 계시, 이것이 에스겔 강의의 초점이 돼야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같은 역사 선상에서 너는 그렇게 보고, 나는 이렇게 본다는 견해는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다 쓸데없는 거죠.

그래서 에스겔 전체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에스겔은 역사적 의미에서 제거당하는 존재에요. “두 발 그 땅에 떼!” 이런 식이란 말이죠. 실제로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의 권능이 임해서 에스겔 마치 크레인으로 끌려오는 것처럼 능력에 의해서 다른 장소로 홀연히 이동하는 그런 대목들도 나와요. 신기한 거죠. 마치 빌립 집사가 갑자기 광야에서 내시를 만나는 것처럼 그러한 기이한 현상이 에스겔에 벌써 나오는 겁니다.

에스겔 3장 12절에 보면,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그러니까 이건 “에스겔에 대해서 당신 어떻게 평가합니까?”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에스겔의 역사적이고 자신의 기대나 포부 이런 것들은 주님에 의해서 완전히 삭제당하는 인생, 그게 적절하죠. 그래서 에스겔처럼 산다는 것은 말씀 속에 있다면 내가 세상에서 날마다 제거돼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말씀이 중요하지 내가 이 세상에 어떤 특정 존재로 여기 있다는 것은 안 중요한 게 되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중요한 것은 말씀이 중요하고 나라는 존재가 나이가 얼마며, 지금 직장은 뭐며, 가족은 어떻게 되며, 이런 것은 이상스럽게 에스겔에게 말씀이 오면서 그런 것은 뭔가 희미하게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탈색하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락스로 빨래 때 빼듯이.

여기는 말씀으로 돼있지만 사실 따져보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적인 실존이라든지 이런 것은 생각할 여유조차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말씀이 중요하게 되면, 여기 에스겔 3장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만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생각 안 해버리면 그 다음에 사회에서 어떤 현상을 보이느냐 하면, 사람이 무섭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본인 자체가 제거대상이라면 자기 앞에 둘러싸인 얼쩡거리고 자기 앞에 밥 먹고 있고 운동하는 모든 사람들도 자기와 동일하게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제거될 대상에 불과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에스겔이 공연장에 갔는데 거기서 미스코리아 진선미를 뽑는다 할 때 에스겔에서 “저기 진선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거대상입니다.” 이렇게. 보통 사람 같으면, “이번엔 얼굴이 예쁘네요. 아주 똑똑하네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예쁘던, 똑똑하던 관계없이 제거대상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번에 대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굴 찍겠습니까?” “둘 다 제거대상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말씀 앞에서 제거대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으로 자기를 비춰보는 식으로 저쪽 사람들도 주변 사람들도 같이 비춰보면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으면 사회가 중요하지 않지요. 사회가 중요하지 않으면 국가도 중요하지 않지요. 그러면 중요한 건 뭐냐? 하나님의 언약인데 말씀 속에 된 하나님의 일관된 밀어붙이는 계획이 중요하죠.

에스겔에게 “당신은 목회 잘 했습니까?”라고 묻게 되면, 에스겔은 목회를 참 잘 했어요. 그러나 목회 잘한 사람은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에스겔이 목회를 참 했지만 목회 잘 한 사람은 존재는 아닌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행동, 동사죠.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이 움직였는데 동사가 뭉쳐져서 명사, 그러니까 에스겔이라는 훌륭한 목회자라는 명사를 낳는 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먼저 염두에 둬요. 나는 훌륭한 목회자가 되겠다고 염두에 두면, 여기서 나온 동사는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잘 되기 위한 수단으로서 목회 잘하기가 나와 버린 겁니다. 이걸 에스겔 내용에 보면 나옵니다. 그걸 ‘거짓 목자’라 해요. 삯꾼 목자지요. 돈을 밝히는 것만 삯꾼 목자가 아니라 “나는 삯꾼 목자 안 돼야지” 하는 그것도 삯꾼 목자에요. 거짓 선지자에요.

명사가 아니고 동사라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됩니다. 그걸 염두에 둬야 돼요. 매일같이 움직이는데 그 움직이는 취지는 뭐냐 하면, 나를 삭제해나가는. 뭐로? 말씀으로. 말씀만 있다는 게 아니고 그렇게 되면 말씀이 명사가 되잖아요. 말씀은 명사가 아니고 말씀은 움직이죠. 말씀의 움직임에 따라 가다보니까 내가 어느 정도냐,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냐? 그걸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아요. 그리고 용서해주지도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먼저 서론을 던지는 것은 에스겔을 할 때 하나님의 계획만 뽑아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에스겔은 의외로 쉬운 책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만. 에스겔은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느꼈을까? 그런 걸 따지면 그것은 에스겔에 관심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우수한 설교자, 우수한 목사 되고자 하는 명사로 자리 잡으려는 수상한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자체를 에스겔이 거부하고 배척해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짓 목사의 모습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좀 더 이야기해봅시다.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이 나간다면 쉬운 예를 굴을 파는 굴착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굴착기 예를 드는 이유가 있어요. 굴이 있는데 앞이 뾰족해서 돌아가는 무서운 기계인데 기계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굴을 파낸다고 합시다. 이 굴착기가 가는 곳에 안 파이는 곳이 없겠지요. 심지어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도 철광산이라도 이 굴착기로 다 파이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어떤 걸 드러내느냐 하면, 무엇이 세상을 파느냐? 세상을 파고 들어가는 게 무엇이냐? 이것 하나 하고, 이것만 알면 안 돼요. 파일 때 여기서 쪼개서 나오는 것이 어떤 것들이냐? 이 두 가지가 에스겔 전체 내용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철광석, 금광석 같은 이 세상을 파고 들어가면서 광부가 팔 때 드릴 때문에 쪼개진 파편들이 어떤 모양새냐 말이죠.

한 가지 예를 들면, 뜯겨져 나온 파편들을 보니까 오홀라, 오홀리바 이런 것 있잖아요. 이스라엘과 유다는 사실은 창녀였다. 그것은 말씀이 와서 쑤셔야 그게 나와요. 그리고 그 당시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왕들의 패역과 백성들의 완악함. 표현하기를 철판인 것처럼. 그래서 에스겔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솥에다 각종 것을 납이고 뭐고 다 녹여버린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솥에 집어넣고 유다나라를 모든 것을 녹여버릴 정도로 무서운 진노로 다 녹인다는 것도 나오고 그 가마솥조차도 녹아버리죠. 얼마나 불길이 셌으면. 나중에 솥이 녹이는 기능을 다하고 난 뒤에 남아있는 솥마저 불길에 물처럼 녹아져버리죠.

또 뜯겨져 나오는 예가 뭐냐 하면, 주변에 그렇게 유난을 떨면서 선진국이라 하면서 나를 의지하라고 큰소리쳤던 애굽, 암몬, 모압, 바벨론 전부다 멸망한다는 것, 그것도 뜯겨져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뜯어내는 파쇄기 역할을 하는 이게 뭐냐? 움직이는 성전으로서의 에스겔 1장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뭔가 움직여요. 보통 가구에 바퀴달린 가구 있잖아요. 피아노도 묵직하지만 잡아당기면 바퀴가 달려서 움직이거든요. 바퀴란 외부에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거기에 어떤 손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바퀴를 움직이는 사람의 모양새가 있어서 하나님의 신이 하나의 파쇄기를 만듭니다.

그러면 파쇄기에 해당되는 재료가 뭡니까? 벽돌입니까, 철입니까? 아니죠. 천사로 돼있고 그 기초는 단단하게 각자의 기능에 따라서 네 생물이라고 돼있습니다. 네 생물이 사면을 장식하면서 이것이 하나의 3D로 입체적인 모양새로 나타나죠. 성경해석에서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데 성경 말씀에서 입체로 나와 버리면 그 동안 수평으로 있던 것도 같이 입체가 돼버립니다.

제가 예를 들면, 구약성경 미가 4장을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이렇게 돼있지요.

지도와 실제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지도는 아무리 정교하게 잘 그려도 그게 2차원적이에요. 수평적이죠. 하나의 종이니까. 그런데 실제로 보면 윤곽이 3차원적이죠. 아까 읽은 미가 같은 경우에는 2차원적으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있고 주변나라와 구분이 되면서 이스라엘나라는 거룩한 공간으로 대변되고 주변의 나라는 속된, 더러운 우상을 섬기는 멸망 받을 나라가 되겠죠. 이렇게 2차원적으로 이스라엘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나눠집니다.

그걸 설명하면, 이스라엘한테는 거룩한 제사장이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있으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가 되죠. 거룩한 제사장 때문에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면,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제사장과 관계있는 모세언약 때문에 거룩하다면, 모세언약이 없고 제사장이 없는 나라는 자동적으로 뭐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안 거룩한 게 아니고 더러운 나라가 되는 거예요. 중립지역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성경적 안목에서는 상당히 난해한 거죠.

더럽다, 아주 더럽다, 약간 더럽다 우리는 이렇게 따지길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거룩 아니면 다 더러운 거예요. 이것은 나중에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고. 천국 있고, 지옥 있고, 천국도 지옥도 아닌 어중간한 것 있고. 이런 게 없어요. 연옥이란 게 없거든요. 양 있고 염소 있지 양도 아닌 것이 염소도 아닌 것이 그런 것 없단 말이죠. 우리는 없는데 자꾸 그 자리를 원하죠. “하나님, 나 믿음 없습니다. 너무 거룩하면 부담됩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안 믿겠다는 건 아니고.” 자꾸 회색지역, 중간지역을 찾아가는 경향이 있어요.

에스겔 선지자의 외침은 속히 포로 잡히도록 재촉하는 느낌이 있어요. 내 말을 안 믿게 돼있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너희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거룩과 먼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이야기하게 되면 그들이 관습, 관행적으로, 버릇처럼, 하루 일상이 버릇 아닙니까. 인간의 일상이 반복이니까 반복돼왔다는 그 질이 어떤 질인가를 새삼스럽게 밝히는 게 되기 때문에 그들이 온다면, 에스겔이 거기에 마주 선다면 에스겔은 마치 바바리맨 같아. 그 에스겔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잖아요. 가는 그 방법이 뭐냐? 바로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멸망시켜서 포로 잡아가는 그 방법이 되는 겁니다.

어떤 특정 행동 잘했다는 게 아니고 평소에 일상적인 삶, 생활, 사고방식 이것이 그들은 종합정리가 안 돼요. 그걸 에스겔을 보내셔서 정리해주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창녀다. “어이 창녀, 이빨 잘 닦아. 그러면 구원해줄게.” 이런 것 없잖아요. 창녀란 사고방식 자체가 더러운 남자를 헐떡이면서 욕정과 색정을 느끼면 더러운 남정네만 찾고 있단 말이죠. 생식기 큰 걸 찾는다고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이러한 점잖지 못한 용어로 설교한다는 것은 아마 그런 설교하면 앞에 있는 장로님부터, 권사님부터 일어나 다 나가버립니다. 나갈 때 에스겔은 뭘 하느냐 하면, 박수를 치는 거예요. 왜? 본인도 삭제당하니까. 본인도 지가 전하는 말씀에 의해서 붕 떠서 맨날 장애인이라. 장애인올림픽 나가야 돼. 땅에 붙었다가 잘라내고. 나라는 명사를 매일같이 잘라내고 말씀의 동사만 있는 입장에서 누구 눈치보고 할, 누구 눈치 본다는 것은 내가 명사로 구축하기, “나는 괜찮은 목사일까?” 구축하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훌륭한 목사일까? 하고 사람을 다루려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파쇄기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천사가 와서. 그럴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면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그들은 생각도 안 하고 평소대로 살아가면 그것이 더러운 거예요. 오늘도 더러운 일 해야지. 그래서 더러운 게 아니고 그냥 서로서로 웃으면서 계모임하고 평소대로 사는 거예요. 부산 오면 맨날 롯데야구하고.

그러니 새삼스럽게 뜯어고치라는 말이 아니고 뜯어고쳤다고 안 더러운 게 아니거든, 그게. 사람이 뜯어고친다는 말은 기준점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바빠서 게을러서 못했다. 나는 이렇게 될 수 있다” 하고 자기 자신의 모델을 설정할 때는 뜯어고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에스겔은 명사가 아니에요. 에스겔 자체가 동사기 때문에 뭔가 모델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본받을 생각하지 말고 네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 말처럼. 니 주제파악을 하라. 주체파악을 하라고 도와주는 거예요. 말씀을 줘서. 에스겔의 입장에서 이미 수평적으로 이스라엘과, 에스겔이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마지막 대목에 보면 땅 분배할 때 열셋으로 분배하면서 땅 하나는 제사장 땅으로 남겨둡니다.

이것이 지도처럼 구분되는 것이 하나님의 파쇄기가 입체로, 3D로 등장하게 되면, 아까 미가 이야기처럼 그 지형도 드디어 3D로 바뀌면서 수평적으로 어느 동네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느냐, 아래 있느냐? 수직적으로, 3D로, 말씀의 모양새가 입체로 달라지게 돼있습니다. 바꿔지게 돼있어요.

침멀리의 교재를 읽어보면, 초장부터 그는 역사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치중하는 것은 3D로 가지 못하고 지평선, 2D, 그냥 수평선, 2차원적으로 펼쳐서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를 면적으로 펼쳐서 예수님의 시대까지 이걸 끌고 가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2차원을 선으로 바꾸면 역사가 되겠죠. 역사에서 예언된 것이 예수님 시대에서 완성이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침멀리뿐만 아니고 모든 신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가는 겁니다. 신학자들이 그만큼 믿음이라는 건 없는 거예요.

믿음이 뭡니까? 그냥 납득되는 식으로 하는 거죠. 지난 주일오전설교에 납득되는 것과 성령 받은 것의 해석의 차이점이 뭐냐? 납득되는 것 이야기했고, 성령 받은 것 두 가지 이야기 다했어요. 이렇게 하시면 구원됩니다. 이건 납득이 돼요. 그런 식으로 납득이 되면 구원받은 나란 명사가 남아요. 그리고 천국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내 손에서 지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하고 자기만 치중하고 자기에만 몰두하는 그런 사람에게 성경의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가 왜 납득이 안 되겠습니까? 다 나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데. “여러분 예수 믿으세요. 여러분 좋으라고 한 소리입니다.” 그게 왜 납득이 안 되겠어요. 이해가 되지요. “저 사람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이렇게 하면 나는 구원받는구나. 아, 나 좋으라고 하는 소리이구나.” 성령은 그게 아니고 너를 잊고 예수님 생각만 하세요. 이건데 이게 어떻게 납득이 됩니까? 어떻게 나를 잊을 수 있어요. 이게 말이 안 되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특징이 뭡니까? 자기 생각을 할 여유를 주께서 허락을 안 한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지 생각했습니까? 그러면 자기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그냥 봤다, 느꼈다. 그런 거거든요. “어, 주님의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네.” 스데반 집사가 이야기했잖아요. 그리고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우리는 목격자라. 그리고 베드로후서에 보면, 우리는 그때 영광 중에 변화산에서 주님과 엘리야와 함께 있었던 걸 보았다. 또 사도 바울 같으면, 나는 다메섹에 내려가다가 주님을 만났지요. 그걸 교육을 시키는 게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은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요.

이게 자기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왜 그러냐 하면, 파쇄 하는 그 말씀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가 들어있거든요. 자기를 부인하라는 그런 상추쌈에 쌓여서 모든 말씀이 담겨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말씀을 해석하면 반드시 뭘 통과하게 돼 있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는 죄인의괴수라는 이걸 통과해서 말씀 해석이 바깥으로 나오게 돼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이 자기 부인이 안 된다면 그것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상태죠. 일반 무식한 할머니들이 여기서 반발하는 것도 있지만 목사들이 반발 더 심해. 신학교수는 더 심해.

에스겔 1장에 보게 되면, 역사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3D, 3차원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하늘이 열렸으며 하나님의 이상이 왔다. 자, 이걸 경험하라는 이야기에요? 아니면 이 경험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냥 내가 하나님께 이런 지시를 받았다는 거죠. 그렇다면 에스겔은 텅텅 비어있는 파이프 또는 대나무줄기 같은. 대나무줄기 불면 나팔처럼 울리잖아요. 그 나오는 소리는 불어준 분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악사가. 그러면 대나무가 하는 역할은 뭡니까? 그냥 바람을 통과한 역할이요.

물론 통과를 잘 해줘야지요. 통과할 때 손을 막아서 도레미파솔라시도 가락이 나오지만. 어쨌든 껍데기 아닙니까. 껍데기에 바람 통과하니까 소리가 나오더란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말씀을 본인이 통과한다는 것은 본인 자신이 그런 말씀을 가로막다가는 태풍에 쓰러지게 돼있죠. “어딜 감히 내 뜻을 가로막아.” 하고 아주 혼나게 돼있지요.

이런 송풍기 같은 역할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시작했단 말이죠. 이 바람은 누가 막습니까? 아무도 막질 못하죠. 에스겔도 못 막고, 유다도 못 막죠. 다만 에스겔, 유다나라의 축복이란 것은 바로 그들이 먼저 이런 바람을 알고 받았다는 사실, 받았고 하나님이 이런 뜻이란 걸 알았다는 그 사실만 해도 이미 새로운 언약에서 거룩한 백성입니다. 새로운 차원에서. 이것은 2D, 지평선, 수평적인 면이 아니라 수직적인 면, 평면적인 면이 아니라 입체적인 면에서 새로운 축복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으며 우리는 이미 땅에서 죽은 자요 우리는 땅을 보지 않고 위를 본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 있잖아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벌써 에스겔에서 입체적인 바람이 불었으니까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도 입체적으로 받아야 되는데 처음에 제자들이 성령을 못 받아서 그걸 입체로 받은 게 아니고 그냥 평면으로 받은 거예요. 역사만 생각해서 하는 말이, “예수님,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가 언제입니까?” 질문을 자기 자신을 평지 속에 존재하는 같은 평지의 일부로 보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 안에 역사라는 것으로 뭉쳐져서 자기를 조성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못 받아서 그렇지요. 나중에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바로 그 마지막 때라는 게 구약의 마지막 때, 아까 미가에 나오는 마지막 때 일어날 모든 상황이 벌써 주변에서 터지고 있는 거예요.

거듭나야지. 어떻게 거듭납니까? 그것 때문에 골몰할 이유가 없어요. 거듭날 방법을 찾기 위해서 니고데모는 그렇게 애가 탔지만 성령 받은 사람은 거듭남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나로 거듭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다시 만들어주면 그것이 거듭난다는 사실,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그걸 내가 만들려고 하니까 미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거듭나게 하려니까 환장할 지경이에요. 되지도 않아요. 자꾸 명사가 되고 말아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내가 구원받은 나를 만들려고 하니까 힘든데 내가 구원받은 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사람 되면 되거든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숙제가 아니고 내 책임이 아니고 주님의 책임이에요. 주님의 권한으로 성령이 와버리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직업도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자체가 완벽해요. 다 이루었다가 되는 거예요.

육신으로 우리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요. 빨래를 할 줄 알겠습니까? 난을 하나 키울 줄 알겠습니까? 설거지를 제대로 할 줄 압니까? 다 어설픈 것밖에 없지요. 점점 나이 들면 다 까먹어버리고. 우리 모임시간도 여섯 시던가, 일곱 시인가 그것도 까먹고. 어설프기 짝이 없지요. 요한복음 할 것은 로마서라 했다가, 마태복음이라 할 걸 누가복음이라 했다가, 성경도 엉터리로 이야기하고.

그게 육에 있을 때는 아무리 완벽해도 완벽이 안 되는데 성령이 임했으면 이미 다 이룬 게 돼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다 이룬 게 되면서 “주여, 주 앞에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아주 기쁨이 넘치는 항상 제거될 수 있는 만반의 마음 준비로 살아가는 거예요. 살랑살랑 존재의 가벼움 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지요. 그게 거듭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데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에스겔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란 바로 하나님의 천사 또는 하나님의 신이 이야기한 모든 것은 에스겔은 다 해냈습니다. 왜? 지는 텅텅 비어있는 대나무 통이니까. 뭘 했다, 안 했다 할 것도 없어요. 대나무 통이라고 하고 있으면 다 이룬 게 돼요. 뭘 통과했는데 뭘 통과했는지 모르겠어. 쓸려 내려갔는데 보니까 자기 마누라 쓸려 내려갔어. 바이바이. 울지도 않아.

에스겔 초반에 보면 에스겔이 390일 동안 누워있어요. 이건 북쪽 이스라엘을 위해서 누워있고, 40일 동안 유다를 위해서 누워있어요. 북쪽 이스라엘이란 여로보암부터 망할 때까지 390년이고, 남쪽 유다의 40이란 요시아의 종교개혁 있었잖아요. 그때부터 망할 때까지. 그러니까 유다가 요시아 종교개혁 이후에 40년 지나서 망했다는 말은, 유다나라 자체가 이미 2D, 평지의 계시 역할은 유다가 한꺼번에 다 보여주고 이걸 돌돌 말면 3D가 돼요. 입체가 되죠.

이걸 돌돌 말아서 바벨론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바벨론은 유다가 받았던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키우는 인큐베이터 역할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이방나라지만 바벨론을 진두지휘하고 모든 계획을 수립해서 그대로 지시 명령하는 것은 바로 유다나라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시거든요. 하지만 눈앞에 유다나라가 포로 잡혀서 마주치는 것은 늘 일상으로 대하는 것은 바벨론을 대하는 겁니다.

쉽게 하면 이런 거죠. “그렇게 바벨론 좋아하더니만 가보니 좋디? 너희들이 그렇게 스마트폰 좋아하고, 골프 치기 좋아하고, 세상 것 좋아하고, 교회부흥 좋아하고, 화려한 명품 좋아하고, 고급아파트나 차 좋아하고, 인기 좋아하고, 명예 얻고, 존경 얻고, 권력 얻고 하는데 니가 자본주의사회에서 흡입하니까 그게 좋아 그래?” “죽겠습니다.” “정말?”

그건 우리가 평소에 좋아했던 것이 하나님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한 게 아니고 멸망당할 바벨론처럼 나도 근사한 괜찮은 나, 가치 있는 나, 훌륭한 목회자 이것 하나 욕심이 되어서 결국 우리 사는 목적이 되어서 살아온 거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거리를 그냥 지식으로 그런 것 좋아하지 말라가 아니라 아예 그런 것들로 듬뿍 들어있는 인큐베이터에 집어 넣어버려요. 완전 진액 속에 헤엄치게 만들어요. 온 천지가 세상적 좋아하는 것에 풍덩 집어넣어 버려요. 네가 거기서 마음껏 그걸 탐하고 그것 못 가져서 설음 당해보고 그것 없어서 가정이 파탄 나고 이혼해보고 자식들 아버지 싫어하고 가출하는 자식 만들어보고 그렇게 하면서 인자는 머리 둘 것도 없구나 하는 말이 이제 무슨 의미인지를 자기를 부인하라는 게 무슨 뜻인지를 알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주위에 구경삼아 아줌마들 왔을 때 막 우는 기라. 예수님 안 됐다. 저 청년은 안 됐다고 하지만 주께서 뭐라 했습니까? 나 보고 울지 말고 네 딸내미, 니 집구석 보고 울어라. 지금 우리가 어디에 속했는지 분간도 못하고 있어요. 기적을 베풀어보라고요?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거기에 나오는 용어가 음란이죠. 에스겔에서 음란이란 말을 굉장히 많이 다루고 있어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내가 보여줄 기적은 죽음이다. 너희들에 의해서 죽었는데 살아난 거죠.

그러면 요나의 기적에서 요나를 누가 죽였습니까? 뱃사람이죠. “요나 당신 때문에 배가 뒤집어지려하니까 우린 살고 싶으니까 당신 하나님한테 버림 받아라.” 그래서 잠자는 요나를 집어던졌잖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래서 뱃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그게 뱃사람의 훌륭한 믿음이에요?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성전의 의미를 알았고 죽음이란 게 뭔지 안 거에요. 죽어봐야 죽음을 아는 거예요. 그냥 죽어야 지옥뿐이고. 진짜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죽였던 그 죽음에 성령을 통해서 참여해 본 사람만이 땡 잡은 사람이에요. 이것은 자살해서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예수님의 십자가 버림받음에 함께 참여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에 내가 죽었으니까 아니죠. 사도 바울이 그냥 죽으면 안 되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되는 거예요. 함께 죽어야 그게 요나가 경험했던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진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죽음으로 다룬다. 장차오실 메시아의 죽음의 시선에서 세상이란 것은 왜 존재해야 되고 세상의 일들은 일어나야 되는가? 그것은 모든 것이 예수님의 원수의 죽음과 관련돼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점에 있어서 에스겔도 역시 마찬가지로 어디에 동참하는가? 에스겔 본인이 원하지 않는 말씀에 제거당하는 죽음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거기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에스겔 1장에 보면 천사의 활동으로부터 나온다는 이야기. 그 안에는 물론 하나님의 힘이 천사 안에 있어요. 1장에 보면 천사들 설명돼있고, 내가 본즉 해서 뒤에 보면, 또 하나의 사람 손이 있어서 그걸 움직이고 나중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3장에 보면 나오죠. 3장 13절에 봅시다.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 곁에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주의 신이 나를 들어올려”

그렇다면 정리해봅시다. 1장에서 천사들이 활동하잖아요. 그러면 그냥 구경하면 안 됩니까? 박수나 치고 놀면 되지 천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신이 왜 꼭 임해야 되는가? 이건 뭐냐 하면, 에스겔이 제사장이고 에스겔을 부를 때 호칭이 ‘인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렇다면 일을 나눠서 이야기해요. 하나는 에스겔을 데리고 그 당시 유다나라에 말씀을 전하는 일도 하면서 동시에 에스겔 자신에게 뭔가 일을 집어넣는. 그러니까 곱창에다 순대 만들 때 집어넣잖아요. 일종에 에스겔이 곱창이에요. 창자에다 쑤셔 넣어요. 쑤셔 넣고 흔들어대고. 또 쑤셔 넣고 흔들어대고.

그러니까 에스겔은 결국 장차오실 예수님이 살아야 될 이 2D, 평지에서 세상에서 역사라는 인식 속에 살아야 될 인자의 모습인데 그 인자의 모습을 담는 것은 묵시에서 오는 거예요. 묵시적 존재가 결국 인간의 육신 속에 담기는 인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면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유다라는 개념 자체가 다윗언약 개념 자체가 두 개를 다 포함하고 있어요. 하나는 역사 속에서의 다윗언약과 그리고 3D, 수직적인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의 다윗언약의 개념이 다같이 나와야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보게 되면, 에스겔 37장 24절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여기 다윗이 나오네요. 다윗 죽은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역사적, 평지 입장에서. 다윗은 죽었다니까요. 내 종 예수 아니잖아요. 다윗이에요. 그러니까 역사적 평지 입장에서 보면 그때 죽었던 다윗이 다시 와야 돼요. 그것도 맞고. 그리고 다윗이라는 역사적 개념이란 틀 안에다가 낯설고 낯선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 담겨서 오게 된다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등장해야 된다 말이죠. 그는 누구냐? 여호와에요. 여호와가 왕이 되시고, 다윗도 되시고 그리고 목자도 되시고. 이것이 바로 인자되는 에스겔이 안고 있는 말씀의 파급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는 사도 바울은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냥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이죠. 그렇다면 그 사람의 존재는 분명히 눈에 보이는 밥 먹고 하니까 육체를 갖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육체를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이상한 소리를 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 옷은 내 몸에 안 맞는 옛, 헌 옷인데 현재 내 안에 있는 내용과 부합되려면 헌 옷을 더러워서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현재 내 몸의 본질과 그 옷이 딱 일치가 된다고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누구도 이야기하라는 겁니까? 성령 받은 우리가 해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맨날 고급 옷 찾지 말고 하늘나라 옷을 입는 것을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 입는 옷보다 더 고대해야 된다는 말이죠. 그게 내 본질에 부합되는 거예요. 만약에 세상 옷과 맞는다면 그 사람은 그 본질이 세속적인 경우에는 세상 옷이 맞지요. 그러나 본질이 하늘나라 속한 몸이라면 입을 옷은 세상적인 옷이 아니고 하늘에서 입혀주는 옷이 알맞은 거예요. 그러한 운명, 인생 그걸 에스겔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2-09-15 22:01

20120910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28-에스겔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첫째 시간에 수평적인 지면에서 수직적인 3D, 입체적인 쪽으로 말씀의 의미가 바뀌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했지요. 용어, 성경해석, 개념에 대해서 역사로 해석해야 될 것과 묵시로 해야 될 것 두 개가 같이 나와야 된다는 거죠. 그것은 장차오실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뱉는 모든 언어나 용어에 두 개의 이중성이 다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묵시로만 이야기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 개념을 쓴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요.

그걸 신약성경 사도 바울 편지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역사와 묵시를 다 이야기할 때 이것을 예수님께서 다 이야기해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 같은 게 있잖아요. 그걸 역사적으로도 해석해야 되고 묵시적으로도 두 개 다 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했을 때 역사에서 죄가 나오고 묵시에서는 의가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정리를 했죠.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에게 전부다 죄 아래 있다고 해서 죄 아래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우리는 죄에 갇혀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사도 바울의 모든 용어 자체가 아래 있고, 갇혀있다고 해서 갇혀 놓으려면 가둬놓는 세력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가둬놓는 세력은 갇혀있는 게 역사이기 때문에 가둬놓는 것이 역사일 수는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보는 이유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로 역사적으로 분명히 죽으신 분이죠. 부활되었음을 과연 역사가 담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부활은 역사로 담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적으로 목숨이 끊어졌다가 이어진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것은 소생이죠. 환생, 소생. 나사로가 살아난 것, 베드로 장모가 살아난 그런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이란 예수님을 죽게 만든 세상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죄악 된 세상 전체가 예수님의 부활하심 그래서 주되심을 보여주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부활이 재료 속에 들어갈 이유는 없다 이 말이죠. 여러 가지 재료로 음식을 만들 때 완성품의 음식이 다시 재료가 될 이유는 없는 것 아닙니까. 다만 완성에 있어서 이 재료가 어떻게 엮여졌고, 어떻게 기여했느냐 그것만 밝혀내면 되거든요.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해서 세상 역사는 어떤 식으로 보여주느냐? 그것만 하면 오케이 아닙니까.

그러면 기준점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몸에 있다. 이 몸은 우리의 보통 몸과 항상 대비가 되면서 사도 바울 편지 전체를 다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몸은 아담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몸은 아담의 몸이면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고 모든 인간의 몸, 이게 좀 어려운데, 인간의 모든 몸이 아담 안에 놓여있다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있기 때문에 규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 아니면 규정을 못하는 거예요.

제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몸이 있고 우리의 몸이 있다는 것을 구분하는 우리의 몸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게 굉장히 어렵지요. 내가 보니까 우리 몸 있고 예수님 몸이 있네. 그럼 니 몸은? 내 몸은 둘 다 아는 다른 장소에 있지. 이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우리 몸 따로 있고 예수님 몸 따로 있는 것을 아는 나는 괜찮은 몸이 돼버려요. 그러면 죄가 아닌 게 된다고.

우리 몸은 여기에 포함이 돼있어야 되고, 주님의 몸은 따로 있으니까 항상 주님의 몸의 지배권을 인정해줘야 되지 지가 따로 독립한다면, 예수님 몸한테 지배도 안 받고 나도 복음도 한다고 까불거릴 수 있단 말이죠.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따로 챙겨서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게 돼요.

이게 제가 어제 주일 낮에 이야기했던 납득해서 믿는 것과 성령으로 믿는 것과의 차이점이라 한 거예요. 이렇게 되면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겁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된 사람들 글 쓴 것 보면 답답하지요. 십자가, 복음, 범벅으로 다 집어넣었어. 온갖 좋은 건 다 이야기하는데 보면 이쪽이라.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방금 두 번째 시간 시작하면서 에스겔이 하는 모든 역사 개념 자체에서 번져서 예수님 쪽으로 그리고 사도 바울 편지 쪽으로 연결돼있다.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지면에서 입체로 나올 때에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에스겔이 있는데 에스겔이 곱창이라면 집어넣는 그 내용이 뭐냐? 침멀리도 그런 이야기하는데 에스겔의 주제인 ‘성전’입니다. 하늘이 열려서 천사가 등장했지요.

그리고 에스겔 11장에 보면, 드디어 성전에서 하나님의 신이 떠납니다.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에스겔 나중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다시 들어오니까 성전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물이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성전이 되니까 성전 주변에서 고기들이 뛰놀고, 에덴동산 같아. 그런 식으로 강이 나눠져서 넘치는 거죠.

그렇다면 에스겔을 우리가 다 읽었다 칩시다. 딱 핵심 하나 잡으려면 이것 하나 잡으세요. 성전. 성전이 어떻게 됐단 말이냐? 성전이 더러워서 깨지고 깨진 성전을 대신해서 거룩한 성전 만들기. 그렇게 보면 되겠죠. 심지어 에스겔 끝부분에 보면 성전 만들 때 천사들이 정확한 치수를 잽니다. 그건 뭐냐 하면, 들어오지 않을 사람은 들어오지 말란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억지로 성전 만들기 위해서……

성전이라는 게 사람 모집하기 위해서 만드는 게 아니에요. 성전에 초점을 두고 새로운 성전을 만들 때 만드는 진행과정, 어떤 절차로 어떤 경로로 새로 만드느냐? 그걸 우리가 알아야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이 에스겔이 예언한 성전 만들기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일들을 했고 말씀을 했는지 알 수 있거든요.

그게 교재에 보면 나와요. 침멀리 책에 보면, [에스겔 8장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공격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져 4가지 가증한 것을 보게 된다. 즉 성전 뜰에 있는 제단, 벽에 그린 형상숭배, 성전 문턱에서 바벨론의 식물신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는 여인들, 그리고 여호와 현현의 장소에서 동쪽을 향하여 성전입구에서 절하는 남자들이다.] 이것이 성전을 망하게 한 범죄라고 나옵니다.

에스겔 8장에서 4가지로 구분되어서 에스겔이 성전을 망하게 만든 내용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9장에 의하면 이 심판은 여섯 사람에 의하여 시행되는데 그들은 성소에서 시작하여 한 제사장의 인침을 받지 않은 모든 예루살렘 거민에게 행한다.]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나와요. 뭐냐 하면, 구원받기 위해서 남은 자들이 등장하는데 [예루살렘 가운데서 행하는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을 보는 시선이 같은 예루살렘 성전을 걷고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밭을 간다든지 고기를 잡는다든지 직업은 상관없어요. 똑같은 일을 한다할지라도 한쪽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과 한쪽은 긍정적으로 보는 것의 엄청난 차이, 부정적으로 보는 그것이 바로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것도 인침 받아서. 도장 받아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나오는 행동과 모든 말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예수님 입장에서 그 당시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보느냐 하면, 성전붕괴 원인의 입장에서 보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해서 성전 없는 거룩한 나라, 천국은 없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하늘나라’ 글자 써있습니까? 하늘나라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뭐였던가요? 하늘나라에 보니까 성전이 있더라.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걸 봐서 그건 하늘나라고, 어린양의 보좌 없으면 하늘나라가 아닌 거예요. 지 살기 좋고 골프장 있고 그것 하늘나라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하늘나라다운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야 돼요. 그게 어린양의 보좌, 성전이거든요.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네 생물이 있잖아요. 눈들이 촘촘히 박혀 있잖아요. 눈들이 박혀있는 그 대목에서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북한의 장성들 훈장 단 것 있잖아요. 꼭 그것 같아. 흉측해. 너무 달아서 훈장 달 데가 없어. 그처럼 온 천지에 눈을 박아 놨다 이거거든요. 그 점에 대해서 해봅시다. 나중에 에스겔에서 성전에서 새로운 토지,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새로운 도성이 만들어지잖아요.

그렇다면 세상이란 게 뭐냐?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핵이 있는 거예요. 태풍의 눈이 있듯이. 세상에 움직이는 눈이 있어요. 그 눈이 성전이라는 것이 유다나라의 성전이 붕괴됨으로서 드디어 온 세상에 공개되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유다나라의 성전붕괴는 유다나라뿐만 아니고 그 주변에 있던 모압과 암몬과 블레셋과 바벨론과 모든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유다나라만 망한 게 아니에요. 유다나라와 관계된 애굽이고 모든 나라가 결부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스웨덴은? 필리핀은? 브라질 원주민들은? 볼리비아 모자 쓰고 있는 인디언들은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다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성전을 파괴하는데 참여한 나라, 바벨론의 연속적인 국가에 해당되는 겁니다. 모든 민족의 대변자가 바벨론이에요. 왜 바벨론이냐? 바벨론이 가장 유다나라가 멸망하는데 직접적으로 관련돼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이 유대인들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이라면, 적그리스도, 복음에 가장 반대하는 신학을 펼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 신학이죠. 그러면 성령 받지 않고 납득하고 이해하고 이해해서 인간이 가장 완벽하게 기독교를 구축할 수 있는 그것이 누구 게요? 현대판 바리새인, 개혁주의죠.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적그리스도, 가장 그리스도에게 대적할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신학, 삼위일체 신학, 그게 바로 개혁주의신학. 왜? 개혁주의신학 저희 스스로 모든 신학 가운데 최정상급 신학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바른 전통 속에서 신에 따라서 날마다 개혁한다. 이게 모토 아닙니까. 바른 전통은 변치 않고 그 시대 상황 따라서 새롭게, 새롭게 변해나간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것 곁들여서. 적 그리스도적이죠.

그들의 주장이 에스겔에서 이야기한 성전의 회오리바람 속에 휩쓸린 바벨론이란 존재와 엮여졌다는 이러한 상황을 그들은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바벨론, 옛날이야기지. 옛날이야기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것이 바로 유대인이라면 그 유대나라의 모든 사고방식과 묵시는 바벨론에서 배운 거예요.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유다의 묵시문학. 유다의 묵시문학이 바벨론 철학책에서 나온 겁니다. 점성술 같은 것.

점성술이란 대자연의 변화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면 숨어있던 하나님의 뜻이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인격체가 지금도 세상을 다루고 있으니까 똑같이 반복적으로 할 수 있다. 마치 사람이 인격이 있으니까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보다 더 위대한 어떤 분이 자연세계를 통해서 자기 뜻을 나타내면 그 뜻을 우리가 챙기면 주의 뜻을 아는 게 되죠. 그게 별자리 아닙니까. 별은 항상 제자리에 반복해서 뜨지요. 그렇다면 그 별자리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돼있고, 동방박사가 별보고 왔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이미 유다나라에 속해 있는 그 세계관이 바벨론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벨론 말고 다른 것으로 할 수 없나? 다시 할게요. 유다나라가 바벨론한테 망했지요. 바벨론한테 덮어쓴 겁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죄 안에 갇혀있다는 말을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에스겔은 실재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다나라가 바벨론한테 망했죠. 유다나라가 알았던 여호와는 결국 바벨론이 자기 신을 섬기는 그 아이디어의 연속이 유다나라가 여호와 섬기는 그 사고방식이라 이 말입니다.

어제 주일 낮에 이야기했지만 우상이라는 게 우리 내부로 이미 들어와 있어요. 바깥에 돌부처 안 섬긴다고 우상 안 섬기는 것이 아니고 우상 섬기는 사고방식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나를 좋게 하는 신 또는 자연세계, 이게 바로 우상적 사고방식이에요.

한 국가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를 그 동안 지켜주고 보호해준 그 하나님이 저쪽 하나님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애굽에 신들이 있었죠. 그 신이 자연신인데 여호와께서 열 번이나 조져버리잖아요. 그래서 나는 애굽의 신들을 심판했다고 돼있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반드시 승리한 쪽이 하나님이 패배한 쪽 하나님보다 훨씬 더 진짜 하나님에 가까운 거예요. 그렇다면 바벨론이 유다를 이겼으니까 마르둑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하지만 유다가 섬겼던 여호와는 잘못된 여호와고 사실은 마르둑 신을 섬겼기 때문에 유다가 그 신에게 망한 거죠. 망했다기보다 복속됐다, 흡수통합된 겁니다. “여호와 믿는 척 하지 마. 사실은 마르둑 신이야. 네 본색 드러내. 힘들게 여호와라 하지 말고. 니 본색은 따로 있잖아. 예수, 예수 하지 말고 삼위일체라 하지 말고.” 본색은 절에 가는 것과 똑같잖아요. 본색을 드러내란 말이죠.

그런 가운데서 성전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성전 새로 만드는 방법이 에스겔 전체의 테마로 등장합니다. 성전을 만들 때는 벽돌이란 재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과정이냐 하면, 성전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고 누가 거주하시는 겁니까? 여호와 하나님 자기 아파트죠. 자기 집이죠. 집 없는 하나님이 있습니까? 없지요. 집 따로 있고 하나님 따로 있는 이런 건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은 자기 집 속에 거주하시길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나오죠. 하나님이 자기 처소라 삼으사.

그런데 하나님의 처소로 삼는데 그 처소가 그 동안 수평적으로 시온이라는 곳 특정장소에 지어놨지요. 이제 어려우니까 참으세요. 시온이란 땅에다가 성전을 세웠습니다. 성전을 사실은 하나님이 세우려고 한 게 아니고 다윗이 자꾸 세우자고해서 다윗은 재료 준비하고 아들이 세워서 다윗가문 또는 다윗자손이 세운 걸로 돼있어요. 나중에 신약시대에 성전을 누가 세웁니까? 다윗자손이 세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말도 안 되는 요구조건을 들어주면서 그걸 부정하면서 새로운 그 개념에다 묵시적 개념을 담아서 그대로 이 땅에 세워지게 하는 겁니다.

시온 땅에 성전을 만드니까 이 땅을 떠나면 성전을 떠난 것이 되겠죠. 요나가 뱃속에 들어갔을 때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네가 어디 있든지 응답하겠다. 이 말은 성전이 한 곳에 지정돼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나 정리해봅시다. 시온에 성전이 세워짐으로서 성전은 한 곳에 지정되어있다. 원리원칙 하나 끄집어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나오잖아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죠. 예수 그리스도 말고, 이만희라든지 마호멧, 문선명 같은 사람은 있을 필요 없죠.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중보자도 한 분밖에 없어요. 구약에 보면 성전은 한 곳에 이미 지정이 돼있어요. 이 원칙을 하나 끄집어냈어요.

한 곳으로 지정돼있다 하니까 이것을 2D로 할 것이냐, 3D로 할 것이냐? 이게 남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평지에 있는 지리적인 그 성전, 역사적으로 솔로몬이 세웠던 그 성전을 성전으로 본 겁니다. 단지 나중에 요나는 방향성만 이야기할 뿐이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더니만 기도가 응답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기가 성전이 되는 건 아니고 성전은 따로 있어요. 한 곳에 지정된 곳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지정된 것이 만약에 성전이 비행접시이라면, 이것이 추진력을 받아서 공중으로 뜨면 어떻게 됩니까? 뜨면 지상에 성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떠버렸으니까. 그런데 땅에서 만든 건물이 하늘로 뜰 수 있겠습니까? 못 뜨죠. 그래서 인간은, 한 곳에 있는 성전은 뜬다, 못 뜬다? 못 뜬다. 그런데 하나님은 뜬다가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죠. 그리고 구름이 가리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 8장,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휘장을 찢어버렸잖아요. 자신의 몸이 곧 제물이고 제사장이고 성전이고 성소고.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 되셔서 그리스도의 몸이 땅을 떴다는 말은 성전이 위로 뜬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볼 때 “성전 참 잘 지었습니다. 46년 걸렸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짓겠다.”고 했거든요. 제자들은 지평적인 한 장소로 봐서 불도저로 헐어버리고 사흘 만에 짓는다고 본 거예요. 제자들이 뭐가 문제에요? 46년 동안 지어도 다 못 지은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할 때 제자들이 그 말을 못 깨달은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자기들의 인식의 한계, 자기가 자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간관과 공간관에 문제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3D로 이해 못하고 2D로 항상 역사와 지평적으로만 생각하는 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는 모든 언어를 자기가 아는 시간과 공간관으로 다시 해석해서 알아들은 양 했던 겁니다.

그 몸을 현재 우리가 입고 있어요.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말씀은 그럴싸한데 실제 살아가는 걸 보면 이 땅에서 밥 먹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후다닥 벗어버려야 돼. 우리 마음대로 벗으면 안 되고. 그런다고 껍데기 벗어지는 건 아니고.

우리가 자살하면 안 되는 이유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우리는 산 영이 되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죠. 살려주는 분이 안 살려주면 천 번 거듭나도 소용없어요. 왜? 천 번 거듭나도 살려내는 영이 안 오면 그냥 사는 것처럼 우기는 것뿐이라니까요. 죽어가고 있으면서. 자살해도 소용없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자살이란 살려는 의지라 했습니다. 상당히 역설적이죠. 자살이라는 것은 현재 나는 안 죽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자살할래.”라는 말을 한다는 거예요. 지가 지금 살아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자신만만한 발언이 자살이죠.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그런 말이 있어요.

에스겔에서 성전을 어떻게 만드느냐 그 이야기 아닙니까. 만들려면 문제가 뭐냐? 우리 자신에 문제가 있죠. 시간과 공간관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를 알고 성전을 섬기다 보니까 바벨론한테 된통 당한 겁니다. 결국 우리가 갖고 있는 성전관은 성전을 보면서 성전의 의미를 몰랐다는 우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바벨론 식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성전으로 우겼다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벨론에 잡혀갔다는 것은 잘 된 셈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본색이 기껏해야 바벨론 그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이 들통 났으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옛날 성전은 어떻게 돼요? 깨질 때 어떻게 깨졌어요? 불에 탔지요. 그러면 바벨론적 성전이란 불에 타게 돼있단 말이죠. 불에 타버리면 그 앞에서 양 잡고, 소 잡고, 염소 잡고, 거룩한 기구 만들어서 다 불쏘시개에 불과한 거예요. 그렇다면 그 동안 유다나라가 성전 섬겼다는 것은 사실은 성전에서 나오는 제대로 된 불 심판을 받아야 합당한 사고방식으로 성전에서 깝죽대고 있었던 겁니다. 그 당시 제사장들도 마찬가지고.

그것을 그들은 바벨론을 통해서 고맙게도 내가 누구며, 내가 어느 수준밖에 안 되는가를 폭로 당하는 행운을 얻게 된 거예요. 이걸 저는 주의 말씀 계획안에 흡수되었다고 표현하는데. 가락교회에서 강의했잖아요. 볼트 박아놓고 집 짓는다고. 철로를 깔아놔야 기차가 다닐 것 아닙니까. 그 철로가 언약이거든요. 비로소 언약에 전에는 지식으로 동참했던 그들이 바벨론에 가서 성전 불타고 난 뒤에는 바로 죄인의 입장에서 멸망당해야 마땅한 자 입장에서 고맙게도 언약노선에 놓여지는 혜택을 입은 거예요. 혜택 정도가 아니고 특혜를 입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 지라는 이 말은 네가 이제는 언약이 다니는 철로로 편입됐다 이 말이거든. 내 안에 언약이 작용하는 그것이 깔려있다 이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이 말은. 십자가가 볼트에요. 뭐든지 십자가 볼트로 단단히 조여야 돼요.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이걸 유다나라는 언제 압니까? 바로 자기들의 성전이 자기들 보는 앞에서 불타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불타도 마땅한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전을 허락했다는 걸 아는 겁니다.

그걸 제자들은 몰라요. 46년 동안 졌습니다. 제자들이 그런 소리 했지만 요즘도 만약에 부산 가다 큰 예배당 있으면 부럽잖아요. “교인들 돈도 많다. 언제 졌노?” 나도 저런 교회 당회장 되어서 당회실에서 쩡쩡 울리면서 당회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이 말이죠. 우리가 시기 질투하지만 우리에게 가라면 갈 수도 있는 문제고^^

그런데 바로 그런 성전이 불타버린다는 것을 깨달을 때 거기에 언약이 발생하는 철도노선이 깔리게 되는 거예요. 그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님이 하신 모든 것이 몽땅 주어지는데 그 주어지는 것 안에 옛날 성전 불타버렸다는 내용이 담겨서 우리에게 임하는 거예요. 에스겔 전체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특혜에요. 이건 논산훈련소에서 후방으로 빠지는 것과 똑같아요. 이건 보통 특혜가 아닙니다. 하늘나라 빽써야 빠질 수 있는 겁니다.

다시 설명할게요. 하나님이 성전을 어떻게 만드는가? 성전을 불태워서 성전을 만든다 이 말이죠. 성전을 불태우는 게 재료란 말이 아니고 불타면 없어지죠. 성전의 재료가 문제가 아니고 뭐가 문제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의 마음가짐, 인간 자체가 문제 되는 거예요. 우리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문제가 다른데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 미처 몰랐던 거예요. 더러운 곳이 주님의 거룩한 곳이 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죠.

그래서 에스겔 37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만들 때 재료가 뭐죠? 이스라엘 군대 만드는 재료가 뼈다귀에요. 그것도 세상에 바짝 마른 뼈로 성전 만들 줄이야 상상이나 했습니까. 하나님 같으면 귀한 보석, 나무도 최고급 나무로 만들고 이렇게 성전 짓는다고 생각했잖아요. 솔로몬이. 다윗이 준비한 최고의 재료가 뭐였습니까? 그 당시 레바논 백향목. 우리나라 같으면 춘양목. 또는 영덕에 가면 금강송, 그런 정도. 그리고 보석도 최고급 귀한 수입품들로 성전 만들었을 때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자기 자신의 주제도 파악 못하고, “주님 이 정도 했으면 영광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한 거죠. “너희들이 원하는 성전이 이것 맞나?” “맞습니다. 이 정도 됐으면 우리는 땡 잡은 겁니다.” 이렇게만 생각했지 자기들 속이 시커멓다는 사실을 몰랐죠. 시커먼 속에 성전 만들 줄이야. 이건 하나님 아니면 어느 누가 발상이나 하겠습니까? 죄인 중에 괴수 안에 자기의 거룩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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