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다니엘2장(정박지)120906-3강a-이 근호 목사
가락교회-다니엘2장(정박지)120906-3강a-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1.16)
가락교회-다니엘2장(정박지)120906-3강a-이 근호 목사
제 3강a
다니엘 2장 할 차례입니다. 다니엘을 이렇게 누구든지 보게 되면 첫 느끼는 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뭔가 주변에 다른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다니엘은 느끼게 되죠. 사람들끼리 오밀조밀하게 사는데 이걸 외부에서 바라보고 있는 어떤 시선 같은 것을 느끼게 되죠.
여기 다니엘이 있고 다니엘 3친구도 있고 여기 느부갓네살 왕도 있는데 이 보이는 세계를 왕이나 왕의 신하가 보게 되면 이게 전부예요. 여기 ‘있다, 있음’이 전부가 되는 겁니다. ‘세상 뭐 별거 뭐 있노. 하늘에 달 있고 별 있고 사람 있고 산 있고 밭 있고 논 있고 바다 있고 이거 있는 게 전부지, 여기에 헷갈릴 일이 없다. 이게 전부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다니엘 전체를 읽어 본 사람의 느낌은 다른 어떤 눈동자 같은 거, 이것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어떤 시선 같은 거, 바깥에 포진돼 있는 어떤 다른 세계를 다니엘을 보게 되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이 인간 세계 바깥에 있는 이쪽과 이쪽에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관여가 되고 어떤 식으로 이게 반응을 나타내느냐,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세계관이죠.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현재 요 있는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이거는 지나 개나 어린애나 어른이나 다 아는 건데, 예를 들어서 KBS에서 3일 다큐멘터리를 했다 말이죠. 어디서 했느냐 하면 얼마 전에 내가 다녀왔던 그 마을에서 했어요. 경주 괘릉마을에서 묘지를 이렇게 걸어서 땅 파놓은 데를 걸어서 연못에다 묘지를 했던 옛날 신라의 마을이 있는데 그런데 그 마을의 묘지의 은덕으로 인해서 우리 마을이 잘 산다는 그런 괘릉마을의 농촌 생활을 3일 동안 기자가 생활을 같이 하면서 찍었던 다큐멘터리라 말이죠.
그걸 이렇게 보게 되면 12시간 경과 후, 24시간 경과 후, 74시간 경과 후를 쭉 보거든요. 그럴 때 그 다큐멘터리에 그들의 농부와 그들의 옛날 선조들의 괘릉, 잔디밭, 농사지면서 서로 협동하는 거, 한우 키우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에 다니엘에 나오는 다른 시선이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걸 보면서 제가 뭘 느끼느냐 하면 다니엘과 비교해 보는 거예요. TV본다고 뭐라고 하는데 뭐라 하지 마세요.ㅎ
다니엘과 비교해 볼 때 다니엘과 저쪽 다큐멘터리 차이점이 뭐냐, 말이 다큐멘터리지 여러분들이 평소에 시장에서 또는 사회에서 사는 게 다니엘과 어떤 차이가 난다? 그런 생각해보신 적 있죠? 있나 물어보면 안 되잖아요. 회사 다큐멘터리 찍어 보세요. 맨 똑같다니까요. 다른 시선 없어요. 그냥 직원들 일하고 계획 잡고 프로그램 진행시키고 그런 거잖아요.
다니엘을 그게 아니잖아요? ‘다른 눈이 하나 여기 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것에 의해서 여기 이쪽 세계가 젊은 애들 말로 ‘쫄았다. 완전히 주눅 들었다.’ 다니엘이 그 기록입니다. 특히 여기 느부갓네살 같은 경우는 최고 아닙니까? 최고! 누구한테 주눅들 이유가 없어요. 최고인데 이 바깥에 있는 이쪽 분이 이상한 꿈을 꾸게 만들어 버리니까 느부갓네살 이 사람이 당황스러워서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라 해요. 그리고 자기가 꾼 꿈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해도 신하들은 ‘으흠, 우리 왕 돌았나?’ 이렇게 되고 어떻게 해결책이 없는 거예요.
이것을 칼 바르트란 신학자들은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위기라고 한다는 것은 그냥 낯선 세계의 접합 정도가 아니죠. 낯선 세계 접합하면 오히려 ‘신기하다, 반갑다.‘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반갑다‘가 아니라 ’고맙네‘가 아니라 뭐라고요? 위기, 뭔가 깨어진다는 것. ’야, 우리가 당하겠네. 우리가 그동안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3일 다큐멘터리 괘릉마을 아기자기한 이 3백년 마을 이 마을이 전부라고 여겼는데 여기에 갑자기 위에서 뭔가 조치를 해버리면 뭘 느끼느냐 하면 도대체 새로운 개념들이 나와요.
‘나는 왕이다.’ 했다가 뭔가 하나 쳐들어오면 ‘주여 왕이 뭡니까?’라고 질문해야 되고, ‘저 사람들은 신하다.’ 이렇게 나오다가 위에서 뭔가 계시가 내려오면 ‘하나님, 신하가 과연 무엇입니까?’ ‘나는 잘났다’ 이러는데 뭔가 하나 계시가 오게 되면 ‘과연 나는 잘난 존재입니까?’라는 물음이 생기죠. 위기에서 뭐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심각한 물음, 어떤 질문이 나오죠. 그런데 질문 대상이 없어요. 누구한테 질문하는지를 몰라요. 그냥 뭔가 당황스러워요.
이러한 다니엘에게 일어나는 현상은 육의 세계에 대해서 영의 세계가 쳐들어 올 때 공통적으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 저 누굽니까?’ 또는 ‘주여, 날 찾아오신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들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영과 접촉이 된 사람 이예요. ‘아, 저 사람 내 딸입니다.’ 이랬다가 주께서 찾아왔는데 ‘딸이라는 게 과연 무슨 뜻입니까? 자식이라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마누라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남편이라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개념을 새로 정립하자. 주께서는 니가 갖고 있는 개념을 새로 정립하자는 거예요. 돈이 무엇이며 사회가 무엇이며 국가가 무엇이며 정의가 무엇이며 심판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이며 십자가가 무엇이며 모든 개념을 다시, 다시 재정립, 정립 다시 하는 그러한 과제를 우리에게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이걸 다시 정리한다면 다니엘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눈에 보이는 사람끼리 찍어놓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냥 다니엘 느부갓네살 그 수다 떠는 것 그게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다니엘도 아니고 느부갓네살도 아니고 우리끼리 땅에 있는 지평적인 사람이 아니라 다른데서 그냥 침범하듯이 어떤 위기가 조성되면서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쳐다보게 되고 다니엘 또한 느부갓네살을 쳐다보고 과거 이스라엘 유다나라를 다시 한 번 재현해서 다시 해석을 하게 되고 모든 게 뒤죽박죽 가운데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끝났는가, 정도가 아니고 인류의 역사라는 게 과연 무슨 의미냐, 무슨 목적으로 그전의 역사들이 왜 있어야만 했던가, 단순히 이렇게 끝난다가 아니라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역사를 왜 위기, 앞에서도 이런 역사들이 이렇게 진행되었어야 했는가를 다시 한 번 소급해서 다시 아는 거예요.
그런 가운데서 왜 이스라엘 말고 이방나라 바벨론은 왜 있어야 되는가, 더 나아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쳐들어오는 하나님에 의해서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의미로 이 땅에서 활동을 해야만 하는가, 그런 문제들이 죽 둘러져 있죠. 이쯤해서 어려우니까 제가 결론부터 미리 당겨주는 것 있잖아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사람의 활동과 아무상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활동이 아무 상관이 없고 세상이라 하는 것은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세상이라 하는 것은 만들어져 왔습니다. 죄가 무어냐, 그 다음에 하나 더 알기 위해서 용서가 무어냐, 다른 말로 긍휼이죠. 죄가 무엇이며 긍휼이 무엇이냐를 알기 위해서 이 세상은 그동안 죽 이어온 거예요.
이 죄라는 것은 사람의 행동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우상 섬기는 거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 섬겨서 망했다면 이야기를 그걸로 끝나야 됩니다. 옛날에 한 때에 이스라엘 나라가 있었는데 우상 섬겼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야기 끝. 접자. 끝났다. 이렇게 돼야 될 텐데 그 우상 섬긴 이스라엘을 바벨론 품속에다 집어넣는 것은 단순히 우상 섬긴다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 있는 게 아니에요.
다른 거, 이 긍휼로만 구원되기 위해서 맞은편에 수립돼야 될 새로운 가치체제, 이게 바로 죄악입니다. 긍휼과 대비되어서.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이스라엘 살리고 이방나라 조진다. 이방나라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구원하기 위해서 ‘너희들은 구원 안 해줘.’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로 만나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뭐냐 하면 긍휼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것은 죄에 해당돼야 된다는 거예요. 이건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죄가 아니라 짓거나 안 짓거나 상관없이 죄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게 기쁜 소식 이예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상관없이 죄이어야 하는 거예요. ‘엄마, 나는 왜 황인종이야?’ ‘이유 없어, 너는 무조건 황인종이야. 대한민국에 태어났으니까. 엄마한테 태어났으면 황인종이야.’ 이건 내가 나쁜 짓해서 백인에서 황인종 된 게 아닙니다. 더 나쁜 짓하면 흑인 됩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인간은 무조건 죄인 되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죄 지었다.’가 아니라 인간은 죄가 무엇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겁니다. 선악과는 심어져야 되고 인간은 따먹어야 하고 그래서 죄는 드러나야 하고, 이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왜 기쁜 소식이냐 하면 이러한 원칙을 우리 손에서 조정하지 않고 우리 손에서 변경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굉장히 가뿐한 거예요. 이건 우리 선에서 어떻게 운명을 조절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봄 지나고 여름 오죠? 지난여름 더웠잖아요. 여름 지나면 뭐가 옵니까? 가을 오잖아요. 가을 오는데 여러분 해준 거 뭐 있습니까? 없죠. 그거라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구원받는데 아무것도 우리가 한 게 없어요. 이게 기쁜 소식, 복음 이예요. 어떻게 헌금을 하고 어떻게 전도를 하고 아무 필요 없어요. 그냥 그렇게 ‘니는 천국 가야만 하리. 너는 긍휼을 입어야만 해야 될 사람’이예요. ‘긍휼이 왜 옵니까?‘라고 묻지도 마세요. 그런 질문 성립 안 돼요. 이렇게 물어요. ’긍휼이 무엇입니까?‘ 이러면 돼요. ’죄가 무엇입니까?‘ 이건 되는데 ’내가 죄를 알면 구원받습니까? 긍휼을 알면 구원받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안 돼요.
내 운명은 내 선에서 이미 끝나버렸어요. 내가 어떻게 조치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다루고 관리하고 조정할 대상에서 벗어났습니다. 다니엘은 주님의 계획에 말려든 사람입니다. 다니엘과 3친구의 운명은 전혀 자기가 자기를 손댈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일단 그렇게 시험적으로 결론을 내려놓고 이제부터 어려운 쪽으로 해보겠습니다.
자연 질서에 문화질서가 여기에 어떤 식으로 접촉이 가능한가, 자연 질서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여러분이 거기 있고 부모로부터 내가 태어났고 산은 저기 있고 별은 여기 있고, 그냥 있는 것. 자연 질서라 하는 것은 사람이 손댔다? 안 댔다?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게 자연 질서예요. 사람이 해를 안 만들고 달을 안 만들었잖아요. 태어나 보니까 하늘에 달 떠있고 별 떠있다 말이죠. 이건 자연 질서예요.
그런데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연 질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신을 찾지 않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존재가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쫄릴 수밖에 없고 ‘예, 알아서 기겠습니다.’라고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에 이 회사에 딴 거는 다 아는데 국정원에서 물건 하나 ‘사장님 이 물건은 국정원에서 대통령이 맡겨 놓은 물건인데 맡깁니다.’ 해서 물건이 여기 있으면 청소를 하면서 다른 곳은 함부로 하고 깨져도 괜찮은데 그런데 이쪽을 하다가 대통령이 맡긴 물건이 있으면 되게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자칫하다 깨지면 물어줘야 되고 책임추궁 당해야 되고 보통 문제가 아니라 말이죠. 폭발물일 수도 있고, 딴 거는 큰소리치는데 그쪽에 오면 큰소리 못 치는 겁니다. 큰소리 못 치니까 남겨뒀으니까 자기 맘 한 구석에 자유스럽지 못한 어떤 족쇄하나 있잖아요. 고 자리를 뭐로 메꾸느냐 하면 신의 자리로 채우는 거예요.
여기서 요기까지는 내 꺼, 내가 만들지 못하고 내가 손대지 못하는, 예를 들면 나의 미래, 내가 농사짓는데 비가 내리고 적절하게 햇빛 비취고 하는 이런 거, 우리가 갖지 못했잖아요. 그거는 ‘우리 신의 몫입니다.’ 요렇게 해줘야 신과 나 사이에 균형이 잡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종교라 이야기하고 이게 문화질서입니다.
자연 질서에 뭐를 입히는 겁니까? 문화질서를 입힘으로써 이 전체를 합해서 이걸 현실이라 합니다. 다니엘을 설명할 때 이 점을 반드시 언급해줘야 되는 이유는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자연 질서에다 뭐를 추가했습니까? 문화질서를 추가한 거예요. 그 문화질서를 추가하면서 나온 게 종교라 했죠? 느부갓네살은 이 종교로 만들어 국가를 집어넣은 겁니다.
자, 그러면 자연 질서는 반복입니다. 오늘 해가 동쪽에서 떴는데 내일은 서쪽 뜨고 다음 날은 남쪽 뜨고 이러면 곤란하잖아요. 1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해는 어디서 뜹니까? 동쪽에서 뜨죠. 이건 사람이 손댑니까? 손 안 댑니까? 이건 손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역사라는 것, 특히 역사라 하는 것은 실체가 있어야 됩니다. 그냥 역사 하면 말도 안 돼요. 무슨 역사? 니 가정 역사야? 국가 역사야? 옳지 국가 역사. 내가 소속된 바벨론 국가 역사는 자연 질서가 아니고 무슨 질서? 문화질서에 속하죠. 문화질서와 자연 질서를 합해서 사람들은 뭐로 본다? 이게 신이 만든 현실, 이게 현실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관심사는 뭐예요? 자연 질서에 있겠습니까? 문화질서에 있겠습니까? 문화질서에 관심 있죠. 신을 믿는 이유도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유도 전부 다 문화질서, 다시 말해서 내가 속해 있는 국가의 번영된 역사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16세기 들어와서 이게 문제가 있어버렸어요. 무슨 문제냐 하면 서양의 중세에 카톨릭 있죠? 그게 무슨 질서입니까? 중세 카톨릭 교회는 자연 질서가 아니고 문화질서죠. 자연 질서에다 뭐를 더한다? 문화질서를 포함해서 이것이 현실의 전부라고 보잖아요.
내가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동그란 원이 있고 길쭉한 타원이 있습니다. 타원은 중심이 2개예요. 원은 중심이 하나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이라면 천체 공정 괘도를,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원으로 만들겠습니까? 타원으로 만들겠습니까? 원이 완전에 가까워요? 쭈그러진 진 게 완전에 가깝습니까? 원이겠죠. 다들 그렇게들 알고 태양계를 바라본 거예요. 그런데 케플러란 사람이 우주의 괘도가 원이 아니고 초점이 2개인 타원이라는 걸 밝혀냈습니다. 그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문화질서 안에 신이 있죠. 신은 완전하죠. 그럼 우리가 완전한 것은 원이 완전한 거예요.
이런 삼각형이 완전합니까? 정 삼각형이 완전한 거예요? 정 삼각형이 완전한 거예요. 우린 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원이 완전한 거예요. 찌그러진 타원은 불완전한 거예요. 문화질서 가운데 신이 있잖아요.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이렇게 생각하죠. 문화질서가 자연 질서를 해석하고 이해하니까. 신이 자연 질서를 했다면 자연 질서하고 내가 생각한 문화질서하고 일치성을 가질 때 우리는 그 신은 똑바로 신을 믿고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거예요. 신을 똑바로 믿으면 죽어도 어디 가겠어요? 하나님이 만든 천국에 가죠. 왜, 살아있을 때 제대로 하나님을 알았으니까. 완전한 걸 알았으니까. 왜 문화질서에서 제대로 안 신이 죽고 난 뒤에 자연 질서를 만든 그 하나님이 우리가 문화질서 속에서 믿었다. 딱 일치된다. 그럴 때 우리는 죽어도 안심 푹 놓고 죽을 수가 있는 겁니다.
교회가 해야 될 일이 그 일이라. 교인들, 오는 고객들에게 ‘이거 믿으시면 안심하시고 오늘 죽어도 괜찮습니다. 푹~ 쉬세요. 우리가 알아서 정답 내놓습니다.’ 이렇게 할 때 안심 놓고 ‘믿습니다.’하는 거예요.
수요일 날 했죠? ‘믿습니다.’하는 것은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고 이건 주관성이 아니고 객관적이다. 뭐를 믿느냐, 예요. 어떤 객관을 믿는가가 믿음이고, 행함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주관적인 의지를 행하는 게 행함이라 했죠. 자기 의지를 믿는 건 아니에요. 자기 행함을 믿는 게 아니고 믿는다는 말은 어떤 믿는 객관적인 내용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 내용을 중세 문화질서가 교회가 해줬다니까요. 오는 사람에게. 신부한테 고해하면 하늘에서도 당신의 죄를 신부를 매개로 해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만약에 신부한테 입으로 발설 안 하면 당신은 그 죄를 갖고 있을 것이고 성당에 나와서 삐딱하게 앉아있는 신부에게 고하기만 하면 안 되고, 신부에게 고하고 신부가 용서를 해줬을 때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릴 것이라는 마태복음(16장 19절, 18장 18절)의 말씀에 의해서 당신의 죄는 사해집니다. 돈 내세요. 죄 많이 짓거든 돈 많이 내고 적게 지면 돈 조금 내도되고, 나중에 모아서 연말에 내고, 그런 문화질서를 자연 질서와 일치된다고 여기면서 중세가 그렇게 지내온 겁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오늘날 교회가 무슨 소리합니까? 우리 교회가 있는 것, 우리 예배당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정한 문화질서에 속한다. 이것은 주께서 인정한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 교회를 저주하는 것은 곧 누굴 저주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죠. 왜, 문화질서와 자연 질서가 일치된다고 그렇게 교인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왜 가르쳐야 됩니까? 그래야 그 교회에 와서 등록하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땡그랑’하고 합격이 되기 때문에.
교회들이 성만찬, 세례식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를 아시겠죠? 오는 손님들에게 모호하게 해버리면 장사가 될 수가 없어요. 확실한 걸 주고 돈 받고 확실한 걸 줘야 되죠. 돈만 받아놓고 어설프게 해버려서 구원도 못 받으면 돈 내놓으라 하면 환불해줘야 돼요. 안되잖아요. 그래서 ‘당신 교회 목사 엉터리다.’하는 것은 누가 더 화를 내요? 목사가 화내는 게 아니고 누가 화를 냅니까? 거기 다니는 교인들이 화를 더 내요. 자기는 우리교회 짓는데 돈 바치고 눈에 보이는 강대상이 있는 것을 믿는다는 거예요. 객관성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루터, 칼빈 거론하면서 교회 등록하지 않은 사람은 뭐도 없다? 구원도 없다.
소위 개혁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그것에 완전히 빠졌는데 그 교회가 만약에 엉터리라 해버리면 그 교회가 문제가 아니에요. 철석같이 믿었던 자신의 객관성, 자기의 믿음의 내용이 달라져 버리면 지금까지 믿은 것이 결국은 오늘밤 죽으면 자기를 천국에 못 가게 만드는 엉터리 믿음을 믿은 게 되니까 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청춘을 이 역사를 누가 보상해줘요? 누가? 누가 위로해 줘요? 안 되죠. 그러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고 인정해 달라, 교인들이 그것만 요구하는 거예요. ‘목사님 저 믿는 것 맞죠?’ ‘맞습니다.’ ‘됐어~’ 그것만 믿는 거예요.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정기적으로 성만찬에서 떡 떼고 세례만 주면 그거면 공부 안 해도 되잖아요. 물만 뿌리면 되고 떡만 먹으면 되는데 얼마나 편합니까? 그러면 자기는 확실히 구원받으니까. 그렇게 편한 게 어디 있습니까? 착한 일은 김수환 추기경이 다하고 우리는 존경만 해주면 되고.
이게 방금 제가 이야기한 무슨 질서라 했습니까? 이게 문화질서죠. 그 문화질서가 오늘날 교회 내에 들어왔습니다만 다니엘에서 이 문화질서를 누가 이룬다? 바로 느부갓네살이 이루는 겁니다. 이 문화질서에는 자연 질서와 일치시키기 위해서 문화질서와 궁극적으로 하나로 만나기 위해서 여기 뭐가 필요 하느냐, 바로 역사(歷史)가 필요했던 겁니다. 우리 역사의 끝은? 천국에 골인이다. 그거였던 겁니다.
마라톤 선수가 마라톤을 하면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아저씨, 그 길 아닌데요. 사이드카가 인도하는 다른 선수들은 저쪽으로 갔는데요. 혼자 왜 이 길로 옵니까?’ 그래서 보니까 ‘아무도 없네.’ 그건 백날 뛰어도 허공을 뛴 것밖에 안 되죠. 헛짓 한 거예요.
그래서 내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방향이 지금 내가 지금 교회 다니고 하는 모든 문화질서가 실제로 자연 질서와 끄트머리는 딱 아다리, 만나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한 문제예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이 역사를 끌고 가는 겁니다. 국가라는 문화질서를 끌고 가는데 느부갓네살이 끌고 가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은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느부갓네살이 끌고 가는 게 아니고 누가 끌고 가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끌고 사는 거예요.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면 바다로 끌고 갑니다. 야! 이게 어렵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바다의 짐승입니까? 땅바닥 기는 짐승입니까? 땅바닥 기는 짐승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뱀은 어디서 기어 나온 뱀 이예요? 바다에서 나오죠. 어떻게 해서 땅에서 기는 짐승이 어떻게 해서 바다에서 기어 나옵니까? 이거 요번 시간에 해결해야 돼요.
아! 보통 어려운 문제 아니죠? 처음부터 창세기 3장에 바다에서 뱀이 기어 올라와서 뱀이 꼬였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되는데 처음부터 그냥 에덴동산에 있는 뱀 이예요. 뱀이 어떻게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느냐, 그 중간에 뭐가 있느냐, 다니엘이 있습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이 뱀이 바다와 연계된 짐승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거죠.
그 짐승 역할을 누가 하느냐, 바로 문화질서를 구현한 느부갓네살이 그 역할을 단단히 해줘야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사실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주께서는 짐승으로 보거든요. 느부갓네살 뿐만 아니고 느부갓네살 후임자도 다 짐승입니다. 짐승 1, 짐승 2, 짐승 3, 그런데 그 짐승은 나중에 다니엘 보면 나오지만 짐승들이 어디서 올라오느냐 하면 느부갓네살 이후의 짐승들이 바다에서 올라오죠. 맞죠? 바다에서 네 짐승 올라오죠. 거기에 유념해야 될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요번에 태풍 불었잖아요? 무안 저쪽에 분명히 태풍불기 전에는 섬이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태풍 부니까 파도가 넘치니까 잠시나마 섬이 뭐로 변했습니까? 바다 일부로 변해 버렸어요. 바다 물이 넘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섬겨서 범죄하고 난 뒤에 어느 품에 안겼느냐 하면 바벨론이라는 나라 품에 안깁니다. 이 바벨론의 품에 안길 때는 이스라엘도 생각했고 다니엘도 그렇게 다들 생각했습니다. 바벨론도 다른 이스라엘처럼 땅에 속한 나라라고 그렇게들 알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이 바다에 속한 나라라는 생각을 감히 어느 누구도 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뜸들이지 말고 어렵지만 쉽게, 쉽게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이죠? 땅은 땅인데 무슨 땅? 약속의 땅이죠. 약속의 땅을 그냥 복주머니로 봅시다. 요걸 끈을 풀면 뭐가 나와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약속의 보따리니까 약속이 나오죠. 그런데 약속이 약속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많은 개념들이 묶어서 약속이 되는데 그 많은 개념이 뭐냐 여자, 땅, 율법, 의, 메시아, 인간, 하나님, 바다, 짐승, 악마, 말씀, 온갖 개념들이 약속이 구체화돼서 이 안에 담겨 있다 말이죠.
그러면 약속의 보따리를 툴툴툴 털어내면 뭐가 나오겠습니까? 새로운 의미를 가진 땅이 나올 것이고, 새로운 의미를 가진 바다가 나올 것이고, 새로운 개념을 갖고 있는 창조 세계가 약속 속에서 펼쳐지겠죠? 그 중에 하나 땅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갔을 때 그들은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했던 겁니다.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11장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야기할 때 그들의 인생을 나그네 인생이라 했거든요. 그 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들보고 나그네 인생이라 하면 누가 화를 내느냐 하면 서울역 앞에 있는 노숙자들이 화를 내요. ‘무슨 부동산 가진 나그네가 있노?’ 정작 나그네라면 누가 나그네다? ‘부동산 안 갖고 있는 거지인 우리가 나그네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부동산을 가지고 정착해 있어도 나그네예요. 그걸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땅을 많이 가지고 부동산을 가지고 재산을 가지고 지상의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성도는 무조건 나그네예요. 그거는 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언젠가 했는데, 애굽이 무슨 땅이냐 하면 창세기 10장에 보면 애굽이 함 땅입니다. 함 땅인데 셈과 야벳이 있잖아요. 가나안 땅도 함 땅 이예요.
땅이라는 게 이렇게 있다면 그 시대 맞춰서 땅의 개념이 성립되고 그 다음 시대가 되면 새로운 땅의 개념이 성립되고 그 다음 시대에도 새로운 땅의 개념이 생겨나요. 이게 어디로 가느냐 하면 결국 땅은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리스도가 만들어 내는 부활의 세계가 그게 약속의 땅 이예요. 그 약속의 땅이 조명발로 비추니까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3자로 그림자라 합니다. 그림자로서의 땅이죠.
그림자라 하는 것은 실체는 따로 있는 그것의 그림자죠. 현재 우리한테 생명이 있잖아요. 이 생명은 그림자로서의 목숨이고 생명입니다. 그래서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는 그림자 목숨 죽고 나흘 만에 그림자 목숨 살고, 그림자 목숨 날라 가고 나흘 만에 누이동생 보여준다고 그림자 목숨 다시 찾아오고, 군대 2번 간 거예요. 강남 스타일, 가수 싸이 같아. 훈련소 두 번 갔어요.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마르다 마리아가 오빠를 보고 울 때에 오빠 보고 안 됐다고 우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아줌마들이 울었잖아요. 운다는 것은 뭐를 뜻하느냐 하면 ‘아직 나는 살았는데, 아직 나는 안 죽었는데 아이쿠, 저 양반은 나보다 일찍 죽었노, 나는 아직도 이 귀한 생명 아직도 이렇게 간직하고 있는데, 세상에 불쌍한 우리 오빠는 먼저 죽었구나.’ 자기 생명이 생명인 줄 알고 착각해서 먼저 죽은 오빠에 대해서 그렇게 애닳아 하는 거예요. 그게 그림자인 줄도 모르고. 오빠는 ‘니 갖고 있는 생명 아니고 그림자로서의 생명이다.’ 진짜 생명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 이예요. 예수님 자신. 아, 이 말이 어려워요. ‘생명이 저기 있다.’ 하면 쉬운데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다. 예수님 부활의 세계가 생명이다. 그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으면 우리는 이미 죽어도 산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기존의 목숨과 생명, 이걸 사는 거라고 우기는 사람한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 날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떡으로가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할 때 에스겔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말씀이 작동하니까 그 기능 따라서 에스겔이 움직일 때 그 관계가 살았다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주의 말씀이 안 들어온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살아도 산 게 아니고 그건 죽은 거죠. 그러니까 저 길에 다니는 사람은 다 죽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거예요. 거의 대부분 다 죽은 사람들이라니까요. 다 좀비라니까요. 김혜선씨 표현에 의하면 이건 기계. 그냥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작동하고 밥 주면 좋아서 헤헤 웃고 없으면 ‘아이고 배고파라.‘ 하는 기계 같은 존재예요. 생명이 끊어진 거예요.
생명이 끊어진 것은 약속의 땅에서 못 삽니다. 다른 말로 하면 땅이 아니에요. 그래서 느부갓네살 보고 ‘니는 다니엘이 있는 곳에, 그게 땅이니까 땅에서 꺼져라. 나가라.’ 이 말 이예요. 그 땅에서 나가버리면 창조 때 땅이 어떻게 됐습니까? 바다에 둘러 싸여서 땅이 생겼잖아요. 그러니까 땅에서 꺼지면 다 어디예요? 그게 전부 다 바다죠. 바다에 사는 걸 짐승이라 합니다.
문제는 이거예요. 문제는 이스라엘 나라가 유일하게 약속의 땅에서 왔다는 거예요. 그림자가 되든 뭐든 간에 약속의 땅에서 들어온 이상 빼도 박도 못합니다. 지가 ‘나 약속의 땅에서 안 살래.’ 도망쳐도 도망칠 수가 없어요. 약속의 땅이 따라오면서 약속의 땅 되게 만드는 작업이 택한 백성에게 덮쳐옵니다. 우리 예수 믿지 맙시다. 그래야 돼요. 따라오면서 믿게 해요.
사실은 우리는 매일같이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 생각 안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 생각 안 하는 인간을 동원해서 기꺼이 약속의 땅이 뭔가를 우리한테 귀신 씌우듯 우리한테 덮어씌워버려요. 덮어씌워버리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보자, 내가 지금 사는 게 나그네인가?’라는 것을 느끼게 만듭니다. 거지라서 나그네가 아니에요. 소유가 없어 통장이 없어 나그네가 아니라 다른 거 다 갖고 있으면서도 ‘나 분명 나그네지, 아마 나그네일거야. 나그네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그네 같은데.’ 뭐가 없어서 나그네가 아니라 있어도 나그네 같아. 이상해요. 말로 설명이 안 돼요. 이상스럽게 나그네 같아요.
방금 이것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느부갓네살 = 정박지, 정박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해변 가에 배가 한번 대보는 거죠. 오늘 이 항구에 한번 정박해 볼까? 그냥 잠시 멈추는 거죠. 오늘 저쪽 해변에 정박해 볼까? 고 정박. 정박이라 하는 것은 뭣과 뭐의 접촉점이냐 하면 바다와 육지의 유일하게 접촉선을 드러내는데 그 접촉선을 누굴 통해서?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은 뭐를 꿈꿨다? 문화질서를 꿈꿨다. 그 문화질서는 뭐를 노렸다? 자연 질서와 궁극적으로 일치 될 것이라고 믿었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은 뭐냐 하면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이것이 유일한 땅이라고 여겼어요. 유일한 땅이라고 여긴 거기에 진짜 약속의 땅에서 살아본 이스라엘의 패잔병들, 남은 자, 다니엘과 3친구가 옴으로 말미암아 그들 속에 약속이라는 보따리를 가지고 오니까 갑자기 땅의 개념이 몇 개가 돼 버려요? 땅의 개념이 하나가 아니고 둘로 된 거예요. 니 땅이 땅이냐, 내 땅이 땅이냐, 어느 것이 주께서 창조할 때 의미 있던 그 땅이냐, 새로운 땅 개념이 발생되는 겁니다.
진짜배기 약속의 땅이 옴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땅이라고 우겼던 그들은 뭐도 밀렸습니까? 이건 땅이 아님이 드러나고 만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들의 모든 문화질서는 교회라든지 하나님이라든지 신학이라든지 국가라든지 역사라든지 모든 것은 진짜 약속 앞에서는 그것은 다 짐승들이 지어낸, 조작해낸 바다에서 조작해낸 바다의 확장 면이었던 겁니다.
이 정박지가 땅에서 보면 정박지지만 바다에서 보면 바다의 끝 지점 이예요. 바다의 끝 지점과 땅의 끝 지점이 느부갓네살 왕의 존재로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은 죽었다? 안 죽었다? 안 죽고 드디어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게 역사라는 물결과 묵시의 만남이죠. 역사와 묵시의 만남!
그렇다면 자연 질서에다 문화질서를 덧입히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겠죠. 이걸 잘라버리고 자연 질서와 문화질서를 구분해서 잘라서 집어 던져버리면 남는 것은 자연 질서만 남겠죠. 그러면 진짜 있는 이 자연 질서는 결국은 누굴 위한 자연이었습니까? 바로 다니엘을 통해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과 연결된 그 자연 질서, 그 땅이요, 그 해요, 그 달이요, 그 별이지, 인간이 지 사는 걸 긍정하고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있어야 될 해와 달과 별은 아니었던 겁니다. ‘나 여기 있다, 자연아 날 먹여 살려라. 왜 비는 안 오느냐, 비야 와다오. 왜 남의 자식은 멀쩡한데 내 애는 아프냐.’ 그게 성립됩니까? 성립 안 됩니까? 성립 안 되죠.
이건 성립돼요. ‘하나님이여, 나는 내가 지어낸 날 위한 문화질서는 다 죄악된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연 질서에 합한 사람이 돼 버려요.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면 어디 소속됩니까? 주님의 약속과 결부된 자연 질서 가운데 한 인간이 나가 되는 겁니다.
자, 이러면 첫째 시간에 대충 내릴 결론은 나와 있죠. 새롭게 뭘 없애는 게 아니에요. 그냥 놔두고 다니엘을 통해서 현재 기존에 있는 국가들하고 접촉을 시도해서 이 자연은 오직 나 하나 살리기 위해서, 우리나라 잘 되기 위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있기 위해서, 신은 존재한다고 여기는 그것을 뭐로 교체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에 속한 백성, 돌이 날아와서 우상의 발을 깨뜨릴 때 태산이 되잖아요. 그게 인자의 나라 아닙니까? 하늘나라를 위한 자연 질서에 편입돼야 이게 옳은 겁니다.
우리 속에 남아있는 나 위주의 것은 짐승의 것으로 바다 속으로 분류되고 그러한 우리를 그리스도 나라에 일치시키는 작업이 여기에 있어야 되겠죠. 그게 필요하겠죠. 그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를 그걸 잠시 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모세와 다니엘의 비교, 모세와 다니엘이 어떤 차이점이 있고 어떤 일치점이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죠. 모세는 독립투사죠. 웃통 벗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뛰었잖아요. 박 정우 선수가. 그걸 보고 감독이 우리 팀에 독립투사 들어왔다 이야기하거든요. 모세는 독립투사였습니다. 뭘 살리기 위한 독립투사였습니까?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죠. 그 백성 다니엘 시대에 없습니다. 기껏 다니엘과 3친구 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다 떨어져 버리고 없다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거론한 것은 모세라는 인간 속에 바깥에 있는 엄청난 것이 모세 안에 이미 담겨있다는 거예요.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일 때는 사적인 감정 때문에 쳐 죽인 게 아니고 모세 품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비전과 꿈이 있었던 거예요. 박정우가 독도는 우리 땅 들고 있는 것이 지가 동메달 안 받기 위해서 그 짓 했습니까? 이참에 ‘일본 놈들아, 독도는 우리 것이다.’라고 알리고 싶어 하는 그 애국심이 안에 내장돼 있잖아요.
모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전체 우리 히브리인들을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그런 게 다 들어있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각각 개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이미 전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제가 그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개인 속에 ‘나는 우리 집구석 밖에 몰라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밖에 나가면 태극기 나오고 하면 눈물 흘립니다. 인간 속에 국가라는 것, 내 민족, 내 국가, 나의 문화질서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뭐 어린애라고 적게 들어있는 게 아닙니다. 어릴 때 우리 배웠잖아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애들도 다 이게 들어있다니까요. ‘아이고, 나는 개인이니까 내가 뭐 압니까? 나는 조금밖에 생각 안 합니다.’ 그러한 핑계를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핑계 댈 수 있다? 없다? 핑계 댈 수 없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무한이 나와요. 요거 설명하고 10분 쉽시다. 1을 뭐로 나누면 ∞(무한)이 나오느냐, 1을 1로 나누면 1이죠. 1을 0.5로 나누면 뭐가 나옵니까? 2 나오죠. 1을 0.1로 나누면 10이 나오죠. 결국은 1을 0.00000001로 나누면 점점 뭐에 가까워요? 무한에 가깝죠. 1을 신이라면 신의 무한은 뭐가 들어가야 돼요? 내가 너무나 미약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점점 더 느끼면 느낄수록 세상은 무한이 되겠죠.
그런데 보세요. 0.00000001이 자기는 작다고 생각하는데 동그라미가 몇 개입니까? 엄청나죠. 이 동그라미 숫자만큼 이게 뭐냐 무한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속에 ‘아이고, 난 단출해, 난 나밖에 몰라.’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거예요. 우리 안에 뭐가 들어있다? 무한(∞)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악마 들어있다. 우리 안에 바다 들어있고 짐승 들어있어요.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우리 안에 선악과 따먹었으면 이미 우리 안에 신 들어있는 겁니다. 작은 신 아닙니다. 큰 신이예요. 아주 엄청난 신입니다. 이것과 바깥에 있는 신이 어떤 대결을 이룰 것인가,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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