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스러운 부활 120902
염려스러운 부활 120902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염려스러운 부활(눅 24:1-6)
이근호
12-09-02 13:27
염려스러운 부활
2012년 9월 2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4:1-6
(눅 24:1, 개역)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눅 24:2, 개역)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눅 24:3, 개역)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눅 24:4, 개역)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눅 24:5, 개역)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6, 개역)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들의 일상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마치 지하철 공사하면서 지하에는 공사가 분주하지만 지상에서는 평소처럼 차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안식일이란 사람들이 원해서 정해놓은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안식의 때를 위해서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작업 따라 묵묵히 진척에 나섭니다. 천사들도 여기에 동원됩니다. 이것은 화나님 아버지와 ‘약속’ 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일상과 그리고 약속을 연결 지어서 세상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비록 남들 보기에 일상대로 살았지만 그들의 본향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일상은 일상대로 가고 약속은 약속대로 움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감당이 안됩니다. “우리보고 뭘 어쩌라고?”는 식입니다. 예수님을 부활하셨더라도 우리네 일상의 패턴이나 질서는 깨어지는 우리는 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과연 무엇을 가지고 ‘부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참된 믿음에 대해서 로마서 4장에 잘 나와있습니다. 로마서 4:19에 보면,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이나 아내의 몸을 ‘죽은 몸’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 수행을 위하여 자신의 몸이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죽은 몸이 되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그 이삭을 ‘죽은 자신의 몸’의 산물로 보지 않고 ‘약속으로 난 자식’으로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로 보편화 시켜봅시다. 로마서 4:25에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저촉을 받는 자들은 자신이 비록 살아있다고 자부해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죄로 인하여 죽은 자가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일상과 약속의 연결입니다. 성도가 그 어떤 일상에 종사하든지 간에 약속에 준해서 그 일상을 늘 다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죄가 있는 자는 누구나 죽은 자가 됩니다. 따라서 죽은 자에게는 더 이상 영멸 되지 않으려는 기대나 꿈은 허락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살아있다고 자부한다면, 현 살아있는 자신에 대해서 내세에 또 영원히 안 죽으려고 애쓰게 되겠지만 이미 죄로 인하여 죽은 자의 입장에서 그런 요구조차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왜 죄인인가를 밝혀주는 식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즉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덤에 넣어놓았지만 실은 인간들이 현재 무덤 속에 살면서 못 빠져나오는 형편에 있습니다. 인간들은 죄에 갇혀 있는 겁니다. 갇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보는 것만 믿겠다’는 식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자신을 영원히 살게 만들겠다는 의욕으로 드러납니다.
일단 우리는 우리 인간의 논리로 설명이 되는 식의 부활 사건을 먼저 상정해 봅시다. 그리고 난 뒤 그것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로 몰려 올 수 있는 미끼로서 부활 사건을 거론합니다. 논리가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죽더라도 영원히 다시 살 수 있는 몸으로 되살려내기 위해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몸을 다시 살려내었다.”는 겁니다.
이 이론대로라면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두 가지 증거를 지녀야 합니다. 첫째는 확실하게 죽었었다는 증거와 두 번째는 죽은데서 다시 완벽하게 살았다는 증거말입니다. 그 증거를 가지고 동네방네 다시면서 자신을 부활을 몸을 보란 듯이 자랑을 해야 합니다. 마치 남성들이 그동안 애쓰서 다듬어놓은 복근을 드러내놓고 자랑하고 아가씨들이 해변가에서 여름내 태운 구리빛 피부를 드러내기 위해 짧은 옷으로 거리를 쏘아다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부활을 증거하시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일종의 인간 질서에 대한 테러요 폭력입니다. 갈라디아서 3:27-29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즉 모든 인위적인 경계선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통이나 관행이나 관습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좋아라고 쇼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적으로 도리어 믿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보고서는 못 믿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와 인간이 등장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배제되면서 도리어 인간의 죄악됨을 지적하는 기능을 하십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실은 ‘죽은 자’로서 이 땅에 사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안목에서 예수님의 그 진실본체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남기는 흔적이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6:16-17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소지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예수님에게 가까이가게 되는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의 꾸어온 꿈과 낭만과 비전과 희망이 앙파껍질처럼 하나 둘 씩 벗겨져야 합니다. 취직만 하면 하나님에게 꼬박꼬박 십일조 내겠다는 그 결심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예 취직조차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내민 모든 것이 자기가 여전히 전적으로 죄인이 아니며 의로운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내뱉는 증거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만한 겁니다. 성도는 자신이 벗겨내놓은 모든 양파껍질을 하나님께서 하나도 버리지 않고 거기에다 긍휼과 자비의 피를 묻힌다는 사실을 약속과 연결된 안목으로 받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9-03 13:30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4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8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4:1-6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안식일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필요해서, 인간이 요청해서 생긴 제다고 아니잖아요. 안식 후에 주께서 부활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일상을 건드리지 않고 따로 은밀하게 일하시는 거예요. 지하도 공사할 때 위로는 차 지나다니고 밑에는 흙 파고, 일상은 일상대로 움직여 가고 있고 지하도로는 그것대로 건설되어가고. 가끔은 가스통이 터져서 밑에서 공사한다는 흔적이 지표위로 올라와서 사람이 수십 명 죽은 일도 있지요. 대구 상인동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런 것이 바로 부활의 효과거든요. 안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 전부터 심어놓은 코드, 정보, 하나님의 약속이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일상, 현실과 주께서 깔아놓은 그 약속이 서로 통할 때 그것을 믿음이라 하는 겁니다. 일상이 바뀌지는 않아요. 세상 사람과 똑같은데 다만 구원받는 사람, 천국 가는 사람은 그 약속된 세계에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미리 약속을 눈치 채서 그 약속이 이끄는 대로, 그 약속의 힘에 이끌려서 주께서 장만해 놓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약속의 사람인데 약속의 사람이라 해서 하루에 네 끼 먹고 고급 아파트에 산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는데 그 사람에게는 약속에 의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가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항상 자기를 나그네라고 인정하고 자기의 본향은 하늘의 예루살렘성이 있어서 자기를 거기로 이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갔지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그 안식이라는 약속, 안식의 때가 있다, 그 안식이라는 그것, 그것에 담긴 내용을 통해서 생명을 우리한테 공급하고 주입시키는 작업을 은밀하게 해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생각할 때 두 가지를 생각해야 돼요. 하나는 뭐냐, 예수님을 보고 믿을 수는 없다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내가 보면 믿겠다, 그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을 맘대로 만지고 사진 찍는다 할지라도, 현장에서 예수님과 악수한다 해도 보고서는 믿지를 못해요. 요새 새누리당 대선 주자가 사람들 만나고 다니면서 악수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 분이 천사인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천사로 간주하지 않지요. 아무리 봐도 아버지 엄마 닮았잖아요. 저 분 아무리 봐도 천사인데, 이런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마 허 경영 빼놓고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을 나는 보면 믿겠다, 지금 우리도 예수님 봐도 소용없습니다. 예수님 봐도 믿지를 못해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그 살아난 예수님을 내가 보면 믿겠다, 이렇게 우기는데 그것 봐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 아닌 것은 뭐냐,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살아났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 여기 본문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기에 두 사람이 나옵니다.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이 옷을 어디서 맞춰 입었는지 모르겠어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그리고 예수님, 그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계는 우리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만나게 하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죽어서 갈 수 있는 주께서 마련한 그 세계에 계시는 분이에요. 우리가 살아 있다고 우긴다면 살아 있는 우리의 세계와 예수님의 세계가 따로 있는데요, 예수님의 세계로 넘어올 때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서 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리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뭘 믿으면 되지, 라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 살아 있는 내가 그게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살아 있는 내가 괜찮은 종교 하나 골라잡아서, 살아 있는 나는 곧 죽을 테니 죽어서라도 살아 있는 나를 다시 살게 하는 그 종교를 내가 가지겠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기꾼으로 사는 거예요. 종교인들은 전부 다 사기꾼들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 252억 사기 친 사람이 등장했어요. 그 사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부라질 관통하는 고속철을 놓는데 자기들 컨소시엄이 그것을 따냈다는 거예요. 그래서 곧 주식상장하면 대박이 나는데 미리 투자하면 주식 교환할 수 있는 교부 권을 준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교장 퇴직한 퇴직금부터 해서 다 거기에 넣은 거예요. 그런데 1년 지나도 2년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거든요. 그 브라질 공사가 70조의 엄청난 공사라고 했는데 소식이 없기에 사장한테 물으니 ‘그것은 그것이고 이번에 또 중국에서 100조원의 컴퓨터 사업을 따냈다.’고 한 거예요. 사람들 많이 모집하면 대리, 과장, 부장, 이런 식으로 배지도 나눠줬어요. 그걸 보고 제가 느낀 것은 ‘저게 바로 교회다.’ 계속 희망을 늦추는 거예요. 계속 희망을 지연시켜서 사람들 많이 오게 하면 서리집사에서 장립집사로, 장립집사에서 권사나 장로로 해 주는 거예요. 돈을 많이 끌어 모으는 사람한테는 그만큼 높은 직책을 주는 거예요.
사기를 혼자 치다가 장로나 장립집사와 같이 사기를 치는 거예요. 이렇게 같이 사기를 치니까 ‘당신 왜 사기를 치는가?’하면 누가 화를 내는가 하면 그 목사가 화를 내는 것이 아니고 목사 말 듣던 그 밑에 있는 부장급들이 화를 내요. 지금도 거기서 못 빠져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부인 때문에 못 빠져 나온 사람이 있는데 각 가정마다 사기당한 돈만 계산해 봐도 보통 액수가 아닙니다. 십일조를 비롯해서 각종 헌금 낸 것만 따져도 복리로 계산하면 보통 사기당한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계속 지연시키는 겁니다. ‘언젠가는 죽었다가 부활한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지금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내가 살아 있는 채로 계속 안 죽고 나를 지연시켜서 살아 있는 나를 천국에 들여보낼 방법이 없을까, 이것을 미끼로 해서 그만큼 사기를 쳐 온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믿음은 뭐냐, 로마서 4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이 나와서 믿음의 롤 모델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믿음의 모델로 제시하는데 거기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이 자기 몸이 죽었다는 것. 믿음이 뭐냐, 믿음은 약속에 의해서 자기가 재규정 받는 겁니다. ‘주여 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 교인들에게 묻지 말고 성경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입니까, 물으라는 말이지요.
물으니까 ‘너는 이미 죄로 인하여 죽은 존재’라고 확정판결을 받습니다. ‘제가 목숨이 붙어 있어서 숨을 쉬는데요?’ ‘네가 숨을 쉰다 할 찌라도 죄가 있는 이상은 약속에 준해서 너는 죽은 자’라고 간주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그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범죄 함과 죽음과 관련되어 있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의인됨, 우리의 죄 없음과 관련해서 부활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배웠던 국민교육하고 전혀 관계없는 내용입니다.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전혀 관계가 없고 K팝이라든지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는 그 내용, 우리가 미술관이나 음악당이나 스포츠현장에서 느끼는 그 감각과 아무 상관없는 내용으로 우리를 쏘고 있습니다. ‘죄 있나, 너 죽었다! 죄 있는 자를 우리는 죽은 자로 간주한다. 네가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왜, 죄 때문에!’ 따라서 나는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가 밥을 먹고 잠을 자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시체에 불과하다, 라는 규정을 우리 내부에서 끄집어 낼 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가서 풍덩 잠길 때 비로소 우리는 아는 겁니다.
요나가 선원들이 사는 그 배에서 잠을 잘 때는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랐지요. 자기는 잠 자는 그냥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일상입니다. 아까 제가 일상 이야기했지요? 부활은 우리 일상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지요. 요나가 잠이 와서 배 밑에서 잠을 잘 때는 일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해서 요나를 끄집어내서 풍덩 지중해 바다에 요나를 빠트릴 때 비로소 요나는 말씀에 입각해서 자기 자신은 물에 빠져야 될 존재인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지하도 공사는 우리 일상을 건드리지 않고 그냥 조용히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공사하고 있다고 해서, 그 일상을 건드리지 않고 있다고 해서 말씀이 그냥 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일상을 건드리지 않아요. 건드리지 않는데 극구 우리 귀속에 들려온 것은 뭐냐 하면, 도통 이해 못할 약속, 십자가라는 그 약속으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보라고 자꾸 찔러대면서 그 십자가복음 이야기만 자꾸 들려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예수라는 분이 무덤에서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에 근거해서 보니까 무덤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가 그동안 무덤 속에 살아온 겁니다.
우리가 무덤 속에 갇혀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평소에 살아 있을 때에 우리는 오해했지요. 예수님도 살아 있고 나도 살아있고, 그렇게 본 겁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자요, 우리보기에 예수님만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은 죽은 자로서 사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모든 것은 그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대신 담당해야 될 우리 죄를 짊어지고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약속이라는 고리, 사슬, 통로를 통해서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그 파이프를 끊어버리고 예수님 단독으로 보니까 ‘예수님 저 양반 왜 저러는 거지?’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가니까 동네 아줌마들이 와서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보고 우십니다. 날 위해 울지 말고 네 딸을 위해서 울고 너 자신을 위해서 울어라, 내가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갇혀 있어. 갇혀 있는 것을 내가 뽑아주기 위해서 너희들이 어디에 갇혀 있으며 어떻게 해야 거기서 빠져나오는가를 내가 앞서서 보여줄게.’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 받고 무덤에 갇혔다가 사흘 만에 거기서 빠져나오신 겁니다. 도통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도대체 뭘 믿은 겁니까?
우리하고 똑같이 그냥 일상적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이에요. 이스마엘 낳고 밥 먹고 양치면서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하지만 도저히 믿지 못할 이야기입니다. 왜 그런가, 살아 있는 사람이 내 놓는 모든 논리는 그게 그 사람을 죽이는 논리입니다. 자, 아내가 임신했다. 99살 된 아내가 임신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기는 이미 아내의 태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임신을 한 거예요. 여기서 아브라함 보고 믿으라고 하면 아브라함이 뭘 믿겠습니까?
논리를 동원하는 거지요. 아내가 다른 애를 납치해서 숨겨놓고 임신했다고 옷 속에 베개집어 넣고 배 나온 것처럼 해서 임신했다고 해 놓고 나중에 애 낳았다고 할 수도 있고, 또는 체해놓고는 딸국질을 하면서 그것으로 임신한 티를 낼 수도 있고, 대체 아내가 임신해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납득되도록 애 쓰는 모양새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언제까지 계속 믿을 만 해서 믿겠다는 조로 가느냐하면,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은 계속해서 내가 믿을만한 것만 골라서 믿겠다는 억지를 부리게 되는 겁니다.
계속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나는 살아 있기에 더 살아야 돼. 나는 살아 있기에 이왕 사는 것 멋있게 살아 있어야 돼.’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밑바닥에 깔고 살아 있는 내가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사느냐, 계속해서 그것만 자꾸 주장하는 겁니다. 사회의 모든 범죄라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아동성폭력이 어떻고, 그 밖에 강도질, 도둑질 등의 사회범죄를 이야기하지만 그 문제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만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교만한 사람은 누구나 범죄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것 없어도 괜찮고 고생해도 괜찮고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 이렇게 생각이 안 들고 ‘왜 나는 저 사람이 가진 것이 없을까, 나는 왜 저게 없을까?’
언젠가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동화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가 있잖아요. 성냥팔이 소녀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눈은 왜 그렇게 오는지,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 하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밝고 따듯이 빛이 비쳐 나오는 곳을 보니까 어느 가정에서 크리스마스라고 맛난 음식 앞에 놓고 환하게 가족들이 웃을 때 그 성냥팔이 소녀가 뭐라고 합니까? ‘왜 나는 일찍 부모 여의어서 저런 부모가 없고 형제가 없고 나는 왜 저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가?’ 어릴 때 그 동화 보면 눈물이 막 났어요. 세 번째 성냥 켜면서 결국 죽어 가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왜 그런가, 그 마음이 교만해서 그런 거예요.
그게 교만하다니까요? 눈물 낼 일이 아니고 화를 낼 일이라는 말이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이것은 동화가 아니고 실제 있었던 일인데 예수님 태어났을 때 그 빈들에서 양치는 소년, 남들 다 잠들어 있는 그 때 목자는 양들과 함께 들판에 있는데 양들의 등짝은 별빛에 반짝이고 있고 적막이 흐르는 그 시간,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더니 천사가 등장했다 이 말이지요. 천사가 양치는 외로운 목자에게 등장했습니다. 그럴 때 목자는 두려워서 엎드려서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이게 교만 아닌 겁니다. 다른 세계를 접한 겁니다. 그 순간 목자는 내가 살았나 죽었나, 내가 이거 해서 얼마 받는가, 직업을 바꿀까, 이런 생각이 없어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는 천군천사의 찬양소리가 들릴 때에 비로소 그 목자는 교만에서 벗어난 겁니다. 이게 덮쳐진 거예요. 우리 인간들이 사는 바깥의 세계가 하나님의 다윗의 자손이 온다는 약속에 준해서, 그 약속이라는 지하철 공사에 준해서, 평소에 일상을 안 건드리던 그 하나님께서 그때만 목자들의 일상을 건드려서 목자들의 기존의 일상적인 고민과 근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이 모든 것이 일소에 다 날아가 버릴 정도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이게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이게 바로 크리스마스에요!
백날 크리스마스 절기 지켜봐야 소용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내가 살았나, 죽었나? 그것마저 고민거리가 안 되는 거예요. 요양병원에서 내일이냐 모레냐 오락가락 하는 그 할머니, ‘내가 죽으면 유산가지고 형제간에 싸울 건데.’ 하고 고민하다가 갑자기 크리스마스 만나버리면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것조차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그거면 되었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너는 택함 받았다는 그 소식으로 인하여 즐거우면 그것으로 되었지요.
그것이 오늘 본문에 찬란한 옷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어느 의상실에서 맞춘 것도 아닙니다. 그냥 찬란한 옷이에요. 예수님 죽음 속에 함께 세트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두 천사들과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고 있었던 거예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천사들이 도와줬잖아요. 항상 천사들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쪽 세계를 우리는 다 떨어버리고 그냥 우리와 똑같은 어떤 아저씨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당시 사람들이 보고서 믿겠다고 설쳐대니까 살아 있는 내가 억지로라도 그것을 믿고자 애를 쓰는 자체가 이 살아 있는 나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믿음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믿겠다는 그것은 일종의 거짓말이고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믿어져야 되지요. 내가 믿어진다는 것은 내가 믿겠다는 것은 다 헛짓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것이 바로 믿어지는 거예요. 내가 믿겠다, 열심히 하겠다, 하겠다, 하겠다, 전부 다 이것이 말장난에 불과한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애들 소꿉놀이 장난입니다. 일종의 스포츠, 애나 어른이나 그냥 노는 장소에요. 전부 다 자랑 질이에요. 구역예배 가도 자기 자랑 질로 얼룩져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 자랑 질,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자랑 질.
약속에 입각해서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면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죽음의 세계, 우리 일상을 건드리지 않고 하나님끼리 따로 일하던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찢어짐을 통해서 죽으심을 통해서 쏟아지는 거예요. 저쪽의 세계, 영생의 세계가 예수님의 십자가 그 찢어진 틈새를 통해서 왈칵 하고 이쪽으로 쏟아져버린 겁니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폭력이에요. 그 부활의 폭력이 어떤 식으로 사도바울편지에서 등장했는가를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의 그 사건을 통해서 저쪽에 쌓여 있던 생명이 이쪽의,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일상의 사람들의 단체에 침입해 들어왔을 때 이것이 어떤 식으로 폭력적인가를 사도바울의 편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모를뻔 했습니다.
그 사도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부터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것은 대단한 폭력입니다. 기존의 모든 질서를 뭉개버린 겁니다. 관습과 전통과 법과 그리고 양심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을 흙탕물로 싹쓸이 해버리는 겁니다. 남자는 이래야 되고 여자는 이래야 된다는 모든 남녀노소의 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이니라.’ 우리는 규격 맞춰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 여기서 여기까지는 당신 것, 이렇게 하잖아요.
지적공사에서 땅 측량해 보세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라 땅,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땅,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그런 식으로 구역이 잡힐 때 내 소유가 되고 내 경계선이 있을 때 내 것이 되는데 부활이라는 것이 생명의 부활로 쳐들어와버리면 그때부터는 이 모든 네 것 내 것이라 우기는 그것이 주님 앞에서는 교만한 태도로, 여전히 기존 질서를 붙잡고 기존질서에 맞추어서 나라는 것을 따로 뽑아내려는 이 버티기, 주님에 대한 반항심, 교만하고 싶어서 환장한 심보,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로 부활의 능력이 임한 사람, 쉽게 말해서 성령이 임한 사람 같으면 남이 나를 죽인다는 그 힘보다 더 무서운 힘이 부활의 힘, 영생의 힘입니다. 영생의 힘이 사람이 나를 죽이는 힘보다 더 무서운 힘이에요. 왜냐, 부활의 힘은 항상 내 것이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안심하고 한숨 돌리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를 계속 죽음으로, 죽음으로 몰아가면서 생명의 위대함을 부각시키는 식으로 우리에게 일을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이 어렵지요. 쉽게 하면, 부활의 힘이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주여, 이만하면 저도 살만 합니다.’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까지 밀어붙여요.
그러면 우리는 ‘주여, 이러면 주님 때문에 못삽니다. 이래가지고는 정말 살수가 없어요.’ 하면 ‘내가 부활했잖아. 너는 죽어도 살아.’라는 것이 그 상황을 통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아기를 낳았어요. 죽은 몸인데 그 몸을 통해서 이삭이라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뭘 믿었느냐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뭘 믿었기에 자기 아들을 덜렁 제사 한다고 제물로 모리아 산에 바쳤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이 로마서 4장에 분명히 나와 있고 창세기 22장에 분명히 나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믿기가 엄두가 안 나서 그냥 방치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잘났다, 해서 아브라함 따로 놓고 우리 따로 놀아버려요.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니까 조상됨을 인정해 줘야 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대체 뭘 믿었느냐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겠다고 사전에 미리 기대하거나 기도하거나 희망한다거나 꿈꾸는 것이 없었어요. 사람이 꿈이 없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주님께서 성취하시는,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으라고 주시는 것은 살아 있는 내가 아무리 구상하고 연구하고 미래를 예측해도 우리가 구상하고 예측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에요.
우리가 구상하고 예측하고 꿈을 꿔도 그것을 비켜가고 그것을 배제하는 이유가 우리가 죽은 자임을 분명히 하면서 주님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살아 있는 내가 꿈을 꾸고 어떤 계획을 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는 안 죽어도 구원 될 수 있다, 나는 안 죽어도 영생의 나라 갈 수 있다, 안 죽어도 예수님 나라 간다는 식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나로부터 출발한 연결이 그대로 천국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이어지면 그 나라는 주님의 나라가 아니고 내 나라가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일부러 나에게서 출발한 그것을 천국 가는데 잘라버려요. 잘라버리면 그 잘라버린 상태에서 나와 연관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만 거기에 개입되어야 돼요. 우리는 그 몸으로 하신 개입된 그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서 대를 못 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대와 그 다음 대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이삭을 집어넣지요. 그런데 이삭은 절대로 아브라함 몸에서 태어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몸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둘 다 죽은 몸이라는 것이 이삭을 통해서 분명해 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죽은 몸이라는 것은 숨을 헐떡거리고 숨을 못 쉰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증거가 뭐냐, 이삭을 임신한다고 하니까 웃었어요. 웃으니까 그때 천사가 또 등장해요. 천사는 하여튼 애를 먹여요. 천사가 또 등장해서 ‘네가 방금 웃었지?’ ‘안 웃었습니다.’ ‘웃었잖아.’ ‘안 웃었습니다.’ ‘웃었잖아!’ 웃었다는 그것이 낳은 아기의 이름이 되어서 그 이삭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브라함은 이미 죽은 자를 주께서 사용한다는 것, 죽은 자에서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서 죽은 자를 하나님께서 채용한다는 것, 죽은 자를 가지고 온다는 거예요.
올 때 그냥 산자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산자를 죽은 자로 전환시켜서 죽은 자로 만들어놓고 그 죽은 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생명이 꽃 피도록 우리를 그렇게 사용해 내시는 거예요. 기독교가 원래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복음이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어요? 그냥 예수 믿는다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그것을 가지고 가짜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가짜 성령, 가짜 복음, 가짜 예수라 하는 겁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해서 영생의 나라, 또는 영적세계에 이어지기 위해서 인간은 부단한 노력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상식적인 것이 상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일이 왜 일어났을까, 규명하고 조사하고 그 배후를 연구하고 탐색해 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과학의 역사라는 겁니다. 고체라는 것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덩어리가 고체에요. 액체라 하는 것은 흐르는 성질을 액체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체에요. 기체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세에 들어와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다고 해서 처음에 그것이 있다고 한 사람은 욕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있다고 하다니, 네가 좀 상식적으로 놀아라.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이지.’ ‘아니야.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있어서 이런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하니까 공격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보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체라는 것이 있어서 눈에 보이는 식으로 만들었어요. 액체로 만들었어요. 압력을 가하니 기체가 액체로 바뀝니다. ‘거봐, 있잖아. 내가 있다고 했잖아.’ 이것이 화학자 보일이라는 사람이 처음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것이 보일의 법칙인데 압력과 부피의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금 부활했다, ‘어디? 어디?’ ‘안 보인다.’ 안 보이는 것에 만족할 인간이 아닙니다. 안 보이는 것을 기어이 보이게 만들어야 되지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얼려 버릴까요? 물질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영적 세계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과학자들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극저온이라 해서 그 상태에 들어가면 기체도 아니고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니고, 보통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고체나 액체나 기체 셋 중 하나인데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니고 기체도 아닌 상태를 영하 273도, 그 일억 분의 일까지 다가가서 그것을 만들었어요. 전문용어로 ‘보즈-아인슈타인 응축(Bose-Einstein condensation)’이라 하는 것인데 이것은 미세한 양자의 세계에 가게 되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이렇게 있다고 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뭐냐,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 계시다, 하면 그쪽에서 뭔가 <고스트바스터> 영화에서 하는 것처럼 유령을 가두어서 보이는 식으로 만들면 되는데 인간시간 자체를 전부 다 거두어 내다보니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혹은 이때다, 저때다, 하는 자체가 날라 가버리는 세계, 그 세계를 지금 물리학자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나’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이 모든 과학의 노력들과 이상은 뭐냐, 내가 믿을 수 있도록 눈에 보이게 해 줘, 그 말입니다.
설교 마무리하면서 진짜 궁금한 것 할 텐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뭐냐, 저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서 부활의 주님이 여기 있다고 보여줘야 영생의 물이 확 이쪽으로 쏟아진다고 했는데 우리 쪽에서 다가가서 손에 잡힐 만한 것, 이거 믿습니다, 이럴 수는 없겠습니까, 그렇게 믿어봐야 믿음이 아니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있어요. 예수님의 그 부활을 믿고자 할 때 사실은 제자들이 불안불안 했습니다. 왜냐, 예수님께서 자기 일상을 건드리지 않는 법인데 갑자기 주님께서 부활하니까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이 부활했는데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부활했으니 우리는 굶어죽을까요? 왜 갑자기 부활해서 우리가 감당이 안 되도록 우리 생활을 난처하게 만듭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이것은 바로 살아 있는 세계에 그 살아 있는 세계 바깥에 있는 죽음의 힘이 들어와 버리면 이 살아 있는 사람은 감당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부활의 능력이 직접 왔을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쉽게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보면 그 부활의 능력이 이런 식으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 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성령을 받게 되고 부활의 능력이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들이닥친 사람의 특징은 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현장으로, 본인의 모든 일상의 세계가 그것을 증거 하는 현실로 전환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주는……”, 그러니까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 주는 구원자시고 나는 구원되지 않으면 저주받을 인간입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이다.” 주는 살아 계시고 나는 살았다고 하나 사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사건들로 나의 평생의 일상이 질서 잡혀 있다는 것, 그렇게 체계 잡혀져 있다는 겁니다.
실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되느냐하면, 여러분이 양파를 알지요. 양파 껍질 벗기면 계속 벗겨지잖아요. 내가 양복 주머니에 이렇게 넣고 로켓 타고 태양에 간다 치면 태양에 가까이 가면 내 양복 주머니에 넣어놓은 이것도 같이 타버리고 벗겨지지요. 양파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 끌려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주님, 이것 하겠습니다.’ 하면 그것도 응답이 안 돼. ‘주여, 이거 해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그것도 안 돼. 취직이 안 된 사람이 ‘주여, 취직하면 꼭 십일조 하겠습니다.’ 우리 같으면 가만 들어보면 그렇게 되는 것이 주님에게도 이득이 된다 싶지요. 왜, 취직도 하고 십일조 내면 교회로 들어와서 주님 주머니에 들어가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아 보이는데 아예 취직이 안 되네.
뭔가 끊임없이 나는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그것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뭔가 내 놓으면 양파껍질이 층층이 한층, 두층, 계속 벗겨져 나가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뭔가 껍데기가 벗겨지니까 겁이 나서 속으로 기어들어가잖아요. 속으로 기어들어가도 계속 벗겨내면서 나중에는 구더기처럼 숨은 구석에서 기어 나와야 돼요. 계속 벗겨지는 거예요. 이것까지는 안 됩니다, 하는데 어느새 인민군처럼 낙동강전선까지 밀고 들어왔어요. ‘항복해라.’ ‘아닙니다. 안됩니다. 이것만큼은 내가 하나님 이름이라도 못 내놓겠습니다.’ 그것마저 다 와해되고 다 털어보니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있는가, 층층이 벗겨놓은 양파껍질만 옆에 수두룩하게 널 부러져 있지요. 그것을 다시 주워모으는 겁니다. 그것을 주워모으면 그것이 뭐냐, 죄인,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내가 벗겨놓은 이 모든 것,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나도 인간이다, 나도 사람이다, 나도 여자다, 나도 남자다, 나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라고 하면서 우긴 그 모든 껍데기를 주께서는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 양파껍질 벗겨놓은 것 그냥 먹지 않고 시커먼 춘장에 찍어먹는데 그 찍는 춘장이 예수님의 피, 하나님의 긍휼로 찍어서 ‘이 죄도 긍휼로서 내 것이 되었다.’ 그 모든 끝자락에 주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듬뿍 묻는 겁니다.
우리가 벗어야 될 껍질은 너무 많은데 그 껍질의 모든 것마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그것마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때는 남자가 되어서 여자가 부럽고 어떤 경우는 여자가 되어서 남자가 부럽고 어린애는 어른 부러워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이 모든 것이 다 소멸되고 다 하나가 되고 말지요. 모든 것이 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이것이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는 고백, 어떻게 ‘진짜로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나의 주인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내 머리를 주님이 차지함으로써 나는 얼굴 없는 미녀?
주께서 지금도 나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지금도 우리가 양파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까발리는 식으로 마음껏 우리를 활용하십니다. 그 사람들이 엘리야였고 아브라함이었고 이사야였고모세였고 야곱이었고 예레미야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였고 돌에 맞아죽는 스데반집사였고, 순교하신 사도바울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생각하면 주님 앞에서 참 너무나 왜소하지요. 왜소한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너무 나대지 마세요. 우리는 더 왜소해야 돼요. 난처해도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기 있어도 인기 끝나면 너무 왜소해요.
유별나도 세월 지나면 ‘죽었나, 살았나.’ 남들은 다 잊어버립니다. 왜소한 우리, 주께서 우리를 왜소하게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친히 자신의 몸을 바쳤다는 그것과 결부되어 있는 그 왜소함, 그 정도 왜소함 같으면 우리는 우리 자랑할 필요 없이 이제는 주님만 자랑해도 되잖아요. 이정도 되었으면 이제 주님만 자랑해도 되고 주님만 영광스러운 인생이 천국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실 우리가 무덤 속에 있었고 죄에 갇혔는데 죄에 갇힌 것도 모르고 주님이 별나다고 여겼습니다. 같이 살지 않고 왜 죽었는지, 같이 살지 않고 왜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났는지, 미궁 속에 빠져있던 우리의 실체가 우리 속에서 벗어난 예수님의 안목에 의해서 확연하게 그 정체가 폭로되어서 우리는 그냥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껍데기가 주님의 사랑의 재료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고백을 즐겁고 기쁘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