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2. 8. 24) 1강 녹취록
광주 강의(2012. 8. 24) 1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4.44.106.224)
광주 강의(2012. 8. 24) 33-1
에스겔 34장은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에게 질타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2절에 보면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목자들을 친다는 말은, 이스라엘 전체를 양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양으로 볼 때는 하나님과 인간(양) 사이에 목자를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을 목자와 양. 목자도 은밀하게 말하면 양 속에 포함 되는데, 어쨌든 목자의 임무는 양을 하나님 앞에서 양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는 양이 되고 싶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양이고, 양답게 살아야 돼.”라는 일방적인 요구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고, 집단이 있다면 이 사람들이 스스로 “우리 집단은 이렇게 하기로 하자.”라는 결정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 소용없어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야쿠자로 활동하자.” 이런 것 소용없어요. “우리가 모여서 교회를 만들자.” 이것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일체 거부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양으로 이미 규정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양으로 규정했으니까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양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데, 그것도 인정 안 합니다. 왜냐? 하나님이 양으로 규정할 때는 양다운 원칙이 있어야 돼요.
“우리는 양이다.”라고 해서 우리를 양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는 양이야.”라고 말만 하시고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양다움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십니다. 그 원칙을 먼저 알고 그 원칙대로 살도록 할 책임자를 목자라고 해서 세웁니다. 그러니까 양이 있는 곳이 반드시 목자가 있겠지요.
따라서 목자는 본인이 목자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목자가 세워지고 또 양이 규정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이제 하나님 안 믿어. 하나님의 양이라는 것도 싫어. 목자도 하기 싫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포기 하실까요? 아닙니다. 끝까지 그들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은 재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 걸려든 겁니다. 깡패 조직에서 ‘여러 사람 가운데 한 놈만 친다.’는 말이 있어요.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나 기타 맹수들이 양이나 말, 염소를 공격할 때, 딱 한 마리만 노리지요. 그럴 때 표적이 된 짐승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자기 말고도 다른 짐승이 많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 나만 공격하는가? 맹수들이 이렇게 한 마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이유는 그래야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말고도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을 만들어 놓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계속 다루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양 되기 싫어해요. 목자도 되기 싫어하고.
싫다고 해도 강제로 하나님이 “너는 내가 원하는 양이 되어야 하고 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안 되면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거예요. 누가 목자 되고 싶어서 환장했습니까? 그렇다면 “아이고, 잘못 되었습니다.” 하겠는데, 그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노리듯이 찾아와서 “너는 왜 목자답지 못해?” 그러면 목자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언제 목자 한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나오겠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독재를 하시면서 이것을 ‘선택한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 호세아 이후에 보면 어떤 말이 나오는가 하면, “나는 너의 남편이다.”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길가는 아가씨에게 “당신은 내 아내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죠.
남편이라고 불러줘야 남편이지. 그렇잖아요?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하면 그 사람이 남편이 아니지요. “여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야 그 사람의 남편이잖아요. 이스라엘은 이미 남편을 정했어요. 바알이 남편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뭔가 하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어떤 신을 믿을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한다는 거지요. ‘믿는다. 행동한다. 가진다.’할 때 결정은 누가 합니까? 내가 결정하지요. “내가 이것은 갖고 싶어.”하면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너 이것 가져.”하면 괜히 기분 나빠요.
인도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힌두교에도 근본주의가 있는데 이건 이슬람 근본주의보다 더 무섭답니다. 인도 근본주의 아가씨에게 서방의 기자가 질문했어요. “아버지가 당신을 그렇게 때리고 다리미로 지지면서 행동을 똑바로 하라고 강요하는데 그런 아버지가 밉지 않습니까?” 아가씨가 답하기를 “아버지가 고맙지요.” “그런 폭행을 가하는데 고맙다니?” “죽여도 되는 나를 살려주셨으니까 고맙지요.”
힌두교 근본주의에서는 딸을 낳으면 당장 죽이게 되어 있어요. 죽여야 되는데 부인이 “내 딸 죽이면 당장 이혼한다.”고 해서 안 죽인 거예요.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아무리 매를 맞아도 죽이지 않은 것만도 고맙다는 거지요. 복음 같아요. 다른 여자아이들은 죽었는데 본인은 살았으니까 얼마나 감사하냐는 거지요.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면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입니다. 우리들의 의견은 들을 생각도 안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보수적이라. 강남 스타일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의견은 일체 고려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어떤 남편을 보고 남편감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의사를 말해서 합의에 의해서 부부가 되잖아요. 그런데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이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는 너의 남편이고 너는 나의 신부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부될 사람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신부로 정했어요. 왜 이런 식으로 하셨는가? “너의 안목으로는 나(하나님)를 남편감으로 지목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결정은 어떤 것도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거나 흡족한 것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렇다고 내팽개치면 지옥 갈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을 묵살하고 하나님의 일방적 의지만 그 인간 속에 담기 위해서 없었던 인간을 새로 만드는 거예요. 집에 혼자 사는 어떤 아가씨가 심심해서 곰 인형을 갖고 싶어요. 그러면 그것을 구입해야겠지요. 인터넷으로 구매를 해서 택배로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어떤 아가씨는 강아지도 싫고, 곰 인형도 싫고 혼자 있고 싶은데 어느 날 갑자기 택배가 와서 곰 인형을 주고 갔다면 이것은 자기가 원했던 것이 아니니까 그 곰을 칼로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뒤늦게 곰 인형 보내신 분이 찾아와서 “내가 준 곰 인형 어떻게 했니?” 이렇게 묻는 거예요.
“내가 준 성령, 내가 준 믿음, 소망, 사랑을 너는 왜 안 돌아보냐?” 이런 식입니다. 나중에 주님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내가 먼저 있고, 이런 나를 하나님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요소를 담을 그릇을 만들다보니까 이스라엘이 생긴 겁니다. 이사야에 나와요.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릇을 만들 때 천한 그릇과 귀한 그릇을 토기장이가 결정하는 것이지 토기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뭐냐? 거룩한 토기. 그리고 이방 나라는 망치로 때려고 부숴버릴 용도로 만들어진 토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수용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뭐가 붕괴되어야 합니까? 매사를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서 외부와의 관계(하나님과의 관계)도 갖는다는 이런 생각이 어린양 앞에서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이것이 믿어지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기에 반드시 개인구원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 알고, 이런 일하면 구원 됩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개인 구원이 아니라 “너희들은 구원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구원 받는 너희들 속에 포함이 됩니까?” 또 이렇게 개인적인 것을 삽입해서 질문하지요. ‘너희’에는 관심이 없고 ‘나’에게만 관심이 있는 거예요.
‘개인 구원’도 ‘집단 구원’도 적당한 용어가 못 됩니다. 집단 구원을 말하면, “나는 그 집단에 포함 됩니까?” 또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그래서 저는 ‘상태 구원’이라고 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는 상태, 그 상태를 하나님께로부터 돌려받는 식으로 구원 작업이 진행됩니다. 이것이 ‘예수 안’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태를 찾고자 합니다. 상태를 찾고자 한다는 것은 먼저 ‘구원이라는 상태가 이미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져야 되고, 그 상태가 그대로 구원의 내용이 담겨서 회수되는 방식으로만 주께서 일하신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결이 됩니다.
개인은 상태가 있어도 이 상태는 상태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상태에서 나는 구원 받을까?’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오늘 버스를 타고 광주로 오는데 순창을 지나는데 비가 쏟아져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버스 안에 있는 TV에서 골프 중계방송을 하는데 거기는 날씨가 쾌청해요.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는데, 비오는 공간 속에서 화창한 날씨의 화면이 나오더란 말이지요. “맞아. 바로 저거야!” 지금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잖아요. 이 저주받은 세상에 하나님이 TV모니터를 설치해서 그 속에는 축복된 천국의 모습이 나온단 말이지요. 이 상태를 우리가 만들어냈습니까? 아니지요. 그리니까 우리 구원은 예초에 접어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 받을까? 내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그 희망을 접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서 우리가 내미는 손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화목을 이루시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을 냉혹하게 외면하고 거부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구원을 이룬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간추리면, ‘개인 구원을 추구하는 자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태 구원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버스는 폭우 속을 달리는데, 버스 안 TV에서는 날씨가 맑아요. 그런데 TV화면 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 "HOLE IN ONE." 이라고 쓰여 있고, 뒤에 멋있는 승용차가 있었어요. 이것의 의미는 홀인원을 하면 승용차를 준다는 거예요. 이걸 보고, “야, 우리도 한 번에 천국 구멍에 빠지면 얼마나 좋겠나?”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요.
저주의 폭우가 쏟아지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저 구멍에 빠져서 차도 타고, 날씨 좋은 곳에 살면 얼마나 좋겠나?
모니터가 이미 장착되어 있으면 화면이 나오지요. 그러면 이 버스에 탄 사람 30명 가운데 저 모니터에 관심 있는 사람은 어떻게 돼요? 효과를 보지요. 이것이 구원 효과인데, 모니터의 설치효과 있지요. 주께서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거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 인생의 방향성이 그쪽으로 기울듯이, 주께서 켜놓은 복음의 모니터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겠지요.
이럴 경우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현재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주변의 광경, 버스 운전수의 복장, 차장 밖 지리산에 비가 내리는 것 등등이 그 모니터에 있는 아름다운 골프장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못 빼앗습니다. 왜? 방향이 그쪽이니까.
만약 머리 큰 사람이 화면을 가린다면 “머리 치우세요.”라고 나오겠지요. “어이, 이단! 빨리 비켜. 나는 십자가가 보고 싶어.”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제 앞에 앉은 어떤 사람이 화투 패를 돌리면서 “화투 같이 칩시다.” 한다면, TV 속 골프 치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화투는 당신들끼리 치세요. 나는 골프 봅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화투장을 저는 ‘교회 하기’로 봅니다. “우리 모여서 하나님 섬기기 위해 교회 합시다.” 하면, “비키세요. 나는 지금 십자가 복음 듣고 싶어요.” 이렇게 되면 화투장 들고 돈 벌려고 하던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이 동네는 장사 안 되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 골프장은 버스 안에 없습니다. 바깥 서울에 있어요. 서울에 있는데 생중계를 하니까 TV를 통해서 모습과 자막이 나왔잖아요. 지금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어린양의 나라입니다. 그 어린양이 계시는 나라의 소식이 모니터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과연 몇 명이나 거기에 관심을 갖겠습니까?
화투 치기에 바쁘고, 저쪽은 스마트 폰 들고 채팅하고, 뒤에는 이어폰 꼽고 음악 듣고, 어떤 사람은 잠자면서 가고 있단 말이지요. 주위에 이들을 깔아놓은 것은 진정으로 그 모니터 골프장에 관심 두는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구원 효과입니다.
지금까지의 강의를 정리하면, 주의 말씀은 우리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자기 백성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능력이 같이 작용합니다. 바로 그 사실을 우리는 끌려가면서 고백하는 겁니다. “내가 신부도 아닌데 나를 신부라고 하시니 너무 감격스럽습니다.”라는 고백. 나는 양이 되고 싶지도 않은데 양이라고 부르시는 그 고마움. 목자도 아니데 목자로 인정해 주시는 그 은총.
이 모든 것이 감격스럽게 나오는 그것을 성경에서는 ‘회개’라고 하는 겁니다. 질질 짜고 우는 것이 회개가 아니고, 방향성을 모니터 쪽으로 제대로 잡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모니터가 뭡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그 모니터가 예수님이었고, 오늘날은 예수님의 영, 성령입니다. 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만 보여주는 거예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강의 내용을 잘 이해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해보면, 양이나 목자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해서 우리에게 전달한다고 했고,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구원 받고자 하는 욕망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 개념을 왜 하나님이 안 받아드리는가 하면, 우리 쪽에서 뭘 끄집어내도 결국 내가 신이 되기 위한 모양새기 때문에 주님이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 수 없는 새로운 능력이 외부에서 주어져야 돼요. 즉 외부에서 구원하는 것이지 나의 내부적 능력으로 마중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행함이 아닌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서 믿음의 주체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효과 중 하나가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능력이 우리 능력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냥 능력에 뒤덮인 셈이 되겠지요. 광주에 비가 많이 왔지요. 비가 내리는데 이제 그만 내리도록 우리가 결정할 수 없어요. 비가 내릴 때 비가 필요한 밭이 있다면 “빨래 늘어놓은 우리 집에는 비 내리지 마시고 우리 밭에만 비가 오게 하옵소서.” 이렇게 할 수 없지요. 그냥 하늘에서 내리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어요.
이처럼 믿음은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어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그냥 태풍이 와서 퍼붓고 가는 것처럼 우리는 거기에 휩쓸려 갈 뿐이지 따로 내가 어떻게 결정하고 판단할 수 없어요. 만약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바울에 의하면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 됩니다.
로마서 4장에서 ‘행함’은, 아브라함이 자기 행한 것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미 구약부터 있었어요. 구약 때부터 이미 행함 층과 믿음 층이 나란히 간 겁니다. 그래서 행함 층 보다 믿음 층이 이긴 사람은 구원 받고, 행함 층이 이긴 사람은 멸망 받습니다.
제가 어릴 때 삼촌과 같이 방을 썼어요. 우리 형제와 삼촌이 같이 자면서 이불은 하나였습니다. 여름에는 괜찮은데 겨울에 큰 삼촌이 이불을 감고 자면 나머지는 이불도 없이 움츠리고 자야합니다. 믿음의 쪼가리가 제한되어 있다면 우리는 저쪽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져가면 우리는 받을 믿음이 없겠지요?
이 말을 하는 것은, 믿음은 곧 행함의 면적이나 양으로 따질 수 있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져도 그 믿음의 두께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행함으로 한다면 아브라함 이불 따로 있고 우리 이불 따로 있고 이렇게 되는데, 이러면 우리 구원은 보장받지 못합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 층에서 온 것은 구원의 효과가 아니라는 거지요. 방금 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구원은 덧셈이 아니고 뺄셈이다.’ 왜 그런가? 덧셈은 자꾸 보테고 첨가해야 합니다.
플라톤 철학이 뭔가 하면, 이상(이데아)계와 현실계를 나누어서 이상계는 진짜고 현실계는 이상계의 모방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삼각형을 그리라고 하면, 각자 삼각형을 그려요. 여러 삼각형 중 어느 것이 진짜 삼각형입니까? 진짜 삼각형, 세 각의 합이 180도인 것은 따로 있는데, 그 진짜의 모방만 다양하게 그렸을 때 이게 현실계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인간이 누구인가? 이 세상에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없지요. 여러 사람이 있지만 진짜 사람은 없어요. 우리 중에 누구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없어요. 그런데 철수, 영희, 순자 이렇게 모아놓고 사람이라고 한 겁니다. 사람의 원형은 따로 있고, 이 세상에서는 그 모방체들만 현실을 채우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신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플라톤은 이런 주장을 한 겁니다.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진짜는 신만 품고 있고, 그 유사품들을 이 세상에 깔아놓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각자 다르다고 해서 신이 없다고 하지 마라. 사람들이 다 다르지만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라는 거지요.
집사님은 왜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성립되려면 “신이 만들었어.” 이 대답밖에 없어요. “엄마, 왜 내가 있는 거야!” “내가 너를 낳았거든.” “그럼 엄마는 누가 나았는데?” 이러면 그 다음부터 “밥이나 먹어라!” 하면서 강제로 대화를 차단시킵니다. 왜? 계속 이야기해봐야 답이 없거든요.
신이 있어야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성립되고,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야 윤리와 도덕이 탄력성을 받습니다. 만약 아무도 만든 이가 없는데 내가 여기 있다면 누가 신입니까? 내가 최초의 신이 되지요. 내가 최초의 신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희들은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거든요.
내가 술 먹고 칼 들고 옛날 직장 동료를 죽이든 말든 너희들이 왜 간섭하느냔 말이지요. 힌두교 가정에서 자기 딸을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였단 말이지요. 딸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죽였을 때, 경찰이 와서 “살인자 나와!” 한다면, 누가 말리는 줄 알아요? 일가친척들이 다 말려요. 왜? “이건 우리 가정문제인데 나라에서 왜 간섭하는데?” 이렇게 나와요.
힌두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뭐라고 이야기해야 됩니까? ‘우리가정을 위해서 국가가 있는 것인데, 우리 가정을 위해서 국가가 도움은 못 줄지언정 왜 훼방을 놓는가?’ 할 때 나라가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이렇게 답변해야지요. “우리나라 인도는 법치국가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가정의 관행이나 풍습, 전통보다 국가법이 우선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골치 아픈 것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나쁜 짓한 사람을 신부가 개인적으로 죽였다. 그러면 경찰이 와서 신부를 잡아갈 때 신부는 뭐라고 항변합니까? “이 일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교회법에 따라 처리할 테니까 국가는 관여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상식적으로 알아두세요. 근대국가는 어떤 법보다 자연법이 우선됩니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자연법은 천부인권설입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처단할 자격은 없는 겁니다. 어떤 명목으로도. 다만 그 공동체(국가)가 결정한 법에 의해서 인간을 처단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났기에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법의 존재를 언제 아는가? 그 법을 위반했을 때 비로소 국가가 뭔가를 알 수 있지요. 바람피우는 여자에게 “당신은 왜 남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는가?” 하니까 “언제부터 국가가 내 몸을 관리했지?” 라고 되물어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위반했을 때만 간섭하지 말고 내가 굶고 있을 때 먹을 것 주면서 내 삶을 간섭하면 따르겠다는 거지요.
플라톤이 죽은 후에 신플라톤 주의가 등장합니다. 이 둘의 차이점이 뭔가? 플라톤 주의는 제가 앞에서 이야기했지요. 이상계와 현실계가 단절된 것. 신플라톤 주의는 단절된 이상계와 현실계에 단계를 만들어서 연결시킵니다. 더러운 세상에서 점차 신에 대한 정보와 내용을 많이 덧붙이면 점점 신 쪽으로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이 신플라톤 주의를 교회에서 활용했습니다. 지난 수련회에서 말씀드렸지요.
수련회 강의 내용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제 질문은 강의가 처음부터 복음이었냐는 것입니다. 다 복음과 연관되어 있어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면서 민주주의에 안 들어오잖아요. 우리는 의례히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따져보면서 무엇이 민주주의인지 알아야 되듯이, 우리가 복음이라고 하니까 당연히 바울이 복음이고 베드로가 복음이고 요한이 복음인 줄 알잖아요. 그러면서도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잖아요. 그게 싫다는 거예요.
복음과 교회가 어떻게 다른가를 알기 위해서는 교회가 어떤 식으로 성경과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 그런 강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의를 들어보면 별로 은혜도 안 되고, 나쁜 이단들이 하는 짓 같은데 그런 내용을 왜 시간 낭비하면서 길게 이야기했는가? 이런 의문이 들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 속에도 얼마든지 그런 요소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거론한 겁니다. 상대성 원리를 이야기한 것은 현대인들은 과학을 진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납득이 되고 합리적이고 논리에 빈틈이 없어요. 우리는 거기에 뿅 가잖아요. 반면에 복음은 논리도 비약적이고 말이 안 되는데, 그냥 믿으라고 하니까 믿는 척하는데, 뭔가 찜찜하고 분명하지가 않아요.
복음은 인정하지만 과학이 더 끌려요. 과학으로 따지면 딱딱 맞으니까. 이것이 우리의 심성인데 그것이 바로 로고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로고스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어요.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어떻게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느냐? 그걸 해야 돼요. E=MC2 에너지가 물질로, 물질이 에너지로 변한다는 그 공식이 막말이 아니잖아요. 이것이 옳은 공식이라는 것이 바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통해서 확인되었어요. 원자폭탄이 기도해서 터졌습니까?
미국의 핵 잠수함에 보면 E=MC2이라고 써 놓았어요. 왜 이걸 써놓았어요? 지금 이 공식의 힘으로 7만톤이나 되는 항공모함이 움직이고 거기에서 비행기가 뜬단 말이지요. 이게 실재고 이게 현실이지 이것 외에 무슨 현실이 있냔 말이지요. 이 말은 과학만이 실재고 과학으로 점검 안 된 것은 못 믿겠다는 겁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지금 놓여 있습니다. 로고스 속에. 그러니까 이 시대를 인정하면서도 복음을 믿는다? 그러면 하늘의 태양이 둘이 된 것입니까? 예수님도 맞고 과학도 맞고 그런 것입니까?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예수를 믿든지 과학을 믿든지 둘 중 하나를 믿어야 합니다.
이론상으로는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마음은 과학에 더 끌리고. 이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과학이 로고스에서 나왔다고, 그 로고스는 항상 내 편한 쪽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편한 것이 진리가 되지요. ‘나는 진리가 아니요, 나는 길이 아니요, 나는 생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낯선 진리가 들이닥칠 때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신플라톤 주의의 덧셈이라는 것은 계속 추가적인 로고스와 지식을 더할 때 신에게 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매개 역할을 누가 했는가 하면 교회가 하고 있어요. ‘과학이 옳은 것을 아시는 분들 교회 오세요. 여러분들이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한 천국을 우리가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거부할 사람은 없지요. ‘과학도 맞고. 그 다음 과학으로 해결 안 되는 것이 천국 가는 일이니까 이것은 교회 와서 해결하겠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겠다는 심보인데, 이게 옳은 생각입니까? 이게 신플라톤 주의입니다. 로고스에서 나온 거예요.
수련회 마치고 그 강의 내용을 언제까지 우려먹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할 생각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로고스 집단입니다. 로고스로 얻어맞는 로고스가 구원합니다. 그 당시의 유대교가 이랬어요. 점점 거룩해지면 천국에 가깝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천국으로 골인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걸 교회가 미끼로 해서 사람들을 교회에 끌어모은 겁니다. 모든 교회 설교가 이 바탕에서 진행됩니다.
이런 바탕이 아닌 설교 들어보셨어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이런 바탕에서 설교합니다. ‘마음을 낮춰라. 순결하세요. 욕심 부리지 말고 십자가 바로보세요.’ 이 모든 소리가 다 이런 바탕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뭐가 정답인가? 덧셈이 아니고 뺄셈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을 생태 구원이라고 했지요. 다 이룬 것 속에 무엇이 구원이 아닌가를 뽑아내는 방법입니다. ‘아, 이게 구원이 아니었구나! 헌금, 기도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십자가 알고, 복음 아는 것도 구원이 아니었구나.’
내가 십자가를 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십자가로 인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납치되는 것이지 주님을 우리가 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되는 것이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되는 것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차이를 아는 사람이 복음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출발해야 만족합니다. 정신이 희한해요.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자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그 목적이 자기에서 꽂혀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텐데 주님이 나를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어요. 나를 위한 링거(영양 주사)가 주님이고 나는 주님의 링거를 받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면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쪽 빨아먹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홀쭉해 집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빨아먹습니다.
어제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있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은 주님께 말려들었어요. 왜냐하면, 다윗이 밧세바를 맞이하는 것도 주님이 설치해 놓은 덫에 걸린 거예요.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그물에 걸리게 해놓고 용서해 주시고.
그래서 우리는 용서 받기 위해서 걸려들어야 합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용서받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덫에 걸려들어야 돼요. 그 모든 배경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너는 내 양이라.”는 그 한 마디 속에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리고 자칭 양을 돌본다는 그 인간들은 무조건 거짓 목자가 되어야 해요. 왜냐? 그래야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참 목자가 티가 나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참 목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으면서 어떤 사람을 내보내서 “네가 거짓 목자 역할을 해.” 하면서 떠미는 거예요. 그래서 엉뚱한 짓 실컷 하도록 한 후에 참 목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에 등장한 거짓 목자들은 참 목자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가지 싫어도 억지로 등장해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없으면 안 됩니다. 거짓 목자노릇을 해야 합니다. 조00 목사가 그런 짓해야 되고 다 그렇게 해야 돼요. 자기도 자기 인생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5중 복음 외쳐야 돼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데살로니가 후서에 나오지요. 사단이 역사하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구원 받는 것은 택한 자 외에는 안 되도록 하는 교묘한 전략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전략에 말려들었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이야기, 그 목자라는 개념 안에 이처럼 엄청난 것이 들어있어요. 목자의 개념은 양을 겨냥하고, 양과 목자 그리고 하나님, 하나님과 양 사이에 목자가 개입해서, ‘내가 규정하는 양처럼, 내가 규정하는 목자로써 제대로 역할을 못했냐고 책임을 묻는 것’ 그 모든 것은 모니터에 있는 날씨 좋은 골프장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구원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목자 안 될래. 나는 양 안 할래.” 이런 식으로 거부하면 그 사람은 방향성 자체가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자기 자신에게만 꽂혀있는 그런 셈이 되겠지요.
10분 쉽시다.
(2012. 9. 10. 09:4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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