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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무덤과 죽음 120826우리교회누가복음

무덤과 죽음 120826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무덤과 죽음(눅 23:50-56)

이근호

12-08-26 13:26

무덤과 죽음

2012년 8월 26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3:50-56

(눅 23:50, 개역)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눅 23:51, 개역)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눅 23:52, 개역)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눅 23:53, 개역)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눅 23:54, 개역)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눅 23:55, 개역)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눅 23:56, 개역)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시신이 뭔가 관련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공의회의 결정이 잘못된 결정이라고 여겼습니다. 이 말은 곧 평소에 예수님께서 언급하는 모든 것이 결코 인간의 의견에 타협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의롭다고 여긴 사고방식은 놀라운 겁니다.

이는 곧 아리마대 요셉,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따로 챙기지 않고 그동안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나라가 인간의 행함과 자신의 자존심이나 가치나 의미를 챙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늘 말씀하신 바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심어놓은 각가지 행함과 업적과 실적을 부정하지 않으려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가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이런 심성을 지속적으로 지적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미처 따라올 수 없는 범주 밖으로 작업 영역을 확장시켜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보통 ‘잊어버림’의 순간입니다. 치워버리기가 장례식이며 두 번 다시 생각 안해도 되기가 곧 일상으로 돌아서는 자세입니다.

결국 인간이 구성하고 인간들이 설계가 이 진짜 세상에서 죽은 자를 몰아내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산 자들의 세계에서 죽은 자들을 추방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시체를 가지고 그동안 살아온 모든 일과 사건과 경험들이 응축된 증거물로 보시는 겁니다.

“너는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하나 놓치지 않고 다 함유하고 흠뻑 젖어있는 것이 우리네 시체들입니다. 그 시신을 갖고 본격적으로 일하십니다. 천국으로 이송한 시신과 지옥으로 이송할 시신을 분류하십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느냐 하며는,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속에는 그동안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시고 남기시고 보여주신 모든 사건들이 다 응축되어 있는 바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확장된 작업 영역 속에서는 결코 ‘나의 것’이라는 것을 고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었으니까요.

이 때부터는 우리를 죽이시는 그 죽음의 손길에만 주도권이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15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예수님 개인적인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에게 벌어진 사건이 모든 인간에게 다 내려지고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와 구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지옥가야 하고 어떤 이는 천국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에게 벌어진 그 사건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인간에 대한 일괄 죽음이라면 평소에 우리가 축복이라는 여기는 것도 다기 규명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날 때, 이 일괄성을 철회하지 않고 도리어 작업 영역으로 삼으로서 덮쳐지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사람은 죽은 자로 간주하고 일을 벌리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뭔가 얻었다고 여기는 그것이 결코 축복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관련해서 구약에 두 가지 경우를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열왕기상 17장이요 다른 한 예는 열왕기하 4장의 예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가 나오고 사르밧 과부가 등장합니다. 열왕기하 4장에서 수넴 여인이 나오고 엘리사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밀가루통에 밀가루가 자꾸만 솟아나오는 기적으로 다가왔고, 엘리사의 경우에는 기름병에서 계속해서 기름 나오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사르밧과부는 남편은 없으나 자식은 있었고, 수넴 여인은 남편은 있으나 자식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들 두 경우는 모두 생활이 어려워서 생존 차원의 하나님의 축복을 반길 수 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가정 다 ‘자식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축복처럼 간주되는 것들을 가지고 찾아온 선지자로 인하여 발생된 일들입니다.

뭔가 축복입니다. 자신들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살아있어도 실은 죽어 있는 것임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두 집안 다 선지자를 대하면서, ‘살아있는 자신들을 더 살게 해준 것’을 축복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식들의 죽음을 통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이 주시려는 축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축복이란 살아있는 자도 죽은 자로 다루시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입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천국이란 우리들의 의미나 가치를 일체 인정해주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작 죽은 시신 덩어리로 살아야 했습니다. 즉 우리의 죽음을 죽여야 했던 겁니다.

이런 안목은 선악과 심은 놓은 취지를 생각해봅시다.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 말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따먹지 않고 뱀이나 원숭이나 아니면 사슴이나 곰이 그 선악과를 따먹어도 그 짐승은 죽었을까요? 참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5:45의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즉 아담마저 ‘마지막 아담’되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등장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죽음과 진정한 삶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사는 자가 지옥가는 자라는 점을 늘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8-27 08:13

3142강-눅23장 50-56(무덤과 죽음)1208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50절에서 5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8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3:50-56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두니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어떤 활동을 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 내가 그 시신을 장사하겠다, 그런 활동을 하는 그 가운데서도 54절에 보니까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활동을 하게 되면 활동하는 그것이 인간세상과 역사를 이룬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람의 활동이 손에 잡히지 않고 사람의 활동에 의해서 따로 전개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가,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라는 그 대목입니다. 안식일이라 하는 것이 사람들끼리 서로 의논해서 ‘우리 일주일이 한 번 쉬도록 합시다.’ 이렇게 한다면 그 안식일마저 사람손이 만들어 낸 것이고 사람 손이 창의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이 사람 손으로 다 만들어진 것이고 사람은 사람이 만든 그 세계 속에, 인간세계 속에 그냥 살다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사람 손으로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닌 것이 인간을 뒤따라온다는 것은 세상이라 하는 것이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 모든 공장, 밭, 다 사람손이 일구어서 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손대야 무슨 일이 일어나지 손 안대면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태풍이 그렇습니까? 태풍 만들고 싶어서 환장해서 태풍이 몰아치는 겁니까? 가뭄이 드는 것은 사람이 한 번 비 안 오면 어떻게 되는가 싶어서 일부러 비 안 오도록 그렇게 만든 겁니까?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사람 외에, 사람 말고, 사람이 노동하는 것 말고 오히려 다른 요소가 사람을 가지고 노는, 사람을 이끌고 있는 환경인 거예요. 그중에서도 특별히 다른 나라에는 없는 안식일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누가 제정을 했는가, ‘누가 만들었어! 안식일을 누가 만든 거야!’ 옛날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에 기독교를 없앤다고 일주일마다 노니 너무 게을러진다 해서 한때 10일 일하고 하루 놀도록 그렇게 정한 적이 있습니다.

레닌인지 스탈린인지 하여튼 그렇게 정했습니다. 반대가 너무 극심해서 다시 원위치 했어요. 사람이 안식일이라는 것도 사람이 정하면 정한대로 된다고 여겼는데 여기에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사람이 다룰 수 없고 뭔가 사람하고 따로 노는 것이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운명을 자기 스스로 정한다든지 단정 지을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평소에 사람이 일할 때는 ‘내가 이 일해서 장차 이렇게 되어야지.’ 나름대로 결심이 선 것이 있다고요.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 손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 나를 따라온다면, 나를 덮어씌우고 나를 지배하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런 계획도 결국은 무산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다 우리의 세우는 계획이라는 것이 허풍으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해요. 특히 오늘 본문 51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고 했어요. 기다린다는 말이 아주 재미있는 말이지요. 저 혼자 지금 재미있습니다만. 기다린다는 말은 ‘주님이여, 하늘나라 제가 안 만들었어요.’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사람이 되어서 자기가 만든 것을 즐겨야지 자기가 만들지 않은 것을 왜 그렇게 기다리는가, 자존심도 없는가, 네가 애쓴 것으로 네가 영광을 얻어야지 네가 만들지도 않고 손대지도 않은 것을 왜 기다려? 그러면 네가 너 스스로를 비하하잖아. 너를 그렇게 낮춘다면 네 가치와 의미는 없는 거잖아.’ 라고 비아냥거릴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이 ‘나는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믿어.’라고 하면 안 믿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자존심도 없나? 네가 일구어내고 네가 애쓰고 네 평생에 힘쓴 것들이 담겨 있을 때 네 자존심을 세워주고 나는 대단하다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지 공짜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네가 사람답지 못하잖아.’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아리마대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뭐냐, 자기의미 자기가치를 일단 포기했다는 뜻이에요.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중요한 것은 맞는데 나는 무엇을 믿느냐, 무엇을 기다리는가,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을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손으로 안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분, 뭘 기다립니까? 부모가 자식 키우면서 자녀에게 기대하는 것이 뭐예요? ‘얘야, 내가 너를 공부시킨다고 애썼다. 따라서 너는 아무리 못해서 의사나 판사가 되어야 돼.’라는 기대를 하잖아요. 그런데 그 자식이 의사나 판사를 하다가 때려치우고 농사지으러 가면서 ‘엄마, 이제부터 나는 파프리카 농사짓기로 했어요.’ 하면 엄마가 ‘잘했구나, 잘했어.’ 그러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나는 너를 기다렸어. 내 노력의 성과가 어떻게 영광스럽게 나타나는가를 기다렸는데 너는 나의 기대에 어긋난 자식이다. 이제부터 나를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훈련받아서 그렇습니까? 교육받아서 그런 거예요? 왜 이 사람은 이런 거예요? 자기가 손댈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왜 기다리는 겁니까? 그것은 나의 의미나 나의 가치보다 더 우선되는 의미와 가치가 있어서 그것을 위하여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 라는 존재의 의미를 자기에게서 만들어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덮쳐져야 비로소 내 존재의 의미를 안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이 아리마대요셉의 등장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사람 손으로 손댈 수 없는 “이 날은 예비일이고 안식일이 되었더라.”와 관련되어 있고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것, 예수님의 시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요셉이라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더, 예수님이 죽어서 시체가 되었다는 이 사실의 삼종세트, 이 삼종세트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왜 사는지, 우리는 숨 쉬고 있는지, 우리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지가 밝혀지는 거예요. 성경의 삼종세트를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우리한테 말합니다. ‘네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뭘 로? 우리가 묻는다면 ‘삼종세트’ 그 삼종세트에는 뭐가 포함되지 않느냐, 나의 행함과 나의 의지나 나의 노력 같은 것은 일체 포함되지 않고 내 자존심과 나의 의미나 나의 가치도 거기에는 섞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하는데 상당히 오해가 많아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무엇이 섞여 들어가느냐 하면, 자신의 이 땅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섞어놓고 그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여기는 경향이 많아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 나라가 돼요. 하늘나라 들어가서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이 땅에서부터 자기자존심과 자기의미와 자기가치를 빼세요. 빼는 겁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광주강의를 못 들으셨지요? 서버가 다운되는 바람에. 광주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세상 모든 종교를 포함해서 기독교라는 종교는 더하기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더하기만 하면 점점 더 하늘나라가 가깝습니다, 착한 것도 더하고 선한 것도 더하고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믿음에 행함도 더하고 헌금과 기도를 자꾸 더하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점점 더 가까이 갑니다, 이렇게 되는데 제가 보기에 하늘나라는 더하기가 아니고 빼기라고 했습니다. 어떤 빼기인가 하면 이미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루었는데 뭘 빼는가, 어떤 것들이 구원을 훼방하고 구원에 방해요소가 되는가를 살아가면서 내 속에 내 구원을 방해하는 요소가 내 안에서 살아가면서 나오는 거예요. 그것을 하나씩 쏙쏙 뽑아내서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불순물이고 이것이 잡것들이고 이것이 주님의 공로에 내 것을 섞어 넣으려는 것이고 이것이 추잡스런 것이고, 그것을 다시 끄집어서 보는 거예요. 내 죄를 다시 끄집어내서 보는 거예요. 그 죄라 하는 것은 윤리 도덕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저주신 다 이루었다, 에 대해서 흠집 내는 것들, 그것들을 끄집어내는데 그것들의 공통점은 뭐냐, 나의 의미, 나의 가치, 내 행함의 가치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은 나한테 보태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런 가치들, ‘내가 고생스럽게 주의 일을 했는데 주께서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라는 불만들.

다시 기억하세요. 하늘나라는 더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이미 백 프로 다 줘놓고 이제부터는 그냥 솔솔 빼먹기를 하는 거예요. 나중에 자 빼먹으면 남는 것은 시체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죽음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잊어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없애버리고 제거해버리고 삭제하고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이 죽음입니다. 죽었나, 잊자, 이것이 인간들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죽음, 시체라는 것은 그동안 살았던 사건들이 응어리진 것, 응축된 겁니다. 응축물, 우리가 평생 살아온 것이 시체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을 현실로 만들어놓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업을 위한 작업대에 놓인 재료가 되는 겁니다. 살아온 모든 세월, 1950년도, 60년도, 70년도, 살아온 모든 것이 모여 축적되고 압축이 되어서 나중에 돌아갈 때 그것이 시체가 되거든요. 시체를 주께서 버리지를 않습니다. 그 시체에 평생 살아온 모든 것이 함축해서 고스란히 담겨 있거든요. 그 담겨있는 것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주께서 작업에 나서게 되면 사람의 작업이라 하는 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로 끝나지만 주님의 작업의 영역은 확장되는 겁니다. 그 당시 유대인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아이고, 꼴 보기 싫은 것은 죽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요새 술 먹고 길가는 사람 죽이고, 또 술 먹고 이혼한 아내를 죽이고, 그런 짓 많이 하잖아요. 성경에도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와요. 술 먹고 싶거든 그 맥주잔에 성령 담아서 성령을 마시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에 취해야지 왜 술에 취하는가, 그렇게 하는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뭐냐? 없애버리고 싶은 거죠. 내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죽으면 더 이상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 속에 신구약성경이 다 담겨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오직 나의 죽음으로만 이 율법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완성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그 내용이 죽음을 통해서 말해주는 겁니다.

우리는 그 죽음 속에 그런 것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하는 것과 그 사람이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것과는 연관이 있어요. 아리마대 사람이 이해하기를 예수님은 죽을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근거에서 당신은 그렇게 주장하느냐, 그렇게 누가 묻는다면 ‘나는 하늘나라를 기다리는데 하늘나라와 지금 죽는 이 분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살아 있을 때 하늘나라 안 왔거든요. 하늘나라 안 온 상태에서 하늘나라 기다리고 있는 중에 있는데 사람의 죄로 따져서는 죽을 이유가 없는 그 분이 죽어서 시체가 되었다는 그 말은 내가 고대하고 있는 하늘나라와 이 분의 죽음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직 성령이 안 왔으니 뭔지 모르지요, 모르지만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그 시체에 의미를 두려고 하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다른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쓸데없는 죄수의 죽음, 있으나 마나한 죽음, 흔하디흔한 시체의 일부에 불과한 거예요. ‘죽었나? 잊어버리자.’ 잊어버리기 위해서 죽이는 겁니다. 다시는 예수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 다니는 우리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차례씩 예수를 죽이는 거예요. ‘잔소리 하지 마소. 바쁜데 무슨 잔소리를 이렇게 하나. 예수 당신 이야기 내 무슨 소리인지 아니 잔소리 하지 말라니까.’ 나에게는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당신 예수의 말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라는 것이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고 아리마대 요셉은 뭐냐,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살아 있는 그것보다 예수의 시체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아리마대 요셉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은 운이 없어서 우연한 죽음이 아니라 그동안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누적이 되어서 쌓여서 시체가 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시체에 의미를 두고 그 시체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만 그 전에 한 모든 말이 헛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헛말이 아니고 제대로 살았던 사람이 시체로 변했다면, 아리마대 요셉의 생각이, 어쩌면 우리도 예수님 따라 죽어야 비로소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천국에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 겁니다. 인간의 장례란 시신을 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아이고, 이모! 촌에서 농사짓는다고 그렇게 고생하더니만, 허리도 다 꼬부라져버리더니 이렇게 죽는군요. 이제 이모 좀 편히 쉬세요.’ 하지요.

그래서 인간의 장례라 하는 것은 이 땅에 살아서는 고생 많이 했는데 이젠 편히 쉬라는 사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 죽은 자에 대한 마지막 배려, 그런 입장에서 쉬는 공간을 살아 있는 사람이 베풀어주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죽은 사람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작업이 확장되어야 되는데 인간은 확장된 그 작업 구역을 모르고 칸막이를 쳐버리는 겁니다. 인생은 여기서 여기까지, 이렇게 끝나버리는 거예요. 아닙니다. 시체, 죽음은 하늘나라를 위한 재료가 돼요. 그것이 하늘나라를 위한 재료가 된다고요. 지옥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느냐, 그것이 지옥 가는가, 천국 가는가, 를 결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입장에서는 네 원대로 네 맘대로 살아서 빨리 빨리 죽음이라는, 포장하기 쉬운 상태로 빨리 빨리 열심히 일해서 빨리 죽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죽으면 택배로 이것은 지옥 보낼 것, 이것은 천국 보낼 것, 정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다고 오해들 하지 마세요.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음의 덩어리가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죽음의 덩어리가 되어야 주께서 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진정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그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신 되는 재료로서 사건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전부 다 구성요소가 돼요. 일주일에 한 번 돌아오는 진정한 안식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는 우리의 휴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생한 것이 고생입니까? 진정한 휴식은 하나님의 휴식이 진정한 휴식이고 하나님의 안식이 그 안식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나 천국은 주님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는 겁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4장에 나옵니다. ‘너희가 아직 하나님의 안식에는 참여 못했다. 그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간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일체 이 세상에서 네가 살아온 것 믿지 말라. 왜, 그것은 결국 죽게 만드는 요인들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죽음 다음에 손질하시는 주님의 손질을 살아 있으면서, 죽어가면서 미리 믿는 거예요. 죽어도 삽니다, 를 믿게 하는 거예요. 그 히브리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나온 편지입니다. 사도바울이 썼어요. 우리의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이지요. 보는 것이 보이더라도 ‘저것은 진정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야’라는 소리를 외치세요. 그것을 외쳐야 돼요. ‘모든 보이는 것, 나타난 것은 내가 믿을 만한 것이 아니야.’라는 외침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흔적들은 뭐냐, 그 시대에 일반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그들은 뭔가 만들고 있었던 겁니다. 노아 같은 경우에는 방주, 그리고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아이를 못 낳는 여자에게서 아이가 출생하는 것, 야곱 같은 경우에는 큰 놈을 둘째로 작은 놈을 첫째로 해서 어긋맞게 안수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바로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우리는 그거 아니거든. 왜,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속의 믿음이 나를 그렇게 보도록 용납하지 않거든.’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세 같은 경우에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겼으니 그는 하늘이 주는 상을 바라봄’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 모든 믿음의 응축은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메시아가 온다고 믿은 그 예루살렘, 예루살렘에서 죽으시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밖에 나가서 죽는다고 해서 우리도 예루살렘 밖에 나가서 거기서 오실 분을 기다리자(히 13:12-14),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뭔가 일반사람들의 입에서 그렇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것을 비켜나가요.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우리는 땅에 있어도 나그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땅에 있어도 나그네라는 거예요.

일반적인 개념으로 보면 땅이 있고 자기 집이 있으면 나그네가 아닙니다. 정착 생활, 정주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뭐냐, 우리는 땅이 있어도 이곳은 우리가 기대했던 그 땅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다른 하늘나라, 본향을 사모한다고 하지요. 뭔가 자꾸 삐딱하게 비켜나가는 버릇이 있어요. 교회라 하면 교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라 하면 그 예수는 아니라는 거예요. 뭔가 자꾸 비켜나가는 것은 누가 봐도 그 대상이라서 동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안 믿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는 자꾸만 자기의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미끄러지듯이 놓아버리기 때문에, 나라는 것, 자꾸 내가 나를 놓아버려요. 쥐려고 하다가 아니야, 나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야, 자기가 자기를 자꾸 놓아버린다니까요. 아리마대 요셉이 살아 있는 자기 몸뚱이보다도 하늘나라를 기다리기 때문에 살아 있는 내 몸뚱이가 하늘나라에 영광 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누가 끼어든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시체다, 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시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다면 그 전에 이미 예수님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죽은 뒤에 사흘 만에 부활 한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시체는 살아 있는 나보다도 더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본 거예요.

평소에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공들여 키우는 내 자식보다도 내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내 남편이나 자식이 무슨 하늘나라와 관련이 있습니까? 지옥과 관련되어 있어요, 지옥과. 예수 못 믿게 하고 하늘나라 쳐다보지 못하게 하고 믿음 생활 못하게 하는, 내가 나에게서 끄집어내야 될 훼방요소, 믿음의 방해요소들이 주변에 쫙 깔려 있지요. 여고동창회 같이 쫙 깔려 있어요. 히브리서 11장과 정 반대되는 모습으로 쭉 깔려 있어요. 사람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사건이 삼종세트를 만들었어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제가 설교 처음 한 것처럼 사람 손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손을 벗어난 어떤 다른 작용들이 덮칠 때 그 사람은 벌써 본인부터 자기인생은 내가 손질할, 내가 관리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 내가 관리해서 내 인생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이 예수님 오시기전에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예고 또 하나는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예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는 엘리야선지자가 나타나고 거기에 사르밧 과부가 등장해요. 그리고 열왕기하 4장에서는 엘리사 선지자가 등장하고 거기에는 수넴여인이 등장합니다. 수넴 여인은 과부가 아니에요. 늙었거나 마나 어쨌든 그래도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 전에 엘리사 이전에 엘리야 시대에 사르밧 과부가 있었어요. 남편은 없는데 자식은 있어요. 그런데 그 후에 엘리사시대 때 수넴 여인에게는 남편이 있었는데 자식은 없었습니다. 조가 교묘한 짜임이지요? 그 이야기를 왜 거론하느냐, 사르밧과부니까 남편은 없고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이 죽어요.

그 자식이 죽고 난 뒤에 다시 살아납니다. 열왕기하 엘리사시대는 자식이 없는 여인입니다. 남편이 있는데 너무 늙어서 자식이 없는데 없던 자식이 생겨요. 그런데 생긴 자식이 죽어요. 엘리사선지자 시대입니다. 뭔가 없는데 생겨서 생긴 뒤에 죽었다. 또는 애가 죽었다. 그런데 거기에 엘리야가 등장해서 살렸고 수넴여인에게는 엘리사가 등장해서 살아난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겁니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뭐냐, 일괄적으로 우리를 산 존재로 보지 않고 우리 모든 존재를 죽은 존재로 보시고 사건을 일으킵니다. ‘너 죽었거든. 그런데 내가 살려주면 살거든.’

여러분, 다른 축복 있거든 나와 보라고 해요. 가정이 잘되고 화목하고 부자 되는 것들은 다 걷어치우고 ‘부자가 되었든지 토지가 있든지 남편이 잘되고 자식이 잘되든지 관계없이 너는 죽었거든.’ ‘저는 안 죽었거든요.’ 그러면 사건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너는 죽었거든!’ 하면 ‘자식이 열 명이나 되는데 제가 왜 죽었습니까? 제가 지금 심장이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니까 그 심장의 무게가 네 근이라고 박근혜가 이야기했잖아요, 이렇게 두근두근 뛰고 있는데 이게 왜 죽었어요?’ ‘너는 죽어야 돼. 그래야 하나님의 사건에 접속이 된다고, 접속이.’

우리 십자가 마을 접속 안 되니까 답답했지요. 저도 답답해요. 자꾸 살았다고 여기고 살아 있는 내가 복 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참 답답한 거예요. ‘죽었다니까!’ ‘아니 살았어요.’ ‘죽었다니까!’ ‘나는 살아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합니다.’ ‘기쁘게 하고 자시고간에 네가 죽었음을 아는 그것이 기쁜 거야. 너는 죽었어.’ ‘그러면 나한테 있는 것은 뭡니까?’ ‘네가 죽으라고 배치되어 있는 장치, 기계장치들이다.’ 엘리야, 엘리사가 찾아간 것은 그들이 가난해서 찾아간 거예요. 처음에 그들은 살아 있는 나를 이 가뭄 때 더 살려내기 위해서 엘리야가 와서 병 준비해서 기름 채워서 밥 먹고 잘 살고 살아 있는 내가 더 잘 살았으니까 엘리야선지자를 보내준 하나님이 고맙고, 엘리야가 고맙고, 살아 있는 내가 보기에 내가 고맙고, 그런 엘리야한테 순종한 내가 고맙고, 그렇게 되었지요.

그런데 가고 난 뒤에 그 집 고장 났습니다. 꼭 우리 사이트 같아요. 돌아서면 생중계가 안 되니 뭐가 안 되니, 뭔가가 고장 났어요. 왜 고장 났는가,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려주기 위해서 왔으면 현재 살아 있는 나를 주께서 안 빼앗아가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참기름 통, 밀가루 통, 그럴 때는 참 좋았지요. 할렐루야, 춤추고 싶었는데 왜 멀쩡한 그 선지자가 다녀가고 난 뒤에 멀쩡한 애가 왜 죽느냐 그 말이지요. 그래서 원망했습니다. 엘리야 만나기만 해 봐라, 내가 죽이고 만다,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찾아드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어요. 없다 하는 것은 죽은 자가 만들어내는 하나님은 죽은 자가 만들어냈기 때문에 다 가짜라는 말입니다. 자기도 죽어가는 주제에 하나님 만들어 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준 그 사건의 노선에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뭐냐, ‘너 죽었거든!’ ‘그러면 참기름 통에 참기름 붓고 밀가루통의 밀가루는 뭡니까?’ ‘그것은 네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야.’ ‘왜 그런 식으로 합니까?’ ‘네가 참기름이나 밀가루 안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가 갑자기 축복주면, 그렇지 나는 의미 있지, 나는 더 살아야 돼, 라고 까불 테니까 그 까부는 그것이 바로 죽은 자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래, 나는 더 살아야 돼. 내가 죽으면 아깝지. 내가 죽으면 복음 누가 전하는데?’ 이게 바로 진작 죽어야 될 죽음의 요소 중에 하나라는 말이지요. ‘그러다가 너는 90되면 죽어.’ 90되어서 죽으면 다행인데 오늘 죽으면? ‘그러다가 네가 죽는 거야.’ 그 사르밧 과부는 전에 참기름이고 밀가루고 그런 기쁨 다 날라 갔어요. 그거 다 소용없어요. 제일 중요한 것이 죽었는데 그런 따위의 선물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 ‘이것만은 손대지 말라.’ 한 그것이 죽어버렸는데. 지금 여러분들이 손대지 말라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 아닙니까? 주께서 그걸 손대려고 하는 거예요.

미리 결론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모든 인간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보 뒤에 요약 보면 나와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살아 있는 내가 천국 가서 살기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노선이 달라져요. 살아 있는 내가 계속 나의 의와 가치를 주장해 버리면 이것은 방향이 지옥으로 가 버립니다. 천국가려면 우리는 죽어야 돼요, 아니 우리의 죽음을 죽여야 돼요.

말을 해 놓고도 참 어렵습니다. 나의 죽음도 의미 없는 죽음이라는 것을, 그것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내 죽는 것조차 의미 없다는 것, 진짜 의미는 주님께서 내 죽음을 다루어줘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시체를 사흘 만에 부활시킨 것은 ‘너는 죽어도 죽은 너하고 상대 안한다.’ 그런 뜻입니다. 내가 죽어도 주님께서는 내 죽음하고 상대 안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살아 있을 동안 미리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이 오게 되면 이제는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죽음을 담는 그릇으로 죽기 때문에 이 그릇은 갖다 버려버리고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관계해서 죽을 자를 살리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이유 때문에. 이게 복음입니다. 교회 가면 ‘예수 믿고 천당 가자.’ 이것은 복음이 아니지요.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예수 믿고 천당 가겠다는 사람, 내가 예수 믿는다는 그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 못 받습니다. 구원의 능력이란 내가 예수 믿는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원의 능력이에요. 예수님이 살아서 우리를 구원하지 내가 예수 믿는 믿음을 간직한다고 그것이 나를 구원해주는 능력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멘트를 달았지요. 이 소리를 해서 십자가마을에 우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다 들린다고. 살아 있는 내가 어떤 조작이나 관리를 나한테 해서 교회 안다니다가 교회 다니는 나를 만들어서 거기다가 복음까지 접수해서 집어넣어서 집어넣은 나를 살려보겠다는 모든 시도, 그것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보편적인 성향인데 그것이 나오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나오기 마련인데 그것이 나를 살리는 능력이 못 된다는 것을 믿어야 돼요.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주님이 나를 살리지 내가 나를 관리해서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피부 관리는 미스코리아 대회 나가는 사람이나 하라고 하세요. 우리 피부 관리나 손톱관리 해 봐야 그것은 소용없어요. 손톱 예쁜 것이 구원받는데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 나올 때 주의 능력으로 나오게 되면 우리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힘으로 나온다고 그렇게 우겨도 나중에 천국가보면 ‘아 그때 2012년 8월 26일 날 주의 힘으로 왔다.’ 주의 힘으로 오게 된 거예요. 수넴 여인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 없으니까 자식 줬습니다. 온 집안 잔치 분위기지요. 때 맞게 엘리사 선지자 보내줘서 자식 없는 우리 가정에 자식이 생겼으니 이런 축복이 어디 있느냐, 라고 그렇게 장담을 했지요.

역시 우리 가정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가정이야, 하나님께서 일부러 찾아와서 자식을 주다니, 라고 생각했는데 그 자식이 죽었어요. 그 자식 죽었습니다. 약 주고 병 준 거예요. 엘리사 또 방문 옵니다. 우리 교회에 방송기사 또 오듯이. 전화 자꾸 하려니 미안해 죽겠어요. 오늘 아침에도 전화 했어요. 또 방문해서 그 죽은 자식을 살려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왜 자꾸 간 떨리게 하는 겁니까? 그것은 출애굽 할 때 우리 집안의 맏이를 하나님의 맏이로 바꾸기 위해서 어린양 피를 문설주에 가져다 바르는 그것, 숨어 있는 하나님이 나타날 때 오직 그러한 사건으로만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내 자식이라고 고이 간직했던 내 자식이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자식 되듯이 그동안 우리 부모의 자식이라고 했던 우리가 성령 받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자녀만 천국 가는 겁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왜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가? 선악과나무가 있잖아요. 선악과나무의 과실을 한 번 우리가 상상해 봅시다. 그 과실을 아담과 하와가 따먹지 않고 곤충이 파먹었다든지 뱀이 파먹었을 때 과연 그것이 죽었을까, 그것을 생각해 보는 거예요. 심심해서. 원숭이가 그것을 먹었을 때 원숭이는 그것을 먹고 죽겠는가, 하는 거예요.

그것 먹고 죽으면 선악과는 그냥 독약에 불과하겠지요. 지나 개나 먹으면 다 죽는 거니까. 그런데 따먹지 말라는 이야기를 뱀보고 한 것도 아니고 개미보고 한 것이 아니고 사람보고 한 거예요. 이것이 무슨 뜻인가, 사람이 먹을 때만 사람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숨겨진 죽음의 의미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가,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보니 비로소 거기에 해답이 나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이미 첫 번째 인간은 아담이 만들어진 것도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에요. 만들어진 목적이 있어요. 뭔가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 말씀이 나오지요.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아, 이거다! 살려주는 분을 위하여 첫 번째 아담은 만들어졌고 선악과 따먹고 그 뒤에 따먹고 난 뒤에 죽어야 되는 겁니다. 아담이 따먹고 죽어야 되는 이유도 살려주는 분을 도드라지게, 온 우주를 통해서, 창조세계를 통해서 주를 주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아담이 하나의 연극배우로서 우리보다 먼저 등장한 겁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차례고. 살려주는 영, 이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내가 애쓰고 내가 만들고 노력한 것, 내가 수고한 것의 열매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뭡니까? 그냥 하늘나라를 기다려요. 이것은 뭐냐, 자기가 애쓰고 노력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다립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겁니다. 왜 그랬을까,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살려주는 영이 살려냄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살려내 줘야 삽니다, 보여줄 수 있는 죽어가는 존재로서 이 땅에 살아가야 되지요. 그것을 율법으로 하다가 실패하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죽어도 좋습니다. 죽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운명입니다. 죽어도 살리라.’ 이렇게 그 말씀을 내 쪽에서 내가 믿음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따로 실천에 옮기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렇게 될 줄로 믿고 그렇게 다 이루어진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그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신 우리가 손대지 않은 그 일, 그 일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 기쁨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영원토록 천국까지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생각만 했고 우리 사는 영역만 생각하고 내 노동의 현장만 생각했습니다. 그저 대가만 하나님이 복으로 주기를 원했습니다. 자기한테 파묻혀서 벗어나지 못한, 작업 범위가 나밖에 모르는, 그래서 예수도 필요 없다고 잔소리한다고 죽여 버리는, 매일 같이 예수님을 죽여 버리고 예수님을 싫어한바 되고 외면해 버리는 저희들, 주께서 늘 그런 인간도 다루어서 기어이 예수님을 찬양하게 하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습니다, 하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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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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