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선지자의 사기 120826
거짓 선지자의 사기 120826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거짓 선지자의 사기(미 3:1-8)
이근호
12-08-26 15:56
거짓 선지자의 사기
2012년 8월 26일 본문 말씀: 미가 3:1-7
(미 3:1, 개역)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미 3:2, 개역)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미 3:3, 개역)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미 3:4, 개역)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미 3:5, 개역)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미 3:6,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미 3:7, 개역)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미 3:8, 개역)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평강을 외치는 자이고 거기에 비해서 참된 선지자는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내고 지적하는 선지자입니다”고 간단하게 결론 내리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 세상의 일부가 같이 서로 주고 받고 사는 사이에는 상대의 허물을 지적한다는 것은 일종의 홓로 자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정도로 세상은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 생각하는 생각의 틀이라는 것도 이 사회생활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틀입니다. 즉 남들에게 잘해주면 그만큼 나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있는 반면에, 남을 공격하는 식으로 살게 되면 필히 항상 타인의 공격을 달고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복수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아에 대한 자기 공격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손해 볼 짓은 될 수 있는 한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인식으로 하나님에게 접근합니다. 하나님을 존대하고 존중한 만큼 뭔가 돌려받는 것이 많아진다는 상식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는 참으로 상식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들이 납득이 되고 수긍이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참된 선지자는 괜한 트집으로 자신의 우수함을 타인에게 과시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선지자가 실상 자체를 겨냥해서 말씀한다는 겁니다. 즉 현실이란 실상과 실상이 움집한 것입니다.
따라서 실상과 실상을 비교하는 것은 서로 자기 잘났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눈에는 미가 선지자도 일개 성격이 까칠한 선지자로 보입니다. 나름대로 실상이지요. 그러나 미가 선지자에 보이에 그 많은 실상들에 의해서 버려지고 거부당한 것이 무엇인가에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북극에 쇄빙선이 지나가게 되면 두꺼운 얼음짱이 깨어지면서 숨어있는 거대한 고기들이 수면 위에 모습을 나타냅니다. 실상 밑에 숨겨진 실상이 표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에서는 자신들의 실상을 구축하기 위해 떠밀고 갖다버린 게 있습니다. 실상과 실상 사이에다 자신이 혐오스러운 하는 것을 밀어내는 겁니다.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는 프랑스 용어가 있습니다. 이는 배척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배제하기 위하여 밀어내지요. ‘크리스테바’라는 여성철학자가 이 용어를 가지고 인간의 주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갓난 아이가 자신을 덮고 있는 어머니의 주체성을 떠밀서 자아성을 구축한다는 겁니다.
어디 이것이 어린 시설에서 국한되는 현상이겠습니까 이후 계속 자라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끊임없이 밀어냅니다. 자신이 혐오스럽게 느끼는 것,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밀어내다보면 그전에 그 인간을 덮었던 타인의 담요는 지속적으로 찢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러한 현상은 구약의 ‘정화淨化’ 작용을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 작용이란 바깥에 세속적이고 더러운 것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언약이 도착하면 그 언약은 사건으로 작용하면서 기존의 모든 것을 더럽고 세속적인 것으로 취급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치 껍질이 깨어지는 것처럼 밖으로 밀리게 되겠지요.
이것이 이스라엘의 거룩성입니다. 문제는 인간들로 나름대로 자기 주체성을 갖추기 위해 이런 식으로 행동에 나선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의 마찰이 수시로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서 자신을 엄연한 실상으로 행세하기 위해 허상적인 것들을 갖다 버리게 되는데 그 허상 속에 참된 복음적 진수가 숨어있습니다.
즉 모두들 행복한 실상이 되기 위해서 활동하는 것으로 인해 비극과 눈물과 아품으로 살아야 될 자들이 등장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들 속에서 진리의 진수를 뽑아올립니다. 한 예를 들면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한나’라는 여인도 그러합니다. 엘가나라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첩으로 들어온 브닌나의 자랑질에 마음이 상합니다.
아들도 낳지 못한 아내가 무슨 축복된 부인이냐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축복된 실상은 아들을 낳으므로서 실상으로 구축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실상과 실상의 부딪침으로서 한나라는 여인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미가 선지자의 지적인 단순히 자기 나름대로의 실상체로 그 시대에 버티기 위함이 아니라 그 사람은 현실의 원천과 접선되어 있습니다.
북극의 얼음 밑에서 올라오는 고기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원천이 있습니다. 이 원천이 인간들이 스스로 장만한 실상과 실상을 어떤 식으로 더러운 것으로 부정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창세기 35:16-18에 보면,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노니’라는 말은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요,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라헬이라는 여인은 야곱을 만나고서부터 계속 불행했습니다. 끝까지 불행합니다. 야곱을 만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모든 성도의 가야될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야곱의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사랑하지도 않는 언니 레아와 결혼했어야 했습니다. 가문을 살리기 위한다 는 관습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는 사랑의 출발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요한일서 4: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그 지접이 곧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덮친 곳입니다. 레헬은 자신이 야곱의 아이를 임신함과 동시에 그것이 자기 죽음을 유발함을 알게 됩니다.
‘해산의 고통’이란 단순히 육신적 고통이라는 의미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인해 자식이 낳게 되면 그 자식은 어미 없는 자식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라헬에게는 남편에게도 그러한 것처럼 사항하는 자식에게는 아품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원리가 곧 성신의 원리, 성령님의 원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죽음이 동참된 슬픔이나 기쁨이나 아니라 아예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님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8-27 13:10
05강-미3장1-8(거짓 선지자의 사기)1208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3장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3페이지입니다.
미가 3:1-8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의 특징을 백성들의 죄를 그대로 보여주면 참된 선지자고, 그냥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가면 그것은 거짓 선지자고, 방금 이런 이야기가 그들에게 먹힐 리가 없죠. 사람들의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좋게 하는 하나님일 경우에만 하나님으로 대우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데, 자기 죄를 자꾸 추궁해내면 그건 아무도 좋아할 사람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마치 뭐하고 같은가 하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와 똑같아요. 이웃이 나한테 잘해주면 나도 그 사람을 잘해주게 돼 있고 이웃이 나의 약점과 허물을 자꾸 소문내면 그냥 술 한 잔 먹고 여의도에서 칼 들고 설치는 것처럼 그 사람을 갑자기 칼 들고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신 아람이라는 펜싱 선수가 준결승전 하는데 오스트리아 여자 심판이 1초 남았는데 1초가 왜 그렇게 긴지, 1초가 무척 길어요. 1초가 길어서 상대방이 공격해서 놓쳤을 때 그 소리를 들은 진 종오 금메달 딴 사람이 총 들고 나섰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건 확실치는 않지만 펜싱과 총의 싸움이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 소리 듣고 죽인다고 나설 수가 있어요. 욱하는 성질은 누구나 있는데 자신의 허물을 들추어내면 안 좋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되게 좋아하는데 막상 허물을 드러내야 덮고 자시고 할 게 있죠. 허물을 드러내야 덮고 자시고 용서를 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할 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말만 죄인, 죄인, ‘그 입을 닫으라.’ 하면 어떻게 하렵니까? 말만 죄인, 죄인이라 하지, 막상 자기 죄가 드러나면 하나님께 욕하고 도망치는 우리가 되겠죠.
그래서 거짓 선지자, 참된 선지자를 가릴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자꾸 구분 짓는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있는 것을 자꾸 쪼개면 싫어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꾸 쪼개는 겁니다. 쪼개면 덩어리와 덩어리가 나눠지겠죠.
진리가 어디 있느냐 하면 그 덩어리라는 실상 그 밑에, 또는 그 사이에 진리가 있습니다. 북극에 가면 얼음들이 떠 있잖아요. 그러면 쇄빙선이 지나가면서 얼음이 쫙쫙 갈라집니다. 고기는 어디 있는가, 얼음이 갈라진 그 틈에서 비로소 고기가 파딱 올라오죠. 참치가 되던 뭐가 되던.
그러니 뭐가 갈라져야, 쇄빙선이 우리 마음을 가르기를 우리가 원해야 돼요. 왜냐, 우리는 갈라놓으면 붙이고 갈라놓으면 붙이거든요. 우리는 이것저것 뜯어서 꽃다발 만들듯이 자꾸 붙이는 걸 좋아하지, 갈라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갈라놓으면 큰 덩어리 하나 쥐고 ‘내거다.’ 하고 또 거기서 자아를 형성하고, 이 세상에는 전부 우리가 만나는 것은 실상과 실상 뿐인데 정작 우리의 피할 길은 실상이란 것에 눈 돌리지 마요. 실상은 허상이고 아무것도 아니고 실상이라고 우기는 틈바구니로 빠져나가면 돼요. ‘나 뭐다’ 하거든 들은 체 하지 말고 ‘나도 뭐다’ 하지 말고 그 사이에 그 사람들이 갖다 버린 게 있어요.
이걸 아브젝시옹, abjection 프랑스 말인데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배제한다. 그래서 크리스테바라는 여성 철학자는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엄마를 밀쳐야 자기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걸 다른 표현으로 했습니다. 뭐냐 하면 웅크리고 펼 때 그냥 고요히 펴지는 법이 없어요. 웅크리고 펴면 그동안 눌렀던 것이 찢어집니다. 엄마가 자식을 누르고 있으면 자식이 자기 자리를 찾는 그 순간 엄마의 모든 은혜와 자비는 산산조각으로 다 흩어지고 다 깨져버립니다.
알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죠. 뭔가 껍질(계란)이 깨졌다고 보면 그 안에 병아리가 기어 나오고 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부모는 그 깨어짐이 자기가 그동안 자식 키우면서 걸쳐놓은 것들이 깨어짐에 대해서 못내 아쉬워합니다. ‘내가 니 어이 키웠는데, 이제 와서 니가 엄마한테 컸다고 딱딱 대느냐, 결혼해서 지 마누라 말만 좋아하고 내 말은 개뿔 듣지도 않고 내가 니 키울 때 어이 키웠냐?’ 이렇게 나오죠. 특히 홀어미로 키운 자식 같으면 보통 아니죠. 마마보이 격이죠. 왜냐, 자신의 전부를 거기다 했으니까. 살아온 모든 의미를 자식한테 다 퍼붰는데 그 자식이 사랑하는 여자 생겼다고 어떤 새파란 젊은 여자 데려오면 엄마는 환장하죠.
자신의 담요를 덮어놨는데 어느 날 자식이 담요를 발길질 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이렇게 사람이 어떤 자아를 뭔가 덮쳐 있는 것을 깰 때 그건 새로운 실상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설명하고 예수님을 소개할 때 이렇게 깨어지고 깨어진 빙하의 덩어리처럼 각자 깨어진 것들을 지적하면서 그 틈바구니 속에서 너희들이 싫다고 버린 것들 속에 진정한 너희 구원의 자비의 능력이 그 속에 있다는 겁니다. 자비의 능력을 너희가 버려버린 그 속에 오히려 자비를 제공하는 것들이 그 안에 담겨있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실상이다. 나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 나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라고 외치면 외칠수록 정작 우리를 구원하는 자비의 담요는 찢어지고 우리한테 버려지고 우리한테 외면당하는 그런 식으로 세상이라는 것이 진행되는 겁니다. 이거는 뭐 우리 일상뿐만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엄마 속에서 나올 때 엄마를 밀치고 나왔다는 그것이 뭐냐, 뭔가 오물과 더러운 것을 벗겨 버려야 자기가 튀어나오듯이 인간은 그런 인간이 아이뿐만 아니고 어른이 되면서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주체성을 찾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밀치고 떠밀고 이렇게 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이것이 오늘날 현대인의 사는 모습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나는 이렇다.’라고 크게 고함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인간들의 현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용합니다. 그걸 정화(淨化)라고 합니다. 대구에 정화여고 있죠? 정화, 깨끗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것을 벗겨내는 작업을 끝이라고 보는 거예요. 알기 쉽게 하면 아까 제가 철학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자기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 자기가 싫은 것을 밀치죠. 그런데 하나님은 진짜 깨끗한 것은 인간이 지가 깨끗하다고 우기는 가운데 억압받는 식으로 안에 숨어 있어요. 그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지적을 해줘야 됩니다. 어디 감히 죄인이 하나님의 구원과 자비의 은총을 누르고 죽치고 깔고 앉느냐 하는 이야깁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하고 혼인하고 난 뒤에 아기가 태어나죠. 그 아기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기를 죽입니다. 그 아기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아기의 죽음에 다윗이 관여돼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죽은 아들 대신 솔로몬을 태어나게 해서 솔로몬 태어난 데서 ‘니 손 떼라. 니가 밧세바하고 관계해서 솔로몬 낳아서 내 자식이다 싶지? 아니야, 그건 너라는 죄인을 통해서 내가 낳은 자식이야.’ 솔로몬을 내가 낳은 자식으로 보는 겁니다. 이것도 하나의 하나님이 우리를 밀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일종의 정화작업에 우리가 말려드는 식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끌리고 있습니다.
자, 그러한 예를 창세기 35장 17절~18절에 보면 거기 누가 나오느냐 하면 여인 하나가 등장합니다. 비련의 여인이죠. 슬픔을 간직한 여인입니다. 사랑하는 남편보고 사랑한다는 말을 못했던 여인, 이름은 라헬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자가 야곱인데 그 집안의 아버지에 의해서 자기와 결혼 못하고 언니하고 결혼을 할 때, 그 라헬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자기가 그 사랑하는 남편과 결혼 못한 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더 가슴 아픈 것은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억지 결혼했다는 그 현실이 자기는 가슴이 더 아픈 거예요. 아! 정말 사랑답죠?
가문과 가풍을 위해서 자기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 못하고 언니한테 빼앗길 때에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는가, 사랑은 빼앗기는 아픔을 통해서 비로소 사랑은 등장한다는 거예요. ‘나는 저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어.’라는 그 진짜 순수한 사랑마저도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길을 비켜야 되고 자리를 양보해야 되는 겁니다. 밀침을 당해야 돼요.
요한일서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것이 사랑의 첫 장면에, 제 1장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게 출발점 이예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느냐, 아니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밀칠 때 비로소 내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우리 부모 눈에 띄는 거예요. ‘아하! 내가 너무 욕심 부렸구나. 그저 내 자식, 내 자식,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 내 자식.’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지금 내가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을 바로 라헬이 경험했고 그 라헬의 남편인 야곱도 그 야곱의 이름이 바뀌어서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이 오늘날 교회, 성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성도라면 뿌리를 캐 나가야죠. 뿌리를 모르고 뿌리와 무관한 성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뿌리에서 올라 온 그 기, 그 능력으로 오늘날 성도가 됐기 때문에 우리를 성도되게 하는 계속해서 힘을 받으려면 그 힘의 출처를 놓치면 안 되죠.
그 힘의 출처가 뭐냐, 슬픔의 장소라는 거죠. 그 슬픔의 장소가 창세기 35장에 보면 라헬이 뒤늦게 애를 낳아요. 뒤늦게 요셉 하나 낳고, 요셉 낳아도 소용없어요. 이미 언니는 사랑하지도 않는 언니가 애를 10명이나 낳았습니다. 10명 낳고 요셉 하나 낳았으니까 10대 1이예요. 거기다 하나 낳아봐야 10대 2, 약분하면 5대 1, 옛날에는 자식 많은 걸, 주의 사랑, 축복으로 봤거든요. 하나님께서 언니 5덩어리 주고 자기는 1덩어리 받고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의 처 한나를 남편이 사랑하는데 사랑의 결실을 안 주네요. 그러니까 브닌나라는 원수가 들어와서 첩이죠. 첩이 들어와서 아들 낳았다고 그렇게 유세를 떠네요. 유세를 떨면서 ‘아이구, 형님, 형님은 만날 하나님 믿는다고 교회 가서 기도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지식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형님을 버렸다는 뜻 이예요. 형님, 정신 차리세요. 나한테 아들이 왜 있는지 알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형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반박하려면 반박하세요. 있어야 반박하지.’ 이렇게 나오니까 한나가 환장한 겁니다. 그래서 한나 엄마한테는 다 한나 이름을 그래서 오기가 나서 짓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뭐하십니까? 이런 뜻 이예요. 진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경로가 왜 이런 식입니까? 하는 거예요. 경로가 달라요. 우리가 사랑하는 것 주께서 주시고 예뻐하시는 것 주시고 이건 경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달라하는 것은 주께서 밀치시고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그동안 십자가를 억눌렀던 우리의 야심과 야망 세속적인 것을 밀어내는 껍데기를 뜯어내기 위해서 특별히 택한 백성에게만 그러한 하나님의 우리가 주님 사랑한 게 아니라는 그러한 흔적들을 상처를 남기면서 비련의 주인공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얼굴 보니 다 비련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둘째를 낳는 거예요. 둘째를 낳으니까 저쪽 언니는 10명이고 이쪽에는 2명이니까 10명이라고 다 10명이 아니고 종이 낳은 것까지 10명이라 치고, 이쪽은 몇 명 안 되니까 애 낳으면 싶은데 아! 라헬이 직감을 해요. 뭐냐, 애 낳으면서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압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걸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분만이라는 것, 잉태해서 분만하는 자체. 분만하는 육체에다 구원의 사건을 거기다 접목을 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원초적으로 인간은 슬퍼야 되고 죄인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의 뿌리부터 그걸 가르칩니다.
분만하는 그것이 기뻐해야 될 텐데 분만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슬픔의 분만, 비극을 잉태해서 비극을 생산하는 그런 도구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라헬이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것이 뭐냐, 자기 뱃속의 애가 나올 때 하는 이야기가 ‘나는 죽고 니는 태어나봐야 어미도 없는 비극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한 겁니다. 슬픔의 아들, 베노니. 이 말은 너는 평생 나를 인하여 슬퍼해라.
남편한테 사랑도 다 독차지 못하고, 사랑은 독차지하는데서 오거든요.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도 받지 못하면서 애 낳으면서 드디어 이 세상의 어떤 희망이 완전히 절단된 채 그냥 왔다가 울다가 죽고 마는 슬픔의 여인, 그게 비련의 여인 라헬입니다. 그 라헬을 마태복음 2장 18절에서는 베들레헴에서 자식 잃은 사람들이 집합을 라헬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자,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하는데? 하나님은 눈물 질질 짜도록 만드는 이런 하나님이냐? 라고 하겠죠. 그런데 창세기 35장에 라헬의 소리를 듣고 야곱이 이름을 바꿉니다. 뭐라고 바꾸느냐 하면 베노니(슬픔의 아들)에서 베냐민으로 바꿔요. 이건 오른손의 아들이라. 자, 여기서 퀴즈, 문제 하나 나갑니다. 이 땅에서 안 슬프고 행복의 아들로 사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하늘나라의 아들로 사는 게 좋습니까? 그야 물으나 마나죠.
이 땅에서 천사처럼 신분이 하늘에 가 있는 그런 신분자로 사는 게 좋지, 이 땅에서 좀 행복하고 행복하다 지옥 가는 거, 그게 뭐가 좋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뭐냐 이 땅의 모든 정과 이 땅의 사랑이니 미움이니 남편의 애정이니 그런 모든 것이 절단 난 그 현장에서만 나라 호처럼 솟아나는 게 그게 뭐냐, 하늘나라에 들어갈 신분 보장이 거기서 솟아나오네.
슬픔이 가득한데 그 슬픔이 단순히 기쁨으로 변하는 게 아니고 슬픔에서 천국으로 변하는 거예요. 슬프다. 기쁘다 좋다. 나쁘다. 행복이다. 불행이다. 그런 낮은 차원이 아니고 아예 껍질 자체. 나는 조금 좋았다. 조금 행복했다. 그런 차원자체의 가치를 찢어버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 백성으로 사는 그것이 거기서 로켓처럼 솟아오르는 베노니에서 베냐민, 슬픔의 아들이 천상의 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여기 미가가 이야기하는 그들에 대한 그 모든 지적은 일종의 트집입니다.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고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이렇게 하지만 막상 가죽 벗긴 양들이 자기 목자한테 가서 제가 만약에 건방지게 미가라면 ‘너희들 목사가 너희들 등 처먹고.’ 이렇게 하면 그 목사가 화낸 정도가 아니고 그 등 처 먹힌 양들이 저한테 달려듭니다. ‘목사님은 우리 가정을 얼마나 신방을 잘해주시고 애들 걱정을 하는지 압니까? 그런데 이 목사는 어디 우리 집 언제 찾아왔습니까?’ 바쁘다고 핑계대로 돌아다닌다고 만날 시간 없다 하고. 오히려 저한테 화를 낸다니까요. 그러니까 다 트집에 불과해요. 그냥 보통 교회가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오랜만에 바른 소리 했네.
여기 한번 봅시다. 교회가 뭔가 하면 여기 5절에 보면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입에 채워 주지 아니하면 ‘니 두고 봐라’ 전쟁을 외친다. 라고 미가는 트집 잡아서 심하게 이야기했지만 이걸 긍정적으로 좀 생각해 볼 수는 없겠습니까? 제가 지금 누구 편에 서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까? 그만큼 관심 있다. 이렇게 보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가정에 이렇게 특별한 관심을 베풀어 주니 거기다가 가시면서 차비하라고 감사 헌금 써서 이렇게 봉투 찔러주는 것, 그거 뭐 고마움의 표시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걸 옆에 서서 선지자가 보고 ‘옳다구나, 드디어 cctv 찍혔다. 이 나쁜 목사들이 입에 뭐 찔러주면 축복을 외치고 안 찔러주면 이 나쁜 놈, 목사 신방와도 차비도 안 찔러주고 이런 식으로 하더라.’ 이거 뭐 너무 오버하고 좀 과도하게 일방적으로 ‘저 인간은 거짓 선지자다.’라고 단정 짓고 그렇게 무리한 증거들을 수집하는 그런 얍삽한 차원이 아닐까요?
여러분, 목사는 교인들이 만듭니다. 버릇 더럽게 길들여 놓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만약에 어느 청년들이 있고 어른들 있는 교회에 목사 설교해도 월급 없어 굶어 죽어도 어느 교인 하나 쌀 하나 갖다 주는 게 없었다. 그래서 목사 가정이 아내는 못 살겠다 해서 이혼하고 새로 시집가고 목사는 굶어 죽었다 합시다. 죽고 난 뒤에 가보지고 않고 일주일이 지나고 난 뒤에 시체 발견되어 이럴 수 있느냐, 했다 합시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그 교회 지금 대학교 1~2학년, 고등학교 3학년이나 학생이 있다 합시다. 그 사람이 신학교 가겠습니까? 이게 문제예요. 미가는 이걸 지적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가치관은 그 사회가 담요로서 만들어서 담요로서 덮어주는 거예요. 지금 미가는 혼자서 담요를 찢는 겁니다. 그건 헛된 실상이라고 허상에 불과하다고.
그런데 만약에 어떤 교인들이 좋은 것은 목사 집안에 다 갖다 바치는 거예요. 십일조에다 십일조 모자란다고 ‘구약이나 십일조지, 더 해야지.’라는 소리를 듣고 ‘내가 십일조 해서 요새 복을 영 못 받았어. 십 이조를 하면 주께서 30배, 60배, 100배 채워주실 거야.’하고 그 소리 듣고 십의 이조 하고 좋은 것 전부를 목사한테 갖다 바칠 때 마침 그 교회 고 3이 있고 대학교 1~2학년이 있다고 합시다. 졸업해서 어디 가려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엄마가 권사하면 빡세게 기도 뭐하겠습니까? ‘주여 우리 아들 신학교 가게 해주소서.’ 그 권사님 딸이 있다면 ‘주여 목사한테 시집가게 해 주소서.’라고 한다 말이죠.
그러니까 미가는 어떤 특정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 선지자를 그 인간들이 그 분위기가 그런 걸 양산해 냈다 이 말입니다. 그럼 거짓 선지자 아닌 사람은 누구냐, 없어요. 없는데 오늘 본문 끝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아까 베노니, 베냐민 이야기했죠? 그게 우리의 원천이잖아요. 그러니까 미가는 본인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고 미가는 하나님이 성신에 의해서 원천으로 끌려가서 그때 원천에서 로켓처럼 솟아오르는 그 힘에 같이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밑에서 담요 찢으면서 솟구쳐 오르는 웅크리고 있다가 펴면서 솟구쳐 오르면서 이런 허상을 실상을 다 찢어버리는 거기에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 비로소 이런 안목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성신이 오늘날 신약에서 성령 받은 우리를 말합니다. 성령 받았다. 웅크리고 찢으면 세상은 찢길 것이고 그 찢겨진 그 틈바구니에 사람들이 싫어버린바 된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것을 아는 사람, 성도죠. 오늘날 움직이는 참된 선지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 편승해서 아니라 하지만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저 갔습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다 찢어버리고 내갖다 버리는 그 쓰레기 더미에서 도리어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행복한 것이 아니고 천국의 사람 만들었다는 이 능력을 우리가 무시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