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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말씀을 먹다 120905우리교회에스겔

말씀을 먹다 120905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말씀을 먹다 (겔 2:8-10)

이근호

12-09-05 21:08

말씀을 먹다

2012년 9월 5일 본문 말씀: 에스겔 2:8-10

(겔 2:8, 개역)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겔 2:9, 개역)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겔 2:10, 개역)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산다’는 것은 결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전 세계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심지어 교회 내에서 소위 봉사한다는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봉사자들도 결국에는 ‘어떻게 하면 밥 먹을 수 있느냐’와 관련지어서 일합니다.

인간이 벌리는 모든 일들은 이 헛된 ‘사는 일’을 목표로 시행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이 의미도 ‘하나님 말씀 지키면 굶는 일은 없다’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에스겔을 통해서 보면 이런 주장들은 자신들을 제대로 살리는 이해가 아니라 제대로 죽이는 이해들입니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휘젓고 다니면서 말씀이 담고 있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는데 활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이 말씀대로 사는 것’만이 ‘사는 것’입니다. 마치 폭풍 속에서 휘말려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의 ‘폭풍의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씀 속’에 들어가면 ‘산 자’가 되는 겁니다.

돼지 창자에다 내용물을 억지로 집어넣어 순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 강제로 말씀을 밀어넣습니다. 에스겔을 개인적으로 구원시키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에스겔 속에 담기게 되는 말씀은 안 팎으로 애곡과 애가와 재앙을 유발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에스겔이 담아놓은 그 말씀이 에스겔이 가는 곳마다 슬품과 통곡과 재앙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에스겔 입장에서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바로 이점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기존의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게 하시는 겁니다. 당장이라도 죽고 싶을 정도로 이 세상이 재앙과 애곡과 슬픔 뿐임을 느끼면서 세상을 통과케 합니다.

그렇다면 에스겔로 하여금 일종의 자살을 유도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에스겔처럼 이런 말씀이 들어온 사람들은 새로운 계열을 자아내게 됩니다. 기존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바로 이 새로운 창조에 관여되는 팔자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단지 세상을 도피하려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반발하고 반항하는 가운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선함을 맛보게 됩니다.

에스겔이 지니고 있는 말씀은 어떤 방향성을 지니게 됩니다. 단순히 에스겔 개인을 구원하는 용도가 아니라 말씀에서 언급하는 그 ‘이스라엘’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새로운 면을 접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형상’으로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신과의 접선을 시도하면서 제조하는 그런 형상을 거부하십니다. 신명기 5:8에 보면,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無)형상’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무형상도 일종의 형상입니다. 형상을 없앤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겁니다. 신명기 4:23-24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불’이 곧 하나님의 형상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불의 기능’을 발휘하는 식으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이 불의 기능은 소멸의 기능에요 또한 애곡과 애가와 재앙을 유발하는 기능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이러한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성도를 만나는 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대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를 보는 것은 그냥 인간을 보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 받은 스데반 집사’를 보는 것은 그냥 스데반 집사를 대하는 것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기능은 인간들이 요청한다고 현존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는 것을 ‘하나님 형상’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말씀이 유발시킨 사태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방향성’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이스라에게로 보냅니다. 이는 에스겔이 담고 있는 그 말씀과 ‘이스라엘’과 접선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이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에스겔이 담고 있는 말씀이 발휘흔 기능이 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이란 에스겔이 외치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이 작용해서 만들어내는 그 영역은 인간들이 다룰 수 있고 손에 잡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8: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세 제자가 보았던 그 예수님의 빛난 형상이 과연 참된 형상의 본질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형상’이란 항상 눈에 보인다는 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눈에 보이게 되면 거기에 경계선이 처져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없는 곳과 있는 곳이 구분 되어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어느 공간을 일단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 순간 다른 공간에서는 예수님이 아예 아니 계신 게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점을 이해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을 만들어내면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바로 그런 관계만이 진정 ‘산다’에 해당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사는 참 이스라엘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9-06 16:47

5강-에스겔2장 8-10(말씀을 먹다)12090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장 8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8-10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옛날 다 못살던 그 시절 우리 어렸을 적에 어떤 사람은 흙을 먹는다, 어떤 사람은 나무 줄기를 먹는다, 이것도 못 먹던 학교 애들은 학교에 와서 수돗물 틀어놓고 그거 실컷 먹고 점심은 생각도 못하고, 그런 일이 실제로 빈번했습니다. 뭔가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먹을 때 배가 불러서 또 하루를 살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보고 두루마리 성경책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 두루마리 양피지 먹으면 소화가 되겠습니까? 그 영양가가 몇 킬로칼로리가 나옵니까? 이거 먹으면 몇 끼니 때울 수 있겠습니까?

책이라는 물질을 먹어요. 책이라는 물질을 먹었는데 막상 하나님께서는 뭘 먹었다고 보느냐 하면 글자의 의미, 글자를 먹었다고 보는 겁니다. 양피지로 만들었든 종이로 만들었든지 간에 책을 뜯어먹는 것이 아니고, 책 뜯어 먹는 것은 쥐나 염소나 하는 짓이죠, 하나님께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고 할 때 그게 무슨 뜻이냐, 그게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광야시험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인자 되는 에스겔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떡을 먹는 것 말고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글자가 담겨 있는 미래에 이루어질 사태가 있어요. 그 사건이 선지자속에 들어가서 그 선지자는 그 사건에 의해서 거기에 동참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태풍을 일으킨다면 그 태풍 속에 에스겔이 들어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지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제대로 산다.’라고 하는 겁니다. 산다는 것은 뭐냐, 영양분 있는 것을 먹어서 배불러서 산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놓은 사태에 휘말려 들어가는 관계를 가지고 ‘산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독자적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까는 겁니다. 너 독자적으로 한 번 살아봐라, 그것은 에스겔에 나타난 산다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네 마음대로 산다는 거예요. 그것은 에스겔에게 비로소 말씀으로 산다, 가 성립되게 되면 에스겔 방식이 아닌 것은 몽땅 다 죽은 것이 되는 겁니다.

뉴스에 경제문제가 나온다면 그것은 사람 죽이는 경제문제에요. 모든 경제적인 문제가 다 사람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겁니다. 저는 죽은 팝 가수 마이클 잭슨이 평소에 했던 노래나 그 사람의 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못사는 아이들과 못사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보냈기에 우리가 그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면 그들은 삽니다, 라고 마이클 잭슨은 노래를 불렀고 평소에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양식주면 그것이 똥 되는 거지요.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산다는 것은 마이클 잭슨이 이야기했던 그 정도, 북한에 양식 나눠주면 그 양식으로 사는 그것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태에 말려들어가는 것을 산다고 여기기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사태에 들어가게 되는 그것이 영생이고 그것이 사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 사태에 말려들어가는 것도 살만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쉽고 안일하게 생각하는데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이 글이 에스겔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글이 어떤 내용이냐 하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에스겔 속에 들어가는 그 글들이 에스겔로 하여금 무엇을 유발하느냐, 애가와 애곡, 슬픈 노래로 통곡하는 것과 재앙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는 사건과 사태에 에스겔이 말려들어가는 겁니다. 이 말은 쉽게 해서 뭐냐, 하나님이 일으키는 재앙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이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애곡과 재앙과 슬픔과 통곡소리에 휘말려서 살게 되면 그게 사는 것이겠습니까? 아마 에스겔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아이고, 난 여기서 그만 살래. 그만 죽는 것이 편하다.’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이 땅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유일하게 이 땅에서 영생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84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천 날 동안 사는 것보다 하늘나라 성전 문지기로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 봤으면 좋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참새처럼, 마치 제비처럼. 성전 처마에 집을 짓고 난 제비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말은 달리 말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사는 것 자체가 힘들어 죽겠다는 겁니다. 훌쩍 떠났으면 좋겠다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이 땅에 사는 것이 괴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끌어내신 그 복음, 말씀 때문에 주어진 재앙과 애곡과 애통 속에 있는 사람 같으면 더 이상 ‘내가 이 땅에서 좀 더 살아볼까’ 하는 사적인 구원, 사적인 이 땅의 부귀영화 같은 것은 일찌감치 접어놓은 사람의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사태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을 얻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 만 살래, 더 살고 싶지 않아, 라는 생각이 매일 같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면 그 사람을 자살하게 하느냐, 자살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그만 살래, 하는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계열의 세상을 조성해 내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다, 라고 우리가 하는데 그 전부라고 여기는데 거기서 새로운 계열이 삐져나오지요. 그 삐져나오는 그쪽, 마태복음 7장에 의하면 그게 좁은 길입니다, 넓은 길이 아니고 사람들이 찾는 길이 아니고 좁은 길로 새롭게 불쑥 튀어나오는 새로운 계열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 계열은 에스겔처럼 떡으로 사는 세계가 아니고 말씀을 먹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의 계열들이 새롭게 삐져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새롭게 삐져나오는 사람들은 말씀 가지고 무엇을 부여받게 되느냐,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이 사명은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밥 먹고 살까, 그런 사명이 아니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내가 어떻게 기여하느냐, 내가 어떻게 쓰이는가, 세상을 차버리고 세상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엮어내는데 내가 어떻게 거기에 투입되고 있느냐, 거기에 매진하는 사명이지요.

내가 이렇게 복음전해서 월급 받은 것 가지고 기존세계에서 밥 먹고 살 수 있다, 라는 사명이 아니고 어떻게 세상을 차버릴 수 있는가, 세상을 포기해도 될 만한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 내가 이 몸 하나를 주께서는 집어넣는구나, 라는 데서 오는 사명입니다. 쉽게 말해서 기존 세상에 반항할 수 있는 사명, 의도적으로 반항하는 것, 반항하는 그 재미로 사는 사명, 사람이 안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된다고 들려지는 사명. ‘너 거기 가면 죽어.’ 하는데 그 ‘죽어’가 나에게는 ‘그것이 네가 사는 길이야.’라고 새삼스럽게 들려지는 사명, 세상과 역으로 살아가는 그 즐거움이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세상대로 안 해보는 데서의 기쁨을 느끼는 사명입니다. 세상 입장에서 어떻게 보면 상당히 용감한 거지만 성도입장에서는 자기의 팔자와 운명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세상에 반항하지 않으면 살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이고, 세상 살기 싫어. 빨리 자살해야 지.’ 그냥 피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 만들어 봐, 라는 식으로 투입된 운명을 부여받은 겁니다. 세상에 없는 것인데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그 일에 종사하게 된 그러한 사명을 배당받은 사람들이 성도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이 말씀은 자기가 먹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강제로 집어넣어 버려요. 병원에서 위내시경 할 때 환자 잠 재워놓고 기구를 집어넣어서 위장을 다 탐색한 다음에 헬리코박터 균 있다고 약 먹으로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강제로 그냥 말씀을 집어넣은 거예요. 이런 경우를 제가 좀 흉측하지만 TV로 본적이 있습니다. 전라도 어느 지방에서 순대를 특산물로 만들고 있어요. 돼지곱창에 강제로 내용물을 집어넣는데 참 보기도 싫던데 갑자기 그 장면이 생각나네요. 우리를 돼지곱창으로 생각해서 주께서 강제로 막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불룩불룩 집어넣는 거예요.

주께서 강제로 집어넣은 것이라 토할 수도 없어요. 토해봐야 또 집어넣을 것이니까. 왜 그렇게 하시는가, 거기에는 어떤 방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사적인 나의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집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지방교회라는 것이 있어요. 일종의 교단인데 워치만니의 주장이 실린 책들이 있는데 소위 기존 교회에 불만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 책들 많이 봅니다. 열두 광주리니 무슨 단계니 하는 책들인데 그런 책들이 혹은 구원 파, 이 단체의 책들이 전부 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다 개인 구원용으로 성경말씀을 도용하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 있는 에스겔 같은 경우는 구원용이 아닙니다. 3장 1절에 보면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라고 어떤 방향성을 띄고 있어요. 이것 먹고 구원받아라, 혹은 이것 먹고 영생 얻으면 네 할 일 다 했다, 이것이 아닙니다. 이게 아니고 어떤 방향성을 띄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고하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고하는데 네가 느끼고 있는, 네가 안에 품고 있는 폭탄 같은 것, 다시 말해서 애곡과 애가와 재앙을 어디 가서 쏟아놓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가서 왈칵 다 쏟아내 버리라는 겁니다.

네가 속해 있는 말씀, 말씀을 담고 있는 네가 존재하는 그 모든 곳에는 하나님이 제공하는 재앙과 심판과 저주가 폭발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에스겔은 일종의 자살폭탄, 탈레반? 알 카에다, 자기 몸에 폭탄을 두르고 뛰어드는 테러조직의 요원 같은 느낌이 들지요. 그냥 폭탄 실은 차량을 몰아서 돌진한다든지 그냥 쳐들어가서 심지 빼버리면 자기도 죽고 다 죽는 거지요. 네가 구원받았으니 저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자살해라, 그런 식이 아니고 네가 영생 얻었으니 거기서 말씀에 의해서 터져서 너도 죽고 그들도 죽고 다 죽어라, 그 말입니다.

인생이란 어차피 한 번 죽잖아요. 죽는다는 것이 우리하고 별개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이야기를 죽 따라가 보면 마지막 끝에는 죽음이 있으니까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거예요. 원숭이에게 꼬리가 달려 있지요.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누구나 죽음이라는 꼬리가 달려 있는데 그 죽음이라는 꼬리를 감춰놓고 나는 죽음 없다,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과 연결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은 지금 착각 속에 살아가는 것이고 꿈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현실적이에요. 그냥 밥이나 먹고 또 너무 먹어서 살 뺀다고 하는 것들이 다 비현실적인 겁니다.

전혀 현실하고 안 맞아요. 현실과 맞으려면 죽음이라는 꼬리와 현재 삶의 관계를 지어줘야 그것이 산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에스겔에게 그런 임무를 맡기는가, 그것도 이스라엘 속에 가서 터뜨려라, 터뜨리면 에스겔도 죽고 그들도 죽지만 에스겔이 그들에게 터뜨리면 에스겔은 영생 얻고 만약에 그 사람들이 무서워서 안 터뜨리면 에스겔도 지옥가고 그 사람들도 지옥가고. 그러니까 복음을 아는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굉장히 간편합니다. 죽으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고, 그겁니다.

옛날 말에 이런 것이 있어요. 참말을 할 때는 한 마디만 필요하지만 거짓말 할 때는 만권의 책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짜 말은 간단한 거예요. 복음 안고 복음 터뜨려 버리면 터뜨리는 순간 너는 살고 영생을 얻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무서워서 안 터뜨리면 죽는 거지요. 복음을 아는 목사가 강단에서 복음을 안 전하면 목사 저도 죽고 다 죽는 겁니다.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은 내 개인 구원용이 아니고요 간직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장식품이 아니고 어떤 기능을 나타내요. 그 기능이 뭐냐를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시면서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5장 8절에도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는 것이 형상이 없는 것인가? 여러분, 무형상도 형상입니다.

자, 방금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불이 하나님의 모습입니까, 라고 물을 때는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는 소멸하는 불이라고 할 때 그냥 불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 불이라고 한 그 불이 어디를 향하여 무엇을 태울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형상이 있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형상 앞장세워서 신과 접촉을 시도할 수 있다고 하는 인간들의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그러면 그 말은 좀 더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그냥 태운다는 거지요.

태운다는 것은 그냥 태우는 것이 아니고 화가 나서 분노로 태운다는 말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기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뭐냐,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일을 하는 거예요. 방금 에스겔이 먹었던 그 말씀, 애곡과 애가와 재앙은 이것들을 유발하는 하나님의 기능으로서 나타날 때 그것이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또는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 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해같이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예수님의 형상을 다 본 것이냐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서 믿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믿는다는 것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객관화 시키고 그 객관화 시킨 것을 주관화 시켜서 그것을 행함과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하면 객관화된 것에서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믿는다고 하고 그 객관화된 주관적인 의지로 만들어서 실천에 나서면 그것을 행함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니까 사람들이 뭔가 객관적으로 눈으로 봐야 되고 그 본 것을 취득해야 되고 취득한 그것이 나의 소유, 나의 의미가 되어야 되고 그 의미에서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의지를 끄집어내서 그 의지에서 행동이 나오게 되면 그 믿음에 합한 행함이 된다, 이것이 일반인이 갖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 출발점이 뭐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거울 비춰보면서 날마다 확인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기가 만져지고 여기 있다, 라는 식으로 주님도 보고 만지고 느껴질 때 비로소 거기 계시네, 거기 계시니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주님 거기 계시지요, 내가 안다니까, 내가 수정에 한 번 비춰보면 분명히 형체가 나타날 걸, 계신 것 다 아는데 뭐,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마치 옛날 전설의 고향 같은 것을 보면 귀신이 문 열고 들어올 때 들어오기는 했는데 보통 인간들처럼 형체는 안보이잖아요. 삐그덕, 저벅저벅, 할 때 ‘귀신 들어왔지요? 당신이 얼마 전에 죽은 내 남편 맞지요? 한 번 모습 드러내 봐요. 내가 물 한 번 뿌려볼까?’ 하면서 물을 확 끼얹으면 귀신이 ‘어, 차가워.’ 거봐 귀신이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믿고 싶은 거예요. 데미 무어와 패트릭 스웨이지 나온 영화 <사랑과 영혼>에도 비슷한 장면 나오잖아요.

사랑하는 애인이 나타난 것을 어떻게 아느냐, 동전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아, 당신 여기 있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것처럼 어떤 지점에 있을 때 우리는 내가 내 공간 점유해서 있는 것처럼 어떤 공간과 시간을 점유할 그 때 우리는 ‘있음’이라고 붙이고 싶은 거예요. 그리 되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마태복음 28장 20절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할 때 그 말을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할 때 여기에 함께 있어 버리면, 주님이 지금 여기 예배당 안에 있으면 지금 그 순간 팔공산에는 없는 것이 되어버리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의 믿음이라는 것이 이처럼 엄청나게 자기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내 식대로 믿었다고 해서 그것을 자꾸 믿음이라고 우기는 버릇들이 있어요. 하나님을 무슨 투명인간처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신체를 가지고 오셨으니 몸무게도 있을 것이고 키도 있겠지요. 음식도 드셨으니 소화도 했을 것이고 주무시기도 했으니 거기 계신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는 기능을 두고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겁니다. 심판하는 기능, 애곡과 애가와 재앙을 만들어내시는 그 작업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어떤 일이지요. 우리가 스데반 집사가 보고 싶다, 만약에 우리가 그 현장에서 저 사람이 스데반 집사라고 했을 때 스데반 집사를 보고 싶다 할 때는 대번 알아내요. 그런데 성령에 충만한 스데반집사라고 했을 때는 그냥 스데반집사하고는 상관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스데반도 그렇고 사도바울도 그런데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님, 당신이 사도바울이십니까?’ ‘예’ ‘내가 만나고 싶은 것은 그냥 사도바울 말고 성령에 충만한 사도바울이 보고 싶은데.’라고 하면 사도바울이 ‘그것은 당신이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사도바울이 손수건 가지고 기적을 일으킬 때 그게 사도바울이 자기가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 손수건이 늘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 때 그 순간 주께서 일을 일으키니까 성령 받은 사도바울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와 버린 거예요.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 이렇게 할 때 그것은 평소에 밥 먹고 있고 잠자고 있는 상태에서는 성령 충만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성령 충만한 이 근호, 그것은 이 근호조차 어떻게 보장할 수가 없어요. 에스겔이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 계시 한 번 내려 보세요. 계시 내려오니까 너무 재미있더라.’ 하는 이것은 에스겔의 태도가 아닙니다. 에스겔은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계시를 줘 놓고 다른 사람 앞에서 ‘에스겔아, 너 전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받았지.’ ‘지금 우리 앞에서 계시 한 번 받아 봐라.’ 하면 이것이 됩니까? 헐! 이게 안 되지요,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에스겔의 형상이라고 할 때 에스겔의 몸을 가지고 에스겔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강남스타일’은 싸이라는 가수가 있으면 말뚝 춤이 강남스타일이 되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강남스타일을 반복할 수가 있습니다. 무려 유-튜브 조회 수가 일억 번을 넘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 춤이. 그런데 스데반집사님이나 사도바울에게 해보라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말 탄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이것은 뭐냐, 재앙을 받을 때, 에스겔이 안에 곱창처럼 들어 있는 말씀을 가지고 터뜨릴 때 ‘야, 에스겔아, 네가 나에게 전하니까 우리한테는 재앙과 애곡과 슬픈 노래를 부르게 되네.’라고 느낀다면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계열로 만들어지는 이스라엘이 된다 그 말입니다.

무진장 어렵지요? 이스라엘이 있는데 에스겔이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에스겔이 증거 하는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사태를 유발시키는 말씀이라고 에스겔을 바라보면서 믿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에스겔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 겁니다. 에스겔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이 갖고 있던 그 말씀에 같이 참여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이 이런 말씀의 이스라엘이 되었을까요? 택도 없는 소리, ‘이게 어디서 미친 소리를 듣고 와서……, 뭐? 내 말 안 지키면 재앙, 심판이 이른다고? 어디서 미친 소리를 하고 있나, 유다나라가 이렇게 편안한데. 저리가!’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에스겔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나본적이 없지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오른편에 있는 천국 갈 양아, 네가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돌아보았느니라.’ 할 때 천국 갈 사람이 뭐라고 해요?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말씀이 작렬하고 말씀이 역사하는 그곳이 바로 지금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사람을 주님의 형상으로, 형상답게, 형상 속에서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참 이스라엘이고 참 성도라면 지금도 쉬지 않고 주께서 주신 말씀대로 세상이 부지런히 진척되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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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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