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베드로후서2:9(삯꾼 목자)120810b-이 근호 목사
안양-베드로후서2:9(삯꾼 목자)120810b-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35)
안양-베드로후서2:9(삯꾼 목자)120810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첫 째 시간에 땅하고 인간하고 안 맞는다 했지요. 안 맞지만 사람들은 지 나름대로 살다보니까 누가 괴로운가 하면 땅이 괴로운 거예요. 그게 가인 같은 경우에 땅이 못 견디는 겁니다. 의인의 피가 흐려지니까 땅이 못 견디면 누구한테 호소하겠어요? 하나님한테 호소하지요. 그 대목이 창세기4장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4장11절에 보면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땅이 못 견뎌서 하소연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에 뭐가 따르느냐 하면, 심판과 복수가 따르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심판은 처음부터 있었습니까?’ 심판이 처음부터 있었어요. 다만 국소적이지요. 미시적이고. 대규모 심판은 노아 홍수 때 일차 있었지만, 나중에는 장차 주님 오실 때 오겠지만, 그 전에 이미 심판이 군데, 군데 있었던 거예요. 심판들이 있는데 심판들을 할 때 심판이 심판으로 있으려면 반드시 심판받을 짓들을 해줘야 되거든요.
그러면 무엇을 양성화 시켜야 하느냐 하면 불법과 무법이 땅위에서 양성화 돼야 됩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그렇게 양성화될 때 어떤 류의 인간들이 이 지상을 지배하고 설쳐 다니고 있는가가 낱낱이 우리 눈에 띄어야 돼요.
어떤 사람이 ‘목사님, 나는 성도입니다.’ 한다면 그러면 묻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도 아닙니까?’ 물어야 돼요. ‘나는 예수님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그거 말고 ‘어떤 사람이 성도 아닙니까?’ 저는 새로운 목사를 만나게 되면 묻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이단에 대해서 어떤 정의를 내리고 계십니까?’ 묻고 싶어요. 왜냐 하면 어떤 교회 담임하는 목사가 이단에 대해서 정의를 갖고 있으면 그 기준에 맞추어서 사람들을 내 사람과 저 사람과 구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단의 기준이 없으면 ‘아무나 온나, 아무나 온나’ 이리 된다고요.
우리 십자가마을에 논쟁이 있을 때 여러 번 물었어요. ‘무엇이 이단입니까?’ 물은 거예요. 답변을 안 해요. 왜 답변을 안 할까요? 왜 답변을 안 하느냐 하면, 십자가 마을이 공격받는 이유가 너무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만 옳다하고, 자기만 복음 안다고 주장하고, 그러니까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것을 공격했다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묻는 게 뭐냐, 그러면 ‘그렇게 물으시는 분은 어떤 것이 이단입니까?’ 물으면 답변을 안 하는 거예요. 그 답변을 하는 순간 본인도 폐쇄적이고 본인도 고집부리는 거예요.
여기에 고집이야기 나왔지요. 베드로후서 2장 10절에 나오지요. 그 뒤 이야기가 12절에 보면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이것은 어떤 특정 개인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한 사람의 총집합을 언급해 놓은 거지요. 총 집합을.
한 사람을 가지고 이단이라 할 건데 이건 어떤 특정사람을 가지고 이단이라 하지 않고 이런 류가 한데 같이 모이게 되는데 요런 사람이 한데 모이도록 홀치는 다른 동기가 있는 거예요. 성경 자체가 어렵게 되어있는데, 여기가 세상인데 땅은 사람과 안 맞지요. 안 맞으니까 이 땅은 심판을 호소하게 되니까 심판이 와야 되고 심판은 기정사실인데, 이 땅에서 심판받을 이유들이 있어야 심판이 정당화되니까 그 이유들이 나타납니다. 마치 난타할 때 북을 치면 북위에 물이 튀듯이 탁! 탁! 튀게 하는 그게 불법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하는 기반은 한결 같아요. 그게 바로 복음이고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이 사람들은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을.
자기가 복음을 거부하고 있다는 본색이 들통 났으니까 그냥 발작을 일으키고 저항을 강렬히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짐승 같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특정 사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이스라엘을 항공모함을 몰고 가게 되면 거기에 따라서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이 계속해서 발생되게 되어 있어요. 끊임없이.
한 가지 예를 들면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있을 때 바로 왕이 성경대로라면 완전히 미친 사람이에요. 지금 백성들이 죽을 판이에요.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그냥 히브리인들 보내줍시다. 보통일이 아닙니다. 지금’ 해도 바로 왕은 안 보내줘요. 왜? 마음씨가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강팍케 해요. 의도적으로 왜? 어떤 역할을 해야 되거든요. 이성 없는 짐승역할을 해줘야 돼요. 누군가는 해 줘야 된다 말이지요. 그것이 식구일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심지어 부부간에 있을 수도 있고. 같은 목사들 속에 교인일 수도 있고. 하여튼 아까 처음에 한 복음 때문에 고통 받아야 됩니다. 이건 할 수 없어요. ‘복음 아는데 왜 고통주십니까?’ 해서 너무 대들지 마시고요. 아~ 복음 때문에 받는 고통이라면 ‘주께서 하나같이 다루고 있구나!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듯이 이젠 나를 하나님처럼 다루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아요. 구원 받은 롯도 고통 끝나고 지금 편히 놀고 있잖아요. 좋잖아요. 제대해서요. 제대하려면 고통이 있어야 돼요. 아무나 제대 안 시켜 주거든요.
9절 봅시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여기서 ‘까지’ 또 나왔지요. 심판 날만 지키고 그 다음은 안 지킵니까? 그게 아니고 까지라는 말은 목적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기어이 심판하고 말리라, 그런 뜻입니다. 이신바예바가 5m를 못 넘었는데 5m를 넘었거든요. 기어이 5m넘을 때까지 하면 그 다음에는 5m 안 넘습니까? 넘잖아요. 기어이 심판 때 까지라는 말은 역할과 사명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정도 이상으로 계속 주님의 일은 포기되지 않는다. 줄기차게 밀어붙인다. 기어이 심판받게 한다. 심판받으려면 심판 받는 자가 발생되어야 돼요.
발생되는 요건은 뭐냐, 우리가 복음을 품고 살면 우리가 항공모함 되어서 우리 주변에 심판받을 사람들이 발생되게 돼 있습니다. 친구라고 해서 봐줄 수 없어요.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일을 우리가 변경시킬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에게는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행복한 거죠. 사람들은 내일 되면 또 다른 소리 할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내일되면 다른 사람이 못할 처지에 있다 말이지요. 오늘도 십자가 피! 내일도 십자가 피! 20년 후에도 십자가 피로 구원 받고 죽을 때도 십자가 피만이 용서 받는다. 똑같은 소리해야 될 팔자니까 얼마나 안정되어 있습니까? 이 정도만 안정되어도 얼마나 자식들에게 훌륭한 엄마고, 훌륭한 아빠입니다.
하도 엄마부터 흔들리니까 자식들도 갈피를 못 잡아서 혼돈되지만, 엄마가 딱! 서서 든든하게 ‘이건 돼! 이건 안 돼!’ 분명히 해 주시면 자식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러면 자식은 지 본색을 드러내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길렀던 공들였던 애가 없으면 죽고 싶었던 애가 복음을 거부할 때는 기가 막히지요.
12절 봅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이리 되어 있잖아요. 한 번 적어 볼게요. 이 사람들은 ( )해 놓고 하늘나라 수능시험 있습니다. 괄호 속에 들어갈 말을 다음 중 고르시오, 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어떻냐 하면,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지옥가기 위해서 이렇게 설쳐야 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본디 이 짓을 해야 할 사람들이에요. 반드시 해야 돼요. 너무 말리지 맙시다. 우리가. 말린다고 말 들을 사람이 아니고. 본디 지 본성대로 갈 뿐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섞여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섞이니까 좋은 친구인데 복음만 외치니까 본디 자기의 본성을 더 이상 감출길이 없지요.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훼방한다, 훼방이라 하면 쉬운 말이 있어요. 비난한다. 아무소리 안하는 것 하고, 비난하는 것 하고 다릅니다. 아무소리 안 할 때는 저 소리가 뭐나 하고 모를 때고 비난한다는 말은 충분히 알고 본격적으로 하면 팔 걷어붙이고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거예요. 그게 훼방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음녀가 이 짓해요.
음녀 나오는 거 미리 볼까요. 14절에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요거 현대말로 고치면 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 대도시’를 말합니다. 강남 스타일로 보시면 돼요. 왜냐 하면 요한계시록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음녀가 특정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집단이 하나라고 통일될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정신이 먹구름처럼 고루고루 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똑같은지, 똑같이 덮어버려요. ‘어이! 3차 갈까? 가자!’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지 몰라요. 1차 가고, 2차 가고, 4차 가보셨습니까? 5차 옛날에. 땅이 저주할 때, 복음 모를 때, 복음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지. 아시잖아요? 복음 모를 때 있었잖아요.
이 사람들은 개인으로 하는 게 아니고 결국 생각이 같은 본성이 통일되게 되어 있다 말이지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다루시는 성도 주변에 바짝 올라오면서 성도는 노아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뚝딱! 뚝딱! 강날스타일이든지, 강북스타일이든지 관계없이 노아방주 만들지요. ‘왜 만드십니까?’ 물어보지도 않을뿐더러 물어봐도 설명해도 못 알아들어요. ‘예수의 피를 마시며......’ ‘에이~ 가자, 가자, 강남 가자.’ 어제 지하철에서 술꾼들 봤지요. 어떻게 모르는 사람들끼리 생각이 똑같은지. 술만 먹으면 전부다 대동단결돼요. 이성 없는 짐승 같아요. 그런 것을 우리한테 목격하게 하시기 위해서 아직도 이 세상을 살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들을 이해해 봅시다. 왜 술을 먹었으며 기분 좋아서 먹는 경우는 없어요. 대부분 기분 나빠서 먹어요.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술을 먹거든요. 니가 뭔데? 맞지도 않는 땅에 살면서 땅이 니 맘대로 안 된다고 해서 화를 내는 너는 뭐냐 말이지요. 너는 어디서 기어 나왔느냐 말이지요.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있다가도 언제 있었나? 할 정도로 흙에 같이 합류되었으니까 훅~ 불면 없어지는데. 선덕여왕? 예쁜지, 안 예쁜지 모르겠어요. 선덕여왕 없어요. 세종대왕 없어요. 괜히 우리 기억 속에, 연상 속에, 추억 속에 있지, 지금은 없다 말이지요. 우리도 장차 없어져요. 흙에서 와서 흙으로 살아서 흙속에서 이름도 없이 성도 없이 그냥 가버릴 존재인데 옷 한 벌 건졌으면 수지맞은 장사잖아요. 으하하하 웃으면서 그저 빈손으로 와서 빈 몸으로 돌아가는 게 디모데전서에 나오잖아요. 거저 왔으니 거저 먹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뭐가 그리 화나는데? 키가 작은 사람은 오락이 아닙니다. 키 크려고 할 때 오락이 생기는 거예요. 없는 건 오락이 아닌데 만들면 그 때는 오락이에요.
14절 봅시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음심이란 말을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려운 게 아니고 눈을 다른데 돌리는 게 음심이에요. 원래 음란하다는 것은 뭐냐, 가정을 가진 배우자가 다른데 눈 돌릴 때 다른 배우자로 눈 돌릴 때 음란하다고 하거든요. 음란은 전체 개념을 확장시킨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언약, 뚝딱 뚝딱 노아가 방주 만드는 그 소리를 안 듣고 다른데 눈을 돌리면 그 전체가 음란이 되는 겁니다. 살인이고 음란이고 똑같은 죄에요. 하나님께서 홍수 줄 때 ‘가만있자, 이 마을은 음란이니까 더 받을까’ 이런 거 없어요. 음란죄 있는 마을보다 살인죄가 더 좋고 이런 게 없어요. 살인하나 음란하나 속으로 죄 지으나 전부 다 똑같이 불 심판 다 받습니다. 이거는 죄의 경중이 없어요. 왜, 이것자체가 죄인데 무슨 경중이 있어요. 방향을 다른데 튼다는 말은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이쪽이 십자가 안 보이는 방향 같으면 똑같이 마찬가지예요. 방향이 저 쪽 같으면 이쪽이 뭘 해도 안 보이게 돼요. 방향 이 쪽하고 뜨개질 해봐도 죄에요.
그러면 언제 방향을 돌립니까? 주께서 돌리시면, 주께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셔서 방향을 방주 만드는 소리에 십자가 흘린 피 소리, 신음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내 피를 마셔라는 그렇게 하십니다. 무지개만 펴도 마음에 감동되도록 하는 사람 있고 무지개 뜨면 옛날에 무지개 뜨는 언덕해서 그게 자꾸 생각이 나요. 얼마나 재미있던지 막 울면서 봐요.
15절 봅시다.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이거 어려워요. 현재 지금 저주 받는 모델이 나왔지요. 발람만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사실은 다 그런데 그 모델로 한 게 뭡니까? 발람이지요. 발람이 저주받은 자식이라 하는 것은 누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항공모함, 누가 등장합니까? 이스라엘입니다.
택한 백성 만들어 놓고 주변을 가지고 저주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택한 백성 된 것을 자부심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 때문에 자부심을 가져야 돼요. 이건 내 구원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세상 까발리라고 복음 준 겁니다. 주님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셨어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로 니에게서 일어나는 니 행동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냥 십자가 피 자체가 너를 구원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예요. 논리도 안 맞아요. 건너뛸 수 있는 논리가 없다니까요.
‘십자가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아니거든.’ ‘그러면 내가 예수님 사랑하면.’ ‘아니거든.’ ‘그러면 어떻게요?’ 아니, 처음부터 안 된다니까요. 안 된다 해도 고집이 세서 자꾸 뭘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어떻게, 어떻게, 자꾸 어떻게 찾아요. 어떻게 해도 소용없어요. 주께서 어떻게 찾기 전에 이미 다 했어요. 한 예가 뭐냐 하면 문 닫았을 때 들어오셨잖아요. 도마 없었고 나중에 도마 들어왔습니다. 도마한테 뭘 보여줬습니까? ‘어이, 도마야, 칼 있지? 창 있지? 찔러라.’ 안 했어요. 이미 찔렸어요. 도마 대신 로마 군인이 이미 찔러줬어요. 이미 옆구리에다가. 안양 사는 우리가 찔르기 전에 이미 그 당시 로마 군인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요. 피가 팍팍 쏟아졌습니다. 우리가 쇠사슬에 올라가려하니 키도 작고 못 올라가요. 이미 올려놨어요. 면류관 쓰시고 피나고 손에 못을 다 박아놨어요. 고맙게도 로마 군인들이. 그게 우리를 구원합니다.
내가 못 박는다고 망치질한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고 도마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도망치기 바빴지요. 그냥 보여줬다니까요. ‘그냥 만져 봐라.’ 누가 했어요? ‘제가 안 찔렀는데요.’ 이렇게 했습니까? ‘제가 안 박았는데요.’ 이렇게 했습니까? 도마가 기겁을 해버렸습니다. ‘주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오십니까?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왜 더러운 인간 속에 오십니까? 재래시장에 마트에 안 가시고. 에어컨 있는데 안 가시고 왜 재래시장에 오셔서 질퍽질퍽한 아스팔트에 왜 오셨습니까? 인간 속에 왜 끼어들었습니까? ‘니 하나 건지러왔다’ 이말 이거든요.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이 없어요. 다 이루었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십일조하면 복 받습니까? 만날 이런 식으로 사기치고 있다 말이지요. 교회에서. 선교회비하면 달란트 복 받습니다. 이런 소리 하고. 마지못해 선교회비 한다는 게 천원내고. 주고 싶지도 않고 안주려하니 찝찝하니 거지 동냥하듯이 천원 줘버리고. 그러면 그 선교사는 일 년 놀러 와서 슬라이드 해서 찍어놓고 돈 달라 하고.
발람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민수기 읽어보세요. 발람 훌륭합니다. 읽어 보셨지요? 발람이 처음부터 돈 돈 돈 이리 했습니까? 발람이 뭐라 했습니까? ‘니가 모압 당신 왕이 나한테 돈을 준다 할지라도 나는 여호와께서 시키는 대로 하지 니가 왕이라고 누굴 거지로 아나? 오해하지 마! 나, 거지 아니야! 싸가지가 없어. 아무리 이리 보여도 나는 선지자야! 선지자를 왜 돈으로 매수해! 내가 돈에 팔린 선지자야?’ 라고 한 사람이 누구 였었었습니까? 발람이었습니다.
아까 뭐라 했던가요? 본디 이성 없는 인간은 그 길로 가줘야 돼요. 본인이 원하고 안 원하고 관계없이 본디 삯꾼 돼 줘야 됩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지어낸 말인데요.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요. 국을 끓여놨는데 고기국에 하다못해 약간의 신문지조각이 있다. 국자로 그 부분을 덜어내지요. 드러내요. 또 군에 가면 강제로 하는 게임이 있어요. 구덩이에 10명씩 들어가서 상대방의 숫자를 바깥으로 다 드러내는 쪽이 이기는 거예요. 돼지잡고 파티 하는 게 있어요. 그 때 바짝 들어서, 바깥에 안 나가려고 발버둥 쳐요. 그러면 딱 들어서 떼어 놓고 소장님, 우리 이겼습니다. 하는 거예요. 고거 들어 내줘야 돼요. 니는 여기에 천국에 오면 안 돼! 바짝 들어내 주는 그것은 복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복음이면 분류가 돼요. 왜 그래야 하느냐면, 우리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게 우리가 원해서 받은 게 아니고 우리가 연구해서 신학공부 많이 해서 신학박사 돼서 안 게 아니고 이것은 얼또당또 않은 복음을 알아들었으니까 얼또당또 않게 알아버린 사람만 결국은 그리스도만 찬양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죄인 되고. 우리는 아무것도 의로운 게 없고, 우리 성령 받은 사람은 안 어렵지요. 내일되면 몰라, 그건 내일 문제이고 걱정할 필요 없고. 전혀 어렵지 않아요. 실제로 복음 안다는 사람들도 제가 물으면 쉽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집안에 돈 문제 얽히고 특히 교회에서 개인 감정문제, 집사가 과격하게 말실수할 수 있거든요. 아침에 부부싸움해서 교회 와서 화풀이하다 보니까 영원히 삐지는 거 있잖아요. 점심식사 하는데 ‘이 밥, 누가 했노? 이리 해서 사람들 밥 먹으라고 내놨나?’ 철없는 할머니소리 해서 그거에 삐져서 교회 안 나오고 이런 것이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 말하기 전까지는 복음만 있으면 우리는 됩니다. 죄인입니다. 다들 그렇게들 했었어요. 다들 했는데, 뭡니까? 바짝 들어서 들어내 버렸어요. 바짝.
이렇습니다. 발람이 지속적으로 삯을 받고 이건 나와 있으니까 알지만, 발람이 모압한테 이런 압력을 받은 거예요. ‘이스라엘을 잡아 죽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들이 스스로 타락하면 됩니다.’ ‘스스로 타락하기 위해서 그들은 뭘 좋아하는데?’ ‘여자를 좋아합니다.’ 여자가 보여주는 거룩한 파티가 종교적인 파티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방종교에는 그 시대에 스트레스 푸는 게 요새 같은 부흥회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남편하고 싸워서 스트레스 받는 거 새로운 만남으로 잠시나마 행복한 생활을 보냈는가 봐요. 이게 있어 가지고 인기 있었던 모양이라.
종교라는 것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 종교지, 울기만 해서는 안 되고 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뭔가 짭짤한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짭짤한 인위적으로 만들어 주는 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한 번 경험하고 난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숨어있는 본성을 주체할 수 없었던 모양이라, 그걸 그렇게 미끼를 던지도록 주동한 자가 누구다? 발람이 그렇게 했다 말입니다.
여기 바알 브올 신에게 부속해서 죽은 사람이 이만사천명이에요. 숫자 1명도 아쉬운 이때에 이만사천명이 군대라고 보면 돼요. 이만사천명이 전사했어요. 누구한테? 하나님한테 맞아서 전사했어요. 바알 브올에게 먹고 마시고 신에게 절함으로서 바알 브올이 뭐냐 하면 민수기25장 4절에 보세요.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아마도 바알 성산이 태양을 섬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태양을 섬길까요?
과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서는 아무리 봐도 이 세상은 신이 만들었는데, 신이 만들었으면 신의 Code, 암호 같은 것, 법칙 같은 것, 신의 코드 같은 것이 만들어진 것 속에 분명히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뭘 찾으면 돼요? 신이니까 일관성 있잖아요. 거기서 뭘 찾으면 돼요? 주기성을 찾으면 되지요. 그 때마다 똑같이 반복 되는 것. 이 자연세계는 우리가 안 만들었지요. 우리가 안 만들었는데 달이 차면 기울고, 기울면 그 면적대로 차츰 차츰 차다가 만월 되고 난 뒤에는, 우리가 시키지도 않았어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달이 알아서 조금씩 어두운 면이 많아지고 밝은 면은 줄어들고.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저런 조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 달을 만들어서 하늘에 매달을 수 있겠습니까? 지나가는 구름도 우리가 만들지를 못하는데 달을 누가 만들어요? 그러면 우리는 신을 부정하려면 뭘 부정해야 돼요? 인간이 만들어낸 컵이나 볼펜 이런 것만 있고 그 외에는 없다 해줘야 신을 부정할 수 있어요. 없어! 없어! 인간이 다 만든 거야! 그런데 밤하늘을 보니까 별이 반짝이고 달이 있더라, 누구야? 저 달 만든 공장이? 현대에서 만들었어? 삼성에서 만들었어? LG에서 만들었어요? 누가 만들었어요? 안 만들었는데 왜 있느냐, 그게 무서운 거예요. 인간이 미처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은 지가 죽는 이유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앞으로 내가 갈 때, 모르는 게 있어버리면 모르는 것 때문에 내 앞길이 방해가 되고 실패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겁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믿는 거예요. 왜? 자기 앞길이 만사형통하라고. 부흥회 한다! 부흥회 해! 진짜 이겁니다. 교회는 만사형통 때문에 가는 거예요. 신에게 미리 뇌물 주는 거예요. 뇌물 주고 미리 술수를 써 놓는 겁니다. 초를 쳐 놓는 거예요. 약을 먹이는 겁니다. 왜? 이렇게 신을 찾는 대견한 나에게 주께서 쓸데없이 자꾸 방해하지 말고 좀 보탬이 되라고. 이렇게 하는데 지도 양심이 있지, 얻어먹은 게 있으면 도와주는 게 있어야지, 그래야 보험을 들은 보람이 나지, 죽어도 보험 들어 놓으면 천당 갈 수 있잖아요. 그게 목사가 속여서도 그렇지만, 그런 말만 나는 듣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자기를 속였던 사람들도 문제 있어요.
듣기 좋은 것만 듣는 사람들도 문제 있어요.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내가 전한 복음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 있다, 저주 받는 이유가 이미 저주 받았기 때문에 저주 받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저주 받는 거 아닙니다. 괜히 화내지 마세요.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아이구, 여자네, 여자 태어났네, 화내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어디 남자입니까? 여자잖아요. 마찬가지로 저주받겠다, 하면 저주 받는 거지 화는 왜 내요. 다만 저주 받는데, 왠 은혜인지 십자가 피로, “니는 저주받는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나, 니 같은 죄인 부르러 왔거든.” 그게 믿어지니까 마음에 도착이 되니까 그게 기쁘고 정말 너무 좋아서 미치는 거예요.
사람들이 옛날 고대에서 신을 어떻게 찾는다고요? 내가 안 만들었으니까, 누가 만들었느냐? 저 큰일을 하는 것은 신밖에 없는데 신이 만들었다. 신이 만들었으면 신의 의중을 알아야 우리도 가뭄이나 풍랑이나 재앙이나 농사 짓을 때 비가 제때 오고 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데, 알아차릴 때는 주기성이란 말이지요. 반복하는 거예요. 반복.
그게 뭐냐 반복을 현대로 말하면 시간이에요. 시간을 측정하는 겁니다. 측정을 왜 하느냐, 주님의 뜻에 맞추기 위해서. ‘주님이여, 조금만 있으면 동지 되지요? 알아서 돈 준비하겠습니다.’ ‘좀 있으면 가을되지요, 내가 알아서 추수 하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대화를 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대화는 개인적이잖아요. 개인은 근대 16세기 이후에 개인이고, 옛날은 집단이었어요. 집단적으로 같은 마음 하기 위해서는 월초에 첫 달이 해가 지고 다시 차는 첫 달, 초승달에 모여서 신에게 주기성을 주신, 법칙을 주시고, 마음을 트는, 주기적으로 자기 마음을 드러내 주신 신에게 찬미하는 제천의식을 가미한 거예요.
제가 전에 했잖아요. 용산에 있는 박물관보면 동예, 옥저, 부여 등 제천의식이 있다고요.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월 초에 한 달 처음을 주 앞에 드리는, 성경에서는 월삭이라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5월이면 단오하고 전부다 첫 번째, 제사 빡세게 드리고 잘 빌어놓고 한 달간을 축복받아 잘 버티는 거예요. 그러니 하루에 첫 시간, 새벽시간을 누구한테 바친다? 하나님에게 바친다. 우리 민중에 어떻게 그리 잘 맞아떨어지는지. 새벽기도 하루에 첫 시간을 했고 거기다가 김00목사는 새벽을 깨운다, 해서 새벽 다 깨워놓고, 그 목사에게 묻고 싶어요. ‘무엇이 이단입니까?’ 묻고 싶어요.
그러니 선지자 발람처럼 삯을 받아서 성도로 하여금 타락케 했다는 말은 ‘방향성’ 다른 거 아니에요. 큰 범죄도 아닙니다. 방향만 틀어버리면 그리스도의 방주소리가 안 들리고 십자가 안 보이는 그 쪽 방향으로 틀기만 하면 그 쪽이 바로 넓은 길, 죽음으로 통하는 그 길로 가는 겁니다.
15절 봅시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그러니까 민수기에서는 뭐라 했습니까? 당신이 내게 뇌물을 주더라도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라고 했는데, 요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이야기 보면 돈은 돈대로 쳐 먹고 선지자의 위신과 체면 있어 가지고 목사를 뭘로 봅니까? 그 소리 한 모양이라, 맞추다 보니 그러한데, 성경이 참 재미있지요.
요번에 수련회할 때 ‘로고스’ 했지요. 로고스는 말입니다. 모으다, 질서를 갖추다 이런 뜻인데 대표적으로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로고스가 육신이 됐다는 뜻입니다. 말은 누가합니까? 사람이 합니까? 당나귀가 합니까? 사람이 말을 하지요. 말을 하는 그 말을 하나님께서는 말로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왜냐, 그 말은 방향성을 잃어버렸어요. 하나님께 가는 말이 아니고 자기의 짐승 같은 더러운 본성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인간은 말을 내뱉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수련회에서 말하는 해답은 뭐라 했습니까? help me. 나에 대한 관심사, 나를 좀 도와 주세요! 어떤 말을 하더라도. ‘아이고, 이 수박 맛있네.’ 이건 무슨 말입니까? 당신 먹는 거 치우고 내 먹는 거 봐다오. 이렇게 되지요. 당신은 우이 먹던, 씨를 같이 먹던, 나만 맛있으면 끝나는 거야, 이런 뜻이다 말이지요.
인간은 존재 자체가 타고난 거거든요. 모든 게 다 그래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어떻게 생각이 똑같은지, 생각이 개성적으로 다르다 싶지만, 술을 다 먹여보면 결국 생각은 똑같아요. 술을 먹여보면 짐승이란 지점에서 같이 반갑다! 친구야! 같이 만나게 되어 있어요. 니도 짐승이고 나도 짐승. 술 안 먹고 주정해 본 적 있습니까? 있어요. 말 많을 때, 쓸데없이 말이 많을 때,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떠벌이고 말 많을 때, 분명히 술주정하고 있어요. 뭔가 속에 캥기는 게 있어요. 문제 있어요.
말 할 줄 아는 인간의 말은 하나님 쪽으로 꽂혀 오르는 로겟이 될 수 없는 거예요. 도리어 방향이 인간의 죄를 지었던 뱀 쪽으로 가는 말이에요. 인간의 모든 말은 뱀 우선입니다. 마귀 쪽으로 가는 말인데 이스라엘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저주가 퍼붓지 않기 위해서는 발람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본의 아니게 돈은 돈대로 받고 축복은 축복대로 해야 될 역할을 한 발람에게는 말로 먹고 사는 선지자가 어떻게 됩니까? 누구한테 웃음을 당하지요? 말 못하는 당나귀. 하나님의 작전이라는 게 상상이 안 됩니다.
당나귀 말했다 해서 집에 가서 말시키지 마세요. ‘당나귀야, 발람당나귀도 했는데 니는 왜 못하니? 니는 바보야? 같은 당나귀인데. 말도 못해. 말 해봐.’ 그러면 당나귀가 말하지 않고 옆에 있는 해바라기가 말합니다. 의외로, 항상 우리의 예상에 우리가 이쪽을 안다고 하면 엉뚱한데서 옵니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목소리로 말했어요. 사실은 당나귀가 해야 될 소리를 누가 해야 됩니까? 사실은 발람이 해야 돼요. 그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축복을 해야 돼요. 그 순간만큼은 주인과 종이 반대로 됐어요. 그래서 당나귀가 시키는 대로 발람이 합니다. 할 때 나오는 말은 뭐냐 나귀와 발람을 그렇게 작업하셨던 그 분이 정작 하고 싶은 것을 이미 작업이 가해진 당나귀 탔던 발람선지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축복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은 발람의 축복도 아니고 당나귀의 축복도 아니고 이스라엘 왕이 그런 경로를 통해서 발람이란 경로, 당나귀의 경로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축복의 말씀을 그렇게 전한 겁니다.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뭘 알아야 됩니까? 이방 선지자도 그렇게 다루시거늘 하물며 우리가 주님한테 직접 다루어지지 않을까, 거기에 대한 안도감과 그리고 감사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찬양해요. 그저 찬양합니다.
이걸 신약시대에 기준을 삼자 이거예요. 무엇의 기준? 무법과 불법과 지옥 가는 사람과 드러내야 될 사람과 구원받을 사람의 기준을 방금 길게 말한 이것이 하나의 기준점으로 하자, 이말 이에요. 결국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지요. ‘방향성’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방향을 이미 다 이루었다 쪽으로 시계 바늘이 그 쪽 방향으로 가도록 돼 있어요. 몸무게 재보다가 바늘이72로 가지 말고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몸무게 재는 오락하시다가 ‘이거, 몸무게 왜 재지?’ 방향성을 다시 주께 바라 볼 수 있어야 되지요.
그 다음 18절 봅시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이게 특정사람을 두고 하는 게 아니고 바로 보편적인 모든 지옥 갈 사람들의 특징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하나 나오지요. ‘자유’입니다.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자유는 반드시 그 전에 살던 곳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자유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거예요. 반드시 그 전에 살던 곳이 있었고, 두 번째는 묶여있다. 다른 말로 하면 갇혀있다. 세 번째는 자력으로 못 벗어난다. 2번하고 비슷하지요. 2번은 그냥 갇혀있는 것이고, 3번은 빠져 나오려 해도 빠져 나올 수 없어요. 이것이 성경에서 자유라고 할 때 구원받는 자유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는 이런 식이 아니고 안에 뭐가 있느냐, 아리스토텔레스가 밝혀냈는데, 인간 속에 잠재성 또는 잠재테라는 게 있고 인간의 모든 것은 그 잠재테가 현실화된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플라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처음부터 인간은 안에 잠재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인간은 허구고 모방이고 허상이다, 이리 본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닙니다. 선생님, 우리 안에 실상이 있습니다. 잠재테가 있는데 한 꺼풀씩 꺼풀이 벗겨지면서 줄음이 펴지면 그것이 현실테입니다. 제가 선생님보다 한 수 더 압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실체 없는 허상이 아니고 그건 플라톤 선생님이 주장한 것이고 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실체입니다.’ 각 개성이 중요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인간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자유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는데 이것을 누가 마음껏 발휘하도록 만들어 줄 때 그 자유케 하신 것의 종이 된다고 오늘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완전한 자유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이 완전한 자유성은 누구한테 해당이 되느냐 하면 누구한테 자유를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는 것은 누구한테 해당됩니까? 신이지요. 신은 누구한테 자유를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어요. 지옥 갈 인간들은 자기가 자유를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면 마는 거야. 아까 도서관 갔다가 버스타고 오는데 애 엄마가 이런 이야기해요. 초등학교 3학년쯤 됐어요. ‘얘야, 친구하고 놀아라.’ ‘내가 왜 노는데?’ ‘내가 그 애랑 놀만큼 큰 죄를 지은거야?’ 말을 해도 무섭게 해요.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 거야. 이리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지가 한 말을 지가 알지 못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애들이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생각은 없고 잠재테, 나는 내가 지껄이고 싶은 대로 지껄일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걸 모든 사람은 꾹 참고 있다가 1차, 2차, 술만 쳐 먹으면 나온다니까요. 그게.
그러니까 술만 먹으면 짐승이 된다니까요. 어제 지하철에서 봤지요. 지가 언제 봤다고 그럽니까? 술만 취하면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 여자 관계없이 전부 다 그래요. 성경에 뭐라고 그래요? 술 쳐 먹지 말고 성령 받아라, 하지 않습니까? 성령 받으면 누구 이야기 나옵니까? 술 안 먹어도 예수 이야기 나오게 돼 있습니다.
22절 봅시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술 안 쳐 먹으면 이런 짓합니까? 마약에 도취되면 이렇게 되지요.
20절 봅시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여기 ‘앎으로’ 해서 믿음 있는 게 아닙니다. 아는 것이지요. 아는 것.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버려요. 왜 그러느냐, 주님이 그렇게 만만한 분으로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주님은 피를 흘렸어요. 쉽게 노인들하고 장난치듯이, 어른하고 장난치듯이, 농담조로 주고받는 사이 아닙니다. 친구라고 했다고 맞먹는 사이 아니에요.
진정한 친구는 마음이 낮아질 때 황공스러운 개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주여, 저 같은 것에게 친구 안 해도 됩니다. 황공무지로소이다.’ 이렇게 돼야지, ‘어이, 맞먹자, 김대중처럼, 우리는 친구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방향을 주님 보다가 좀 여유 있다 싶으니까 방향을 잠재되어 있던 자기 자신의 자유, 나는 뭐든지 하고 싶다! 하는 거기에 발각된 거예요. 그것을 알고 내가 뭐라 했습니까? ‘하고 싶으면 니 맘대로 해라. 멋대로 살아라.’ 이리 한 거예요. ‘막 살아야 돼.’ 했거든요. 그러니 좋다고 손들고 난리 났어요. ‘이근호 목사는 막 산다 이야기했다! 세상에서 막 사는 게 그게 복음적이냐?’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그 사람들이 막 살고 싶은데 신자라는 체면 때문에 탐색적으로 전략을 스스로 조절하고 있다는 거예요. 막 살고 싶은데 꾹꾹 참는 거예요. 저는 차라리 막 살아라, 그럴 것 같으면. 이래도 믿음 없고 저래도 믿음 없으면 차라리 막 살아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우리는 뭘 해도 막사는 그것이 죄인입니다.’ 고백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살아있음을 모르고 저 혼자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 혼자 세상 홀로 남아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속에 들어있는 자기 악마적인 심적인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그런 것들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인 줄 압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다른 길로 터주시고 다른 길로 방향을 돌려주시니 날마다 십자가 보이는 삶을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길로 쭉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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