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베드로후서2:9(삯꾼 목자)120810a-이 근호 목사
안양-베드로후서2:9(삯꾼 목자)120810a-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35)
안양-베드로후서2:9(삯꾼 목자)120810a-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2장7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리 되어 있지요. 구원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놓여 있는 장소가 복음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될 그런 환경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롯이 있습니다. 롯이 있는데, 롯이 구원을 받잖아요. 롯이 구원을 받을 때, 여기서 뭐가 튀어 나온다고 했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고통이 나오지요. 이 고통이 생계 문제 때문에 고생 하는 것, 그런 고통이 아니고 이 고통은 복음을 인하여 받는 고통을 복음이라 했습니다. 복음만 버리면 고통은 당합니까? 안 당합니까? 안 당하지요. 복음을 내가 버려버리면 고통을 안 당하는데 괜히 복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거예요.
그러면 고통을 당하는 복음을 버리지, 왜 안 버리느냐, 복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고통이란 아픔이 가미되면서 복음은 찾아오고, 그 고통이 가미된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롯이 구원받을 때 고통 받는다, 이거 하고 로마서 1장에 보면 의인은 오직 믿음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고 어떤 연관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하면 전혀 고통이 없지요. ‘믿나?’ ‘믿습니다!’ 이게 뭐가 아파요. 혀가 약간 아파요? 전혀 고통스럽지 않지요. ‘학생! 구원 어떻게 받지요?’ ‘선생님,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이게 뭐가 어려워요. 전혀 고통스럽지 않잖아요. 그런데 정작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뭐가 수반되어 있어요? 고통이 찾아오게 되어 있고, 이 고통은 복음을 버리면 안 찾아오는 고통이고, 복음을 유지하게 되면 늘 찾아오는 고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을 버리면 되지, 하는데 복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니에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아, 또는 부부의 관계와 같아,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너는 성령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 되어 있고, 너희는 나의 신부라 되어 있으니까 성경에서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가 우리가 임의로 철수하는 관계로 표현하지 않아요. 부부관계 또는 부자관계가 우리 쪽에서 취소한다고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혈연관계, 혈연관계는 한 번 태어나면 영원한 아버지고, 영원한 자식이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임의로 거부할 수 없듯이, 그 이상으로 주님께서 그 혈연관계보다 더 단단한 관계로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게 되는 겁니다.
고통이 싫다고 해서 복음을 철야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애초부터 신자가 아닙니다. 지가 골라잡은 거지, 동대문시장의 물건도 바꿀 수는 있습니다마는 믿음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골라, 골라, 떨이, 떨이해서 산 게 아니기 때문에 바꿔주는 것도 없어요.
그래서 욥은 고통을 내 뱉으면서 예수님이 당했던 고통을 이 시대에 앞당겨 살면서 주님의 고통을 내뱉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우리에게 나오는 고통이라면 그 고통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당했던 고통을 우리 속을 통해서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발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득이 되는 게 뭐냐, 하나님의 좋은 점이 뭐냐 하면, 그 뒤에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불법이라는 것이 성사가 되고 어렵지요. 이렇게 의로운 롯에게 고통을 당해서 구원을 건지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얻고자 이러한 의로운 롯에게 고통을 주시는가? 그것은 뭐냐 불법 또는 무법 그리고 여기에 따르는 심판, 이것이 이 세상이 분명히 이렇게 무법하고 불법하고 심판 받는다, 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증거물로서 이렇게 의로운 롯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겁니다.
요게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나오지요. 두 증인이 죽게 됐는데 사람들은 두 증인을 죽였다고 춤을 추고 좋아하고 선물을 서로 교환하고 귀찮은 존재 없앴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두 증인이 죽었던 장소가 바로 십자가라 하고 동시에 소돔이고 애굽이지요. 보세요. 사건하나 터지니까 이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 되니까 졸지에 주변에 롯이 있는 자리가 십자가 사건 동시에 주변은 뭐로 바뀌었냐, 애굽으로 변하고 소돔으로 변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로고스, 수련회에서 배우셨지요? 우리의 로고스의 인식으로서의 소돔이라 하는 것은 여기 저기 소돔이 아니라 지금 사해근처에 있는 그 마을이 소돔이잖아요. 인간적인 로고스는. 필리핀하면 저 북극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남태평양 그 나라지, 쥐나 개나 필리핀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묵시적 세계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 복음을 인하여 고난 받는 그 현장이 뭐가 되는 겁니까? 소돔이 되는 거예요. 거기 소돔, 고모라가 돼 줘야 모든 세상이 심판받는 것도 정당하게 되는 겁니다. 세상이 심판받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으로 고통 받는 이러한 의로운 자의 모습을 자기 백성에게 안겨주게 되어 있어요. 우리 팔자가.
특히 윤집사님 같은 경우는 친구들이 잘 나가는 친구들 아닙니까? 이제 나이 60후반 되어 가지고 성경문자 보내고 그러면 백이면 백 ‘미쳤다! 드디어 치매현상도 여러 가지 현상 중에서도 교회에 미쳤다!’ 그 사람들은 성경 모르니까. 교회에 미쳤다, 기독교에 미쳤다 해요. 기독교에 미친 그런 치매가 있네. 아마 다들 그렇게 하실 거예요. 모임에 있다가 화장실가면 안 됐다고 쯧쯧 거리고 ‘멀쩡했던 사람이 왜 저렇게.... 인생 저렇게 해서 망가지는구나!’ 얼마나 뒤에서 뒷다마 많이 듣겠습니까?
특히 성경을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예를 해 놨어요. 요한복음도 마찬가지고. 너희가 나로 인하여 세상한테 미움을 받는데, 너 때문이 아니고 니가 믿는 나 때문에 너희도 같이 다행스럽게도 같이 미움 받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을 아주 다행스럽게 여겨라,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예요. 하나. 이로서 우리가 하나 된다. 하나 되려고 빡세게 기도하지 마세요. 그냥 복음 믿고 있으면 주변에서 미쳤다 소리 듣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 되면 어떤 점이 좋냐, 우리가 예수님을 버릴 수가 없을 정도로 주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버리고 싶어도 허락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우리를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그 하나 됨을 스스로 유지시켜 나가는 혜택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취직 한 번 잘 하신 거예요. 특히 결혼 한 번 잘 하신 겁니다. 신랑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신랑. 그런 신랑 있으면 나와 보라 하세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아브라함에게 있는 모든 축복이 다 우리 것으로 주시는 그 신랑을 만난 겁니다.
수요일날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에스겔 묵시이야기하면서 지금 에스겔 보면서 도저히 가상치도 않는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 안양에 살고, 인덕원에 살고, 역사 속에 있으면서 감히 천사들이 우굴 거리는 그 세계를 뛰어올라간다는 게 이게 정신이상자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 있을 수 없는 것을 주께서 이루어주시는 겁니다.
잘나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는데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라고 우리보고 그렇게 해준 거예요. 그리스도만 자랑하라고. 사람이 따져보면 자기에게 자랑할 게 있는데 주께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사람들, 꽃송이가 모여서 꽃다발이 되는 것처럼, 그런 저런 사람들이 모였는데, 다 각자 자랑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 다 자랑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해서 꽃다발처럼 하나 모을 때 그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그게 바로 고린도교회에서 말하는 교회증인이에요. 그렇게 모아질 때 본드 역할 하는 것이 뭐냐, 십자가 피라는 거예요. 고리도전서는 어쩌면 내용이 간단해요. 십자가 피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너희는 성령이 알려주어서 알았다. 따라서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예수님의 죽으심 죽음으로 인하여 구원받았다, 이 말이지요.
다시 지금까지 정리해 보면, 욥이 구원 받을 때, ‘나는 믿습니다.’ 큰소리치면 될 일인데 그렇지 않고 실제로는 고통이 따라왔다. 고통이라 하는 것은 복음만 버리면 안 오는 고통인데 복음 때문에 유발한 고통이다. 이 고통이 오게 된 하나님의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노리는 게 뭐냐, 이 세상은 불법과 무법하다는 세상이라는 것을 규정해서 심판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당연하다는 조치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한 번 물어 볼게요. 이 불법하고 무법하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대목에 대해서 동의합니까? 안 합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나쁜 짓해서 설쳐서 그런 게 아니고 바르게 사는 쪽으로 살겠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보고 불법이라 무법이라 했으니까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 제일 납득이 안 되는 것이 힘들게 교회 왔는데, 교회 참석도 죄가 된다고 할 때에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는 두 시간, 한 시간 차 달려서 힘들게 왔는데, 그게 죄가 된다 하니까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경우는 뭐냐 하면 자기가 두 시간 동안, 가는데 한 시간, 오는데 한 시간, 무려 이동시간만 두 시간 받친 자기 자신을 믿고, 그 다음에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고통 받지 않는 나 되기 위해서 사실은 그 교회 출석해서 하나님 믿었다.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실제 하나님은 고통을 줬는데 교회 온 사람들은 교회 옴으로서 들 고통스럽게 인생 살고자 교회 온 사람들이에요. 어느 교회 다니면서 ‘주님이여! 오늘도 고통 받으러 왔습니다.’ 이리 교회 온 사람 누가 있어요? 그것도 뒷자리에 앉지 않고 앞자리에 앉는 이유가 ‘고통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성전의 세리 말고는 없어요. 성전에 엎드려서 감히 고개를 못 드는 세리 말고는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세리 말고는 다른 사람은 있을 수 없지요.
백부장의 종이 아플 때 백부장은 그걸 어떻게 해석했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 종이 아팠다. 이리 해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이 신기하지요. 따라서 종이 아픔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님 앞에 어떤 사이인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사이이다. 이런 관계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요. 주님이 놀래시고 이 만한 믿음 본 적 없다. 저 천국 차지하는 거 다 물렀거라! 다 나가, 나가, 나가. 그리고 너희들이 채워진다는 거.
수요일날 잠깐 언급했지요. 불타는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으로는 불타 버려야 돼요. 불타는 하늘나라. 이렇게 정리 했습니다. 그러면 그걸 고통이라 했는데, 고통은 어디서 나오는가? 고통은 바로 죽음에서 나옵니다. 아프다는 것은 뭐와 가깝다? 죽음이 전에 보다 더 가까이 느껴질 때 고통스럽지요. 정신적으로 외로울 때는 죽고 싶다 하지요. 기분 좋을 때 죽고 싶지 않지요. 물론 아주 기분 좋을 때는 우리 이대로 죽자, 하는 경우도 있지만 특이한 경우이고, 집안이 안 됐을 때 죽고 싶다 하는 것은 그 만큼 늘 현존하고 있는 죽음을, 죽음 속에 쌓여 있으면서도 못 느끼는데 자기 챙기는 것이 안 될 때 죽음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지요. 롯에게 고통이 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겠습니다. 롯에게 주님의 죽음이 있었다. 주의 죽음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보면 되지요.
엘리야가 그릿강가에서 음식을 어떻게 조달했습니까? 까마귀가 와서 줬지요. 내가 만약에 엘리야라면 아침에 까마귀가 음식을 줬잖아요. 점심 때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분명히 백이면 백 아침에 다 안 먹고 좀 남깁니다. 사람이라 알 수가 없으니까. 까마귀가 오면 아침에 마냥 먹고, 사람이 준비성이 있어야 되잖아요. 엘리야는 왜 그렇게 안 했는가? 엘리야는 죽으러 간 거예요. 오히려 양식 물려주는 것이 더 무서워. 자살하려고 물에 빠졌는데 건져주면 더 짜증나는 것처럼.
어린 초등학교 애들이 샤워하고 있으면 뒤늦게 온 엄마가 사정도 모르고 ‘야, 야, 뜨거운 물로 해야지.’ 해서 뜨거운 물로 할 때 아이는 기겁을 하지요. 실컷 하고 나오려 하는데. ‘야, 야, 머리 이리 하면 안 된다. 더 감아라.’ 요거 감고 숙제하려고 하는데 아이 머리 집어넣고 샴푸 집어넣고 강제로 감기면, 아이들은 미쳐요. 엄마의 열심히 아이로 하여금 상처를 주는, 엄마의 일방적인 평가에 의해서 돌발적인 사태를 갔다 안겨줄지 아이들은 겁을 내고 슬슬 문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요. 눈을 마주치기 싫어해요. 너무 잔소리를 해대면. 그런데 엄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엄마의 존재 이유가 남편에서 자식으로 넘어갔는데 할거리가 생겼는데 놓치면 안 되지요. 미끼인데.
여기서 죽음이 롯과 함께 있을 때, 이 죽음은 롯의 죽음이 아니고 롯을 구원하신 분의 죽음이 롯과 함께 있어서 그래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롯은 지금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 사람과 동행한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나 때문에 죽을 사람이 나와 함께 동행 한다면 결국 나는 어떤 짝이 나느냐 하면, 팔자가 되느냐 하면, 동행하는 것 때문에 나는 복음 때문에 죽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굉장히 많지요. 가능성 정도가 아니고 확실합니다.
복음 때문에 죽는 것, 그럼 복음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죽을 때만 복음 때문에 죽을까요? 아니면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나날이 복음 때문에 죽음에 포함되어 있을까요? 포함되어 있습니다. ‘밥 먹어. 열심히 먹어 놔. 열심히 먹어놔야 복음 때문에 죽을 수 있어.’ 이런 식이다 말이지요. 쓸데없이 금식 같은 거 하지 마세요. 금식은 굶어서 죽는 방법이 지가 채택한 게 되기 때문에 영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주께서는 밥 먹어가면서 죽으라는데 지가 고집을 부려가지고 금식해서 죽겠다고 나서니 이것은 주님 하신 걸 모독하고 있지요.
함께하신 분이 밥 먹으라 하면 밥 먹고 굶으라 하면 굶으면 돼요. 함께 하신 분이 굶으라 하는 것이 어느 경우냐 하면, 밥맛이 없을 때, 먹고 싶어도 모래 뜨는 것 같아. 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애가 시험에 떨어졌을 때, 계 탈 때 계 오야가 도망갔을 때 이런 경우들이 있지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롯의 죽음이 있는 것은 본인의 인생은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나를 위한 인생은 더 이상 주께서는 남겨두지도 않고 허락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세상은 롯과 같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불법이고 무법이 되는 거예요. 이게 좀 어려워요. 창세기 4장하면 쉽습니다. 아벨이 죽는 이유는 누구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까? 가인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가인의 죄를.
만약에 아벨이 처음부터 양 잡아서 흠양하는 제사를 드렸다면 그리고 그 뒤에 가인이 제사를 드렸다면 가인이 뭘 딱 보겠습니까? ‘아~하! 동생 저 제사 불이 내려와서 응답하는구나!’ 그러면 ‘야, 동생아! 무슨 재료로 사용했노?’ ‘이렇게 했습니다.’ ‘조미료는?’ ‘조미료는 약간 뿌리고.’ ‘소금은?’ ‘쳤고.’ ‘파는?’ ‘송송송 썰어서’ ‘옳지!’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천의 수양도 만만의 제물도 다 나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다. 니 마음을 원하지. 형식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알겠지요. 9절 봅시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그러니까 한 쪽이 구원 받았다는 말은 한 쪽이 구원 되지 않기로 결정 났다, 그 말입니다. 구원된 사람과 같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단지 구원 받은 롯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않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자동적으로 저 쪽은 지옥가게 돼 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 해야 될 이유는 지옥 갈 사람들을 표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에요.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대해서 무지하고 거부하고 감사하지 않고 대항하는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지옥 가는 사람으로 분류시키기 위한 분류시킬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먼저 와 버린 겁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말씀에 먼저 된 자 나중 된다 하지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은 소위 오래 믿었다 하는, 그 당시 바리새인두고 하는 얘기예요. ‘오래 믿었다! 에헴!’ 하는 사람들에게 처음 믿은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보냄으로서 그들로서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만든 겁니다.
중풍병자가 친구들이 몰고 와서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내려 놨을 때,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예수, 당신은 병만 고쳐라.’ 왜? 그 정도는 자기들, 유대인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죄 사함을 받았나니 했는데, 중풍병자가 낫다 말이지요. 그러면 죄 사함은 하나님께 속했으니 우리가 터치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기도함으로서 병이나 낫는 것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한계이고 전부인데, 요 원칙이 있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다른 방식의 구원방식을 노선을 가지고 왔다는 셈이 돼 버리지요.
그럼 졸지에 기존방식을 주장하던 사람은 뭐가 됩니까? 이거는 완전히 이리요, 도둑놈이요, 사기꾼이 된 겁니다. 고 사건 이후에 나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시고 그 뒤에 나온 말이 뭐냐, 옛 술은 옛 부대에 담고, 술 마시고 잘 먹고 잘 떨어져라 이말 이에요. 새 술은 새 부대가 있어야 새 술이 담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새 부대는 깨끗한 부대? 아닙니다. 고상한 부대? 아니거든요. 착한 부대? 아닙니다. 중풍병자처럼 예수를 믿는 부대! 거기에 예수님의 피가 새 부대와 담겨서 죄인과 피의 만남으로 진짜 하나님이 구상한 구원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된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놀랬지요. ‘누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거, 지가 왜 하는데?’ ‘내가 하나님이거든.’ 그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어디를 봐서? 어디를 봐서?’ 니가 보고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말을 안 한다. 그들은 봄으로서 오히려 안 믿었어요. 안 보면 상상이나 하지. 배트맨은 끝까지 가면을 벗지 말았어야 했어요. 괜히 배트맨 가면 벗어서 신비감 다 떨어지고.
그래서 기존교회 목사는 항상 평신도 만날 때는 음성 변조가 돼 있습니다. 할~렐~루~야~ 신비감을 계속 유지해 줘야 돼요. 간격, 지옥과 천국간의 고리처럼 평신도와 목사사이에 간격이 있어서 당회장실도 함부로 못 들어가요. 당회장 만나는 것이 예수님 만나는 것 같아요.
10절에 보세요.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육체를 따라 정욕가운데 행한다니까 이 지옥 가는 사람의 육체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육체가 있지요. 그럼 천국 가는 사람 육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시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쪽은 육체를 따라 육체의 정욕대로 하고 한 쪽은 육체의 정욕 따라 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영이 그걸 못하게 만들지요. 왜? 육체를 누가 접수해 놨기 때문에? 육체의 전환권이 누구한테 전환되었기 때문에? 값을 주고 산 것이 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육체를 다루기 때문에 본인이 자기 육체를 다룰 수 있는 것이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사는 것도 지 맘대로 못 살고요, 특히 지 맘대로 못 죽어요.
성도의 즐거움이라 하는 게 그겁니다. 이상하게 내 뜻대로 삶이 아니라는 것이 수시로 느껴지는 게 이게 아주 신기해요. 내 뜻대로 아닌데 누가 나를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계획했던 것이 없는데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나면서 나중에 보니까 그게 더 좋아 보이고. 그게 옳아 보이고. 나의 결심이나 선택보다도 우연히 가져다주는 그것이 내 선택보다 훨씬 더 괜찮아 보이는 그런 거. 그런 것들이 성도한테는 굉장히 영에 의해서 자기 육체가 다루어진다는 그런 특징이 있어요.
그런 특징들을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케 한다.’ 사람이 자기 마음이 돛대처럼 높아지면 아무리 비싼 집, 맛있는 음식, 많은 돈을 벌어도 짜증나요.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마음이 교만하니까 뭐, 이리 좀 줘도 ‘아이고, 이 정도는 당연하지.’ 이리 되어 가지고 지가 행복하지를 않아요. 주께서 우리 뜻대로 안 되는 이유는 우리를 낮추고, 낮추고 계속 낮춥니다. 낮춰 놓으면 우리 육체가 또 올리고 내리면 또 올리고 계속 이런 식으로 가지요.
몇일만 주님 생각안하면 이만큼 올라가 있고 재앙이 있어서 한꺼번에 훌떡 밑으로 내려가고. 인기를 얻었다. 자기는 그것이 큰 실수인 줄 몰랐지요. 인기 전까지는 굉장히 겸손했는데 인기가 있었다, 없어지니까 그 때 그 인기 다 어디 갔나? 그거 찾아다녀요. 난 이 정도는 아닌데. 특히 가수들, 배우들, 차라리 처음부터 인기 없었으면 같이 시장바닥 걸을 수 있는데. 좀 인기 있다고 여자 분들은 모자 쓰고 다니고 복잡해요.
10절에 봅시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이 경우가 무슨 경우입니까? 우리는 무슨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지요? 이게 뭐냐 구약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무슨 이야기냐, 구약에서 여기에 권세 있고 권위 있는 게 뭐냐, 이스라엘과 함께한 그 분,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이런 예가 성경에 이렇게 있으니까 이런 경우가 언제 있었지? 롯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다가, 다른 이야기 보편적인 이야기처럼 보이는데, 이걸 좀 설명하겠습니다.
구약이 바다라면, 여기에 거대한 항공모함이 있다면 주변에 뭐가 일어납니까? 항공모함이 5만톤, 7만톤이 되니까 배가 얼마나 큽니까? 여기에 여파가 일어나겠지요. 이거는 평평한 바다에 파장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냥 니 살고, 나 살고 고요한 이 땅에 이스라엘나라 등장해서 죽 흩고 지나가니까 주변에서 아우성이고 난리에요. ‘저런, 민족이 다 있어?’ ‘저거는 깡패야 뭐야? 저거는?’ 여호와 믿고 돌아다니는데 가는데 마다 다 당하고 패배하고 이방나라는 다치고 울고, 불고 그 나라는 승리하고 뭐야? 조폭도 아니고. 그게 바로 권세 있는 분과 함께 있는 특징입니다.
이스라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주변이 어두움이 되고 졸지에 육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나라로 드디어 들통이 난 겁니다. 가만히 있는 평범히 살아가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면서 서로 이웃나라로 편하게 살아가는데 거기에 갑자기 망나니 같은 어떤 히브리인들의 집합체가 등장해서 가는 곳마다 다 헤치니까 모압 나라에 비상 걸렸고, 여리고성에도 비상 걸렸습니다. 모압나라 왕이 뭐라 합니까? ‘안 된다. 우리 영토에 못 온다.’ ‘과수원 그거 안 따먹을게. 우물 안 먹을게.’ ‘못 믿는다. 너희들 소문 다 들었어. 다 들었어. 가는 곳마다 작살났다는 거 다 들었어. 아말렉도 작살나고. 아예 통과하지 마. 돌아가.’ 돌아가면 또 민족 만나지요. 또 처단하고, 또 처단하고.
누구 때문입니까? 언약궤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이스라엘의 언약궤입니다. 민수기 10장 35절 봅시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이스라엘이 없었으면 적도 없어요. 이 동네에 오지도 않으면 여호와의 적인지 구분도 안 돼요. 그냥 사이좋게 윈윈처럼 지내는 거예요. 유별난 나라예요. 뭘 앞장 세웠다? 언약궤를 앞장세우니까 여호와여 일어나사, 언약궤는 여호와를 일으켜 세워요. 마치 바다의 해적선이 가게 되면 해적선 앞에 큰 톱이라든지 창을 달아서 가는 곳마다 다 부숴지고 파손되는 것처럼 그냥 들이미는데 주변 나라들이 감당을 못하지요.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땅은 인간과 안 맞는다.’ 땅은 인간을 저주합니다. 가인이 죄 짓고 난 뒤에 피를 머금고 가인의 후손들이 이 땅에 도시를 건설했고 그들이 예술, 공업 모든 목축, 특히 성곽, 도시, 법령 함무라비법전, 왕 위주의 법이 생긴 거예요. 그걸 ‘정주’라고 해요. 안착해서 사는 것. 주저앉아 사는 것을 어려운 말로 정주라고 합니다.
사람은 땅에서 정주하려는 것이 있어요. 자꾸 거기에 안착해서 안착하고 난 뒤에는 이유도 없이 무조건 확대하고 확장하려고 하는데, 그걸 누가 반대하느냐 하면, 토해내치고 엉덩이를 밀어 내치느냐 하면, 땅이 밀어내요. 땅이 잡초가 나온다 했잖아요. 엉겅퀴. 땅은 밀어내고 인간은 갈 곳이 없으니까 땅에 정주는 해야 되고, 둘 사이에 얼마나 심합니까? 텃밭에 잡초 뽑는 거 얼마나 짜증납니까? 보기는 아름답지요. ‘아이고, 참 촌에서 잘 키우셨습니다.’ ‘한 번 살아볼래요?’ ‘아니요.’ 못 살지요.
이거는 고요한 촌에 가서 문화생활하려고 갔다가 잡초 뽑는데 사역하고 있다구요. 뽑아도 또 올라오고 뽑아도 또 올라오고 뽑으면 안 올라와야 되잖아요. 비 오고 난 뒤에는 와르르 쏟아져 있어요. 뽑으면 또 생기고, ‘누구야? 잡초 뿌린 자가?’ 화가 나지요. 땅이 말합니다. ‘나, 니 안 좋아하거든.’ 반가운 채 하면 ‘나, 니 안 반갑거든.’ 땅이 유일하게 반가워하는 사람은 한 분 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11장에 보면, 아이가 사자 굴에 손을 넣지요. 양이 사자와 같이 하고, 그게 뭐냐, 땅이 받아줘서 그래요. 동물이든 식물이든 땅이 안 받아주면 땅에서 못 살게 되어 있습니다. 참 가련한 신세에요. 인간의 신세가. 이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받아 줄 곳이 없습니다. 부도난 그룹 안 받아주지요. 대우그룹이 그렇잖아요. 계열사가 아무도 안 받아줘서 부도나 버렸잖아요. 부채가 너무 많아서 안 받아줬잖아요. 우리가 부채가 너무 많아요. 이미 부도났어요. 땅이 받아주질 않습니다. 받아주면 정주해서 거기서 안착해서 법을 만들어서 이제는 지가 왕질 하고 있어요. 땅의 고마움을 모르고 지가 잘나서 잘된 걸로 안다 말이지요.
제가 방금 땅이라고 했는데 땅은 뭐도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비, 구름도 포함되어 있어요. 햇빛도 포함되어 있어요. 여기서 땅이라는 말은 평평한 흙 성분을 말하는 게 아니고, 땅은 하늘에서 비 내리고,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잖아요. 땅 자체가 그 공간, 삶의 공간 전체를 땅이라 하는 거예요.
그 땅이 하나님의 매서운 손맛을 봤지요. 그게 노아 홍수잖아요. 땅하고 인간하고 맞다? 안 맞다? 맞기? 안 맞기? 안 맞기! 맞지를 않아요. 그래서 물청소를 해 버려요. 물청소를 싹 하니까 거기서 아무도 살아남을 인간이 없었어요. 오직 방주만 살아남아요. 왜 방주만 살아남는가? 방주는 친히 하나님이 만들라 했으니까. 이는 지상에서 인간이 창의해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배가 노아 방주입니다. 그 거 배 같지도 않아요. 재미도 없어요. 어떤 창고 같아. 그게 무슨 배입니까?
노아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방주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노아가 구원 받았고 장차 저주받을 노아의 아들 함까지 거기서 구원을 받지요. 그게 노아 방주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아 방주를 언약이라고 해요. 언약에서는요,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구원해줘요. 노아는 그 덕분에 살았기 때문에 노아는 알지요. 노아는 죽었다가 살아났잖아요. 똑같은 사람 다 죽었으니까. 육에 속한 사람 다 죽었으니까. 자기가 살았다는 것이 더 무섭지요. 이제는 사명을 듬뿍 부여 받았어요. 무지개가 뜨면서 무지개가 뜨는 이유를 대대로 전해야 될 사명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기의 수치를 덮어주는 그 야벳과 셈을 축복하는 기능을 하지요. 그게 뭐냐 주님의 은혜를 후손에 전달, 전달하는 전달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걸 해야 되지요. 만나는 사람마다 그걸 전하지요. 예수님이 방주니까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죄인이었습니다. 그걸 증거 하는 겁니다.
땅이 인간을 안 받아 주지요. 이걸 붕~ 떴다고 할 수 있는데, 정착이 안 돼요. 항상 붕~ 떠있어 가지고 땅하고 자꾸 반발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나중에 땅 자체를 하나님께서 불 질러 버려요. 땅을 위해서 불 질렀겠습니까? 땅에 뭐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땅하고 안 맞는 족속들 한꺼번에 태워버리지요.
연꽃잎이 있지요. 밥 쌓아 먹잖아요. 연잎을 펼쳐 놓고 그 안에 밥을 넣을 때, 넓은 연 잎이 자기 세상인 줄 알아요. 여기서 빌딩 짓고 올림픽 하고 살기 좋다고 사진 찍고 이리 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연꽃이 삼킬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 연잎위에서 미국에서 목성에 인공위성 보내서 착륙시키고 좋다 하는 거예요.
우주가 종이 축 휘말리듯이 돌돌돌 말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와서 이불을 돌돌돌 말아보세요. 인간은 모래위에 지은 집이 무너지듯이 바탕 자체가 없어요.
아무것도 없으면서 인간은 고집을 부리고, 이 땅에 디딜게 없어요. 안개 같아요. 축축한 물방울 같아서 잠시 있다가 바짝 마르면 어디 있었나? 하고 사라지는 거예요. 이번 수련회 때 개그콘서트에서 나오는 대목을 하나 이야기를 했어요. 가루상입니다. 가루상이란 콩가루란 뜻이에요. ‘가루상이 그렇게 하면 되나?’ ‘가루상 사람 아니무니이다.’ 그 말이 너무 멋있는 말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가루상은 말 아닙니다.’ 질문 자체에 근거를 없애버린다고요. ‘그럼 너 뭐야?’ ‘가루상무니이다.’ 로고스로 끝나버려요. 바탕이 없는.
인간 자체가 땅과 안 맞아요. 땅의 주인은 창조하신 주님이신데 주님이 담요 확~ 가지고 가면 후당탕 떨어져서 맨땅에 붕 떠 있는 상태에요. 그 땅을 불사르게 되면 그 불길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지구상에 있는 모든 자에게 임하시리라. 누가복음 24장에 나오지요. 모든 자에게 재앙이 임한다는 거, 다 불태워 버린다는 것. 그래서 국회의원 됐다고 까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오락이고 연세 많으신 분은 알겠지만, 지나가보면 다 시간 감당이 안 되어서 그냥 해 보는 짓이에요.
산에 올라가는 것도 마찬가지고 암벽 타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냥 남아도는 시간 할 것 없어서 해 보는 거예요. 죽는 것도 태어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태어났고,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죽고, 거기에서 일구어지는 모든 사태와 사건도 육체를 다루시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성령이 다루신다면 우리는 그냥 이 구경, 저 구경하다가 고통가운데서 남의 땅에서, 안 맞는 땅에서, 고통하고 있다가 맞는 새 하늘 새 땅으로 쑥~ 들어가면서 사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베드로후서2장9(삯꾼 목자)120810a-이 근호 목사.hwp (54.5K), Down: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