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에스겔2장 1-7(하나님의 신)120829-이 근호목사
4강-에스겔2장 1-7(하나님의 신)120829-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83.105.195.249)
4강-에스겔2장 1-7(하나님의 신)12082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1-7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을 알찌니라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찌라도 그들을 두려워말고 그 말을 두려워말찌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말찌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찌어다.”
하나님의 신이 인자라고 불리는 선지자에게 먼저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이 인간들이 어떤 존재라 하는 것을 익히 아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어느 정도 패역한지 아는데 인간은 평소에 늘 대하는 이웃이랄지 인간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나타느냐 하면 자기한테 잘해주고 칭찬해 주면 행복을 느끼고 자기를 비난하면 원수로 여기고, 그런 것이 바로 사람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뜻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기대하고 원하는 대로 주변이 호응해주게 되면 세상은 아주 살기 좋은 세상이고 자기 뜻대로 안되면 한강에 몸을 던져서 자살하기도 하고, 그렇지요.
자살하나 아니면 이 땅에 90년 100년 버티고 사나 근본적인 것은 내가 누구냐, 하나님 보시기에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대통령 되고 국회의원 되는 것이 아니고 자녀의 학교성적이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어떤 안목으로 보느냐, 그것만 체크하면 그것은 오늘밤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죽으면, 요한복음 5장의 말씀처럼 인자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죽으나 예수 안 믿고 죽으나 결국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그때를 생각하게 되면 미리 인자의 음성을 당겨서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자의 음성이 선지자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 말씀대로 강퍅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하나님 상대하는 것을 마치 사람 상대하듯 하찮게 여기게 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가 듣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좋은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 들을 용의가 되어 있는데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마음으로 호응할 수 없고 기대하던 것이 아니라면 그 하나님을 가짜 하나님, 또는 이단으로 분류시켜서 배척하는 경향을 인간들이 보인다는 겁니다.
성령을 안 받았을 경우입니다. 자 그러면 성령을 받은 경우, 성신을 받은 경우를 봅시다. 성신을 받은 경우에 지금 에스겔이 우리 앞에 모델로 등장합니다. 성신 받을때는 이런 식으로 받는다, 라고 하는 겁니다. 본문 보면서도 제가 또 따로 설명을 해줘야 돼요. 목사님, 성신 받은 사람은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그러면 제가 이 본문 가지고 설명을 해 드립니다. 이렇게 설명이 가능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성신 가지고 들이대 버리면 성신 받는 쪽에서 ‘이것은 안하겠습니다, 이것은 하겠습니다.’라고 거부권을 행사할 자격이 아예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생이라는 것, 나라는 인생의 운명 같은 것은 가진 것 강도한테 다 털리듯이 성신이 임하게 되면 이미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것이 주님한테 탈탈 매일같이 털려버리는 겁니다. 아침에 눈 뜨면 계획했던 것이 성령이 임하면 그 날 계획이 강도한테 도둑맞듯이 강도한테 다 털려버리는 겁니다. 유명 가구점에 가서 유명가구 들여놓고 냉장고 들여놓고 다 했는데 그날 오후에 네 시에 강도가 들어와서 묶어놓고 살림살이 다 가져갔을 때 텅텅 비어서 허하잖아요. 다 가져가버렸으니. 약이 올라서 다음날 또 가구점에 가서 가구 새로 들여놓고 살림살이 들여 놓으니 또 오후 세시에 강도 들어와서 다 털리니 아파트 전체가 텅텅 비어있고.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내가 20년 전에 어떻게 한 것이고 30년 전에 어떻게 한 것이고, 내 것, 내 것이라는 이 자체가 따로 내 것을 챙겨버리면 우리는 내 것이라는 것을 먼저 사수하는 버릇이 있어서 성령이 오더라도 성령하게 흥정할 생각을 하게 돼요. 하나님 말씀을 듣더라도 흥정할 생각을 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 그 말씀대로 이것은 내가 양보하는데 이것은 제 명예가 달린 문제니까 손대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쓰시고 이것은 내가 간직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상대로 꼭 사람 상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하게 되는 겁니다.
시장 통에서 사람 상대하는 것, 그것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천지를 만드시고 북한의 김정은도 지금도 먹여 살리시고 이 세상 이단 아니라 삼단들도 먹여 살리시고 불교신자와 중들,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 바다의 고래를 비롯해서 성폭행 범들까지 먹여 살리시는 그 하나님을 상대한다는 것, 우리의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을 세시는 그 하나님을 상대할 때 우리는 욥이 나타냈던 그 태도 이상으로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서 재를 뒤집어쓰고 아무 소리 못합니다. 또는 이사야가 이사야서 6장에서 본 것처럼 그저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1장의 말씀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것은 강도한테 다 털린 거예요.
주님께서 이야기했잖아요. 하늘나라가 오는 것이 도적같이 온다고. 도둑놈이 들어와서 나를 묶어놓고 다 털어가듯이, 내 것이라고 여겼던, 내가 애지중지했던 것을 다 털어가듯이 날마다 강탈당하는 식. 그래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 그가 정리한 인생은 이렇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나라는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친히 제작하시는 것이지 내가 나를 제작하고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거기에 관여할 것이 아니다, 그런 태도입니다.
문제는 에스겔이 갖고 있던 태도에 대해서 과연, 에스겔의 말을 듣는 사람이 에스겔과 동일한 마음자세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에스겔이 장담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 요한복음 6장 3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유명한 말씀, 잘 아시는 말씀이지요? “내게 주신 자 중에” 그 다음에 잘 들어 보세요.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했다, 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이 인간을 배제하고 예수님 혼자 일해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하고 동업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얻어야 될 자를 잃어버리고 천국에 오지 말아야 될 자를 천국에 보내는 일이 생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시 말해서 누가 구원받느냐, 누가 구원 받아서는 안 되느냐, 하는 그것에 대해서 이미 예수님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알고 계시고 우리는 모르는 상태입니다.
모르는 상태의 우리한테 일을 맡기지는 않아요. 어떻게 하느냐, ‘너는 일을 못해’하고 자꾸 밀치고 배제하는 식으로 하나님은 일을 하시지요. 제가 이렇게 하면 아예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안하겠다고 나자빠지면 어떻게 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들어 쓰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 나름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늘 발췌해 냅니다. 늘 하나님의 일이라고 발췌해 놓고 ……, 첫 번째, ‘하나님, 이렇게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우리가 서슴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방치하세요. 그러면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거든요.
열심히 하게 되면 그 다음 작전이 뭐냐, 그 열심인 그것이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를 건지는 일이 아니고, 또 하나님이 건진 자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을 자를 잃게 하는 일에 해당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면서 사용하셔요. 우리는 ‘제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해서 하나님을 돕겠습니다.’라고 해 놓고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해놓은 사람을 잃게 하고 하나님이 정해놓지도 않은 사람을 구원시키는 그런 일에 우리가 매진했다는 것을 들통 나게 하는 식으로 일이 가도록 주께서는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하게 깨닫게 만들지요.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습니다, 라고 깨닫는 그것, 바로 그것을 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들어 쓰시는 거예요. 세 번째,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모든 영광은 몽땅 예수님 홀로 가져가야 된다는 사실이 가장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를 하시면서 의도적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제일 나중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비유를 이야기했어요.
아침 열시에 온 사람, 열두시에 온 사람, 세시에 온 사람, 퇴근 한 시간 앞두고 다섯 시에 온 사람. 자, 이 넷 중에서 누가 하늘나라 보여주는데 제일 많이 기여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우리에게 먼저 수능 치르듯이 문제를 던지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백이면 백 전부 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 쪽이 하나님의 나라를 많이 드러냈습니다, 라는 쪽으로 정리할 것을 주께서는 뻔히 아십니다. 자, 오늘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어떻다, 하는 것을 익이 아십니다.
그래서 끝에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리고 중간에 “패역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완악하고 패역한 백성이니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하라,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이거든요. 하나님의 신이 우리를 안다고요. 알면 우리를 지옥에 보내야 될 텐데 뻔히 우리가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를 향하여 천국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거예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포도원농부를 모집했는데 아침 10시에도 오고 또 12시에도 왔다.’ 우리가 엉터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한다면 아예 우리하고 상종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우리는 나서봐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도리어 우리보고 천국 이야기를 하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지요.
이것이 하나님나라 모습가운데 제일 큰 모순이고 비밀이잖아요. 이 비밀이 풀리면 하늘나라 다 풀리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많이 일한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를 많이 증거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니다. 제일 나중에 온 사람이 가장 하나님 나라에 합치되는 사람이다. 진짜 이 땅에 나타내고자 하는 하늘나라에 합치되는 사람은 제일 나중에 온 사람이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몰라요. 그 모르는 자를 상대로 해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에게 살림 받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애쓰는 모든 짓은 결국 뭐냐,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에 방해되는 짓거리에 불과한 거예요. 주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그 방식과 방향과 우리가 낌새를 알아채고 우리 쪽에서 이렇게 하면 구원될 거라고 하는 그 방식이 일치되지 않고 빗나가 버린다는 거예요. 그 어긋난다는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는 말을 한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다.’라고 한 겁니다.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고 여러 말씀을 전해봤자 사람들이 제일 마지막 걸림돌처럼 철커덕 하고 문 닫아 버리고 자기 세계 속으로 문 걸고 문 뒤로 숨어버리는 가장 큰 대목은 바로, ‘우리가 뭘 해도 우리 구원에 전혀 무관합니다.’ 하는 그 말입니다.
헌금, 기도, 전도, 예배참석, 교회세우기, 강의, 설교, 철야기도, 금식, 중보기도, 방언, 기적, 뭘 해도, ‘주여, 우리가 귀신을 쫒아내고 기적 베풀었습니다.’라는 그 무엇을 해도 그것이 우리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 이것은 바로 주께서 인자 되도록 에스겔을 새로 제작하고 새로 만든다는 그 취지를 모르게 되면 우리는 에스겔의 말을 이해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에스겔에 나타난 근본 취지가 뭐냐, 그것을 봐야 되겠지요. 에스겔 이전에 뭐가 있느냐, 출애굽이 있습니다. 강퍅하고 패역한 백성에게도 주께서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뭐냐, 제가 아까 포도원비유도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전에 구약 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9장 34, 35절에 보면 “바로가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 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니 그와 그 신하가 일반이라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바로는 자기의사가 있고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이에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볼 때 극히 정상적인 인간입니다. 자기 국가의 백성들의 안녕과 행복을 책임져야 될 통치자지요. 그 사람이 미쳤거나 정신이상자가 아닙니다. 이 사람의 모든 행동과 태도는 인간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느냐, 아니면 나에게 손해되느냐를 따져서 이익이 많은 쪽으로 말과 행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거짓말이든 장담이든 과장된 말이든 관계없이 현 시점에서 내가 손해되는 것은 피하고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그쪽으로 행동과 말을 옮기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출애굽기 바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바로는 정상적인 사람이고 거기에 비해서 비정상적인 사람이 누구냐, 모세가 비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에스겔은 비정상적인 사람이에요. 그리고 에스겔의 말을 들어야 될 백성들은 극히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뭐냐,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한테 이익이 되면 뭐라도 하고 자기한테 손해되면 피신해 버리는 모습, 그게 바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에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도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상적인 니고데모를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누가 어떤 질문을 했기에 니고데모 입에서 ‘내가 엄마 뱃속에 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는, 누가 들으면, ‘저 정상적인 국회의원이 저런 반응을 하지? 저 사람이 미친 것이 아니야? 정신이 돈 거 아닌가?’ 할 정도로 괴상한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앞에 있는 예수님의 질문을 안 들었다고 칩시다. 지나가는 과객이 니고데모의 답변만 들었다고 칩시다. ‘당신 멀쩡해요? 당신 정신 이상자 아니야? 당신이 방금 누구 보고 이야기했는데?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난다? 그런 하나마나 한 소리를 왜,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내뱉는가?’ 그 말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도 비정상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신입니다, 성령입니다. 주님 앞에 서면 우리는 갑자기 정상적인 사람에서 비정상적인 사람이 돼 버려요. 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런 소리를 왜 하지?’ 의아해 할 정도가 돼 버립니다.
출애굽기 7장, 8장, 9장, 10장, 11장까지 계속해서 바로는 강퍅합니다. 그 당시에 공장이라 하는 것은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이 아니고 사람의 신체가 오늘날 기계를 대신해서 생산물을 양산하는 산업체제입니다. 그것이 노예라는 거예요.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야 생산물이 나오지요. 그 당시 기계는 노예입니다. 노예가 일을 해야 나라경제가 돌아갑니다. 돈 벌어 준적도 없는 모세가 갑자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뭐냐, ‘너의 나라 공장 기계 다 가져가겠다.’ 그 말 아닙니까? 통치자가 있는데, 공장 사장이 있는데 지나가는 거지같은 것이 와서 ‘당신 공장 기계 내가 다 가져가겠습니다.’ 할 때 ‘가져가세요.’ 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되지요.
그런데 갑자기 그 거지가 총을 들고 와서 그 기계 안내놓으면 죽인다, 하면 그 사장이 뭐라고 합니까? 총을 보고 ‘네 시간만 여유를 주세요. 총을 왜 들고 그럽니까? 우리가 다 말로 해도 알아듣는데. 네 시간 뒤에 정리 다 해서 보내겠습니다. 네 시간 뒤에 트럭 몰고 오면 다 실어 드리겠습니다. 총은 그만 거두세요.’ 했는데 네 시간 뒤에 도둑이 온 것을 보니 총을 안 들고 왔거든요. 총 안 들고 오니까 대뜸 사장이 하는 말이 ‘미쳤나? 미쳤어! 내가 너에게 공장 기계를 내주게.’ 그런데 그 강도가 하는 말이 ‘네가 맘이 완악하고 강퍅했다. 그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라고 하는 것이 출애굽기 7장, 8장, 9장, 10장의 이야기입니다.
누가 정상입니까? 멘붕, 멘탈 붕괴되었어요. 요새 교회들 교인들이 다 정상이에요. 그런데 교회에다 복음을 외쳐버리면, 만약 교회에 복음을 외치는 자가 있으면 교회내부에서 그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요새 하나님 믿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목사도 안 믿어요. ‘우리 교회 목사도 하나님 안 믿어. 돈 있는 유력한 장로, 사람을 믿지, 하나님 안 믿어.’ 이렇게 핀잔 받는 시대라니까요. 유력한 사람과 좋은 관계 맺을 때 나에게 이득이 된다, 다시 말해서 교회라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나한테 이득이 된다 싶으면 오고 손해된다 싶으면 안 오는 정상적인 사람들의 집합이 교회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에스겔에서는 뭐라 하느냐, ‘너희가 패역한 족속’이라고 하니까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거예요? 에스겔이 비정상이에요. 오늘날 뺀질이들이 정상이고.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그 다음에 대포 들고 왔거든요. 대포를 앞장세워 오니까 대포가 겁나기는 한 모양이죠. ‘그래, 그래. 오늘 중으로 기계 다 실어준다.’ 했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에 대포 없이 또 빈손으로 가니까 ‘미쳤나, 내가 기계 내 주게?’ 그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의 기간산업에서 모든 노동력을 밑바닥에서 다 책임지던 기계였습니다. 여호와가 누군데요? 여호와가 뭔데? 그 신이 뭔데 덜렁 그것을 내 줍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로마서 9장에서는 출애굽에 나오는 이 바로의 마음이 바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전 인류에게 공통적인 마음씨라고 보는 겁니다. 로마서 9장 16절, 17절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운 것은 주의 이름을 바로를 통해서 전파되게 함이지요. 바로는 죽었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 사람을 붙들고 주의 이름을 전파되게 할 것이고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그 다음 사람을 붙들고 전파되게 할 것이지요.
그러면 오늘날은 누굴 붙들고 전파되게 하느냐, 18절에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주께서 강퍅케 하시는 것은 주의 긍휼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오늘 에스겔 2장에서 주께서 패역한 족속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이 그것을 익이 알고 계시면서도 에스겔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패역 되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너희들이, 그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서 교만한 것이고 완악한 것이고 패역한 것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11장 31절에 보면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가두어 두었다, 가두리 어장 알지요?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패역케 했다는 이 단어, 이것은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난 광주강의에서 이런 예를 들었는데요. 다시 한 번 같은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대구에서 광주 가는 길인데 태풍 올라오기 전에 비가 많이 올 때입니다. 지리산 휴게소 근처에서 비가 억수로 쏟아져요.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근처에서 비가 억수로 왔어요. 비는 억수같이 오는데 버스 안에 TV를 틀어놓았는데 그 안에서는 SBS 골프대회 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거기는 날씨가 아주 맑은 거예요.
버스 밖은 빗줄기가 완전히 뒤덮었습니다. 그런데 TV안 날씨는 말짱해요. 골프대회 장면을 자세히 보니까 영어로 ‘HOLL IN ONE’이라고 해놓고 그 앞에 차가 한 대 있어요. ‘한 번에 구멍으로 들어가면 차 준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완악하고 패역한 족속,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 가두리 양식장처럼 가두어두심은 온통 비가 쏟아지는 거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그 안에 TV를 틀어놓고 긍휼이라는, 인자라고 호칭하는 에스겔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골프에 관심 있는 사람은 저하고 몇 명 없었어요. 다 자기 바쁘지 저 혼자 골프 보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그 현장에서 그 TV안 골프 치는 쨍쨍한 그 현장에 관심 두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아요. 이게 뭐냐, 듣든지 아니 듣든지 TV는 방영된다는 말이지요. 보든지 아니 보든지. 에스겔도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입니다. 자기한테 이익이 될 경우에만 힘들게 살고 손해되면 안하거든요. 에스겔에게 성신으로 주어진 것은 ‘네가 힘 드는가, 안 힘 드는가, 그것은 네가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 나는 내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리는 그 작업을 너의 성격이나 성질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네가 내 일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을 도리어 사용함으로써 구원은 직접 여러분들을 은혜 줘서 구원합니다.’ 모든 긍휼과 그 반대로 모든 저주가 오직 인자되시는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앞당겨서 우리에게 에스겔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이 시간을 끝내면서 다시 한 번 당부합니다. 바로를 통해서 주의 이름을 등장시켰던 주님, 그 바로는 바로 완악하고 패역한 사람이고 완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바로가 모세를 만났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를 만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바로입니다. 패역하고 완강합니다. 뭐 좀 했다 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복 받는데 도움 될까 싶어서, 헌금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자신의 이익이 아니면 헌금 하지도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런 인간을 도리어 주께서 쓰셔서 내가 뭘 해도 주님의 일을 방해만 했다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고 완악한 사람이고 화로다, 망해야 될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들추어내면서 주의 이름만을 증거 하게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잘난 체 하지만 그것이 주의 일에 전혀 보탬이 안 되고 도리어 훼방자로서 주 앞에 붙잡힌 바 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은 다 허사고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는 것만이 택한 백성 건지는 수단이 되고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제작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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