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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말일의 산 120909우리교회미가

말일의 산 120909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말일의 산 (미 4:1-2)

이근호

12-09-09 15:34

말일의 산

2012년 9월 9일 본문 말씀: 미가 4:1-2

(미 4:1, 개역)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미 4:2, 개역)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사람들은 마지막을 무척 싫어합니다. 자신들이 평생 일구어놓은 것을 다 파괴하는 날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처하는 방식은 인간을 향하여 날아오는 간섭과 지시와 명령은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식이었습니다. 선악과 나무 열매를 먹으므로서 원초적으로 더 이상 명령하게 명령할 게 없는 관계로 정립하고자 했습니다.

인간들이 뭘 하든지 간에 일체 심판하거나 평가내리는 않는 그런 관계로서 신과 교류하고 싶어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은 신을 평가하되 신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근원은 출생지와 출생날짜로 짜여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태어나면서 발휘하게 되는 시간관과 공간관입니다.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출생날짜와 출생지역과 관련 있습니다. 자신이 만약에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그 이후에는 무조건 일본에게는 져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한국 땅에서 한국민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출생 날짜를 가지고 이 사회에서 격에 많은 어른 대우를 받고 싶어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시간관과 공간관은 자기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서 대우를 받고 존귀를 받고 영광을 받고 싶어하는 본능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원래 없었는데 지금은 있음에 대해서 그 자체로 영광받아도 마땅한 존재라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음에 나는 당연히 존귀함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요구는 대인관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같이 시도됩니다. 즉 신이라고 해서 날 무시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를 무시하지 않을 경우에만 본인도 신을 신답게 대우할 마음이 갖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자기에 대한 과도한 신자 노릇은 평생을 통해서 반복됩니다. 단 한시도 자기 존경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을 언급한 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미워지는 법입니다. 즉 내가 더 살고 싶다는데 왜 신은 자꾸만 모든 것을 끝장내려하느냐 겁니다. 당연히 자신의 육적인 본성에 부합되지가 않는 겁니다. 이왕 이 세상에서 태어난 것, 영원까지 그 존재와 가치를 보장해달라는 것이 인간들이 신을 향하여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의 끝은 사실은 끝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 출현한 그 지점이요 그 시점입니다. 본디 인간이 출발한 그 곳이 ‘마지막’이라는 이름으로 마중 나오는 겁니다. 인간은 본래의 자리에 가야 비로소 인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욥 같은 이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근원 속에서 자기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곧 ‘창세 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입니다. 마지막으로 간다는 것은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작점에 합류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인간 이 전에 계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다윗 언약’에 의해서 지상에 등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윗 언약’에 준해서 재편성하십니다.

기존의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의 구분은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문자로서 가르치게 되는 그런 율법의 시대도 참된 이스라엘을 생산해내지를 못하게 합니다. 수평으로 패 갈라진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의 편성은 3D같은 입체적으로 펼쳐지면서 진수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마지막 때에만 드러나는 광경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이 민족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사모해서 마구 시온산을 향하여 달려오는 사태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의 법이란 간섭과 명령과 지시와 지배의 상징이기에 사람들이라면 질색입니다. 사람이란 자기 마음대로, 자기 편한대로 살고 싶은 심정을 스스로 포기할 줄을 모릅니다.

따라서 자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싶어한다는 것은 괴이한 현상에 속합니다. 끝을 원하고 바라고 끝을 소망한다는 것은 자신의 세상적인 시간관과 세상관을 포기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간섭받고 지시받고 평가받은 것이 좋다는 말이 됩니다. 참으로 선악과 따먹은 그 품성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 4:3-4에 보면, 끝이 왔을 때 비로소 펼쳐지는 세상상이 나옵니다.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더 이상 스스로 살기 위해서 살 필요없는 세상이 펼쳐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스스로 판단해서 사는 세상을 청산하라는 겁니다. 간섭받기 싫어하고 평가받기 싫어하는 그런 생활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러한 끝날을 사모하는 방법은 율법이 쏟아져나오는 그 곳으로 달려가라는 겁니다.

그런데 시온에서 율법을 외치는 분은 이미 다윗 언약을 홀로 다 이루신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5:1-3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아웅다웅 싸울 필요없이 홀로 다 이루신 것들을 다지고 공동으로 누리게 되는 세계를 장만해놓으신 겁니다. 그리고 그런 나라로 통하는 것은 그 예수님의 말씀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남편은 아내를 웃게 하고 아내는 남편의 이 웃김에 웃음으로 보답하는 것처럼 예수님에 의해서 늘 웃는 천국은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버티는 식의 인생을 스스로 힘들게 할 뿐입니다. 스스로 지키는 율법 같은 것들은 새로운 짐을 가중할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때가 갈수록 거북하고 싫어지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어서 그날이 오기를 원해야 합니다. 몸으로 인한 무게를 다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입혀주는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겁니다.

이 모든 혜택은 오직 십자가 복음으로 완성된 그 도(道)를 즐거워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시간이 마지막으로부터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9-10 14:37

07강-미4장1-2(말일의 산)120909-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

(IP:203.90.41.16)

07강-미4장1-2(말일의 산)1209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4장 1절에서 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3페이지입니다.

미가 4:1-2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말일이라 하는 것은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과학을 좋아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가 뭐냐 하면 심판 날에 대한 겁니다. 마지막이 있다는 거죠. 마지막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 애쓰고 노력하는 것도 다 쓰잘데기 없는 짓이 되니까 그렇다면 마지막 때가 또 언제인 줄도 모르고 오늘 9월 9일이 마지막이라고 단정 지으면 그러면 마지막 되기 전에 벌초 안 한 죄는 어떻게? 다음 주에 벌초 하려고 하는데 오늘이 마지막이 되면 조상님 벌초도 못 했는데, 추석도 못 지냈는데.

그래서 마지막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다른 뜻을 우리가 내부에서 뭔가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외부에서 오는 하나님의 뜻은 ‘마지막이 있다.’ 이겁니다. 우리 내부에서는 ‘마지막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내부에서 쏟아내는 겁니다.

마지막이 만약에 있게 되면 우리는 그 마지막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이라는 것이 그냥 마지막이 아니고 ‘얘들아, 한번 정리해 보자.’하고 장부 정리하는 시간이거든요. 그걸 회계라 하는데 회계사라는 회계 말이죠. 수지 타산 맞는가 보자, 회계하자. 이렇게 한번 니 얼마나 살았는가 한번 내놔봐라.‘ 이렇게 하니까 우리가 잘나고 못 나고는 그건 나중 문제고 누구한테 감시받고 감사받고 평가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더러운 겁니까?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독립선언하기 위해서 따먹은 거예요. 더 이상 우리보고 ‘따먹지 말라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예 선악과 자체를 없애버림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그 누구로부터 이래라, 저래라 간섭받지 않고 사는 그런 사람이고 싶어서 우리는 우리조상은 선악과를 따먹고 우리는 그 선악과 따먹은 후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상한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여기 2절 중간에 보면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온다.’라고 했어요. 평소에 우리가 율법이 어디서 나오는가, 몰라서 환장해서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그런 존재들입니까? ‘아, 율법 없어 난 미치겠다. 내가 율법 못 들으니까 밥맛이 뚝 떨어지네.’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살아갑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마지막 때가 되면 방금 이야기한 이상한 사람들, ‘나 율법 없이는 밥맛이 뚝 떨어져.’라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거예요.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지 말고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마지막 때에 건질 자를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건질 만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불쑥 불쑥 여기, 저기서 툭툭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마지막도 싫고 율법도 싫고 하나님도 싫고 신앙도 싫고 교회도 싫고 예수 싫고 다 싫어요. 내가 행한 것 빼놓고는 다 싫어요.

그런데 이상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아! 나는 율법이 최고고 나머지는 다 싫어, 나는 마지막 때가 좋지 왜 빨리 마지막 때가 안 오는지 그것 때문에 난 환장하겠어. 어서 세상 끝장냈으면 좋겠다. 나는 끝을 좋아해.’라는 희귀한 사람들이 여기서 저기서 불쑥 튀어나온다면 이미 그거는 마지막 때의 징조라고 보시면 된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 이야깁니다.

이상스럽죠? 참 이상스러운 거예요. 어디서 돈 안 주나? 돈이 없어 환장했지, 율법 없고 말씀 없고 마지막 때란 소리를 안 들어서 환장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죠. 우리교회, 십자가마을 사람 빼놓고는.ㅎ 거의 없죠.

저는 단언합니다. 사람이 심판 때를 안 좋아합니다. 안 좋아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났어요. 이거 우리가 새삼스럽게 나쁜 짓해서가 아니라 성질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태생 자체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말씀을 거부하고 율법도 싫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건 간섭도 싫고 하는 그러한 식의 정신을 우리는 뱃속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지니고 태어난 겁니다.

도대체 마지막이라는 게 뭐길래, 우리가 그렇게 심판 날, 마지막 날, 평가받는 날, 그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겁니까? 그걸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어렵게 하면 시간관 또는 확장하면 공간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자기를 추스르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민등록, 제가 가락교회 갔을 때 사무실 직원이 얼른 물어요. ‘목사님, 주민등록 번호가 어떻게 됩니까?’ 그걸 묻는 순간 주민등록 번호를 말할 수가 없었어요. 053627 하니까 아닌 것 같아요.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문등록 하는데 등록하면 지문만 대면 문이 철커덕 열리게 돼 있어요. 그래서 등록을 해야 되는데 053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530...이렇게 나와요. 따지고 보면 나이가 60가까이 됐어요.

누구나 태어난 날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마다 해마다 거역할 수 없는 자기만의 축제가 있는데 그건 자기만이 영광 받는 날, 그게 뭐냐, 케이크를 해놓고 ‘happy birthday to you' 이건 북한에도 그렇고 파키스탄, 이슬람, 사우디아라비아등 이런 나라에도 이 노래가 울려요. 생일날에는 그날만큼은 본인이 영광 받는 날 이예요.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래 잘했다. 그래.‘ 태어난 게 자랑이라고.

사람은 자신의 영광의 출발점을 자기가 이 땅에 없다가 있었던 태어난 날부터 나는 영광 받기로 합당한 존재로서 벌써 시작이 된 겁니다. 이것을 인간은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누구 만나면 제일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 만나면 ‘실례하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 말을 함부로 합니까?’ 라고 꼭 주민등록 보자 하는 식으로 ‘이씨, 나이가 몇 살인데?’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 나이 얼마나 먹었는데 나한테 딱딱 거리느냐?’ 이런 식이죠. 우리 태어난 것부터 계산하자는 거예요. 그 양이 많으면 어른 대우 받고 양이 적으면 ‘내 앞에서 눈깔아’ 이런 식으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출생을 기점으로 한 이런 시간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시간관에서 중요한 건 방향성이거든요. 나 태어났다. 남아있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밖에 없다. 해서 태어난 것부터 방향이 과거로부터 미래를 겨냥하는 식으로 쭉 나가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매몰차게 따집니다. ‘니가 예수님이 언제 태어난 걸 아느냐?’ 이렇게 나와요. 우리 몸은 우리가 태어난 장소와 고향, 고향에는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우리 부모도 포함됩니다.

드라마에 보면 출생의 비밀이 있어요. 눈에 보이는 부모가, 부모가 아니라는 거예요. 고아원에서 데려왔든지 어디서 태어났던지 복잡해요. 사람이 있는 포지션, 위치라 하는 것은 언제 태어났느냐, 그리고 누가 태어나고 우리의 태어난 고향은 어디냐, 이것이 인간의 전부입니다. 이것을 말살하면 누구든지 거기에 대해서 강력하게 이걸 저항하게 돼 있어요. 제발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과 내가 이 동네 사람이라는 그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극구 거기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합니다. 대한민국하고 일본하고 축구할 때나 다른 나라하고 하면 꼭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것은 이미 거기서 출생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출생지를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 하느냐, ‘니 태어난 거 말고 니 고향 말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그분의 고향이 어디인 줄 니가 아느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때에 산들이 높아지는데 그 중에 제일 높은 산이 시온이라 하는데 오늘 본문 내용이 그거거든요. 마지막 때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 보기는 마지막 때지만 하나님 보기에는 원래 우리가 있어야 될 원래 고향이었어요. 우리는 거기서 추방된 겁니다. 우리가 살았던 곳이 아닌 엉뚱한 곳을 고향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 믿음은 잘못된 믿음 이예요. 우리의 출발은 자꾸 언제 몇 월 몇 일 태어난 그것부터 출발하는데 하나님의 출발점은 여기서 부터가 아니라 창세전부터 출발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는 엉뚱한 것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안 붙잡아도 되는 걸 붙잡고 있어요. 그것도 힘주어 붙잡죠. 그거 놓치면 망하는 줄 알고.

처음에 천주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처음 들어왔을 때 목사님들이나 그 당시 신부들이 제사 섬기지 말라고 초반에는 강조했어요. 천주교는 제사 모신다고 환장했지만. 초반에 천주교는 제사지내지 말라 했습니다. 아직까지 그때는 신부가 순수해서 하나님 말씀 따른다고 지 딴아 따랐는데 문제는 제사를 금지하니까 죽어나가도 너무 죽어 나가요. 대원군부터. 기독교가 뭔지 몰라도 제사 안 섬겨? 그러면 제사 안 섬기면 이건 부모의 은덕을 부정하는 게 되기 때문에 이건 유교 나라의 근간이 완전히 뿌리 채 뽑히는 겁니다.

3일 찍었던 다큐멘터리를 얼마 전에 봤는데 다큐멘터리가 어디서 찍었느냐 하면 경주의 외동이란 곳에 괘릉마을을 PD가 가서 3일 동안 72시간 찍은 것을 방영한 적이 있어요. 괘릉마을이란 말은 뭐냐 하면 거기에 능이 하나 있는데 신라시대 때 왕릉이죠. 괘라 해서 걸어놓는 무덤이랍니다. 연못에다 무덤을 쓰니까 양쪽에 빠지지 말라고 걸어놓고 만든 무덤인데 그 무덤이 아주 정비가 잘 돼 있어요. 잔디밭도 잘 돼 있어요. 왜냐 하면 그 괘릉마을 400명 되는 마을 주민들이 기본 연령이 60이 다 넘어요. 이 사람들이 우리 마을이 이렇게 잘 사는 것은 저 괘릉마을의 조상님이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에 잘 살기 때문에 할머니들이 괘릉마을을 일주일에 한번 청소를 하는데 노인봉사라 해서 옷을 입고 청소를 하는데 그 능 앞에 가서 인사를 해요. 마치 천주교 신자들이 성당 들어가기 전에 마리아 상보고 인사 하듯이, 괘릉에 보면 이상한 비석 앞에서 절을 해요. 이게 뭐냐 하면 저 조상님의 은덕으로 산다는 거예요.

그러니 유교의 출발점이 뭐냐 생일보다 중요한 게 조상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조상님 위해서 하는 게 명절 아닙니까? 조금 있으면 추석 오잖아요. 아이쿠, 교회 나오면서, 그것도 권사라 하면서 조상 섬기는 것 보면, 기가 차죠.

출발지가 성경의 출발지가 기껏 조상님이 아니에요. 시간을 과거로 갈 게 아니라 우리가 맞이하는 그것이 원래 우리 출발점입니다. 뺑뺑이 돌고 다시 원지점으로 도착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게 아니고 원래 우리 자리 찾아주는 겁니다. 이래도 하나님이 싫습니까? 심판이? 새벽 2시에 돌아다니다가 성폭행 당하는데 그 돌아다니는 애를 선도해서 ‘애, 이게 니 집이야. 이게 니 자리야.’라고 찾아주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 이예요.

돈 다 허비한 탕자, 집으로 가게 되면 집에 가면 원래 탕자가 나왔던 그 이상의 만반의 준비 된 게 나옵니다. 그게 오늘 본문 3~4절에 나오는데 준비된 게 뭐냐 하면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이 대목은 이사야 2장에 보면 똑같은 대목이 또 나와요. 이사야 2장 4절은 오늘 본문보다 더 풍성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더 이상 누구하고 싸울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이 니 행한 것과 관계없이 니가 이 세상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했는가, 관계없이 이미 복을 주려고 만반의 준비된 곳이 있다는 겁니다. 있는데, 거기를 왜 못 찾아가느냐 하면 그 본향을 찾아가는데 유일하게 연결돼 있는 것이 율법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잃어버린 다시 찾게 해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지 고향 찾는 사람은, 다른 말로 하면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그 율법이 어디서 나오느냐, 율법이 나오는 그곳이 우리가 가야할 그곳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비록 이방인이라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온의 사람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그에게 부여되는 겁니다. 필리핀 사람이라도 이스라엘로 쳐주는 거예요. 브라질 사람이라도 이스라엘로 쳐주는 겁니다.

그 율법이 나오는 곳이 어디냐, 주님께서 그걸 가르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서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주께서 산에 올라 가사 입을 열어 가르치시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이건 뭐냐 하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여기에 가야 본향으로서 거기에 살게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 때라 하니까 자꾸 늬앙스가 조지는 것, 파괴하는 것, 불 질러 버리는 것, 그동안 우리가 공들였던 것을 다 무시하는 하나님, 아이구, 무서운 하나님, 하지만 그 심판이라 하는 것은 원래 원판이 있기에 가짜, 원판이 있기에 덧붙여진 가짜를 좀 떼는데 그게 좀 아파요. 가짜 떼면 진짜 나오는데 그 가짜 떼려고 하니까 그걸 못 떼게 하려고 붙드는 겁니다. ‘하나님, 나 이거 떼면 죽습니다. 이거 떼면 나 못 삽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무심할 수가. 아예 나를 죽이려고 작심을 하셨군요. 내가 하나님한테 이익 보려고 믿었더니 하나님이 나한테 와장창 인간을 망하게 만드니 이러면 안 됩니다. 이럴 수는 없나이다.’ 이렇게 반항을 하는데 주께서 우두둑 다 떼버리면 예상을 초월한 상상을 초월한 큰 복이 바로 그동안 우리의 가짜에 우리들의 어설픈 종교 같은 이걸 덮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예배당 크게 짓고 선교회비 돈 내라 하는 것도 웃기는 거예요. 그게 전부 다 가짜에 가짜 덧대게 한 거밖에 없어요. 그거 뜯어낼 거예요. 돈 안내도 구원받고 헌금 안 해도 구원받고 전도 안 해도 구원받는 그 원판이 있잖아요. 전도하기 굉장히 쉬워요. 돈 안내도 전도 안 해도 구원받습니다. 이게 전도 아닙니까?

그게 오늘 본문에는 전도라 하지 않고 그걸 한자로 돼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그 도, 도를 전하니까 전도 아닙니까? 그런데 그 도는 전의 율법은 돌 판으로 돼 있지만 여기 본문에서는 그 도가 어떤 인물, 어떤 인물이 먼저 시온 산을 선점에서 거기서 입을 외치는 거예요. 시온 산이 뭐냐 하면 다윗의 자손일 경우에만 그 위에 설 수 있는 산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한분밖에 없어요. 누구냐,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다윗 언약을, 약속을 이루어서 서시면 그곳이 시온의 산이고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소식이 팡! 팡! 팡! 팡! 쏟아질 때 그것이 우리의 고향을 찾게 만드는 완성된 ‘다 이루었다’의 율법의 완성으로서 진짜 도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도 들어와요. 그 도가 십자가의 도 아닙니까? 다 이루었다고 값없는 자에게 주시는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그게 막 쏟아진 거예요. 이게 12사도가 다 받은 겁니다. 그래서 12사도는 이거 받고 난 뒤에는 숱한 고생과 어려움이 있어도 거기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받을 것 챙겨버렸는데요, 뭐. 진짜 복을 받아버렸는데요. 이제 남아있는 것은 사도바울처럼 ‘어서 이 몸이 떠나서 이 껍데기가 우두둑 다 떨어져서 따라서 어서 그 나라에 가고 싶다..‘하는 그 소망. ’니들 때문에 내가 지체하고 있는지, 니들 아니면 벌써 갔어. 니들한테 말씀 가르치려고 주께서 자꾸 지연시키는 것이지, 안 그러면 주께서 벌써 나를 천국 데려갔어. 나는 이미 봐버렸어. 삼 층천 다 봤어.‘ 본 게 있다고요. 베드로도 본 게 있고.

이게 뭐냐, 마지막 때가 주는 기쁨 이예요. 마지막 때를 기쁨으로 받아버리면 뭐를 포기하느냐 하면 내 생일, 내 고향을 거기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되는 거예요. 욥 같은 경우는 자기 생일을 오히려 저주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생일이 없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생일이 없었으면 태어날 수도 없잖아요. 차라리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그러나 태어나는 이유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용도로서 욥은 태어나야 했고 오늘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왔다가 잠시 나그네 생활 하다가 잠시 우리의 고향으로 귀환하는 겁니다. 군에 말뚝 안 박는 입장에서는 그냥 잠시 왔다가 잠시 2년 끝나고 난 뒤에는 집에 가면 되죠. 그 잠시 갔던 것이 아파서 제대하고 또 꿈꾸고 어떤 사람은 군에 2번 간 사람도 있지만, 그게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제대 날짜를 앞두고 있습니다. 곧 제대됩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분들은 제대 날짜 달력에 몇 개 안 남았고, 태민이 같은 애는 더 멀었고, 그래서 젊은 사람들 보면 방향을 태어나서 얼마 안 됐다 하지 말고 주께서 매일같이 이끄신다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거든요. 내가 태어나서 이만큼 됐다 하지 말고 아이큐, 제대 할 날이 날마다 가깝네. 점점 더 가까웠다고 생각해야 되지, 태어난 것부터 너무 멀어진 것에 대해서 너무 서러워하면 안 됩니다.

제가 20대, 30대에 그때 ‘6시 내 고향’ ‘가요 무대’ 그 프로 보면 짜증났어요. 어떻게 저런 프로를 다 보나 하고. 누가 저런 프로를 좋아하겠나 했거든요. 그런데 요새 가요무대 하고 6시 내 고향 그게 좋아질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니까요. 점점 가까운 모양이라.

마지막 때가 온 몸으로 들어와야 돼요. 마지막 때 벌어질 그리스도와 만나는 그 대목, 그 장면을 이제는 온 몸으로 미리 와 닿아서 지금부터 함께 하는 방법은 뭐냐, 주의 도를 사랑하면 되죠. 뭐, 간단한 거죠. 성경 말씀에 나오잖아요. 그때 마지막 때에 주의 도가 좋아서 거기로 달려간다고, 얼마나 좋았으면 달려가겠습니까?

끝으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지금 높은 지리산에 있는데 어떤 사람은 안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데 지리산이 그리운 사람은 지리산을 올라가거든요. 힘들다 하지 않고 산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간다고요. 그래서 우리도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냥 막 올라가는 거예요. 왜, 그곳이 우리의 기다렸던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에.

제가 주례를 하게 되면 이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나요. 남편을 그저 아내를 웃기기만 하면 되고 아내는 그저 웃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 때문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만날 아내를 웃길 일만 만들어서 주면 되고 신부는 그저 남편이 웃기는 대로 웃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그런 가정은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어지간하거든 남편 보고 웃으세요. 왜, 웃기를 기다리다가는 웃기지도 않고 오히려 슬픔만 생기니까.

결국 이 세상에서 주께서 주시는 것은 남편은, 우리 주님은 우리를 웃게 하실 것이고, 우리는 웃으면 되는 거예요. 남편(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만날 주님은 우리를 웃게 만들 거예요. 이 땅의 천 날보다 하나님의 성전의 한 날이 더 좋으니, 참새가 더 부럽고 제비가 더 부러운 것이 참새, 제비가 성전에 집을 짓고 살거든요. 그걸 보고 ‘나도 저기서 집 짓고 살면 얼마나 좋겠노.’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전도가 십자가의 전도가 너무 좋아서 그것이 만날 우리를 웃게 만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모든 걸 얻도록 조치하는 그 주님의 그 은총이 선물이 커서 날마다 웃으면서 사는 거, 세월을, 나이를 잊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꾸로 살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당긴다고 생각하시고 만날 날이 가깝다고 생각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저희들이 날마다 주를 더욱 더 독수리처럼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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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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