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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엠마오의 두 제자 120909우리교회누가복음

엠마오의 두 제자 120909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엠마오의 두 제자(눅 24:13-24)

이근호

12-09-10 09:16

엠마오의 두 제자

2012년 9월 9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4:13-23

(눅 24:13, 개역)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눅 24:14, 개역)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 24:15, 개역)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눅 24:16, 개역)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17,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 24:18, 개역)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눅 24:19, 개역)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눅 24:20, 개역)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눅 24:21, 개역)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눅 24:22, 개역)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눅 24:23, 개역)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예루살렘을 도망치듯이 벗어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 입장에서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지난 일에 대해서 그만 잊기로 합니다. 즉 예수님은 떠났지만 자신들은 여전히 이 지상의 삶을 살아야 될 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은 그저 과거 속에 묻힌 도시가 될 것입니다.

그 도시에서 있었던 일은 자신들이 그 도시를 떠나므로서 과거에 묻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매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었다가 예루살렘에서 살아난 그 분이 이미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두 제자들을 덮칩니다. 이로서 이 세상은 두 개의 현실로 나뉘어져 있음이 밝혀집니다.

지상에 인간들이 사는 동네를 ‘아랫동네’라고 친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세계는 ‘윗동네’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받은 상태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납득이 되는 상태에서 나오는 해석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24:49에 비해서는 아직 성령을 받지 않는 상태에 있는 제자들과의 만남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자기만의 세계라는 것이 더 이상 용납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가 계획한 바대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그냥 지켜보지 않습니다. 부활의 세계, 즉 윗동네가 인간들의 지상세계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고 그 후에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벌써 이 아랫 동네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난감한 사태가 벌어져 버린 겁니다. 부활이란 죽음을 전제로 한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찾아들었다는 말은 곧 죽음이 찾아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여고 동창생들이 여럿 보였는데 한 사람 빼놓고 다들 시집을 갔다고 칩시다.

모였다하면 자식 자랑, 남편에 대한 불만 같은 것을 늘어 놓게 되면 시집 안 간 그 사람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모독합니다. 부정해버리게 됩니다. 기껏 해봤자 우리 자신을 죽이는데 이유로서 가담되는 체험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죽는 체험은 오로지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 십자기니 부활을 거론하고 언급하는 것은 그저 세상적으로 납득이 되지 지식만 나열할 뿐입니다. 여기는 제가 잠시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이 이해하게 되는 성경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어서 에덴동산에 쫓겨나셨는데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자신의 조치를 후회하시고 인간들로 하여금 천국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 방식이 바로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고 그 알게 된 죄를 갖고서는 자신이 지은 죄를 그저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을 찾게 되는데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믿는 자에게는 천국이 들어가게 했습니다.”

방금 제가 언급한 이런 식의 성경 해석이 바로 ‘성령 없이 이해되는 성경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받은 자로서의 성경해석은 어떻게 될까요? 우선 우상 이야기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캄보디아의 민족풍습에 보면, ‘스벡톰’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동남 아시아에 널리 퍼져있는데 ‘그림자 연극’을 말합니다.

이 연극을 상영하게 되면 연사가 이 극의 내용을 옆에서 읊어주는데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앙코르 왕국에 한 왕자가 있는데 마라왕의 아들입니다. 이 아들에게 아내가 있었는데 악마의 신은 아수라에게 납치되어 어두운 갇혀있습니다. 용감한 마라 왕국의 왕자는 비쉬누라는 빛의 신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아수라 신을 물리치고 자기 아내를 구출해온다는 내용입니다.

이 형식을 가지고 앙코르왕국은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으면 이 제가가 현재 캄보이아 시대에 와서는 토속 예술로 승화됩니다. 사람이 신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완벽한 신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 신들에게 바치는 연극을 하는 것이요 그것이 곧 신 아래서 사는 자기네들의 일생입니다.

이 우상이 제사 형식과 예술 형식으로 밖으로 내보인다는 것은 이미 인간들 마음 속에서 우상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우상이란 특정한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되풀이되는 그 동일성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천국에 넣어주어도 아니가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지루하니까요.

사람이 사는 재미란 자기 중심으로 날마다 변화가 일어나는 그 재미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오로지 예수님 위주로 돌아가고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바치는 영원한 세계라는 그 지루함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는 겁니다. 이는 곧 평소에 예수님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사랑한 겁니다.

따라서 늘 자신은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의 삶을 기반으로해서 그 기반의 동일성으로 신과 접선하려고 했습니다. 정기적인 제사 행위가 어제나 오늘날이 동일하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 같음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말씀의 동일성만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들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를 넣어주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만이 동일한 능력을 발휘하여 자기 백성을 천국에 넣어주십니다.

따라서 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이 갈기갈기 찢어져야 합니다. 이 능력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한 세상이란 애초에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9-10 09:17

144강-눅24장 13-24(엠마오의 두 제자)1209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4장 13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40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4:13-24

“그 날에 저희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예수님이 사람 손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살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졸지에 세상이 죽을 자리에서 죽는 그 세상과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되는 세상, 졸지에 두 개의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인간이 사는 세상을 아랫동네라고 한다면 우리 아랫동네만 있다고 생각하고 살다 죽고 살다 죽고, 이것이 전부라고 여겼는데 그렇지 않고 죽어도 죽지 않는 부활의 세계가 윗동네로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알려줌으로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알려줘버리면 우리 인간으로서는 감당이 되지를 않습니다. 어쩌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가 감당이 안 되니까 우리한테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말고 나중에 그 땅에서 살게 만드시고 죽을 즈음 되어서, 숨 거둘 때 쯤 되어서 ‘너는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라.’ 그러면 우리가 이 땅을 편하게 살겠습니까? 어차피 죽어서도 가고 알아서 가고 가야 될 세상 같으면 그만 주께서 입 다무시고 조용히 계시다가 덜렁 그 나라에 넣어주면 좋겠는데 그것을 아직 죽지도 않을 제자에게 미리 알려주니까 두 제자의 인생이 뒤죽박죽 꼬이게 되는 겁니다. 감당이 안돼요, 감당이.

어떻게 이것을 대체해야 될지. 그래서 아마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서 ‘나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 하는 것을 알려준 것은 예수님의 윗동네 이야기가 아랫동네 사정보다 더 중요하고 더 현실적이고 더 실체가 있다는 것을 세상 보고 알려주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이 제자니까. 스승 없는 제자는 없으니까 스승의 일을 물려받아서 너희들이 해라, 그래서 제자 아닙니까?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은 예수님이 했던 그 이야기를 전하라고 하는 것인데 막상 이 두 제자 입장에서는 그만한 능력이 자체적으로 없습니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하고 똑같이 그저 밥 먹고 사는 그 재주 외에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런데 그 재주밖에 없는 제자에게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이렇게 부활했다.’ 하니까 감당이 안 되는데 뭘 어쩌란 말입니까? 괜히 남의 인생에 혼란을 일으켜 버린 거예요. 남들은 한 가지 세계만 알면 끝나는데 이 제자는 두 가지 세계를 다 알아버렸으니까. 또 두 가지 세계가 하나 끝나고 나서 다음 이어지는 세계 같으면 알아도 모른 체하고 가만있으면 되는데 이 두 가지 세계가 하나 끝나고 이어서 주어지는 세계가 아니고 현재 9월 9일 오늘도 같이 작용을 해 대니까 아랫동네에 살던 버릇 가지고는 윗동네와 마찰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아랫동네, 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들 살던 그 방식을 그냥 고수해서 밀어붙이면 윗동네 원리원칙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고 차단시켜버리고 그것을 무산시켜 버리니까 중간에 쥐포처럼 납작하게 끼어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한테 부활의 나라가 있음을 알게 된 성도만이 힘들게 된 겁니다. 차라리 몰랐을 것을, 차라리 몰랐으면 조용하게나 살지. 가락교회에서 다니엘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랑을 몰랐으면 이렇게 아프지를 않았을 것을 괜히 사랑해 놓고 헤어져버리니까 괜히 사랑했어, 괜히 사랑했어! 처음부터 사랑을 안했으면 아픔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인데 사랑해놓고 찢어지고 갈라지니 그것이 두고두고 평생토록 마음의 상처가 되어서 잊으려고 하면 더욱더 못 잊고…….

이 세상 모든 유행가가 그것 아닙니까? 잊으려고 해도 못 잊고. 그냥 사랑해서 좋게 지나면 그런 유행가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신나는데 무슨 그런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꼭 뭔가 틀어져야 노래 아니고서는 해결할 틈이 없어서 어찌합니까, 노래 부르면서 고생하는 거예요. 차라리 몰랐을 것을, 차라리 그대를 몰랐으면 이다지도 아프지를 않았을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아버린 거예요. 감당할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감당도 되지를 않아요. 내 인생에 나의 허락도 없이 침범해서 주님의 커다란 발자국을 찍어버리니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원대로 기대대로 되지 않고 다 꼬여버린 겁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위기요, 절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나타난 것은 성령이 오기전의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성령은 어디에 오느냐하면 49절에 보면 성령이 나옵니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따로 임해야 돼요.

그러면 성령이 임하기 전에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을 길에서 만나버린 겁니다. 그럴 때 이 사람들은 굉장히 당황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 당황스러움, 이 당황스러움이 어째서 주어지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을 왜 알아야 되는가? 주님이 오시면 기쁘지 당황스럽기는 뭐가 당황스러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와버리면 참 당황스럽습니다. 모르고 아파트 문을 안 잠궈 놓았는데, 그냥 속옷 바람으로 있는데 갑자기 문 확 열어 제치고 택배 왔습니다, 하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나만의 공간에 허락 없이 외부인이 갑자기 쳐들어올 때 그 당황스러움을 우리가 확실하게 온 몸으로 느껴야 될 이유는 성령님께서 그 당황스러워하는 그것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이 초점이기에 그렇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그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마다 또 다시 당황스럽고 또 다시 당황스럽고……, ‘주님, 왜 이러십니까? 주님은 왜 이러십니까? 나는 나름대로 잘 있는데 왜 택배가 찾아왔습니까? 왜 하필이면 저를??’ 이런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하면서 성령께서 우리한테 작용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하느냐하면, 그래야 성령이 하는 일이 우리의 일의 공로로 넘어오지를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서 왜 성령이 하는 일이 우리의 공로가 되어서는 안 되느냐 하면, 우리가 가는 그 윗동네 영원한 부활의 천국에서는 이미 확정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예수님의 공로만 찬양하면서 영원히 사는 세계가 바로 성도가 가야될 천국이라는 세계로 이미 굳어져서 확정적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도 달라질 것이 없어요. 그래서 부활의 세계를 들은 사람들, 특히 용감한 문학자들이나 자칭 똑똑한 사람들이 이렇게들 이야기해요.

‘나는 교회에서 부활의 세계를 듣고 두 번 다시 부활의 세계로 가기를 접었다. 안 보내준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안 간다.’ 왜, 그 세계에 가자니 나의 개성이 사라져가더라는 말이지요. 사람이 자기를 위해야 재미있는데 자기 빼놓고 주님만 섬겨버리면 거기서 주어지는 것은 뭐냐, 죽음보다 더 힘든 세월이라는 그 지루함. 쇼펜하우어나 니체라는 철학자가 제일 싫어한 것이 뭐냐, 권태입니다. 죽음보다 더 힘든 시기가 지루함이고 권태에요. 퇴직하고 집에서 노시는 분들, 이것은 죽음보다 더 힘들지요. 할 게 있어야지요. 맨 날 시간은 가는데, 방에서 이쪽으로 굴렀다가 다시 저쪽으로 굴렀다가, 문밖에 비오나 보다가 다시 문 닫았다가, 그나마 TV나 보면서 견디지 TV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했나 모르겠어요, 어떻게!

그래서 옛날 사람은 TV 없어서 죽은 거예요. 재미없어서 죽은 거예요. TV에 남의 일이 나오잖아요. 남의 일 간섭하는 재미라도 있는데 라디오도 없고 TV도 없으니까. 그래서 조선시대는 평균수명이 46세라 하지 않습니까? 재미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만 재미가 없어도 괜찮게요, 죽어서도 영원히 지루함과 권태의 연속인 천국에 간다 하니까 차라리 악다구니를 쓰고 발악을 해대는 지옥이 나한테는 더 맞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옥 보내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딱 적합한 곳이 지옥이에요. 전혀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없으면서 교회 와서 목사하고 장로 해 봐야 지옥 갑니다.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 교회 와서 재미가 교회 부흥되는 그 재미, 목사라고 인정받는 재미, 남들에게 설교 잘한다고 칭찬받는 그 재미, 기도 잘한다는 그 재미, 사람 숲 속에 쌓여서 자랑 질 하는 그 재미로 사는 사람들, 천국가라 하면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이 땅에서부터 안 바뀌었는데 안 바뀐 인간이 가기를 어디를 갑니까? 안 바뀐 그대로 지옥 가야 되겠지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와서 천국에 데려갈 때는 항상 우리 속에 당황스러움을 유발시킵니다.

나는 나로 인해서 재미있어서 사는데 그 재미를 부숴버리고 앗아가 버리니까 그것이 얼마나……, 평생 살아온 것이 한꺼번에 고속도로에 충돌한 것처럼, 배가 난파된 것처럼 완전히 부서져 버리는 거예요, 나의 모든 것이. 이러한 충격, 충돌지점들을 만들어내시면서 성령께서 일하시는 이유는 모든 주의 일의 공로가 우리한테 오는 것이 아니고 주께 홀로만 돌아가서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작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두 가지 차이점을 얻고자 합니다. 하나는 뭐냐, 성령을 받아야 아는 해석과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납득이 되어서 해석하는 그 해석, 그 두 가지 해석 둘 다를 성령 받은 사람은 내 놓아야 되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둘 다 나와야 되는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런 식으로 납득이 되었다는 그것만 나오고 그 납득된 그것을 박살내더라 하는 성령의 이야기는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럼 먼저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는 성경해석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럴 때는 내가 생각해도 참 친절해! 왜 이렇게 친절한지 몰라!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예수님 십자가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영원히 삽니다, 이게 바로 납득이 되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납득이 되는 식으로 믿어지는 그 성경해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 고마워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세계에 들어간다, 그것이 부활의 세계이고 하늘나라 천국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지 않더라도 누구나 기분 좋게 수납할 수 있고 납득이 되는 가짜 성령, 악령이 집어넣은 것이 그 해석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납득이 되는, 모든 교회에서 다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가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 인간이 철없어서 선악과 따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었다고 쫒아냈지만 쫓아내고 난 뒤에 돌아서서 후회하시면서 ‘내가 만든 자식들이 저렇게 고생하는 것이 내 뜻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 보내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주셔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셔서 그 죄인 되게 한 것을 알게 하시고 그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지셔서 예수 믿는 자마다 구원받아서 영원히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의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게 바로 인간에게 납득이 되는 해석이라니까요.

이래가지고는 천국에 안 넣어줍니다. 방금 그 해석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2천년 교회역사동안 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지금도 전 세계 모든 교회가 그것을 이야기하는데 이게 뭐가 지옥가게 만드는 멘트라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동일성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여기서 그 ‘나’라는 것이 돌멩이처럼 딱딱 뭉쳐져 있어요. 나라는 것이 항상 떼어지지 않고 어제도 나고 오늘도 나고 그 ‘나’라는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그 정해져 있는 나를 주께서는 사랑하셔서 깨지지 않은 채로 현재 있는 나를 천국에 있는 나로 그대로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캄보디아 여행하는 사람들은 알거예요.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데 스벡톰(Sbek Thom)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태국이나 캄보디아나 베트남이나 라오스 같은데서 유행하는 그림자 연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천막 쳐 놓고 뒤에 모닥불 피워서 조명시설 갖춰놓고 앞에 소가죽으로 오려 만든 그림 만들어놓고 막 뒤에서 연기를 하면서 해설자가 설명을 해 주면 사람들은 막에 비친 그림자를 보면서 관람하는 그림자연극이 있어요. 내용은 힌두교 내용입니다. 그 당시에 힌두교가 번졌으니까요. 그 내용을 보면 캄보디아에 라마 왕이 있었는데 아수라라는 악마신이 라마왕자의 결혼할 여자를 납치해서 지옥에 데려다 숨겨 놓았어요.

그래서 라마 왕자가 용감하게 갔을 때 비슈누라는 빛의 신의 도움을 받아서 아수라 악마의 신에게 지옥에 잡혀 있던 자기 아내를 데려오고 나중에 그 라마왕자가 왕이 되어서 그 신들에게 감사해서 신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힌두교 신에게 바치는 연극이 돼요. 완벽한 신의 세계를 구현하는 겁니다.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캄보디아 왕국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가운데서 제사라는 말 나왔지요. 이게 반복성입니다.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거예요.

반복할 때마다 다시 라마왕자의 용감함, 비슈누 신에게 경배하고 아수라라는 악마 신을 거부하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구약성경에 보면 그게 바로 우상이라는 거예요. 원래 교회 관심도 없고 성경도 안보고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시는 분들은 구약에서 우상에 대해서 왜 그렇게 거론하는지를, 그 취지를 잘 모르고 있어요. 우리는 우상, 하면 자꾸 갓바위를 생각하고 부처를 생각하는데 내가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을 가지고 그것이 반복적으로 반복적인 행위와 제사를 드림으로서 내가 나답게 유지했다는 그 모든 법칙이 우상의 법칙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여호와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이해하다가 그 나라 망했어요. 지금도 망했잖아요, 망했다 이 말이지요. 지금은 캄보디아가 제사를 안 드립니다. 지금은 왕국이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서 이제는 유네스코에서 예술로 지정되었지만 비슈누고 아수라고 제사고 다 걷어내면 남는 것이 뭐냐, 그런 우상이 우리 속에 이미 잠재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상숭배자라는 겁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을 안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스벡톰이라는 그림자연극을 함으로써, 실제로 제사할 때 신에게 그렇게 연출을 했어요, 그런 식으로 비슈누 신을 섬기는 식으로 되었다면 똑같은 우상을 가지고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숭배를 지금도 교회에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신이 나에게 무슨 혜택을 주는가를 챙기자 그 말입니다. 모든 교회가. 예수라는 분이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주었는가, 우리는 고맙다고 하고 감사하다고 해서 죽으면 그 나라에 합세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게 우상이라니까, 그게, 그게 십자가라는 이름의 우상, 여호와라는 이름의 우상, 부활이라는 이름의 우상, 기독교라는 이름의 우상, 복음이라는 우상, 성령이라는 이름의 우상, 삼위일체라는 이름의 우상, 모조리 다 우상인 거예요.

이미 우리 안에서 우상 적인 잠재능력을 발휘하고 있고 그런 자질을 갖고 있어요. 누구나, 어린애도 다 마찬가지에요.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하면, 오늘 본문은 성령받기 전의 상황임을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성령받기 전의 상황에서 이 제자들은 당황스럽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요. 설교시간이라서 긴 설명을 못하겠고 핵심만 짚으면서 넘어가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예루살렘이라는 땅에서 일어난 일을 그들은 사흘 전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예루살렘에서 그 사건이 없어진 후에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땅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땅에서 땅으로 가는 거예요. 땅에서 땅으로. 그리고 예루살렘은 어떤 특이한 사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특이한 도시고 특이한 지역이고 이제 그 특정지역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3년간 지냈던 제자들이지요. 열두제자 안에 포함된 제자인지 아닌지 그것은 확실지 않지만 여기에 이름도 나와 있어요. 18절에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라고 나오는데 글로바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열두제자에는 포함이 안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19장 25절에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와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해서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마리아의 남편이 글로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사람이 누군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어떤 지역에서 어떤 지역으로 자기 인생을 위해서 떠났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예요. 서울, 대구, 대전, 부산, 찍고 목포 찍고 올라온다, 서울 살다가 대전 살다가 대전 살다가 대구 살다가 대구 살다가 부산 갔다, 우리가 날개 없고 날개 달린 조류가 아닌 이상은 기껏 우리가 할 수 있는 인생변동은 그 정도 선에서 움직이잖아요, 그 정도 선에서.

우리는 그 정도 선에서 내 인생의 어떤 변화를 구가하잖아요. 그렇게 구가해봐야 서울 살던 그 인간이나 대전 살던 그 인간이나 대구 살던 그 인간이나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 인간의 동일성은 변함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살든 예루살렘에서 그만 살고 엠마오로 가든 그 예루살렘의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아무런 변화가 없이 그냥 그 몸 그대로 예루살렘에 살다가 이제는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도 땅의 사람이고 나중도 땅의 사람이고 아랫동네 사람이에요.

구약에서 땅의 대표자가 나옵니다. 좀 어렵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가 가락교회에서 다니엘서를 강의하고 있으니까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구약에서 느부갓네살이라는 바벨론 왕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모든 인간의 땅의 대표자에요. 느부갓네살왕. 왜 대표자인가 하면, 느부갓네살왕, 우상 섬기는 이방 왕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너는 땅의 사람이라고 규정을 하면서 동시에 바다에 속한 짐승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은 어느 중간에 끼었는가하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땅이며 어디서 어디까지가 짐승들이 사는, 뱀들이 사는 바다의 시작인가의 그 경계지점에 놓인 사람이 느부갓네살이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두 제자, 이 두 제자는 땅에 속한 사람이거든요. 땅에 속한 사람인데 느부갓네살의 영역에 집어넣어버리면 땅에 속한 모든 사람은 짐승의 나라에 의해서 이미, 태풍이 몰려와서 바닷물이 넘치는 것처럼 이미 이 땅은 악마에 의해서 지배받는, 짐승이 넘실거리는 땅의 사람으로 거기에 잠기어 있는 겁니다. 잠겨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 16절 봅시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 눈에 가리워졌다고 되어 있지요. 지금 두 제자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본인이 예수님 안 믿으려고 환장해서 안대 만들어서 가린 것이 아닙니다. ‘난 이제 예수 안 믿을 거야. 난 예수 믿기 지쳤어. 예수님한테 실망했어. 난 이제 예수님 안 봐야지. 두 번 다시 안 볼거야.’ 이렇게 자기가 안대 만들어서 가린 것이 아니고 그냥 사는 거예요. 판사하고 살고 국회의원하고 살고 장애인 올림픽 나가서 활 쏘고 금메달 따고 피아노치고 등산도 하고 그냥 사는 거예요. 직장에서 와서 드라마 보고 아침에 또 출근하고 그렇게 그냥 사는 거라니까요. 그냥 사는 그것을 보고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이게 어떻게 인간의 잘못입니까? 이게 뭐가 잘못이에요, 이게 뭐가 잘못이에요, 이게? 남들이 그렇게 다 사는데, 남들도 다 그렇게 살잖아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눈이 가리워져야 정상이라는 말을 외치고 있는 겁니다. 눈이 가리워져야 이것이 정상이라는 거예요. 눈이 가리워졌다, 안 가리워졌다, 구분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사건……,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떠나가면 예수님도 그냥 ‘빠이빠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따라온 겁니다. 미치겠어요, 정말! 주님이 따라와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내 다리 내놔라, 내 다리 내놔라, 이게 전설이 고향에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따라와서 ‘네 눈 가리워졌다.’고 한 거예요. 왜 따라옵니까? 따라와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 왜 합니까? 네 눈 가리워졌다, 가리기는 뭘 가리워져요? 맨 눈인데, 시력 좋은데, 양쪽 눈 1.5, 1.5인데 뭘 가리워져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강제 격리조치 된 사람이에요. 미쳤어, 완전히 미쳤어! 성령 받은 사람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에요. 이것은 강제격리조치에요. 본인이 세상 살기 싫어서 은폐 생활하는 것 말고요. 부패하고 더러운 세상, 하고 머리 깎고 지리산에 들어가는 그것 말고! 안 그러면 방구석이나 PC방에 처박혀서 컵라면 먹어가면서 게임하다가 사흘 만에 죽는 그런 것 말고. 본인이 세상하고 끊는 그런 것 말고.

그냥 살고 싶어요. 남들처럼 세상에서 자랑 질 해가면서 그냥 살고 싶은데 주께서 강제격리조치를 해버린다니까요. 자기는 예루살렘이 싫어요. 예수님도 ‘한때 그런 일이 있었겠지.’ 하고 잊고 싶어요. 엠마오로 가서 사람들과 섞여서 장사라도 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런데 뒤따라오기는 왜 뒤따라옵니까, 그 예루살렘 귀신이. 그게 따라와서 격리조치 해버렸으니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살기는, 이제는 조져놓은 거예요. 베려놓은 거예요.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어라! ‘안되거든!’

옛날에 설경구가 나온 영화 있어요. <박하사탕>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나 돌아갈래!’ 하는 것 있잖아요.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현실, 그 현실을 깨고 듣도 보도 못한 현실이 허락도 없이 내 현실을 침범한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고 다른 예수고 다른 성령’이에요.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 성령, 예수, 복음이 대 유행을 했다는 사실을 여러분 놓치지 마세요.

우상, 인간 속에 있는 귀중한 신을 섬겨서 내가 얼마나 영웅적이며 신은 얼마나 내 편이며 하나님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느냐의 입장에서 납득이 되는 식으로, 성령 받지 않고 납득이 되는 식으로 성경을 보는 집단, 그런 집단들 속에서 진짜 성령 받아버리면 진짜 돌아버립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그 사랑의 하나님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뭘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 모든 문자들이, 용어들이 전부다 우리끼리의 동질성, 인간들끼리 뭉쳐서 주고받던 그 동일성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한시도 같을 때가 없어요. 옛날 구약 때 제사장이 제사지낼 때 양 잡는다고 칩시다. 아침에 양 두 마리 잡고 저녁에 양 두 마리 잡는데 그 양이 동일한 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잡는 사람도 동일한 사람이 아니에요. 세상은 변화하니까 사람들이 발악을 해서 이 변화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자기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런데 집어넣는 그 주머니 역할을 하는 나도 매일 달라지는데 동일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비슈누신을 섬기는 그 제사를 반복해 봐야 그게 자기 딴에는 ‘하나님이여, 어제도 제사 드리고 오늘도 제사 드렸으니 동일한 축복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네가 그 인간이 아니야, 네가.’

여러분이 주기도문을 한다면 첫 번째 주기도문 할 때의 집중도가 그 다음에 할 때와 같던가요? 세 번 네 번 갈수록 주기도문 하다가 엉뚱한 생각을 해요. 주기도문 하다가 프로야구 지금 누가 이기나, 그 생각을 하고 주기도문 하다가 주식 값 오르나 생각하고. 사람은 그냥 형식으로 때우는 것이지 같은 제사를 경건하게 한다고 해도 반복 자체가 안돼요. 반복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동일한 것이 없어요. 동일한 것은 없고 쥐포처럼 다 찢어버려요. 그 찢는 행위, 찢어놓으면 우리는 또 동일성으로 주섬주섬 주워서 꿰매고 꿰매면 또 찢어버리고 꿰매면 또 찢어버리고.

우리는 항상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가는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는 나만의 소박한 이 세상의, 땅의 사람이고자 하는 거예요. 아랫동네 사람이고자 하는 겁니다. 왜, 윗동네는 감당이 안 되니까. 뭘 아는 게 있어야지. 늘 아랫동네 사는 사람인데 줄기차게 주께서 따라와서 우리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 당황스러운 대목이 24절에 나옵니다.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그 다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야, 이거!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블랙박스로 찍어놓아야 되는데. ‘아, 그 때 찍어놓을걸.’

아마 여자가 카메라 들고 있었으면 주님이 안 나타났을 거예요. 예수를 보지 못했어요. 여자가 봤던 것은 구라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당신이 헛본 거지. 기가 너무 빠져서 사람이 허해서 헛것을 봤지. 뭔가 보기는 봤나? 당신이 봤으면 나도 봐야지. 당신이 본 것이 나는 안 보이니까 그 지점에, 예루살렘 그 지점에, 무덤 그 지점에 왔어도 예수님을 나는 못봤’습니다. 그 못 봤다는 그것이 중요해요. 못 봤으니까 못 믿겠다는 그것이 뭐냐, 나의 동일성을 내가 붙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야, 어디 가니까 주님 봤다.’ ‘그래?? 고~뢔?’ 해도 주님 봤다는 그 지점에서 주님이 안 보여요. ‘에라, 없네.’ ‘봤다니까!’ ‘에이, 없다! 없어! 내려가자.’ 내려왔을 때 그 사람이 보고 믿는 것처럼 나도 보고 믿을 때 그 사람과 내가 한통속이 되고 그 사람이 믿는 예수도 내가 같이 믿는다, 라고 생각하는 그 근거가 뭐냐, ‘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동일하다.’는 이 동일성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오류가 발생되는 겁니다. 주님은 보여줌으로써 믿게 하는 그것은 성령받기 전에 일어난 상황입니다.

그러면 성령받기 전에 예수님께서 잠시 보여준 것은, 27절에 봅시다. “이에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성경이야기가 나오지요. “모든 성경” 또 47절에 보면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기록되었으니” 앞에 누가복음 24장 27절에 보면 선지자의 성경이야기, 47절의 기록된 것, 신약성경, 47절에는 신약성경, 27절에는 구약성경,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모두 다 성령의 감동으로 지었다, 성령의 감동으로 지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땅의 세계에서 어디서 봤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이유가 주께서 나타나는 그것이 바로 도망쳐도 예루살렘이라, 도망쳐도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사건, 부활사건이 왜 감당이 안 되느냐 하면, 이것은 주님의 죽음을 들이미는 것이거든요. ‘나 죽었다.’ 하고 들이밀면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에게 죽음을 가지고 들이밀면 어떻게 설명합니까? 죽어본 적이 없는데. 주님은 이미 죽어봤고 우리는 아직 안 죽었는데 죽어본 분이 자기의 죽음 소식을 우리에게 밀어붙이면 죽지도 않은 우리가 죽은 뒤의 일을 어떻게 압니까?

아가씨 한 열 명 모였는데 그 중에 아홉 명은 다 시집을 갔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한 명은 시집을 안 갔어요. 모여서 동창회를 하는데 아홉 명이 맨 날 자기남편 이야기 애 얘기를 하니까 혼자 남은 아가씨는 재미 하나도 없지요. 가 봤어야 알지, 가 봐야. 시아버지고 시어머니고 가봐야 알지.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 죽었던 사건에 대해서 제자들은 오해했습니다. 자기 동질성 때문에, 내 덩치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떠나버리면 예루살렘을 잊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은 땅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묵시의 문제였고 땅을 초월해서 네가 엠마오로 가든 엠마오 아니라 서울 대전 부산 대구, 어디에 가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화장실에 가든 목욕탕에 가든 커피숍에 가든지 나이트클럽에 가든지 룸살롱에 가든지, 어디에 가도 주께서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 부활의 기록된 말씀을 깨닫게 하시면 그 사람은 그 동안 자기 자신이 눈이 가리워진 상태에서 아랫동네에서 그것만 죽자하고 전부인줄 알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죽은 인간이 주님을 감당할 수가 없고 죽은 인간을 살려 내면서 감당케 하셨기에 우리가 감당되는 겁니다. 교인들 집에 가면 더러 붙어 있는 귀한 말씀, 빌립보서 4장에 있는 말씀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3 독서실 옆에 붙일 수도 있고 다단계 영업직원 숙소에 붙일 수도 있어요. 보험회사에 붙어 있을 수도 있어요. 자동차 영업사원 같으면 ‘내가 모든 것(자동차)을 팔수 있느니라.’

이런 것도 있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것도 있고.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는 이미 우리를 죽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나는 동일성을 유지하니까, 나는 나라고 의지하니까 늘 이것을 죽이시는데 그 나를 죽이는 능력으로 못하는 것이 없게 만들어요. 이미 죽은 자로서 대전가도 살게 만들고 대구가도 살게 만들고 북한가도 살게 만들고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가도 살게 만들고 아마존에 가서도 살게 만들고. 나를 이미 죽은 자로서 다루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내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로 넘겨진다는 식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은 천국 갈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황스럽습니다. 그냥 남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가만 놔두고 우리의 소망이나 희망이나 주께서 응답이나 해주는 고마우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주시고 나의 것, 나의 동질성이라는 것을 다 깨부수고 주의 말씀만 증거 되게 하시는 주의 모든 능력이 살아 있는 주의 부활의 능력인 것을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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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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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