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답과 질문 120907
해답과 질문 120907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한윤범(IP:14.♡.134.60)
12-09-12 11:31
20120907a 울산강의-출애굽기 24장 : 해답과 질문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24장 1절에 보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이렇게 돼있지요. 여기 “여호와에게로 올라와”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 사태가 따져보면 수평적이죠. 산에 올라가 봤자 산 자체가 나름대로 수평이잖아요. 산이 있다면 산에 기어 올라가면 이 자체로 보면 수평이잖아요. 올라가봐야 계속 수평이잖아요.
성경에서 위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무리 높은데 해봐야 항상 2차원으로 만들 수 있거든요. 3차원도 따지고 보면 2차원의 연속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올라오라? 하나님이 어디 있는데 올라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저 인간들과 인간들이 수평을 이루는 곳이죠.
만약에 아파트가 있다면, 아파트가 우리 보기에는 높아 보이지만 막상 올라가면 이 자체가 전부다 수평이란 말이죠. 이 밑에서는 올라가는 게 되지만 막상 올라가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냥 나란하죠. 아파트 9층에 올라가선 한 집에서 마주보잖아요. 수평 아닙니까. 수평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간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그래서 옛날에는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거예요. 어떤 장소가 있으면, 인류문화에 보면 그런 게 나와요. 신성한 곳을 성소라 하는데, 신성한 곳이 고도가 높은 게 아니고 같은 수평이 되는 겁니다.
AD6세기 경 마야문명이 있는데, 마야문명에도 피라미드가 있어요. 피라미드에 처녀나 아기를 산 채로 신에게 바쳤습니다. 바친 이유가 가뭄 때문에. 지형상 편서풍 때문에 가뭄이 많아요. 그래서 바쳐야 공양을 해야 비 좀 줘서 신의 뜻으로 옥수수가 잘 됐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곡식 중에서 밀을 키우느냐, 옥수수를 키우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밀을 키우면 정성을 다해서 자기 집 정원을 가꾸듯이 신경을 많이 써야 됩니다. 그래서 밀을 키우는 데는 종교가 발달하지 않아요. 그런데 옥수수는 정성들입니까? 그냥 간격대로 뿌려놓으면 알아서 자라잖아요. 그러면 나머지 시간에는 뭐할 겁니까? 나머지 시간은 신에게 제사한다든지, 고기를 키운다든지, 딴 짓 하겠지요. 시조를 읊는다든지, 민요를 하든지, 판소리를 하든지 하겠지요. 종교가 그만큼 발달할 여지가 많은 겁니다.
예수님 태어난 시기가 고구려 건국 2년 후라고 보면 돼요. 그 시대에 고인돌 알지요. 고인돌이 장례풍습인데요. 그나마 지면에서 약간 뜨게 만들어서 육은 땅에 묻혀도 영혼은 땅과 격리된 높은 세계에 영혼이 들어간다고 그런 식으로 티를 내고 싶어서 고인돌이라는 유전을 만들었단 말이죠. 하지만 올라가봐야 몇 센티 되겠어요? 얼마 안 되거든요. 무거운 걸 어떻게 들겠습니까? 고인돌 제작방법을 제가 본 적도 있어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모든 종교라는 것은 어떤 수평적인 지점인데 특정 지점을 거룩하다고 해놓고 그 다음에 여기에 울타리를 쳐놓고 여기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거룩함과 세속을 수평적으로 울타리로 분리시키는 방법으로 신이 계신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상식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출애굽기 24장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올라오라고 한 거예요. 이제부터 중요한 합니다. 과연 올라오라가 성사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 올라오라 했을 때 올라 갈 수 있습니까? 못 올라가죠. “얘들아 나 있는 곳에 너희가 올라오라” 해도 우리가 갈 수가 없습니다. 왜? 너무 무섭기 때문에 접근이 안 돼요. 그리고 하나님도 그걸 아시고. 모세만 올라오고 나머지는 대기상태에 돌입하고 마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쉬운 거예요. 제가 구분해볼게요. 성령을 받아서 믿는 것과 납득이 되어서 믿는 것이 성경적으로 원래 차이가 나게 돼있죠. 성경에서 분명히 차이가 난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우리는 성령 안 받아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 식으로 믿고 싶어 해요. 성령 없어도 신으로부터 어떤 영을 안 받아도 우리가 따져서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한다고,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너는 못 올라온다는 거예요. 나 있는 곳에 못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데 너희들은 나 있는 곳에 올라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못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못 올라가는 상태에서 이 사람들은 성령을 못 받아서 납득이 되는 식으로 믿으니까 올라가지는 못 하지만 올라가는 시늉은 하겠지요. 이게 바로 종교라는 거예요.
실제로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아마 어디 계시겠지 하고 납득을 한다니까. 스스로 그걸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니까요. 이것은 성령을 받은 거예요? 성령 받은 게 아니에요.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식으로 하나님과 연결시켜보려고 애를 쓰는 게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간단한 문제입니다. 뭐냐 하면, “종교적으로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지?” “예.” 그렇다면 못 올라온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인간이 들으면 인간 입장에서는 답답한 게 이래도 못 올라오고, 저래도 못 올라오고 어차피 못 올라가는 건 마찬가지에요. 납득이 되는 것은 엉터리 종교라고 그런 것은 안 믿겠다고 가만있어도 하나님 못 만나는 건 마찬가지고. 내 쪽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뭔가 만들어서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하나님 교회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도 하나님 못 만나기는 마찬가지고. 둘 다 아무 소용없는 것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방식은 뭐냐 하면, 여기서 뭘 내세우느냐? 중개인, 중매인. 같은 뜻이라 봅시다. 이 사람을 내세웁니다. 그럼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걸 정리하면, 결국 중개인과 중매인이 하는 역할이 뭐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께 접근을 못 하는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너 혼자는 나한테 올라와.”라고 허락받은 사람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중개인이 되어서 다시 어디로 내려가죠? 지금 하나님 못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 틈 속에 그 사람이 와서 섞여버리면 그 사람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겁니까? 하나의 본드죠. 못 만난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를 뭔가 엮으려고 하는 하나님 쪽의 새로운 시도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상식적인 이야기를 할 테니까 이건 성령 안 받아도 되는 이야기니까 들어보세요. 15, 16세기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처음 발생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로 나누겠습니다. 시장경제가 자본주의가 차이가 나요. 일반사람들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구분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마켓, 시장중심으로 무역과 교환이 이뤄짐으로 경제가 발달하는 그것이 결국 자본주의가 되는 겁니다.
이게 세밀하게 하면 구분이 돼요.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를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 있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고기를 잡았다 합시다. 저쪽에서는 밭에서 채소를 키웠다. 고기는 많이 잡았어요. 이걸 잉여 또는 잉여생산물이라 합니다. 내가 먹을 만큼 이상으로 많이 잡았어요. 놔두면 썩잖아요. 저쪽에선 밀을 키우는데 자기 식구가 먹을 만큼 이상으로 더 많이 키웠어요. 이걸 어떻게 처치할까요? 얘는 간 고등어 먹고 싶다 하고, 이쪽은 빵 먹으면 좋겠다고 할 때 방법은 하나밖에 없죠. 만나야죠.
서로가 만날 때 이미 전통적으로 쌀 한 부대에 고등어 세 마리라고 정해져있어요. 만나는 장소가 시장이 되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물물교환이 되겠지만 나중에는 화폐로 바뀌어서 구매자와 생산자가 같이 만나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시장경제라는 겁니다. 이건 어렵지 않죠.
자본주의가 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밀가루부대 들고 가기 전에 먼저 아저씨가 그 마을에 방문해요. 여기 밀 농사했지요? 요새는 고추. “고추농사 많이 했지요. 고추를 나한테 파소.” “당신한테 뭐 있는데?” “고등어 있어, 오징어 있어, 뭐 있어?” “저는 현찰이 많습니다.” 현찰이 많을 것 같으면 구태여 고추 사 들고, 밀가루 사 들고 갈 이유가 없잖아요. 무거운 배추 사 들고 갈 필요 없단 말이죠. “배추 밭떼기로 미리 파소. 현찰 줄 테니까.” 그러면 이 사람은 상인한테 배추, 고추 다 팔았지요.
그 다음에 저쪽 상인이 어부한테 가서 비린내 나고 운반하기 힘든데 나한테 파소. 그러면 원래 시장에서 100을 받아야 될 고등어를 현찰박치기로 80 받으면 팔 수 있단 말이죠. 원래 100을 받아야 될 배추를 50 받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50에 산 상인과 80에 산 상인과 둘이 만나서 100으로 바꾸면, 각각 20과 50이 남지요. 이게 자본주의에요. 결국 돈 놓고 돈 먹기가 되는 거예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 놈이 번다고 이게 자본주의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배추 사고, 어부한테 고등어 사지요. 이걸 상업자본주의라 하거든요. 더 발달되면 금융자본주의가 돼버리면, “배추 농사하는데 일꾼 필요하죠. 일꾼 삯을 내가 줄 테니까” 하고 노동자까지 고용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 시장이 형성돼버리면 이것은 제품 자체를 쓰는 것이 아니고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를 사게 돼요. 이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중개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강의하면서 하나님과 인간 만남에 중개인이 있다 했지요. 자본주의 발달에서 중개인이 들어가죠. 여기서부터 중요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중개인이 들어가면 중개인이 알고 있는 것을 농부나 어부가 그 검은 속셈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그러니까 자본주의에서 중개인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악인, 부정정인 존재가 돼요. 그리고 이쪽의 농부나 어부도 장사하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아무도 모릅니다. “남는 것 없습니다.” 이러거든요. 남는 게 없으면 장사를 왜 합니까?
이게 결국 농부는 자기가 피땀 흘린 배추에 관심 있고, 어부는 폭풍을 무릅쓰고 잡은 고등어에 관심 있다면 중개인은 어디에 관심 있겠어요? 바다도 관심 없고, 배추밭도 관심 없고, 무엇에 관심 있겠습니까? 돈이죠. 그걸 두 자로 늘이면 자본. 그래서 자본주의. 애매한 것 확실히 했습니다. 자본주의란 결국은 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모든 노동의 현장을 돈 될까요, 안 될까요? 그런 가치관으로 탈색/변색 시키는 그래서 모든 것이 자본가 중심으로 시장을 재편성할 때 그게 자본주의라는 겁니다.
15세기, 16세기부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된 증권거래소가 전 세계 곳곳에 있어서 어음을 미리 결제한다든지, 새로운 화폐의 통화량을 조절해서 저희들끼리 돈 놓고 돈 먹는 그걸 노리는, 환율 차이를 노리는 또 다른 중개인이 또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결국 중개인 천지가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면 농사지면 못 살겠네 하는데 농사를 짓되 자기가 애 쓴 만큼 돈 번다고 하면 그건 돈 못 벌어요. 이걸 사용가치라 합니다. 농사를 그렇게 지어서 돈 못 벌고 교환가치로서. 내가 만들어놓고 창고 집어넣고 나중에 값 오르면 파는 자기 나름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스스로 자본가 행세를 할 수 있어야, 그런 안목이 있어야 돈을 버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학원을 한다. 애들 잘 가르치면 되지. 그것은 학원이 하나밖에 없을 때는 통하죠. 잘 가르치는 노동의 대가로. 그런데 잘 가르치는 학원이 옆에 수십 개 생기면 잘 가르친다는 자기의 애씀의 가치를 내세워서는 학원 운영이 안 되죠. 그러면 뭐 해야 됩니까? “저쪽 학원은 질이 나쁘더라. 저쪽 학원은 진학을 못 시키더라.” 하고 사기를 쳐야 자기 학원 얘들 안 빼앗기고 더 몰릴 수가 있죠.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기가 노동한 것이 아니고 항상 교환, 모든 아이들을 상품으로 모든 대상으로 돈으로 보는 그것이 바로 인간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자본주의를 형성시키는 중개인으로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목사도 예외는 없죠. 똑같죠. 사람들이 헌금을 낼 수 있는 설교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게 되겠죠.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정리해봅시다. 제가 강의한 게 그냥 한 게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거예요.
처음에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끼리 거룩한 장소와 속된 장소를 구분해놓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면 거룩하고 나가면 세속이라고 봤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무엇이 거룩한 겁니까? 중개인이 있는 곳이 거룩하다 했지요. 여호와에게 모세가 올라가잖아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중개인이 누구라 했습니까? 누가 중개해서 나한테 돈을 벌어주는 거예요? 중개인이 누구에요? 자기 자신 아니에요. 하나님을 빙자해서 우리를 키우면 되는 거예요. 뭐든지 내가 제일 중요하죠. 내가 중개인이니까.
내 인생의 중개인은 나인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다 하나님을 거론하고 예수님을 거론한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위한 게 아니고 결국은 누구를 위한 거다? 자본주의사회니까 나에게 돈을 주면 착한 신이고 나에게 돈을 빼앗아 가면 나쁜 신이 되고. 전부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시다바리가 되는 거고. 이게 뭐냐? 납득이 되는 거예요.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납득이 되는 하나님은 나에게 돈 벌어주는 좋으신 하나님일 경우에만 납득이 되고 그래야 교회가 부흥되는 겁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이야기하세요.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바로 그 교회를 위해서 오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을 만들어내는 중심에 서있으니까 중심에 서있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시다바리 역할을, 보조역할을 나한테 듬뿍해달라는 거예요. 해주면 지분의 얼마 떼어 헌금할 용의가 돼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로 올라간다는 것이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올라가면 골치 아파. 안 올라가도 복 받으면 되잖아요. 올라갈 필요 없는 것. 그런데 오늘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올라오라 했죠. 이것은 뭐냐? 지상에 깔아놓은 우리의 모든 터전을 포기하라는 거죠. 하나의 위기죠.
결국 성경이란 성령 없으면 해석이 안 되는 것을 보여줘요. 성령 없이 해석을 해버리면 성경의 어떤 구절을 봐도 나 자신을 위해서 성경을 볼 수밖에 없는, 납득이 되는, 상식적인 그러한 종교생활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죠. 그때부터 모세만 하나님을 알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겁니다. 오늘 강의는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모세는 알고, 백성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앎과 모름의 마주침에서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는 거죠. 이점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하겠습니다.
적어볼게요. 모세는 안다. 하나님을 안다. 백성들은 모른다. 누구를? 하나님을 모른다. 모세가 안다 할 때는 위에서 내려오는 식으로 계시를 전하겠지요. 그런데 모르고 있는 백성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아래에서 올라가는 방식으로 하겠지요. 아래에서 올라가는 방식이 맞느냐? 이건 상식적이고 납득이 되는데 아니면 위에서 내려오는 게 맞느냐? 이 싸움을 출애굽기 24장에서 하게 되는 겁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안다고 나갈 때 스스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중개인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도 하나님에 대해서 압니다. 제가 상식적으로 알거든요. 이런 식으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죠. 그래서 헌금하고, 예배드리고,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면 하나님이 기쁜 쪽으로 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얼마든지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안다고 우기면서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막상 한들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그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은 전부다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르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부흥강사 특징은 간단하죠. “내가 하는 모든 짓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는 짓입니다.”라는 것을 알면 되겠지요. 말이 어렵습니까? 내가 하는 모든 짓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짓거리를 내가 내 몸을 통해서 벌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돼요. 그 인정한 사람은 자기 행한 것은 믿겠습니까, 자기 행한 것을 안 믿겠습니까? 믿는다? 안 믿는다? 안 믿죠. 그게 바로 믿음인 거예요. 믿음이란 자기 자신의 어떤 행동도 하나님께 도달될 게 없다는 그걸 믿는 거예요. 이걸 쉽게 이야기해서 갇혀있다고 하는데 갇혀있는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영광이 안 되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게 바로 성령을 받았기에 알 수 있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한 것도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중매인이 한 것만 받는다는 것. 우리에게 중보자가 계시잖아요. 그 중보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하나님은 예수님만 받아요. 심지어 모세도 하나님이 안 받아요. 왜냐하면 모세가 보고 온 것이 제한적이고 전부 다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변화산에서 보면 모세도 구원받았거든요.
모세가 하나님의 일부를 안다 할지라도 모세가 구원받은 것은 일부 안 것 때문에 구원받은 게 아니고 누구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죽으심의 공로로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도 똑같은 입장이에요.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안 통합니다. 하나님께 뇌물 줘보세요. 그 뇌물 안 받습니다. 어떤 재롱을 피워도 하나님이 기뻐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기뻐할 게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제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는 것,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예요. 참 쉽지요. 결국 제가 지금 강의한 걸 보면 중매인 싸움입니다. 누가 안다? 모른다? 이 싸움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만 달랑 구원하십니까? 그것 때문에 모세를 보낸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모세를 통해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냈잖아요. 백성들은 엉뚱한 짓하고 있는데요? 지금 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는데.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꼭 아는 체 해요. 송아지 섬겨놓고 이게 여호와라고 우긴다니까요. 예배당 지어놓고 여기서 예배드리면 복 받는다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헌금 해놓고 복 받는다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어요. 그게 복이 안 옵니다. 헌금한다고 복이 안 와요. 이건 제 손에 장을 지을게요.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할 때 했어요. 우리도 모르는 새에 너무 많은 행운들이 우리에게 붙었다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 우리가 중매인이니까. 내 행동으로 복 달라하는데 우리가 나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행운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에게 왔다가 가고, 왔다가 가고, 매일같이 우리를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착해서 그런 복을 받는 거예요? 거저 받는 겁니까? 거저 받지요.
제가 가락교회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어제 선선했거든요. 여러분, 가을 되면 우리가 기도해서 가을 됐습니까? 가을은 누가 되게 하신 거예요? 봄 다음에 여름, 여름 다음에 가을, 가을 다음에 겨울, 누가 되게 하는 겁니까? 우리가 몸부림치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주께서는 우리가 한 행동 보지도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가을 되게 하신 거예요. 우리는 그냥 혜택을 입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재롱 부려서 복을 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아까 민중이가 포도 먹었지요. 민중이가 포도 먹을 짓을 한 게 있어요? 오줌 싼다고 해서 포도 안 먹입니까? 오줌 싸는 놈은 먹을 자격도 없어 하고 안 먹입니까? 이것은 엄마 마음이지 애가 엄마에 대해서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아무 상관이 없다니까요. 네가 엄마로 부르던, 아줌마로 부르던 관계없이 나에게는 무조건 내 아들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걸 언제 알아요? 그걸 알 때 어머니는 흐뭇한 거예요. 니 노는 레벨과 하나님이 노는 레벨이 달라요. 우리는 개뿔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우리 인간들 레벨로 낮춰놓고 하나님을 주물럭거리고 있단 말입니다. 값없이 그냥 주고 있는데 우리는 값을 치러야 자기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대인 관계하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이 떠오르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원하는 내가 기대하는 그런 모습으로 힘주어서 내가 원하는 나를 자꾸 살려내고 싶은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느냐? 그것은 관심이 없어요. 내가 기쁘면 그만이야. 내가 기쁘고,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즐기고 싶고 그거면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안중에 없어요. 무조건 내가 교회 갔으면 하나님은 무조건 복 줘야 되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한 대로 주께서 응답해야 되고. 이것은 내가 할렐루야야. 하나님은 시다바리, 종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그 이야기를 안 했어요. 모세가 하나님을 알았다. “모세, 너 혼자 구원받으면 그만이겠네.” 모세를 보낸 것은 백성들을 구원시키려는 것인데 백성들은 모르고 있어요. 모르고 있는 인간들에게 모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 것이냐? 이 문제가 남아있어요. 이 문제를 지금부터 이야기해드릴게요. 모세 혼자 알고 백성들은 모르고, 모르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하느냐?
제가 물어볼게요. 성공 비결을 알면 성공됩니까? 누가 이렇게 하니까 성공했다. 어떤 학생은 하루에 다섯 시간 자고 공부했더니만 서울대학 들어갔다. 그게 성공비결이에요. 나는 공부하는 게 제일 쉬웠어요. 그래서 서울대학 들어갔다고 합시다. 성공비결을 알면 성공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사흘 만에 부활했죠. 그것 알면 부활합니까? 이게 선교단체의 약점이에요. 이건 치명적인 거예요.
어떤 방법을 알면 그 방법이 나와 엮여진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우깁니다. 주님이 하는 방법은 주님에게만 엮여져요. 우리와는 안 엮여집니다. 산상설교요? 예수님만 이룰 수 있어요. 우리는 그것 알아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예수님만 구원받으면 안 되니까 우리도 구원받아야 되니까 구원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그 문제까지 진척이 돼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문제없이 해답만 있다고 그것이 해답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수학 주관식 시험 치는데 3번, 8이라고 적었어요. 선생님이, “어떻게 해서 8이 나왔어?” “무조건 8입니다.” “어떻게 푸니까 8이 나온 거야. 전개과정을 보자니까.” “저는 믿습니다. 무조건 8이라는 걸.” “예수님 어떻게 됐어?”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데?” “믿습니다. 예수님 죽은 것을.” 거기다 보태서 “우리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죄 때문에 죽은 걸 믿습니다.” “네 죄가 뭔데?” “모르겠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어서 구원한다고 해놓고는 그러면 당신 죄가 뭔데? 하니까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 평소에 죄 진 게 없거든. 어릴 때 오줌 싼 게 죄라면 죄에 포함되겠지만. 구체적으로 죄 진 게 없다니까요. 그러면 죄 지으러 가야 됩니까? 사창가로. 문제가 없으면 해답이 없거든요. 하나님이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해답은 만들어졌는데 문제가 안 만들어진 거예요. 우리 죄를 위해서 메시아가 죽었다는 게 해답이잖아요. 그러면 문제는 뭡니까? 아직도 이 사람들은 자기가 의인 행세한다는 거예요. 문제가 있을 때 해답이 아귀가 맞는 거예요. 그러면 모세의 율법이 하는 일은 뭡니까?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겁니다. 같이 끌고 다니면서. 구약 쉽지요. 이제 구약 풀렸지요.
중개인이, 이 세상에서 수평이라. 인간에게 오른다는 게 없어요. 인간은 태산은 높다하되 못 오를리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로 올라오라. 등산하는 사람만 올라갈 수 있습니까? 나에게로 올라오라고 해놓고 너는 올라오지 말라고 해서 결국 하나님 만나는 것이 하나님은 올라가도 못 만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못 만나는 하나님은 질색이라. 싫어요. 가인의 제사가 그런 거예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드렸잖아요. 하나님께서 응답을 안 했지요. 그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원하는 하나님이 나는 되기 싫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납득이 되고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식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모르는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해서 내가 보낸 중개인이 또는 중보자가 너희들이 중매를 납득이 안 되는 식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너희들에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그 방법이 뭐냐 하면, 해답은 이미 갖고 있는데 문제가 안 만들어졌어요.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우리 죄가 피로 인하여 깨끗하게 용서받는 게 해답이잖아요. 문제가 뭐냐 하면, 어느 누구도 자기를 죄인으로 간주 안 하고 있다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어느 누구도 자기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 안 하고 있는 상태에 있어. 남의 집구석은 망해도 우리 집구석은 잘 돼야 돼. 왜? 나는 망할 정도로 죄인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꼼수를 써요. “하나님이여, 저는 망해도 싸고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한 것을 알고 있으니까 다시는 저한테 저주 안 떨어지겠지요?” 아주 놀고 있어요. 온갖 가진 수단 다 부리는데 그것 주님한테 안 통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수직적으로 올라오는 것을 수평적으로 나란히 했을 때는 오늘 제일 중요한 부분 나왔습니다. 아까 올라오라 했을 때 수직적으로 못 올라오죠. 못 올라오는 것을 나란히 수평적으로 옆에 있으면 갈 수 있다고 되겠지요. 나란히 있게 되면 못 올라오는 게 아니고 죽음이 벽이 되어 가로막습니다. 그게 어린양의 죽음이에요. 어린양의 죽음은 어느 누구도 어린양과 같은 신세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주님의 사자에 의해서 저주받고 심판된다는 거예요. 심판받고 저주받는 인간이, “나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해서 살려주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성폭행했기 때문에 18년 선고한다. 피고가, “맞습니다. 저는 18년 감옥살이해도 마땅합니다.”라고 해서 18년 면제. 이렇게 해주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18년 다 살아야죠. “그래 알아요? 그럼 18년 박세게 살아봐. 너는 감형 없다. 네가 인정했으니까.”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우리에게는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건 없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될 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구원되는 거죠. 내 이름으로 구원되는 법은 성경 어디에도 없어요. 그리스도 소유가 되었다는 전제 하에 누구나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너무 구원, 천국에 기대하지 마시고 내 몸이 아직도 내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서 내가 그리스도의 소유냐? 그것이 관건입니다. 이 말하는데 너무 돌아왔어. 세월이 너무 길어요.
우리는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안 되는데 구원된다는 것은 사기꾼들이 하는 소리에요. 우리 것으로 구원 안 되고 주님의 것으로 전환될 때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데려가는 방식으로 우리는 구원되는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공들여서 햇빛 주시고, 공기 주셔서 키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아까 목사님 댁에 가니까 화초가 있어요. 사모님이 화초를 하나 샀는데 이 화초가 아주 천재적인 화초가 되어서 목사님이 공부하신다고 잊어버려서 물 안 줬을 때 화초가 줄기를 뻗어서 싱크대 물주고 크면 결국 이 화초는 누구 것이 되겠어요? 목사님의 것이 아니고 화초 본인이 것이 되겠지요.
우리가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보고 그것을 자기가 흉내 내서 자기가 행동을 만들어서 자기한테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자기한테 다 퍼붓고 있어요. 헌금할 헌금하고, 예배 참석할 때 예배 참석하고, 봉사할 때 봉사하고, 전도할 때 전도하고, 기도할 때 기도하고, 새벽기도에 나와서. 지가 자기에게 물주는 지가 자기를 키우는 화초가 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정말 화딱지 나는. 이걸 오늘날 교회에서는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안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세요. 없지요. 다 그 짓하고 있지요. 주께서 그 짓하도록 그렇게 허락하신 겁니다. 왜? 바로 그것이 주께서 기다렸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죄인인 티를 팍팍 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하고 싶은 대로 그냥 하시고 그냥 사세요. 주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괜히 꼼수로 자기 행동을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보이고 위장한다고 해서 주의 것 되는 것 아닙니다. 주의 것은 성령이 임할 때만 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에게 느끼는 느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자신의 피로 죄인을 용서했다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철저하게 죄인으로 본격적으로 만들어 가시는 작업을 지금 주께서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가 죄인의 괴수됨을 알게 되는 그 기쁨, 이게 바로 복음으로 인한 기쁨이에요. 이걸 오늘 출애굽기 24장에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의 계시, 율법으로 설명합니다. 이것만 설명하고 10분간 쉬도록 하겠습니다.
4절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이렇게 돼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그냥 위로 올라와. 위로 올라갔던 모세가 위에서 자기가 듣고 본 거예요. 위에서 본 것을 아래에 오게 되면 아래는 사람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고 왜 너는 어린양의 피, 어린양의 죽음, 피로만 용서가 되는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느냐를 이제는 말씀으로 두고두고 반복적으로 확인시키는 작업에 모세가 나서게 되는 겁니다.
모세가 중매인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중매인이에요? 모세입니다. 왜? 그는 하나님을 직접 봤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 모세보다 마음이 더 낮은 사람은 없다. 겸손이라는 게 부족합니다, 이게 겸손 아니고 하나님 보고 난 뒤에 이제는 내 인생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가는 인생인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겸손한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2-09-12 11:32
20120907b 울산강의-출애굽기 24장 : 해답과 질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냥 믿으면 되는데 피가 왜 필요하죠? 이상하잖아요. 여기에 8절에 보면,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모세가 양푼에 피를 담아서 백성들에게 뿌려요. 6절에 보면,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피가 왜 필요합니까? 소금을 뿌리는 것은 이해가 돼요. 팥을 뿌리는 것은 옛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필요한데 멀쩡한 피를 왜 뿌립니까? 뭔가 뿌린다는 말은 뭔가 있는 물체에 피막을 입히는 거잖아요. 덮는 걸 말하거든요. 나는 키 180이다. 나는 여자다. 남자다. 나는 직업이 의사다, 판사다. 여기에 피가 묻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판사다 했는데 피가 묻으면 피물에 묻히게 되죠.
마치 초가집이고 기와집이고 양철집이 있지만 폭설이 내리면 모든 것이 눈에 덮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를 뿌리면 우리가 실존적으로 개인적으로, “나는 너와 달라. 나는 아이큐가 150이야. 너는 30이야.” 이런 차이가 다 없어지는 거죠. 장애인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면 애국가 안 나옵니까? 애국가 나오죠. 그리고 진짜 장애가 아닌 비장애자가 올림픽해도 애국가 나오죠. 그러면 애국가만 듣고 장애자인지, 장애자 아닌지 알아낼 길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피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우리 인간 쪽에서 앞장세우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기도를 하면 두 시간하니, 금식기도를 몇 번 했다니, 교회를 몇 군데 세웠다느니, 나는 강의를 얼마나 돌아다니고, 책을 몇 권을 짓고, 나는 신학박사고. 이 모든 것은 누가 만들었으며 누구 좋으라고 그 짓하고 있는 겁니까? 인간 개인이 지옥가려고? 아니죠. 인간 개인이 중요합니다. 오늘 제일 중요한 것 나왔어요. 사적 구원, 개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 어떻습니까? 이러면 구원시켜주겠지요.”라고 들고 나온 거란 말이죠. 그걸 피를 들고 마중 왔다는 말은 일체 그런 것에 대해서 보지도 듣지도 않고 거부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왜 사람들은 그걸 모를까요? 교회 와서 솜씨자랑하고 말이죠. 교회 잘 나오다 “오늘 점심식사당번 누구고? 반찬이 좀 짜다.” 이러면 삐져서 교회 안 나오고. 그게 어떻게 말이 됩니까? 진작 안 나와야 될 사람이에요. 교회 와서 뭘 보여주려고? 지 잘남. 그걸 세 자로 ‘자랑질’ 이걸 네 자로 하면 ‘구역예배’ 자랑질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
이 사적구원, 개인구원은 하나님한테 안 통합니다. 이런 구원 말고 다른 식으로 구원한다고 제가 광주에서 이야기했죠. 그게 무슨 구원이냐 하면, 상태구원이라 했죠. 상황, 상태 자체를 건져버리면 그 상태에 녹아져있으면 구원받고 그 상태에 녹아져있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 겁니다. 상태구원이란 말은 제가 지어낸 거지만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간단해요.
로마서 9장에서 너는 그릇이다. 그릇이란 뭐예요? 그릇이란 뭘 담는 거잖아요. 만약에 진노를 담으면 진노의 그릇, 만약에 긍휼이 담기면 긍휼의 그릇. 그걸 다 아는데 우리는 왜 빈 그릇으로 못 살아가는지 참 답답해요. 우리는 안에 내용을 내 것으로 채우려고 해요. 내 것으로 채운 것은 무효입니다. 그건 인정 안 해줘요. 이 그릇은 내 것으로 채우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담는 그릇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주여, 이것 주셨습니다. 주여, 성령 주셨네요. 얼마나 황공한지. 예수님의 피를 담아주셨네요. 이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께서 주신 것을 알게 하려함이라. 성령이 임한 것은 너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함이라.
미국 대통령이 오바마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을 담았지요. 마이클 잭슨은 뭘 담았어요? 그릇은 흑인인데 뭐 DNA에 잘못 됐는지 약물중독이 됐는데 왜 코가 갑자기 커지고 얼굴은 하얘집니까? 그릇은 흑인인데 아마 병 같아서. 백인으로 되는 병, 유전자 병 같아요. 상당히 남들 보기에 당황스럽지요. 결국 사람은 자기 본색을 감출 수는 없는 겁니다.
어떻게 에티오피아, 구스의 까만 피부가 하얗게 되겠으며 반점이 있어야 표범이지, 반점이 없으면 그게 하마지 표범이겠습니까? 그 표범의 반점을 어떻게 지을 수가 있겠는가? 흑인의 멜라닌 색소가 없어지지 않듯이, 표범의 반점이 없어지지 않듯이, 너희의 없어지지 않는 그 죄가 세상에 주께서 하시겠다고 나서면 그것도 없어진다는 거예요.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질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소리 들으려고 교회 옵니까? 이 소리 들으려고.
바쳐라 이것 말고. 내놔라. 이것 말고. 너는 네가 생각한 네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들은 생각은 울산바닥에서 현대자동차 들었던 거예요. 드라마에서 들었던 거고, 신문에서 들었던 거고, 성폭행범 때문에 밤늦게 못 돌아다니고. 전부다 세상에서 듣고 본 거예요. 그런데 막상 교회 와서 듣는 것은 성폭행을 당하던, 성폭행범이든 관계없이 예수의 피로 희어진 거예요. 그 피를 지금 모세가 양푼에 담아서 머리에다 뿌리는 거예요. 죄 용서받으라고 뿌린단 말이죠.
그러니 참 제 정신 아니죠. 정상이 아니고 다 미쳤어. 현장에 이상한 사람들만 모인 것 같아. 뭐 피를 뿌리고. 그 피가 무슨 효과가 있다고. 한 바가지 덮어쓰고 돌아다니고.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장난도 아니고. 미친 짓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물어 볼게요? 지금 어린양 피 양푼에 담아서 저한테 뿌리면 구원받습니까? 지금? 안 되지요. 지금 양 잡고 피 발라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이 모든 말씀은 너희들이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모든 말씀을 내가 알아서 내가 다 해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림자로서 폼을 낸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 백성들은 장차오실 예수님이 하실 것을 그냥 폼만 잡을 뿐이에요.
제가 설교시간에 예를 들었잖아요. 옛날 냇가에 천막 쳐놓고 홍콩영화 보여줄 때 [조영남-최유라]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계단에 올라가면서 칼 한 번 쓱 빼면 여러 명 죽고. 그 영화를 할머니들이 보고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이웃집 할머니가 내일 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 할머니가 말리는 거예요. 오늘 다 죽었기 때문에 내일 죽은 사람은 안 나온다는 거예요. 영화라는 게 뭡니까? 같은 필름에 뭘 담았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같은 내용이 나오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같은 영화를 튼 거예요. 오늘도 양 잡고, 내일도 양 잡고, 모레도 양 잡고. 하지만 실제로 거기에 나왔던 엑스트라 한 명도 안 죽었죠. 그게 40년 전 영화니까 늙어서 죽었을지 모르지만 한 명도 안 죽었어요. 죽는 척을 한 거죠. 그걸 그림자.
십일조하면 복 받는다. 이게 뭡니까? 이게 그림자라니까요. 십일조가 뭔 뜻이냐 하면, 구약에는 십일조내서 복 받잖아요. 신약에는 이미 우리 대신 십일조내신 분 때문에 우리는 십일조내서 받는 복을 그냥 공짜로 다 받는 거예요. 그 십일조가 누구냐 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일조인 겁니다. 그리고 구약 말라기의 십일조는 뭡니까? 폼을 낸 거예요. 장차오실 메시아가 이렇게 내지요. 심지어 자기 몸 전체를 바치지요.
세상에 그 폼을 가지고 오늘날 이렇게 해석하잖아요. 구약에는 십일조 했지만 신약에는 더 많이 해야 된다. 십의 이조해야 된다고 나온다니까. 아예 사기를 쳐. 그것도 모자라서 십일조해서 복 받은 인간들 간증집회해서 사람들 마음 약하게 만들어서 돈 우려내고.
여러분 인생의 해답을 알아야 돼요. 해답을 모르고 백날 울산바닥에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해답이 피에요. 피가 있을 경우에는 나를 내 것이라는 것은 접었습니다. 내 몸이 내 것이라면 우리가 거듭나도 지옥 갑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것이라는 걸 접고 피가 있는 한, 피라는 것은 형제들 간에 밥 먹다가 “형, 좀 줘.” “안 줘.” 안 주려고 침 뱉어서 내 것이라고 한 것처럼 주님께서 피를 발라서 주님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것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께서 왜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가서 죽어야 되는가? 그 문제와 해답을 보여주는 바탕으로서 역할을 하라고 우리를 채용을 한 거예요. 취직시켜놓은 거예요.
만약 우리가 우라늄이라고 합시다. 19세기 초에 퀴리 부인이 방사능 물질을 발견하기 전까지 우라늄 원자력발전소가 없었어요. 라듐에서 방사능 나오는 걸 발견해서 그때부터 연구해서 원자력발전소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내가 하나의 우라늄 광석이라 합시다. 이게 그냥 길바닥에 우라늄이에요. 천년만년 방사능이 퍼지는데 이걸 어떤 사람이 나를 잡아서 가져와서 발전소의 재료로 사용한다면 결국은 너도 잡혀 왔고, 나도 잡혀 와서 발전소 돌아가면 나오는 것은 원자력에너지가 나오겠죠.
원자력에너지가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길바닥에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인데 거기서 원자력발전소를 운영시키는 그게 교회죠.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취직한 거죠. 채용된 겁니다. 우리보다 채용된 나를 네 자로 집단적으로 된 것을 ‘이스라엘’ 개인적으로 된 것을 야곱. 야곱의 아버지는 이삭, 이삭의 아버지는 하나님. 그렇지요. 이삭은 두 분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아버지고 육신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 되겠죠.
로마서 4장에서는 이삭에 일어난 일을 하나의 영화로 봅니다. 척하는 그림자, 연극으로 보는 거예요. 이삭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장차오실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납니다. 이 지상에 없던 존재가 새로 생겼다. 그러니까 지상에 없는 것이 약속으로 인하여 생겨버리고 그 인간이 살았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죠. 이걸 로마서 4장 25절에서는 우리 죄 때문에 죽어야 되고 우리 의 때문에 살아나야 하느니라. 그러면 이삭은 하나의 굴러다니는 우라늄 광석과 같은 거죠.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기 위해서.
그러면 믿는다는 것은 이삭을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이삭처럼 채용 되었고 이삭 같은 운명으로 주님 앞에 채택되었다는 것, 그걸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채택이란 말을 했지만 성경적 용어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웠나니 또는 선택. 선택된 집단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다수라는 집단과 하나님 만나고 온 모세라는 개인의 만남이죠. 일과 다수의 만남이죠. 모세의 손에서 양푼에서 피가 쏟아지고 말씀도 같이 거기에 낭독이 된다는 것은 피와 말씀의 만남을 깔아놓는 카펫, 바닥 돌로 써먹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돌멩이로서 거기에 가담이 돼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노아가 방주 만들지요. 노아가 방주 만들었으니까 우리도 방주 만들면 구원받습니까? 이순신함 만들면 구원받습니까? 그렇게 해서 구원받으려면 돈 더 많이 벌어야 돼요. 구축함 하나 만드는데 돈 얼마나 드는데. 아까 원목으로 책꽂이 만드는데 오십 만원 든다고 했잖아요. 방주 원목으로 만들려면 얼마나 들어야 돼요? 있는 재산 다 팔아서, 저축은행에 하든지, 사채 쓰든지 구원받으려면 무슨 수라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던 시절이 있더랬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얄궂게도 노아 그 이후로 똑같이 방주 만들어서 하게 되면 얼마나 수월합니까. 고3들 보면 [정통종합영어]가 처음 나올 때나 그 다음 해나 똑같지요. 얼마나 수월합니까. [수학정석1,2] 똑같은 책을 보면 되니까 형한테 물려받으면 되니까. 왜 주님은 그런 식으로 그 다음은 이야기하지 우리 않아도 압니다. 방주 만들면 되지요? 아니거든. 이게 뭐냔 말이죠. 그러면 형이 물려준 교과서와 체육복, 교복은 다 찢어야 된다 말이죠.
노아 이후에 그 다음에 뭐였습니까?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이 아기가 없었는데 이삭이 생겼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옳다구나. 구원받으려면 무조건 바람 피워서 아기 낳으면 되겠구나. 남자들은 좋지요. 여자들은 죽을 판이고. 그것도 아브라함에게만 써먹고 그 다음부터는 그게 없어요.
이삭은 어떻게 구원합니까? 이삭은 별미 좋아해서 먹고 엉터리로 축복하면 구원받는 거예요. 나중에 어긋맞게 하는 야곱이 나오고. 이삭은 하여튼 뭔가 잘못됐어. 복 줄 사람은 저주해버리고, 저주할 사람은 복 줘버린 거예요. 그런 식으로 구원받으면 우리는 그런 걸 매일하는 거예요. 우리는 해봐야 맨날 헛짓이나 하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 쉽네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이 하나의 모자이크, 박석 압니까? 포장 공사할 때 까는 돌. 하나의 수놓기 위한 박석으로서 있는 거예요. 특히 주의할 것은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 믿다가 톱에 켜죽잖아요. 그럼 톱에 켜죽으면 구원받습니까? 아프긴 아프겠지만 진통제 미리 먹고 목재소에 가서 드러눕지 뭐. 아프겠지만 구원받는다는데 어차피 인간은 한 번 죽는 거니까. 톱에 켠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에요.
제 말은 결국 뭔 뜻입니까? 인간은 어떤 식으로 해도 인간이 하는 식으로는 구원 안 해준다는 뜻이에요. 방주 만들어서 구원 안 줬고, 톱으로 켰다고 구원 안 해줬고, 모세가 바로의 공주 아들 됨을 버리고 고난 받기를 좋아했다고 구원 안 해줬고, 이삭이 엉터리 축복했다고 구원 안 해줬고, 야곱이 어긋맞게 축복했다고 구원 안 해줬어요. 결국은 구원하는 방법은 우리에게서 만들어낼 수 있다, 없다? 우리가 행한 것은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이걸 믿는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걸 인정함으로 그 사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피어오르는 바로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아우라였습니다. 후광이었고 능력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내가 직장 다녀도 이것으로 구원 안 되고, 애 키워도 이것으로 구원 안 되고, 교회목회해도 이것으로 구원 안 되고, 비타500 먹어도 그것도 착한 비타500 먹어도 구원 안 되고, 교회 나온다고 구원 안 되고, 전도한다고 구원 안 되고, 헌금 하신다고 구원 안 된다고 강단에서 외쳐야 됩니다. 헌금 다 날아갔어. 끝났어. 교회 간판 내려야 돼. 어차피 합기도인데 뭐. 선교회비 내도 구원 안 돼요. 안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제가 어제 유튜브 녹화하면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인간 쪽에서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이 결국 끊어진다. 하나님 앞에 연결이 안 되고 끊어지게 돼있어요. 부부 사이가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은 사랑한 만큼 돌아서게 돼있습니다. 사랑한 만큼 사람은 실망이 더 크게 마련이에요. 그렇다고 사랑 안 할 수도 없고. 이미 결혼한 것 빼도 박도 못하고 무를 수도 없고.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을 아무리 사랑해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게 돼있습니다. 그런데도 고맙게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은 우리 몸이 아니고 예수님 몸으로 하는 것을 환란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슨 태풍이 와도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느니라.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어도 주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 이유가, 아들이 그것 때문에 오셨다고. 안 끊어진다는 그것 때문에 오신 거예요.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싶어서 이리저리 해도 다 끊어지는데 머리카락 밀어버리니까 힘이 빠져요. 몸이에요. 하나님의 성신 받은 몸, 나실인의 몸, 그 몸의 비밀이에요. 예수님의 모든 비밀은 예수에게 초점이 맞춰있어요. 우리 몸이 아니고 주의 몸에 있고 우리는 껍데기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피를 우리에게 바르는 것은 현재 있는 네 몸은 피를 바를 때 비로소 채용이 되는 거예요. 피가 만들어내는 피로 인하여 이룰 나라에 취직이 되는 겁니다. 요새처럼 취직하기 어려운데 피 발라서 천국에 취직합니다. 취직이 되면 그 나라를 이걸 택하신 나라, 이걸 거룩한 나라, 이걸 제사장 나라라 하죠. 여기에 보세요. 제사장, 거룩, 택함 이걸 한꺼번에 묶어서 언약의 나라. 그래서 언약의 피, 또는 언약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오는 이러한 택함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제사장 나라 개념이 나올 때 이건 제가 좀 설명할게요. 초등학교 얘들에게 삼각함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얘가 삼각함수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아무리 앞선 공부를 해도 삼각함수까지 배우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삼각함수가 뭐지???
그런데 수학교수한테 삼각함수 물으면 삼각함수가 줄줄 나오죠. 탄젠트, 코사인, 사인하면서. 파동을 수치화시킬 때 또는 수학에서는 해석이라는 게 있어요. 이걸 수치화시키는 방법이 삼각함수에요. 이 세상에는 에너지 파동이 있잖아요. 파동을 수치화하려면 삼각함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삼각함수가 라디안이라 해서 나중에 곡선이 되거든요. 그래서 모든 파를 물리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삼각함수가 동원됩니다.
그렇다면 초등학교 1학년과 수학교수의 차이점이 뭡니까? 누적된 개념들이 있지요. 수학교수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알았습니까? 그건 천재보다 더 하죠. 자기도 역시 초등학교 때는 몰랐단 말이죠. 그런데 관심이 있어서 2학년, 3학년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대학원까지 박사학위 받으니까 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데 택하심, 거룩함, 제사장 이것은 예수님이 나타날 때까지는 알아요, 몰라요? 초등학생이에요. 몰라요. 그때는 우리는 초등학문 속에 있다 하는데, 모른다고. 택하신 하니까 모르는 게 꼭 아는 체 해요. 이게 또 문제라.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나라기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이것 누가 이야기합니까? 거짓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하죠. 성령 받은 참된 선지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택하신 민족이기 때문에 주께서 필히 우리를 망하게 하신다. 왜? 신명기 28장에 보니까 이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으니까.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 못 지켰으니까 저주받는 것이 당연하니까 이스라엘은 망해야 마땅하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초딩처럼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는 선택받았기 때문에 안 망한다고 돼있는 거예요. 이 아이디어 어디서 나왔습니까?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를 믿으라고 한 게 아니고 피를 뿌렸잖아요. 피라는 지식을 믿으라는 게 아니고 피를 뿌렸다고. 피는 지식이 아니고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 팔자가 돼버린 거예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방점 팍팍 찍고, 밑줄 쫙쫙 그어야 돼요.
우리가 피라는 것을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피가 나를 피를 안 사람으로 제조하고 만들어내죠. 만들어낸다는 것은 우리가 뭐다? 피는 죄인을 의인되게 만들어서 의의 나라, 천국 가잖아요. 그러니까 주께서 우리를 피 아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말은 우리를 뭐로 만든다는 말입니까?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만들잖아요. 그 죄가 뭐냐 하면, 택함이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택함 받았다고 우기는 그것이 바로 죄면, 거룩이 뭔지도 모르면서 거룩이라고 우기는 그거에요.
그럼 거룩을 제대로 아는 게 뭡니까? 아까 이야기했는데 빨리 한다고 다 잊어버렸죠. 언약이 예수님께 드러나죠. 그러면 뭐가 거룩입니까? 예수님만 거룩이죠. 예수님만 택하신 자고, 예수님만 영원한 제사장. 이 말은 우리는 안 거룩하고, 우리가 선택한 선택 개념은 엉터리고, 우리가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이걸 아는 것이 거룩을 아는 거라 말해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 작업을 이제부터 우리가 눈여겨봐야 되죠.
무슨 말이냐 하면, 앞으로 24장 쭉 나가는데 그 내용을 무엇에 유념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모든 개념과 그걸 받아들이는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잘못 오해해서 오해한 것과 진짜 모세를 통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어떤 충돌들이 있었는가를 살펴보면서 그런 충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극복했고 인간들은 어느 정도로 불신앙적인 사람들인가를 폭로당하고 있는가를 봐야 된다 이 말이죠. 그때 그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들 이야기죠.
8절에 봅시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제 이해되겠죠. 피를 뿌리는 이유는 우리를 죄인 만들기 위해서. 우리 죄와 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오다시피 백성들은 피 발랐으니까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다고 우기는 사람이 되고 만 거예요.
자기 주체를 포기 안 하는 겁니다. 지 주체됨을. 피가 왔으면 우리는 채용됐는데 지가 계속해서 주인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주님의 피 발린 걸 알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구원받겠습니다.” 아까 화초가 스스로 지한테 물주는 식으로. 성경에서 이런 걸 알아서 막 넣는 거예요. 팥빙수에 여러 가지 넣듯이 오색찬란하게 뿌려서 멋있게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이라 하는 것이 기껏 스물네 시간 온종일 생각하는 것이 자기를 아름답게 예쁘게 치장하는 그것 외에는 사실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보면 돼요. 그런 자아를 발견할 때 얼마나 그게 감사한지요. 피 없이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9절 봅시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이것도 제가 질문함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겠습니다. 질문은 이겁니다. ①그들이 행했다. ②그들이 보았다. 몇 번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냥 본 거예요? 했습니까, 봤습니까? 여러분 불꽃놀이 할 때 불꽃을 만듭니까, 보는 겁니까? 보는 거죠. 불꽃놀이는 주최 측에서 만들었죠.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보기는 이스라엘이 그냥 보고 있는 거예요. 앞으로 모든 구원도 그런 식입니다.
여러분이 성도인데 성도가 매일같이 성도되는 것이 여러분이 행한 겁니까, 그냥 당하는 겁니까? 지금 당하고 있는 거예요. 사모님, 참 요새 많이 당하죠. 좁은 문 간다고. 그냥 당하는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때려치우고 싶어. 마음 같아서는 로또 사서 1등 되서 어린이집 내가 차렸으면 좋겠다. 하여튼 원치 않는 길로 가요. 베드로처럼. 매일같이 당해. 하루 동안 내 뜻대로 된 것과 뜻대로 안 된 것을 계산해 보세요. 뜻대로 안 된 것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불꽃놀이를 그냥 쳐다보는 거예요. 내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을 쳐다봐야 되는 신세. 나는 내 인생을 꾸미고 싶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참기름 바른 것처럼 내 손에서 벗어나 미끄러져서 어떻게 감당이 안 되는 그런 식으로 가고 있는 내 인생, 그냥 쳐다보는 겁니다. 그 자체를 우리 예수님이 나서서 만드는 작품이라고 그렇게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것을 아름답게 보시면 안 될까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 자기 원대로 안 되면 세상에 재미를 못 느껴요. 재미있는 것은 뜻대로 될 때만 사는 재미를 느낍니다. 사람들이 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